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4년 1673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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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계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이조가 ‘수령이 도적을 잡은 데 따른 논상이 어수선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유로 변통해주기를 계청했습니다. 요즘 잇따라 흉년이 드는 바람에 겁박하고 약탈하는 도적들이 곳곳에서 봉기하고 있으나 그들을 포획하여 상을 받는 무리들 중에는 또한 과람하게 된 경우가 없지 않으니, 해조가 그 폐단을 시정하려고 하는 의도는 미상불 옳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수령이 도적을 잡고 해를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직분에 속한 일이라 하더라도 도적을 다스리는 일만을 전담하는 포도청이나 토포사(討捕使)와는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지금 상을 주어도 오히려 힘을 다 쏟지 않을까 걱정인데, 더구나 상을 주지도 않으면서 권장할 수 있겠습니까. 상을 베푸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아무 죄없는 자까지 마구 잡아들이는 자가 있거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허실을 철저히 조사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주관해서 자세히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용담(龍潭)의 적도들이 빙고(氷庫)에 불을 지르고는 관아까지 범하려고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듣건대 감사가 꽤나 도적을 잡았다고 하는데 아직 계문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고, 승지 정석(鄭晳)이 아뢰기를,
"용담의 적도는 보통으로 도적질만 하는 무리가 아니었으니, 한편으로 수색하여 체포하고 한편으로 치계(馳啓)하는 것이 사체상 당연한 일인데도 아직껏 계문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동직(李東稷)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수항이 아뢰기를,
"전 수원 토포사(水原討捕使)의 계문을 보면 그 중에 적도의 초사(招辭)에 나온 양성(陽城) 사람이 3명이었는데, 본현(本縣)에서 당초부터 잡아들인 사실이 없었고 토포사 역시 다시 물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천(利川) 사람 4명과 충주(忠州) 사람 8명이 적도의 초사에 나왔는데, 수색해 체포하지 못하자 이천부에서 ‘그들의 용모와 아비의 이름을 원적(元賊)에게 다시 물어보라.’는 내용으로 치보(馳報)했는데도 토포사가 그냥 놔두고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또 충주의 경우는 처음부터 끌어대지도 않은 사람을 첨가해서 9명이라고 기록하였으니, 도적을 다스리는 일이 착실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에 의거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적인(賊人)들이 이미 처단되었으니 지금 다시 조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토포사와 당해 수령은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토포사는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수령은 추고하라."
하였다. 지평 임상원(任相元)이 아뢰기를,
"도적을 뒤쫓아 체포하고 조사하는 일체의 일은 수령이 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차등을 두어 논죄해서는 안 되니, 당해 수령도 똑같이 파직한 뒤 추고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수항이 아뢰기를,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集要)》를 얻어 보건대, 거기에 기록된 내용이 전일 보았던 서책들과는 상당히 달랐는데, 그 가운데에는 ‘전왕(前王)이 스스로 하늘의 명을 끊었는데, 소경왕(昭敬王)026)  의 손자가 총명하고 인효(仁孝)하여 사군(嗣君)이 되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이런 청을 한 것이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우리 나라의 주문(奏文) 가운데에서 뽑은 말일 것이다. 이런 서책들을 옥당은 널리 물어 찾아모아 참고할 자료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계해년 반정(反正) 초기에 혼조(昏朝)의 잔당들이 가도(椵島)에 유언 비어를 퍼뜨리자 등주(登州)의 무신(撫臣)이 이를 인해 상문(上聞)하였다. 그리하여 갑자년에 중국 조정에서 차관(差官)을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본국의 신민(臣民)들이 각각 주본(奏本)을 갖추어 폐치(廢置)시켰던 정상을 밝혀 알렸다. 이에 칙명(勅命)이 곧바로 내렸는데 ‘윤서(倫序)가 상응하고 인심이 복속되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고 보면, 무망(誣罔)하는 설들이 참으로 중국 조정에 일찍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종신록(從信錄)》 등 여러 서책은 전후로 들은 바에 따라 모두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니 일을 기록하는 체재상 자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또 그 의도 역시 ‘변신(邊臣)이 전해 들은 것은 이와 같았고 차관이 조사해 보고한 것은 이와 같았다.’는 식이었으니, 먼저 들어온 말을 위주로 삼으려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이 일은 변론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변론할 만한 것도 없다 하겠는데, 상의 뜻에도 그 일이 이와 같다는 것을 대체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갑인년027)  까지 놔두고 다시 의논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금상(今上)028)   초에 이르러 이정과 이남 등이 다시 전의 이야기를 거듭 꺼내 자청해서 변무사(辨誣使)가 되었다가 끝내 일을 망치고 재물만 허비하고는 그만두었는데,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말하기를 ‘이남과 이정 등이 이 의논을 재차 꺼낸 의도는 의논을 달리하는 여러 신하를 중상하려는 목적에서였다.’고 하였다.

 

3월 4일 갑술

옥당을 소대하여 《강목》을 강하였다.

 

3월 6일 병자

박세견·민종도를 승지로, 김우형을 호조 참판으로, 이관징을 경상 감사로, 권주를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상이 시독관 김만중(金萬重)과 검토관 조위봉(趙威鳳)을 소대하여 《강목》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위봉이 아뢰기를,
"전일 당상 이상과 시종신들의 연로한 부모들은 모두 특별한 은전(恩典)을 받았습니다만, 시종과 당상 이상의 경력자로서 나이 70이 된 자들이 똑같이 은전을 받지 못했으니, 흠전(欠典)이 될 듯싶습니다. 그리고 음관으로 당상관이 된 자들의 연로한 부모들도 모두 참여되지 못했는데, 이렇게 구별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에게 식품을 제급하라고 명하고, 나이 70세가 된 종반(宗班)에게도 똑같이 시행하도록 하였다.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고(故) 대신의 처 및 친공신(親功臣)의 처로서 궁핍하게 살고 있는 자들도 진휼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위봉이 또 아뢰기를,
"조창기(趙昌期)가 지난번 소회(所懷)를 토로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뒤 전조(銓曹)가 다시 비의(備擬)를 하지 않고 있으니, 일을 말하는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가 결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까닭을 물었는데, 수항이 아뢰기를,
"전조가 의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또한 어찌 영원히 막으려는 뜻이야 있겠습니까."
하였다.

 

3월 7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월 8일 무인

이세익을 승지로 삼고, 특명으로 조창기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전조(銓曹)가 막고 통하게 하는 것을 전횡하는 것이 이미 조가(朝家)의 법령이 아니고 보면 오늘날처럼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에 듣건대, 전 지평 조창기가 소를 올렸다가 거스름을 당해 전조로부터 기꺼이 수용(收用)되지 않고 있다 하기에 내가 괴이하게 생각하면서 이 폐단을 시정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오늘 정사(政事)에서 지평을 더 의망하라고 명을 내린 뒤에 특별히 추고할 것을 명하고 도로 망단(望單)을 내려 보냈으니 이는 실로 범연한 뜻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사를 하는 관원의 입장에서는 계품했어야 마땅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으로 책임을 메꾸려 하였으니,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군 그 정상이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는다면 장차 뒷날을 징계할 길이 없을 것이니, 이조 참의 이익상을 먼저 파직한 다음에 추고하라."

 

지평 임상원(任相元)이 아뢰기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민섬은 군병을 가혹하게 부리면서 오로지 탐람한 짓을 일삼고 있는데, 각진(各鎭)의 군포(軍布)를 쓰다 남은 베라고 칭하고서 버젓이 가까운 자에게 주는 등 오직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가 하면, 영내(營內)에서 사사로이 물품을 판매하면서 심지어는 변장(邊將)을 강제로 차원(差員)으로 정하고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간교하게 이익을 취하고 있으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임치 첨사(臨淄僉使) 노욱은 아무리 민섬의 관하(管下)라고는 해도 직접 사사로이 판매하는 일을 관장하면서 차원이 된 것을 달갑게 여기고 있으니, 너무나도 비열하고 무식합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네 차례째 아뢰자 따랐다.

 

승지 정석(鄭晳)·이세익(李世翊)이 아뢰기를,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이조 참의 이익상(李翊相)을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셨는데, 말씀하시는 뜻이 지극히 엄하시어 ‘전횡하며 방자하게 행동했다.’는 표현으로 분부하셨습니다. 정관(政官)이 계품하지 않은 것이 무슨 곡절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체례(體例)에 구애받은 나머지 독정(獨政)029)  하는 날에 무턱대고 의망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굴었다는 것은 본정(本情)이 아닐 것이니, 파직한 뒤에 추고토록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9일 기묘

사간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지평 조창기(趙昌期)가 전일 상소한 말뜻이 상당히 편벽되었으므로 물의가 지금까지 비난하며 배척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어제 헌관(憲官)을 비의(備擬)할 즈음에 비록 몇 차례나 가망(加望)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마는, 의망해야 할 사람이 또한 부족하지 않았고 보면, 정관(政官)의 입장에서야 어떻게 성상께서 꼭 이 사람을 염두에 두고 계시리라고 억측해서 계품을 하여 오래도록 의망하지 않던 사람을 갑자기 독정(獨政)하는 날에 의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연신(筵臣)이 수용하라고 진달드린 말이 아직 결말이 나지도 않았고 또 거행 조건(擧行條件) 가운데 나오지도 않았고 보면 급급히 봉행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그리고 대관(臺官)은 일반 관원과는 같지 않은데 구차하게 비의했다가 정체(政體)를 무너뜨리기라도 한다면 이 또한 어찌 법관을 신중하게 가리는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전횡하며 방자하게 굴었다는 것은 결코 그의 본심이 아닌데, 그만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는 벌을 가하며 한결같이 이토록까지 엄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들이 평소 성명에게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조(銓曹)가 벼슬길을 통하게 하고 막는 것을 전횡하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연신(筵臣)이 진달한 뒤이고 보면 해조가 절대로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지금 ‘성명의 뜻이 꼭 이 사람에게 있는 줄을 어떻게 억측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내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익상(李翊相)의 죄는 파추(罷推)한 것만도 가볍다고 할 것인데, 지금 번거롭게들 아뢰고 있으니 내가 놀라울 뿐이다."
하였다.

 

홍문관 교리 이규령(李奎齡), 부수찬 최후상(崔後尙) 등이 상차하기를,
"인물을 진퇴시키는 것이 전조(銓曹)에 속한 일이긴 하지만 청망(淸望)에 통하게 되는 여부는 실로 공의(公議)에 말미암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가 허락하지 않으면 이미 청망을 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조가 마음대로 주의(注擬)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바로 공의를 중하게 여기고 관방(官方)030)  을 신중히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지난번 조창기(趙昌期)가 헌직(憲職)에 몸담고 있을 때 상소 하나를 올렸다가 대각(臺閣)의 신하에게 크게 배척을 받았는데, 대각에서 ‘기회에 편승하여 사의(私意)를 개입시켰다.’는 등의 말로 그의 마음가짐을 극론했고 보면, 그 말이 비록 피혐(避嫌)하는 계사(啓辭)를 인해 나온 것이긴 하나 실은 그를 탄핵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조가 경솔하게 다시 그를 청망에 주의할 수 없었던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어제 판서와 참판이 모두 나오지 않아 참의 혼자 독정(獨政)하였고 또 낭관도 없었고 보면, 어떻게 공의가 허락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함부로 대직(臺職)에 의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익상(李翊相)이 가망(加望)하라는 분부를 여러번 받고서도 끝내 감히 그를 거론치 못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신중했다고 평한다면 그것은 그래도 되겠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그의 본심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차근차근하게 따져보지 않으시고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신 나머지 뜻밖에도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임금은 한 마디 말이라도 신중하게 해야 하고 국가에서 벌을 시행하는 도리는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하는 법인데, 이 점이야말로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생각지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혀 그 이치를 살피셔야 할 부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고, 지평 임상원(任相元)도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양사(兩司)가 한 달여 동안 쟁집(爭執)했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다.

 

3월 11일 신사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상차하기를,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조창기(趙昌期)를 지평에 의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정관(政官)을 파추(罷推)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책임만 메꾸려고 가망(加望)한 채 계품을 하지 않았다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망하라고 명을 내리신 뒤에 의망해야 할 사람이 모두 유고 상태에 있었다면 차례로 거론하여 계품하는 일이 혹 있을 수 있고, 상께서 이름을 지적하시며 의망하지 않는 이유를 하문하셨다면 역시 그 곡절을 진달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후로 가망한 사람들이 모두 조창기보다 못한 자들이 아니었고 보면 책임만 메꾸려 했다고 말할 수 없고, 기타 조창기와 같은 자가 또 한두 사람뿐이 아니었고 보면 이미 차례로 거론하여 계품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하문하시는 일도 없었고 보면 어떻게 성상께서 꼭 창기에 뜻을 두고 계신다는 것을 미리 알아서 계품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창기의 형이 현재 헌직(憲職)에 있으니, 설령 창기가 무고하여 의망될 수 있다 하더라도 정관(政官)이 친혐(親嫌)을 따지지 않고 의망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메꾸는 짓이라고 할 것인데, 의망하지 않은 것이 도대체 무슨 죄가 된단 말입니까. 더구나 정관이 된 자가 주의(注擬)할 즈음에 반드시 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미리 알아서 취사(取舍)를 한다면 앞으로 번질 폐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갑자기 진노하시어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굴었다는 것으로 그의 죄안(罪案)을 삼기까지 하셨으니, 성명께서 혹 깊이 생각하셔야 되는 점에 있어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당초 창기가 소를 올린 것에 대해서는 그의 마음씨와 의논드린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논할 것 없이 그가 언책(言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면서 소회를 진달드리기만 했었다면 그래도 빠져나갈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답이 내린 뒤에 근거없이 인피하며 전도된 거조를 취한 것 같은 것은 참으로 그의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일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언자(言者)가 조정을 어지럽힌다고 걱정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런 것을 창기에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역시 너무도 당치 않은 일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단지 일개 어리석고 망령된 가소로운 사람일 뿐이라고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 때문에 끝까지 수록(收錄)하지 않는다면 지나친 일이 될 듯도 싶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급급하게 다시 청선(淸選)에 두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신이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조창기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있자 성명께서 그 연유를 하문하셨는데 신도 대략 답변드린 것이 있었습니다만, 그때 생각에는 창기의 소를 일단 비국에 내린 이상 시비를 논변할 때가 자연히 있겠기에 미리 앞질러 스스로 번거롭게 진달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사태가 이렇게까지 발전하여 성덕(聖德)에 누를 중하게 끼치게 되었는데, 이는 분명 신이 제대로 사리를 따져 진달드리지 못함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마음 속으로 더욱 의심하게 하고 거조가 중도에 맞지 않게 해드린 것이니, 신이 이에 더욱 심하게 부끄럽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치를 살피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어들이시고, 이어 신을 체직시키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바로잡지 못한 죄를 드러내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소를 살펴보고 내가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날 경연에서 나온 이야기를 경이 상세히 들었고 한두 마디 말도 하였는데, 지금 이렇게 말을 하다니 이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내가 꼭 가망(加望)하게 한 것이 만약 ‘오늘날 다른 사람 가운데 이 사람을 뛰어넘을 자는 없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라면, 경의 말이 또한 안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어제의 비망기를 본다면 역시 내 뜻을 알 것이다. 내 뜻이 그저 전횡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었고 보면 경이 어떻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인물을 진퇴시키는 것이 전조(銓曹)의 직분이라 하더라도 벼슬길을 막고 통하게 하는 것을 전횡하기까지 하는 것은 실로 영갑(令甲)이 아니다.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그 소가 혹 어리석고 망령스러웠는지는 모르나 일단 음험하고 사특한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보면 일개 임규(任奎)의 광언(狂言) 때문에 전조가 전횡하여 벼슬길을 막아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조창기의 소를 이미 살펴본 뒤였고 잇따라 가상하게 여겨 포상 장려하는 비답을 내렸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묘당에서도 품계하는 일이 있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전조가 억지로 공의(公義)라고 하면서 속에서 길을 막아버렸으니, 이것이 전횡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일단 경연 석상에서 나온데다가 길을 막은 것이 또 온당한 조치가 못되었고 보면 정관(政官)이 된 자의 입장에서는 황공해 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마땅할 텐데 방자하게 길을 막고 자신이 앞장서서 떠맡았으니, 국법을 무시한 죄를 따지면 어찌 파추 정도에 그치겠는가. 이 정도로 그친 것만도 말감(末減)한 것이라 하겠는데, 경이 이처럼 말하고 또 면직을 청하다니 내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조창기의 소는 그 의도한 바가 본디 매우 아름답지 못하지만 그 말까지 모두 그릇된 것은 아니었고, 임규가 배척한 것이나 이익상이 길을 막은 것은 그 의도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질투하는 아낙네와 같은 혐의를 면치 못하는 것이었으니, 그렇다면 상의 마음 속에 있는 의혹을 씻고 생각을 돌리게 하기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조위봉(趙威鳳)이 기회를 틈타 부추키어 상의 마음을 혼란시켰는데 조창기와 이익수(李翼秀)의 소가 서로 잇따라 나오면서 그 화(禍)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게 되었다. 예로부터 임금이 제대로 간위(奸僞)를 판별하지 못한 채 오직 당론(黨論)만을 미워할 경우 소인들에 의해 잘못되지 않은 적이 드물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창기는 역적 남(枏)의 처형(妻兄)인데, 그러고 보면 그가 상의 마음 속의 은미한 점을 엿보고 영합한 것도 대체로 유래한 바가 있다고 하겠다.’ 하였다.

 

3월 13일 계미

집의 조원기(趙遠期)가 ‘창기(昌期)의 형이라서 감히 본부(本府)의 계사에 동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3월 14일 갑신

지평 조창기(趙昌期)가 시관(試官)으로서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아 파직에 해당되었는데, 상이 전지(傳旨)를 받들지 말라고 명하였다.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차자에 대해 미안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상소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어진익(魚震翼)을 헌납으로, 성호징(成虎徵)·김해일(金海一)을 장령으로, 정재희(鄭載禧)를 집의로 삼았다.

 

3월 15일 을유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이 병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3월 16일 병술

예조가 아뢰기를,
"관무재(觀武才)의 초시(初試)를 이미 18일로 정했는데, 예전부터 춘당대에서 관무할 때에는 문신이나 유생의 정시(庭試)를 대거(對擧)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유생의 정시 차례인데 그대로 거행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우의정 이경억(李慶億)이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사은 겸 동지사 창성군(昌城君) 이필(李珌)·부사 이정영(李正英)·서장관 강석창(姜碩昌)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3월 17일 정해

우박이 오고 눈발이 뿌렸다.

 

3월 18일 무자

김휘를 대사헌으로, 김익경을 대사간으로, 윤증을 진선으로 삼았다.

 

3월 20일 경인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흰 기운이 무지개처럼 햇무리에 잇닿았다.

 

안진을 승지로 삼았다.

 

3월 22일 임진

상이 팔의 통증 때문에 뜸을 떴다. 약방 도제조 김수항(金壽恒)이 정세가 편키 어려운 점을 진달하고 이어 전관(銓官)의 잘못이 없음을 언급하니, 상이 일렀다.
"내 뜻은 전후의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그런데도 경이 이처럼 말하는 것을 보면, 대신을 대하는 나의 도리에 극진하지 못한 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일 텐데, 서로들 닦고 면려하자는 말 이외에는 다시 더 이를 말이 없다."

 

3월 24일 갑오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가 상소하기를,
"영릉(寧陵)의 국장을 치른 지 지금 어언 15년이 되는데 그동안 회칠하고 수리하는 공사가 어느 해이고 벌어지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사사로이 말하기를 ‘옛날 제왕의 장례에 흙과 돌로 능을 쌓았어도 어제 만든 것처럼 완연하기만 한데, 어떻게 능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잇따라 수리하는 일이 있게 되었단 말인가. 당초 능을 옮기자는 의논이 있었는데도 곧바로 또 정지되었고 보면 기울어지고 무너진 곳이 그리 대단치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텐데, 매년 수리하는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아 민간에 지극히 낭자하게 말들이 전파되고 있으니, 아무래도 직접 봉심(奉審)하여 허실을 짐작한 뒤에 상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갑진년031)   초겨울에 능에 가서 재랑(齋郞)에게 요청하여 상세히 봉심하였더니, 전체적으로 볼 때 능의 서북방이 기울어진 듯하였고, 사면의 가석(駕石)·병석(屛石) 및 상석(裳石)·지대석(地臺石)도 모두 틀어져 어긋나 틈이 생겼는데 작은 것은 손가락 하나쯤 들어갈 만하고 큰 것은 두 손가락이 들어갈 만하였으며 앞쪽의 지방석(地傍石)과 상석 사이에는 더욱 크게 틈이 벌어져 팔뚝 하나가 들어갈 만하였고, 틈이 속에서 얼마나 깊이 벌어져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그 속이 꽤나 비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봉분한 능의 지세가 평균적으로 아래로 내려와 다른 능과는 같지 않기에 본래 이러했는가 의심스러워 이어 능관(陵官) 및 수복(守僕)에게 물어 보았더니, 대답하기를 ‘능을 쌓는 것은 본디 일정한 규례가 있는 법인데 어찌 처음에 이렇게 할 리가 있었겠는가. 국장을 치른 이듬해 능을 쌓은 지대석이 배치된 곳이 큰 비로 인해 함몰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흙을 쌓은 것이 미처 견고하게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단 밑으로 내려온 돌을 다시 높이 올려 놓기가 어려운 형세였기 때문에 지면의 흙을 파내고 대석이 노출되게 하였으므로 지세가 평균적으로 하향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비가 올 때 필시 물이 고일 텐데 어떻게 하는가?’ 하니, 수복이 말하기를 ‘비가 올 때는 발이 빠질 정도로 고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빠져 나간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묻기를 ‘여름엔 축축하고 겨울엔 얼어붙어 사초(莎草)가 필시 잘 자라지 않을 텐데 그것은 또 어떻게 하는가?’ 하니, 수복이 말하기를 ‘과연 그런 걱정이 있다. 그래서 매년 새 사초로 바꾸고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대석이 능의 봉분이 무너져 내리는 통에 또 안으로 기울어지면서 밖으로 치올려져, 비가 올 때면 물이 스며들어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면포(綿布)로 적셔서 제거하곤 한다.’ 하였습니다.
이상은 갑진년에 봉심할 때 듣고 본 것인데, 그동안 1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가면 갈수록 놀라운 말들이 나오기에, 신이 몇 달 전에 다시 능소에 나아가 재랑에게 청한 뒤 수복과 함께 능 위로 나아가 다시 한번 봉심하였습니다. 그 결과, 병석에 틈이 생겼을 뿐만이 아니라 파손까지 되었고, 지방석과 상석 사이에 난 틈이 예전보다 훨씬 커졌으며, 여러 돌들이 전일 살필 때보다 심하게 어긋나 있었습니다.
신이 수복에게 묻기를 ‘지방석과 상석 사이에 틈이 난 곳을 이미 회로 발랐으면 다시 틈이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이처럼 틈이 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매년 회를 바를 때 틈 내부가 텅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에 회를 채워 넣었으나 채우는 대로 빠져버리고 붙어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에 회를 바를 때에는 부득이 먼저 기와와 잔돌을 무수히 채워 넣은 뒤에 회로 때웠는데 때운 뒤에도 또다시 틈이 벌어졌다. 이는 상석과 지대석이 늘 물러나 빠지는 상황에 처해 있는 관계로 바른 회가 굳지를 못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그러면 기와와 잔돌을 쓴 양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수복이 말하기를 ‘양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인부 5명이 3, 4차례 등에 짊어지고 와서 모두 쏟아 넣었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묻기를 ‘능 사면의 지세가 의당 높아야 하는데 지금은 후면이 이미 이처럼 평등하게 내려갔고, 지대석은 의당 지면보다 높아야 하는데 지금은 평지와 높이가 같아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빗물이 고이는 걱정이 없는가?’ 하니, 수복이 말하기를 ‘장마 비가 올 때 물이 고이는 걱정은 없으나 습지가 되는 것은 면할 수가 없다. 그런데 급히 퍼붓는 비를 만나면 물이 빨리 빠져나가지 못해 지대석 위에 가득 차곤 하니 보기에 미안스럽기 그지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전후로 듣고 본 것이 대략 이와 같고, 능의 봉분이 기울어지고 함몰된 것이 이미 저와 같고, 빗물이 고이는 것이 또 이와 같고 보면, 땅속의 일을 감히 함부로 헤아릴 수는 없지만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매년 수리를 한다고는 하지만 외부의 회를 바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도 곧바로 틈이 벌어져 빗물의 유입을 금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보면 고식적인 것일 뿐 영원한 안택(安宅)을 마련해드리는 도리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기와와 잔돌로 채워 넣었다니 어찌 더욱 미안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묘소를 잘 가려 편안히 모신다.’032)  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만세의 유택(幽宅)에 이미 이런 걱정이 있게 되었고 보면, 어떻게 편안히 모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능침(陵寢)에 대한 일을 경솔하게 함부로 의논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일이 이미 이렇게까지 된 이상 변통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천릉(遷陵)하는 일은 중대하여 행하기 어렵다고 여기신다면 대신 및 예관(禮官)에게 자문을 구하소서. 그리하여 《예경(禮經)》을 참작해 능침의 봉분을 고쳐 만들어서 선왕의 묘소가 만세토록 편안한 유택이 되게 하소서. 그러면 종사(宗社)와 신민의 다행이 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혼 역시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필시 즐거워하실 것이니, 어찌 우리 나라에 억만년 오래도록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소를 들이자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유거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왔다.

 

3월 25일 을미

상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였다.

 

조형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6일 병신

상이 춘당대에 나아가 무사를 모아 기예를 시험하고 유생에게는 제술 시험을 보였는데, 문과(文科)에서 유명현(柳命賢) 등 10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 채사웅(蔡嗣雄) 등 30인을 뽑았다.

 

3월 27일 정유

상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하였다. 상이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과 어영 대장 신여철(申汝哲)에게 명하여 들어와 활을 쏘도록 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노장(老將)이 오래도록 활을 잡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시어 들어와 쏘도록 하셨으니 성상의 의도가 참으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주장(主將)이 된 몸으로 인솔한 군교(軍校)들과 우열을 비교하게 하는 것은 사체상 타당치 못할 듯도 싶습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이 왕덕용(王德用)에게 활을 쏘도록 명했을 때 덕용이 여러 차례 사양한 뒤에 쏘아 세 발을 제대로 적중시켰기 때문에 마침내 미담(美談)이 되었습니다만, 지금 이 두 사람이 혹시라도 적중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역시 흠사(欠事)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그만두었다. 상이 승지 신정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보건대, 선조(先朝) 때 가선(嘉善) 이상의 무신들은 들어와 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중신(李重信)·이화악(李華岳)·이창욱(李昌彧)이 감히 스스로 편할 마음을 내어 거안(擧案)033)  에서 빠졌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승지는 나가서 열 대씩 곤장을 쳐라."
하였는데,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중신의 일이 참으로 가증스럽기는 합니다만 벌을 시행할 때는 당하(堂下)와 차이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반으로 줄이도록 명하였다. 유혁연도 화악의 나이가 70이 넘었다고 아뢰니, 상이 곤장 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박세견(朴世堅)을 형조 참의로, 이지무(李枝茂)를 판결사로 삼았다.

 

3월 28일 무술

판중추부사 정치화(鄭致和)가 상차하기를,
"방금 삼가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의 상소에 나오는 내용을 보건대, 지극히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영릉(寧陵)에 탈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당초 감독을 착실히 하지 못한 소치인데, 신이 도감 당상으로서 응당 죄벌을 받아야 하니, 직명을 체차시켜 주시고 이어 법부에 내려 신의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고, 좌의정 김수항(金壽恒)도 상차하기를,
"영릉의 석물(石物)에 벌어진 틈을 회로 메꾼 정상에 대해서는 성상께서도 자세히 아시고 아랫사람들도 모두 들은 바입니다만, 그 일이 막중하고 막대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릴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만약 당초 감독했던 사람을 개인적으로 감싸주려고, 알고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 큰 인신(人臣)의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이 지난해 선공감 제조로서 다시 회를 바르는 일에 나아가 참여했을 때 이미 상세히 봉심(奉審)했었는데 세월이 가장 가까우니, 만약 말하지 않은 것을 죄로 삼는다면 신이야말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그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엄한 주벌(誅罰)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모두에게 안심하고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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