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3년 1672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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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계유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조위봉(趙威鳳)을 수찬으로, 이항(李沆)을 주서로 삼았다.

 

9월 2일 갑술

상이 뜸을 떴다. 약방 도제조 김수항(金壽恒)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차자에 대해 비답하신 것을 보니, 망령스레 경솔히 행동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나, 지척에 계신 곳에서 부득불 다시 아뢰는 바입니다. 그날 성상의 분부를 신 혼자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영상도 이처럼 듣고서 상께서 용서하시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날 영상 및 호조 참판 김만기(金萬基) 모두가 ‘나장(羅將)이 죄인(罪人)이 길을 지체한 것으로 말을 하니 추후에 추문(推問)하는 일이 불가할 게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우선 나장을 추문하도록 한 것인데, 정원은 마치 앞에서는 허락을 하였다가 나중에 고친 것마냥 하였으니 이는 잘못이었고, 경의 차자 내용도 이러하였다. 그래서 비답에 그 곡절을 말한 것이다. 죄인이 어찌 감히 제마음대로 길을 가거나 머물러 쉰단 말인가. 그런데 나장이 공술(供述)한 것을 보면, 하루 행정(行程)이 수십 리에 불과한 적이 매우 많아, 지체된 날을 합계해보면 10여 일이나 된다. 만약 단지 사나흘 지체가 되었는데도 국가에서 그를 죄준다면, 심각(深刻)하다고 해도 되겠지만, 경교를 추문하라는 일이 불가한 게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정원·대간이 이처럼 굳이 따지고 들기를 마치 무슨 좋은 꼬투리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어인 일인가?"
하였다.

 

9월 3일 을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항이 의주(義州)의 월경(越境)했다가 사로잡혀 온 사람을 처치할 일로 앙품(仰稟)을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정말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고 하던가?"
하자, 수항이 아뢰기를,
"의주 부윤이 엄히 형신하여 캐묻기도 하고 술을 대접하여 그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꾀어보기도 하였으나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인 듯한데 바깥 의논들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이건 실성을 한 사람이건 난자도(蘭子島) 근처에서 붙잡혔으니만큼 그가 월경을 한 정상이 뚜렷하니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입시한 신하들에게 다시 한 번 묻도록 명하였는데, 다들 신문을 할 필요없이 곧장 효시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말을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호조 참판 김만기가 문형(文衡)에 제수되고부터 누차 상소하여 고사(苦辭)를 하다가 나중에는 나아가 사은(謝恩)을 하였는데, 이때 와서 또다시 정리상 편안하기가 어려운 형세임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정리를 내가 모르지 않으나, 경이 출사를 아니했기 때문에 미처 의논하여 정하지 못하였다."
하고는, 수항에게 물었다. 수항이 아뢰기를,
"선조(先祖) 때에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문형에 재임하던 당시, 저들에 관한 모든 문서들에 대해서는 별지제교(別知製敎)를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제학(提學)으로 하여금 주관토록 하는 게 좋겠다."
하였다.
대체로, 만기는 김익희의 조카인데, 정축년의 난리에 익희의 어미 서씨(徐氏)가 강화도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만기의 아비 김익겸(金益兼)도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죽었기 때문이었다.

 

9월 5일 정축

상이 뜸을 떴다.

 

강백년(姜栢年)을 대사성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동지성균관사로, 신여철(申汝哲)을 평안 병사로 각각 삼았다.

 

9월 6일 무인

상이 뜸을 떴다.

 

9월 7일 기묘

상이 뜸을 떴다. 이 뒤 갑신일까지 연이어 뜸을 떴다.

 

9월 8일 경진

상이 뜸을 뜨는 중에 도승지 김휘더러 이르기를,
"희정당(熙政堂) 및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에 기울어 무너진 데가 있고, 인정전(仁政殿)에도 기와를 바꿀 데가 있으니 삼조(三曹)에 말하여 수개(修改)토록 하라."
하였다.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심유(沈濡)를 사서로 각각 삼았다.

 

9월 11일 계미

영의정 정태화가 일곱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 도타이 타이르게 하였다.

 

9월 12일 갑신

영의정 정태화가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상이 사은 부사(謝恩副使) 민점(閔點)의 사직소를 이유로 서도 곤수(閫帥)를 잉임하도록 명하고 이정영(李正英)을 도로 차송(差送)하였다.

 

9월 14일 병술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 졸하였다. 상이 예장(禮葬)을 명하고 또 관재(棺材)를 제급하였다.
주원은 참판 홍영(洪霙)의 아들이자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의 외손(外孫)이다. 귀척(貴戚) 중에 있는 자로서 능히 제 어버이를 잘 섬겼고, 글재주도 있었으며, 빈객을 좋아하여 일시의 명류(名流)들을 두루 사귀었다. 그의 아들 홍만용(洪萬容)·홍만형(洪萬衡) 모두가 재차 과제(科第)에 올라 좋은 벼슬을 두루 지냈고, 또 공주(公主)와 더불어 부귀를 한껏 누렸으며 향년도 칠십 가까이 되었다. 그 복록(福祿)의 성함은 국조(國朝)의 부마(駙馬) 중에 없던 일이었다. 나중에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다.

 

9월 15일 정해

영의정 정태화가 아홉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아, 경은 오늘날의 나랏일을 한번 살펴보라. 어떤 때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기근과 돌림병 끝에 민생의 고달픔이 갈수록 심해가는데도 조정에서는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대소 신료들 간에는 서로 협심을 한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다. 이런 때를 맞아 경이 나라와 고락을 함께 한 원로(元老)로서 갑자기 남의 일을 보듯이 외면하면서 물러나 한가히 지내고자 하니,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인가. 대궐에 누워서일망정 치도를 논하라는 뜻을 이미 전에 모두 말했는데도 겸손해하는 말로 거절하기를 갈수록 더욱더 굳게 고집하니, 어쩌면 이다지도 성의(誠意)가 미덥지 않단 말인가. 마음이 저으기 부끄러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마땅히 이 뜻을 몸받아 한시바삐 사직한다는 글을 그만두고 대궐에 누워 치도를 논하여 애타는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하라고 명하였다.

 

9월 17일 기축

영의정 정태화가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9월 18일 경인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등이 아뢰기를,
"요전에 내린 대사면령으로 인해 병오년 이전에 방출된 곡물을 탕감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는 참으로 궁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성스러운 혜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통영과 병영에서 방출한 곡물은 원회부(元會付)의 곡물과는 다르므로 각 고을이 엄한 명령에 겁을 먹고서 간혹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이미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갚을 길이 없어진 곡물을 탕감시키는 이런 때에 이것만이 유독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징수하는 폐단이 옛날과 같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해도의 감사로 하여금 통영과 병영에서 곡물을 나누어 주었던 문서를 거두어들여 자세히 조사한 다음 보고케 하여 일체로 탕감시킬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평안 병사 민점(閔點)이 사은 부사에 제수된 뒤에 감히 거만스럽게 소를 올려 병을 끌어대어 면직되기를 바랐으니, 이는 참으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고 듣기에 놀라운 일이니,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9일 신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김만기·이단하 및 호조 판서 김수흥, 이조 판서 이경억 등을 인견하였다. 이단하가 나아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일찍이 늠료를 주는 군병이 없었는데, 임진 왜란 후 선조(宣祖) 때에 상신 유성룡(柳成龍)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로 인해 그중 장정들을 뽑아 척계광(戚繼光) 병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숫자가 처음에는 수백 명도 채 못되었으나, 그 뒤 점차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년 이전에는 호위군(扈衛軍)이 2천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포수(砲手)가 5천 5백여 명이나 있고, 이밖에도 별대(別隊)가 1천 명, 어영병(御營兵)이 1천 명, 정초병(精抄兵)이 5백 명, 금군(禁軍)이 7백 명이며, 각청의 군관들도 1만 명에 가까우니, 병자년 이전에 비하면 그 숫자가 여러 배나 됩니다. 지금 일정한 세입(稅入)이 12만 석인데, 군병을 양성하는 데에 8만 석이 소비되므로 나머지 4만 석만 가지고 국가 경비에 쓰고 있으니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덜어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려고 하니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인심을 얻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인심을 얻는다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속오군의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급할 때 믿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별도로 군병을 둘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나라 살림을 넉넉하게 만드는 방법으로는 군병을 감축시키는 것보다 먼저 할일이 없는데, 그것을 변통하는 것으로는 궐액이 있어도 보충하지 말도록 하는 길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단하는 시무를 담론하기 좋아하였고, 그가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이 특히 훈국의 병제를 변통하는 데에 있었다. 대개 그는 군병 양성이 폐해가 있는 줄만 알았을 뿐, 군병을 줄이기가 어려운 줄은 몰랐다. 그러므로 그의 말이 결국은 시행되지 않았다.

 

9월 20일 임진

영의정 정태화가 열두 번째 정사(呈辭)를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 돈독히 타이르도록 명하였다.

 

지평 이유가 주서(注書) 이항(李沆)을 단망(單望) 계하(啓下)한 것은 사체를 손상시키고 뒤폐단에도 관계되는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해당 승지를 추고하기를 청하고, 또 이항을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조원기가 추감(推勘)을 조율(照律)할 때 상피(相避) 관계를 살피지 못하고 흐릿하게 서입(署入)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9월 21일 계사

남용익(南龍翼)을 공조 판서로, 경최(慶㝡)를 승지로, 이동직(李東稷)을 예조 참의로, 윤증(尹拯)을 집의로, 서문상(徐文尙)을 문학으로, 신선온(申善溫)을 설서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전라 좌수사 원상(元相)을 인견하고서 보냈다. 원상이 조금 전에 막 영변(寧邊)으로부터 조정에 왔으므로 상이 철옹(鐵甕)·약산(藥山)의 성지(城池) 형세를 상세히 물었다.

 

9월 22일 갑오

사은사 복평군(福平君) 이인, 부사 홍처대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의관으로 하여금 입진(入診)토록 하였다. 승지 이지익이 아뢰기를,
"정원(政院)의 낭청에 오랫동안 실관(實官)이 없는 형편인데 이항이 또 계사로 인해 체직을 당했으니, 앞으로는 천망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후일의 정사에 이항을 다시 단망으로 하비(下批)하여 그로 하여금 의논하여 천거토록 하겠다."
하였다.

 

9월 25일 정유

영의정 정태화가 열다섯 번째 정사(呈辭)를 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상이 뜸을 떴다. 이튿날에도 뜸을 떴다.

 

9월 26일 무술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이항(李沆)을 주서로, 신여철(申汝哲)을 남병사로, 김해일(金海日)·김두익(金斗翼)·민암(閔黯)을 겸 춘추로 삼았다.
고사(故事)에, 육조·간원·종부시·승문원의 당하관 1원(員)과 춘방(春坊) 2원(員)은 분겸(分兼)을 하고, 옥당(玉堂)의 장관 이하, 양사(兩司)의 아장(亞長) 이하 및 승지는 예겸(例兼)을 하며, 외방의 경우는 팔도의 도사(都事)가 예겸(例兼)을 하되 수령 가운데에서도 가려서 겸임토록 하여, 듣고 본 것들을 갖추 기록해 사관(史官)에게 보내도록 하였고, 그것으로써 전최(殿最)를 감정하였다. 그 의도가 당초 우연한 것이 아닌데도 근래에 직무 폐기가 유행처럼 되어 그저 날짜·날씨만을 기록하였고 장고(掌考)를 고적(考績)하는 일에 청감(聽勘)을 하는 자도 이를 꾸짖어 나무라지 않으니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9월 28일 경자

영의정 정태화가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9월 29일 신축

수어사 이완이 청대(請對)하여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의 곡물로 경기 고을에 방출된 수량이 1만 5천 2백 석입니다. 그중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 4분의 1인데, 아직도 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양주(楊州)는 4분의 1내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80석이며, 포천(抱川)은 30석, 영평(永平)은 10석입니다. 세 고을의 수령에 대해 마땅히 죄주자고 청해야 하겠습니다만, 교체시키면 폐단이 있으니 우선 먼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이 또 아뢰기를,
"산성의 여덟 절에 거주하는 중의 수를 합하면 4백 명인데, 중들에게도 먹을 것이 모자라서 늘 군량으로 대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절에 미곡 백여 석을 유치해두면 군량이 소비되지 않을 것이고 외부에서 왕래하는 중들 역시 편리할 것입니다. 김좌명(金佐明)이 재임시에 절마다 곡물을 모으게 하였는데 많은 곳은 80석, 적은 곳은 수십 석이었습니다. 지금 곡물을 더 모아두려 하는데 공명첩(空名帖)과 고신첩(告身帖)으로 곡식을 모으는 규례를 써서 모은다면 8백여 석은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의 통정첩(通政帖) 3백 장, 가선첩(嘉善帖) 50장과 노직(老職)의 통정첩·가선첩 각 50장을 해조로 하여금 만들어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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