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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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무릎 부위의 산통(酸痛) 때문에 뜸을 떴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현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고 있으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그런데 지사 이구원(李久源)은 나이가 90이 넘었고, 능풍군(綾豊君) 구인기(具仁墍)는 나이가 80에 이른데다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 생존해 있는 자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가자(加資)한 것이라고 해야 모두 자헌(資憲)에서 정헌(正憲)으로 올린 데 불과하니, 이 두 사람은 품계를 바꿔 가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 참판 정두경(鄭斗卿)이 이미 죽었습니다만, 그도 자헌으로 추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박천영(朴千榮)에게 다시 급제(及第)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천영의 본 시험 답안지 가운데 몇 글자나 주필(朱筆)로 점을 찍어 고친 곳이 있었으므로, 대간이 간계(奸計)가 있지 않나 의심하여 계청(啓請)해서 합격을 취소토록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좌참찬 장선징이 천영의 합격이 취소된 원통함을 극력 말하면서 ‘요즘 가뭄의 재해가 드는 것이 꼭 여기에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고 하고, 우상 김수흥(金壽興)도 ‘점을 찍어 고친 곳이 문장이 잘 되고 못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천영 역시 그런 사실을 알았을 리가 전혀 없다.’고 하자, 상이 마침내 그의 복과(復科)054)  을 명한 것이다.
살피건대, 천영의 시험 답안지 중에 일단 주필(朱筆)로 지우고 고친 흔적이 있었고 보면, 그가 그런 사실을 알았는지의 여부를 따질 것 없이 대간이 법에 의거하여 합격을 취소시키도록 한 것이야말로 옳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천영이 연줄을 부여잡고 분주히 움직여 끝내 복과되고야 말았으니, 조정의 전도된 거조가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7월 2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정(申晸)을 대사성으로, 성호징(成虎徵)을 정언으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삼았다.

 

장령 김해일(金海一)이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언 서문상(徐文尙)이 추함(推緘)받는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헌납 김석주(金錫胄)가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선릉(先陵)의 토석(土石)에 틈이 벌어지는 변고가 있게 되었으므로 군신 상하가 속이 상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급속도로 능을 옮길 계책을 정해 이미 시일을 복정(卜定)하였고 장인(匠人)의 일도 이미 채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충성심이 있고 의리를 아는 자라면 그야말로 황급해하고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마음과 뜻을 함께 합쳐 만세토록 모실 유택(幽宅)을 마련하는데 각자 힘을 다 쏟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이런 때에 느닷없이 틈을 비집고 천리 밖에서 소(疏)를 전해 들여 왔습니다. 그리고는 패거리를 지어 대립하고 배격하며 노여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하고 원수로 여기며 유감을 품고 있는 그 뜻을 한번 이루어보려고 하였습니다. 남이야 불행하게 되든 말든 재앙을 당하는 모습을 즐거워하며 한 세상을 측량할 수 없는 위태한 경지로 모두 몰아넣으려는 그 행위야말로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 가슴이 서늘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뜻이 군부(君父)를 격동시키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는 태상(太上)을 조롱하는 일까지 하면서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그의 계책이 아랫사람들과 틈이 벌어지도록 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말을 감히 날조해내면서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성명께서 남김없이 살펴주신 덕택으로 그의 정상이 도망칠 길이 없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한때의 간인(奸人)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만, 이런 자가 만약 독기를 그대로 마음 속에 남겨두고 재앙을 일으킬 뜻을 품는다면 끝내 조신(朝紳)에게 화근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삭탈 관직하고 문외 출송시키는 벌은 너무도 가볍게 감해 준 것으로서 ‘계속 참소하는 저런 자는 불모지에나 던져버려야 한다.’055)  는 의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장응일을 멀리 유배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 일이 있을 경우 삼사(三司)가 의견을 합하여 의론함은 바로 평상시의 규례입니다. 전일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응일을 논할 때에도 옥당과 상의해서 율명(律名)을 의정(擬定)했었는데, 끝에 가서 그만 율이 가벼웠다고 옥당이 차자를 진달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중도에 낭패를 보게 하고 어떤 길을 쫓아야 할지 종잡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말하며 의논할 때에 기본적인 지조가 없어서는 안 되니, 차자를 진달한 옥당의 관원을 모두 체차 하소서. 그리고 정언 성호징은 잇따라 대각에 있으면서 걸핏하면 남으로부터 비난하는 의논을 받았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윤지선(尹趾善)·정도성(鄭道成)을 정언으로, 유연(柳㝚)을 장령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지평으로, 이훤(李藼)을 교리로, 김석주(金錫胄)를 부교리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삼았다. 도성은 곧 이어 추함(推緘)받는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7월 3일 경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나아가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의 복제(服制)를 보건대, 일단 우제(虞祭)를 지내고 나면 복을 벗고, 벗은 다음에는 흰옷 차림으로 3개월을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예라 하더라도 반쯤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막중한 예이니 외방의 유신(儒臣)에게 물어보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감사의 임무는 부서기회(簿書期會)056)  하는 것만이 아니고, 수령의 출척(黜陟) 또한 감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가 된 자들은 전최(殿最)057)   할 때 한 두 수령을 대상으로 책임을 메꾼 채,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파출(罷黜)시킨 경우는 끝내 없었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선정신 이이(李珥)가 황해 감사로 있을 때는 대부분 하등(下等)과 중등(中等)으로 평가하고 등제(登第)058)  하는 사이에 어쩌다가 상등(上等)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포폄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상등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정사를 공수(龔遂)나 황패(黃霸)처럼 한 뒤에야 상등에 맞을텐데, 어찌 사람마다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팔도의 감사를 모두 추고하여 경책(警責)토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동궁을 보양하는 임무야말로 가장 중대하고 급한 일인데, 현재 진선(進善)이나 자의(咨議) 등의 직위를 부질없는 자리로 보고 있으니, 참으로 염려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윤선거(尹宣擧)가 군직(軍職)에 부쳐진 뒤 표폄으로 중고(中考)를 맞은 탓으로 의망되지 못하였는데 신의 조부가 일찍이 유감으로 여겼었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이 사람들의 경우, 군직에 부쳐진 뒤 쉽게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포폄할 때 관례에 따라 중고에 해당시키고 그 결과 이조에서 의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표폄에서 중고를 맞은 자는 누구인가?"
하였는데, 수흥이 아뢰기를,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신석번(申碩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 사람의 중고는 탕척해주고 포폄하여 등제(登第)한 속에 ‘미처 올라오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기록해 두어라."
하였다.

 

동부승지 이규령(李奎齡)이 아뢰었다.
"신이 명을 받들고 가서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에게 유시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어제 예관(禮官)이 성상의 분부를 전유(傳諭)하여 신으로 하여금 새 지문(誌文)의 문자를 지어 올리게 하였으므로 신이 참으로 황공하기에 즉시 소장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고 면하게 해 줄 것을 빌었다. 그런데 지금 또 승지가 와서 전한 성상의 분부를 삼가 받들건대 간곡하게 타일렀다. 미천한 신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심이 참으로 지극하기에, 신은 받들어 읽으면서 눈물이 흐를 뿐 몸둘 바를 몰랐다. 다만 상소를 올려 배척한 그 사람으로 말하면 본디 명문(名門)의 자제인데, 신이 아무 죄가 없다면 그가 어찌 이렇게 하겠는가. 유지에 응하여 진언한 사람이 신 때문에 거꾸로 엄한 분부를 받았으니, 더욱 더 신이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우리 선릉(先陵)을 옮겨 모시는 날에는 신이 비록 기력이 다하긴 했지만 목숨이 그래도 남아 있는 한 어찌 감히 나아가서 못다 한 애통함을 풀지 않겠는가.’하였습니다."

 

7월 4일 신미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사양하고 아뢰기를,
"지난 기해년 가을에 전하께서는 신이 일찍이 외람되게도 선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의 반열에 끼어 있었다는 이유로 지문을 지어 올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이 보기 드문 성고(聖考)의 은혜를 과람하게 받고서도 식견이 얕고 재주가 소활한 나머지 성지(聖志)를 받드는 일을 앞에서 이미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또 정신이 혼미하고 문장력이 졸렬하여 성덕(盛德)을 뒤에서 드러내지 못하였으므로, 늘 이를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간담이 떨어지는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면례(緬禮)059)  를 거행함에 있어 다시 이 명을 받고 보니 슬픔이 새로 북받쳐 오르면서 옛날의 한스러움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더구나 신의 나이가 70에 박두하여 혼미해지고 쇠약해진 것이 또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닌데, 어떻게 기력이 다한 노둔한 몸을 책려하여 다시 전철을 밟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신이 이익수(李翼秀)의 소가 나온 이래로 삼가 듣건대, 물의가 신의 몸에 매우 중하게 죄를 돌리고 있다 합니다. 그러므로 전일 사관(史官)이 돌아갈 때에 신이 황공한 뜻을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잇따라 또 듣건대, 방외(方外)의 소가 마침내 올라와 크게 불충(不忠)하다는 죄목을 가했다 합니다. 신이야말로 왕법(王法)으로 용서해선 안 될 죄인으로서 그저 사패(司敗)에 회부되어 유사(有司)의 처단을 기다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찌 감히 아무 죄도 없는 자처럼 붓을 잡고 먹을 갈아 성명의 명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토록 명하였다.

 

장령 김수오(金粹五)가 아뢰어 장응일(張應一)을 멀리 유배보내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반년 동안 쟁집(爭執)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다.

 

밤에 태백성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7월 5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윤지선(尹趾善)이 본원(本院)의 계사(啓辭)에 혐의가 있어 감히 동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장응일(張應一)이 소에서 봉심(奉審)한 대신을 공격했는데, 정치화(鄭致和)가 바로 지선의 외숙이었다.

 

7월 6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김수오·유연이 아뢰기를,
"황해 감사 황준구(黃儁耉)는 일찍이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있을 때 청렴치 못하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었는데, 본직을 제수받은 이래로 더욱 근신하지 않아 열읍(列邑)에 폐를 끼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수령을 잘 다스려 깨끗한 정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책임을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누차 아뢰자 이에 따랐다.

 

7월 7일 갑술

산릉 도감(山陵都監)이 아뢰기를,
"하현궁(下玄宮)할 예정일이 구릉(舊陵)을 헐 날과 고작 7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전일 이미 행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일들을 제때에 하지 못하게 될 근심은 없을 듯합니다만, 신중하게 해야 하는 도리로 볼 때에는 길일(吉日)을 더 가려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지관(地官) 반호의(潘好義) 등으로 하여금 가려 뽑게 하였더니, 모두들 10월 25일이 크게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날을 계하(啓下)한 뒤 앞으로 형세를 보아가며 날짜를 물리고 당길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7월 8일 을해

김우석(金愚錫)·이혜(李嵆)를 승지로, 오두인(吳斗寅)을 참지로, 이우정(李宇鼎)·홍만종(洪萬鐘)을 정언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사서로, 김석주(金錫胄)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7월 9일 병자

상이 안질 때문에 침을 맞았다.

 

장령 김수오(金粹五)가 병 때문에 정부의 참알(參謁)에 나아가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7월 10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1일 무인

도목 대정을 행하였다. 박상형(朴相馨)을 장령으로, 정석(鄭晳)을 병조 참지로, 신정(申晸)을 예조 참의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응교로, 민종도(閔宗道)를 승지로, 윤증(尹拯)을 진선으로, 권우(權堣)를 좌윤으로, 조사석(趙師錫)·신익상(申翼相)을 부교리로, 박태상(朴泰尙)을 교리로, 김석주(金錫胄)를 이조 정랑으로, 유송제(柳松齊)를 지평으로, 이훤(李藼)·이당규(李堂揆)·윤진(尹搢)을 이조 좌랑으로, 임상원(任相元)·이인환(李寅煥)을 수찬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홍만종(洪萬鐘)을 부수찬으로, 윤창형(尹昌亨)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았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의 시복(緦服)에 대해 경오년에는 정원의 계사(啓辭)에 따라 우제(虞祭)를 지낸 뒤 시복과 흰 옷 차림의 복장을 모두 벗었었습니다. 지금 복을 벗는 한 조목은 역시 경오년의 예에 따라 거행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전례(前例)가 있는 만큼 그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마는, 자세히 살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다시 송 판부사에게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행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의논드리기를,
"일찍이 기억하건대, 경오년에 능을 옮기고 복을 벗은 뒤에 신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이 《의례(儀禮)》 및 주자(朱子)의 설을 따르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겨 글을 보내 장유(張維)에게 질문하였더니, 그가 답서를 보내기를 ‘조정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렇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일단 자사(子思)의 설도 있고 보면 오늘날 행한 것이 또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건대 유선(儒先)의 논을 알 수 있고 장유가 융통했던 은미한 뜻도 알 수가 있는데, 신의 입장에서는 이미 전수받은 설이 있는 이상 다시 다른 의논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건대 오늘날 찬궁(欑宮)을 열고 하현궁(下玄宮)할 때까지의 기간이 고작 6, 7일 밖에 되지 않고 보면 금방 착용했다가 금방 벗어버린다는 것도 군부(君父)에게 극진하게 대해야 하는 신자(臣子)의 도리가 못될 듯싶습니다. 성상의 입장에서 진선(盡善)하고 진미(盡美)하게 되는 방향으로 살펴 조처하셔야지 꼭 전례가 어떠했는지에 다시 구애받으실 것은 없습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기해년 초상일(初喪日)에 신이 고(故) 참찬 송준길(宋浚吉)과 의논 드리면서 《의례》 및 주자의 설을 따라 관질(冠絰)과 최상(衰裳) 차림으로 성복(成服)하고 따로 시사복(視事服)을 만들어 사진(仕進)하는 것이 합당하겠다고 청했더니, 성상께서 불가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 의논을 조정 신하들에게 내리셨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외부의 의논은 고례(古禮) 및 주자의 설을 오늘날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곧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결국 전례를 따르게 되었으므로 식자들이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면례(緬禮)와 관련하여 그래도 예문(禮文)에 의거해서 세포(細布)와 숙마(熟麻)로 시마복(緦麻服)을 만들어 장례와 제사 때에 배행(陪行)하게 하고, 따로 소단령(素團領)·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臺) 차림으로 일을 보게 한다면, 군부에 대해 애통해하는 의리를 이루는 데 합치될 수 있을 듯하고 이로 인하여 점차 고례를 회복할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개 국가의 전례(典禮)는 사람의 마음과 예문이 서로 걸맞게 되어야만 인심에 유감이 없습니다. 신의 망령된 의견이 조정의 의논에 합치되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소회가 있기에 감히 이렇게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3개월의 복제를 따라 의논한 대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7월 12일 기묘

이지익(李之翼)을 황해 감사로, 안후(安垕)를 정언으로, 최관(崔寬)을 승지로, 윤심(尹深)을 응교로, 이유(李濡)를 교리로 삼았다.

 

7월 13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삼성 추국할 때 나아와 참여할 간원의 관원이 없었기 때문에 상이 명하여 외방에 있는 대사간 이숙(李䎘), 사간 박세당(朴世堂), 헌납 송규렴(宋奎濂)을 체직시키고, 김휘(金徽)를 대사간으로, 윤심(尹深)을 사간으로, 어진익(魚震翼)을 헌납으로 삼았다.

 

정언 안후(安垕)가 추함(推緘)받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적곡(糴穀)을 허위로 기재한 각도 수령의 문서가 지금 모두 올라 왔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아 일체 논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럴 것이다. 1천 석 이상을 허위로 기재한 자는 나문(拿問)하고, 1백석 이상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11석 이상은 추고하고, 10석 이하는 논하지 말라."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이 청하기를 ‘연한이 이미 찬 수령 중에 치적의 명성이 있는 자는 대신과 의논하여 뽑아쓰게 했으면 한다.’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옛 법제를 가벼이 고치는 것은 거북할 뿐만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어느 일이고 간에 법제를 지켜 나가면 그리 큰 잘못이 었는데, 법 테두리를 벗어나 융통하다 보면 끝내 폐단이 생기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일체 옛 법제대로 준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연한을 넘긴 사람 가운데에도 애석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다만 생각건대 수령의 임무는 다른 직책과 달라서 노쇠한 사람은 임무를 수행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법전의 뜻을 보건대, 내직(內職)은 연한을 정하지 않고, 오직 외임(外任)만 연한을 정한 것이 우연한 게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가려 뽑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국가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 대신이 된 자는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외방의 형옥(刑獄)이나 재이(災異) 등이 관계된 장계(狀啓)를 으레 해조에 내릴 뿐 대신에게 두루 보여주는 규정이 없으니, 사체로 볼 때 이래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이 뒤로는 외방의 장계 가운데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은 일들은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와서 보여 주도록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7월 14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동래(東萊) 해운대(海雲臺)에 전일 바다 암석이 굴러 나온 곳에서 또 작은 돌이나와 여러 바위 가운데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고 도신(道臣)이 보고 하였다.

 

7월 15일 임오

안진(安縝)을 승지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병조 참판으로, 정륜(鄭錀)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정언 이우정(李宇鼎)이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대사간 김휘(金徽)가 인피하기를,
"장응일(張應一)이 유지에 응한다는 핑계로 천리 먼 곳에서 봉소(封疏)하였는데 이미 사실과 다른 내용일뿐더러 말조차 두서가 없으니 그의 죄를 청하는 논을 늦출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다만 장응일의 소가 그의 의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에게만 죄를 주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겠지만, 만약 글을 보내 그를 사주한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한다면 사주한 그 사람의 죄야말로 응일에 비해 더욱 중하다 할 것입니다. 대저 군부(君父)를 기롱하고 대신의 죄를 성토하는 것이 얼마나 중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안으로는 모함하려는 마음을 품고 밖으로는 자취를 남기는 혐의를 피하려 하면서 종적을 숨기고 안면을 바꾸고 나와 그 계책을 이루려 하였고 보면, 이 심술로 장차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 죄야말로 유배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될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은 이렇습니다. 먼저 응일을 사패(司敗)에 내려 그런 뜻을 주입시킨 사람을 끝까지 따지게 하면 전하의 위엄에 눌려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 그런 뒤에 죄를 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주한 사람이 없이 응일 혼자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찌 흑심을 품고 사특하게 굴었다는 죄명을 그런 범죄 사실이 없는 사람에게 가함으로써 군신 상하의 관계가 의심하며 막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의견이 이와 같아서 유배를 보내자고 청하는 논에 구차하게 동조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장령 박상형·유연이 처치하여 ‘따로 의견을 내어 억지로 인피하다니 구차함을 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안질 때문에 침을 맞았다.

 

7월 16일 계미

김환(金奐)을 정언으로, 홍만종(洪萬鐘)을 수찬으로, 서문상(徐文尙)을 부수찬으로, 정중휘(鄭重徽)를 문학으로, 이유(李濡)를 사서로, 이훤(李藼)을 교리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았다.

 

7월 17일 갑신

정언 윤지선(尹趾善)이 전계(前啓)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혐의가 예전과 다름이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7월 18일 을유

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이숙(李䎘)을 대사간으로, 강시경(姜時儆)을 정언으로, 윤지선(尹趾善)을 부수찬으로, 윤형성(尹衡聖)을 사간으로, 윤심(尹深)을 부응교로 삼았다.

 

평산부(平山府)에서 주인을 살해한 죄인 감동(甘同)과 춘덕(春德)이 복주(伏誅)되자, 부를 현(縣)으로 강등하고, 부사 홍석귀(洪錫龜)를 파직하였다.

 

7월 19일 병술

정창도(丁昌燾)에게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하도록 청한 원계(院啓)를 이때에 이르러 따랐다.

 

7월 20일 정해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연경(燕京)에 갈 때의 금제(禁制) 가운데 우리 나라에서 금하는 것으로는 은화(銀貨)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지금은 공공연히 싣고 가고 있습니다. 반면 피혁(皮革) 등 물건은 금조(禁條)에 들어 있지 않은데도 지난번 북사(北使)가 가렴주구하는 바람에 상신(相臣) 정치화(鄭致和)가 진달하여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범법자가 생길 때마다 그 물건을 빼앗아 공가(公家)에 들여서 몇년 동안 창고에 그냥 놔둔 결과 좀이 파먹고 끝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산물은 오직 인삼과 피물(皮物)뿐인 만큼 이것으로 연경과 통화(通貨)해도 안 될 것이 없는데, 이 길이 한번 막혀 장사치들이 전혀 조치해 마련하지 않은 관계로 피물이 희귀해져 통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금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1일 무자

이합(李柙)을 응교로, 윤증(尹拯)을 집의로, 이당규(李堂揆)를 이조 정랑으로, 안진(安縝)을 호조 참의로, 최후상(崔後尙)을 보덕으로, 장시규(張是奎)를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7월 22일 기축

장령 유연(柳㝚) 등이 아뢰기를,
"전조(銓曹)에서 불공정하게 선발하는 것이 요즘 들어 고질적인 폐단으로 되었는데, 이번 대정(大政)에서는 정말 더욱 심한 점이 있었습니다. 제목(除目)이 내리기도 전에, 이지(李墀)는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될 것이고 안찬(安燦)은 순안 현령(順安縣令)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사부(士夫) 사이에 전파되었었는데, 급기야 제배(除拜)된 것을 보니 과연 사람들의 말 그대로였습니다. 설령 이지 등의 재기(才器)가 그 자리에 충분히 걸맞는다 하더라도 미리 그런 말이 전파되어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내었고 보면 정관(政官)이 사정(私情)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이에 의해서도 알 수 있으니, 결코 그대로 부임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안음현감 이지와 순안 현령 안찬은 체차하고, 이조의 당상과 낭청은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3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24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정(申晸)을 대사간으로 삼았는데, 곧 이어 추함(推緘)받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하였다. 이때 명선 공주(明善公主)가 천연두를 앓고 있었으므로 약방 제조 및 여러 승지가 이어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7월 26일 계사

허적(許積)을 영의정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좌의정으로, 이숙(李䎘)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30일 정유

원임(原任) 좌의정 행 지중추부사 이경억(李慶億)이 죽었다. 이때는 그가 정승으로 들어 온 지 겨우 한 달이 넘었을 때인데 향년 54세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억은 그의 형 이경휘(李慶徽)와 같은 해에 등과(登科)하여 두루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했고 서로 바꿔가며 전형(銓衡)을 맡아 보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경휘를 낫게 여겼다. 경억은 자못 영민하고 예리하여 동료들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나 국량(局量)이 넓지 못해 재상의 그릇은 못되었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54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이경억은 그의 형 이경휘(李慶徽)와 같은 해에 등과(登科)하여 두루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했고 서로 바꿔가며 전형(銓衡)을 맡아 보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경휘를 낫게 여겼다. 경억은 자못 영민하고 예리하여 동료들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나 국량(局量)이 넓지 못해 재상의 그릇은 못되었다.

 

세자빈이 질병에 걸렸는데 그 증세가 천연두와 비슷하였으므로 상이 또 경덕궁(慶德宮)에서 어의동(於義洞) 본궁으로 옮겼다. 어의궁은 바로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잠저(潛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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