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임인
민유중(閔維重)을 대사헌으로, 이혜(李嵆)를 승지로, 신선온(申善溫)을 대교로 삼았다.
10월 2일 계묘
장령 이휴징이 신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고, 헌납 송규렴이 고향에 있으면서 모친의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모두에게 체직을 허락하였다.
10월 3일 갑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도민(都民)이 받은 조적(糶糴) 건에 대해 여쭙기를,
"쌀로 거두게 되면 필시 쌀이 귀해지는 걱정이 생길 것이니, 민원(民願)에 따라 은화(銀貨)로 계산하여 거두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얼마 전에 이단하(李端夏)의 계사로 인하여 삼수량(三手糧)의 세입(歲入) 및 용하(用下) 수량을 써서 올리라는 분부가 계셨으므로 초록(抄錄)하여 가져 왔습니다. 정축년 이후 전결(田結)의 수가 가장 많았던 해는 무자년이고, 그 뒤로 기유년이 그 다음이고 신해년이 가장 적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해의 소입(所入)된 수량을 초출(抄出)하였는데, 훈국 군병의 감원(減員) 이전 방료(放料) 수량과 감원 이후 방료 수량에 대해서도 기록을 하였습니다.
무자년의 삼수량은 3만 9천 41석이고, 기유년은 3만 5천 5백 83석이고, 신해년은 2만 5천 7백 91석입니다. 감원 이전의 방료는 한 해에 쌀이 5만 5천 1백 20석, 콩이 5천 2백 76석으로, 쌀과 콩을 합계하면 6만 3백 96석인데, 1만 6천 79석은 전미(田米)로 지급하였습니다. 감원 이후의 방료는 한 해에 쌀이 4만 8천 9백 8석, 콩이 4천 3백 39석으로, 무자년의 세입으로 따져보니 9천 8백 67석이 부족하고, 기유년의 세입으로 따져보니 2만 3천 1백 17석이 부족하였습니다. 감원 이전에 비하면, 줄어든 쌀과 콩이 모두 합계하여 7천여 석이고, 각 아문의 장관(將官)·군관(軍官), 내금 위국(內禁衛局)의 출신(出身) 호위 군관(護衛軍官) 등의 방료가 한 해에 쌀이 1만 1천 9백 20석, 콩이 8천 4백 70석입니다."
하고, 우의정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 일의 변통은 영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주관(主管)하는 대장(大將)과 더불어 입시하여 충분히 논의한 뒤에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지평 이유(李濡)가 윤경교를 나문토록 한 명을 환수하시라는 일을 연계하고, 또 진달하기를,
"윤경교(尹敬敎)를 이미 안치만 시키도록 형을 감하였다면, 잡아다 문초할 것이 다시 뭐가 있겠습니까. 잡아다 문초한다는 것은 숨긴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윤경교를 아직 대질하지는 못했지만 만약에 대질하더라도 나졸의 공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원하기에 급급하여 며칠 지체하였다고 하지만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다. 승지 최일(崔逸)이 아뢰기를,
"대간의 계사에서 한 말은 나졸의 공초대로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니, 상이 큰소리로 이르기를,
"그 대간이 어찌 눈이 없겠는가? 대간의 계사 중에 ‘관인(寬仁)’ 등의 말은 온순한 말이 아니라 기롱하고 조소하는 느낌이 있다. 나같이 각박한 임금이 어찌 관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이유가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나갔다.
10월 4일 을사
지평 박태상(朴泰尙)이 처치하여 이유를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고 또 아뢰기를,
"윤경교(尹敬敎)가 북쪽 변방에 정배(定配)될 때에 신의 어리석은 의견을 재차 진달하여 결국에는 삭출(削黜)하는 것으로 감죄(減罪)를 해주셨는데, 그 당시 성상의 분부가 신이 올린 말에 중점을 돌리는 듯한 감이 있었으므로 신의 마음 영광스럽고 고맙기가 다른 신하들보다 만배나 컸습니다. 그런데 그뒤 등대(登對)하였을 때 또 하교를 들으니, 경교가 적소(謫所)에 느릿느릿 나아갔다는 이유로 장차 나문을 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신은 성상께서 또 중도에 어긋난 거조를 하실까 몹시 걱정스러운 나머지 황급히 말을 엮는 사이에 함부로 인조조(仁祖朝)에 단지 윤명은(尹鳴殷)을 압송해 간 나장(羅將)만 논죄했던 일을 인용하였습니다. 어찌 나장이 형을 받은 뒤 또 경교를 나문하라는 명이 있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 일이 밝은 시대의 누(累)가 된다고 우지(愚智)를 막론하고 다들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이 외람스레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일찌감치 한 차례 차자를 올리기를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것은 단지 성명께서 양사(兩司)의 청을 따라주시기만 바란 까닭이었습니다. 그런데 허락한다는 말씀이 오래도록 감감하고 겨울철이 벌써 닥쳤으니, 신은 진정 놀랍고 아쉬운 나머지 깊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듣건대, 전옥서(典獄署)에 경미한 죄수를 석방하라는 명이 계셨다고 하니, 신은 이 일에 더욱더 감탄을 누를 수 없습니다. 이에 하정(下情)을 드러내어, 다시 한번 생각을 하시고 한시바삐 너그럽고 어진 은전을 베푸심으로써 뭇 신하들의 소망에 따라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나의 뜻을 이렇게까지 헤아려주니 나는 반갑고 기쁘게 여긴다. 소(疏)의 말미에 말한 일은 근일에 여러 신하들이 구제하는 데에 급급하여 마치 제때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듯 서두르고 있어, 마음이 저으기 통분스럽고 놀랍다. 참으로 윤허를 해 줄 수는 없는 일이나, 경의 말이 이처럼 간절하니 내 어찌 끝까지 한번 허락하는 것을 아끼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풀어보내도록 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하도록 명하였다.
수어청이 구리[銅]로 대자(大字) 6만 6천 1백여 자, 소자(小字) 4만 6천 6백여 자를 주조하였다고 입계하여, 교국(校局)050) 에 이송하였다. 전 수어사 김좌명(金佐明) 때에 주조한 글자이다.
10월 5일 병오
민유중(閔維重)을 우참찬으로, 남용익(南龍翼)을 형조 판서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여성제(呂聖齊)를 병조 참의로, 이익(李翊)을 공조 참의로, 맹주서(孟胄瑞)를 승지로, 조원기(趙遠期)를 집의로, 강시경(姜時儆)을 장령으로, 조위봉(趙威鳳)을 보덕으로, 신후재(申厚載)를 헌납으로, 이수언(李秀彦)을 설서로 삼았다.
사헌부가 윤경교를 삭탈 관작하여 내쫓으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신이 윤경교의 일로 석 달 동안 힘써 쟁론하였으나 마침내 허락을 받지 못하였는데, 대신이 말 한 마디 하자 즉시 윤허하였습니다. 이는 신들의 말이 믿을 수도 없고 들을 것도 없다고 여기셔서 그런 것입니다.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언지(言地)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0월 6일 정미
지평 이유(李濡)가 패초(牌招)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지평 박태상(朴泰尙)과 정언 안후(安垕)도 대신의 차자에 대한 비답이 거북스럽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사직서를 올려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게 하였다.
10월 7일 무신
대사헌 강백년이 아뢰기를,
"신의 생질 조이병(趙爾炳)이 미처 일을 마치고 복명하기도 전에 대간을 겸대한 것으로 서로 피하기를 전날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 신이 명을 도로 거두시라는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그 의도가 바로 잡으려는 데에 있는 것인데 임금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것이 여러 동료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0월 8일 기유
부교리 이규령(李奎齡)이 대사간 이익상, 정언 안후, 지평 박태상은 출사시키고 대사헌 강백년은 체차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9일 경술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장선징을 공조 판서로, 홍처대(洪處大)를 형조 참판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성으로, 김해일(金海一)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익상이 소패(召牌)를 받고도 나아오지 아니한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이 되었다.
우의정 김수항이 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또 아뢰기를,
"뜻하지 않게 성자(聖慈)께서 남다른 은수(恩數)를 베풀어 특별히 사관을 보내 정녕 간곡하게 선유(宣諭)하신 것은 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감히 받들어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간신(諫臣)의 인피하는 계사를 거론하기까지 하시면서 신의 사직을 청하는 일이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여기시는 감이 있으니, 신이 더욱 송구스러움을 누를 수 없습니다.
대체로 인신(人臣)이 군부(君父)에게 진언(進言)을 할 때는 저마다 자기 정성을 나름대로 다하고자 하는 법인데, 간혹 채용이 되더라도 일신의 다행이 아니거늘, 어찌 가부(可否)와 종위(從違)051) 의 차이로써 감히 그 사이에 못마땅한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비록 보잘것없는 사람이긴 해도 감히 생각지 못하는 바입니다. 아무튼 신이 황공스럽고 불안하게 여기는 점이 또 있습니다. 이미 성상의 유시를 받든 이상, 어찌 감히 그 진심을 밝히지 않겠습니까.
윤경교를 나문하라는 명이 내리던 날, 신이 제 얕은 성의와 가벼운 말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서, 망령스레 차자 하나를 아뢰어 나름대로 광구(匡救)052) 하는 의리로 삼았는데, 급기야 성상의 비답을 받들고 보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아는 일이 소중한 법인데, 신이 한마디 진언을 할 때마다 성상의 뜻에 합당하게 하지 못했고, 또 그 본정(本情)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함으로써, 의심을 자아내고 정의가 막히는 탄식이 있게 하였으니, 임금을 섬김에 정성스럽지 못한 죄가 이미 드러났습니다.
얼마 전 탑전에서 대신(臺臣)의 진계(陳啓)로 인하여 내리신 성상의 분부가 엄절하여 신자(臣子)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대간의 계사 중에 ‘수일(數日)을 지체하였다.’는 얘기를 ‘교묘하게 명목(名目)을 만들었다.’고 하신 것인데, 신의 전일 차자에서도 나졸의 공사를 의거하여 ‘7, 8일 지체되었다.’고 말을 하였으니 ‘수일’은 ‘7, 8일’과 기실 차이가 없는만큼 ‘교묘히 명목을 만들었다.’는 것은 곧 신의 죄인 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간의 계사 중에 ‘너그럽고 어지신 큰 도량’이라고 한 것을 ‘군부를 조롱하였다.’고 하신 것인데, 신의 차자에서도 ‘관대하고 인자하게 대하소서.’라고 말을 하였으니, ‘군부를 조롱하였다.’는 것도 신의 죄인 셈입니다.
신의 죄가 이에 이르렀으니 만번 죽더라도 오히려 가벼우나, 지척 가까운 천위(天威)로부터 이 부월보다 더 엄한 분부를 받들고보니, 자연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땅에 조아려지고 땀이 옷을 적셨습니다.
이어서 삼가 수상의 차자에 대해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또 ‘구제하는 데에 급급하여 마치 제때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듯 서두른다.’고 하셨는데, 당초에 ‘이제 그만 논의를 중지하시라는 의논’을 신이 진정 앞장섰으니만큼, 구제하고 나선 죄는 오로지 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감히 안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 중임을 맡아, 조금이나마 직책을 메워 나갈 별다른 재능은 없었으나, 어줍잖게나마 마음속에 나름대로 힘쓴 바는 단지 일에 따라 숨김없이 말이나 해드리려는 데에 있었는데, 이른바 남김없이 말해 드린다는 것마저 또 모두가 위에 아뢴 것처럼 망령되고 어긋난 것들이어서, 위로 성덕(聖德)을 보필하지 못하고 아래로 죄려(罪戾)만 늘어날 뿐이니, 신은 장차 무엇을 가지고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으면 또한 장차 어떻게 백료를 바로잡고 서정을 총괄하겠습니까. 신이 무릅쓰고 자리에 있기 어려운 의리가 이에 판가름난 셈입니다.
‘국사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신이 진정 두렵게 느끼고 몸둘 곳이 없으나, 다만 신이 아무리 어리석은 몸이기는 해도 어찌 금일의 시세가 신하로서 한가히 쉬기를 청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설령 신이 어려운 국면을 헤쳐나갈 만한 재주가 있을지라도 죄상이 이와 같고 질병이 이와 같으면, 오히려 부질없이 총애와 녹을 훔치어 현인의 진로를 방해하게 놔둘 수 없는 일이거늘, 하물며 아무런 재능이 없어 있으나마나 한 자인데야 어련하겠습니까.
신이 극력 사직을 하면서 면직을 간청하는 것은 제몸만 편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실로 나랏일을 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어제의 비답에 유시를 하였으니, 다시 어찌 여러 말을 하겠는가. 경의 말은 비록 이러하나, 일은 그렇지 아니한 게 많은데, 어째서 굳이 사직을 하는가. 경은 모쪼록 나의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한시바삐 행공(行公)을 함으로써 나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상의 궐실에 대해 빠짐없이 일에 따라 광구(匡救)를 하였으나, 한 번도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상 차자에 대한 비답 또한 매우 적절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정고(呈告)하고 인입(引入)을 한 것인데, 상이 또
"어제 이익상의 피사(避辭)를 보니 못마땅히 여기는 말을 문자 사이에 제기하였는데 오늘 경의 상소가 또 이르니, 불안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라고 하교를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차자를 올려 사직을 한 것이었다.
해서(海西)에 천둥이 쳤다.
10월 11일 임자
좌의정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을 하니, 상이 체직을 허락하며 비답하기를,
"경의 고사(固辭)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성의가 미덥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옛 사람이 소중히 여겼던 바는 서로의 마음을 아는 데에 있었다. 경을 조정에 초치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직임의 유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비록 체직을 허락하기는 하나, 경이 선뜻 올라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갈수록 더욱 간절하여 목마른 자가 마실 것을 생각하는 정도뿐이 아니다. 그러나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 경은 모쪼록 이 뜻을 몸받아 한시바삐 선뜻 올라오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10월 12일 계축
송시열(宋時烈)을 판중추부사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수항이 신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을 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4일 을묘
조사석(趙師錫)을 접위관으로 삼았다.
해조가 처음에 김해일(金海一)을 의망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가려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사석을 보낸 것이다.
이 달 초엿새날에 동래(東萊)의 왜관에 불이 나 서쪽 행랑채 등 열한 개 고(庫)가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다. 우리 나라 간가(間架)로 계산하면 3백 80여 칸이었고 왜인 1명도 불에 타죽었다. 왜관은 과거 정미·신해년에도 불에 탄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공미포(公米布)를 사여하고 역관을 보내 위문하는 일이 있었다. 【정미년에는 공미(公米) 1백 석, 공목(公木) 5동을 주었고, 신해년에는 공미 2백 석, 공목(公木) 10동을 주었다.】 그러므로 비국이 신해년의 전례에 따라 위문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5일 병진
지평 김해일이 장령 이하진(李夏鎭)과 피혐해야 될 처지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17일 무오
이익상(李翊相)을 호조 참의로, 권상구(權尙矩)를 공조 참의로, 신후재(申厚載)를 부교리로, 윤심(尹深)을 헌납으로, 목창명(睦昌明)을 설서로 삼았다.
10월 19일 경신
병조에서 아뢰기를,
"무과 전시(武科殿試)의 명관(命官) 계사로 인해 ‘하임우(夏霖雨)의 부자가 같은 시험에 합격한 일에 대해 관례를 상고하여 처리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대체로 부자가 함께 문무과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경우에 있어서는 으레 아들 이름으로 다음 시험에 응시하라는 공문을 내주었습니다. 만약 각기 문과 무과의 초시에 합격한 자가 있는 경우에도 마땅히 문과 무과의 전시(殿試)에 나누어 나가게는 하나, 함께 합격을 하였더라도 그 아들은 다음 시험에서 합격시켜 주었습니다. 어찌 부자가 같은 시험장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예전에 없었던 일이니만큼 하임우가 몰랐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그가 제딴에 생각하기를, 부자가 함께 합격하면 앞뒤로 나누어 합격자 명단을 불러줄 것이고 한 사람만 합격하더라도 이번 과거를 독점하는 데엔 지장이 없다고 여기고서는, 자취를 숨기고 이름을 기록하였으니 그의 의도가 간교합니다. 만약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경계할 수 없을 것이니, 하임우 부자를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하고 유사로 하여금 법률에 비추어 죄를 주게 하소서. 그리고 녹명관(錄名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마땅히 하임우 등과 대질시켜 사실을 조사하여 처리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1일 임술
무과 전시의 명관이 아뢰기를,
"응시자 이만방(李晩芳)이 두 기예에 합격한 뒤 녹명 단자(錄名單子)를 상고해 보니, 그의 외조부는 곧 역적 조인필(趙仁弼)이었는데 학생(學生)으로 써 넣었습니다. 그가 법을 무시하고서 함부로 응시한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법으로 보아 마땅히 삭제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아비 해천군(海川君) 이영(李暎)이 신묘년의 역적 변고 때, 충의심을 분발하여 왕실을 부축하였다. 그래서 선왕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종사가 위태로울 뻔하였다.’고 하셨는데, 별도로 우대하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만방을 삭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 역시 재고하시기를 청하면서
"시소(試所)의 초기(草記)가 매우 체통이 있으니,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이만방의 아비가 비록 정훈(正勳)에는 참여되지 못하였으나 그의 아들을 금고(禁錮)하는 것은 부당할 듯하다. 그 당시에 혹 조정에서 처분한 일이 있는가? 신묘년의 일기(日記) 중에는 이 일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영의정은 이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 것 같으니 사관을 보내 문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해천령(海川令) 이영(李暎)과 진사 신호(申壕) 등이 연명으로 소를 올려 그의 장인 조인필(趙仁弼)의 역모 사실을 고발하였습니다. 국청이 이 소를 따라 안문(按問)하였고, 옥사가 끝난 후, 선왕께서 논상하여 두 사람이 모두 3등의 자품으로 승진하였으며, 특별히 영을 부총관으로 삼고 호를 동지중추부사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신이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조인필의 외손을 금고시켰는지 여부에 있어서는 그 당시 조정에서 처분한 일이 없었던 듯하고, 역률에 죽은 자의 외손은 함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것도 의거할 만한 관례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별시 전시 문과에서 유명천(柳命天) 등 21명을 【그 안에 끝의 2명은 제주(濟州)의 제술에서 직부(直赴)한 자이다.】 뽑고, 무과에서 박정원(朴廷元) 등 5백 13명을 뽑았다.
10월 22일 계해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뜸을 떴다. 도제조 김수항이 아뢰기를,
"하임우(夏霖雨) 부자가 과거 시험에 합격한 것을 취소한 데 대해 외부의 의논도 억울하다고 하는 자가 많습니다. 하임우는 먼 외방의 사람이므로 필시 무식하여 망령된 짓을 한 것일 겁니다."
하니, 상이 그 아들만 취소시키고 죄를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10월 23일 갑자
집의 조원기(趙遠期)와 지평 박태상(朴泰尙)이 아뢰기를,
"이만방의 아비 이영(李暎)에게 비록 변고를 고발한 공로가 있으나, 이만방이 역적의 외손으로서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과거장에 나왔으니 국법이 너무나 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합격을 취소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참으로 성상의 의도가 격려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마는, 국가가 사람을 뽑는 그 법이 매우 엄중하니 단연코 그 아비에게 공로가 있다고 하여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학생(學生)’이라는 칭호를 흉측한 사람에게 쓴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 방목(榜目)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보거인(保擧人)053) 이 서명한 것과 녹명관(錄名官)이 기록하게 허락한 것도 매우 놀랍습니다. 모두 파직시키고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만 하라고 하였다.
10월 24일 을축
윤진(尹搢)을 부교리로, 이합(李柙)을 수찬으로, 이휴징(李休徵)을 헌납으로, 윤심(尹深)을 겸문학으로 삼았다.
사간 박증휘가 고향에 있으며 상소하여 사직을 하면서 영남의 네 가지 폐단을 아뢰기를,
"금년 봄 관조(官糶)를 탕감하라는 명에 단지 원회부(元會付)만을 거론하고 별회부(別會付)에 대해서는 논급을 않았는데, 원회(元會)라는 것은 국곡(國穀)으로서 해조가 회부(會付)를 하는 것이고, 별회(別會)라는 것은 도내의 각영(各營)이 사적으로 구관(句管)하는 것입니다. 원회도 오히려 탕감을 시키면서 별회를 논급하지 않은 것은 대관절 어째서입니까? 마땅히 일체로 한꺼번에 탕감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성은을 고르게 입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강이나 냇가에 인접한 지역이 수재를 혹독하게 입어 도신이 급재(給災)하기를 계청하였는데 해조가 방계(防啓)하였습니다. 백성이 그 땅의 소출(所出)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도 도리어 세(稅)를 내라고 다그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급재(給災)하고 역(役)을 관대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시급한 일이니, 일체 도신의 장계에 따라 시행하소서.
영남 한 도의 전세(田稅) 미포(米布)는 중도(中道) 이하를 나누어 왜인(倭人)에게 떼어 주고 있는데, 처음에 쌀로 목면을 환산할 때에는 쌀 다섯 말로 베 1필을 환산하였으나, 나중에 베로 쌀을 환산할 때에는 베 1필로 쌀 열두 말을 환산하고 있어서, 강가에 인접한 각 읍이 모두 폐해를 받고 있습니다. 풍년 흉년을 막론하고 예식(例式)으로 삼고 있는 것이 전에 1석(石)을 납부하면 될 사람이 지금은 36두(斗)를 납부하는 실정입니다. 산간 고을은 으레 1석을 납부하고 있는데 강가에 인접한 각 읍은 납부해야 되는 수량 이외에 1석 6두를 더 내고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몹시 치우치게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왜인에게 주는 수요(需要)에 관계되는 것이라서 비록 즉시 변통하기에는 어렵더라도 마땅히 강가 고을과 산간 고을이 적절하게 융통하여 쌀을 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강가에 인접한 고을의 다른 역(役)을 덜어내어 산간 고을에 이정(移定)하는 것이 역(役)을 고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갖가지 군병의 궐액(闕額)은 비록 신해년 이전의 물고(物故)된 자는 3년이 지난 뒤에 대정(代定)하라는 명령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가운데 대정인(代定人)을 제 스스로 찾아내거나 자원(自願)한 자에 대해서는 대정을 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각 고을이 신구(新舊) 물고(物故)를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서 보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놀라 흩어질 생각을 품는 정도가 지난 해의 흉년 때보다 도리어 심한 형편입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이제 마땅히 숫자를 정하여 매년 3분의 1을 보충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일에 뽑은 경별대(京別隊) 이외에 지금 또 별초(別抄)의 호보(戶保)를 추가로 정하여 기보(騎步)의 대정인을 충당하고 있어, 해마다 으레 뽑는 숫자도 이미 채우기 어려운 점이 걱정스러운 형편인데, 별도로 정하는 숫자를 어디로부터 찾아내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는, 별초를 추가로 정한 것도 마땅히 정파(停罷)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을 소요시키지 아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아뢴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지평 안후(安垕)가 패초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25일 병인
집의 조원기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대궐의 전각에 비가 새고 기울어진 곳이 있어서 재목과 돌을 운반하는 등의 역사를 이미 요리하여 시작하였으나 그 비용이 적지 않다고 하니, 아마도 제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국운이 불행하여 백성이 다 죽어가는데 이런 때를 당하여 만약 다시 재력을 허비해가면서 때아닌 역사를 일으킨다면, 국가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으며 백성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 원근에서 전해 듣고 이 일을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국가 형편의 위태로움과 백성의 곤궁한 형편과 재물의 비축이 고갈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다면, 얼마 안 되는 돈과 비단이라도 백성을 위해 아끼고 차마 헛되이 쓰지 않으실 터인데, 어느 겨를에 수선하는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개수하라는 명령을 속히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각에 비가 새고 기울어진 곳을 개수하는 일은 시기를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의 말도 우연한 것이 아니니, 해조로 하여금 명년 가을에 거행케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정묘
이여발(李汝發)을 좌윤으로, 이후산(李後山)을 우윤으로, 신석번(申碩蕃)을 장령으로, 김해일(金海一)·심유(沈濡)를 정언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사서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양서(兩西)·영남(嶺南)의 병오년 이전의 조적(糶糴) 허록(虛錄)에 【양서는 3만여 석이고 영남은 6만여 석임.】 대해 이미 사계(査啓)를 하였는데, 신이 영상 정태화와 상의를 해보니, 그도 ‘지금 비록 때가 늦긴 하였어도 탕감하여 조정의 덕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도에 대해서도 마땅히 똑같이 사계를 하도록 하되, 그 당시의 수령에 대해서는 또한 논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서 및 영남의 허록(虛錄) 조적은 우선적으로 탕감을 해주고, 수령에 대해서는 다른 도의 사계가 오거든 한꺼번에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고산 찰방(高山察訪) 이익태(李益泰)가, 역졸(驛卒)의 양처(良妻) 소생이 역리(驛吏)에 승진된 일로 상소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역졸의 양처 소생을, 새로 제정한 사목(事目)으로 논할 것 같으면 양인의 역(役)을 따라야 마땅한데 전부터 조정이 역졸을 중시하여, 역졸이 사비(私婢)에게 장가들어 낳은 자에 대해서도 모두 역(驛)에 귀속시킨 것은 뜻한 바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역리는 천역(賤役)과는 달라서 역졸 양처의 아들이 역리에 승진된 일은 양역(良役)을 따르는 뜻에 어긋나지 않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역졸의 양처 소생은 전대로 역리에 귀속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묻기를,
"역졸이 사비(私婢)를 아내로 맞아 자녀를 낳으면 남자는 아비의 역(役)을 따르고 여자는 어미의 역을 따르는가?"
하니, 참찬 민유중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그러나 난리 후로는 사천(私賤)을 아내로 맞아 낳은 자녀도 모두 역(驛)에 귀속시켰습니다."하고, 수항이 아뢰기를,
"근자에 공사천(公私賤)의 양처 소생은 어미의 역을 따르도록 한 일은, 판부사 송시열이 건백(建白)한 것이니, 이번 역졸의 일도 그와 서로 의논하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리는 본디 천역(賤役)이 아니니, 공사천의 양처 소생이 아비의 역을 따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역졸의 양처가 낳은 아들은 역에 귀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나, 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들·딸에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사목(事目) 중에 똑같이 역리가 되도록 허락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북로(北路) 만이 아니라 다른 도에 대해서도 마땅히 똑같이 분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황해 감사가 계청하기를 ‘연백(延白)의 재해를 당한 고을의 제반 신역을 특별히 감면토록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재해를 당한 고을에 대해 어떻게 하였는가?"
하자,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우심하게 재해를 당한 고을은 3분의 1을 거두고 그 다음 고을은 절반을 거두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것도 반을 줄여 거두되 앞으로 다른 도에 대해서도 모두 이에 따라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이단하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형세로는 반드시 군역을 변통해야만 나라가 지탱하고 백성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일에 신이 군병에 관한 일로 대략 진달드린 바가 있습니다. 정초군(精抄軍)을 가설(加設)한 뒤 하나의 새로운 병대(兵隊)가 불어나 그에 따른 경비가 적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정초군을 가설한 대신에 도감(都監)의 군병을 적당히 줄여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정초군에 대해서는 상번(上番)하지 말도록 하고 그 군포를 거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하고, 지사 유혁연이 아뢰기를,
"강원도는 목화가 유난히 품귀하여 포보(砲保) 번포(番布)의 어려움이 다른 도보다 배나 되는데, 이 일은 제반 신역을 감면해 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마땅히 별도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군포(軍布)로 납부해야 되는 것이 혹은 2필 또는 3필인데 3필은 결코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중 1필을 감하여 2필을 납부하기로 된 자와 똑같게 하면 좋을 듯한데, 금번(今番)에는 감량하여 받은 뒤 추이(推移)할 곳이 없다는 점이 걱정스럽습니다."
하고, 수항이 아뢰기를,
"진휼청에 아직은 남은 저축이 있으니, 이것으로 추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혁연이 이어 또 아뢰기를,
"도감 군병의 액수를 줄이자는 뜻은 단하(端夏)도 일찍이 신에게 말했으나, 도감의 군병은 3부(部)가 아니고서는 부국(部局)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단하가 이른바 ‘궐액이 있더라도 보충하지 말자.’고 한 것은 결단코 불가한 일입니다. 단하는 말하기를 ‘병자년에 남한(南漢)에서 성(城)을 수비할 때 도감 군병이 2천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부족하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도 꼭 많게 하여 국가 경비를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만, 현재 잡색군(雜色軍)이 많기는 해도 원군(元軍)은 3천여 명에 불과하므로 병자년의 군병 수에 비하면 그다지 많은 것이 아니고 이른바 ‘잡색군’이라는 것도 없어서는 안 될 군대입니다."
하고, 단하가 아뢰기를,
"혁연이 말한 ‘3부(部)’라는 것은 비록 1천, 2천 명이라도 다 국(局)을 편성할 수 있고, 별대(別隊) 1군(軍) 또한 부(部)를 편성할 수 있으므로 오직 부분(部分)하기를 잘하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어찌 꼭 5천이 차야만 3부가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혁연이 올린 소첩(小帖)을 가져다 살피고서 하교하기를,
"도감군은 이미 감한 숫자가 거의 1천여 명에 이르는데, 마병(馬兵)을 제외하면 8백 40명이 되는가?"
하였다. 혁연이 그렇다고 하였고, 수항이 아뢰기를,
"1부(部)를 줄이라고 하교를 하셨으나 감원된 숫자는 1부가 다 못되고, 한 해에 줄어든 쌀은 8천여 석입니다."
하였다. 혁연이 아뢰기를,
"전후로 통틀어 계산하면, 출신(出身) 잡색군(雜色軍)을 감원한 쌀이 많게는 1만여 석이나 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이경억이 아뢰기를,
"외방의 속오군(束伍軍) 복호(復戶)는 으레 50속(束)을 지급하되, 조총(鳥銃)을 스스로 갖춘 자에 대해서는 50부(負)를 더 지급하였는데, 얼마 전부터 흉년으로 인하여 1결(結)을 지급해야 할 자에게 감량(減量)하여 50부를 지급하고 50부를 지급해야 하는 자에게는 전량을 감하여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금년에도 조련(操鍊)하는 일이 없었으니 당분간 예전대로 감량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이외의 복호에 대해서도 감량을 하였는가?"
하자, 경억이 아뢰기를,
"이를테면 내관(內官)·의녀(醫女) 등의 복호에 대해서도 감량을 하였고, 사절인(死節人)054) 자손의 복호에 대해서는 지난 경술년에 감량하지 말라고 하신 상의 하교로 인하여 이번에도 감량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관·의녀 등의 복호에 대해서는 내년 봄에 급복(給復)을 시작하고 속오(束伍)에 대해서는 내년 가을의 조련(操鍊)을 기다려 급복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근래 외간에서 대궐의 금령이 엄하지 못하다고 말하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듣자니, 의관 양제신(梁濟臣)이 군관으로서 북경에 들어가고자 사신인 창성군(昌城君) 이필(李佖)에게 청하였는데, 필이 허락하지 않고 물리쳤다 합니다. 뒤에 양제신이 상의 하교를 전하면서 따라가려고 하자, 필이 듣고 크게 놀라며 꾸짖어 물리쳤다고 합니다. 일전에 필이 신을 찾아왔기에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필이 말하기를 ‘양제신이 따라가고 싶다는 뜻을 내관에게 말하였는데 내관이 조금 후에 상의 하교를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을 만약 나타나는 대로 중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간사한 길을 막고 대중의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곡절이 있다. 들으니, 창성군에게 병이 있어 데리고 가고 싶은데 어의(御醫)이므로 어렵게 여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데리고 가고 싶으면 불가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가 어찌 감히 나의 말을 전하였겠는가?"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양제신에게 약을 의논하는 직임부터 먼저 없애고 이어 잡아다 문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해당 내관(內官)도 마찬가지로 잡아다 문초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집의 조원기가 아뢰기를,
"내관이 감히 사사로운 말을 외람스럽게 임금에게 진달하였으니 안팎에서 쑥덕거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후일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해당 내관을 양제신과 마찬가지로 잡아다 문초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곡절이 다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7일 무진
사은 겸 동지사인 창성군(昌城君) 이필(李佖), 부사인 판윤 이정영(李正英), 서장관인 사예 강석창(姜碩昌)이 청나라에 갔다. 그 이듬해 봄에 환국하였는데, 그들의 문견사건에,
"몽고(蒙古) 기악온(奇握溫)의 후예가 군대와 말이 웅장(雄壯)하여 청인(淸人)이 두렵게 느끼고서 해마다 3백 6십만 금(金)을 실어다 주고 있으니, 명색은 속국이라고 하나, 실은 신복(臣服)하는 것이 아닌데, 근일에는, 대동지(大同地)를 떼어 주어 방목(放牧)하기를 요구하여, 장차 실랑이가 벌어지려는 형편이므로 한창 장수를 가려 군대를 조련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대체로 이들의 형세가 조만간 아무래도 청나라의 절박한 해(害)가 될 것인데, 우리 나라의 걱정 또한 작지 않습니다. 지난 병오년 사은사 허적 등이 연경에 들어갔을 때 궐정(闕庭)에서 몽고 사신과 맞닥뜨렸는데, 역관으로 하여금 탐문을 하였더니, 답하기를 ‘우리 몽고는 지금 세 나라가 되었다. 하나는 항타안(項朶顔)이고, 하나는 대타안(大朶顔)이고, 하나는 산타안(山朶顔)이다. 그 밖에 국경과 근접한 부락은 모두 청나라에 속해 있다. 우리 항타안은 곧 대원(大元)의 후예이다. 비록 청나라에 귀부(歸附)하고 있으나 그래도 제호(帝號)가 있고, 대타안은 대국에 복종하여 몹시 친대(親待)를 받으며, 산타안은 군대가 강한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복종하는 일이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북경(北京)은 우리 나라 소유인데 잃어버린 지가 지금 이미 수백년 째이다. 산타안은 쌍환달자(雙環㺚子)라고도 하는데 요새(要塞)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제 스스로 지켜 나가고 있어, 비록 청나라의 위세로도 감히 가병(加兵)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집의 조원기(趙遠期) 등이 아뢰기를,
"근년 이래 흉년과 돌림병이 연거푸 잇따라 병란을 치른 것만큼이나 참혹한 형편인데도 중외가 덤덤하게 여기고 경각심을 느낄 줄 모르고 있어, 식자들이 걱정을 해온 지가 벌써 오래입니다. 이번에 문·무과를 방방(放榜)한 뒤 풍년이 든 때처럼 허비를 하도록 놔둘 수 없는 형편이니, 청컨대 신은(新恩)·창악(倡樂)·경연(慶宴) 등의 일을 모두 금지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재차 아뢰어서야 윤허를 받았다.
10월 28일 기사
전 이조 참판 윤문거(尹文擧)가 졸하였다.
문거는 자(字)가 여망(汝望)으로, 성품이 침착·차분하고 꿋꿋하였다. 젊어서 과거에 올라 이름난 벼슬을 두루 지냈고 정축년 이후로는 벼슬길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효묘조(孝廟朝) 때 외임으로 동래 부사에 제수하여 내보내니, 변방 수령인 이유로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만두고 돌아와서는 마침내 시골에 박혀 지냈는데, 연이어 삼사(三司)의 장관으로 특별히 불렀다. 금상(今上) 초기에 소신을 굽히고 서울에 왔다가 금세 사직하고 돌아가서는 끝까지 취직(就職)하지 않았다. 그가 용감히 물러난 일절(一節)만큼은 옛사람에게도 손색이 없었다. 이때 와서 졸하니, 향년은 67세이다. 그의 아우 선거(宣擧)는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에 힘쓰고 몸가짐을 조심함으로써 중한 명망을 받았으나, 결점이 없이 순수하기로는 사람들이 또 문거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한다.
10월 30일 신미
한성부에서 호구(戶口)의 수를 올렸다.
경중 5부(京中五部)는 원래 호수가 2만 4천 8백 호인데, 남자는 9만 8천 7백 13명이고, 여자는 9만 3천 4백 41명이다.
경기도는 호수가 10만 7천 1백 86호인데, 인구는 46만 9천 3백 31명이다.
관동은 호수가 4만 6천 1백 45호인데, 인구는 21만 7천 4백명이다.
해서는 호수가 9만 6천 49호인데, 인구는 38만 6천 6백 85명이다.
관북은 호수가 6만 8천 4백 93호인데, 인구는 29만 6백 14명이다.
호서는 호수가 17만 8천 4백 44호인데, 인구는 65만 2천 8백 명이다.
영남은 호수가 26만 5천 8백호인데, 인구는 96만 60명이다.
호남은 호수가 23만 6천 9백 63호인데, 인구는 84만 9천 9백 44명이다.
관서는 호수가 15만 4천 2백 64호인데, 인구는 68만 2천 3백 71명이다.
경외 도합은 호수가 1백 17만 6천 9백 17호인데, 인구는 4백 69만 5천 6백 11명으로, 남자가 2백 54만 1천 5백 52명이고, 여자는 2백 15만 4천 59명이다.
제주 세 읍은 8천 4백 90호인데, 인구는 남자가 1만 2천 5백 57명이고, 여자가 1만 7천 2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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