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4년 1673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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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유연이 전에 홍양(洪陽)을 맡고 있을 때 군포(軍布)를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2일 계유

오두인(吳斗寅)을 승지로, 김수오(金粹五)를 장령으로 삼았다.

 

원양 감사 이지익(李之翼)이 조정을 하직하니, 상이 그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본도는 땅이 척박하여 백성이 가난한데 경신년 이후로 흉년이 잇따라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이 아직 소생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을 무마해서 안정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니, 지익이 아뢰기를,
"감히 명하신 대로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월 3일 갑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지금 이렇게 신년 초에 신하들을 인접하셨는데, 옛사람들은 신년이 되면 으레 경계시켜 바로잡는 말씀을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과 같은 자는 본래 학식이 없으니 깨우쳐드릴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국가가 불행하여 전에 없던 큰 흉년을 잇따라 만난 탓으로 마치 큰 병란을 겪은 것처럼 광경이 참혹하니, 지금까지 지탱해 온 것만도 당초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사람의 정리상 잊기 쉬운 것이고 군신 상하가 그저 땜질하기만을 일삼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렇게 하는 일 역시 날이 갈수록 시들해지고 말 것입니다.
‘1년에는 1년 동안 할 공부가 있는 법이다.’는 선유(先儒)의 말이 있는데, 이는 학문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국사(國事)를 가지고 말할 때에도 역시 매년 더욱 면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형세를 보면 마치 물이 더욱 쏟아져 내려오는 것과 같은데, 이는 모두가 신하들이 형편없어 제대로 성휴(聖休)를 떠받들지 못한 탓이긴 합니다만, 상께서 책려하고 신칙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어쩌면 조금 소홀한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자(朱子)가 송 효종(宋孝宗)에게 고하기를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데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야말로 감개 무량한 심정에서 우러나온 절실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상께서 오래도록 건강이 좋지 못하셨으므로 아랫사람들의 구구한 근심이 정말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러다가 요즈음 다행히도 정상을 점차 회복하시게 되었는데,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유신(儒臣)을 인접하시고 때때로 경연을 여신다면, 성덕이 날로 새로워지는 아름다움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도 장차 흥기(興起)하는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우상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전하의 안색을 우러러 살펴보니 거의 완전히 정상을 회복하신 것 같습니다. 아직은 경연을 열 수 없다 하더라도 자주 소대를 내리시면 뭇 신하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마는 병 때문에 뜻대로 잘 안 된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지금 품정할 일이 있는가?."
하니, 병판 김만기(金萬基)가 인하여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한 뒤에 잇따라 흉년을 만난 탓으로 본조가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을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당초 설립할 때 정태화와 이완이 모두 온당치 못하다고 말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과연 허다한 폐단이 발생하고 있으니, 실로 선처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 일이 흡사 그릇을 다 만들었다가 깨뜨리는 것과 같이 되었으니 정말 애석합니다."
하였다.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아뢰기를,
"안동(安東) 사람인 고(故) 교리 이종준(李宗準)은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무오 사화(戊午史禍) 때 죽었는데, 뒤에 신리(伸理)되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추증(追贈)되지 않았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1월 4일 을해

송창(宋昌)을 헌납으로, 이유(李濡)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12회째 정사(呈辭)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월 6일 정축

상이 팔의 통증 때문에 뜸을 떴다.

 

1월 7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민시중(閔蓍重)과 이홍연(李弘淵)을 발탁하여 각각 호조 참판과 형조 참판으로 삼고, 정석(鄭晳)을 승지로 삼았다.

 

1월 8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9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완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상이 팔의 통증 때문에 연일 뜸을 떴다.

 

1월 10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1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접위관(接慰官) 조사석(趙師錫)과 충청 병사 박진한(朴振翰)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모두 불러 보았다. 조사석이 왜인과 문답할 말을 강정(講定)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제신(諸臣)에게 하문하니, 모두 아뢰기를,
"이관(移館)해 달라는 요청은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사석이 아뢰기를,
"왜인의 서계(書啓) 가운데 ‘북쪽을 대비하고 남쪽을 도모한다.[備北圖南]’고 한 말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저들이 만약 ‘똑같이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인데 북쪽 사람들의 말은 모두 곡진히 따라주면서 남쪽 사람들의 청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불균등하게 차별을 두는가.’라고 할 경우, 대답하기가 난처할 뿐만 아니라 모욕을 받을 단서를 열어주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 정축년 이후의 일을 왜인에게는 숨겼는가?"
하니, 동부승지 정석(鄭晳)이 아뢰기를,
"이원진(李元鎭)이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있을 때, 왜인이 묻기를 ‘근일의 서계에는 어째서 연호(年號)를 쓰지 않는가?’ 하자, 원진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중국의 연호를 써 왔는데 지금은 정삭(正朔)을 받들지 못하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다.’ 하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자체적으로 연호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투가 매우 패려했다 합니다. 그리고 그 뒤 언젠가 역관배(譯官輩)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서 북쪽 사람을 하루 동안 대접하는 찬거리를 가지면 우리를 1년 동안 공급해도 충분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런 말들을 늘상 이야기하고 다닌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말로 대답하면 체통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니,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서 왜인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테니, 이는 숨길 말이 아닙니다."
하고,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적국(敵國)이 묻는 것에 대해 처음에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가는 점차 난처한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만약 ‘중국을 섬기는 도리는 이웃 나라를 대하는 것과 차이를 두는 것이 본래 마땅하니, 너희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런 내용으로 대답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정초청(精抄廳) 군사 중에 물고(物故)된 자가 도합 2천여 명이고 도망자가 8백 70명인데, 각도에서 궐액에 따라 충정(充定)한 숫자는 고작 1백 34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호서(湖西)의 경우는 3백 90명의 궐액 가운데 충정한 숫자가 20명 밖에 안 되는데도 도신(道臣)은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칭하고 있습니다. 매달 급료를 나누어 줄 때 보미(保米)001)  가 부족한 것이 늘 걱정인데, 지금 또 이들 숫자까지 덜어낸다면 결코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수항이 아뢰기를,
"난처한 일이 생길 때마다 추후에 분부하겠다고만 말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체되고 있는데 이런 일이 대부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2년 기한으로 절반씩 나누어 충정토록 하라."
하였다.

 

1월 12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임상원(任相元)·박태상(朴泰尙)이 아뢰기를,
"국가의 작급(爵級)에는 제한이 있고 사서(士庶)의 명분에도 한계가 있으니, 참람되게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근래 전제(典制)가 엄격하지 못하고 제한(制限)이 점차 무너진 결과, 심지어 여염의 산류(散類)와 서얼 천품(賤品)이 혹 당상관에 오르게 될 경우 그 혜택이 처에게까지 미쳐 봉첩(封帖)을 아울러 받는가 하면 출입할 때 교자(轎子)를 타고 다니니, 명기(名器)가 난잡하게 된 폐단이 극에 달했다 하겠습니다. 서얼의 경우에는 남편에 따라 봉작(封爵)할 수 없는 것이 법령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 해조의 관원이 잘못을 답습하여 마구 내줌으로써 분수를 넘어 법을 범하는 자들이 있게끔 하였으니, 정말 한심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일체 《대전(大典)》에 의거하도록 하여, 외람되게 봉하는 폐단이 없어지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3일 갑신

상이 뜸을 떴다.

 

1월 15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6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민희를 한성 판윤으로, 권우를 좌윤으로, 안진을 판결사로, 신여철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1월 17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편을 죽인 죄인 부귀(富貴)가 복주(伏誅)되었다.

 

1월 20일 신묘

지평 임상원(任相元)·박태상(朴泰尙)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국조(國朝)의 사부와 서얼은 명분이 엄연히 다르므로 《대전(大典)》 외명부(外命婦) 조(條)에도 ‘서얼에게는 봉(封)하지 못한다.’는 글귀가 있는데, 해조가 이를 준수하지 않고 곧바로 봉첩(封牒)을 내줌으로써 잡류와 천품(賤品)이 참람되게도 한계를 뛰어넘는 폐단을 빚게 하였기 때문에, 신들이 일체 법전에 따라 논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물의가 모두 ‘부인이 남편의 작위를 따르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이고, 근대에 서얼을 통사(通仕)시킨 규정 또한 과거와 다른 것이고 보면, 옛날 제도만 고집스럽게 지키는 것은 융통성없는 병통이 없지 않은데, 데면데면하게 법 조문을 인용하다니 짐작해서 해야 한다는뜻을 자못 잃었다.’고 한다 하니, 신들이 제대로 살펴 일을 논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장령 박순(朴純)이 처치하기를,
"《대전(大典)》대로 따르려 한 것에는 실로 잘못이 있지 않으니, 물의가 있다 하더라도 가벼이 체차시킬 수는 없습니다. 출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1일 임진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백관의 조참(朝參)을 받았다. 도승지 강백년(姜栢年)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참할 때는 일찍이 일을 아뢰는 규정이 없었는데, 지난번 판중추 송시열(宋時烈)이 아룀에 따라 백관이 각자 소회를 진달하도록 특별히 허락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그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지금 모든 관원들이 업무에 태만한 채 시간이나 보내는 것이 풍조가 되었습니다.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분분하게 정고(呈告)하고 있는데, 심지어 옥당의 관원은 경연이 오래 폐지된 탓으로 쓸모없는 관원이라고 자처(自處)한 나머지 하번(下番)의 경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꺼번에 정고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장례원은 일이 가장 바쁜 곳인데, 판결사 안진(安縝)이 이미 오래 전에 제수를 받았으면서도 아직 나와 숙배(肅拜)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오늘과 같은 성대한 예(禮)에도 나와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듯 태만하기만 하니 어떻게 아름다운 공적을 이루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진은 추고한 뒤에 패초(牌招)하여 임무를 살피게 하라. 정병(呈病)한 옥당의 관원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대사간 김휘(金徽)가 나아가 윤완(尹完) 등의 일을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김휘가 아뢰기를,
"한(漢)나라 융려 공주(隆廬公主)의 아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법 행위를 저지르자 무제(武帝)가 한참 동안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다가 말하기를 ‘법은 고제(高帝)의 법이니 사정(私情) 때문에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참(斬)하도록 명한 뒤 이를 인해 크게 곡(哭)하니 좌우가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황조(皇朝)002) 태조(太祖) 때에도 부마(駙馬) 구양륜(歐陽倫)이 다금(茶禁)003)  을 범하자 태조가 법 조문대로 복주(伏誅)시켰습니다. 예로부터 큰 일을 이룬 임금치고 법을 굽혀가면서 사정을 쓴 분은 있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양제신(梁濟臣)과 윤완의 무리들에게 애석한 점이 뭐가 있기에 선왕의 삼척(三尺)의 법을 동요시키려 하십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 조정에서 애통해 하는 교서를 내렸으므로 신이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덕의(德意)를 포고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제색(諸色) 군병으로서 도망치거나 물고(物故)되어 빠진 액수(額數)는 3년을 기한으로 대신 충정(充定)시키지 말도록 하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감읍했는데, 수 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서 병조가 관문(關文)을 띄워 정초군(精抄軍)과 어영군(御營軍)의 경우는 빠진 액수 만큼 대신 충정시키도록 하였으니, 백성에게 믿음을 잃는 일로서 그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일을 담당한 신하는 직무를 제대로 수행했다고 스스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은 나라를 병들게 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김수항이 아뢰기를,
"김휘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나라를 보위하는 것이 목적이니 액수가 빠진 만큼 충정시키는 것이야말로 부득이한 조처라고 할 것입니다. 일을 담당한 신하라고 해서 어찌 또한 나라를 병들게 할 마음을 갖고 있겠습니까."
하고, 김휘가 아뢰기를,
"나라를 병들게 할 마음은 없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여 백성에게 믿음을 잃는다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먹을 것은 없어도 좋지만, 믿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군병을 조금 얻는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마음을 잃게 되면 그 득실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교서를 반포할 때에 충분히 생각을 하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였다. 영림 부수(靈林副守) 이익수(李翼秀)가 나아가 아뢰기를,
"두 분 자전(慈殿)의 춘추가 이미 높으신데도 잇따라 흉년이 든 탓으로 아직껏 연회 베푸는 예를 거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신의 생각에는, 풍년에는 그 예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흉년에는 그 예를 간략하게 해서라도 거행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옛 성인이 이르기를 ‘천하로써 봉양하는 것이 효(孝)의 으뜸이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만 유독 한 나라로써 봉양할 수 없단 말입니까. 원하옵건대, 신의 말을 가지고 묘당에 자문을 구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충성심에서 나왔으므로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민시중을 강화 유수로, 이원정을 우윤으로 삼았다.

 

지평 임상원(任相元)·박태상(朴泰尙)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했지만 조어(措語)가 구차하다.’는 이유로 재차 인피하였다. 장령 박순(朴純)이 ‘잘못 처치하여 동료의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1월 22일 계사

사간 박세당(朴世堂), 정언 이일정(李日井)이 병 때문에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헌납 송창(宋昌), 대사간 김휘(金徽), 정언 홍만종(洪萬鐘), 집의 정재희(鄭載禧)가 병 때문에 정고(呈告)했는데 대신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구전(舊典)을 준수하려 한 그 뜻이야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시의(時宜)를 참작하지 않아 끝내 틀어막는 결과가 되었으니, 박태상(朴泰尙)·임상원(任相元)을 체차하소서. 처치하여 출사를 청한 것은 타당성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으니, 박순을 체차하소서.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았을 때는 관례상 체차시켜야 하니, 박세당·이일정을 체차하소서. 질병에 걸리는 것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송창·김휘·홍만종·정재희는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3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판윤 민희(閔熙)가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조곡 가운데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5백여 석인데, 받아먹은 자가 이미 죽었거나 혹 변방에 유배된 경우에는 어디에서 징수하겠습니까. 차라리 면제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지중추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민희의 말대로라면 실로 징수할 기약이 없으니 형세상 면제해 줄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받아먹고 변경에 옮겨진 자는 의당 방환(放還)하여 관노비(官奴婢)에 소속시킴으로써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을 알차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판의금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이면(李葂)이 범한 것은 군사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말하면 일죄(一罪)004)  로 논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평시에 이를 적용할 경우 실로 과중하게 될 듯기에 품정하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율문(律文)을 상고해 보았는가?"
하니, 지화가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에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나아가지 않아 군기(軍機)를 그르친 자는 참(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적과 대치한 상황은 평시와 다르고, 또 일단 기일에 미쳐 올려 보냈고 보면, 군기를 그르친 것에 또한 비유할 성질이 못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타당한 율이 아니니 감등하여 조율하라. 그리고 이 뒤로 평시에 군병을 동원해 보낼 때 기일에 대지 못하는 수령은 충군(充軍)시키는 율을 적용하는 것으로 정하여 항식(恒式)을 삼으라."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남편을 살해한 죄인 부귀(富貴)는 어느 고을 사람인가?"
하니, 지화가 아뢰기를,
"태생은 공산(公山)이고 변을 일으킨 곳은 장단(長湍)이고 호적은 서울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읍호(邑號)를 강등하는 등의 일을 거행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변을 일으켰을 때 거주하고 있던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고 그 읍호를 강등시키는 것으로 규식을 정해 시행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듣건대, 해주(海州) 지역에서 몇 년 전에 아비를 시해한 변이 일어났는데 감사와 수령이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변방에 옮기는 정도로 그쳤다 합니다. 일이 놀랍기 그지없으니, 별도로 안문하여 처치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형조 낭관을 보내 엄히 안핵해서 기필코 사실을 규명토록 하라."
하였다. 부교리 이당규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 풍속이 본래 농사를 힘쓰지 않는데, 이른바 양반이라는 자들은 아무리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직접 경작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생산하는 자는 적고 소비하는 자는 많기 때문에, 조금만 수재나 한재를 만나도 굶어 죽는 걱정이 필연적으로 이르곤 합니다. 신은 특별히 친경(親耕)하는 예를 거행하여 백성을 권장했으면 합니다."
하고, 수항이 아뢰기를,
"친경하는 예를 충분히 강구해서 행해야 하는데, 세종조(世宗朝) 때 권농(勸農)했던 교서문(敎書文)이 있으니, 지금 역시 이에 의거하여 제도(諸道)에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대신 초안을 작성하여 하유토록 하라."
하였다. 당규가 또 아뢰기를,
"일찍이 무신년 간에 당상 및 시종신의 부모 가운데 나이 70이상이 된 자에게는 가자(加資)해 주기도 하고 옷감이나 식품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매우 성대한 전범(典範)이라 할 것이니, 무신년의 은례(恩例)에 따라 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리고 이어 나이 70이상이 된 종실에게도 옷감과 식품을 차등있게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1월 24일 을미

승지와 중사(中使)를 보내 성균관 유생에게 귤을 하사하고, 이어 대제학 김만기(金萬基)에게 명하여 유생을 시취(試取)토록 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박태손(朴泰遜)은 직부 전시(直赴殿試)케 하고, 나머지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1월 26일 정유

송창을 사간으로, 성호징을 장령으로, 이당규·안후를 지평으로, 이유를 정언으로, 임규를 필선으로, 윤치적을 겸설서로, 조근을 사서로, 신후재를 헌납으로, 신명전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대사간 김휘(金徽) 등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3품 이상으로 하여금 매년 초에 수령과 변장(邊將)에 적합한 사람을 각각 천거토록 한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닌데, 법이 오래 시행되다 보니 폐단이 생겨 청탁하는 풍조가 관례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거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청탁과 관련되어 있으니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지금 이후로 매년 초에 천거된 자들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더 정밀하게 가려 취해 쓸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였다.

 

1월 27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황해 감사 황준구가 조정을 하직하니,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본도에는 군병을 점열(點閱)할 일이 없는가?"
하였다. 준구가 아뢰기를,
"군병을 점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파손된 군기와 무너진 성지(城池)도 아직 보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극히 한심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는 군병의 조련을 뜻대로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병사에게 분부하여 순시토록 하라."
하였다.

 

1월 28일 기해

상이 팔의 통증 때문에 뜸을 뜨고,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양호(兩湖)와 경기에서 거둬들인 미곡의 사목(事目)을 마련할 일로 나아가 아뢰기를,
"경기는 임자년의 결전(結田)을 기준으로 3만 7천 4백 60석을 거두어들여야 하는데, 도 전체를 통틀어 각각 1두(斗)씩 감해주면 그 수가 3천 4백 석이 되어 용도에 부족한 것이 무려 2천여 석에 이릅니다. 호서는 거두어들일 양이 7만 1천 7백여 석이니 빠짐없이 다 받는다 해도 부족량이 3천 70여 석이나 되는데, 만약 도를 통틀어 각각 1두씩 감해주면 7천 1백 70여 석이 됩니다. 호남은 받아들일 양이 12만 5천여 석이니 설령 감해준다 하더라도 용도에 부족한 양이 그리 대단치는 않습니다."
하니, 상이 하문하기를,
"3도 가운데 재해를 입은 고을은 얼마나 되는가?"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경기는 3개 읍이고, 호서는 26개 읍인데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은 곳은 9개 읍이고, 호남은 17개 읍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남 은 대동미(大同米)를 12두로 했는데 호서는 겨우 10두만 받기로 했으니 용도에 부족하게 되는 것은 괴이할 것도 없다. 농사가 조금 풍년들 때를 기다려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지 이대로는 결코 지탱할 수가 없다. 경기의 대동미를 12두로 의정(議定)할 때 어떤 이는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대체로 법을 처음 만들 때에는 넉넉하게 정하는 것이 그래도 낫다. 1년 동안 쓰고 남은 미곡 3천 석을 5년 동안 계속 미루어 가면 1년의 용도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니, 흉년을 만나더라도 혜택을 베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호서는 대동미를 정할 때 당초 이와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급할 때 다시 손을 쓸 수가 없으니, 어찌 졸렬한 계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명하여 경기의 재해입은 3개 읍과 호서의 재해입은 고을 중 더욱 심한 9개 읍에 대해서는 각각 2두씩 감해주도록 하고, 호서의 17개 읍과 호남의 17개 읍에 대해서는 각각 1두씩 감해주도록 하였다.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경기는 근본이 되는 지역이라서 예전부터 다른 도보다 특별히 돌보아 주었는데, 3개 읍만 감해주면 실질적인 혜택이 두루 미치지 못할 것이니, 도 전체를 통틀어 각각 1두씩 감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수항이 아뢰기를,
"매년 초에 실시하는 천거를 정밀하게 가려 뽑자는 간원의 요청에 따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오직 전조(銓曹)에서 더욱더 정밀하게 살펴 가려 뽑아 쓰기에 달려 있는 것으로서, 묘당에서 가려 뽑는 것은 번거롭고 잗달게 되는 일인 듯싶습니다. 천거를 잘못한 사람을 논죄하는 영을 거듭 밝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9일 경자

상이 뜸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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