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경자
상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고 시신(侍臣)에게 시험삼아 활을 쏘아보도록 명했는데, 각 기예마다 1중(中) 이상을 받은 자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사간 송창(宋昌)이 전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을 때 포흠(逋欠)된 조곡을 허록(虛錄)한 일 때문에 인피하여 체직되었고,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삼았다.
4월 2일 신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접위관(接慰官)의 장계를 상의 앞에서 읽고 아뢰기를,
"관소(館所)를 옮겨달라는 왜인의 청에 대해 우리쪽에서 줄곧 모호하게만 답변할 수 없으니 명백하게 답해야 하겠습니다. 설령 이 일로 인해 도주(島主)가 강호(江戶)에 죄를 얻어 죽고 양국이 우호 관계를 단절하게까지 되는 등 모두 그가 말한 대로 된다 할지라도 따를 수는 없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될 리가 또 어찌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동래 근처의 관방(關防)을 설치하지 않은 지역을 청한다면 다시 의논해 볼 수도 있지만 웅천(熊川)의 경우는 결코 들어줄 수 없다는 내용으로 답변토록 하라."
하였다. 상이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를 불러오게 한 뒤 그에게 하문하기를,
"상소한 내용 외에 또 할 말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봉심(奉審)했을 때 참봉이 말하기를 ‘기해년 국장 때에 감독하는 관원이 마침 병에 걸려 보토(補土)하는 공사를 기한 내에 끝마치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도감이 독촉하는 바람에 야간에까지 공이로 다지면서 공사를 끝마치기에 급급한 나머지 나무 조각을 많이 사용하여 메꿨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썩어 날이 갈수록 점점 기울어지고 무너지게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전일 능관(陵官)이 빗물이 고인 상황을 예조에 보고했더니 며칠이 지난 뒤에야 와서 살폈는데 고였던 물이 이미 다 말라버리고 없자 능관이 속인 것이라고 하면서 도태시켜 버렸으므로 그뒤로는 감히 다시 보고하지 않았다 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나무 조각으로 메꿨다는 이야기야말로 놀랍기 그지없는데,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적발해서 효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대해서는 서서히 처리하도록 하고, 능관을 도태시켰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익수에게 하문하기를,
"현재 틈이 벌어진 상태가 갑진년에 보았을 때와 비교해서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회와 돌 사이가 마치 인가의 대청 마루에 댄 판자 사이의 틈과 같은데, 나무자로 재보니 깊이 들어가기만 할 뿐 걸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전에 보았던 것에 비해 훨씬 틈이 넓어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갑진년에 봉심하고 나서 왜 진달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익수가 아뢰기를,
"즉시 상달하려고 했습니다만 부형(父兄)이 혹 죄를 입을까 염려하여 울며 금지하였기 때문에 생각이 있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야 비로소 죽음을 무릅쓰고 앙달했는데 다행히도 사대(賜對)하는 은혜를 받았으니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가령 전폐(殿陛)의 돌이 기울어져 바르지 못하게 된 경우일지라도 개조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텐데, 능침이 얼마나 중한 관계가 있는 일인데 한 사람도 실상대로 상달한 자가 없었단 말입니까. 정말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거리끼는 일이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던 것을 말하였으니 정말 가상하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기와와 자갈로 보충해서 메꿀 때에 어떤 사람이 봉심했는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회를 바를 때의 감역관(監役官)이 의레 감독했을 텐데 그가 어찌 감히 이렇게 했겠습니까. 지금 모름지기 외면의 석회를 떼어내고 틈 속의 깊이와 넓이 및 기와와 자갈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일일이 봉심해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병 때문에 직접 살피지를 못하니, 대신·육경·삼사(三司)의 장관·한성 판윤이 이익수와 함께 같이 가서 봉심토록 하라."
하였다.
정언 박태상(朴泰尙)이 계부(季父)인 세당(世堂)이 사간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3일 임인
헌납 어진익(魚震翼) 등이 아뢰기를,
"동부승지 이세익(李世翊)은 처음 임명되었을 때부터 이미 물의가 있었는데 구차하게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조롱하는 소리가 끝이 없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조창기(趙昌期)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중하게 시휘(時諱)를 저촉하여 폐고(廢固)된 것을 스스로 달갑게 여기고 있었는데, 중비(中批)034) 로 특별히 제수하는 은전이 외람되게도 미천한 신에게까지 미쳤고 사태가 시끄럽게 발전하여 정관(政官)에게까지 죄가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전보다 더 일층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아무리 억지로 참으며 반열에 나아가고 싶어도 위로 임금의 사랑을 욕되게 하는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본디 진정한 천하의 공론이 있는 법이고 인심은 지극히 신령스러워서 시비를 속이기 어려운 법이니, 신이 시끄럽게 자신을 변명하여 거듭 전하를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현재 나라 안팎으로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염려되고 위태로운 일이 갖가지로 일어나고 나라의 형세가 날로 쇠미해져 백성의 생활이 절박한 상태이므로 비상한 걱정거리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만백성이 함께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집사된 자들은 이것을 걱정하지는 않고 안색을 바꾸고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오활하게 일을 말한 한 신하를 배척하느라 해를 넘기고 있는데, 시간이 오래 흘렀어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세상을 다스리는 것과 관계된 일이겠으며 또한 어찌 정신(廷臣)에게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의 내용은 실로 분개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근일 세도(世道)를 보건대, 색목(色目)에 관심을 갖고 전적으로 이를 뿌리박아 심는 일만 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색목을 비판하는 이야기만 들으면 매우 미워하며 반드시 암암리에 함정에 빠뜨리려 생각하고 있다. 그대가 혐의를 둘 것이 뭐가 있는가. 속히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4월 4일 계묘
헌납 어진익(魚震翼)·정언 홍만종(洪萬鐘)이 아뢰기를,
"지평 조창기가 상소한 내용이 아름답지 못해 물의에 비난을 받고 오래도록 청반(淸班)에 비의(備擬)되지 못했는데, 지난번 헌직(憲職)에 특별히 제수하던 날 전관(銓官)을 파추(罷推)시키라는 명이 있게까지 되자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모두 명을 환수하기를 청했고 보면, 여론이 어떠한지를 이에 의거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조창기의 입장에서는 황공하고 부끄러워 몸을 움츠리며 자신을 탄핵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마땅할 텐데, 그만 감히 사직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했는가 하면, 심지어 천하의 공론이니 시비는 감추기 어렵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자기 견해를 스스로 정당화하고, 또 외우내환의 상태인데도 이를 염려하지는 않고 있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정신(廷臣)을 기롱하며 배척했으니, 이것이 어찌 대관(臺官)이 자책하는 뜻으로 면직을 청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창기가 전에 올린 상소는 그 말이 어떠했는지를 논할 것 없이 일단 소회를 진달한 것이었고 보면 그래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태가 발전하여 정관(政官)에게 벌이 미치게 된 뒤에 와서도 공의와 대립하며 이기려고만 하고 스스로 반성할 줄은 모르고 있으니, 염우(廉隅)의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암암리에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말한 것은 대체로 이와 같은 유를 두고서 말한 것인데, 뜻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하였다. 진익과 만종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러나 뒤이어 패(牌)에 응하지 않아 체직되었다.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등이 영릉(寧陵)을 봉심(奉審)할 일로 나가자 상이 인견하고, 능 위의 크고 작은 틈들을 일일이 자로 재는 동시에 그림으로 그려 오라고 명하였다.
4월 5일 갑진
상이 영릉을 봉심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김수항이 도형(圖形)을 가지고 나아가 아뢰기를,
"전에 봉심했을 때에는 틈이 벌어지기는 했어도 그저 대단치는 않았는데, 지금은 예전과 크게 달랐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비해 크게 다르던가?"
하자, 수항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인(寅)·묘(卯)·진(辰)의 세 방향의 틈 벌어진 것이 더욱 심했고 그 나머지도 모두 틈이 벌어졌습니다만 오직 서쪽 면만은 그리 대단치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회 바른 곳이 거의 한 치나 떨어졌는데 능관(陵官)이 어째서 보고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회 바른 것이 그대로 있다 해도, 회와 돌 사이가 전혀 문제없는 곳과는 다르기 때문에 틈이 벌어지는 것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능의 경우는 지대(地臺) 아래에 모두 엄석(掩石)이 있는데, 이 능은 당초 엄석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기울어지고 빠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실(宗室)035) 이 말한 바 ‘기와와 자갈을 채워 넣었다.’고 한 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가 말한 바 ‘상석(裳石) 사이에 틈이 더욱 크게 벌어져 팔뚝 하나가 들어갈 만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던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팔뚝만한 크기도 들어갈 만하였는데, 돌의 두께가 3척(尺)이나 되는 관계로 구멍 역시 꽤나 깊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실이 말한 바 ‘능관을 도태시켰다.’는 일은 조사했는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예조의 《등록(謄錄)》을 조사해 보아도 그런 일이 없었고 능소(陵所)에 도착해 물어 보아도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송민(宋旻)이 참봉으로 있을 때 석물(石物)이 파손되었다고 예조에 보고하자 당시 참판 남용익(南龍翼)이 능소에 나아가 봉심하였는데도 송민이 와서 대기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추고를 청했는데 상께서 특명으로 파직시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나무 조각을 채워 메꿨다.’는 이야기를 수호군(守護軍)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대답하였는데, 상한(常漢)은 말을 본래 바꾸기를 잘 하는 법이라서 참봉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역시 그런 말을 발설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실과 대면하여 변론하게 했는데도 끝내 귀일되지 않아 조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신(諸臣)은 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상석(裳石)에 벌어진 틈은 다시 고쳐 놓을 수가 있겠지만 가석(架石)과 병석(屛石)은 결단코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조종조에 봉분을 개조한 일이 또한 있었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목릉(穆陵)과 장릉(章陵)도 모두 능을 옮겼을 뿐인데, 어찌 봉분을 개조했던 때가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능 위의 석물을 개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조종조에 봉분을 개조한 일이 없었다면 능을 옮기는 일이 극히 중대한 일이긴 하지만 조용히 강정(講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조종조에 봉분을 개조한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미안한 정도로 보면 봉분을 개조할 때 진동시키는 것이 그래도 재궁(梓宮)을 옮겨 움직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듣건대, 선묘조(宣廟朝) 신해년 무렵에 북도(北道)에서 능의 봉분을 개조한 일이 있었다 하는데, 그때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 등이 모두 조정에 있었으니, 강구하고 조치한 것들이 필시 허술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교리 이당규의 대답 역시 만기의 말과 같았는데, 상이 이르기를, "봉분을 개조하자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불안한 점이 있다. 지금 개조하더라도 오래도록 편안하게 될지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북도 제릉(諸陵)의 봉분을 개조한 옛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뒤이라서 재궁을 옮겨 모실 수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런 일을 했던 것이니, 어떻게 오늘날의 일과 동격에 두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매번 회만 바르면서 고식적으로 일 처리하는 것은 결단코 할 수 없다."
하니, 수항 등이 아뢰기를,
"신의 소견도 그와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신해년에 봉분을 개조한 일과 영릉(英陵)을 옮겨 모셨을 때의 사유를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개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능의 사면 팔방 어디고 완전한 곳이 없는데, 그때 일을 감독한 신하가 뜻을 두고 감독했더라면 어찌 이런 걱정거리가 생겼겠는가. 그때의 도감 당상 이하를 모두 나문(拿問)하라."
하였는데, 승지 신정이 아뢰기를,
"기해년 산릉 도감(山陵都監)의 당상으로는 판부사 정치화(鄭致和)밖에 없는데, 대신을 곧장 나추하는 것은 일찍이 전례(前例)에 없던 일이니,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나문하지 말고 결말을 기다려 보라."
하였다.
4월 6일 을사
한재(旱災) 때문에 기우제를 행하였다.
기해년 산릉 도감의 낭청(郞廳)이었던 신명규·이정기·한시중·송지렴·이최만과 차지 내관(次知內官) 윤완 등을 금부에 내렸다.
4월 8일 정미
윤형성을 헌납으로, 서문상·이당규를 정언으로, 이하진을 필선으로, 권유를 사서로, 조원기를 문학으로 삼았다.
우의정 이경억(李慶億)이 열한 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4월 10일 기유
시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대학(大學)》의 강을 다 마쳤기에 본원의 관원이 영(令)을 받들고 사부(師傅)에게 가서 다음에 강할 책을 물어 보았더니,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대학(大學)》을 완전히 익힌 뒤에는 《논어(論語)》를 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4월 11일 경술
부수찬 조위봉(趙威鳳)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영릉(寧陵)을 봉심(奉審)한 공경과 대시(臺侍)가 돌아와서 이익수(李翼秀)의 상소가 빈말이 아니라고 아뢰자, 상께서 ‘능의 사면 팔방 어느 곳 하나 완전한 데가 없다.’고 분부하셨다 합니다. 영릉에 봉안한 지 지금 15년밖에 되지 않는데도 이런 결과가 빚어졌고 보면 만세토록 모실 교산(喬山)036) 에 대한 염려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옛날 송 인종(宋仁宗)을 영소능(永昭陵)에 장사지낼 때에 황당(皇堂)의 마룻대가 파손되었는데 제사(諸使)가 덮어두려 하자, 한기(韓琦)가 정색하고 말하기를 ‘파손되었으면 바꿔야 마땅하다. 장사지낼 기일을 어기는 것이나 비용을 더 쓰는 데 따른 책임이야 그래도 감당할 수 있지만, 만약 구차하게 덮어두었다가 뒤에 무너지는 일이라도 생겨 인주(人主)가 의심하는 결과를 빚게 되면, 신하로서 어떻게 그 책임을 당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때 감독했던 신하들이 뒤에 무너질 걱정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그저 일 끝내는 것만을 일삼았으니, 한기의 말과 비교해 볼 때 어떻다 하겠습니까.
따라서 공사를 감독한 관원이야 물론 죄가 있습니다만, 흙을 쌓고 돌을 배치한 곳에 이상이 발생했다고 보고한 뒤로부터 전후로 봉심한 신하들이 그저 틈이 벌어진 곳에 회로 바르는 것만 일삼았을 뿐 사면 팔방이 염려스러운 상황을 상에게 아뢰지 않았는데, 살펴보면서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면 그래도 혹 괜찮을 수 있지만 만약 알고서도 아뢰지 않았다면 그 죄는 실로 감독한 관원보다 크다고 할 것입니다. 능침을 봉심하는 일이야말로 국가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앞뒤를 재어보고 주저하며 사실대로 보고드리지 않았으니, 이런 습성이 계속 조장될 경우 신성한 능침을 훼손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전하께서 듣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신은 두렵기만 합니다. 전하의 효심을 몸받지 못하고 감히 멋대로 속인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다시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능의 일이 완전치 못하게 된 사실이 이미 오래 전에 드러났는데도 양사(兩司)가 침묵만 지키면서 전후 부실하게 봉심한 것이 옳지 않다고 거론하지 않았으니, 그 의도가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어리석은 신이 나름대로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어 감히 눈먼 소견을 진달드리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소를 살펴 보건대, 분개하는 뜻과 충성심이 언외(言外)에 넘쳐 흘렀으므로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찬탄하였다. 지금 선왕을 만세토록 모실 능침의 의물(儀物)에 완전한 곳이 없어 장차 부득이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전후로 봉심한 신하들이 있는 일을 없다고 하고 큰 것을 작다고 하였다면 참으로 죄를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내가 실상을 조사한 뒤에 조처하겠다. 근일 대각의 신하들이 앞뒤를 재며 주저하는 자가 많으니, 누가 기꺼이 나라를 위해 분발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정말 개탄스럽다."
하였다.
위봉은 조경(趙絅)의 아들로서 생김새가 소박하고 촌스럽게 생겼으며 말투가 공손하고 근실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사람됨을 모르고 있었는데, 급기야 이 소가 나오자 사람들이 비로소 크게 놀랐다.
4월 12일 신해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임인년037) 이후로 영릉(寧陵) 석물(石物)에 틈이 벌어진 곳을 봉심(奉審)하고 서계(書啓)한 것들을 일일이 찾아 들이라."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병으로 면직되었다.
4월 15일 갑인
상의 턱 아래 멍울이 곪아 침을 맞았다.
함경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망자가 2백여 인이나 되었고 심한 가뭄으로 양맥(兩麥)038) 이 누렇게 시들었는데, 영남의 곡식 7천 석을 그곳으로 옮겨 진휼하였다.
4월 16일 을묘
여성제를 대사간으로, 송창을 보덕으로, 윤지완을 설서로, 정태화를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4월 17일 병진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영릉을 전후로 봉심한 문서 중에 틈이 벌어진 곳을 분명히 헤아려 기록한 것이 매우 적다. 본릉(本陵)과 해조에 혹 근거할 문서를 남겨 둔 것이 있는가? 물어서 아뢰어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예조는 전부터 장부를 비치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4월 16일 본릉의 석물(石物)에 회를 바를 때 당상이 틈이 벌어진 곳과 회를 얼마나 깊이 채워 넣었는지를 개인적으로 기록해서 가져 왔는데, 그것은 찾아서 들였습니다. 그리고 본릉의 문서는 지금 이문(移文)하여 조사 중입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었다.
"본릉(本陵)에 물어보니 문서가 이미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하는데, 무신년부터 신해년까지 참봉이 보고한 서목(書目) 가운데 분명히 헤아려 기록한 것이 5장이 있기에 첨부(沾付)하여 들입니다."
4월 18일 정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후로 봉심한 문서를 상고해 보건대, 영릉의 석물에 틈이 벌어진 뒤로 모두 대신이 봉심했는데, 정미년에 봄과 가을 두 번 봉심할 때에는 해조가 따로 의견을 내어 다른 능의 예를 인용하면서 본조 당상만 보내 봉심하게 하였다. 그 마음 씀씀이를 논하건대, 대신이 나아가는 것은 중하게 여긴 반면 능에 대한 사체는 가볍게 여긴 것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영릉을 봉심하는 것을 어떻게 다른 능과 동격에 두고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능에는 언제 한번이라도 이런 변고가 있었던가. 정말 통분스럽고 놀랍기 그지없다. 그때의 당해 당상과 낭청을 모두 나국(拿鞫)하여 엄히 신문해 처리하라."
하였다. 이에 전 예조 판서 정지화와 경기 감사 이준구가 전 예조 참의였다는 이유로 모두 금부에 내려졌다.
장령 김해일, 집의 정재희, 지평 임상원, 대사헌 김휘, 정언 서문상·이당규, 장령 성호징이 조위봉(趙威鳳)의 상소에서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혐하였는데, 교리 이규령 등이 처치하기를,
"전후로 봉심했을 때의 서계(書啓)가 모두 있으니 지금 조사해 징험할 수 있는데, 과연 틈이 벌어진 실상에 대해 숨긴 점이 있다면 봉심한 신하들이 실제로 죄가 있고 양사(兩司)가 논하지 않은 것도 따라서 잘못이라고 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전하를 속였다는 죄를 억지로 가해서는 안 될 것이고 양사가 논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잘못을 확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렇게 처치한 것을 보건대 내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양사의 신하들이 국가의 막중한 일을 접하고서도 끝내 한 마디도 없었고 보면 이치상 그대로 두기가 어려우니, 모두 체차하라. 그러나 이당규와 서문상은 행공(行公)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그런데 당규와 문상도 곧 이어 재차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최일(崔逸)을 승지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최문식(崔文湜)·김수오(金粹五)를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홍처후(洪處厚)를 경기 감사로, 조원기(趙遠期)를 집의로 삼았다. 그런데 원기는 또 ‘본부(本府)가 한창 이익상(李翊相)을 파추(罷推)시키도록 내린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고 있는 중이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식년시(式年試)를 실시하여 문과(文科)에서 이익(李榏) 등 34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 이돈(李敦) 등 28인을 뽑았다.
4월 19일 무오
상이 예조 판서 조형, 참판 이은상, 참의 이혜를 불러 일렀다.
"이미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았는데도 봉분을 개조하는 규정이 없는 이상 산을 가려 능을 옮기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구릉(舊陵)을 열 길년(吉年)을 먼저 알고 싶으니 물러가 지사(地師)와 의논해 아뢰어라."
대사간 여성제(呂聖齊)가 직책을 띠고서 고향에 내려가면 안 되는 금법(禁法)을 범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체차되었다.
4월 22일 신유
이홍연을 대사간으로, 이규령을 집의로, 권유·정유악을 정언으로, 이일정을 문학으로, 김휘를 공조 참판으로, 신정을 호조 참의로, 이당규를 수찬으로, 어진익을 사서로, 홍주국을 교리로, 이수언을 겸 설서로 삼고, 이원정을 특별히 도승지로 제수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영릉을 전후로 봉심한 문서를 보건대, 참봉이 보고한 것 중에는 분수(分數)039) 를 기록한 것도 있고, 혹은 조금 크고 미세하다는 식으로 말해 분명히 알 수 없는 것도 있었는데, 봉심한 문서도 대략 이와 비슷하였다. 10년 전에 벌어져 있었던 틈은 또한 근일과는 같지 않을 것인데,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컸는데 별로 더 벌어진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봉심한 간격이 워낙 떨어져 있고 또 근거할 만한 분촌(分寸)이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위를 속인 죄를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신해년040) 8월에 봉심한 뒤 올린 서계(書啓)는 형편없기 그지없다. 그 속에 ‘인(寅)·묘(卯) 사이와 축(丑)·인(寅) 사이와 술(戌)·해(亥) 사이와 해(亥)·자(子) 사이의 가석(駕石) 및 인방(寅方) 병풍석(屛風石) 등처의 틈이 벌어진 곳에 바른 회가 모조리 떨어졌는데 예전에 비해 더 크게 틈이 벌어진 곳은 별로 없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신해년 이전의 서계를 거슬러 올라가 상고해 보니 그동안 봉심한 일이 없다가 무신년041) 3월에 이르러서야 봉심한 문서가 나왔는데 거기에도 분수를 기록한 곳은 없었다. 무신년 3월부터 신해년 8월까지는 도합 43개월로서 이미 3년을 지난 뒤인데 예전에 비해 더 틈이 벌어진 곳이 없다고 하다니, 그렇다면 어떻게 점차 틈이 벌어진 환란이 있게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회가 이미 떨어졌고 또 분촌을 기록한 곳도 없었고 보면 그 틈이 벌어진 곳의 크기를 무엇에 근거해서 ‘별로 더 크게 틈이 벌어진 곳이 없다.’고 말했단 말인가.
지금 예조가 추가로 들인 문서를 보건대, 이 다섯 방향의 탈 잡힌 곳을 지난해 4월에 비로소 고쳤는데, 그때 써넣은 분수와 이번에 봉심하고 서계한 분수를 비교해 보면 틈이 더 벌어진 것이 한 치쯤 되는 것도 있고 4, 5분(分)이 되는 것도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1년 내에도 이처럼 넓게 더 틈이 벌어지고 있는데, 3년이 지난 뒤에 봉심하면서 더 벌어진 틈이 없다고 하다니 더욱 놀랍기 그지없다. 그때 봉심한 관원들을 모두 나문하여 정죄하라."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그때 봉심한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대신은 바로 지금의 판부사 정치화였고 선공감 제조는 지금의 좌의정 김수항이었습니다. 대신을 조사받게 하려면 먼저 직첩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곧 구례(舊例)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파직시키고 우선 그들로 하여금 죄명(罪名)을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3일 임술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지난번 특별히 대신과 육경·삼사(三司)를 보내 영릉을 봉심하게 하던 날에 이조 판서 이상진(李尙眞)이 다리에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거만스럽게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상진의 다리 병이 과연 중해서 늘 환자로 자처한다면 사환(仕宦)이나 교유(交遊)도 모두 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관직과 좋은 작위를 병 때문에 받지 않은 적이 일찍이 없었고 친구와 왕래하는 일도 병 때문에 혹 빠뜨린 적이 한번도 없으면서 유독 임금 앞에 입시하는 일만은 늘 병을 이유로 거부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진정 거만하게 스스로 편할 도리만 취한 결과를 면키 어렵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산릉(山陵)의 일로 위아래 모두가 황급해 하고 있으니, 지금이 어찌 인신(人臣)으로서 병을 말할 때이겠습니까.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습니다. 만약 상진의 부모 묘소에 허물어지는 환란이 일어났다면 상진의 다리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끝내 가서 보지 않았겠습니까? 상진의 소위 다리 병이라는 것은 그저 무릎꿇어 절하고 주선하는 데 불편한 정도에 불과할 뿐 출입하고 나다니는 것까지 완전히 폐지한 상태는 아닌데 병을 핑계로 봉심하는 행사에 나아가지 않다니, 분의(分義)로 헤아려 볼 때 정말 터무니없기 짝이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은대(銀臺)042) 의 장관은 청직(淸職)으로서 임무가 중합니다. 그래서 전조(銓曹)가 필수적으로 공의를 채집하고 이력을 조사한 뒤에야 비로소 주의(注擬)하니, 이는 바로 그 선발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 제수된 도승지 이원정은 재상의 반열에 오른 뒤로 청현(淸顯)에 선발되는 일을 아직 거치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중비(中批)로 제수하시는 거조가 전조에서 주의한 일을 도외시하고 갑자기 나왔으므로 물의가 모두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대저 사람을 논하는 것이 그 실정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기 마련이고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면 임금 역시 그 마음 씀씀이를 의심하게 되는 법이다. 이는 무슨 말이겠는가. 이원정은 일찍이 대시(臺侍)를 거쳤고 여러 차례나 은대에 있었으며 은대에서 자급(資級)이 올랐으니, 그렇다면 ‘이력을 조사한다.’는 말은 논할 성격의 것이 못된다. 그리고 지금의 물의는 당론(黨論)을 우선으로 하고 공도(公道)는 그 다음이다. 만약 당론의 입장에서 취한다면 원정이 인망(人望)에 흡족하지 못하게 된 지가 오래라고 하겠지만, 공도로써 논한다면 여러 신하들에 비해 원정이 그렇게 뒤떨어질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지난날 풍파가 일어났던 일을 계속 집요하게 문제삼는다면, 그런 일은 그가 해가 넘도록 군읍(郡邑)에 가 있었으니 이제는 그만 둘 만도 한데, 지금 어찌하여 이토록 급급하게 한단 말인가. 중비(中批)로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본래 상격(常格)이 아닌데, 일체 해조의 정체(政體)에 따라 해야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대의 그와 같은 이야기는 매우 바르지 못하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집의 이규령이 현재 추감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4월 24일 계해
맹주서·여성제를 승지로, 홍주국을 집의로, 이규령을 교리로, 조원기를 보덕으로, 임상원을 사서로, 장선징을 겸 세자 좌부 빈객으로 삼고, 조형을 발탁하여 판의금으로 삼고, 김수흥을 특별히 임명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정언 정유악이 인피하기를,
"신이 이원정을 논한 것은 단지 관방(官方)의 체례(體例) 때문이었는데, 거꾸로 마음 씀씀이가 의심스럽다고 하셨으니, 이 모두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형편없어 신임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실정을 벗어난 성상의 분부를 혐의할 필요는 없다는 이유로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러나 유악이 패초에 응하지 않아 관례에 따라 체차되었다.
4월 27일 병인
명혜 공주(明惠公主)가 죽었는데, 상의 둘째 딸이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명혜 공주가 뜻밖에 죽었으므로 애통한 나머지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다마는, 다만 생각건대 부마(駙馬)의 위호(尉號)를 정하긴 했어도 아직 납채(納采)하는 예(禮)를 행하지 않았으니 이미 정혼(定婚)하고 길례(吉禮)를 올린 자와는 차이가 있는데, 위호를 그대로 두어야 할지 고사(古事)에 그런 일이 있는가 즉시 예관에게 물어 아뢰어라."
하니, 예조가 회계하여 아뢰기를,
"이는 국조(國朝)에 있지 않았던 변례(變禮)이고 또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딸을 시집보낼 길일(吉日)이 정해졌는데 딸이 죽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사위될 사람이 자최복(齊衰服)을 입고 조문하고 장례가 끝나면 벗는다.」 하였다.’고 했는데, 길일이 정해졌다는 것은 납채(納采)를 하고 기일을 정한 것을 말합니다. 지금 이 명혜 공주의 경우는 이미 납채하고 납폐(納幣)하는 일이 없었으니 길일을 정한 것과는 당연히 차이를 두어야 할 듯한데, 부마의 봉작(封爵)을 일단 정한 뒤에 여러 번 금중(禁中)에 출입한 것은 또한 고례(古禮)와 차이가 있습니다. 막중하고 막대한 변례를 신조에서 감히 경솔하게 단정할 수 없으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품정토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홍문관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품달케 하니, 홍문관이 아뢰기를,
"예관이 인용한 증자문의 ‘딸을 시집보낼 길일이 정해졌는데 딸이 죽었을 경우’라는 조항이 주(註)에 ‘일찍이 청기(請期)043) 했기 때문에 자최복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부 관계는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례가 끝나면 벗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길일이 정해졌다는 것은 바로 청기한 것을 의미하는데 육례(六禮)의 차례로 볼 때 청기는 납채·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의 뒤에 행해집니다. 그런데 이미 청기한 상태인데도 아직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말했고 보면 더구나 납채하기도 전의 일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 한 조항만 가지고도 근거할 예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부마의 봉작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이런 변례를 당한 경우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는데, 예전(禮典)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모두 오늘날 당한 것과는 비슷한 예가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좌상 이경억(李慶億)이 의논드리기를,
"제왕가(帝王家)의 혼례가 사서(士庶)와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서로 주고받고 희생을 같이 드린 뒤에야 부부의 의리가 성립되고 혼례를 거행하기 이전에는 부부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 점은 귀한 자나 천한 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공주의 상(喪)이 육례(六禮)를 거행하기 이전에 일어났고 보면, 부마의 봉작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될 듯한데, 사체가 중대한 만큼 병들어 혼미한 자의 견해로 단정할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단 위호(位號)를 정한 뒤에 이미 은의(恩義)가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 작명(爵名)을 거두자니 참혹하고 애통한 심정을 가누기가 어렵다. 다만 생각건대, 오륜(五倫) 가운데 부부가 그 하나를 차지하고, 자사(子思)도 ‘군자의 도는 부부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지금 불행히도 공주의 상이 뜻밖에 있게 되었는데, 고기(告期)044) 등의 예를 일단 거행하지 않았고 보면, 예(禮)에서 말하는 바 ‘아직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과 차이가 없다. 그러니 위호를 그대로 두어 종신토록 가정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게 한다면 인정으로 헤아려 볼 때 더욱 차마 못할 일이다.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부마는 즉 동안위(東安尉) 신요경(申堯卿)이니 신정의 아들이다.
살피건대, 부마라는 호는 공주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육례를 거행하기도 전에 먼저 공주에게 장가든 자의 호를 가하고 금중(禁中)에 출입하게 하다니, 아무리 구례(舊例)가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제도를 바람직하게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처리하기 어려운 예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인데, 만약 청기(請期)한 뒤에 그 작호를 정하는 것을 대략 가례(嘉禮) 중 책빈(冊嬪)할 때의 순서처럼 했다면 그런대로 정례(情禮)에 합치되었을 것이다.
4월 29일 무진
대사간 이홍연, 정언 권유가 병 때문에 부름에 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4월 30일 기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가뭄이 갈수록 더욱 혹독해지는데 백성의 일을 생각하노라면 기가 막히고 낙심이 된다. 심리(審理) 등의 일이 형식적이라고는 해도, 요즘 급병이 들고 상을 만난 근심 때문에 아직 거행하지 못했으니, 황급해 하고 우려하는 나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심리할 문서를 수정해 들이도록 하라."
김익경을 대사간으로, 이유·최후상을 정언으로, 이홍연을 형조 참판으로, 이세익을 병조 참지로, 민유중을 호조 판서로, 민희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우의정 김수흥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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