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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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경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내가 즉위한 이래로 홍수와 가뭄이 들고 바람 불고 서리 내리는 재해가 없는 해가 없었다. 경신(庚辛)045)   대 흉년을 막 당한 뒤에 애달픈 우리 백성들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데 그 참혹함이야말로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지난해 농사 역시 풍년이 들지 않아 백성이 아직 소생치 못하고 있는데, 바로 만물이 자라나는 여름철을 맞았는데도 비오지 않은 것이 한 달을 훨씬 넘었고 간혹 조금 적셔주다가도 해가 쨍쨍 내려쬐곤 한다. 망종(芒種)도 이미 지나 파종할 시기를 놓쳤는데, 경작을 해야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니, 씨를 땅에 뿌리지도 않고서 어떻게 추수를 기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오장이 타는 듯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아,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 것인데,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나라가 무엇에 의지하여 나라답게 되겠는가. 고요히 생각해 보건대 그 책임이 전적으로 내 몸에 있는데,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나 대신 재앙을 받고 있으니,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 수성하는 도를 닦아 조금이라도 하늘의 꾸짖음에 답해야 할 것이니, 승지는 나 대신 교서를 초안하여 널리 직언을 구함으로써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토록 하라.
그리고 생각건대, 오늘날 재앙을 빚게 된 것이 실로 과인이 너무도 중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긴 하지만, 대소 신료들 또한 어찌 책려해야 할 도가 없겠는가. 아, 그대들 백관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편당을 짓지 말고 함께 화목하게 협력해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세상의 원망도 도맡아 나서고 충성을 다 바칠 것은 물론, 과인의 잘못과 시정(時政)의 병통을 극언하여 잘못을 살피고 고칠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급선무이기 때문에 전후로 분명하게 반복해서 유지(有旨)를 내렸는데도 끝내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별도의 거조를 취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온당하게 일을 작정하여 중외에 신칙함으로써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하라. 감선(減膳)과 금주(禁酒) 등의 일 역시 해조로 하여금 똑같이 거행토록 하라."
하였는데, 승지가 곧장 왕언(王言) 그대로 중외에 반포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상이 왼쪽 귀 밑의 멍울 때문에 침을 맞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삼사 및 금부 당상을 인견하고 죄수를 심리(審理)하였는데, 사형 죄수 외에는 모두 경중을 분간하여 처결하였다. 송지렴 등의 추안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이 율(律)은 어떠한가?"
하니, 판의금 조형이 아뢰기를,
"훼대사구단(毁大祀丘壇)의 조목에 따르면 장 일백 유 삼천 리의 율을 적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개 보토(補土)할 때 기한이 촉박했던 데다가 마침 혹한기였고 보토할 곳의 길이가 무려 60척(尺)이나 되었으니, 아무리 견고하게 쌓게 해도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형세였습니다. 다만 그들의 원정(原情)을 보면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는데 이 일은 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좌·우 부석소 감조관(浮石所監造官)이었던 송지렴·신명규·한시중·이정기와 보토 감조관(補土監造官)이었던 이최만은 모두 정배하라. 호상 중사(護喪中使) 윤완(尹完)은 금정(金井)을 설치하고 현궁(玄宮)을 내릴 때 및 정자각(丁字閣)을 상량(上樑)할 때 명을 받들고 왕래했을 뿐 능소(陵所)에 머물면서 연일 감독한 일은 없었으니, 똑같이 논죄할 수 없다. 풀어 보내라."
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경중을 논한다면 보토관의 죄가 다른 사람보다 더욱 중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토한 속에 잡물(雜物)을 집어넣었다는 등 운운하는 말이 있었는데 아직은 그 허실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극변(極邊)에 정배하라."
하였다. 장령 김수오가 아뢰기를,
"감독한 신하들이 일단 모두 죄를 받았고 보면, 윤완이라고 해서 또한 어찌 전연 무죄로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만약 역사를 감독했었다면 본래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미 간여한 바가 없는데 어떻게 벌을 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교리 김만중이 아뢰기를,
"이미 호상 중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제신(諸臣)에게 죄를 매길 때 그만 홀로 죄를 면하게 될 경우 외부 사람들이 또한 어떻게 그 곡절을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삭직(削職)하고 풀어 보내라."
하였다. 조형이 아뢰기를,
"전일 봉심한 뒤 인견하셨을 때 상께서 ‘능에 틈이 벌어진 분수(分數)가 예전에 비해 어떠하던가?’라고 하교하셨는데, 아래에서 상세히 답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전후에 사용한 자에 길고 짧은 차이가 있어 분수가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해년의 서계(書啓)에는 4, 5분(分)의 틈이 벌어졌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1촌(寸)이 넘는다. 봉심할 때의 도량형은 모두 공척(工尺)을 쓰는데 어떻게 차이가 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의 아우 김수항이 현재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이라서 신이 이 일에 대해 감히 진달드릴 입장이 못됩니다마는, 대체로 그 실상을 듣건대 석회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틈이 더 벌어졌는지 상세히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리로 미루어 보건대, 3년이 지난 뒤였는데도 별로 증가된 것이 없었다고 말한 것은 너무도 그럴 듯하지 않은 말이니, 상의 하교가 어찌 지당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증가(增加)’라는 말 위에 ‘대단(大段)’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면 그래도 혹 괜찮을 수 있다. 그런데 단지 별로 증가된 것이 없었다고 말했으니, 이 점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그때 참봉이 보고한 내용 가운데 ‘회 바른 데가 떨어지지 않은 곳은 그 벌어진 틈의 분수(分數)를 정확히 재지 못했고 단지 회가 이미 떨어진 곳을 자로 쟀을 뿐이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형세상 혹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자를 범연히 보아 넘기다니 정말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토록 중대한 일을 그만 자세히 살피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어찌 문서를 소홀히 다뤄서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근래 산릉(山陵)의 일 때문에 대신 이하 많은 사람들이 죄를 받는 대상에 들어 있어 상하가 의심하며 막혀 있고 인심이 침울하기만 하였는데, 지금 ‘문서를 소홀히 다뤄서 그런 것이겠는가.’라고 하신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서야 지난날 아랫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이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능침에 대한 일이 불행히도 이 지경에 이르러 상께서 바야흐로 황급해 하시며 애통해하시는 중에 계시게 되었으니 죄를 받은 신하들로서는 죽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전에 봉심했던 신하는 모두 죄를 면하고 신해년에 봉심했던 신하들에 대해서만 유독 위를 속였다는 죄명(罪名)을 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법입니다. 산릉의 사체가 얼마나 중대한데 어떻게 눈으로 틈이 더 벌어진 것을 보고서도 고의로 숨겨 군부(君父)를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살펴보는 날에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그것이 될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3년 뒤에 봉심했는데도 별로 증가된 것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해 문서를 가지고 살펴 보니 지극히 수상하기에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만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평상시에 대신을 대하실 때에는 얼마나 신임하고 예모를 갖추셨습니까. 그런데 이에 이르러 그만 실정 밖의 분부를 내리셨는데, 신의 생각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꼭 상하가 의심하여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용한 자의 길이가 같지 않았다는 설에 대해서는 신이 그 곡절은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똑같은 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틈의 크기를 잰 분수(分數)가 차이 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동의금 김우형(金宇亨)이 아뢰기를,
"두 개의 자를 서로 썼던 문서를 신이 지금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정지화·남용익·이준구는 모두 삭직하여 방송하고, 예조의 낭청은 간여한 일이 없으니 방송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상께서 가뭄의 재해를 안타깝게 여기며 걱정하느라 겨를이 없으신 나머지 이렇듯 심리하는 거조를 취하게 되셨으니 신도 부득이 염치를 잊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간 가운데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은 자가 많은데, 병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비망록으로 책려하신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차출된 수령 가운데 서경(署經)을 받지 못한 사람이 5인이나 되는데, 각읍(各邑)의 인마(人馬)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되는 폐단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패소에 응하지 않은 대간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김익경, 정언 최후상, 집의 홍주국이 모두 패소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차되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 심리할 때에 산릉 도감 낭청들을 이미 처결하였으니, 도감 당상 정치화(鄭致和)도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영릉을 봉심했던 여러 신하들을 모두 처결했으니, 그때의 대신 정치화와 선공감 제조 김수항(金壽恒)도 관작을 깎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일 신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조형이 아뢰기를,
"영릉의 틈이 벌어진 곳을 자로 잴 때 어떤 길이의 자를 써야 하는지 특별히 정해진 예가 없으니, 지금 이후로는 각릉(各陵)으로 하여금 주척(周尺) 하나씩 만들어 비치하게 하고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김만중(金萬重)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입시해서 봉심했을 때 자로 재었던 일을 앙달했습니다만 자세히 다 말씀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물러나와 예관의 말을 듣건대, 지난해 예관이 회를 메꿀 때 사용한 것은 주척이었고 틈을 잴 때는 공척(工尺)을 사용했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전후로 모두 주척을 사용하였다."
하였다. 만중이 아뢰기를,
"봉심한 신하들이 문자가 소략했기 때문에 위를 속였다는 죄를 받았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안타깝게 여겼었는데, 어제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서 중외(中外)의 마음이 비로소 풀렸습니다. 더구나 삭직(削職)의 율(律)이야 원래 중죄(重罪)가 아닌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일반 백성들이라면 죄를 면하기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겠지만, 사부(士夫)가 소원하는 것은 마음 속의 일이 명백하게 밝혀지는 것입니다. 각각 다른 자를 사용한 것이 참으로 예관이 진달드린 것과 같다면, 상께서 어찌 그들의 마음을 풀어줄 도리를 취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문서를 되돌려 보낼 테니 그것을 보면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신해년에 자로 잰 수치에 차이난 것은 전적으로 봉심할 때 사용한 자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입시한 상신(相臣)도 피혐한 채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의금부의 신하들도 말만 꺼낸 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였고, 옥당의 신하도 변론하면서 끝까지 제대로 하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보필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조차도 속마음을 토로하지 못하는 점이 있게 하였으니, 소원(疏遠)한 신하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정언 이유가 아뢰기를,
"홍주 목사(洪州牧使) 구음은 성격이 본래 술을 좋아해 정신이 맑은 날이 많지 않은데, 일찍이 대직(臺職)에 있을 때에도 남의 비웃음을 산 일이 많이 있었으니, 잔약한 백성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개혁하는 책무를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어 대신·삼사(三司) 및 형조의 당상과 함께 중외(中外)의 죄인을 심리하여 경중을 분간해 체결하였는데, 도년 정배(徒年定配)된 자는 모두 석방하였다.

 

5월 3일 임신

강릉(江陵)에 우박이 쏟아져 금수(禽獸)가 많이 죽고 다쳤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5월 5일 갑술

강백년을 대사간으로, 장선징을 좌참찬으로, 이규령을 집의로, 이정영을 판윤으로, 임상원을 장령으로, 박태상을 지평으로, 서문상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우의정 김수흥, 예조 판서 조형, 참판 이은상, 참의 이혜를 인견하고 산릉(山陵)을 개조할 것인지 옮길 것인지의 여부를 하문하였는데, 모두 대답하기를,
"보토(補土)한 것이 기울어지고 함몰되어 오늘날과 같은 변을 초래했으니, 지금 비록 개축한다 하더라도 뒷날 무사하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길지(吉地)를 가려 능을 옮기는 외에는 다른 대책이 다시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영릉(寧陵) 능 위의 석물(石物)이 점차 틈이 벌어진 것이 당초 잘 안배(按排)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보토를 견고하게 하지 못해서 해마다 틈이 벌어지는 환란을 초래한 것이니, 능의 봉분을 개조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보토가 일단 견고하게 되지 못한 이상 뒷날 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꼭 보장할 수 없는데, 만세토록 영원히 모셔야 할 도리에 있어 끝내 고식적으로만 처리하고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다. 능을 옮기는 일이 막중하고 막대한 일이라는 것을 본디 알고 있지만 그야말로 사세가 만부득이해서 하는 일이다. 예관은 지관(地官) 및 지술(地術)에 정통한 사부(士夫)들을 데리고 먼저 근방의 여러 산에 가 살펴보도록 하고, 관상감 제조도 동행토록 하라."
하였다.

 

5월 7일 병자

장령 임상원(任相元)이 ‘일찍이 예조 낭관으로 있을 때 영릉을 봉심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집의 이규령 등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상원이 패초에 응하지 않아 관례대로 체차되었다.

 

5월 11일 경진

집의 이규령 등이 아뢰기를,
"신급제(新及第) 윤방헌(尹邦憲)이 본부(本府)에 정장(呈狀)하여 말하기를 ‘아비 윤자(尹滋)가 고(故) 사간 이필행(李必行)과 산송(山訟) 문제로 혐원(嫌怨)이 있었는데, 필행의 외손 이만봉(李萬封)이 사관(四館)이 회좌(會坐) 한 곳에서 드러내놓고 「방헌의 아비의 외고조(外高祖)는 지극히 미천하여 백정을 업으로 삼았고, 방헌은 서모(庶母)를 때려 죽였으니 죄가 윤기(倫紀)에 관계된다.」는 등의 말을 하며 정거(停擧)시킬 명목으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방헌이 정장한 말이 옳으면 만봉은 남을 함정에 빠뜨린 죄율(罪律)에 자연히 걸리게 되고, 만봉의 말이 옳으면 서모를 타살한 방헌의 죄를 더욱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두 사람 모두 나문해서 사실을 조사한 뒤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2일 신사

성호징을 장령으로, 김석주를 부교리로 삼았다.

 

5월 13일 임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창도는 지술(地術)에 정통하다고 사부(士夫) 사이에 많이 일컬어지고 있으니, 경직(京職)으로 바꿔 붙여 산을 살피는데 동참토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창도가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는데 새로 제수한 자급은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제수하라."
하였는데, 뒤에 대계(臺啓)에 따라 환수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저택 공사에 대해 지금 듣건대 내사(內司)에서 비용을 대주어 경상비를 쓰지 않도록 했다 하는데, 이렇게 재해를 당해 절약하는 날을 당하여 이미 정지한 공사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우선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동래(東萊) 해운대(海雲臺) 동쪽에 큰 바위가 바다에서부터 굴러 나와 바닷가 높은 바위 위에 놓여졌는데, 넓이 4척(尺) 길이 5척 높이 2척 5촌(寸)이었으며 청백색이었다. 절반은 흙에 묻힌 흔적이 있고 절반은 물에 닳은 형상이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5월 15일 갑신

이정영(李正英)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우의정 김수흥과 예조 판서 조형을 인견하였는데, 수어사 이완이 또한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예판·관상감 제조 및 도감 당상 1인이 지금 떠나 여러 산들을 살펴 볼 예정입니다. 그런데 가령 건원릉(健元陵)·헌릉(獻陵)·광릉(光陵)·영릉(英陵) 및 양주(楊州) 화접동(花蝶洞) 등은 모두 살펴볼 대상 중에 들어 있는데, 수원(水原) 읍내 역시 가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수원을 쓰지 않았던 것이 하자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도 가 볼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일에 대해 경연에서 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광주(廣州)의 민병(民兵)으로 노약자를 제외하고 1만여 명을 얻을 수 있고 신이 거느리고 있는 아병(牙兵)도 6천 명을 밑돌지 않으니, 외병(外兵)을 기다릴 것 없이 이것만 가지고도 성첩(城堞)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남쪽과 북쪽의 관방(關防)으로는 조령(鳥嶺)과 철령(鐵嶺)만한 곳이 없는데, 충주(忠州)와 철원(鐵原) 양 진(鎭)의 군사를 모두 남한 산성에 소속시킴으로써 위급할 때에 험란한 요새에 웅거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온당한 계책이 못됩니다. 지금 충주와 철원의 군병을 도로 본도(本道)에 주어 조령과 철령을 파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뒷날 여러 재신(宰臣)들이 다 모일 때 품정토록 하라."
하였다. 상이 수흥 등에게 이르기를,
"지관(地官)의 말을 듣건대 금년에 능을 옮기면 좋다고 한다. 모든 일을 미리 요리해 두지 않으면 안 되니, 내재궁(內梓宮)046)  을 예비하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6일 을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지금 이렇듯 가뭄의 재해가 들어 나라의 재정이 고갈된 때에 군신 상하가 오직 능을 옮기는 대사에 한 뜻으로 전념해야 할 것이니, 각사(各司)의 크고 작은 영선(營繕) 및 호조 제상사(諸上司)의 수응(酬應)하는 물건들은 경중과 긴헐(緊歇)을 논할 것 없이 산릉을 개복(改卜)하기 이전에는 모두 일체 정파(停罷)하는 것이 옳겠는데, 상방(尙方)의 직조(織造)하는 것과 같은 일들도 정지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산릉의 일과 관련하여 나름대로의 소회가 있기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자년047)   간에 영릉(寧陵)의 능관(陵官)이 이미 석물(石物)에 틈이 생겼다고 예조에 보고하자 그때 능의 봉분을 개조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상께서 친히 살펴 보신 뒤에 ‘봉분을 개조할 필요없이 그냥 회만 바르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에 해마다 회만 바르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조정의 신하들 모두가 진달하고 싶어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 채 능을 옮기는 큰 의논이 마침내 종실(宗室)의 말단에게서 나오게 하였으니, 오늘날 조정의 신하치고 누군들 죄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그 사이에 상께서 배릉(拜陵)을 하셨더라면 필시 오늘날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텐데, 오래도록 몸이 불편하신 상태에 계셨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6, 7년 동안 계속 나의 병이 낫지 않아 직접 살피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재주도 없으면서 끝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마침 심리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감히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안으로는 산릉을 가려야 하고 밖으로는 변방의 정세가 수상하니, 설사 재능이 있는 자가 책임을 맡더라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까 걱정할 텐데 더구나 신같은 자가 어떻게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곧 경이 겸양하는 말이다. 만약 대소 관원으로 하여금 모두 마음과 힘을 다하게 한다면 어찌 실효가 없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남원(南原)의 습속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홍석기(洪錫箕)의 원정(原情)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남원의 사부(士夫)가 개인적인 일 때문에 관인(官人)을 사가(私家)에서 형신(刑訊)하는가 하면 적곡과 전세를 납부하지 않는 자가 많다 합니다."
하고, 호판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그곳은 풍토가 좋지 못해 사람들이 모두 싫어해 피하는데, 수령이 자주 바뀌어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현재 수령이 누구냐고 하문하니, 수흥이 이광진(李光鎭)이라고 하였다. 상이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물으니, 범상한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광진의 임기 만료를 기다릴 것 없이 즉시 개차(改差)하고, 당상과 당하를 논할 것 없이 대시(臺侍)의 경력이 있고 강명(剛明)하며 풍력(風力)이 있는 인물을 선택하여 토호(土豪)를 엄히 다스리고 폐읍(廢邑)을 수습할 수 있도록 하라."
하고, 이어 누가 적합할지 하문하니, 민유중이 이세익(李世翊)으로 대답하였다.
이완이 충주(忠州)와 철원(鐵原)의 군병을 도로 본도(本道)에 소속시키고 민병(民兵)으로 성첩을 지키게 할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도록 청하니, 상이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수흥 등이 모두 편하겠다고 아뢰니, 상이 따랐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세화(李世華)가 나아가 아뢰기를,
"마전(麻田)·가평(加平)·적성(積城) 3읍의 군병이 남한 산성에 소속되어 있는데 거리가 꽤 멀어 위급할 때 힘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총융청에 소속된 용인(龍仁)·양지(陽智) 등의 읍은 남한 산성과의 거리가 40, 50리에 불과하여 그 군병들을 빠른 시간 안에 수습할 수 있으니, 총융청과 형편에 따라 서로 바꿀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또한 따랐다.

 

5월 17일 병술

민유중(閔維重)을 겸 총융사(兼摠戎使)로 삼았다.

 

5월 19일 무자

남편을 죽인 공산(公山)의 죄인 애춘(愛春)을 복주(伏誅)하였다.

 

5월 20일 기축

유연을 장령으로, 윤지완을 설서로, 유혁연을 판윤으로, 유헌을 남원 부사로 삼았다.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대신 및 여러 재신(宰臣)들과 함께 영릉을 봉심했는데 틈이 벌어진 곳을 자로 잴 때 물러난 곳만 쟀지 그 깊이는 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형을 만들때에도 큰 것을 작게 하고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하기에 신이 강력히 다투었습니다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복명(復命)한 뒤에도 또 동시에 봉심한 신하들과 입시하지 못했는데 끝내 감히 침묵만 지킬 수 없기에 변변찮은 견해나마 진달드릴까 합니다."
하고, 이어 능을 옮기는 대사를 속히 완결짓도록 청하니, 상이 정원에 명하여 이익수를 불러들여서 큰 것을 작게 하고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한 정상에 대하여 묻게 하였는데, 익수가 대답하지 못하자, 상이 이에 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기를,
"소에서 말한 대소·유무에 대한 설은 사실을 잘 모르고 한 것으로서 경솔하게 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밖에 진달한 말은 나라를 위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상소하기를,
"이번에 봉심했던 일은 상례(常例)와는 크게 다르게 대신과 육경과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모두 나아가 참여했었고, 명을 받고 파견된 두 내신(內臣)이 모양을 살펴보고 예전에 발랐던 회를 뜯어내 자로 재는가 하면 또 자로 잰 것을 의거하여 도형으로 그려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혹 이익수(李翼秀)의 마음에 부당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말한 대소·유무의 설이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것으로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렇게 한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봉심한 신하들 가운데 설혹 몹시 형편없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이라서 숨기기가 어려웠을 텐데 감히 지엄한 곳에서 방자하게 마음먹은 대로 행하며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대저 사람이 좋지 못한 일을 행하는 동기는 자기 몸에 이익이 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데, 석물(石物)에 벌어진 틈의 대소와 유무를 바꿔놓는 것이 자기 몸에 무슨 이익이 있다고 환한 대낮에 고의로 상을 속이는 죄를 범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봉심하는 대열에 나아가 참여했고 보면, 자로 재고 도형을 그릴 때 실상대로 하지 않은 죄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익수가 상소하며 그런 말을 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그가 입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나머지 나온 것인데, 지금 이미 조사해서 사실을 알았으니, 경은 인혐할 일이 없다."
하였다.

 

5월 21일 경인

집의 이규령, 장령 김수오, 지평 박태상 등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상차하면서, 뜻을 반드시 독실하게 세우고 다스릴 방도를 반드시 정성으로 구할 것과, 자주 강연(講筵)을 열고 신료를 빈번하게 접하며 말을 용납하여 흔쾌히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고 자신을 반성해 닦아 실제로 덕에 나아가도록 힘쓸 것과, 궁금(宮禁)을 엄히 하여 개인적으로 청탁하는 길을 막고 쓸데없는 군사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여 속히 변통시킬 것과, 출척(黜陟)시키고 진퇴(進退)시킬 즈음에 실정을 살피도록 힘쓰고 먼저 귀에 들어온 말을 위주로 하지 말 것과, 기타 일반 정사의 득실과 백성의 이해관계에 대하여 모두 유념해 강구하고 시종 나태하지 말 것과, 사소한 일 때문에 원대한 생각을 소홀히 하지 말고 형식적인 일 때문에 실질적인 일을 폐하지 말 것 등을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5월 22일 신묘

장령 유연이 전에 홍양(洪陽)을 맡고 있을 때의 일로 추고를 받는 일이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5월 24일 계사

황해 감사가 치계하기를,
"은율(殷栗)의 품관(品官) 황윤헌(黃胤憲) 등 50여 인이 6세(世)에 걸쳐 한 마을에서 같이 살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쇠퇴한 세상에는 없었던 일이니, 포상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복호(復戶)하라고 명하였다.

 

5월 26일 을미

임상원을 장령으로, 유연을 필선으로, 김해일을 사서로, 최후상을 교리로 삼았다.

 

5월 27일 병신

산릉 도감(山陵都監) 당상인 조형과 민유중이 여러 산을 살펴보고 들어오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는데, 우의정 김수흥도 입시하였다. 상이 차례로 여러 산의 우열을 하문하니, 김수흥 등이 여러 지관(地官)의 말로 대답하기를,
"화접동(花蝶洞)의 형세가 꽤 좋지만 혈(穴)위에 10여 개의 옛무덤이 있으니 쓸 수 없을 듯하고, 영릉(寧陵)의 백호(白虎) 밖 첫 번째 언덕이 영릉에 비교해 낫지만 마무리되는 마당이 작으니, 모두 영릉(英陵) 안쪽 홍제동(弘濟洞)의 순수하게 좋은 곳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토(補土)한 곳은 없던가?"
하니, 유중이 아뢰기를,
"곡장(曲墻) 밖에 조금 있었습니다."
하였다.

 

5월 28일 정유

심재를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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