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3년 1672년 윤7월

싸라리리 2025. 12. 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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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7월 1일 갑술

사간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순창군(淳昌郡)에 주인없이 묵은 땅을 궁가(宮家)가 떼어받은 곳이 있었는데, 상께서 ‘내어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하교가 계셨다고 하니, 신은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곳은 궁가가 빼앗아 점유할 수 없다는 금령이 명백하게 있습니다. 이로써 이번 일을 헤아려 본다면 너무나 어긋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미련한 백성이 역을 도피한 폐단이 있다면 곧바로 감사에게 회부할 따름이지, 그 사이에 별도의 판부(判付)를 내려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옛날 당 대종(唐代宗)이 백거(白渠)의 전개(磚磑)를 헐어내고 백성의 전답에 물을 대게 하였습니다.042)   이에 승평 공주(昇平公主)가 하소연하자, 대종이 말하기를 ‘내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에 너는 마땅히 남보다 앞장서야 한다.’고 하니, 공주가 그날로 철거했다고 합니다. 이를 유념하셔야 합니다. 내주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7월 2일 을해

이동직(李東稷)을 승지로, 이단하(李端夏)를 병조 참지로, 이일정(李日井)을 정언으로, 윤치적(尹致績)을 봉교로 삼았다. 또 특명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이조 참의로 제수하였다.

 

윤7월 3일 병자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소를 올려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요전 상소에서 정승에 관한 일에 대해 날짜를 잘못 썼고, 또 그 내용에서 비록 본지는 잃지 않았으나 간혹 표현이 사실과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꽤 물의가 있습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간지 한 달 만에야 【8월 3일.】  상이 비로소 답하기를,
"아, 국가의 일은 몹시 위태롭고 백성의 일은 끝이 없는데 나의 질병이 순월(旬月)조차 쾌유한 시기가 없어, 정신과 기력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경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날로 더욱 간절하다. 비록 나의 성의는 천박(淺薄)하다고 할지라도 경이 선왕에게 남달리 예우를 받았음을 추념(追念)해야 되는 점에 있어서야 어쩌겠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고사를 하지 말고 한시바삐 올라와서 조야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이어 승지를 보내 전유하도록 명하였다.

 

윤7월 5일 무인

이훤을 북평사로 삼았다.

 

윤7월 6일 기묘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상원(祥原)에 사는 선비 주동백(周東伯)의 상소를 대신에게 내어 보였다. 그 상소에 맨 먼저 말하기를,
"명(明)나라의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임진년에 우리 나라를 구해준 은혜에 대해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서에 사당을 세우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회계하기 곤란할 것이기 때문에 직접 함께 의논하려고 하였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번방의 나라에서 신종의 사당을 세운다는 것은 사체로 보아 불가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세로는 더욱 시행키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조위봉(趙威鳳)의 상소를 보였는데, 그 상소에는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을 많이 보낸 폐단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것은 좌의정 송시열의 말이었는데 지금은 보내도 무방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판의금 정지화(鄭知和)에게 이르기를,
"윤경교(尹敬敎)를 안치시켰는데 그 도배장(到配狀)043)  이 왔는가? 또 해방(該房)에서는 그것을 사실과 대조한 일은 없었는가?"
하니, 정지화가 대답하기를,
"도배장은 이미 왔으나 별도로 대조하는 규례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죄인으로서 배소에 나갔으니만큼 마땅히 역참을 계산하여 갔어야 할 것이다. 어찌 대간(臺諫)이 그 명령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가 있었다고 하여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길 수가 있겠는가. 들으니 이민적(李敏迪)도 이달 18일에 도임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조심스런 마음이 있었다면 감히 이처럼 지체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민적이 미처 깊이 생각지 못하고 평소의 일정으로 갔기 때문에 저절로 이같이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민적이 수령의 일곱 가지 일을 강하지 않은 것은, 어찌 원망을 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우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일찍이 승지를 지낸 전임자이기 때문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민적의 도임장이 도착한 뒤에 죄를 더 주고 싶었지만 근일 이 일로 매우 시끄러웠는데 그렇게 하면 더 시끄럽게 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잠시 기다리고 있다."
하니, 장령 이수만이 아뢰기를,
"들으니 민적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지체됨을 면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고, 사간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또 신병이 있어서 지체되었는데, 이 때문에 죄를 더 준다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척의 가까운 곳에서 어떻게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이수만과 조원기가 엄한 말씀으로 크게 꾸지람을 하였으니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체로써 말한다면 민적을 마땅히 잡아다 문초해야 되겠으나, 우선 꺼리어 피한 법률을 쓰겠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꺼리어 피한 것이라고 하신다면 아마 그의 본심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민적은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고, 윤경교와 압송해 간 나졸은 모두 잡아다 문초한 다음 처리하라."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인조 때에 윤명은(尹鳴殷)이 죄를 받아 귀양지로 갔는데 정해진 기한보다 3일을 지체하였기 때문에 나졸을 잡아다 추문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모두 잡아오라는 것은 사리에 있어서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압송해 간 나졸을 먼저 잡아다 문초하라."
하였다.

 

윤7월 8일 신사

호남에는 7월 보름부터 그믐까지 잇따라 비가 내렸고 또 이달 6일부터 3일 동안 큰비가 퍼붓듯이 쏟아져 넓은 들이 마치 강이나 바다같이 출렁이었다. 전주(全州)의 성문 밖 서남 일대의 강가 3백여 집이 일시에 잠겨 떠내려 갔고 죽은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았다. 사람들이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고 말하였다. 영남에는 7월 27일부터 4일 동안 큰비가 계속 내렸다. 또 초 6일부터 3일 동안 크게 돌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서 산간 고을의 전답이 모두 급류에 손상되어 도랑과 밭두둑이 위치가 바뀌었고, 낙동강(洛東江) 일대는 수재가 더욱 혹심하여 벼와 곡식들이 많이 손상되었다. 관동에도 7월부터 큰 물이 져서 원주(原州)·평창(平昌)·영월(寧越)의 세 고을이 참혹하게 침수를 당해 냇물이 거꾸로 흐르고 물가가 떨어져 나갔는데 온 도가 마찬가지였다. 호서에도 7월 20일 이후로 큰비가 내려 수재가 매우 참혹하였다. 죽은 백성은 82명이고 떠내려 갔거나 잠긴 민가가 90여 채였으며, 붕괴된 무덤과 떠내려 간 재산과 빠져 죽은 소나 말들이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공주(公州) 궁원(弓院)이 가장 혹심하였고 경강(京江)에는 가을물이 크게 넘쳤는데, 사람들은 정해년 홍수 이후로 처음 보았다고 말하였다.

 

윤7월 9일 임오

영남의 하동현(河東縣) 백성 이암회(李巖回)의 아내가 한 배에 2남 1녀를 낳았다.

 

윤7월 10일 계미

민유중에게 비국 제조를 겸임시켰다.

 

헌납 임규(任奎)가 아뢰기를,
"이민적이 외직에 제수된 일로 양사가 쟁론한 지 오래되었으나 상께서는 전혀 들어주지 않으셨고 이번에 또 부임을 지체하였다는 것으로 죄목을 삼아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어찌 성명께서 잘못 조처하심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민적은 10년 동안 경연에서 모신 신하였는데 말 한마디가 상의 뜻을 거슬리자 노여움이 점점 더해 원망함이 있지는 않은가 의심했다가 또 일부러 지체하지는 않았는가 의심하여 죄를 더 주었습니다. 민적이 비록 볼품없으나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원기(趙遠期)가 상의 앞에서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의외의 엄한 분부를 혐의할 필요는 없으니,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민적이 죄가 없다 하여 감히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다니, 어찌 그리도 방자한가."
하고, 또 조원기를 특별히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지평 조사석(趙師錫)이 이민적을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고, 또 이수만을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간원에 내린 것과 똑같이 비답하고 수만의 직임도 특별히 체차하였다. 정원이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에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고 조원기와 이수만을 특별히 체차한 데 있어서는 더욱이 온당치 못하다." 하여 다시 생각하시기를 진달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임규와 조사석이 상의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부제학 김만기(金萬基)와 수찬 이당규(李堂揆) 등이 임규·조사석을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고, 이어 품은 생각을 진달하기를,
"원컨대 양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허물을 고쳤다는 것을 시원스럽게 보이소서."
하고, 또 조원기와 이수만을 특별히 체차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처치한 일만 윤허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조 참의 오시수가 소를 올려 신명(新命)을 사직하니, 상이 한시바삐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지평 조창기(趙昌期)가 소를 올려 여섯 가지 일을 진달하였다. 그것은 곧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권(權)과 강(綱)을 총괄할 것, 관리를 가릴 것, 상벌을 밝힐 것, 당파를 깨뜨릴 것, 민생을 걱정할 것 등으로, 무릇 만여 마디나 되었는데, 정치의 근본을 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는 지극히 은미하여 드러내기 어렵고, 천하의 일은 지극히 번거로워 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한 마음은 넉넉히 이를 관철하고 총괄할 수 있으므로, 옛날의 제왕들은 마음에 얻어진 것을 미루어 나아가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폐단을 없애고 이치를 밝히려면 실로 학문을 해야 됩니다. 경서를 읽을 때에는 성현이 논리를 세운 본뜻을 깊이 연구하여 자기에게 절실한 응용의 자료로 삼고, 사기를 읽을 때에는 치란과 흥폐의 큰 틀을 총체적으로 보아 이를 정치나 일을 하는 사이에 이용하면 읽은 바가 헛된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 학문을 강론하여 이치를 밝힌다는 말은 이미 듣기 싫은 묵은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정무는 지극히 많고 도리는 끝이 없으므로 만약 옛날을 배우는 기술이 없고 지혜와 생각이 밝지 못하면, 시비를 분변할 수 없고 득실을 징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어진 보필과 유능한 신하가 마음을 다하여 도운다 하더라도 동쪽에서 붙들어 세워도 서쪽에서 엎어져 넘어지며 이쪽에서 구원하면 저쪽에서 잃을 것이니, 참으로 실수할 때마다 규간할 수도 없을 것이며 일에 따라 의논을 드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원을 탐구하고 근본을 미루어 보는 데는 학문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권과 강을 총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권이라는 것은 사물을 저울질하는 도구이며 강이란 것은 그물을 펴는 도구입니다. 권이 옮겨지면 경중이 저절로 드러나고 강이 움직이면 온갖 그물의 줄이 모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백관의 위에 앉아 만민을 다스릴 때 조정하여 움직이게 하고 돌아가게 하며 합해지게 하고 펴지게 하는 것을 권과 강이라고 하는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대체를 세우고 사정(事情)을 살피신 다음, 이로써 일정한 견해를 세우고 권과 강을 운용하여 서무를 관리하는 도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국사가 위급하고 조정이 어수선하니, 전하께서는 먼저 예전의 방식을 한 번 변경시켜, 반드시 옛도를 본받고 주관을 세워서 사무를 결단하고 신하들을 독려하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옛도는 회복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도 듣지 말 것이며, 예전 방식은 변경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도 듣지 마소서. 이미 사리를 알았으면 고침이 없이 굳게 정하여 반드시 신하들이 모두 나의 영을 따르게 하고, 나의 영이 신하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에 국사를 생각지 않고 태만하여 방자하던 자들이 너나없이 두려워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자세를 가다듬어 쉴 사이 없이 상의 명령을 받들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들뜨고 망령스런 말이 현혹시킬 수 없을 것이며 허위의 일들이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령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며 조종(操縱)이 모두 상에게서 나오게 되어 대소가 마음을 같이 하고 위령이 사방에 통해져 이모저모로 운영하는 데 있어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당파를 깨뜨리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당파의 근심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이는 대체로 소인이 군자를 무함하는 것으로 한때 서로 배척만하고 말았지, 어찌 우리 나라와 같이 온 나라에 파급되어 여러 대 동안 그 해독을 받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동서의 당이 비롯된 이야기는 성명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의겸(沈義謙)이 옛날 잘못을 버리지 않은 것과 김효원(金孝元)이 한때 굴복을 당한 것이 국사에 있어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두 사람에게 틈이 생겨 사이가 좋지 않자 나이 젊은 명사들은 모두 김효원을 따르고 노성한 인사들은 심의겸과 친하였으므로 형색이 나누어지고 시기와 불화가 날로 조성되어 왕실과 백성에게 해독을 끼쳤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반복해서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면서 사대부들이 대대로 가법으로 전해 국법 같이 지키고 더없는 가르침으로 여겨, 색목(色目) 밖으로 빠져 나오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아, 괴이한 일입니다.
대개 정축년 이후는 동쪽이 성하고 서쪽이 쇠하였으며, 계해년 이후부터는 서쪽이 득세하고 동쪽이 위축되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형세가 점차로 성해져서 득세한 쪽은 점점 날카로운 칼자루를 쥐게 되고 위축된 쪽은 더욱 분노를 품게 되었습니다. 재기(才器)가 서로 같아 별로 고하를 분별할 것도 없는데, 서쪽 사람이면 끌어들이지 못하지나 않을까 서두르고, 동쪽 사람이면 가로막으면서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남의 말이 혐의로워서 약간 등용시키지마는 한 계급은 반드시 아끼면서도 작은 벌은 꼭 시행합니다. 그래서 같은 반열에서 함께 일을 하더라도 원수지간이 서로 등지는 것처럼 미워하고 있으니, 함께 공경한다는 아름다움은 물론 가망이 없습니다만, 떼 지어 일어나 서로 공격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서쪽이 강하고 동쪽이 약한 것은 참으로 지금의 오래된 폐단입니다. 근래 성상의 의향을 징험해 보건대, 매양 한쪽을 곡진히 옹호하려고 하시는데, 이는 물론 성인의 공평정대한 체통이며 강한 것을 억누르고 약한 것을 부축하려는 뜻입니다만, 신의 트이지 못한 생각에는 옳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만약 한쪽만 유난히 도와 세력과 체제가 균등하게 된다면 피차간에 알력이 생길 근심이 도리어 금일보다 더 심할 것이니, 이는 무기를 마련해주어 서로 공격하도록 도우는 격입니다. 성상의 생각은 이런 점을 혹 빠뜨린 것이 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잠시 당파를 도외시하고 나의 정치와 형벌을 맑게 하고 나의 기강을 정돈해서, 먼저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을 분별하시는 것으로 업무를 삼으시고 상벌을 밝게 베푸는 것으로 급무를 삼으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훌륭하면 동서에 구애하거나 비천에 혐의하지 말고 조금도 의심없이 발탁하여 쓰고, 참으로 어리석으면 귀현(貴顯)을 묻거나 형세에 끌리지 말고 가차없이 물리치소서. 가령 훌륭한 인재가 이쪽에 있다면 한쪽만 수용하게 되더라도 치우친 게 아니라 훌륭한 인재가 한쪽에 몰려 있기 때문이며, 용렬한 자가 저쪽에 있다면 한쪽만 으레 배척을 당하게 되더라도 치우친 게 아니라 한쪽에 용렬한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등용하거나 물리치는 것이 색목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훌륭한 인재이면 모두 등용되고 불초한 자는 으레 폐출을 당할 경우, 대권이 윗사람에게로 돌아가고 만민이 모두 그들의 분수에 편안히 여길 것이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어디서 생기겠으며 당파의 근심이 어디서 일어나겠습니까. 훌륭한 인재가 등용되면 직위에 있는 자가 모두 군자일 것이며, 상벌이 마땅하게 주어지면 백관이 모두 분발하려고 할 것입니다. 군자가 직위에 있고 백관이 분발하려고 한다면 조정이 청명해지고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질 것이니, 비록 당파를 지으라고 시키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점을 조종하여 보람을 넓게 하는 것은 전하께서 힘써 행하시는 데 달렸습니다."
하였다. 상소의 끝에 또 말하기를,
"조정의 처사는 화평이 귀중합니다. 조정이 화평하지 못하면 사방이 어디를 우러러 보겠습니까. 지난번 영의정의 일로 인하여 조정에 하나의 소요가 일어났는데 그 조처가 마땅함을 잃어 분위기가 아름답지 못하였으므로 신은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허적(許積)은 상의 특별한 대우를 받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위로는 성상을 보필하여 조그만 도움도 주지 못하였으며, 아래로는 곤궁한 백성을 걱정하여 하나의 폐단도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당(私黨)을 굳이 진취시키려 하여 공평한 도량이 적었으며 대부분 당시 의논의 눈치를 보아가며 우물쭈물하는 병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허물을 삼아 대의로 꾸짖는다면 비록 허적더러 말해 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해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적 김자점(金自點)에다 견준 것은 어긋나게 비유하였고, 권간(權奸)이라고 배척하였지만 그 자취는 볼 수 없습니다. 걸맞지 않게 비유를 했으니 어떻게 그의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상(李翔)을 논하는 자가 혹은 마음에 음험한 꾀를 품어 사람을 망측한 지경에다 밀어넣으려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충의로운 분노에 격동되었으나 사람을 논함은 착오가 없었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이 두 가지 견해는 모두 잘못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의 그릇된 점만 밝게 배척하여 망령스럽게 한 말을 꾸짖으면 족합니다. 저 사람은 초야에 있던 사람으로 언지(言地)에 있게 되었고 또한 별도의 유시를 받은 날을 맞아 그런 논계를 올린 것이고 보면, 그의 죄를 깊이 다스린다는 것은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우대하는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상소를 비국에 내렸으나, 삼공(三公)이 모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일에 천천히 회계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윤7월 12일 을유

남용익(南龍翼)을 홍문 제학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도승지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대사성으로, 박세견(朴世堅)을 병조 참의로, 이지익(李之翼)을 예조 참의로, 조위봉(趙威鳳)을 사간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이조 정랑으로, 윤심(尹深)을 겸 사서로, 권유(權愈)를 사서로, 신석번(申碩蕃)을 장령으로 삼고, 이상진(李尙眞)을 발탁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다. 상진이 이때 대사헌으로 휴가를 받아 밖에 있었는데, 상이 종2품을 가망하도록 명하여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윤7월 15일 무자

헌납 임규(任奎)와 지평 조사석(趙師錫)이 패초(牌招)하여도 나오지 않은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윤7월 17일 경인

호남 감사에게 명하여 경서를 인쇄해서 제주(濟州)에 보내게 하였다. 이에 앞서 어사 이하(李夏)가 돌아와 말하기를
"외딴 곳이라서 서적이 많지 않으니 경서를 인쇄해 보내야 한다."
고 하였으므로 이때 와서 해도 도신에게 명하여 인쇄해서 들여보냈다.

 

윤7월 18일 신묘

이단하(李端夏)·최일(崔逸)을 승지로, 이후산(李後山)을 병조 참지로, 이익(李翊)을 형조 참판으로, 맹주서(孟胄瑞)를 공조 참의로, 이선(李選)을 겸보덕으로, 조원기(趙遠期)를 필선으로, 이흥발을 집의로, 김만중(金萬重)을 겸문학으로, 송규렴을 헌납으로, 강석창(姜碩昌)을 사서로 삼았다. 또 이연년(李延年)을 발탁하여 좌윤으로 삼았다. 연년이 오랫동안 승지로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작년에 각종 감한 것을 금년 가을 곡식이 익을 때까지로 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가을 곡식이 잘 익으리라는 것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갑자기 옛날처럼 회복하는 일이 천재를 경외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까지는 당분간 옛날처럼 회복하지 말라."
하였다. 태화 등이 또 호서의 수재가 참혹한 지역에 어사(御史)를 보내 살피어 급재(給災)를 해야 된다고 말하고, 이조 판서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물에 빠져 죽거나 깔려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두 휼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관북(關北)의 갑산(甲山)·삼수(三水) 등 고을에 3일을 연이어 서리가 내렸다.

 

윤7월 19일 임진

대제학의 권점(圈點)이 있었는데 김만기(金萬基)는 9점, 이단하(李端夏)·이은상(李殷相)·강백년(姜栢年)은 8점, 남용익(南龍翼)은 7점, 정두경(鄭斗卿)은 6점이었다. 정두경은 문장이 고상하기로 당대에 으뜸이었는데, 다만 관각(館閣)에 이용하는 글이 아니었고, 성품도 가볍고 얽매이지 않아 세사에 밝지 못하였으므로 끝까지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고 문형의 권점도 다른 사람보다 가장 적었다.

 

김만기(金萬基)를 좌윤 겸 양관 대제학 동지경연사로, 민유중(閔維重)을 우부빈객으로, 임규를 사간으로 삼았다.

 

윤7월 21일 갑오

바람과 물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유전(流轉)하였는데 서쪽으로부터 동쪽을 향해 들렸다. 【하늘이 울리는 소리[天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21면
【분류】과학-천기(天氣)

 

윤7월 23일 병신

이관징(李觀徵)을 승지로, 김익경(金益炅)을 병조 참의로, 이단하(李端夏)를 대사성으로, 이선(李選)을 응교로, 조위봉(趙威鳳)을 부수찬으로, 임유후(任有後)를 경주 부사로 각각 삼았다.
임유후는 곧 판서 국노(國老)의 손자이자 교리 수정(守正)의 아들이다. 국노는 산해(山海)044)  에 편당(偏黨)한 까닭에 사론(士論)에 천시를 당했고, 유후의 숙부인 임취정(任就正)은 혼조(昏朝) 때 등에 업은 권세가 이이첨(李爾瞻)과 더불어 서로 막상막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모두 차술(借述)하여 과거에 올랐는데 유후 혼자만 그의 족형(族兄)인 고(故) 지평 숙영(叔英)을 좇아 수학하여 고문(古文)을 공부하였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여 동문생(同門生)인 이해창(李海昌)·강여재(姜與載) 등이 모두 추허(推許)하였다.
인조 초기에 과거에 올라 승문원에 뽑혀 배속되었고, 무진년에 아우 지후(之後)가 역도(逆徒)를 좇아 동모(同謀)하다가 유후 및 그의 형 덕후(德後)에게 혼나고서 반역 사실을 고발하였는데, 유후 또한 적신(賊臣) 박동기(朴東起)가 끌어들이는 바람에 체포되었으나 끝내는 석방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영동(嶺東)을 넘어 울진(蔚珍)의 산속에 살면서 고을 사람들을 가르쳤다. 시일이 한참 지난 후, 조정 의논이 조금씩 그를 수용하여 간간히 찰방(察訪)·도사(都事) 등에 제수하였고, 고상(故相) 이경여(李敬輿)는 그가 가행(家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힘껏 추천하였으며, 재신(宰臣) 김익희(金益熙) 또한 몹시 입김을 넣었다. 그 결과 대성(臺省)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고, 뒤에는 변방 수령으로서 자급이 승진되어 누차 주부(州府)를 맡았으며, 그리하여 재신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경여의 아들 이민적(李敏迪) 등이 요직에 있으면서 한결 더 현용(顯用)을 하였으나 물정(物情)은 끝내 그를 흡족하게 여기지 않아 대관 중에 더러 탄핵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급기야 도승지에 제배되자 동렬(同列) 중에는 인입(引入)하고 출사(出仕)하지 않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유후는 처지가 낭패스러워 감히 조정에 있지 못하다가 이때 와서 외직(外職)을 힘써 구하여 떠났는데, 그로부터 1년을 살다가 임지에서 졸하였다.

 

윤7월 26일 기해

충청도 수재 순시 어사(忠淸道水災巡視御史) 이선(李選)·조원기(趙遠期)가 길을 떠났다.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복명을 하였는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거행하고 좌·우도의 수재를 당한 고을이 모두 27읍(邑)으로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을 합하여 8천 6백 50여 결을 【 우도 13고을에 1천 1백 14결이고 좌도 14고을에 5천 5백 40여 결이다.】  성책(成冊)하여 아뢰었다. 호조가 복계하여 유난히 심한 고을은 특별히 전재(全災)를 급여하고 그 나머지는 칠분재(七分災)를 급여하였으며, 목화전(木花田) 가운데 수확이 전혀 없는 곳에 대해서도 전재를 급여하였다.

 

윤7월 27일 경자

김만기(金萬基)를 호조 참판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사간으로 삼았다.

 

윤7월 28일 신축

이여발(李汝發)을 좌윤으로, 이하진(李夏鎭)·김수오(金粹五)를 장령으로 삼았다. 수오는 강시경(姜時儆)과 더불어 모두 호남 사람이고 그 성품이 용렬함도 똑같았다. 그런데도 서로 잇따라 대각에 들어가니, 물론이 비웃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외방의 죄수들을 소결하였는데,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이 입시하였다. 형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나아가 각 죄수들의 문안을 낭독하면 상이 여러 신료들에게 두루 물어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죄수 69명 중 석방된 자가 27명이었다. 판부사 정치화가 아뢰기를,
"요즈음 성상께서 벌을 쓰시는 것이 너무나 중하여 조정 신하들이 다들 위구심을 느끼고 있으니 전혀 화평스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일의 시비에 대해서는 당분간 논외로 치더라도 대신(臺臣)이 하루 사이에 재차 계청하는 것이 어찌 큰 죄가 되겠습니까. 이 사람들을 내쳐 버리고 나서 앞사람만 못한 자로 그 자리를 잇게 함으로써 명기(名器)045)  가 날로 혼탁해지고 국세(國勢)가 날로 가벼워지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어진익 등을 아무래도 거두어 서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치화 및 우상 김수항도 아뢰기를,
"지금처럼 승지(承旨)에 사람이 부족한 때를 맞아, 민시중에게 벌을 이미 시행하였으니만큼 마땅히 성념(聖念)을 다시 한번 베푸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승지 여성제, 교리 최후상 또한 계속해서 그 일을 말하였으나,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서흥(瑞興) 땅에 장리(長吏)를 장살(杖殺)한 변고가 발생한 이유로 군(郡) 전체에 정거(停擧)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들리는 바로는 옮기어 왔다갔다 하는 자들이 몹시 많다고 하니, 대체로 과거에 응시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일체 정거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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