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갑진
황해도 안악군에 풍재(風災)가 몹시 참혹하였고 연백(延白) 등 고을에는 또 충재(虫災)까지 있었다.
8월 3일 을사
대사헌 민정중이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대제학 김만기가 세 번째 소를 올려 극력 사직을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한시바삐 직무를 살피라고 유시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각도의 농사 형편에 대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니, 모두
"관서가 가장 낫고, 양남이 그 다음이며 북로가 더욱 흉작이 심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어영청의 별마대(別馬隊) 소속인 배준학(裵俊學)이 시재 때에 편전(片箭) 세 발을 쏘아 세 번 다 맞혔는데, 영상 정태화가 은전을 감히 곧장 청하지 못한 이유를 품하니, 상이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라고 명하였다. 형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정주(定州)는 곧 청천강 이북인데도 그곳만큼은 가족을 데리고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기타 정주와 마찬가지인 고을에 대해서도 아울러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천(泰川)·영변(寧邊)·가산(嘉山)·박천(博川)의 네 고을도 모두 가족을 대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장령 김수오(金粹五)가 소패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일찍이 대직(臺職)에 있으면서 그의 이름이 백간(白簡)046) 에 올랐기 때문에 감히 나오지 못한 것이다. 장령 이하진(李夏鎭)이 일찍이 김징(金澄)에게 탄핵을 당해 물의를 받고 있는 중이어서 감히 동료를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정원이 전례상으로는 그전 일을 가지고 인피하지 말도록 되어 있다는 내용으로 말을 엮어서 받아들이니, 상이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이하진이 이에 출사하여 직무를 보면서 이상·윤경교·이민적 등에 대한 명을 환수하라는 논계 같은 것을 모두 연계하였다.
남편을 죽인 죄인 애숙(愛淑)이 처형되었다.
8월 4일 병오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김휘(金徽)를 도승지로, 홍처량(洪處亮)을 우부빈객으로, 조위봉(趙威鳳)을 사간으로, 신후재(申厚載)를 필선으로, 윤형성(尹衡聖)을 문학으로, 이유(李濡)를 지평으로, 윤천뢰(尹天賚)를 북병사로 삼았다.
병조 판서 이상진이 고향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진이 길을 가는 도중에도 사직소를 올리고, 상경해서도 세 번에 걸쳐 사직을 한 뒤에야 나와서 사은(謝恩)을 하였다.
8월 5일 정미
지평 조창기(趙昌期)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성품이 어리석어 기휘해야 할 바를 몰라서 한 번 서툰 말을 꺼내자 비방이 시끄럽게 일어나 사실에 벗어난 비평을 갖가지로 받고 있습니다. 신은 안으로 평소의 마음을 돌아보면 남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음이 스스로 슬퍼지고, 밖으로 여론을 생각해 보면 결코 대간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집의 임규(任奎)와 지평 이하진(李夏鎭)이 처치하기를,
"비방의 유무는 알 수 없으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창기는 패초에 나아오지 않았다.
8월 6일 무신
지평 조창기가 사헌부에 나아와 또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망령스럽게 소를 진달하여 비방을 몹시 받았으면서도 그저께 나와서 사은을 한 것은 대체로 인혐하여 체차받으려고 했던 것인데, 출사하게 하자고 처치하였으니, 참으로 뜻밖의 일로서 신은 의심스러워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서툴고 망령된 말로 거듭 때의 기휘를 범하여 벼슬아치나 선비들의 의논이 들끓고 있으므로 처치한 대관이 필시 자세히 들었을 터인데도 계사의 내용에 끝내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고, 비방의 유무를 모른다는 말로 핑계대었으니,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신의 상소의 뜻은 참으로 위로는 성명을 규계하여 비상한 대업을 일으키고 아래로는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아 오래 전할 수 있는 큰 공렬을 넓히려고 한 것입니다. 이른바 공도(公道)를 넓히고 당파를 부리뽑아야 한다는 것은 동쪽을 부축하고 서쪽을 억제하여 알력의 근심이 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서쪽으로써 동쪽을 억제하게 해서 불공평한 폐단만 늘려서도 안 된다는 것이며, 또한 사람 쓰는 것을 색목(色目) 내에서 허덕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태여 그것을 조정해서 세력을 균등하게 하려고 한다면, 이는 밖으로는 균평한 것 같으나 사실은 도움이 없으니, 오직 피차를 묻지 말고 색목을 탈피하여 훌륭한 인재만 등용시키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털끝만큼이라도 한쪽만 편드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각의 논의가 지나쳐서 화평의 도리에 어긋나면 그 양쪽 끝을 들어 시비를 참작해서 그 중간을 밝게 택하여 성상의 마음을 확실하게 열어 보임으로써, 위로는 의심으로 막힌 병통을 풀어주고 아래로는 다른 의논을 화합하게 하라는 것이었으니, 털끝만큼도 성상의 뜻에 순종하려는 생각은 더욱이 없었습니다.
신의 상소 내용이 이와 같은데 불과하니 심술에 있어 공평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시속의 보통 생각들은 그 본심은 추구해 보지도 않은 채 지적하여 흠잡을 거리를 뚜렷하게 세워 놓고 사실에 벗어난 비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세도(世道)의 박절함은 참으로 한심스러우나 신의 마음을 돌아볼 때 신명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처치한 관원이 만약 자기의 견해와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거나 어리석고 망령스럽다고 하여 꾸짖는다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출사시키자고 청하면서 말 속에는 조롱이 섞이고, 결말이 명확치 못하여 시비의 귀추가 없었으니, 그 뜻을 반복하여 생각해봐도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이미 여론의 엄한 배척을 당하였고 명패가 문앞에 이르렀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으니, 거만한 죄가 큽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8월 7일 기유
송규렴을 부교리로, 우창적(禹昌績)을 장령으로, 정재희(鄭載禧)를 헌납으로 삼았다.
집의 임규(任奎)가 아뢰기를,
"신이 동료들과 함께 상회례(相會禮)를 행하고 조창기(趙昌期)의 피혐한 내용을 보니, 없는 말을 꾸며 내어 억지 피혐을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의 행사를 추적해 보면 의심이 들기는 하나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알 수 없으니 한갓 그 자취만 가지고 곧바로 그르다고 한다면 이 또한 적당한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상소를 익히 강론해 보고 나서 출사시키도록 처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출사하게 하자고 청한 뒤에도 소명(召命)에 나아오지 않음은 더욱 이유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창기의 마음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상소를 가져다가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 결코 단정한 사람이나 올바른 선비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령 조창기로서는 지극히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날 이전이나 오늘날 이후 그런 일이 있었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단연코 불가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 마음이 꼭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온 것도 아닌데다가, 오늘날 상께서 고민하시고 대중이 의구심을 느끼는 이때에 불쑥 소를 올려, 전하의 마음의 깊이를 엿보려 하였고 전하의 조처를 살펴보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아깝습니다. 조창기는 젊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무슨 바쁘고 급박한 일이 있기에 기회를 틈타 마음을 써서 이같이 단정치 못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신은 훗날 전하의 조정을 어지럽힐 자가 꼭 이 사람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으며, 괴이한 생각으로 틈을 엿보는 무리들이 이를 따라 계속해서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신은 참으로 지붕을 바라보고 깊게 탄식하면서 그저께 출사하기를 청했던 실수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또 어저께 조창기가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고 피혐한 내용을 보니, 종이에 가득히 늘어놓은 말들에 그의 속마음이 더욱 노출되었습니다. 당파의 말을 빌려 성상의 총명을 현란시킴으로써 교묘하게 짜맞추려고 한 꾀가 불을 보듯 환할 뿐만이 아니었으므로 신은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이 사람의 마음씀이 이같은 줄을 알았더라면 그저께의 처치에서 어찌 감히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겠습니까. 사람을 헤아림이 밝지 못하여 마땅히 배척할 자를 배척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이 어둡기 때문이며 또한 신의 잘못입니다. 처치가 잘못되었음은 조창기가 말하지 않더라도 참으로 신 자신이 알고 있으니,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일렀다.
"조창기의 마음이 얼마나 단정치 못한지는 모르겠다만, 너의 피혐한 내용을 보니 의도가 매우 음험함을 면치 못하였다. 사직하지 말라."
8월 8일 경술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정언 이일정(李日井)이 처치하였는데, 조창기에 대해 말하기를,
"이미 생각한 바를 진달하였으면 조용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피혐한 것이 부족하여 다시 자신을 과시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니 자못 가소롭습니다. 또한 소명(召命)을 어겼으니 규례에 있어 응당 체차해야 됩니다."
하였고, 임규에 대해 말하기를,
"당초에 출사하게 하자고 청한 것은 그 의도가 너그럽게 용서하자는 데 있었으니 도리어 배척을 당한 것이 억울한 일이기는 하나, 말을 허비하면서 인피한 것은 역시 평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언관(言官)을 경솔히 교체할 수는 없습니다. 조창기는 체차하고 임규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미 평온을 잃은 줄을 알았다면, 억지로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임규도 체차시키라."
하였다.
단천(端川)에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려 지붕의 기와가 다 날아가고 곡식 열매가 죄다 떨어졌다.
8월 9일 신해
대사간 이홍연이 아뢰기를,
"조창기(趙昌期)의 상소가 한차례 나오자 사람들이 다들 의아스레 여기고는 있어도 공언(公言)하여 비난하는 자는 아직 없었으니, 피혐해서는 안 되는데 굳이 인피를 한 것도 이미 말할 나위조차 없는 일인데 급기야 그가 재차 피혐을 함에 이르러 본정(本情)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두 수백 수천 마디나 되는 많은 말이 죄다 제몸의 행장(行狀)이었으니 세간(世間)의 수치(羞恥)와 겸손(謙遜)을 결코 이 사람에게 책임지울 수 없으며, 누가 보더라도 자연 밉살스런 작태가 있습니다. 그러니 임규(任奎)가 온 힘을 기울여 진언(盡言)하고 공척(攻斥)한 것은 분명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범이불교(犯而不較)047) 하는 도리’로 헤아려 보면, 그의 말은 너무나 어떤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 공평·온당하지 못했음을 아쉽게 여기기는 했으나 끝내 이 점을 허물로 삼을 수는 없었으므로 동료 관원과 서로 의논하여 출사토록 하기를 청했는데,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들고 보니 신의 처치가 타당성을 잃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정언 이일정 또한 ‘함께 의논하여 처치했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였는데, 정언 홍만종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익상(李翊相)을 대사간으로, 이홍연(李弘淵)을 호조 참의로, 김익경(金益炅)을 승지로, 조원기(趙遠期)를 집의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안후(安垕)를 정언으로 각각 삼았다.
8월 10일 임자
상이 뜸을 떴다.
8월 11일 계축
상이 뜸을 떴다.
제주 목사 윤계(尹堦)를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제주에 극악한 도적들이 있었는데 윤계가 부임을 한 뒤 여덟 사람을 기찰(譏察)·체포하여 자복을 받아내고 곧장 목을 베고는, 도적을 체포한 사람을 논상(論賞)하도록 계청을 하였다. 이에 형조가 아뢰지 아니하고 멋대로 죽인 이유를 들어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상이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나중에 윤계는 의금부에 내려져 고신을 박탈하였다.
8월 12일 갑인
상이 뜸을 떴다.
8월 14일 병진
상이 뜸을 떴다.
8월 15일 정사
상이 뜸을 떴다.
좌의정 송시열이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였다. 그 뒤 무진일에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교서를 대신 기초(起草)하게 하여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이어 승지를 보내 돈독하게 타일렀다.
8월 16일 무오
경산 현감(慶山縣監) 이원귀(李元龜)를 통정 대부에 승진시키고, 개령 현감(開寧縣監) 이시현(李時顯)을 준직(準職)에 제수할 것을 명하였는데, 진휼의 정사를 잘했고, 또 별도로 마련한 곡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수령들에 대해서도, 별도로 곡물을 마련한 일로 감사가 칭찬하여 아뢴 까닭에 상을 내린 자가 있었다.
사신은 논한다. 곡물은 땅에서 나는 것으로 한정이 있는 것인데 지금 이른바 별도로 마련하였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당(唐)의 말기에 이른바 ‘선여(羨餘)048) ’라는 것과 다를 게 있겠는가. 신해년의 큰 흉년을 겪은 끝에 비록 속된 관리가 가혹하게 세를 거두는 정치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상 받기를 바랐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이를 금할 줄을 모르고 도리어 포상을 하였으니, 어떻게 법대로 다스리는 관리를 권장할 수 있겠으며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킬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22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사학(史學)
[註 048] 선여(羨餘) : 포상을 노리어 바치는 곡물.
사신은 논한다. 곡물은 땅에서 나는 것으로 한정이 있는 것인데 지금 이른바 별도로 마련하였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당(唐)의 말기에 이른바 ‘선여(羨餘)048) ’라는 것과 다를 게 있겠는가. 신해년의 큰 흉년을 겪은 끝에 비록 속된 관리가 가혹하게 세를 거두는 정치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상 받기를 바랐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이를 금할 줄을 모르고 도리어 포상을 하였으니, 어떻게 법대로 다스리는 관리를 권장할 수 있겠으며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킬 수 있겠는가.
8월 17일 기미
이연년(李延年)을 예조 참판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승지로, 맹주서(孟胄瑞)를 병조 참의로, 이지무(李枝茂)를 형조 참의로, 유헌(兪櫶)을 보덕으로 삼았다.
8월 19일 신유
영의정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신병을 이유로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를 보내 간병토록 하였다.
8월 21일 계해
평안 감사 이만영(李晩榮)이 졸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몹시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이다. 두 도의 감사로 하여금 호상(護喪)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만영은 고(故) 부윤 충작(忠綽)의 손자이다.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성(臺省)을 두루 거치고 여러 번 주부(州府)를 맡아 다스렸으며, 만년에 재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때 와서 외임에 나가 관서(關西)를 안찰(按察)하였는데 미구(未久)에 졸하였다.
8월 24일 병인
이민서(李敏敍)를 예조 참의로, 목내선(睦來善)을 공조 참의로, 신후재(申厚載)를 교리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수찬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지평으로, 원상(元相)을 전라 좌수사로 각각 삼았고, 오시수(吳始壽)를 발탁하여 평안 감사로 삼았다. 시수는 전에 호남 감사로 있을 때 김징(金澄)의 사계(査啓)에 ‘없는 죄를 꾸며 얽어 법망에 밀어 넣는다.’는 비난이 다분히 있어, 당초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을 때 대각 주변에서 탄핵을 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래서 누차 소를 올리고 끝내 감히 출사하지 못했는데, 이때 와서 다시 서도(西道) 감사에 발탁·제수한 것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재차 상차하여 면직을 간청하였으나, 상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장령 이하진(李夏鎭)이 추고(推考)하여 조감(照勘)을 할 때 피혐을 해야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흐릿하게 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8월 27일 기사
금부 나졸(羅卒)의 공사(供辭)를 이유로 죄인 윤경교(尹敬敎)를 똑같이 나문하도록 명하여, 정원이 복역(覆逆)을 하면서 성명(成命)의 환수를 청했으나, 상이 엄한 비답을 내리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이 차자를 올려 종친부의 폐막을 아뢰면서 노비를 얻기 원하는 한편 종실의 반당(伴倘) 【사환(使喚).】 을 청하였는데, 상이 명하여 경노(京奴) 15구(口)를 떼어주고 반당도 유사로 하여금 참작하여 변통하도록 하였다.
대사헌 강백년이 종부시 제조로서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사나흘 전에 삼가 들으니, 복창군(福昌君) 이정이 차자로 제종(諸宗)의 태만한 습성을 말씀드리면서 아울러 종부시(宗簿寺)가 제대로 법을 유지하지 못하는 잘못까지 언급하였는데 갖은 말로 침척(侵斥)하기에 바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종부시 제조의 말석에 끼여 있고 보니, 그 얘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을 더듬어 보건대, 금년 여름에 해부(該府)가 제종(諸宗) 가운데 기거(起居)049) 하는 반열에 참석하지 않은 자 약간 명을 초출(抄出)하였습니다. 등급을 나누어 이문(移文)해서 그들의 명록(名錄)을 살폈더니, 그 가운데 잔폐(殘弊)한 감(監)·영(令)이 절반을 차지하였고, 이른바 ‘내종(內宗) 서너 사람’이라는 자들 또한 나이가 어려 사리를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야 진실로 사리로써 깊이 요구할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기거하는 반열에 한두 번 책임이나 메우려고 진찰을 하는 자하고는 약간 차이가 있는 듯하였으나, 구별(區別)을 하여 죄를 부과하는 것이 번거롭고 자잘할까 염려되었으므로 동임(同任) 제조와 더불어 오가면서 상의를 한 나머지, 함께 추고하기를 청했습니다.
본시(本寺)는 규찰(糾察)·검속(檢束)하는 것이 소임이니만큼, 죄를 부과함의 경중(輕重)에 있어서는 오직 본시가 참작하여 처리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해부(該府)가 미리 알바 아닌데도 월권(越權)을 하여 공척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다니, 신은 그것이 사체에 어떤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직무에 최선을 다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고 한갓 월권하여 꾸짖은 일에 대해서만 화를 내면서, 말씨에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부족하니, 나는 그것이 온당한 줄 모르겠다."
하였다.
이때 이정(李楨) 등이 임금의 은사(恩私)를 믿고 갈수록 방종하게 굴었다. 그러므로 백년이 그들의 침모·능욕을 이렇게 당했는데도 상까지 또 덩달아 준엄하게 배척을 하였으므로 백년은 이에 다시 인피하였는데, 결국은 패초에 나아가지 아니한 이유로서 체직이 되었다.
8월 28일 경오
조수익(趙壽益)을 좌윤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참의로, 정시성(鄭始成)을 장령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이수만(李壽曼)을 필선으로 삼았다.
지평 이유(李濡)가 윤경교를 잡아다 문초하는 것은 성덕(聖德)에 흠이 된다고 환수를 청하고, 이튿날에 대사간 이익상과 정언 홍만종 등이 또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서를 올렸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비답하기를 명하였다.
8월 29일 신미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옛날 당 태종(唐太宗) 말년에 귀양가는 자들이 길에서 지체한다고 하여, 하루에 10역(驛) 【10역은 백 리(里)임.】 을 가도록 칙령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좌천된 관리가 대부분 온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자(朱子)가 이를 사기에 특별히 써서 그 잘못을 드러냈으니, 법령이 너무 각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뒷날의 법식을 정한 것에 불과하였을 뿐이지, 그 사람에게 죄를 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의령(宜寧)에서 갑산(甲山)까지는 수천 리의 길이므로 윤경교가 7, 8일을 지체한 것은 사세상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써 죄를 준다면 법률 적용의 잘못이 당나라 때보다 더한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요전 경연에서 한 이야기를 경도 자세히 들었을 것인데 지금 이같이 말한단 말인가. 정원의 경솔한 말은 말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마는, 죄인을 압송해 가면서 하루 가는 길이 3, 40리에 불과한 것도 많은데 하루에 10역을 가도록 한 것과 동일시한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나는 이해가 안간다."
하였다. 부수찬 최후상(崔後尙)도 차자를 올려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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