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3년 1672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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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인

김만기(金萬基)를 발탁하여 병조 판서로 삼고, 민유중(閔維重)을 지경연으로, 박증휘(朴增輝)를 필선으로, 최석만(崔錫萬)을 설서로 삼았다.

 

12월 3일 갑진

이인환(李寅煥)을 사서로 삼고, 고(故) 일사(逸士) 정랑 이의건(李義健)을 추증하여 사헌부 집의로 삼았다.
의건은 자는 의중(宜仲), 호는 동은(洞隱)이고, 종성(宗姓)이다.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여(李礖)의 후손임.】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롭고 단정하고 수려하였다.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젊어서부터 이미 출세에 뜻이 없었는데 갑자년에 비로소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또 소신을 굽히고 벼슬에 나서 돈령부 직장까지 지냈으나,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 전후의 제명(除命)에 한결같이 취직하지 않았다. 더불어 사귄 벗들이 모두 당대의 명현(名賢)이었는데 누구보다도 성혼(成渾)·이이(李珥)·정철(鄭澈) 등과 가장 사이가 좋았다.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 속에 집을 짓고 고상(故相) 박순(朴淳)과 더불어 왕래하며 유유자적하였으며, 만력(萬曆) 경술년에 대신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행의(行宜)를 아뢰면서 발탁 등용할 것을 청하여 공조 좌랑에 파격적으로 제수되었고 정랑에 승진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나서지 않은 채 향년 89세로 졸하였다.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일찍이 그에게 상(床) 아래에서 절을 하면서 "이 선생(李先生)의 염담 청고(恬淡淸高)야말로 오늘날의 곽입종(郭林宗)059)  이다.’고 칭찬하였다. 이때 와서 영평의 선비들이 상소하여 포증(褒贈)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신병을 이유로 상차하여 면직을 간청하면서 월료(月料)도 사양을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몸조리를 다시금 잘하도록 명하였다.

 

집의 임규가 아뢰기를,
"동의금(同義禁) 정익(鄭榏)이 비록 정고(呈告) 중에 있기는 하나 실병(實病)이 없는 몸이라는 것을 온 조정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인데, 어제 정원이 끝까지 패초 하기를 계청하지 아니하여, 막중한 추국(推鞫)을 제 날짜에 개좌(開坐)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으니, 해당 승지를 선파후추(先罷後推)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중하게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4일 을사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여러 재신 및 삼사와 함께 경외의 죄수들을 세 번째 복심하였는데, 경외의 죄수 중에 사정이 용서할 만한 자 14명에 대해 사형을 감해주었다. 형조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사적으로 돈을 주조한 죄인에 대해 이미 사형을 면해 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후로 사적인 주조의 금지에 대해서 하나의 정식을 지적하여 안팎에 포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행 판중추 정치화(鄭致和),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중국과 달라서 돈이 통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송도(松都) 근처의 몇 고을에만 통용되고 있는데다가 또 관청에서 주조하는 규례마저 없으니, 사적인 주조만을 금지한다는 것은 실로 형식적인 일입니다."
하니, 상이 지금부터는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2월 5일 병오

전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찬선 송준길(宋浚吉)이 집에서 졸하였다. 상이 즉시 정원에 하교하기를,
"참찬 송준길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놀랍고 슬퍼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관곽(棺槨)·조묘군(造墓軍) 및 미진한 상수(喪需)들을 모두 즉시 제급(題給)토록 하라."
하였고, 후에 또 하교하여 【계축년 2월 8일.】  추모하고 슬퍼하는 뜻을 보이고 특별히 영의정에 증직하였다.
준길은 자(字)가 명보(明甫)이고 은진(恩津) 사람이다. 그의 아비인 군수(郡守) 송이창(宋爾昌)은 젊어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어미 김씨(金氏)는 곧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종매(從妹)이다. 이 때문에 일찌감치 이이의 풍도를 듣고 학문에 뜻을 두고서 약관(弱冠)에 장생을 좇아 학문을 닦으니, 장생이 매우 중히 여기고서 일찍이
"이 애가 장차 예가(禮家)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부옹(婦翁)060) 정경세(鄭經世)에게 공부하면서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니 경세도 기대를 매우 중하게 가졌다.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까지 하였다가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서, 더욱 강학(講學)에 전심하니 좋은 평판이 크게 드날렸고, 인조조(仁祖朝) 때 처음 세마(洗馬)에 제수하고 병자년에 특명으로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제수하였으며, 계미년에 또 지평에 발탁 제수하였으나, 모두 취직하지 않았다.
소현 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소를 올려 한시바삐 원손(元孫)을 책봉하여 인망(人望)을 붙들어 매도록 청하였는데, 소를 들였으나 아무런 비답이 없었고, 효묘(孝廟) 초년에 맨 먼저 소지(召旨)를 받고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자주 예우를 입었으며, 누차 천거를 받아 집의에 이르렀다. 이어 역적 김자점(金自點) 및 그의 패거리를 논핵하여 미움과 원망을 몹시 받았는데, 몰래 북쪽 오랑캐를 사주하여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어가던 차에, 효묘의 훌륭하신 결단에 힘입어 일이 풀릴 수 있었다. 급기야 자점이 역모죄로 주벌되고 그의 패거리들도 사형되거나 유배를 당하게 되자, 상의 예우가 다시 융숭해지고 은소(恩召)가 계속 잇따랐으며 교자(轎子)를 타고서 나아오라고 명하시기까지 하였다.
정유년에 비로소 이조 참의 겸 찬선으로 서울에 들어와 양연(兩筵) 【경연 서연.】 을 시강(侍講)하니 특명으로 이조 참판에 제수하였고, 그 이듬해에 다시 입조(入朝)하여 도헌(都憲)061)  으로서 좨주를 겸임하였으며, 기해년에 또 병조 판서에 발탁·제수하였다. 이때 송시열도 소명에 나아와 총재(冢宰)062)  를 맡고 있었으므로 사림이 기대에 부풀고 중외가 희망을 가졌으나, 곧이어 효묘가 승하하였다. 시열과 더불어 함께 고명(顧命)063)  을 받았고 또 시열을 대신해 천조(天曹)064)  의 판서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체직되었다.
경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그 후로 혹은 상의 하교가 빈번하고 간절함으로 인하거나 혹은 나라에 큰 일이 있는 까닭에 애써 조정에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모두 오래지 않아 금세 돌아왔다. 을사년에 온양의 어가 수행을 따라 나섰다가 그 길로 원자 보양관에 제배되어 서너달 머무르다가 돌아왔다.
경자년의 예송(禮訟)이 화의 덫으로 변하면서부터 군소배들이 기어코 틈을 타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여 윤선도(尹善道) 같은 무리들이 전후로 잇따라 나왔으나, 상의 은혜와 예우는 끝까지 변함이 없었는데 허적을 논척하자 비로소 변하기 시작했고 이때 졸하니 향년 67세이다. 유소(遺疏)를 남겨 권계(勸誡)하였고,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서로 거느리고 거애(擧哀)를 하였으며, 관서(官署)이건 초야(草野)이건 서로 조문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여기저기서 장례식에 모인 자들이 거의 1천 인이었다.
준길은 타고난 자질이 온후·순수하고 예법과 태도가 탁트여 그를 바라보면 빙옥(氷玉)과 같았고, 그가 학문에 힘을 얻은 곳은 무엇보다도 《심경》·《근사록》 등의 서적에 있었는데, 염·낙(濂洛)065)  의 연원(淵源)을 따라 연구했다. 본조의 선현(先賢)에 있어서는 이 문순공 황(李文純公滉)을 평생 사법(師法)으로 삼았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는 각기 그 도리를 다하여 모두 모범이 될 만하였고, 두 조정에서 받은 예우는 멀리 천고에 뛰어 났으며, 성의와 지혜를 다해 들어가서는 도덕(道德)을 논하고 나와서는 임금의 계획을 도우면서 미상불 옛날 선철왕(先哲王)이 되기를 임금에게 요구하였다.
그가 진퇴를 할 경우에는 또 반드시 시세를 생각하고 의리를 헤아린 다음에야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누차 조정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끝까지 오랜 기간 머무르지는 않았으며, 그의 언론은 차분하면서도 명확하여 모난 데가 없었다. 일을 대해서는 올바르고 적절하게 처리할 뿐 이해를 돌아보지 않았고, 특히 사정(邪正)의 변별에 엄절하여 끝내는 사후에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송시열과는 동종(同宗)인데다 또 중표 형제(中表兄弟)가 되고 함께 김장생·김집(金集) 부자를 사사(師事)하여 덕망(德望)이 서로 엇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양송(兩宋)’이라 칭하였고 학자들은 그를 존경하여 ‘동춘당 선생(同春堂先生)’이라고 하였다.
금상(今上) 경신년에 장곡강(張曲江) 고사(故事)066)  를 적용하여 관원을 보내 그의 묘소에 제사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추증하라고 명하였다.【송준길이 기축년 초에 임금을 모시고 강학할 때, 글뜻을 분명하게 아뢰고 예의에 익숙하니, 함께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너나없이 다들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였다. 조경(趙絅) 역시 그 자리를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복공(愚伏公)이 전에 ‘내가 송 아무개라는 사위를 두었는데 그 사람이 매우 어질다. 반드시 장차 크게 성취할 것이다.’고 하더니만, 지금 보고 나니 우복공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말할 만하다."고 하였다. 우복은 곧 정경세의 호이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준길의 친우 이유태(李惟泰)가 소를 올려 조경을 몹시 심하게 논척하였는바, 그 상소에 "경서(經書)의 가르침을 견강부회하여 간사한 말을 얼버무리고 꾸며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병술년   강옥(姜獄)067)  때 소를 올려 영합(迎合)한 일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조경은 준길 등의 뜻도 유태와 더불어 마찬가지일 것으로 의심을 하였는데, 준길이 정유년에 조정에 나아갔을 때 조경과 담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끝까지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정두경(鄭斗卿)이 조경과 문자(文字)로써 평소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준길을 방문하여 그의 어질다는 것을 극구 말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하려 하였으나, 준길은 웃기만 할 뿐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태가 소를 올려 조경을 논척하고서부터 상은 유태가 강옥(姜獄)을 두둔하고 나서는 것을 꺼리어 오랫동안 수용(收用)하지 않았는데, 송시열이 그의 어짐을 극력 천거하면서 "이유태의 상소 내의 여덟 자는 강씨를 위해서도 아니고 또한 그 혼자만의 견해도 아닙니다. 신 등의 의견도 모두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비로소 불러들였고, 조경은 이로 말미암아 준길 등에게 원망을 품더니, 후에 마침내 윤선도의 뒤를 이어 글을 올려 공박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30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註 060] 부옹(婦翁) : 아내의 친정 아버지.[註 061] 도헌(都憲) : 사헌부 대사헌.[註 062] 총재(冢宰) : 이조 판서.[註 063] 고명(顧命) : 임금의 유언.[註 064] 천조(天曹) : 이조.[註 065] 염·낙(濂洛) : 염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의 고향인 염계(濂溪)를 뜻하고, 낙은 정호(程顥) 형제가 살던 낙양(洛陽)을 가리킴. 이들은 성리학(性理學)으로 대변되는 송대(宋代) 학풍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진다.[註 066] 장곡강(張曲江) 고사(故事) : 장곡강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상(名相) 장구령(張九齡)을 가리키며, 곡강은 그의 고향이다. 일찍이 그가 현종에게 "안록산(安祿山)은 모역(謀逆)할 상(相)이 있으니, 지금 그에게 죄가 있을 때 처단하여 후환을 끊어야 합니다." 하였으나 현종은 그 말을 듣지 않았는데, 후에 안록산의 반란으로 현종이 촉(蜀) 땅에 피난가 있으면서 전에 장구령이 하던 말을 떠올리며 눈물을 떨구고는 관원을 보내 그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는 한편, 그 가족들을 후하게 보살핀 일이 있다. 《당서(唐書)》 권126.[註 067] 강옥(姜獄) :  소현 세자빈 강씨의 옥사를 말함.

 

살펴보건대, 송준길·송시열 등은 평소부터 존주(尊周)의 의리를 지닌 까닭에 모든 소장(疏章)에 청국(淸國)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고, 전후로 벼슬에 제수하는 교지(敎旨)에도 조정이 연호를 쓰지 말도록 허락을 하였다. 그러나 송준길은 그 고대(高大)하여 행하기 어려운 설(說)에 【토복(討復)의 일을 가리킴.】  대해서는 또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승지와 사관만을 남게 한 뒤 함께 대계(大計)를 의논하였으나, 사관더러 의논한 내용을 쓰지 말라고 명하신 까닭에 그 내용이 끝내 전하지 않는다.
또 경연 석상에서 소매 속에 차자를 넣어 가져가 올리면서 제주(濟州)로부터 사신 한 명을 보내 천조(天朝)068)  에 통문(通問)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주씨(朱氏)의 일맥(一脈)이 아직은 남쪽 끝에 남아 있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이외 궁궐에 관계된 일로 아무나 말하기가 어려운 것들에 대해서도 모두 차자를 품속에 지니고 들어가 비밀히 아뢰면서 꺼리는 바가 없었는데, 상께서 또한 흔쾌히 가납(嘉納)하시고 양궁(兩宮)이 더욱 화기애애하여 끝까지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으니, 군신간의 뜻이 들어맞는 정도가 이러하였다.
그가 이정(李楨)·남(枏)069)  을 논한 일은 특히 후세의 귀감이 되므로, 여기에 함께 추록(追錄)한다.
그의 정유년 【8월.】  차자에 말하기를
"신이 《고려사》를 보니, 당나라 명황(明皇)이 촉(蜀)으로 피난했을 때 고려가 사신을 보내 육해(陸海) 수만 리 밖을 갖은 고생 끝에 가서 안부를 물으니, 명황이 몹시 반기면서 시를 지어 보냈고, 송나라가 고려 쪽으로 남도(南渡)하여 금(金)에게 눌리고 있을 때에도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물어 오랑캐의 정세를 통지하였습니다. 이 일이 오늘날까지 사가(史家)들의 미담이 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정이 3백 년 동안 명나라를 섬겨 온 그 정리와 의리에 대해서야 말할 필요가 없더라도 신종 황제가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만큼은 천지개벽 이래로도 서적에 유례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선조 대왕께서 말씀하신 ‘의리로는 군신(君臣)이지만 은혜는 부자(父子)나 마찬가지이다.’는 것이야말로 진정 통절한 얘기입니다.
아, 하늘이 벌을 내리어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어찌 차마 말을 하겠습니까.
저으기 듣건대, 제실(帝室)의 주자(胄子)가 아직 광동(廣東)·복건(福建)의 사이에 살아 남아 있다고 하니, 천하의 대통(大統)이 송두리째 위적(魏賊)에게 도둑질 당하지는 않은 셈인데, 우리 나라는 까맣게 모른 채 서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는 지가 지금까지 여러 해입니다. 비록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기는 하나, 고려 조정이 당(唐)과 송(宋)에 안부를 물은 것과 비교할 때 어찌 크게 부끄러운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실로 충신·의사들이 자나깨나 애를 태우며 성명께 깊이 바라고 있는 것이고, 우러러 생각건대, 성상께서도 어찌 하루라도 이 마음을 잊으셨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선대왕(先大王)께서 늘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문안을 보낼 방도를 모색하시곤 하였으며 또한 일찍이 누차 시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따라 이어 공을 도모하는 일에 분발하여 밤낮으로 천하에 일이 있게 될 날을 기다리시고, 저들의 형세도 이미 하늘에게 싫증을 받았으니만큼 실로 오래가기 어려운 조짐이 있으니, 비록 이해(利害)로써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도리로서는 어찌 조기에 중원(中原)의 사정을 알아내어 미리 손을 쓰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저으기 들으니, 중국 조정의 백성과 선비로서 우리 나라 사람을 만나는 자는 반드시 눈물을 떨구면서 말하기를 ‘대명(大明)의 멸망은 전적으로 금주(錦州)의 함락 때문이고 금주의 함락은 오로지 너희 나라의 정예포(精銳砲) 때문이었다.’고 한다 합니다. 신이 늘 이에 생각이 미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초(楚)가 비록 세 집밖에 남지 아니해도 진(秦)를 멸망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초(楚)일 것이다.070)  ’ 하였는데, 이는 원통함이 심하여 앙갚음을 반드시 하리라는 말입니다. 아, 이것은 무엇보다도 두려운 일입니다.
신이 들으니, 제주(濟州) 한 도(島)는 남쪽 바다 가운데 외부와 차단되어 있어서, 무릇 행상(行商)하는 중국 선박으로 해외(海外) 제국에 왕래하는 자들이 대부분 제주를 지나서 가다가 해풍을 만나 해안에 정박한 채 며칠씩 발이 묶이는 경우가 흔한데 그곳을 지키는 신하가 그 난처함을 염려하여 그때마다 돌아가도록 내보낸다고 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를 인하여 수를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제주는 또 지역이 멀고 바다가 격해 있으니 일과 기틀에 비밀이 유지될 수 있어 소문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쪼록 우선 재주와 성의를 겸비하고 충성과 신의가 믿을 만한 시종신(侍從臣) 한 사람을 선택하여 제임(濟任)을 제수하고 그로 하여금 요모조모로 계획을 세워, 시간을 한정하지 말고 기필코 그 수로(水路)를 통하게 한 다음 조정에서 뒤이어 사신을 보내면, 우리 조정 군신 상하의 수십 년 쌓인 통절하고 억울한 성의를 혹시 하루 아침에 천조에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우선 수로를 뚫으라는 것이 만약 혹시라도 불리하여 청인(淸人)의 지역에 표박(漂泊)하게 되면, 반드시 의심과 힐난이 벌어져 무사하던 중에 화를 돋울 것이니, 어찌 무겁고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은 아무래도 제주 목사가 어떻게 조화(造化)를 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별도로 기계(奇計)를 쓸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단지 행자(行資)만 마련하여 배에 실어 떠나 보내면서 조촐하게 공문(公文)을 만들어 마치 양호(兩湖)에 관용품(官用品)을 판무(販貿)하는 자처럼 꾸며 일행(一行)이 믿게 만들고, 중국 조정에 통문(通文)하는 글의 경우에도 제주 목사의 문자(文字)를 쓰되 다만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우선 통로(通路)를 만든다.’는 뜻만을 언급하여, 눈에 띄지 않도록 단단히 싸매고 꼭꼭 숨겨 지니게 함으로써, 설혹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누설함이 없게 하면, 성사가 비록 되지 않더라도 그냥 바다를 표류한 행상과 다름이 없으므로 틀림없이 다른 걱정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밖에 행인(行人)을 고르는 일과 저곳에 도착하여 임기응변하면서 중국의 사정을 탐지하는 등의 일은, 모두 제주 목사가 잘 생각하여 적절하게 처치하는 데에 달려 있을 따름이지, 일일이 먼데서 헤아리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요새 듣건대, 제주 목사의 임기 만료가 가깝다고 하니, 이번에 가려뽑는 명을 인하여 은밀히 지휘를 내리신다면 더욱더 자취가 없을 듯합니다. 성명께서는 심사숙고하시어 재처(裁處)하소서."
하였다.
그의 기해년 【7월.】  소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자(慈)’이고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효(孝)’인데, 자효(慈孝)의 도리는 천성(天性)에 뿌리박히고 본심에서 우러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힘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어야 될 법하나, 세도가 떨어지고 풍속이 변질되어 더러 효도에 결함이 있거나 자애 또한 무너지게 되는데, 이것을 보통 사람이야 본디 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제왕가(帝王家)에 이 우환이 유난히 많은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정세(情勢)가 쉽게 막히고 참소와 이간질이 쉽게 기회를 타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제궁(諸宮) 사이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알랑거리며 일을 하는 자는 모두가 환시(宦寺)와 부인(婦人)들인데, 이 자들의 성품이 대부분 음험하고 사특하며 교활하고 약삭빨라, 간사한 심보로 제몸만을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좋아하며 재앙을 내심 즐거워하면서, 효도와 자애가 무엇인지와 예의와 의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오직 저것은 저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힘을 나누어 각립(角立)하여, 많고 적음을 다투고 겨루려는 생각만 가집니다. 그리하여 은혜와 원망이 그들의 가리키고 돌아보는 데에서 생겨나고, 이익과 해로움이 그들의 향배(向背)에 따라 결정되며,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여,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수만 가지 정상으로 혹은 격동시켜 원망하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으름장을 놓아 두렵게 만들기도 하니, 자칫 혹시라도 귀를 기울이어 듣고 믿는 날이면, 스스로 불효에 떨어지고 어버이를 부자(不慈)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역시 군덕(君德)이 어떤가를 볼 따름입니다. 임금이 진정 자기 몸을 올바르게 하고서 상대를 거느린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위로 두 자전을 모시면서 정성과 예의를 빠짐없이 다하여 자·효(慈孝)에 이간(離間)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 이미 지극하다.’고 여기신다면, 이는 효자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고, 대왕 대비전에 있어서 그야말로 이른바 의(義)를 인하여 은혜를 융숭하게 한다는 것이, 실은 소인과 여자들이 손쉽게 틈을 엿보아 말썽을 자아내는 곳이 됩니다.
신이 삼가 전대(前代)의 일을 살펴보건대, 위로 자친(慈親)이 계시고 아래로 효사(孝嗣)가 있는데도 못된 환관이나 참소하는 궁첩이 꾸며낸 말에 홀려 그 효도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이는 비록 성명에게 염려되는 바야 절대로 아니기는 해도 내심 우려를 갖다보니 또한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역(大易) 가인(家人)의 뜻을 거울삼고 《소학(小學)》 명륜(明倫)의 가르침071)  을 본받아,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엄격하고 집안을 바루는 일에 근신하는 한편, 더욱더 성의와 사랑을 이르게 하고 더욱더 효도와 공경을 독실히 함으로써, 좌우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양궁(兩宮)의 자애와 효심에 이간이 없으니 우리들의 참소와 이간질이 그 사이에 행해질 수가 없다.’는 점을 환히 모두 알게 하고, 아울러 그 효도와 자애를 성취시키는 자는 안전함을 얻고 둘 사이에 틈을 만드는 자는 죄를 얻는다는 것을 보이신다면, 자연히 음험·사특한 자가 이간하여 어지럽히는 걱정이 없게 되어 효도에 부족함이 없고 인의(仁義)가 극진하며 사전(四殿)에 화기가 넘치어 만복(萬福)이 모두 이를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구족(九族)을 친목(親睦)하는 것이 보통 사람에 있어서야 두말할 필요없이 아름다운 일이지만, 제왕가에 있어서는 더욱더 성덕(盛德)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인께서 ‘윤리(倫理)를 바루고 은애(恩愛)를 돈독히 하라.’ 하신 가르침에 윤리를 바루는 일이 은애를 돈독히 하는 것보다 앞에 있으니, 그 깊은 뜻을 떠올릴 수 있으며, 윤리를 바로잡지 못하고서도 은애를 돈독하게 해낸 경우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말세에 있어서는 사변이 다단하니, 모든 언행을 더욱더 심장하게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만일 단지 친애(親愛) 만을 위주로 하고 다시 예의(禮儀)로써 마름질을 아니하여 그대로 무한히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 친애한다는 것이 그저 화(禍)를 기른 셈이 될 뿐입니다.
신이 장로(長老)에게 듣건대, 우리 세종 대왕께서 광평 대군(廣平大君)이 일찍 요절한 것을 슬프게 여기어 그의 아들을 궁중에 머물려두고 양육하였는데, 문묘(文廟)072)  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 즉시 밖에 내보내라고 명하셨고, 선조 대왕께서는 여러 왕자나 왕손이 계자(啓字)073)  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니, 그 깊고 원대하신 계산이야말로 후세에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궁금에 관한 일은 진정 바깥 사람이 감히 알 바 아니기는 하나, 근일 이래 바깥 의논이 쑥덕공론을 하면서 모두들 ‘두 왕자 및 그의 부인들이 대왕 대비전에 밑도끝도없이 드나들며 여러 날을 유숙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로 인해 양전(兩殿) 사이에 잡스런 얘기가 오가게 만들었으며, 뿐만 아니라 인평 대군의 두 아이가 선왕조 때부터 궁중에 남아 자랐는데 그 형이 지금 흉복(凶服) 중에 있는데도 거침없이 출입을 하니, 궁중 밖의 말이 궁중 안에 들어가고 궁중 안의 말이 궁중 밖에 새나가는 것이 혹시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을 하니, 신은 가슴이 미어지고 억장이 무너짐을 누를 수 없습니다. 일찍이 탑전에서 그 단서를 슬쩍 말씀드리기는 하였으나, 또한 감히 그 소회를 모두 털어놓지는 못했습니다.
대체로 형제를 나와 한몸으로 여기고 형제의 아들을 나의 아들처럼 여기는 일이 선왕(先王)에게 있어서 진정 성대한 덕이자 지극한 행실로, 삼대(三代)074)  이 후 역사에서 찾아보더라도 그만한 경우가 실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의 경우는 이미 형제도 없고 또 아직은 세자도 없어 형세가 외롭고 위태하니, 안팎에서 걱정하고 두렵게 여기는 점이 그 친척 사이에 친분 관계는 멀어지고 혐핍(嫌逼)의 정도가 깊어지며, 선왕조 때와 비교할 때 또 똑같지 않은 면이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궁중에 머물려두고 양육한 사람이 이미 장성한 나이가 되었다니, 전하의 궁중에 어찌 타인(他人)을 더이상 붙여두어 화기(禍機)를 빚어냄으로써 충신·의사로 하여금 감히 말은 못해도 감히 걱정을 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맑은 아침이나 조용한 밤중에 한번 깊이 생각을 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말세에 사고(事故)가 다단했음을 떠올리고 세종(世宗)과 선묘(宣廟)의 깊은 계산을 몸받되, 그 중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점은 또한 임시방편으로 선처하여 점차 올바르게 귀결시킬 방도를 생각하시고, 그 중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점은 어서 부디 자전께 여쭈어 차근차근 상량하고 의리로써 절제하시는 한편, 보잘것없는 소인(小仁)에 구애하지 않음으로써 시종일관 친애하는 방도를 꾀하소서.
또한 신이 삼가 듣건대, 조종조 때에 여러 왕자나 왕손이 나이가 장성하면, 그 족속 가운데 남을 가르칠 만한 자를 별도로 명하여 교도(敎導)를 위탁함으로써 그 효과를 책임지웠고, 또 종학(宗學) 제도를 밝히어 종부시의 관원을 극선(極選)하고 그로 하여금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워 수시로 강학하고 토론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친들 중에 학문이 성취되고 행실이 높아 세인의 칭찬을 받은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조종의 고사에 따라, 나이가 장성한 왕자는 밖에 있는 사부(師傅)에게 나아가 배우도록 하고, 아울러 종학의 법제를 거듭 밝혀 겉치레가 되지 않고 착실하도록 힘쓰게 함이 진정 사의(事宜)에 맞을 것입니다.
신의 이 말은 진정 국가의 막중 막대한 일이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따끔히 깨달으시어 다시금 도모하시고 혹시라도 시일을 지체하므로써 후회를 남기지 마소서. 그렇게 되면 종묘 사직의 더없는 다행이자 신민(臣民)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전후 아뢴 바를 모두 친필로 써서 올렸는데, 이는 밖에 누설되게 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경상도 각 고을에 7월 이후로 가뭄이 너무도 심하여 11월 이전까지 눈이 내린 일이 없었다.

 

12월 6일 정미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추함(推緘)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우의정 이경억(李慶億)이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재주와 덕망이야말로 재상에 적합하다. 어찌 이처럼 겸손해 하는가. 어서 나와 치도를 강론함으로써 상하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경억이 다섯 번 소를 올리며 극력 사직을 한 뒤에 나와서 사은 하였다.

 

12월 7일 무신

왕세자가 궁관(宮官)을 보내 찬선 송준길의 상(喪)에 조문을 하고, 또 계속해서 궁관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우빈객으로, 이익상(李翊相)을 대사간으로, 이홍연(李弘淵)을 승지로, 이당규(李堂揆)를 부수찬으로, 신후재(申厚載)를 필선으로 삼았다.

 

12월 8일 기유

집의 임규(任奎)와 장령 김수오(金粹五)가 모두 ‘전계(傳啓)하고 나서 간통(簡通)을 개율(改律)075)  한 것은 대각의 체례에 어긋난 점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0일 신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여성제(呂聖齊)를 대사간으로, 이익상(李翊相)·황준구(黃儁耉)를 승지로, 이지무(李枝茂)를 호조 참의로, 정재희(鄭載禧)를 집의로, 신후재(申厚載)를 장령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삼았다.

 

지평 박태상(朴泰尙)이 신병을 끌어대며 체직을 간청하고, 또 아뢰기를,
"《중용(中庸)》 구경(九經)의 항목에 ‘대신(大臣)을 공경하라.’는 것과 ‘뭇 신하를 몸받으라.’는 것이 있는데, 신이 저으기 전하께서 대신을 대우하시는 것을 엿보건대, 그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극진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대신의 직임은 조석으로 훈계를 올리어 임금의 덕을 바로잡아 보필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문서를 받들어 이행하거나 자잘한 일을 건의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 대신이 진언을 하면 전하께서 가상히 받아들여주지 아니하시고 누차 ‘말해봤자 소용없다. 나는 내 방식대로만 하겠다.’고 여기시는 기색을 보이시는데, 일체가 되어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로서의 도리는 이와 같지 않을 듯 싶습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국가가 공경(公卿)의 보필을 하는 신하를 둔 것이 어찌 아첨하고 순종하도록 한 것이겠는가?’라는 것이야말로 움직일 수 없는 확론(確論)이니만큼, 임금이 된 자로서는 빠짐없이 말하도록 인도하여 임금을 도와 성취시키는 보람을 책임지우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아, 군신 상하 사이에 정의가 미덥지 못하고 막혀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목전의 큰 걱정이 되고 있습니다. 근래의 일로 말씀을 드리자면, 이단하의 과실은 문자(文字) 사이의 세세한 잘못일 뿐인데 전하께서는 대뜸 당론을 부식(扶植)한 것이라고 의심을 하시고 옥리(獄吏)에게 내려 국문을 하라는 분부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단하가 국가의 문장을 맡아 짓는 신하로서 한번 상의 뜻에 맞지 않자 느닷없이 옥에 가두어 다스리니, 이는 진정 대성인으로서 포용하는 도량에 흠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정원이 반려하면서 아뢴 것과 대간이 환수를 청한 것은 그 의도가 지나친 거조를 바로잡으려는 데에 있는데도 또 ‘거짓을 꾸며 속이려 든다.’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러고서도 상하가 서로 미덥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분함에 치우쳐 실정(失正)을 하시고 만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체로 대신은 임금의 다리와 팔이고, 정원은 임금의 목구멍과 혀고,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입니다. 세 가지가 가로막혀 통하지 않게 되면 그 몸이 어떻게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의 내용은 내 이미 모두 알았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임자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서를 올리니, 상이 안심하고 몸조리를 하라고 하였다.

 

이단하를 석방하였다. 대간이 달을 넘기도록 쟁집을 하였으나 끝내 되지 않았는데, 이때 와서 고신(告身)을 모조리 뺏는 벌로 조율(照律)하여, 석방이 되었다.

 

12월 13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얼마 전에 충청 감사 남이성(南二星)의 계청으로 인하여 재읍(災邑)의 재해를 당한 면(面)에 거주하는 백성의 신역을 그로 하여금 구별하여 적당히 줄이도록 하였는데, 포보(砲保)에 대해 줄일 베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타도(他道) 재읍(災邑)의 예에 따라 3필을 납부하기로 되어 있는 부류에 대해 그 중 1필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각도와 각사의 노비 신공 가운데 경술년 이전 것을 탕척시킨 뒤 신해년의 유망(流亡)·지징무처(指徵無處)에 대해 조사해 뽑아서 탕척시키라는 일도 일찍이 결정을 내려 분부하였습니다. 그 조사하여 밝힌 것이 이제서야 올라왔는데, 공목(貢木)이 2백 21동, 공주(貢紬)가 12동 30필, 공미(貢米)가 9백 90석입니다. 이미 조사를 하였으면 불가불 탕감을 해야 합니다. 또 무녀세(巫女稅)·염세(鹽稅)·장인세(匠人稅)·선세(船稅) 가운데 신해년 이전의 미수분(未收分)을 조사하여 탕척하라는 일도 전에 이미 결정을 하였는데, 그 수량도 2백 30동입니다. 한꺼번에 똑같이 탕척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숙천(肅川)의 해창 색리(海倉色吏)가 각곡(各穀)을 이전하여 나누어 줄 때에 산간 고을에서 받기를 원하지 아니한 곡물 3천여 석을 중간에 스스로 가져다 판매를 하다가 실리(失利)하였는데 지금 갚을 방도가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간리(奸吏)를 전례에 따라 정배하는 것만으로 그칠 수가 없으니, 마땅히 별도로 처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색리는 효시하고 그 곡물은 탕척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여성제가 추감(推勘)을 받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15일 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6일 정사

민유중(閔維重)을 형조 판서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익(李翊)을 이조 참의로, 김우석(金禹錫)을 병조 참의로, 최일(崔逸)을 호조 참의로, 여성제(呂聖齊)를 형조 참의로, 김휘(金徽)를 도승지로, 이혜(李嵆)·박세견(朴世堅)을 승지로, 조원기(趙遠期)를 필선으로, 황준구(黃儁耉)를 황해 감사로, 구일(具鎰)을 경기 수사로, 유병연(柳炳然)을 남병사로, 유비연(柳斐然)을 평안 병사로, 노정(盧錠)을 통제사로 삼았다.

 

정언 홍만종(洪萬鍾)·이일정(李日井) 등이 아뢰기를,
"작년에 조정에서 경기 각 고을에 분부하여 각종 방출곡을 정해진 수량대로 거두어들이게 한 뒤에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창고 조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각 고을이 대부분 수량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이미 경중을 나누어 죄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들으니, 그중에는 관청에서 쓸 것을 가져다 채워놓거나 혹은 석수(石數)를 나누어 만든 다음 창고로 옮겨다 채워서 조사할 때 죄를 면하려고 한 일이 빈번히 있었다고 합니다. 올 가을에 이르러서 지난해 받아들이지 못한 방출곡을 연기시켜 받으라는 명령이 있게 되자, 허위로 기록했던 고을은 정해진 한도 외의 것을 추징해 받아 축난 수량을 채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민가에 아무것도 없는 이런 때를 맞아 평년과 다름없이 마구 독촉하여 조정의 은혜로운 뜻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빈궁한 백성들이 국가를 원망하게 하였습니다. 당초 창고 조사를 할 때 허위로 기록한 수령은 감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보고하게 해서 죄를 주고, 허위로 기록된 곡물도 조사해내게 해서 지난해 받지 아니한 예에 따라 똑같이 연기시켜 받아들임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 대간의 계사를 살펴보니,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엄명하게 조사를 행하고 사실을 캐내 보고하게 해서, 여쭈어 처리할 수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2월 17일 무오

대사헌        민정중이 고향에 있으면서 신병을 이유로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근일 군신 상하간에 의심과 막힘이 극에 달했습니다. 대신이 아뢴 것이나 대간이 쟁집한 것이나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올바르게 시정을 하려는 격언(格言)인데도 일체 물리쳐 배척하시고 조금도 따라주지 않으시면서 혹은 그 말로 인하여 더욱 악화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모두 한때의 희로가 격발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라의 큰 체통만큼은 생각하시지 않는단 말입니까.
옛날 사람이 임금을 ‘머리’에다 비유하고 대신을 ‘가슴’에다 비유하고 대간을 ‘이목’에다 비유하였는데, 지금 ‘머리’로서 그 ‘가슴’과 ‘이목’을 스스로 의심을 하면, 장차 무슨 수로 그 몸을 보호하여 무사하기를 보장하겠습니까. 임금과 신하는 부자(父子)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아비로서 그 자식을 의심하여 사사건건 의심을 하고 누가 됐건 의심을 함으로써 발 한번 까딱하고 입 한번 뻥긋함이 모두 의심을 받아 죄에 걸리게 되면, 장차 무슨 수로 그 친(親)을 다하고 그 정(情)을 통하겠습니까.
얼마 전 이민적의 소장은 당초 깊은 뜻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그 내용에 대해 지나치게 의심을 하시고 위엄스런 견책을 가하셨기에 지금까지 뭇사람들이 그를 억울하게 여기고 있고, 근래에 또 이단하가 ‘응제 문자(應製文字)076)                  로써 느닷없이 나국의 명을 받았기에 원근에서 전해 듣고 놀라 탄식하면서 더욱 성조(聖朝)를 위해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조제(吊祭)하는 글은 죽음을 측은히 여기는 것이 그 뜻이니만큼, 그가 ‘운운’한 서너 구절은 지난 일을 추서(追敍)하여 위엄과 은혜가 똑같이 행해지고 대우가 변하지 않았음을 보인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비록 그 하자(下字)가 딱 들어맞지 아니하고 어세(語勢)가 중하게 흐르기는 하였으나, 그 사이에 다른 뜻이 뭐가 있기에 기어이 국문을 하여 실정을 캐낸다는 것입니까. 더구나 단하는 평소에 가훈(家訓)을 따라 입심(立心)이 치우치지 않았고, 늘 대역(大易)의 포황(包荒)의 뜻077)                   외워 벗이나 동료에게 면계(勉戒)해 온 것은, 함께 조정에 있는 자들이 모두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의심으로써 죄를 얻게 되고 죄도 그 본정이 아니니, 더욱이 어떻게 인심을 승복시키고 세교(世敎)를 면려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과 신하 사이의 계합(契合)이 시종일관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 드리자면, 예전 역사에서 몹시 기롱(譏弄)한 것이자 충신·지사가 함께 탄식하는 것이며 또한 도의(道義)로써 뜻이 통하고 지심(知心)078)                  으로써 허여한 정도가 송준길이 당대에 있어서만큼 대단하였는데도 말 한마디가 흡족하지 못해 버리듯이 팽개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의심부터 앞세우고 그 말을 살피지 아니하며 말에다 화를 내고 그 본심을 살피지 아니함으로써 스무 해 계속된 빈사(賓師)의 예우를 하루아침에 물리쳐 끊어버리면서 어렵게 여김이 없으시니, 글쎄 전하께서 평소 준길에 대해 뜻이 통하고 대우해주신 것이 웬일이었으며, 서로 마음을 알아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도 웬일이었습니까. 신은 천하 후세에 전하의 집덕(執德)이 한결같지 않았음을 쑥덕거리지나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준길은 일흔 나이의 기구(耆舊)079)                  이자 세 조정을 섬긴 유현(遺賢)으로서 생의 막바지에 병이 위독하여 조석간의 목숨이 다해가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몹시 노하시어 보살피지 아니하시고, 뭇 신하들은 위엄이 무서워 알리지도 아니하니, 설혹 훗날에 성심(聖心)이 깨달으시어 뒤늦게 후회와 아쉬움을 느끼신들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국가의 큰 걱정거리는 상하간에 의심을 하고 정의가 막힌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그 신하를 의심하여 장차 더불어 나랏일을 함께 꾸려나갈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신하들 역시 임금이 의심을 할까 의심하고서 제 마음을 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내 이미 잘 알았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한시바삐 올라와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8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마도 태수(太守) 평의진(平義眞)이 예조에 글을 보내 왜관을 이전해 주기를 청하였다.

 

12월 19일 경신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김휘(金徽)를 대사간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도승지로, 민시중(閔蓍重)을 승지로, 이유상(李有相)을 부응교 겸 필선으로 삼았다.

 

집의        정재희, 지평        박태상 등이 아뢰기를,
"참하(參下) 분관(分館)은 곧 새로 벼슬에 나서는 이의 첫 과정으로, 예로부터 취사를 할 즈음에 반드시 한결 상세하고 신중하게 한 것은 바로 그 선발을 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괴원(槐院)에서 간택을 할 때 본원의 관원들이 저마다 사의(私意)에 맡기고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거조가 엉뚱하고 취사가 분명치 않았으므로,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고 사람들의 비난이 자자합니다. 결코 그때 천거된 사람을 그대로 쓸 수 없으니, 그 당시 상박사(上博士) 및 장무관(掌務官)을 모두 파직시키고, 그들을 다시 분관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내용이 흐릿하여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답하니, 태상·재희 등이 이 일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토록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충청도 재상 경차관(忠淸道災傷敬差官) 유상운(柳尙運)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관할하고 있는 18개 고을 중에 영춘(永春)·단양(丹陽)·청풍(淸風)·연풍(延豊)·청산(靑山)·황간(黃澗)·회인(懷仁)·보은(報恩) 등 고을은 산이 높고 들이 좁습니다. 그래서 목면이 제대로 선 밭이 적고 벼의 이삭이 패지 못한 논이 많은가 하면, 심지어 기장·조·팥·콩도 거의 다 말라버렸습니다. 그러니 8개 고을의 모든 가포와 신역을 적당하게 견감시키고 죽어버린 포병의 보인들도 마땅히 가포를 감해 주어야 이웃과 일가붙이가 보전키 어려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다른 도의 재해 고을의 예대로 포병 보인의 군포(軍布)는 3필 중 1필을 감해 주고 제반 가포와 신역은 3분의 1을 감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1일 임술

도목대정을 하였다. 조원기(趙遠期)를 보덕으로, 김만중(金萬重)을 부교리로, 박순(朴純)을 장령으로, 정중휘(鄭重徽)를 필선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사서로, 박진한(朴振翰)을 충청병사로, 이상경(李尙敬)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이때 무장(武將) 가운데 홍우량(洪宇亮)이 청백하기로 가장 이름이 나서 곤수의 자리에 올랐고, 상경 또한 꽤 염근(廉謹)하다고 일컬어졌다.

 

집의 정재희 등이 다시 괴원의 상박사·장무관을 파직하고 다시 분관하자는 계청을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도 해남(海南)·능주(綾州) 등 고을에 우레와 번개가 크게 치고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다.

 

12월 22일 계해

계속해서 도목정(都目政)을 하였다. 민시중(閔蓍重)을 대사성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승지로, 이익상(李翊相)을 이조 참의로, 이혜(李嵆)를 예조 참의로, 신후재(申厚載)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3일 갑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지평 안후태가 추감을 받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24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5일 병인

영의정 정태화가 여덟 번째 사직서를 올리니, 승지를 보내 돈독히 유시하였다.

 

집의        정재희가 아뢰기를,
"장연 부사(長淵府使)        안명로(安命老)는 전에 변방의 수령을 지내면서 추문과 비방이 많았고, 호읍(湖邑)에 제수되었을 때는 유난히 청렴하지 못하다고 알려졌으며, 얼마 전 마관(馬官)에 임명되어서는 불법을 숱하게 저지르면서 버젓이 침학(侵虐)을 부렸으니, 자목(字牧)의 임무를 다시금 주어서는 안 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금림군(錦林君) 개윤(凱胤)이 졸하였다.
개윤은 성묘(成廟)의 왕자인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의 후손이다. 처음에는 영(令)에 봉해졌는데 뒤에 군(君)에 승격하여 품계가 1품에 이르렀다. 효종(孝宗) 경인년에, 역적 식(釴)이 신면(申冕)의 꾀를 써서 몰래 북정(北庭)080)  을 사주하기를 "김상헌(金尙憲) 등 산인(山人)이 정권을 쥐고 구신(舊臣)들을 모조리 내쫓고는 장차 상국(上國)081)  에 내통하려고 한다." 하자, 청주(淸主)가 크게 의심을 하여 연거푸 여섯 칙사를 보내 힐문을 하고 또 혼구(婚媾)082)  를 청하였다.
이때 큰 화란이 터지려 하여 나라 안이 흉흉하자, 이에 개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로 봉하여 보냈는바, 구왕(九王)이 【 즉 섭정왕(攝政王)이다.】 6만의 무리를 데리고 요동 접계(接界)에 나와 아내를 삼았다. 이때부터 개윤이 누차 사명(使命)을 받들어 연경(燕京)에 들어갔고, 구왕이 죽은 뒤 청국(淸國)이 그를 역률(逆律)로 논죄하니, 공주 또한 몰입(沒入)되어 번왕(藩王)에게 재가(再嫁)하였는데, 번왕이 죽자 공주가 본국에 돌아가게 해주기를 간청하였고, 돌아온 뒤 종신토록 녹을 지급하였는데, 이때 와서 개윤이 졸한 것이다. 상이 특별히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6일 정묘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전라 수사 민섬(閔暹)을 탐욕스럽고 백성을 학대한다는 이유로 논핵하여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27일 무진

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28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30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보덕 조원기(趙遠期)가 소를 올려 춘궁(春宮)의 강학을 권하고, 이어 원일(元日)083)   8잠(八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근본을 가다듬을 것[端本], 학문을 향상시킬 것[進學],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을 것[矯質],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을 삼가할 것[愼獨], 강학을 권장할 것[勸講學], 궁료를 친근히 할 것[親宮僚], 가까이 있는 자를 신중히 가릴 것[擇左右], 무익한 놀이를 없앨 것[屛翫好] 등 이었다.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이어 아뢰기를,
"오늘이 마침 양기(陽氣)가 처음 회복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조용히 재계(齋戒)하시어 성덕(聖德)을 함양하시는 동안에 필시 뜨끔하게 깨닫고 반성하여 무럭무럭 환히 드러남으로써 나날이 새로워지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위로 천심(天心)을 마주하여 성경(聖敬)이 나날이 향상됨으로써, 사의(私意)가 싹트는 것을 잘라내고 유약함이 잡아당기는 것을 끊어버리고, 항상 안씨(顔氏)의 거의[庶幾]를 보존하여 궁천(窮泉)의 묘면(眇綿)084)  을 장구하게 해나가면, 점차 질병이 없어지는 경사가 있게 되어 마침내는 태평을 이루는 즐거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칭찬하는 비답을 내리고 또 봄이 오는 즉시 올라오도록 명하여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각사(各司)에서 재감(裁減)한 물종(物種)을 복구시킬 것인지의 당부(當否)를 물었는데, 좌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큰 흉년이 들어 민력(民力)이 바닥났기 때문에 상공(上供) 물선(物膳)에 대해서도 모두 줄였습니다. 이 일이 비록 성덕(聖德)에서 비롯된 일이기는 하나, 언제까지고 그대로 줄인다는 것은 사체상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각사의 공물을 한결같이 전대로 줄이게 되면, 지탱하기 어려운 폐가 있을까 염려되니 변동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금년이 조금 풍작이라고 해서 모든 수량을 복구하게 되면 이 또한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가 아닌만큼, 무릇 상공(上供)에 관계된 것은 신 등이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으니 오직 성명께서 재량껏 처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각사의 물종에 대해서는 신 등이 수량을 참작하여 여쭈어 정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부득이한 것을 제외하고는 잠시 앞으로의 형편을 살펴가면서 복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이에 상공 물종 가운데 긴요한 것은 복구하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모두 원수(元數) 중에 절반을 복구하라고 명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각사 공물 가운데 비록 재감(裁減)을 하지 아니한 것에 대해서도 모두 분수(分數)를 줄여 급가(給價)하였으므로, 지금에 와서는 쌀이 천하고 물가가 치솟아 원망하는 말들이 꽤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사 공물 중에 재감한 것은 모두 절반을 복구하고 나머지 절반은 내년 가을이 되거든 다시 논의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만기가 제주(濟州)의 월령(月令) 진상 및 각사(各司)의 상납(上納) 물종 중에 견감한 것을 복구할 것인지의 여부를 계품하였는데, 우상 이경억이 아뢰기를,
"제주는 올해에도 흉작을 면치 못했으니, 복구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까지는 복구하지 말라."
하였다. 수항이 접위관(接慰官) 조사석(趙師錫)이 이제 내려갈 참인데 왜관 이전을 허락할 것인지의 여부를 강정(講定)하자고 청하여, 상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자 소견을 아뢰도록 하였는데, 수항이 아뢰기를,
"옮기기로 청하는 데가 만일 우리에게 긴요한 곳이 아닐 경우에는 허락을 해도 무방하겠으나, 만일 긴요한 곳일 경우에는 어떻게 허락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경억이 아뢰기를,
"저들이 수로(水路)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미 포구(浦口)를 팠다고 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허락을 해야 되는 형세이나, 허락을 하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약함을 보이는 일에 가까우므로 몹시 난처한 일입니다. 다만 차왜(差倭)가 늘 이 일 때문에 나오고 있으니 공억(供億)이 지탱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업신여기고 거만하게 구는 일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허락을 할 것인지 허락하지 않을 것인지 간에 속히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정지화가 아뢰기를,
"근래에 이 일로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신이 종일토록 곰곰 생각을 하였으나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요즈음 소요스런 일들이 너무 심하고 인심이 크게 변하였으니, 이로 인해 말썽이 생기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지중추부사 유혁연이 아뢰기를,
"저들이 말하는 왜관 이전의 지역이 순천(順天)·웅천(熊川)·거제(巨濟) 이 세 군데를 벗어나지 않는데, 순천을 허락하게 되면 호남(湖南)의 조운(漕運)하는 길이 끊어지고, 웅천이나 거제를 허락하게 되면 통영(統營)이 손발을 쓸 수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포구를 팠다는 얘기는 본디 믿을 수 없는 것임에야 어련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접위관으로 하여금 우선은 그들의 청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왜관에 대한 방금(防禁)이 점점 느슨해져 역관(譯官)이나 장사치들이 사사로이 그들과 서로 왕래하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누설하여 알리고 있습니다. 이는 변신(邊臣)이 제대로 엄히 금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생긴 일이니, 별도로 신칙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래 부사가 부산 첨사와 더불어 본디 일체로 주관을 해야 하나, 동래는 조금 먼 곳에 있어서 일에 따라 환히 살피기가 어려운 형편이고, 부산은 왜관과 가까이 있어서 무릇 작간(作奸)·범법(犯法)하는 자가 있으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니, 앞으로는 부산 첨사로 하여금 방금을 전담하여 날짜를 정해 시장을 열고, 제멋대로 왕래하는 자를 일절 통금(痛禁)토록 하되, 범금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 즉시 계문하여 효시하고, 첨사가 제대로 엄히 금하지 못할 경우에는 부사가 그를 규찰하여 논죄하라는 것으로 예식을 정해 행회(行會)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고(故) 참판 윤문거(尹文擧)가 돌림병에 걸려 죽었는데 그의 처(妻)도 사망하여 온 집안이 슬픔에 휩싸여 있으므로 수 개월 이내에는 장사지내기가 쉽지 않다 하니, 몹시 불쌍한 일입니다. 또 재신(宰臣)에 관계된 일이기도 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제급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올해의 농사가 작년에 비하면 조금 나은 듯하니, 무릇 재감(裁減)한 것들을 그 경중에 따라 예전대로 조금씩 복구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런데 경비(經費)가 바닥난 정도가 이미 막다른 지경이고, 내년의 걱정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상공(上供)에 관계된 물품은 당연히 여쭈어서 재량껏 정해야 될 것이고, 제사(諸司)의 각처에 진배(進排)하는 물종(物種)으로서 전량을 감했거나 적당히 감한 수량에 대해서는 당분간 내년까지는 그대로 줄이는 것이 진정 사의(事宜)에 마땅하니, 대신에게 물어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장차 헤아려 처리할 것이니, 사직하지 말고 몸조리를 하면서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수흥이 신병 때문에 면전에서 여쭈어 재감(裁減)한 일에 입대하지 못했으므로, 이 차자를 올린 것이다.

 

판윤 이완이 소를 올려 본직 및 수어사(守禦使)의 체직을 간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이완은 이름있는 아비의 아들로서 나이 스물 셋에 무과에 올랐고 낭속(郞屬)에 재임할 때부터 대신 이원익(李元翼)·신흠(申欽)이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많이 물을 정도였으며,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서관(西關)에 군대를 시찰하면서 그와 더불어 군사 기밀을 상의한 뒤 조정에 돌아와 그의 대장으로서의 재주를 극력 추천하였다. 이에 만포 첨사로 있다가 본도의 병사에 파격 제수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고, 그 뒤 여러 차례 승지에 제배되었다.
청인(淸人)이 서쪽으로 명(明)나라를 침범하려 하면서 우리 주사(舟師)085)  를 징발하니, 이에 임경업(林慶業)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이완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전함을 이끌고 부전(赴戰)하였는데, 먼저 비선(飛船)086)  을 보내 비밀히 천장(天將)087)  에게 알렸고, 급기야 천장과 맞닥뜨려 종일토록 교전을 하면서도 양쪽에 사상자가 없었다. 그러자 청주(淸主)가 크게 노하여 조칙(詔勅)으로써 여섯 가지 일을 나열하여 따지면서 힐난하기를
"이는 모두 너희 임금이 너희들과 함께 명조(明朝)에 통모(通謀)한 소치이다."
하고는 경업만을 억류시키고 이완은 동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인조조(仁祖朝) 때부터 이미 어영 대장에 제배되었고, 효묘(孝廟) 초기에 재차 제수되었는데, 군제(軍制)를 크게 변혁하여 번(番)을 나누어 궁궐을 호위하고 그 보인(保人)에게서 군량을 거둠으로써 당나라 때 부병(府兵) 제도의 옛뜻을 깊이 되살렸다. 구인후를 대신해 훈국(訓局)에 이임되어 관장하기를 16년 동안 하였으며, 효묘 말년에 송시열을 불러 오게 해서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이완에게 명하여 시열과 더불어 마음을 합쳐 함께 도모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완은 비록 상의 분부를 받들어 시열과 함께 깊이 결속을 하기는 했어도 또한 함부로 거창한 말을 내세우지 않고서 근본을 튼튼히 하여 기회를 기다리고자 하였다.
성품이 강직·엄격하고 혐의를 멀리하고 청탁을 거절하였다. 그가 사는 집이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과 서로 가까이 있었는데, 대장이 되어서는 마침내 집을 옮겨 살았고, 길에서 마주치면 대군이 서로 얘기를 나누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끝까지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은 바로 그의 종손(從孫)이 되는데 그 공주(公主)가 자전의 분부라 칭하면서 어떤 촉탁을 하였으나,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효묘께서 별도로 기거(起居)를 만들어 입시(入侍)할 때를 인해 일을 아뢰라고 명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남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정원을 경유하여 나아가 뵈어야 하지, 사사로이 뵙는 일은 감히 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형조와 한성부의 장관을 오래 지내면서 일처리가 공정·명확하여 하리와 백성들이 외복(畏服)하였으며, 누차 병조 판서에 제수되기까지 했으나 극력 사양하고 끝까지 나아가지 않으니, 사론(士論)도 그를 몹시 칭찬하였다. 이때 와서 노병(老病)으로 벼슬에 제배할 때마다 번번이 소를 올려 겸대직까지 아울러 사양을 하였는데, 상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 해에 돌림병으로 사망한 중외의 백성이 모두 2천여 명이었다.

 

3월에 동교(東郊)와 북교(北郊)에 두 진소(賑所)를 설치한 뒤로 5월 그믐날에 파할 때까지, 동교의 기민이 많게는 4천여 명, 적게는 2천 7백여 명이었는데, 진소를 파하는 날에 각기 쌀 1되 씩을 나누어 주었고, 그 가운데 특히 심하게 가난한 자에게는 좁쌀 한두 되를 더 주어서 보냈으며, 북교의 기민이 많게는 3천여 명, 적게는 2천여 명이었는데, 귀향하여 농사짓기를 자원하는 자에게는 식량을 주어 보냈다. 진소를 파할 때에 이르러 경외의 기민이 모두 9백여 명이었는데 이들에게는 각기 양자(糧資)를 계산하여 주었고 그밖에 의탁할 곳이 없는 거렁뱅이와 병으로 몸을 기동하지 못하는 자 및 돌림병을 앓고 있는 자가 도합 1천 1백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잠시 막사(幕舍)에 머무르게 하여 계속 죽을 쑤어 먹이다가 그 후에 파하여 보냈다. 두 진소에서 쓴 것이 쌀 1만 6천 3백 50여 석, 좁쌀 4천 3백 80석, 춘추모(春秋牟)088)   2천 9백 60석, 참밀 1백 30여 석, 대두(大豆) 7백여 석, 소금 1백 60여석, 은자(銀子) 8천 9백 70여 냥, 목면 37동, 베 18동 30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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