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4년 1673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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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뜸을 떴다.

 

2월 2일 임인

햇무리가 졌는데 이(珥)가 있고 관(冠)이 있었다. 흰무지개가 햇무리를 뚫고 해를 가리켰다.

 

2월 3일 계묘

이민서를 대사성으로, 정유악을 사서로, 송규렴을 헌납으로, 이후산을 호조 참판으로 삼고, 김익훈을 발탁하여 수원 부사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금년에 절후(節候)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도 민간에서는 미리부터 농사가 잘되지 않을까 걱정들을 하고 있는데, 샘물이 마르는 것을 보면 역시 가물 징조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병판 김만기가 아뢰기를,
"서울 의 조미 중 납부되지 않은 것들을 한결같이 독촉해서 징수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이미 정지시켰는데, 경술·신해 두 해의 납부되지 않은 것과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진휼청에서 먹인 것들도 결코 받아낼 길이 없으니,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수항이 아뢰기를,
"서울 에서 조적하는 일은 예전에 없었던 일인데 달리 좋은 계책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고, 김만기가 아뢰기를,
"조적과 관련하여 간사하게 속이며 서로 덮어씌우는 폐단이 없을 수 없는데, 급기야 받아들이느라 징수를 독촉할 즈음에는 또 백성의 원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진청에 아직 남아 있는 곡식을 시중에 내다 팔면 한때나마 시장 가격을 조금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내다 파는 일을 신이 또한 일찍이 주관했었는데, 대체로 공가(公家)의 가격이 너무 싸기 때문에 사려는 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거꾸로 원망하는 자도 생겼으니, 이 뒤로는 대략 시장 가격에 의거하여 파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동의하였다. 호판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이 겸대(兼帶)한 총융청 군병 중에 용인(龍仁)과 양지(陽智) 등 고을에 있는 자들은 겨우 3개 초(哨)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름이 차비군(差備軍)일 뿐 예전부터 본래 조련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장교와 사병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이니, 갑자기 위급한 일을 당할 때 무슨 수로 힘을 얻겠습니까. 신이 서울에서 모집해 얻은 기취수(旗吹手)의 숫자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으니, 이 3개 초는 속오(束伍)에 소속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유혁연이 아뢰기를,
"차라리 그대로 총융사에 소속시켜서 때때로 조련시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지금 《통감절요(通鑑節要)》 촉한기(蜀漢紀)를 강하고 있는 중인데, 좌의정 김수항이 말하기를 ‘경서(經書)를 진강하는 것이 하루가 급하니 한기(漢紀)의 강을 끝낸 뒤에는 즉시 이어서 《대학(大學)》을 강하는 것이 좋겠다. 다만 사학(史學) 역시 완전히 폐지해서는 안 되니 《대학(大學)》을 진강할 때 《통감(通鑑)》 한기(漢紀) 이하를 석강(夕講)에 아울러 강독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4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 병사 유비연이 조정을 하직하니, 상이 인견하고 일렀다.
"본도의 군정(軍政)을 포기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급할 때 의지할 곳이 없다. 지금 군병을 모아 열무(閱武)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혹 사냥한다고 핑계대거나 하여 군병을 모아 강습하도록 하라."

 

2월 5일 을사

팔도 및 개성부(開城府)·강화부(江華府)에 유지(諭旨)를 내렸다.
"내가 생각건대, 국가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니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요 먹을 것은 백성의 근본인데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는 길은 오로지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하게 여기는 것에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옛날 제왕들은 백성이 의지할 바를 알고서 모두 농사를 급선무로 여겼으니, 《시경(詩經)》의 빈풍(豳風)편과 《서경(書經)》의 무일(無逸)편은 어찌 후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조종(祖宗)께서도 백성을 후하게 해 줄 방도에 깊이 관심을 기울여 맨 먼저 전제(田制)를 바르게 하시고, 혹시라도 백성들이 농사짓는 법을 모를까 염려하시어 농서(農書)를 번역하고 풀이해서 깨우치고 가르치셨는데, 그래도 미진한 점이 있을까 두려워하셨다. 이에 이미 토지에 시험해 본 방법을 통하여 《농사직설(農事直說)》005)  이라는 책을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통해 이해하여 알기 쉽도록 하였으며, 또 권농(勸農)하는 교서를 반포하여 더욱 그 태만함을 다스리는 등, 농사에 이로운 일이라면 어느 것 한 가지도 지극하게 하지 않은 일이 없으셨다. 따라서 백성을 사랑하고 근본을 중요하게 여긴 그 뜻이야말로 곧바로 당우(唐虞) 삼대(三代)의 은성(殷盛)함과 전후로 같았다 할 것이니, 한가(漢家)에서 창고의 곡식이 벌겋게 썩어가고 돈꿰미가 썩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풍성했던 것이나, 쌀 한 말 값이 3전(錢)밖에 나가지 않았던 당실(唐室)의 풍족함은 대단하게 여길 것도 못되었었다.
그런데 과인의 시대에 이르러 하늘에 어여삐 여김을 받지 못해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없는 해가 없었는데,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참혹함이 지난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노약자들이 구렁에 빠져 죽고 뼈만 남은 시체들이 서로 잇따르게 되었는데 곡식을 옮겨 올 곳도 없고 구제할 곡식도 없는 처지라서 내가 잠을 자도 자리가 편치 않고 밥을 먹어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에 어떻게 해서라도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할 계책을 얻고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보려 생각하였으나 끝내는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보기만 하는 결과를 빚음으로써, 조종께서 3백 년 동안에 걸쳐 잘 길러온 백성들을 하루아침에 결딴나게 하고 옥토를 황무지로 변하게 하고 말았으니, 아, 어찌 이를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 이유를 규명해 보건대, 해마다 흉년이 든 탓도 물론 있겠지만, 그 근본을 따진다면 실로 인사(人事)가 미진했던 데에 말미암는다고 할 것이다. 맹자(孟子)가 말하지 않았던가, ‘잉여 소득을 많이 축적해 놓은 자는 흉년에도 끄떡이 없다.’고. 가령 옛날처럼 3년 농사에 1년 버틸 축적이 이루어지고 9년 농사에 3년 먹을 비축이 있게 되었다면, 어찌 이토록까지 계속 죽어 나자빠지는 상황이 발생했겠는가.
대저 농사에 힘써야 할 것은 제때에 맞게 하는 것과 공력을 들이는 것,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력을 들이는 것을 근실하게 하고 제때에 맞게 하는 일을 신속히 하는 자는 수확이 늘 많게 되고, 공력을 들이지도 않고 제때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는 수확이 늘 적게 마련이다. 지금 논밭을 갈고 씨부리는 일도 제때에 하지 못했으면서 김매고 북돋우는 일에도 공력을 들이지 않고, 물을 대주는 저수지 제방이 간혹 무너져도 고치려 하지 않고, 두엄이나 퇴비를 만드는 일도 소홀히 한 채 힘쓰지 않는 등, 정성을 다해야 할 인사(人事)에서 그 이유를 찾지는 않고서 그저 1년의 운세가 불행한 탓으로만 핑계를 돌린다면,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수확을 바라는 일과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전(傳)006)  에 이르기를 ‘민생(民生)은 근실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데, 근실하면 궁핍함이 없게 된다’고 하였고, 《서경(書經)》007)  에 이르기를 ‘게으른 농부가 스스로 편안하게만 여긴 채 힘들여 노동하지 않고 논밭에 나가 일하지 않으면 곡식을 하나도 수확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근로함에서 얻어지고 나태함에서 잃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사민(四民)008)   가운데 농민이 가장 고달프다. 추울 때 논밭 갈고 더울 때 김매는 등 일년 내내 부지런히 움직여도 춥고 배고픈 상태를 면하지 못하는데, 납세를 독촉하는 고을 관원들이 흔들어 못살게 굴고, 이끗만 좇으며 놀고 먹는 무리들이 또 따라서 좀먹고 있으니, 백성이 곤궁해지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
이제 봄날이 비로소 따뜻해져 땅의 맥박이 뛰기 시작하고 있는데, 우사(于耜)의 절기가 이미 지나가고 거지(擧趾)할 시기가 박두했으니,009)   과업을 완수하도록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역(牛疫)이 한번 크게 번진 뒤로 대신 멍에를 매야 하는 백성의 탄식이 있게 되었으니, 밭갈이 할 쟁기도 쓸모가 없게 되어 비옥한 경작지가 장차 황무지가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백성이 전지(田地)에서 일할 때에는 반드시 백 배의 공력을 들여야만 봄철 농사에 어긋남이 없게 되고 추수할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니, 뭔가 권유하고 진작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게으른 자들을 일으켜 세워 나태함이 없이 일에 종사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이를 널리 펴기 위해서는 오직 위에서 법도를 세워 다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옛날에 왕공(王公)들이 직접 친경(親耕)하는 예를 행함으로써 천하의 백성들을 이끌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경사 대부들과 함께 옛날의 제도를 본받아 사방을 창도하려 했었으면서도 미처 이렇게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내가 실로 겸연쩍게 생각하는 바이다. 아, 존엄한 왕공들도 친경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는데, 저 사서인(士庶人)들은 그 누구라서 땅의 산물을 먹고 살지 않기에 농사 일을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부모 처자가 추워하고 굶주리는 것을 보고서도 이처럼 유속(流俗)의 폐습을 끝내 고칠 줄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아, 큰 흉년을 겪은 끝에 전지의 상태가 형편없고 간신히 살아 남은 백성들의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만 하니, 어루만져 위로하는 도리는 급히 시행해야지 느릿느릿 해서는 안되고, 과업을 이루도록 권하는 방도는 서서히 해야지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와 함께 다스리는 자는 오직 관찰사요, 백성을 가까이 하는 직책으로는 수령만한 것이 없으니, 경은 농사를 밝히려는 나의 뜻을 몸받아 사랑으로 다스릴 수령들에게 포고토록 하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밭두둑을 드나들게 하되 마을을 동요치 말게 하고, 논밭을 살펴보게 하되 백성의 일을 방해하지 말게 하고, 보수해야 할 제방은 고치고 뚫어야 할 도랑은 소통시키게 하고, 백성의 힘만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도와줄 방도를 생각하게 하고, 종자 곡식이 모자라거든 보충해 줄 방도를 강구하게 하여 기필코 밭갈고 씨부리는 일이 제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고, 김매고 북돋는 일이 제 기한을 어기지 않게 하고,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땅은 가능한 한 모조리 개간토록 하고, 놀고 먹는 백성들은 모두 농사에 돌아오게끔 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런대로 백성이 본업(本業)을 즐겨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모든 힘을 쏟음으로써, 위로는 경상(經常)의 부세를 바치게 되고 아래로는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는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니, 백성의 생활은 요(堯)임금 때처럼 안정되고 나라의 근본은 반석처럼 굳건해질 것이다. 경은 겉치레로만 보지 말고 명심하여 거행토록 하라."

 

2월 6일 병오

예조 판서 정지화와 공조 판서 장선징이 석전(釋奠)의 헌관으로서 병을 칭탁하고 나아오지 않자 상이 파직을 명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배전 차원(陪箋差員)010)  으로 올라온 수령을 불러 보고 열읍(列邑)의 병폐와 민간의 고달픈 상황을 물어본 뒤 이어 분부하였다.
"지금 막 농사를 권면하는 분부를 내렸는데, 그대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백성을 사랑하고 근본을 힘쓰며 마음을 다해 직무를 수행토록 하라."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상차하기를,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세화(李世華)를 전지(田地) 검사에 착오가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결장(決杖)하는 벌로 논했습니다. 그러나 부윤의 직질(職秩)이 2품(品)이고 또 걸린 것도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에 비할 것이 못되는데, 갑자기 볼기를 치는 벌을 가한다는 것은 국체(國體)를 손상시키는 일이 될 듯싶습니다. 지금 이세화의 죄에 전적으로 용서해 주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다른 벌로 바꿔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의 내용이 참으로 옳다. 추고만 하라."
하였다.

 

2월 7일 정미

밤에 달이 오거성(五車星)을 범했다.

 

2월 8일 무신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전 참찬 송준길(宋浚吉)에 대해 선조(先朝) 때 은총을 베풀며 예우한 것이야말로 천고에 드문 예라고 하겠다. 그리고 과인의 경우는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감반(甘盤)011)  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긴밀했던 정의(情義)가 또한 어찌 적겠는가.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그의 공을 생각하는 마음과 슬픔에 젖는 소회를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다. 해조로 하여금 의정(議政)을 추증하여 나의 뜻을 나타내도록 하라."

 

2월 9일 기유

박태상(朴泰尙)을 정언으로, 민정중(閔鼎重)을 예조 판서로, 남용익(南龍翼)을 공조 판서로, 김수흥(金壽興)을 판의금으로, 최관(崔寬)을 병조 참지로,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홍처대(洪處大)를 도승지로, 신정(申晸)을 승지로 삼고 신요경(申堯卿)을 부마(駙馬)로 삼아 동안위(東安尉)라는 호(號)를 내렸는데, 바로 신정의 아들로서 장차 명혜 공주(明惠公主)를 하가(下嫁)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간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안동 부사(安東府使) 박지(朴贄)는 예전부터 비루하고 잗단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는데, 중한 논박을 받고서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 채 뻔뻔스레 웅부(雄府)에 부임했습니다. 그리고는 근신할 것은 생각지도 않고 인근 고을의 여종을 데려다 같이 살면서 그녀의 말이라면 모두 따라주어, 정령(政令)을 내리는 사이에 놀랄 만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0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유거를 승지로 삼았다.

 

상이 수원 부사(水原府使) 김익훈(金益勳)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수원은 기보(畿輔)의 중진(重鎭)이다. 전에 군액(軍額)이 6천이던 것을 지금 감하여 5천으로 한 것은 정예화하려고 한 것인데, 이제 만약 숫자도 감소된 상태에서 또 잡스럽게 된다면 전일 숫자가 많았던 것보다 오히려 못하게 될 것이니, 그대는 염두에 두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전에 온천에 갈 때 보건대, 수원 후면의 전야(田野)에 농사 작황이 부실한 것이 기읍(畿邑)에서 유난히 심했었다. 조정에서 이제 금방 농사에 힘쓰도록 하는 정사를 신명(申明)하였으니, 수령된 자가 착실히 봉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2월 11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신명전(申命全)이 조정을 하직하니, 상이 인견하고 일렀다.
"금년 봄에 실시하는 조련을 정지시키고 단지 병사와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가을철이 되기를 기다려 한번 순력(巡歷)하게 하였다. 그런데 듣건대, 영남의 한 영장이 순력할 때에 군인으로 하여금 시험삼아 세 번 총을 쏘게 하고는 해산시켰다고 하는데, 1년에 한번 실시하는 일을 어찌 이렇듯 소략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근래 무장들이 궁마(弓馬)의 기예를 전혀 폐지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 그대는 본업(本業)을 잊지 말도록 하라."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등이 상소하였다.
"신들이 《황명통기(皇明通紀)》·《십육조광기(十六朝廣紀)》·《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등에 나오는 글을 얻어 보건대,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계해년에 반정(反正)했던 일에 대한 전기(傳記)가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어 망극하게 무함을 받고 있었으므로, 신들이 책을 덮고 통곡하면서 슬프고 분한 마음에 미상불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인조 대왕께서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한 그 공렬과 덕업이야말로 정대하고 광명한 것으로서 고금을 뛰어넘어 천하에 울릴 만한 것이었는데, 이토록까지 말이 와전되고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었으니, 이대로 천하 후세에 전해진다면 어찌 우리 나라 전체 억만 신민들이 통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해 신들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청(淸)나라의 《진신편람(搢紳便覽)》을 얻어 보건대, 명사(明史)를 찬수할 관원을 두었으니, 지금이야말로 변무(辨誣)할 좋은 기회라 할 것입니다. 의당 속히 사신을 보내 사실에 입각하여 명백히 가리고 제사(諸史)에 잘못 기록된 말들을 고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하늘에 계신 인조의 영(靈)께서도 반드시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뻐하실 것이고, 선조를 빛내는 전하의 효성 역시 만세토록 할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신들의 소장을 묘당에 내려 자문을 구하신 뒤 행하도록 하소서."

 

2월 12일 임자

사간 송창(宋昌) 등이 아뢰기를,
"동부승지 유거는 일찍이 대직(臺職)에 있을 때 논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도 규피(規避)했으므로 공론에 버림받은 지 오래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까이에서 모시는 반열에 제수되자 물정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체차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재차 아뢰자 윤허하였다.

 

집의 정재희(鄭載禧)가 아뢰기를,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하량(金厦樑)은 본래 탐욕스럽고 교활한데 늙으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본직(本職)을 제수받고 나서는 오로지 일신을 살찌우기만 일삼고 있는데, 집도 멀지 않은데다 선척(船隻)까지 갖고서 고을에 비축된 것을 이미 고갈시키고 잔약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곡을 나누어 줄 때 원곡(元穀)에서 덜어내 몰래 자기 집에 운반시킨 뒤 가을철에 받아들일 때 공공연히 민간에서 마구 징수해 남은 곡식을 가지고 그 원수(元數)를 채우고 있으니,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나문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의 상소 및 《십육조광기》·《종신록》 등의 글을 좌상        김수항(金壽恒)에게 내 보이며 이르기를,
"선왕께서 이렇게까지 무함을 받으셨으니 신변하는 일을 그만두기만 할 수가 없는데 경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런 종류의 무망(誣罔)하는 설은 계해년 초부터 있어 온 것으로서, 중국 조정에서 보낸 차관(差官)이 가도(椵島)에 이르러 사문(査問)하는 일을 벌이자, 그때 조정 백관이 정문(呈文)하여 변무(辨誣)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조부 상헌(尙憲)이 진주사(陳奏使)로 경사(京師)에 갔는데, 예부(禮部)가 글을 보내 묻기를 ‘듣건대 팔로(八路)가 모두 신왕(新王)에게 귀순하지는 않았다 하는데, 귀부(歸附)하지 않는 것은 어떤 자가 주동하는 것인가?’ 하자, 신의 조부가 정문하여 대답하기를 ‘폐주(廢主)가 현재 강화(江華)에 있는데 경사에서 겨우 백 리쯤 떨어진 곳이며 일체 한(漢)나라        창읍왕(昌邑王)의 고사012)                  처럼 대우하고 있다. 그리고 팔로와 같은 경우는 어느 신하 어느 백성치고 그 누가 귀순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예부가 또 묻기를 ‘그대 나라가 왜(倭)와 서로 혼인 관계를 맺었다 하는데 사실인가?’ 하자, 신의 조부가 대답하기를 ‘정말 근거없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등래(登萊)에 이르자 무신(撫臣)이 역시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그때에도 신의 조부가 예부에 대답했던 내용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당시 예부는 ‘이제 잘 알았다.’고 답하였고, 무신은 ‘이런 이야기는 필시 근거없이 전파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과연 의심이 풀렸다. 이 뒤로는 신중하게 대처하여 서로 의심하는 일이 없게끔 하라.’고 답하였었습니다.
이는 필시 폐조(廢朝)의 잔당들이 가도에 유언비어를 유포해서 중국 조정에까지 들리게 한 것일 것입니다. 필부가 무함을 당해도 신설(伸雪)하려 할 텐데, 더구나 선왕께서 무함을 받은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시세(時勢)와 사체(事體)로 볼 때 조종조에서 종계(宗系)를 개정했던 일과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신자(臣子)의 마음이 하루라도 편안할 수가 없으니, 변무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 일은 매우 중대하니, 여러 대신에게 물어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입시한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조종께서 이런 무함을 받으셨으니 변무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이번 일은 종계를 개정했을 때와는 도리와 시세와 사체 면에서 모두 다르다고 여겨집니다. 이른바 도리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번거롭게 말씀드리지 않아도 성명께서 필시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시세라고 말씀드린 것은 ‘설령 이 일을 변무했다 하더라도 시대가 달라지고 일이 변한 다음에 명(明)나라 사람의 기록한 것을 저 사람들이 바꾸는 것이고 보면 어찌 후세에 빛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사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신도 실마리만 꺼내놓고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대체적인 뜻은 이러합니다. 즉 《회전(會典)》과 같은 서책은 우리 나라의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같은 비중을 가진 것으로서 천자가 재상·학사(學士)들과 찬수하여 만드니, 이런 서책에 사실과 다른 말이 기록되어 있다면 원래 진달해 변론해서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신록》 등과 같은 책은, 모두 야사(野史)를 기록한 소설(小說)로서 그저 어떤 사람이 잘못 듣고 전한 것을 그대로 수록한 것에 지나지 않은데, 어떻게 일일이 고쳐주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변무하는 일에 있어서 만약 고쳐주기를 청한다면 야사란 국가에서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고, 만약 금해 주기를 청한다면 저네들의 야사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 금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못됩니다. 고쳐주기를 청하는 것도 이미 요청할 수 없고 금하는 것 또한 불가하다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문장을 작성해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비록 《명사(明史)》를 찬수한다고 말하더라도 어떻게 미리 정사(正史)의 기록이 야사와 같을 줄 알고서 지레 앞질러 고쳐주기를 청한단 말입니까."
하고, 응교 이선(李選)이 아뢰기를,
"이런 따위의 야사는 국승(國乘)과 다른 만큼 사체상 온편치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김만기의 말과 같습니다. 일찍이 폐조 때에 허균(許筠)이 연경(燕京)에 가서 사적으로 소설을 보고는 스스로 변무하였는데, 그때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를 비난하였습니다. 지금 이 《종신록》 등의 책이야말로 사록(私錄)이니만큼 일일이 변론해 밝힐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고,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시중도 김만기의 말에 동조했으나, 훈련 대장        유혁연, 집의        정재희, 사간        송창은 모두 변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송사(宋史)》는 즉 원(元)나라 신하인 탈탈(脫脫)013)                  이 찬수했는데 그것을 뒤에 개정한 사람이 없었다. 지금 청나라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무망하는 이야기를 채취하여 후세에 전한다면 어찌 망극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우상        이경억(李慶億)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원임 대신 및 2품 이상과 함께 모여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이선이 노산(魯山)014)                  의 묘에 수졸(守卒)을 두고 관에서 사시(四時) 및 기일(忌日)에 제수(祭需)를 지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선이 또 아뢰기를,
"고 참판        윤문거(尹文擧)는 양조(兩朝)에서 예우했던 신하입니다. 전에 윤선거(尹宣擧)가 죽었을 때에도 장례 물품을 제급하고 이어 증직을 명하였는데, 지금 문거에 대해서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듯하니, 똑같이 증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도 증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5일 을묘

이세익(李世翊)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7일 정사

상이 팔의 통증 때문에 뜸을 떴다.

 

2월 18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휘진을 장령으로, 이상일을 공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뜸을 떴다.

 

집의 정재희 등이 아뢰기를,
"근래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사람들이 법을 아랑곳하지 않는 탓으로, 외방의 당하 관리들이 출입할 즈음에 문득 유옥교(有屋轎)015)  를 타는가 하면 심지어 현감과 찰방들까지도 모두 그 잘못을 본받고 있으니, 법을 어기고 방자하게 구는 그 정상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일체 금단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0일 경신

사간 송창(宋昌), 정언 홍만종(洪萬鐘) 등이 아뢰기를,
"해주(海州)의 죄인 조은금(早隱金)의 죄가 강상(綱常)과 관계되는데 정상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조정에서 장차 안핵하려고 본주(本州)에 분부하여 사련인(辭連人)을 잡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청단 찰방(靑丹察訪)이 제대로 유인하여 체포하지 못하고 시기에 앞서 말이 새어나가게 함으로써 죄인의 형제를 도망가게 하여 잡지 못하였으니, 조정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전 감사 최관(崔寬)은 이미 체임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교대하기 전이었고 보면 바로 도(道)를 안찰하는 신하였다고 할 것인데, 엄히 밝혀 신칙하지 않음으로써 잡지 못하는 결과를 빚게 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감사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이 양제신(梁濟臣)과 윤완(尹完)을 안율(按律)하라는 청을 정지하였다.

 

2월 21일 신유

윤심(尹深)을 헌납으로, 맹주서(孟胄瑞)를 병조 참지로, 조위봉(趙威鳳)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홍만종(洪萬鐘), 사간 송창(宋昌)이 전 황해 감사 최관을 논하면서 타당치 못한 율(律)을 적용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정언 박태상(朴泰尙)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2월 22일 임술

집의 정재희, 장령 성호징, 지평 안후가 아뢰기를,
"전일 감시(監試)의 시관을 명초(命招)하던 날,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이 사직소를 아침에 이미 입계하였는데 정원이 곧장 출패(出牌)했다가 그렇게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사람을 보내 뒤미처 환수해 오게 하였으니, 그 또한 너무나도 전도된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해질 무렵에 소에 대한 비답이 비로소 내려지면서 즉시 출패하였는데 이는 사체상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시관에 대한 낙점(落點)이 떨어졌는데, 백년이 낙점받은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자 정원이 또 들어오면 안 된다는 뜻으로 말해 보내면서 이미 내보낸 패(牌)를 환수함으로써, 막중한 명패로 하여금 두 번이나 헛되이 사문(私門)에 임하게 하였으니, 정원이 착오한 것이야말로 정말 형편없기 그지없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년의 경우는, 이미 소명을 받은 뒤인데도 처음에는 패초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두 번째에는 나아가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였으니, 분의(分義)로 헤아려 볼 때 역시 너무도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당해 승지는 체차하고, 강백년은 두 차례의 패초에도 나아오지 않은 율을 적용해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차례의 패초에도 나아오지 않은 율을 적용해 시행하라고 한 것이 온당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당해 승지는 추고하라."
하였다. 승지 오두인(吳斗寅) 등이 스스로 말해 보낸 일이나 명패를 환수한 일이 없다고 말하고, 물의가 또 강백년에 대해 패초에 나아오지 않은 율을 적용해 시행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자, 정재희·성호징·안후가 잇따라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2월 24일 갑자

사간 송창(宋昌) 등이 아뢰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윤창형(尹昌亨)은 부임한 뒤로 업무를 보는 날이 매우 드물고, 관가의 조곡을 거두어들이고 내줄 때 모두 감색(監色)의 손에 내맡기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중추부사 허적(許積)이 상소하기를,
"신이 허둥지둥 향리로 돌아온 뒤로부터 망극한 말들이 갈수록 혹독해지고 있는데 심지어는 신을 고금의 흉적에 비기면서 종족이 몰살당할 중죄(重罪)에 빠뜨리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신의 죄명(罪名)이 이미 입으로 차마 말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또 사람들과 시끄럽게 변론하며 밝힘으로써 사체를 거듭 손상시키고 다시 화(禍)의 그물에 걸려들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재야(在野)의 유상(儒相)이 또한 뭐라고 말했다는 점에 대해서만은 괴이하게 여겨지기만 합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야말로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형세가 어찌할 겨를이 없이 위급한 날을 당하여 치욕을 참고 뒷날을 도모했던 종려(種蠡)016)  야말로 원래 회륜(檜倫)017)  에 비할 인물이 아닙니다마는, 대의를 부르짖고 강상(綱常)을 세워 국가로 하여금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게끔 한 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그런 인물이 나오도록 북돋아주느라 겨를이 없어야 마땅하지 그들이 원망을 도발하여 화를 불렀다고 뒤에 와서 꾸짖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인데, 신이 이렇게 논했던 점에 대해서는 온 조정이 함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세 신하018)  의 경우는 그 죽음에 더욱 비통한 점이 있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위협과 공갈에 몰려 차마하지 못할 일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세 신하의 불행이 아니요 그야말로 우리 나라 백 년의 수치라 할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그들이 처음에 과격했던 면을 애석해 하고 그들이 나중에 절조를 지켜 죽었던 점을 찬탄하였는데, 평소 말이 여기에 언급되면 약한 나라의 신하가 된 것을 미상불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습니다. 어찌 한번이라도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무신년에 등대(登對)했을 때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세월이 이미 오래된데다 신이 늙고 혼미하여 명백하게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입시한 신하들 중에 혹 조정에서 그들을 위해 사당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진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추가 증직(贈職)하고 자손을 수록(收錄)하라고 청한 것이 신의 입에서 나왔었다는 것만은 신이 그래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령 신의 생각에 그들이 일 내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구하려 하였다고 여겼다면 어찌 이런 요청을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도 많이 변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가령 신이 전에 올린 소에 나오는 한 귀절의 이야기를 가지고 신의 막대한 죄안(罪案)을 삼은 것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를 신이 또 모르겠습니다. 권세의 벼리를 모두 장악하시라는 말은 과거 철인들이 늘 하던 말이고, 건강(乾剛)하시지 못한 흠이 있다고 한 말은 근일 모두 걱정하는 말들인데, 신이 전하의 앞에서 이런 내용으로 일깨워드린 것 또한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으니, 이는 대체로 조정에 기율이 없어 아랫사람들이 법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는가 하면 조정의 논의를 장악하고 사당(私黨)을 심는 그런 자가 없지 않기 때문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도성을 떠나던 날에도 다시 옛날에 드렸던 말씀을 반복했던 것으로서 당초 조정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만 거꾸로 너무나도 지나치게 신을 의심하고 너무도 심각하게 신을 공격하면서 심지어는 보통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까지 하였으니, 이 점이야말로 신이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이미 천지 사이에 용납받을 수 없는 죄명을 입었으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신에게 해당되는 죄율(罪律)을 의논케 해서 사람들의 말에 사과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창황 중에 향리로 돌아간 뒤로부터 병든 몸으로 그리워하던 생각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아, 인심과 세도(世道)가 오늘날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이상(李翔)이 음험하고 간교하게도 반드시 함정에 빠뜨려 해를 끼치려 하였으니, 생각만 해도 참혹하다. 다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경연에서 나온 이야기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끝내 기억을 못하겠는데, 여러 신하들이 문답한 말들을 경이 한 말과 합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근래 경연에서 나온 말들을 뽑아낼 즈음에 너무 착오가 많으니, 판부사가 보고서 괴이하게 여기는 것도 본래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이를 가지고 거듭 불안하게 여기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서 속히 올라와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2월 27일 정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옥당을 소대하였다. 김만중(金萬重)과 조위봉(趙威鳳) 등이 《강목》의 강의를 끝내자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지난번 병조의 결속리(結束吏)019)  가 인출장(印出匠)020)  을 때린 사건 때문에 차비(差備)가 결죄(決罪)한 일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다스려야 할 죄가 있다면 의당 유사에게 맡겨 다스려야지 하필 사소한 일을 가지고 차비에게 죄를 다스리도록 한단 말입니까.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마는, 소란을 금한 일로 하리가 차비에게 죄를 받는다면 중외에서 보고 듣고 놀아와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본(手本)021)  으로 치죄하는 것은 곧 전례이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사소한 일이긴 합니다만 성명의 처분이 중도를 얻지 못한 듯하기에 감히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무 말이 없었다. 만중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왕세자가 현재 《대학(大學)》을 강하고 있다 하는데, 《대학(大學)》은 곧 선유(先儒)가 말한 바 도(道)에 들어가는 문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춘방의 관속들 모두가 참으로 한 시대의 선발된 인물들입니다마는, 가령 찬선 이유태(李惟泰) 같은 사람이 양연(兩筵)022)  에 출입하게 된다면 필시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윤증(尹拯)이나 박세채(朴世采)는 학문의 조예가 어느 정도인지 신이 잘 모르겠습니다만, 문학(文學)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조정의 신하 가운데 이 두 신하를 능가할 자는 없을 것인니, 그들로 하여금 춘방의 직책을 겸대하도록 한다면 역시 보탬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전최(殿最)023)  하는 법이 엄하다고는 하지만 나아오기를 어려워하는 임하(林下)의 선비에게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윤증은 군직(軍職)의 포폄(褒貶)이 중등(中等)을 맞아서 의망(擬望)할 수가 없으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유태(李惟泰)에게 정원은 별도로 하유하라. 그리고 윤증의 중고(中考)024)  는 탕척토록 하라."
하였다. 만중이 아뢰기를,
"진선과 찬선의 직에 적합한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조가 비망(備望)025)  하기 어려워 차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삼망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망(二望)으로 차출케 하는 것이 변통하는 도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의거하여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2월 28일 무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강목》의 강이 끝나자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고려(高麗) 태조(太祖) 이래 능묘(陵墓)가 모두 송도(松都)·풍덕(豊德)·장단(長湍) 등지에 있기 때문에 이미 그 지역의 왕씨(王氏) 자손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양왕(恭讓王)의 능만은 고양(高陽)에 있어 송도와 꽤 거리가 떨어져 있으므로 왕씨의 자손들이 형세상 수호하기 어려우니, 본도로 하여금 본읍에 분부하여 별도로 수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숙이 진정(賑政)을 훌륭하게 행하였으므로 온 도내의 인심이 오직 그가 해직되어 떠나갈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그의 병이 매우 중하여 직무를 돌보지 못하는데, 그 증세도 수토병(水土病) 때문이라 하니 죽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변통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차하라."
하였다. 정언 박태상(朴泰尙)이 아뢰기를,
"남원 부사(南原府使) 홍석기가 늘 술에 취해 엉망으로 지내는 정상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인데, 부임한 뒤에 날이 갈수록 가혹하게 정사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마치 수화(水火) 중에 있는 것처럼 명을 감당치 못하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뒤 누차 아뢰자 따랐다.

 

이준구를 경기 감사로, 이익을 원양 감사(原襄監司)로, 이당규를 부교리로, 윤심을 이조 정랑으로, 조원기를 집의로, 최문식을 장령으로, 권유·임상원을 지평으로, 송규렴을 헌납으로, 이후산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이준을 보덕으로, 이세화를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삼았다.

 

2월 29일 기사

시강원이 아뢰었다.
"본원이 입달(入達)한 바 《대학(大學)》 주각(註脚)을 언해로 풀어야 되는지의 여부를 사부(師傅)에게 물어보라고 왕세자가 하령(下令)하였기에, 사부 김수항(金壽恒)에게 물어 보았더니 ‘왕세자의 문리(文理)가 이미 장족의 발전을 보이고 있으니 주각을 언해로 풀지 않더라도 스스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니, 강관(講官)은 귀절마다 해석을 하고, 왕세자는 언해는 제외하고 송독(訟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2월 30일 경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수어사 이완이 청대하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전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세화(李世華)는 검약한 생활을 하는데다 백성을 기르고 군사를 다스리는 재능이 있으니, 이런 사람은 오래도록 그 직책에 두어 공을 이루도록 책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일 정사(政事)에서 그를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옮겨 임명했으니 정말 애석합니다. 그리고 현재 성첩(城堞)을 수축하는 공사를 진행중인데 신은 늙고 병들어 직접 가서 감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또 이 사람을 잃게 되면 앞으로 경리(經理)할 일이 더욱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방백은 일반 관원과 달라서 감히 곧바로 잉임(仍任)시키기를 청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 역시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으니, 묘당에 자문하시어 변통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 은 지역이 넓고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옮겨 제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임하지 않았고 보장이 되는 지역도 중하니 이세화를 광주 부윤에 잉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조령(鳥嶺)은 충주(忠州)와 문경(聞慶) 사이에 위치하여 남로(南路)를 제압하고 있으며 형세가 지극히 험준한데 그 속에 어류성(御留城)이 있으니 관방(關防)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시방(李時昉)이 군사를 나누는 규정을 설립하여 충주의 군졸을 남한 산성에 소속시키고 조령은 막아 지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생각이 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남한 산성에 소속된 충주의 군졸 3천 9백 명을 그곳에 떼주어 지키게 한다면 위급할 때 어찌 힘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충주의 군졸을 덜어내면 그 대신을 어떻게 보충하려 하는가?"
하자, 이완이 아뢰기를,
"성을 지킬 때는 반드시 본토 백성을 동원해야만 사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세화의 말을 듣건대, 본주(本州)의 민호(民戶)가 8천 9백여 호로서 군사 1만 명은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광주 부윤과 요리한 뒤에 비국과 함께 의논해서 품처토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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