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3년 1672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7.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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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임신

김만중(金萬重)을 헌납으로 삼았다.

 

역관(譯官) 장현(張炫)·서효남(徐孝男)·박이절(朴而巀)·변승형(卞承亨)·안일신(安日新)·변이보(卞爾輔)·김기문(金起門)·정충원(鄭忠源)·장찬(張燦) 등 9인에게 모두 가자(加資)를 명하였다. 이들이 전후 연경에 갔을 때 긴요한 문서를 찾아 오고 장찬은 금년에 환송한 방물(方物)을 자력으로 실어 온 것을 논상(論賞)한 것이다.

 

사신(詞臣) 이단하(李端夏)를 옥에 내리어 엄히 국문해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 인조조(仁祖朝) 때 그의 궁비(宮婢)가 내옥(內獄)에 나아가 죽은 일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감히 조청(朝請)에 나오지 못하고는 항상 두문불출하다가, 효묘조(孝廟朝) 때에 와서 누차 연경에 사행(使行)을 하니 상이 꽤 예우를 하였다. 이때 고신(故臣) 조석윤(趙錫胤)·박장원(朴長遠) 등이 죄아닌 죄로 유배되어 있었는데, 주원이 석윤의 유배 중에 지은 시구(詩句)를 보고 그의 충군(忠君)하려는 뜻이 유배되어 고생하는 중에도 시들지 않았다고 여기어, 소를 올려 석윤 및 장원을 석방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상이 조정 의논에 간여한다는 이유로 몹시 화를 내고 특명으로 파직을 시켰는데, 이때 와서 단하가 주원의 치제문(致祭文)을 찬진(撰進)하면서 한껏 그를 찬미하였다. 심지어
"국제(國制)에 구애되어 정승 자리에 두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고 하였으며, 그 뿐만 아니라 그가 두 신하를 석방하도록 청한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두 신하가 엉뚱하게 유배를 당하니 경이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글을 올리어 그들을 해명하였는데, 처음에 선뜻 허락하지 않으셨던 성교(聖敎)는 신칙과 격려를 보이신 것이고, 끝내는 경의 마음을 알아차리어 매우 융숭하게 예우하셨다."
고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이단하(李端夏)가 지어 올린 제문을 보고 나도 모르게 놀랍고 밉살스러웠다. 선왕께서 끝까지 그를 매몰차게 대하지 않으신 것은, 옛날 의빈(儀賓)으로는 그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지, 당론의 마음을 믿어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 선왕께서 평소에 매우 미워하신 것은 당론이었으며, 의빈 중에 당론에 빌붙은 자가 있으면 더욱 통렬히 미워하셨기 때문에 항상 여러 부마(駙馬)들에게 신칙하는 말씀이 이것에 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단하가 감히 당론을 부각시키려는 꾀를 내어 마침내 홍주원(洪柱元)의 제문 중에 말끝마다 칭찬을 하면서 ‘끝내는 경의 마음을 알아주었다.’는 말로 끝맺어, 마치 선왕께서 그의 마음을 믿어 우대한 것처럼 하였다. 이런 짓을 서슴없이 하는데 무슨 짓을 하지 못하겠는가. 그가 앞장서고 나와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임금의 뜻을 빌려다가 당론을 부식한 죄를 엄중하게 캐묻지 않을 수 없다. 이단하를 잡아다 엄하게 국문하여 죄를 결정하라."
하였다. 도승지 김휘(金徽) 등이 【우승지 이혜·좌부승지 최일·우부승지 이관징·동부승지 경최.】  상의 하교를 반환하면서 진계하기를,
"모든 치제문(致祭文)에 반드시 찬양하는 말을 쓰는 것은 대개 죽음을 측은히 여기고 그를 애도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단하(李端夏)가 제술한 제문의 내용은 그가 생전에 조정의 은총을 깊이 받은 것을 낱낱히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제 털끝만큼이라도 성상의 뜻을 빌려다가 당론(黨論)을 부식(扶植)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실정을 벗어난 분부가 이처럼 엄준하시고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까지 내리시니, 진정 천만 뜻밖의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분수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이다. 그런데 제문에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비록 죽음을 측은히 여겨 애도하고 은총받은 일을 일일이 서술한 것이라고는 하나, 선왕께서 통렬히 미워하시던 일에 대해서까지 지금에 와서 신하된 자가 감히 당론을 찬양하려는 꾀를 내어 마치 그의 마음을 믿고 우대하신 것처럼 하였으니, 그의 간교하고 윗사람을 기망하려는 마음은 차마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경들은 감히 몽롱하고 모호한 말로 구원하려고 하니 참으로 매우 놀랍다."
하였다. 정원이 상의 하교를 반환하면서 재차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이같이 교묘하게 꾸며서는 안 된다. 그 내용 중에 ‘선조(先朝)의 두 신하’부터 ‘매우 융숭하게 대우했다.’까지의 여덟 구절은 쓴 의도가 환하게 드러나 가릴 수 없다. 그런데도 경들은 온갖 말로 구원하려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임금을 속이는 죄에 빠지고 말았으니, 아, 역시 놀랍고 괴이하다."
하였다. 세 차례째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갈수록 더욱 교묘하게 꾸며대고 있으니 더욱 매우 놀랍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길 적에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러 승지들의 계사는 심하게 속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자못 통탄스럽다. 우선 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집의 조원기(趙遠期)가 이단하를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김해일(金海一)과 심유(沈濡)도 그 일을 아뢰어 간쟁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 귀중한 것은 충직함이다. 어찌 너희들같이 임금을 속이고 교묘하게 꾸며 말하는 자가 있겠는가. 내 매우 미워한다."
하였다. 김해일 등이 성상의 비답이 준엄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모두 출사토록 하기를 청했으나, 그 뒤에 패초에 불응한 것을 이유로 재차 인피하여 체직이 되었다.

 

11월 2일 계유

도승지 김휘 등이 엄한 분부를 이유로 소를 올려 어서 직명을 삭제하도록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홍연이 추고를 받아야 되는 형편에 놓여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니, 헌부가 출사토록 하기를 청하였으나, 그 뒤에 패초에 불응한 이유를 들어 재차 인피하여 체직이 되었다.

 

집의 조원기가 승지들을 추고토록한 명을 환수하시라고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고려(高麗)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과 본조(本朝) 이자(李耔) 등의 서원(書院)에 예관(禮官)을 보내 사액(賜額)·치제(致祭)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신숭겸은 절의(節義)와 공렬(功烈)이 전사(專祀)055)  하기에 충분한 사람이지만, 서원에 제향하는 것으로 말하면 선비들이 그를 위해 존봉(尊奉)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1월 3일 갑술

우의정 김수항 및 옥당의 신하들이 【교리 이규령, 부교리 신후재, 수찬 이합·이당규.】  모두 차자를 올려, 이단하를 나문하라는 명을 환수하시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다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6일 정축

우의정 김수항이 신병을 이유로 상차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어의를 보내 간병하게 하였다.

 

11월 8일 기묘

내관(內官)을 나문하라는 일로 아뢴 부계(府啓)를 이때 와서 따랐다.

 

11월 9일 경진

민유중(閔維重)을 판윤으로, 김익경(金益炅)을 대사간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이조 정랑 겸 사서로, 정재희(鄭載禧)를 헌납으로, 이일정(李日井)을 정언으로, 목창명(睦昌明)을 검열로, 신여철(申汝哲)을 경기 수사로, 이세선(李世選)을 남병사로 삼았다.

 

11월 12일 계미

우의정 김수항이 재차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4일 을유

집의 조원기, 지평 성호징이 법률 적용을 어긋나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16일 정해

여성제(呂聖齊)를 우승지로, 임규(任奎)를 집의로, 조원기(趙遠期)를 필선으로, 권개(權瑎)를 지평으로 삼았다.

 

11월 17일 무자

우의정 김수항이 세 번째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연거푸 글을 올려 굳이 사직하는 것이, 혹시 질병 이외에 불안한 바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수순(數旬)의 작은 병으로 기어이 물러나고자 하다니, 나랏일에 대해서는 어쩔 셈인가. 모쪼록 지극한 뜻을 헤아려 한시바삐 나와서 치도를 논함으로써 나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호조 판서 김수흥이 소를 올려 사직을 하였는데, 그 대략에,
"탁지(度支)056)  의 책임은 실로 한 나라의 재부(財賦)를 관장하는만큼, 나라를 풍족하게 하고 백성을 여유있게 해야 될 책무가 모두 한 몸에 쏠려 있으므로 옛부터 지금까지 그 선발을 신중하게 해왔습니다. 더구나 이 유례없는 위급한 때에야 어련하겠습니까. 경술년 이후 나라 살림이 바닥이 나서 지탱할 수 없는 까닭에 동(東)을 부수어 서(西)에 때우는 식으로 구차하게 시일을 보내면서 오늘까지 이어 왔습니다.
우선 목전의 형세로 말씀드리자면, 작년의 세입미(稅入米)가 11만 석에 불과하였으나 한 해의 용도는 거의 14만 석이나 됩니다. 여기저기서 옮겨오고 하여 겨우 모양은 이루었으나, 지난 해에는 경술년 조의 세(稅)를 상납하지 못하고서 단지 조정에서 이급(移給)한 4만여 석의 쌀로 경비를 썼습니다. 금년에는 납입된 3종 전세(田稅)의 수가 기껏해야 7만 석이니, 7만 석을 가지고 14만 석의 용도를 감당하자면 어떻게 내년 봄까지 이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의 재주로서는 감당해낼 수 없는 첫번째 일입니다.
호조의 목면은 노비의 신공(身貢)에 전적으로 의지하는데, 경술년 조의 신공 중에 납입된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미납(未納)인 것은 지난 해의 포흠(逋欠)된 것과 한꺼번에 탕척시킨 가운데 포함되었으며, 신해년의 신공마저 전연 납부하지 않은 채 이 해가 다가는데도 줄곧 지연되고 있습니다. 또 일정한 규정에 따라 써야 되는 비용으로 말하자면, 그 수가 매우 큰데,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는 것이 없어 예전의 저축이 바닥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의 재주로서는 감당해낼 수 없는 두 번째 일입니다.
위로 어공(御供)부터 아래로 백관의 봉록에 이르기까지 줄이지 않은 것이 없으니 긴급하지 않은 낭비가 없는 듯한데, 줄일 수 없는 남북(南北)057)  의 피폐(皮幣)가 나라 살림의 3분의 2에 가깝습니다. 이런 지경에 놓이어 변통할 방책이 없으니, 이것이 신의 재주로서는 감당해낼 수 없는 세 번째 일입니다.
‘유사(有司)는 경비를 걱정한다.’는 얘기가 고금(古今)의 상담(常談)이고, 전후로 이 직임을 맡은 자들이 다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는 신하들만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민생이 곤궁하고 국세가 위급한 때를 당해 비록 극히 못난 사람이기는 해도 어찌 마구 거두어 백성을 고달프게 할 마음을 갖겠습니까. 작년에 조정이 갖가지로 견감을 하고부터 정공(正供)으로서 응당 납부해야 되는 것에 대해서도 기한에 맞춰 징납(徵納)을 하지 않고 있는데, 예전의 포흠이 그대로 남아 있는 형편에 신역(新役)이 거듭 밀어닥치니, 외방에서 원망하고 탄식하는 정도가 마치 과외(科外)로 마구 거두는 것마냥 심합니다. 날씨가 춥거나 덥기만 해도 못살겠노라고 말을 하는 백성들에 대해서야 족히 말할 것이 없겠으나, 대소 벼슬아치 가운데에도 중외가 함께 헤쳐 나가야 되는 의리를 생각해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의 재주로서는 감당해낼 수 없는 네 번째 일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신이 삼가 얼마 전에 헌부가 전각(殿閣) 수리를 정지하도록 청한 계사를 보았더니, 거기에 ‘오늘날 일을 맡은 자들은 반드시 소소한 수리(修理) 공사야 민력을 크게 번거롭게 하지는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신은 걱정스런 느낌을 가눌 수 없습니다. 당초 수리를 하라는 명이 내린 후에 신이 병조·공조 두 조(曹)의 당상과 더불어 성상의 하교에 따라 수리할 곳을 살펴 보았고, 이어 수일 전에 등대하여, 살펴본 형지(形止)와 택일(擇日)의 원근을 진달드렸을 따름입니다. 일의 대소(大小)·편부(便否)와 민력이 번거로운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상께서 물어보신 일도 없었고 신의 입으로도 이러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인대(引對)시에도 수리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모두 제기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간 계사의 내용이 지금 도리어 이와 같으니, 신은 놀랍고 의혹스러울 뿐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몸을 까딱하기만 해도 허물이 생기는 신이 결단코 중한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였다.
"금일의 대계(臺啓)는 범연하게 한 말인데 어찌 꼭 개의하여 깊이 혐의할 것이 있는가. 사직한다는 말을 하지 말고 어서 나와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11월 18일 기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억, 판윤 민유중, 호조 참판 김만기 등이 이단하의 억울한 실정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부가 양제신(梁濟臣)·윤완(尹完) 등의 범죄가 일죄(一罪)058)  에 관계된다고 적용 형률을 아뢰어, 결안(結案)하여 공초를 받으니, 상이 제신은 정배하고 윤완은 삭직하여 풀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11월 20일 신묘

민유중(閔維重)을 대사헌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도승지로, 김우석(金禹錫)을 좌승지로, 박세견(朴世堅)을 병조 참의로, 조원기(趙遠期)를 집의로, 이하진(李夏鎭)·우창적(禹昌績)을 장령으로, 성호징(成虎徵)을 지평으로, 이동직(李東稷)을 전라 감사로 삼고, 신정(申晸)을 특별히 제수하여 병조 참지로 삼았다.
이때, 대사헌 민정중, 장령 신석번·강시경이 외지에 있고 집의 임규, 지평 권개는 봉사(奉使) 중이었는데, 계복(啓覆)이 하룻밤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정원이 여쭈니, 그들의 직임을 체차하고 이어 대임자를 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므로 유중 등이 이번에 제수된 것이었다. 신정의 아들 요경(堯卿)이 곧 부마(駙馬)가 될 참이었으므로 신정이 전라 감사로서 특별 제수를 받아 돌아왔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항이 충청 감사 남이성(南二星)의 장계에 조목별로 열거한 일을 여쭈니, 상이 명하여, 호서의 수재(水災)입은 고을 중 어사가 살핀 곳에 대해서도 마땅히 성책(成冊)하여 등급을 나눠 급재(給災)하고 목화전은 모두 급재를 허락하도록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지난번 정사(政事)에 온성 부사 이세선을 남병사에 제수하였는데 무신이 수사를 거치지 않고 곧장 병사에 제수되는 것은 실로 희한한 일이니, 세선을 온성에 잉임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들으니, 요전 평안 병사 민점(閔點)이 사직하기 위해 올린 소를 본도의 감사가 아뢰면서 올려 보냈는데 정원이 받아들이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비록 그 소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외방의 장계나 소장에 간혹 격식을 어긴 일이 있더라도, 추고를 청하면서 입계(入啓)하거나 여쭈어본 뒤에 되돌려 보내는 것이 전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원에서 까닭없이 되돌려 보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며 후일의 폐단에도 관계됩니다. 이런 버릇을 기를 수는 없으니, 해당 승지를 파직한 다음 추고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김수항이 또 이단하(李端夏)의 일에 대해 간절하게 구원하였으나, 상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언 이당규가 양제신·윤완 등을 해부(該府)의 적용 법률에 따라 법조문을 살펴 처치하라는 일을 진계하였으나, 상이 응답하지 않았고, 응교 이선이 아뢰기를,
"양제신과 윤완에 대한 일을 간신이 이미 논열을 하였는데도 제신을 정배하는 정도로 끝낸 것은 너무나 부당하고, 그 죄가 똑같은 윤완이 또 삭직에 그치어 들쭉날쭉이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11월 21일 임진

민정중(閔鼎重)을 판윤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예조 참의로, 임규(任奎)를 필선으로 삼았다.

 

장령 우창적이 추감 중에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22일 계사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는데 대신과 원임 대신 및 모든 재신, 6승지, 삼사가 입시하였다. 형방 승지가 나아가 추안(推案)을 낭독하고 나면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하문하기를 규례대로 하였다. 추안을 열여섯 번 낭독한 뒤, 날이 저물어서 잠시 정지하였다. 우의정 김수항이 아뢰기를,
"대간은 백관을 살펴 바로잡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언관(言官)의 자리를 마치 덫이나 함정을 피하듯이 꺼립니다. 친히 나오셔서 다시 심리하는 이런 때에 대관 3명이 【 집의 조원기, 장령 이하진, 지평 성호징.】 한꺼번에 사직서를 올렸으니, 스스로의 처신을 이렇게 하면서 많은 관리들을 살펴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체차한 다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3일 갑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또 죄수를 다시 심리하였다. 도승지 강백년(姜栢年)이 이단하를 매우 힘써 구원하였고, 판중추부사 정치화(鄭致和)도 계속해서 더욱 간절하게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단하의 평소 심사에 대해 내 비록 알 수 없으나 부마(駙馬)가 당론에 끼어든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만약 제문 중에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싶었다면 할 말이 없는 게 걱정되지 않았을 것인데 감히 선왕의 뜻을 억측했단 말인가."
하였다. 대사헌 민유중과 정언 이당규 등도 함께 간쟁하고 교리 이규령 역시 거듭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이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이단하의 죄를 만약 《대명률(大明律)》의 ‘당파와 서로 내통한 자는 참(斬)한다.’는 조목을 적용했다면, 신하들이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다만, 한번 잡아 가둔 데 대해 이처럼 굳이 간하니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수찬 최후상(崔後尙)이 아뢰기를,
"이단하가 선조(先朝)의 일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에서 이미 죄를 주었는데, 어찌 모르고 이런 말을 했겠는가. 너희들은 그를 엉뚱하게 두둔한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어 큰소리로 이르기를,
"오늘날의 조정에서 전혀 당론이 없는가? 너희들은 명확하게 말하라."
하니, 이규령(李奎齡)이 아뢰기를,
"어찌 감히 당론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최후상이 아뢰기를,
"조정에 어찌 당론이 없겠습니까마는, 이단하는 당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성상께서 항상 당론으로 뭇 신하들을 의심하시기 때문에 시비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여 그 당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하고, 승지 민종도가 아뢰기를,
"단하는 원래 당론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문자(文字) 때문에 죄를 받는 것은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24일 을미

예조 참판 이연년(李延年)이 안변(安邊)에서 졸하였다.
이때함경도 함흥부의 정화릉(定和陵) 정자각(丁字閣)에 불이 나 연년이 명을 받들어 살피러 갔는데 안변의 남산역(南山驛)까지 갔을 때 병이 중하여 도신이 이를 알려왔다. 이에 상이 의관에게 명하여 급히 역마를 달려 가서 치료하게 하였으나, 채 도착하기 전에 연년이 졸하였다. 이에 상이 하교하기를,
"맡은 일이 끝나기도 전에 영외(嶺外)에서 객사(客死)를 하다니, 정말 슬프기 짝이 없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의금(衣衾)·관곽(棺槨)을 제급(題給)하고 세 도로 하여금 호상(護喪)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5일 병신

임규(任奎)를 집의로,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유연(柳筳)·김수오(金粹五)를 장령으로, 안후태(安後泰)를 지평으로, 이지익(李之翼)을 강원 감사로 삼았다. 이때 세당은 전최(殿最)에 중(中)을 맞아 주의(注擬)되지 못했으나, 상이 파격 가망(加望)하라고 명하여, 이에 제수되었다.

 

11월 27일 무술

행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상차하여 병을 이유로 면직을 간청하면서 아뢰기를,
"효종 대왕이 왕위에 10년 동안 계시면서 큰일을 하시려고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에 든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지극한 정성과 융숭한 예의로 재야의 유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불러다 놓고, 빈사(賓師)로 대우하고 높은 직위에 있게 하여 온 나라의 일을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신하가 은혜와 예우에 감격하여 임금과 뜻을 합심하고 심도있게 일을 꾸려 나가면서 좌우에서 성심껏 임금을 도운 것은 삼대(三代) 이후로도 보기가 드문 일이었는데, 선왕께서는 큰 왕업을 끝마치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마침내 두 신하에게 명하여 우리의 성상에게 물려 주셨습니다. 성상께서 선왕의 유명을 받들어 그들을 대우하신 은혜와 예우는 그야말로 천고에 탁월하였고, 그들의 진퇴로써 사이를 두지 아니하신 지가 지금 10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번 송준길이 한번 올린 소가 거듭 상의 위엄을 건드려 점점 격동된 바람에 기상이 꽉 막혔습니다. 지금 들으니, 준길의 묵은 병이 깊어지는 가운데 딴 병까지 겹치어 더없이 병세가 위독하여 아침 저녁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의 마음을 임금에게 아뢰지도 못하고 질병이 또 이와 같으니,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사라진다면 영원히 떠난 혼백이 반드시 구천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이게 어찌 준길만의 여한이겠습니까. 만일 성상께서 한가한 시간에 지난 일을 생각해 보신다면, 필시 뜨끔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을 것이니, 전하께서 어찌 차마 끝까지 그를 내팽개친 채 돌아보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한가닥 숨이 끊어지기 전에 속히 좋은 말씀을 내리고 특별히 위로해 주신다면, 준길이 죽더라도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찌 성상의 덕에 빛이 더 나지 않겠습니까. 신이 선조에서 경악을 모시면서, 두 신하가 강독하는 일을 주선하게 된 뒤 물과 고기가 만난 듯한 기쁨을 목견하고서 늘 가슴 깊이 감탄을 하였는데, 이 사생의 때를 당해 저도 모르게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들어 망령스레 아룁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 중의 일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근일에 시기나 틈을 노리는 자들이 한두 사람뿐만이 아니므로 내가 매우 미워하는 것이다. 요전 정원의 계사와 문찬의 상소는 매우 형편없었고 때를 틈타 엿보는 뜻이 매우 올바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 몹시 미워하였다. 내 어찌 그의 죽음을 걱정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사직하지 말고 한시바삐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 약물을 가지고 가서 준길의 병을 구호하라고 명하였다.

 

11월 30일 신축

이경억(李慶億)을 우의정으로 삼고, 우상 김수항(金壽恒)을 승진시켜 좌의정에 제수하고, 이상진(李尙眞)을 이조 판서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처음에, 허적·정치화·송시열·송준길로 복상(卜相)을 하였는데 상이 가복(加卜)을 명하니, 우상 김수항이
"삼공(三公) 매복(枚卜)은 사체가 중대하여 전부터 수상(首相)이 아니고서는 감히 홀로 신복(新卜)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가복(加卜)은 상규(常規)와 다른 일이니, 수상이 비록 병고(病告) 중이더라도 마땅히 문의하여 가복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가주서 신완이 상의 명으로써 영상 정태화에게 문의하니, 그가
"아침에 삼가 우상이 보여주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병세가 한창 심하여 사양하는 글로 회답을 하면서 명백하게 하지 못하였던 까닭에 가복을 문의하는 청이 있게 하였습니다. 우상이 생각하는 이외에 신은 별다른 의논을 할 수 없습니다."
고 대답하였다. 수항이 이에 경억을 가복하여 제배하였다. 수항의 서신 중에 이미 경억을 가복할 뜻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경억은 비록 점잖기는 하였으나 국량이 편협하여 재상감이 아니었는데 인원이 부족한 바람에 갑자기 재상 자리에 앉게 된 것이고, 상진 또한 가망(加望)으로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물정이 더러 흡족히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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