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기해
정언 이유, 헌납 윤형성, 정언 서문상이 ‘도승지 이원정의 사직소에 대한 비답에서 「부박(浮薄)한 논을 혐의할 필요가 없다.」고 분부하셨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형성 등을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으나, 패초에 응하지 않아 관례에 따라 체차되었다.
6월 2일 경자
우의정 김수흥, 예조 판서 조형, 산릉 도감 제조 민희, 관상감 제조 민유중 등이 청대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산릉을 가려 정할 때에는 예관(禮官)과 관상감 제조가 먼저 가서 여러 산들을 살펴 본 뒤에 총호사(摠護使)가 가서 우열을 정하고 바야흐로 혈(穴)을 정하는 문제를 의논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고례(古例)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홍제동(弘濟洞)을 길지(吉地)로 잡고 있는 이상 이 지역에 가려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좌상(左相)이 총호사가 된다고 예문(禮文)에 실려 있는 만큼 신이 그 임무를 이미 대행해서는 안 되는데, 좌상의 병이 또 하루 이틀 사이에 나을 것도 아니고 보면 만약 순서에 따라 갔다가 돌아올 경우 날짜가 점점 지체되어 제때에 일들을 처리하지 못할 걱정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이번에 나가 살펴 보고나서 바로 혈을 작정해 두고 오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사(故事)가 그와 같다 하더라도 일이 이미 급박하게 되었으니 이번에 가서 혈을 작정해 두고 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의정 이경억이 병으로 면직되면서 총호사(摠護使) 직임도 체차되고, 우의정 김수흥을 총호사로 삼았다.
6월 3일 신축
이조 참판 홍처량을 발탁하여 판서로 삼았다.
6월 5일 계묘
홍문관 제학 정두경(鄭斗卿)이 죽었다. 두경은 소시적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신흠(申欽)·이정귀(李廷龜)·장유(張維) 등 여러 사람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시(詩)에 뛰어났는데 근세(近世)의 작자 가운데에는 그와 비견될 자가 드물었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고 몸단속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찍이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있을 때에, 군읍(郡邑)의 어떤 자가 ‘성묘(聖廟)에 빗물이 새니 수선해야 한다.’고 알리자 두경이 말하기를 ‘한 조각 썩은 나무판을 뭐하러 덮어주는가.’ 하였는데, 대개 이런 식으로 허튼 소리를 하였기 때문에 문한(文翰)의 직책을 얻지 못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이 그의 문재(文才)를 애석하게 여겨 경연 석상에서 진달하고 전관(銓官)에게 말하여 비로소 제학으로 있게 되었는데 그때는 두경이 이미 노쇠한 상태였다. 죽을 때의 나이 77세였다.
6월 6일 갑진
정익을 도승지로 삼고, 이규령을 동부승지로 발탁하고, 김석주를 헌납으로, 윤지완·박상형을 정언으로, 강백년을 이조 참판으로, 김익경을 이조 참의로, 이상진을 우참찬으로, 신정을 대사간으로, 이합을 집의로, 이경억을 지중추부사로 삼았다.
대교 목창명이 상소하기를,
"설서 윤지완(尹趾完)은 일찍이 사관(史官)이 될 추천을 받았었는데 상신(相臣)이 상피(相避)하는 데 구애되어 아직 취재(取才)를 거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미 상피하는 일도 없으니 본래 응강(應講)048) 해야 마땅한데, 오늘 정사(政事)에서 정언으로 의망(擬望)하여 낙점(落點)을 받았습니다. 사국(史局)에 천거된 뒤에는 다른 길을 통해 승진해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원래 법례(法例)이니, 전조(銓曹)가 출륙(出六)을 허락한 것은 참으로 법례에 어긋난다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온 규정이 신에 이르러 무너졌으니, 감히 얼굴을 들고 사국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내렸다. 해조가 복개하여 아뢰기를,
"신조(臣曹)가 전의 규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의망하여 낙점을 받았습니다만, 지완에게 제수된 직책은 일반 관직과는 다르니, 신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의 규정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6월 7일 을사
이홍연을 경기 감사로, 김휘를 병조 참판으로, 맹주서를 호조 참의로 삼았다.
총호사 김수흥(金壽興) 등이 홍제동에서 돌아오니, 상이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뜻밖에도 산릉(山陵) 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현재의 형세로 볼 때 결코 백성을 사역시키는 어려우니, 목릉(穆陵)을 옮길 때의 예에 의거하여 각 아문의 미포(米布)를 덜어내 역가(役價)를 주고 인부를 모집해서 부역케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경술년049) 이후로 각 아문에 비축된 것이 이미 고갈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호조·병조·진휼청·상평청·사복시 등에 남아있는 미포와 은화(銀貨)를 참작해서 가져다 쓰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산릉 공사 중에는 석역(石役)이 가장 큰데, 거기에 쓰여지는 철물(鐵物)의 수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촉박하여 형세상 외방에 분담시키기가 어려우니, 훈련 도감과 어영청에 비축된 정철(正鐵)을 들어가는 양을 헤아려 가져다 썼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이어 빈청에서 모여 날짜를 가리도록 명하였다.
총호사 김수흥 등이 빈청에 모여 아뢰었다.
"영릉(英陵) 홍제동(弘濟洞)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대한 금년 길월(吉月) 길일(吉日) 및 능을 옮길 길일에 관하여 여러 지관(地官)들을 모이게 해 고르게 하였더니, 구릉(舊陵)은 9월 29일에 현궁(玄宮)을 내리는 것이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장령 임상원, 지평 박태상이 아뢰기를,
"병조 참지 이세익(李世翊)은 조정에 진출한 이래로 평소 취할 만한 실상이 없었고 누차 주군(州郡)을 맡아 다스릴 때에도 불성실하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므로 갑자기 청요직에 앉게 되자 물정(物情)이 놀라와했었는데, 은대(銀臺)에서 막 체차되자마자 이 직책을 제수받았으니 정사(政事)의 체례(體例)로 헤아려 보더라도 이미 너무나 타당성을 잃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익이 또 비판의 소리를 감수하며 무턱대고 나와 태연히 공무를 행하고 있으니 너무도 염치없는 짓이라 하겠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9일 정미
정도성(鄭道成)을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이합이 인피하기를,
"이세익(李世翊)이 힘껏 기성(騎省)050) 의 직책을 사양하지 못하고 끝내 공무를 집행하기까지 하였으니, 서로 바로잡아 주는 논의를 했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그 탄핵하는 글을 보건대, 그만 ‘취할 만한 실상이 없다.’느니 ‘불성실하다는 비난이 많았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하여 몇 마디 말로 정말 여지없이 그의 평생을 단정지웠습니다. 신이 세익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누차 주군(州郡)을 맡아 강명(剛明)하게 잘 다스렸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껴 올린 전의 논계는 신의 본의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임의로 산삭해 고친다는 것도 대체(臺體)에 어긋나는 일이라 할 것이니,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고, 지평 박태상, 장령 임상원이 서로 잇따라 인피하기를,
"신이 세익을 논했던 것은 그에 대한 명론(名論)이 평소 가벼워 청요직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익이 누차 큰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 자못 염결(廉潔)하다는 일컬음이 없었고 본직을 제수받았을 때에도 또 탄핵을 감수한다는 비난을 초래했었는데, 이합이 이토록 그를 위해 변호해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신이 병 때문에 연계(連啓)하지 못한 탓으로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시켰으니, 대체(臺體)로 헤아려 볼 때 어떻게 한 순간인들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장령 김수오도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이합과 같은데 이미 연계할 수도 없고 또 처치해서도 안 될 형편이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응교 이선과 수찬 이당규가 헌부를 처치하기를,
"의견이 다를 경우 구차하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대체(臺體)상 본디 당연한 일인데 혐의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여, 이합의 출사를 청하고,
"사람을 너무 각박하게 논하고 실정과 어긋난 말을 많이 한 데 대해 물의(物議)가 모두 비난하고 있으니, 형세상 그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며, 태상과 상원의 체차를 청하고,
"처음에 논계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처치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일인데 억지로 인피하다니 자못 타당성을 잃었습니다."
하여, 수오의 체차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0일 무신
집의 이합이 ‘동료가 피혐한 내용에 침해하는 말이 많았다.’는 이유로 또 인피하였는데, 정언 정도성(鄭道成)이 탑전에서 처치하기를,
"이합이 당초 변호해준 것만도 구차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재차 피혐까지 하다니 번독케 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런데 도성은 곧 이어, 처치한 것이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6월 12일 경술
성호징·윤형성을 장령으로, 윤진을 지평으로, 이원정을 형조 참판으로, 민점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 및 양 도감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구릉(舊陵)의 정자각(丁字閣)을 헐지 말고 그대로 두어 재궁(梓宮)을 봉안하게 하고, 영악전(靈幄殿)도 새로 짓지 말게 하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총호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지문(誌文)을 고쳐야 할 텐데, 어떤 이는 그 원문(元文)을 기본으로 하되 능을 옮겨고친 곡절만 첨가하자고 하고, 어떤 이는 따로 다른 돌에 기록하여 전의 지문과 함께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의 의견으로는 전자의 설을 따라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첨가할 것인지 따로 기록해야 할 것인지를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국장(國葬) 때 지석(誌石)은 으레 충주(忠州)에서 가져 왔는데, 충주 돌의 품질이 점점 예전만 같지 못해 요즘 들어서는 사부가(士夫家)에서 강화(江華)의 돌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강화의 돌은 새기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하던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그렇긴 하지만 돌의 품질로 말하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강화의 돌을 엄밀히 가려서 가져다 쓰도록 하라."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여러 능침(陵寢) 가운데 광릉(光陵)과 영릉(英陵)만은 병석(屛石)을 설치하지 않고 단지 상석(裳石)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천만세토록 오래 완전하게 하는 방도입니다. 그리고 지금 신릉(新陵)을 영릉(英陵)과 같은 산 안으로 정했으니, 의물(儀物) 또한 차이가 나게 해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선왕께서 매번 광릉 석물의 제도가 좋다고 분부하셨으니, 이번에는 일체 양릉(兩陵)의 규례에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산릉의 큰 공사가 앞에 닥쳤는데 공장(工匠)의 가포(價布)를 계속 지급할 길이 없으니, 평안 병영(兵營)에 남겨 비축한 비변사 소관의 포목 2백여 동(同)을 가져 와 보충해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6월 14일 임자
전 참의 장응일(張應一)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신의 나이 80에 박두하여 오래도록 병상에 있다 보니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정력이 이미 다 떨어져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자연 귀머거리나 소경처럼 되었습니다마는, 세 조정을 거쳐 살아남은 목숨이 일념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것만큼은, 늙었다고 해서 혹 해이해지거나, 위치가 보잘것없다고 해서 잠시라도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늦게야 듣건대, 영릉(寧陵)의 석물(石物)에 틈이 벌어지는 변고가 생겼다 하는데, 이 이야기가 참말입니까? 신이 혼자 스스로 생각하기를 ‘국가의 변고로 이보다 큰 것이 없는데, 선왕을 만세토록 모실 능침(陵寢)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보토(補土)를 빈틈없이 하지 못하고 사람의 계획이 착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택조(宅兆)가 길하지 못하고 신도(神道)가 안정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성상께서 마음 속으로 얼마나 근심하시며 몸둘 바를 몰라 하시겠는가.’ 하며 처분이 어떻게 내려질지 귀를 기울이면서 밤낮으로 우울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후의 비망기(備忘記)를 보고서야 감독한 관원들과 봉심(奉審)한 대신들이 모두 죄를 받았다는 것과, 능을 옮기는 일이 성상의 결단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이는 불행 중 다행으로서 국가의 복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아 심리(審理)하도록 명을 내리시고 봉심한 신하들의 불경스럽고 불충(不忠)한 죄까지 모두 사면해 주셨는데, 전하께서 대신을 대우하는 면에서 보면 극진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선왕을 섬기는 도리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선왕의 오르내리는 영(靈)께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울적한 마음을 갖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대저 심리라고 하는 것은 범죄 사실이 중하기는 해도 그 정상에 용서해 줄 만한 점이 혹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봉심한 대신들의 불경스럽고 불충한 죄에 대해 전하께서는 그 정상에 혹 용서해 줄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불경스럽고 불충한 죄야말로 인신(人臣)의 대죄(大罪)로서 왕법(王法)에 비추어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 전하께서 이처럼 법을 굽혀 죄를 사면해 주시다니,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비가 오게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까 신은 염려됩니다.
능침을 봉심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또 더구나 영릉이 어떤 능침입니까. 그런데도 한두 대신이 전하의 뜻을 몸받지 못하고 그저 인정에만 구애된 나머지 봉심하라는 명을 받고서도 사실대로 보고드리지 않음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이제야 변고를 처음 아시게 하였으니, 성상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마음을 가지셔야 하겠습니까. 보통의 인정으로 말하면 진정 원수로 대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한 것으로서 완전히 석방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성인의 심정에 보통 인정과는 다른 점이 있어서 그러신 것입니까? 전하께서 ‘차라리 남의 제어를 받는다는 이름을 얻을망정 감히 대신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는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다 하더라도, 우선 꾹 참고서 신릉(新陵)의 공사를 완료한 뒤에 곡진하게 처리해 주신다 해도 늦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만 급급하게 심리하는 잘못된 거조를 취하시어 조위봉(趙威鳳)의 말에 대해 책임이나 메꾸려는 듯이 하는 점이 있게 함으로써 나랏 사람들이 비웃도록 만드셨단 말입니까.
아, 필부가 어버이를 장사지낼 때에도 자기 정성을 다하는 법인데, 천승(千乘)의 임금으로서 선왕을 장사지내면서 오히려 필부보다도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삼가 듣건대, 당초 능을 살펴 정하던 날 지술(地術)을 아는 사부들 모두가 말하기를 ‘수원(水原)에 있는 산이 가장 길지(吉地)이다.’고 했었는데, 누가 영릉을 꼭 써야 한다는 의논을 주도하여 전하로 하여금 이렇듯 이 세상에 다시 없을 망극한 변을 맞게 했단 말입니까.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산에 대한 이야기를 갖추어 진달하였는데도 불태워진 채 정원이 끝내 전하께서 보시도록 봉입(捧入)하지 않았던 것은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하문해 보신다면 선도의 상소에 나오는 뜻을 모두 아실 수 있을텐데, 대저 그런 뒤에야 전하께서 영릉은 제왕의 장지(葬地)가 못된다는 것과 당초에 벌써 운운(云云)하는 설이 있었다는 것을 환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영릉을 꼭 써야 한다는 의논을 주도한 자야말로 전하의 집안 일을 망치고 선왕에게 크게 불충한 짓을 했다는 것이 분명한데, 임금의 옷을 입고 임금의 밥을 먹으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길에 전파된 소문을 듣건대, 봉분을 개조하여 쌓자는 설을 가지고 탑전에 진달한 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이런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의 흉참(匈慘)한 의도는 봉심한 신하들보다도 죄가 크다고 할 것이니, 어찌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좌우에 있는 대소의 신하를 믿을 수 없는 점이 이와 같으니, 뒷날 능을 옮길 때 영릉에서 전일 발생했던 환란이 반드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재궁(梓宮)을 옮겨 모시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대신에게 위임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직접 신릉과 구릉 두 곳에 가시어 반드시 성(誠)과 신(信)에 입각한 효도를 완전히 이루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올린 소의 내용을 보고 그저 나의 효성이 형편없음을 한탄하였는데 오장이 찢어 발겨지는 듯 나도 모르게 비통한 울음만 나올 뿐이었다. 다만 감독한 사람들의 죄가 중하다는 상소의 내용은 그래도 괜찮다마는, 기타 사건들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곡절이 있는데, 사실과 다르게 소문이 전파되어 그런 것인가? 그리고 수원과 관련된 한 조목 및 대신에게 위임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로서 내가 대단히 놀랍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6월 16일 갑인
이유상을 집의로, 이합을 부교리로 삼았다.
장령 윤형성(尹衡聖)이 집의 이유상과는 질녀의 사위로서 상피(相避)해야 할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6월 17일 을묘
우의정 김수흥이 상차하여 총호사의 직책을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이렇게까지 사양하다니, 장응일(張應一)의 소 때문에 불안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국가에서 맡겨 쓰는 것은 오로지 대신에게 달려 있는데 어찌 사람마다 불신하고 일마다 의심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혼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경은 안심하고 속히 공무를 집행하라."
6월 19일 정사
김해일을 장령으로, 홍만종을 정언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장응일(張應一)이 상소한 의도는 전적으로 봉분을 개축하자고 한 설을 공격하는 데 있다.’는 이유로 금부에서 명을 기다렸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지금 정관(政官)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살펴 보았더니 병조 판서 김만기가 명을 기다리고 있다 한다. 이 일에는 본래 곡절이 있다는 것을 조가(朝家)에서 알고 있는 바이고, 본병(本兵)의 중한 지위를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으니, 공무를 행하게 하라."
대사간 신정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 참의 장응일(張應一)이 상소하면서 장황한 말로 교묘하게 농락하고 거리낌없는 표현을 구사했다 하는데 정말 그가 마음 속으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국가가 불행하게도 선릉(先陵)에 변고가 생겨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능을 옮기는 일까지 있게 되었는데, 전하께서 봉심했던 신하들을 죄준 것은 그 일을 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사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속이려 한 정상은 없었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통촉하고 계시고 보면, 심리하던 날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해 준 것이 어찌 전하께서 대신을 다치게 할까봐 염려하시어 곡진히 보살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 대신을 대우하신 것은 지극하다 하겠지만 성왕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는 어떨지 모르겠다.’고 한 이 말은 아,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군상(君上)을 위협하여 여러 신하들을 죄주도록 윽박지르고 싶다 하더라도 이 어찌 신자(臣子)된 사람이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내고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수원(水原)을 버리고 영릉(寧陵)을 취한 것과 관련하여 그 죄를 당초 논하며 아뢰었던 신하에게 돌리면서 ‘전하의 집안 일을 망치고 선왕에게 크게 불충한 짓을 한 것이다.’고까지 하였는데, 신은 이에 대해 지극히 분개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수원의 산으로 처음에 이미 복정(卜定)했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이시백(李時白) 등 여러 사람이 ‘수원은 기보(畿輔)의 거진(巨鎭)인 만큼 뒷날 다섯 가지 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으로 누차 상소해 중지할 것을 간하였고 판부사 송시열(宋時烈) 역시 이런 내용으로 의논드려 영릉으로 다시 고쳐 복정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백 등 여러 사람이 과연 모두들 전하의 집안 일을 망치고 선왕에 대해 크게 불충한 짓을 하려 했던 자들이란 말입니까. 그가 이런 계책을 쓴 의도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의논드렸던 신하들은 지금 모두 생존해 있지 않고 오직 시열만 남아 있을 뿐인데, 함정에 빠뜨려 해치려는 대상 인물이 필시 이미 백골이 된 사람들은 아닐 것이고 보면 그가 의도하는 바가 아, 또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위 ‘정원에서 윤선도(尹善道)의 소를 불태웠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상세히 알지 못했는데, 지금 비로소 듣건대, 그때 정원이 품계(稟啓)하여 봉입(捧入)하자 상께서 엄한 말로 그 소를 물리쳐버린 뒤에 정원이 진달드린 데 따라 그 소를 가져다 삼공(三公)에게 두루 보여주게 하고 불태우게 하셨다 했습니다. 일단 성상께서 보시도록 그 소를 올렸었고 보면, 그가 ‘전하께서 보시도록 끝내 들이지 않았다.’고 한 것은 무슨 의도에서 한 말이란 말입니까. 기회를 틈타 얽어 무함하기 위해 못할 짓 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봉심한 신하들을 인견하셨을 때 김만기와 이당규가 봉분을 개축하자는 설을 내놓은 것은 갑자기 큰일을 당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 나머지 의견이 생각나는 대로 진달한 것에 불과할 뿐인데, 소위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은 무슨 일을 가리켜 한 말이며, 흉참(凶慘)하다고 지목한 것은 또 도대체 무슨 마음에서 나온 것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대소 신하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전하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전하가 듣고서 의혹되게 하였는데, 틈을 엿보아 시험해 볼 목적으로 없는 일을 꾸며내고 어지럽게 만들어 임금과 신하 사이에 시끄럽게 될 소지를 야기시키고 위와 아래 사이에 성의(誠意)가 통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소인이 국가를 어지럽게 하는 상투적인 수법이라 할 것입니다. 또 구릉(舊陵)을 헐고 옮겨 모실 때에 전하께서 직접 참석하지 않기로 의정(議定)한 일이 있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장응일이 어떻게 미리 전하께서 분명 직접 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이렇게 억측하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그의 의도가 심각하고 음험하니 신은 이에 더욱 통분스럽기만 합니다.
아, 선왕의 능침에 일이 발생한 것이야말로 국가의 불행이라 할 것인데, 이를 빙자하여 간악한 꾀를 이룰 계책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근래 진언(進言)한 무리들이 한편으로는 ‘신성한 태조의 능침을 훼손한 사건이 일어나도 전하께서 장차 알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용이 지극한 말이라 감히 글에 싣지도 못하겠다.’ 하여 전하로 하여금 놀랍고 의심스러워 불안감을 갖게 하였는데, 뒤이어 나온 장응일의 소 역시 서로 기맥이 통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이 음험하고 참혹하였습니다. 그가 ‘신하의 제재를 전하가 받고 계신다.’느니 ‘책임을 메꾸려 하신다.’느니 ‘보통 인정과는 다른 점이 있다.’느니 한 말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자기 멋대로 조소하며 희롱한 것이니, 혈기가 있는 자로서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 누가 팔을 치켜들고 분격하여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응일이 나이 80에 박두한 사람으로서 이렇듯 보통 인정상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능히 해냈고 보면, 앞으로 또 무슨 놀라운 이야기를 지어낸 뒤에야 그만둘지 모를 일인데, 신은 전하께서 의혹하신 나머지 밝게 진위(眞僞)를 살피시지 못해 국가에 무궁한 환란을 초래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한 내용이 범연치 않은데 내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하였다. 당시 응일의 소를 입계(入啓)한 지 이미 6일이 지났었는데, 신정의 소를 들이자 비로소 응일의 소에 대한 비답을 내렸다.
6월 20일 무오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능침에 틈이 벌어지는 변고가 있게 된 결과 감독하고 봉심한 신하들 모두가 이미 경중에 따라 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장응일(張應一)이 유지(有旨)에 응한다는 핑계로 기회를 틈타 소장을 올리면서 능침을 가탁해 장황하게 위협하였는데, 위로는 선왕을 모시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았다고 군부(君父)를 기롱하였는가 하면, 아래로는 불충하고 불경스러운 죄를 억지로 신하들에게 가하는 등, 그 의도가 음험하고 막된 표현을 마구 구사했으니, 함정에 빠뜨리고 이간시키려는 그의 계책이 아, 또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일을 담당했던 신하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그 누가 능침의 일에 대해 스스로 극진하게 하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일이 불행하게 되어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게 된 것인데, 응일이 기필코 죄를 얽어 만들어 연단해서 그 죄안(罪案)을 늘리려고 하였으니, 도대체 그 의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수원(水原)과 영릉(寧陵) 가운데 취사 선택할 때 충성스럽기 이를 데 없는 훈구지신(勳舊之臣)들이 나라를 염려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인사(人事)를 참작하고 지술(地術)의 설을 참고하여 같은 내용으로 의논을 드렸었고 마침내는 또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셨던 것이었는데, 응일은 그만 ‘영릉으로 꼭 장소를 정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도한 자는 전하의 집안 일을 망치고 선왕에게 불충한 자임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주(人主)가 위임하고 국가가 의지할 자로서 대신을 제외하면 그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응일이 ‘전하의 좌우에 있는 대소의 신하 가운데에는 믿을 수 없는 자가 있으니, 재궁(梓宮)을 옮겨 모실 때에는 더욱 대신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이토록까지 그 말이 당치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러한데도 그냥 놔두면 장차 참소하는 간사한 이야기를 근절시키고 뒷날의 폐단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니, 응일의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이유상(李有相)이 상소하기를,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여 선왕을 만세토록 모실 유택(幽宅)을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온 나라의 신민들이 함께 가슴 아파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직 상하가 합심하고 정성과 예의를 극진히 하여 이 큰 일을 유감없이 완수할 수 있도록 힘써야만 마땅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한 집안이나 한 사람만이 혼자 의견을 내고 개인적으로 근심할 일이겠습니까.
공경(公卿)의 지위에 있는 신하들은 거의 모두가 선조(先朝)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전하에게 보답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봉심(奉審)했을 때에 설령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 마음이야 어찌 모두 이익수(李翼秀)나 장응일보다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능을 옮기는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사람을 함정에 빠뜨릴 계기로 삼은 뒤 온 나라 공경의 신하들을 일체 불경스럽고 불충한 자라고 몰아부치면서 기필코 전하의 조정을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두려 하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가 아, 또한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지난해 윤선도(尹善道)가 소장을 올렸을 때 정원의 신하가 전하에게 소를 들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봉입(捧入)하자 상께서 그 소를 열람하신 뒤에 즉시 불태우라고 명하면서 동시에 엄준한 분부를 내리셨었습니다. 그런데도 응일이 그만 ‘전하께서 열람하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원에서 불태워졌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또한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위 ‘원수로 대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한다.’고 한 것은 더욱 이치에 어긋난 말입니다. 나라의 임금이 원수로 삼아야 할 대상은 오직 정당한 도리로 우리를 대하지 않는 이웃 적국일 뿐입니다. 언제 일찍이 나라의 임금이 그 신하를 원수로 대한 적이 있었습니까. 신하에게 죄가 있으면 그 경중에 따라 죄를 주면 그뿐이지, 어떻게 도리상 원수로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그의 소 가운데 전하로 하여금 신하들을 불신하게 하면서 친히 양릉(兩陵)에 가 모든 일을 직접 행하시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아, 어쩌면 이렇게까지 망극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친상(親喪)에는 물론 스스로 극진히 해야 하지만 동시에 절제함이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다만 좌우에 자문을 구하고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함은 물론 근력의 한계를 헤아리고 정리와 예문(禮文)이 조화되도록 하여 결과적으로 지당하게 되면서 그 도리를 극진히 행하는 길을 모색해야 마땅할 것인데, 그 자가 어떻게 감히 예를 뛰어넘고 상도(常道)에서 벗어난 말을 가지고 남의 마음을 헤아려 격동시켜 권하면서 군부의 마음을 두렵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저 수원(水原)과 관련된 한 조목이나 대신에게 일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나 봉분을 개축하자고 한 설에 대해 운운(云云)한 말 같은 것들은 음험하고 사특하여 바로 볼 수 없는 점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기 때문에 신이 다시 누누이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중에 성상을 직접 공격한 말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신에게 제어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고, 하나는 ‘선왕의 장례를 필부보다도 못하게 치루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제어를 받으신 것은 어떤 일이며 필부보다도 못하게 한 것은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이런 말을 어떻게 신하된 입장에서 차마 입으로 내놓을 수 있단말입니까. 그런데도 장응일이 거침없이 말하면서 다시 거리낌 없었으니, 아아, 이 또한 너무나도 불인(不仁)하다 하겠습니다.
응일이 만약 노쇠하여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았다면 필시 이렇듯 패만스러운 말은 하지 않았을텐데, 그 문자를 살펴 보면 교묘하게 농락한 수법이 결코 노쇠하여 혼미한 자의 작품이 아니니, 이 점이 더욱 괴이합니다. 그러나 응일 또한 그 말에 논리가 없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마는, 선왕에 관계된 일인만큼 누가 감히 대들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이렇듯 시험삼아 떠보고 현혹하는 말을 함으로써 화를 전가시켜 일망타진할 계책을 이루려 한 것이니, 이 어찌 직분상 선왕을 위하고 전하에게 충성을 바치려 한 자이겠습니까.
전일 조위봉(趙威鳳)이 소를 올렸을 때 그것이 과연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러웠는데, 익수(翼秀)가 재차 소를 올리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음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정원에 명하여 그를 불러다 물어 보도록 하셨을 때 사실이 드러나고 말이 궁해지면서 그의 간교한 작태가 모두 폭로되었는데, 당시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임금을 속인 그의 죄를 바로잡지 못했고 전하께서도 능침과 관련된 일이라서 관대히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잇따라 응일의 소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 나라에 큰 일이 발생해 성상께서 걱정하시고 뭇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데, 이런 때를 당하여 또 불평분자가 기회를 틈타 뚫고 들어오면서 벌떼처럼 일어나 동요시키고 있으니, 신은 국가의 일이 끝내 어떤 상황에 놓여지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고 속히 응일의 죄를 바로잡으심으로써 뭇 사람들의 의심을 가라앉히고 뭇사람들의 심정을 통쾌하게 해 주소서."
하고, 응교 이선(李選)이 상소하기를,
"근래 사람들의 심정을 보건대, 흉흉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치 큰 화란이라도 곧 일어날 것처럼 여기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장응일(張應一)의 상소 때문입니다. 그가 마음 내키는 대로 두렵게 느끼도록 한 말 모두가 군부(君父)를 위협하고 조정 신하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었는데 성명께서 위에 계신 만큼 통쾌하게 호오(好惡)를 보여주시어 화란이 일어날 씨앗을 없애버려 주실 줄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거꾸로 비답을 내려 타이르면서 그에게 응수해 주셨으니, 이것은 어찌 된 연고입니까.
응일이 윤선도(尹善道)의 소를 제기하면서 그 목적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애석해하였는데, 심지어는 ‘정원에서 불태워진 채 끝내 전하께서 보시도록 봉입(捧入)되지 않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당초 선도의 소에 대해서는 상께서 훤히 알고 계시어 특명으로 쫓아냈고 소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전하께서 보신 뒤에 있었는데도 응일은 전하께서 보시도록 봉입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분명히 기억하고 계실텐데 그래도 이렇게 속였으니, 그밖에 날조한 것들이야 또 논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 흉인(凶人)들이 사림(士林)에 한번 화풀이하려고 별러 온 지가 오래 됩니다. 그리하여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의 설을 가지고 당초 화를 전가시킬 막강한 수단으로 삼아 선도가 앞에서 창도하고 조경(趙絅)이 뒤에서 화답하였으며, 잇따라 종묘에 고하고 죄를 청해야 한다는 소장과 부판(附板)051) 한 일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소를 올리면서, 군부(君父)에 대해 중한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사림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에 빠뜨리려고 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다행히 성상의 뜻이 굳게 정해지신 덕분으로 간교한 꾀가 실패로 돌아가 10년 동안 무사하게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또 원침(園寢)의 일을 가지고 안면을 바꾸고 나와 기필코 그 마음을 후련하게 하려고 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것이 어찌 시골에 물러가 살며 정신이 혼미해진 80노인이 독자적으로 해 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글을 띄워 사주를 해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이름을 가탁한 뒤 한번 시험해 보는 선봉(先鋒)으로 삼겠다는 그 의도가 숨길 수 없이 환히 드러났는데, 이산해(李山海)와 이이첨(李爾瞻)이 오늘날에 다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간흉(奸兇)의 무리가 밤낮으로 기원한 것은 오로지 광중(壙中)에서 물이 나거나 재궁(梓宮)에 틈이라도 벌어졌으면 하는 것으로서, 만일 조금이라도 이와 비슷한 사태가 한번 발생하면 반드시 서로들 이끌고 일어나 끝내 조정을 망치고 어지럽게 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했던 것인데, 성명께서 임어하시는 만큼 그럴 리는 없으리라는 점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사림의 화가 전후로 잇따랐는데, 기묘년의 화란이나 을사년의 옥사야말로 참혹했다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소인은 으레 중한 일이라고 핑계대고 교묘하게 일을 얽어내기 마련이라서 아무리 현성(賢聖)한 임금일지라도 일시적으로 가리워져 그들의 협제(脅制)를 받은 나머지 그 의도대로 따라주는 경우가 없지 않으니, 어찌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중묘조(中廟朝) 때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희릉(禧陵)의 총호사(摠護使)로서 광중(壙中)에 암석이 있는 것을 보고 즉시 계품(啓稟)한 뒤에 비로소 대례(大禮)를 완결지었고 보면, 광필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 능을 옮길 때에 이르러 간신 김안로(金安老)가 이것을 가지고 그의 죄안(罪案)으로 삼아 반역(叛逆)에 해당하는 율(律)을 적용했는데, 간신히 감사(減死)되어 유배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인성(仁聖)한 군부가 아니었던들 광필이 성명(性命)을 보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시에 논죄할 때에야 분명히 안로를 충성스럽다고 하고 광필을 죄인으로 몰아부쳤겠습니다만, 지금 와서 볼때 안로가 과연 나라를 위한 충신이었고 광필이 과연 나라를 등진 사람이었습니까.
이번에 영릉의 석물에 틈이 난 것에 대해서도 본래 이익수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전후에 걸쳐 봉분을 개축하자고 청한 것으로는 이미 유현(儒賢)의 의논과 간신(諫臣)의 소와 탑전에서의 중신(重臣)의 아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에 여러 신하들이 다시 품달드리지 못했던 것은 단지 그 사체가 지극히 중했기 때문이었을 뿐이지, 어찌 일찍이 덮어둘 일이 있고 숨기며 속일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능을 옮기게 된 일이 국가의 큰 다행이니만큼 익수가 처음 상소한 그 뜻은 충성스러운 것 같기도 했습니다만, 그 글 속에 나타난 의미를 볼 때는 함축하고 있는 뜻이 현저하였으므로 그 소를 보고 우려하지 않을 자가 없었는데, 그가 재차 상소함에 미쳐서는 정원에서 대질 신문을 벌인 결과 사주를 받아 대신 기술한 정상이 모두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조위봉(趙威鳳)의 소가 처음 익수가 소를 올린 뒤를 이어 펄쩍 뛰어나왔는데, 상께서 놀라 동요하고 계실 즈음이라서, 기회를 틈타 교묘하게 맞추려는 설이 거꾸로 가장(嘉奬)되는 비답을 받게 되자, 남몰래 서로들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면서 자기들의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급기야 성명께서 처분하신 뒤에 여러 신하들에게 내린 죄가 군소배들의 기대에 오히려 차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 또 천 리 밖에서부터 응일의 소가 이르게 된 것인데, 이는 마치 10일 연왕의 글052) 과 같은 점이 있는 것으로서 꼭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허다하게 조작해 낸 뜻이 실제로 서로 조응(照應)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김안로가 능침의 일이 중하다는 것을 빙자하여 충량(忠良)한 인사를 모함하여 해친 것과 전후로 똑 같은 방식인데, 전하께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혹시 모르신다면 모르지만, 아시면서도 뒷 일을 염려하고 꺼린 나머지 명확하게 변별하여 통렬히 배척하지 않으신다면 장차 참소하여 해치는 자들의 입을 막을 길이 없게 되면서 급속도로 그네들의 술수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시어 속히 응일의 죄를 다스리심으로써 간특하고 흉측한 무리들의 행태가 사라지게 하소서. 그러면 국가에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고, 이어 병에 걸린 상태를 진달하고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이유상의 소에 대해서는 신정의 소에 비답한 것과 동일하게 답하고, 이선의 소는 한 달여 동안 안에 놔두고 단지 사직하지 말라고 회보하였다.
상이 총호사 김수흥 및 도감 당상을 인견하였다. 승지 안진이 아뢰기를,
"장응일(張應一)의 소에 대한 비답에 통렬히 배척하는 내용이 별로 없으니 아랫사람들로서는 의혹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다만 그 상소의 말에 많은 곡절이 있었고 그가 가차(假借)한 것이 중대한 것이었으므로 만약 범상하게 여기고 곧바로 배척할 경우 사체(事體)에 온당치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답했던 것일 뿐이다."
하였다. 안진이 아뢰기를,
"그 소의 내용에도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많았습니다. 윤선도(尹善道)가 산릉의 일로 상소했을 때에 상께서 상하를 이간질하는 그의 태도를 미워하시어 삭직하도록 명하셨고, 이튿날 옥당이 그의 소를 불태우자고 청하자 상이 그 소를 삼공(三公)에게 두루 보여 준 다음에 불태우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일의 곡절이 이러한데도 응일이 감히 속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일이든 간에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일단 불태운 다음에는 나중에 구해 볼 흔적이 없어지게 되므로 사람들이 뒤에 말을 하게 마련이다. 삼공에게 두루 보여준 다음에 불태우도록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상이 응일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하문하니, 김수흥이 대답하기를,
"아마 육십 육칠 세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경자년 간에 신이 이조 낭관으로서 응일의 아비인 고(故) 유신(儒臣) 장현광(張顯光)의 시호(諡號)를 가지고 응일의 집에 가서 전하며 처음으로 그와 만나 보았는데, 그때 이미 술이 고질화되어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가까스로 주객(主客)의 예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벌써 10여 년이 흘렀으니, 얼마나 몸이 결딴났을지 알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응일의 소에 서명한 것을 보면 노인의 필적같지가 않았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모두 이 일에 대해 소장을 올려 진달하였는데, 성상께서 보시고도 아직 다 살피지 못하신 듯합니다. 응일이 소에서 윤선도의 일을 인용한 의도는 전적으로 판부사 송시열(宋時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보건대, 당초 수원(水原)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이시백(李時白)·이후원(李厚源)·이해(李懈) 등 여러 신하의 의논에서 나온 것이었고, 송시열도 진달한 적이 있긴 합니다만 시열 혼자서 주장한 것이 아니었으며, 영릉(寧陵)을 써야 한다고 말한 것도 시열이 창도한 것이 아니었는데, 민간에 전파된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두 시열이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응일이 그와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야말로 교묘하게 해 보려다가 거꾸로 졸렬하게 된 격이라 하겠다. 소위 ‘전하의 집안 일을 망치는 자이다.’라고 한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응일은 또 봉분을 개축하자고 의논드린 것을 흉참(凶慘)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생각하기에, 길한 곳으로 옮기지 않은 것을 안 된다고 여긴 나머지 흉참하다고 지목하기까지 한 것인가?"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이 점 역시 성명께서 제대로 통촉하지 못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경자년 이후로 시열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년복(朞年服)으로 의정(議定)한 것, 영릉을 쓰자고 주장한 것, 현궁(玄宮)을 합판(合板)한 것 등 세 가지 일을 가지고 시열의 죄안(罪案)으로 삼았습니다. 현궁을 합판한 것은 국가에 없었던 일로서 창졸간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부득이하게 나온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응일의 무리들은 생각하기를 ‘지금 능을 옮길 때를 당하여 혹시라도 재궁(梓宮)에 탈이 있게 되면 시열이 반드시 중한 죄를 입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시열의 패거리들이 봉분을 개축하자고 의논하여 엄호하려 하는 것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응일이 흉참하다고 말한 것도 주된 뜻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듣고 나니 이제야 상소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겠는데, 우상은 이미 전파된 말들을 들었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봉분을 개축하자고 한 뜻은 그저 일시적인 소견을 진달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을 흉참하다고 지목한 것은 오직 시열에게 죄를 돌리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옆에서 보는 자야 쉽게 보아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막상 당한 자의 입장에서는 어찌 마음이 위축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옛사람이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씀을 올릴 때 혹 걸(桀)·주(紂)·환(桓)·영(靈)에 비유한 경우가 있긴 하였습니다만 응일처럼 말한 경우는 옛날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자기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소하는 사람이 그칠 줄을 모른다.[讒人罔極]’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 온다마는, 이렇게까지 사람의 말이 있게 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하자, 수흥이 아뢰기를,
"성명께서 위에서 어떤 어둠침침한 곳도 환히 밝혀 보시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신릉(新陵)의 정자각(丁字閣) 공사는 제때에 마칠 수 있겠는가? 영악전(靈幄殿)을 유둔(油芚)과 초둔(草芚)으로 덮기 때문에 큰 비라도 오면 빗물이 스며드는 결과를 면치 못하는데, 일찍이 듣건대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상 때에 비가 와서 낭패를 당했다고 한다. 지금 신릉의 경우는 영악을 설치하지 말고 정자각에 봉안했으면 한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정자각의 재목을 이미 분정(分定)했으니 제때에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호판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이번 능을 옮길 때의 여러 기구를 일체 기묘년 빈전 도감(殯殿都監)의 전례(前例)에 따르고 있습니다만, 대렴(大斂) 때부터 마련해야 하는지 아니면 소렴(小斂) 때부터 마련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하문하기를,
"희릉(禧陵)의 전례는 어떠한가?"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국사(國史)를 상고해 보건대, 희릉의 능을 옮길 때에는 단지 대렴 때에 고쳤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소렴 때부터 마련토록 하라."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능 위의 석물(石物)에 관한 제도를 미리 정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청(都廳)을 보내 효릉(孝陵)·장릉(長陵)·영릉(寧陵)을 봉심케 한 뒤에 품정토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신릉의 석물을 일체 영릉(英陵)의 제도대로 하고 병석(屛石)은 설치하지 말자는 의견이 이미 전일 인견할 때 나왔었다. 그뒤 자성(慈聖)께 여쭈었더니 자성의 뜻도 그와 같으셨다."
하니, 수흥 등이 아뢰기를,
"병석을 설치하면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기울어질 염려가 없지 않은데, 사초(莎草)가 시들어 손상되는 것도 이에 연유합니다. 영릉과 광릉(光陵) 두 릉에서 병석을 세우지 않은 것도 필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성상께서 이렇게 분부하시니 정말 무척 다행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에 산릉의 혈(穴)을 정할 때 자성의 하교에 따라 쌍릉(雙陵)으로 제도를 정했었는데, 지금 신릉의 지형 역시 쌍릉을 들일 만한가?"
하니, 유중이 아뢰기를,
"만약 쌍릉의 제도를 쓰게 되면 정혈(正穴)이 중앙에 위치하게 되어 기지(棄地)가 되는 결과를 면할 수 없습니다. 여러 지관(地官)들 모두가 하혈(下穴) 역시 지극히 좋다고 하는데, 만약 상하로 능을 만들 경우 정리(情理)로 볼 때 쌍릉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기해년 국장(國葬) 때에 여사군(轝士軍)의 액수(額數)를 6천 9백 명으로 정해 외방에 분정(分定)했었는데, 7천 명에 가까운 인부를 외방에서만 감당하게 하기에는 형세상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번 능을 옮기는 큰 일을 당하여 서울의 인민(人民)들 또한 어찌 감히 스스로 편하게 여기겠습니까. 여사군을 경군(京軍)으로 조용하여 1호(戶)당 각각 1명씩 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뒤이어 서울의 민호(民戶)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여 총융청과 수어청 두 곳의 아병(牙兵) 3천여 명을 조발해 쓰도록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편방(便房)에 소장할 것들도 모두 미리 만들어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면복(冕服) 종류같은 것들은 당초 평상시 쓰시던 것들로 했으니 지금 새것으로 고쳐서는 안 될 것이나, 그밖에 새로 만들어서 쓴 여러 물건들은 지금 역시 개조토록 하라. 죽책(竹冊)이나 왕세자 고명(誥命)은 다른 물건과는 다르니, 역시 옛날 것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공판 이정영(李正英)이 아뢰기를,
"전례(前例)를 상고해 보건대 재궁(梓宮)의 은정(隱釘)053) 으로 이년목(二年木)을 썼는데, 이년목(二年木)이 땅에 들어가면 가장 쉽게 썩으니, 이는 대체로 나무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 옛날 방식대로 한다는 것은 실로 미안하게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년목(二年木)을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석(誌石)을 개조할 일을 송 판부사에게 물어 보았더니, ‘옛 지석에 남은 공간이 있으면 거기에 더 새겨 넣기만 하면 될 것이고, 만약 공간이 없다면 새 지석을 써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당초에 글자를 계산한 뒤 안배해서 새겼을텐데 어찌 남은 공간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새 지문은 강화(江華)의 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 돌의 품질이 매우 견고하고 강해서 오래도록 전할 수 있는데, 그래도 모호하게 마멸되는 근심이 없도록 구워 만든 것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석각(石刻)하는 일 하나는 의례(儀禮)를 다 갖추어 쓰도록 하되 구워 만드는 일도 병용토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1일 기미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장응일(張應一)의 소에서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며 인구(引咎)하고 죄를 청하는 동시에 체직시켜 주기를 빌었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2일 경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총호사 김수흥 및 천릉 도감 당상을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김휘(金徽)가 신릉(新陵)과 구릉(舊陵) 사이의 도로를 살펴보고 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릉에서 이천(利川)까지 몇 리(里)나 되는가?"
하자, 김휘가 아뢰기를,
"구릉에서 사기소(沙器所)까지 85리이고 사기소에서 이천까지 35리이고 이천에서 신릉까지 50리인데, 사기소에서 이천으로 가는 길을 잡지 않고 곧장 신릉으로 향할 경우에는 겨우 75리밖에 안 됩니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이천을 숙소(宿所)로 삼을 경우, 겨울철에 해가 한창 짧을 때에 1백 20리나 되는 거리를 통과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사기소가 읍 소재지는 아니지만 지세가 넓고 탁 틔어 촌락이 꽤나 번성하고 바로 신릉과 구릉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쪽 거리가 균등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이곳에 영악전(靈幄殿)을 설치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판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옛 제도를 보면 외재궁(外梓宮) 위에 세 치짜리 칸막이 판자를 놓아 석회나 탄 가루가 닿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외재궁에 바른 칠이 손상될까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선조(先朝) 때에는 광중(壙中) 안이 너무 넓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용하지 말도록 명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판자의 두께를 얇게 해서 쓰면 어떻겠는가?"
하였는데, 수흥이 아뢰기를,
"깎아내어 얇게 할 수야 있겠으나, 끝내 쓰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예판 조형이 아뢰기를,
"만약 두꺼운 유지(油紙)로 덮는다면 광중 안이 너무 넓어질 염려가 없을 뿐 아니라 옻칠한 것이 손4상될 걱정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도 남는 물건이니 쓰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6월 23일 신유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에게 전유하여 전의 지문(誌文) 속에 문자를 첨가해 기입토록 하였다.
6월 24일 임술
정재숭을 병조 참지로, 송창을 보덕으로, 서문상을 사서로 삼았다.
상이 동부승지 이규령을 보내 판부사 송시열에게 전유하였다.
"지난번 사관(史官)이 돌아와 올린 경의 말을 보건대 불안해하는 뜻이 많이 있었는데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번에 장응일(張應一)이 소를 올려 두서없는 말로 암암리에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는데, 심지어 수원(水原)의 설까지 끄집어낸 것은 그 의도가 더욱 흉참하기 그지없는 것이라서 내가 경악하였으므로 이에 근시(近侍)를 보내 나의 뜻을 유시한다.
이번에 능을 옮기게 된 일이야말로 망극한 변고이니 어찌 불행한 것으로만 그치겠는가. 그런데 간인(奸人)이 그 틈을 타고 끝없이 말을 날조해내고 있는데, 이는 나의 성효(誠孝)가 형편없어 오늘과 같은 일을 초래한 것이기 때문에 가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릴 따름이다. 그러나 상하를 이간질하고 나라를 망칠 꾀를 낸 것 같은 것은 전의 역사에서 그런 일을 보기만 해도 두려워지는 일로서 더욱 놀랍기 그지없다.
아, 흉인(凶人)이 꾀를 쓰는 것이 아무리 간교하다고는 해도 이 일의 경우는 결코 근사하지도 않은 것이니 경이 불안하게 느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속히 멀리 하려는 마음을 돌려 빠른 시간 안에 올라와서 능을 옮기는 예를 주선토록 하라. 그러면 선왕이 특별히 대우해 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6월 25일 계해
예조가 아뢰기를,
"오늘이 바로 입추절(立秋節)이니, 다시 정전(正殿)에 임어(臨御)하시고 상선(常膳)을 회복하는 일 등을 관례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교리 최후상과 부교리 이합 등이 차자로 진달하여 장응일(張應一)의 죄가 중한데도 가벼운 율(律)을 적용해 논한 헌부의 잘못을 아뢰니, 장령 성호징이 인피하였다. 정언 홍만종·박상형이 아뢰기를,
"옥당이 차자를 올리면서 장응일의 죄가 중한데도 가벼운 율을 적용했다고 아뢰었으니, 여론의 소재를 이에 의거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이를 말하지 못한 잘못을 이미 면하기가 정말 어려운데, 더구나 헌부의 관원이 이를 이유로 인피했고 보면 신들로서는 스스로를 탄핵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역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9일 정묘
대사간 신정은 추고받고 있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의 이유상은 병 때문에 소명에 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이숙을 대사간으로, 김수오를 장령으로, 나이준을 수찬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승지로, 홍만종(洪萬鐘)을 사서로, 서문상(徐文尙)·이유(李濡)를 정언으로 삼았다. 이유는 곧 이어 추함(推緘)받는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8월 (0) | 2025.12.07 |
|---|---|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7월 (0)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5월 (0)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4년 1673년 4월 (0)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4년 1673년 3월 (1) | 2025.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