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일 기해
명선 공주가 죽었는데, 상의 장녀이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번 명선 공주의 상(喪)은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상과는 같지 않으니, 맹만택(孟萬澤)의 위호(尉號)를 그냥 두어야 할 듯한데,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만택은 승지 맹주서(孟胄瑞)의 아들로서 신안위(新安尉)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미 가례청(嘉禮廳)도 설치하고 육례(六禮)를 행할 길일(吉日)도 모두 가려 뽑았었는데, 만택이 어미 상을 당해 아직 예를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상이 이렇게 분부한 것이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의논드리기를,
"증자문(曾子問)060) 에 이르기를 ‘「딸을 시집보낼 길일이 정해졌는데 딸이 죽었을 경우엔 어떻게 합니까?」하니,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사위될 사람이 자최복(齊衰服)을 입고 조문하고 장례가 끝난 후 벗는다.」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석을 달기를 ‘그가 일찍이 청기(請期)061) 했기 때문에 자최복 차림으로 조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장례를 치르고 나면 벗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명선 공주에 대해 삼간택(三揀擇)062) 을 행한 뒤에 부마(駙馬)의 작위를 봉해 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납채(納采)·납폐(納幣)·명복(命服)·내출(內出)·친영(親迎) 등의 길일도 모두 가려 정했으며 가례청도 배설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야말로 예문(禮文)에서 이야기한 고기(告期)에 해당되는 만큼 사위될 사람이 당연히 자최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자최복을 입었으면 전일 명혜 공주의 상과 차이가 나는 듯싶기는 합니다만, 아직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위호(尉號)의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실로 근거할 만한 전례(前例)가 없고 신의 천박한 식견으로는 단정짓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상께서 재결하셨으면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길일을 정했고 또 가례청을 설치했으니, 그저 고기(告期)만 행한 경우와는 더욱 차이가 있다. 작호를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윤형성(尹衡聖) 등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내관 윤완(尹完)을 특별히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하는데, 신들은 삼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초 윤완이 산릉(山陵)을 감독한 신하들과 함께 죄를 입었을 때 경중의 차이가 있었기에 이미 뭇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불쾌하게 여겼었습니다. 현재 여러 신하들이 아직도 죄책을 받고 있는 중인데 윤완만 먼저 용서를 받았으니, 이것이 어찌 국체(國體)를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재차 아뢰자 따랐다.
8월 3일 경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신안위(新安尉)의 작호를 일단 그대로 두기로 한 만큼 신안위와 우승지 맹주서(孟胄瑞)가 들어 와서 상사(喪事)에 참여토록 하라."
8월 4일 신축
예조가 아뢰기를,
"맹주서가 말하기를 ‘들어가 상사에 참여할 때에 곡림(哭臨)하는 절차를 마땅히 의논해 정한 뒤에 거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안위의 위호(尉號)를 일단 그대로 두기로 한 이상 장례가 끝난 뒤에 복을 벗는 한 조목은 변통해야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주서는 바깥 청사(廳事)063) 에 들어와 곡하는 일에 이어서 호상(護喪)케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고, 신안위의 경우는 아직 부부 관계가 성립된 것은 아니지만 작호를 그대로 두기로 한 이상 장례를 마친 뒤에 복을 벗게 하는 것은 과연 타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일이 변례(變禮)와 관계되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부마의 작호를 그대로 두어야 할지의 여부를 하문하셨을 때 실로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기에 단지 증자문의 「자최복을 입고 조문한다.」는 한 조목을 가지고 답변드렸었는데, 끝내는 작호를 그대로 두라고 명하셨고 또 들어와서 상사(喪事)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일단 작호를 그대로 둔 채 「자최복을 입고 조문한다.」는 예문(禮文)을 한결같이 따르기로 한다면 들어와서 상사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히 그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다만 생각건대 자최복을 입은 것은 그가 고기(告期)한 상태에서 아직 부부 관계는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장례를 마친 뒤에는 복을 벗도록 한 것에 대해 예문(禮文)의 본의를 대체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작호를 그대로 두는 것에 변통한 점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예에 없는 예이고, 몽매한 신의 식견으로 억측해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신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 제왕가(帝王家)의 예절은 사부가(士夫家)와는 같지 않으니, 작호에 대한 하나의 일은 부닥치는 곳마다 불편한 점이 끝내 있다고 여겨진다. 성상께서 비록 매우 애통해하는 심정으로 차마 그만둘 수 없어 이렇게 그대로 두라는 명을 내리셨다 하더라도 앞으로 난처한 일이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성상께서도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다. 이런 변례(變禮)는 완전무결하게 강구해서 후세에 비난하는 의논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만큼 외방에 있는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여 선처하는 것이 실로 일의 도리에 합당하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공주의 상이 천만 뜻밖에 나왔으므로 상께서 비통해하시는 심정에서 정을 억누르지 못하신 나머지 신안위(新安尉)의 작호를 그대로 두도록 하시고 들어와서 상사에 참여토록까지 하셨습니다. 예문에 이른바 ‘자최복을 입고 조문한다.’고 한 것은 대체로 고기(告期)를 하고 부부 관계는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고기도 아직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뜻밖의 상이 있게 된 것인 만큼, 예문의 본의는 아니더라도 자최복을 입게 하는 것은 어쩌면 혹시 가능하겠지만, 작호를 그대로 두도록까지 한다면 앞으로 일을 처리할 때 조목마다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대신이 의논드린 뜻도 대체로 이에서 나온 것인데, 성상께서 변례에 대처하시는 도리상 전(前) 공주의 상과 차이가 없도록 하셔야 온당하리라 여겨집니다. 신들의 미천한 의견이 이와 같기에 앙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물어 보았고 또 처분을 내렸는데 본조가 자기 의견을 대신의 의견을 묻는 끝에다 첨가해 집어넣다니, 이는 실로 상규(常規)가 아닌 것으로서 매우 놀라운 일이다. 당해 당상을 중하게 추고하라. 그리고 일단 작호를 그대로 두기로 한 이상 장례만 치르고 복을 벗는 것은 부당하니, 이에 따라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육례(六禮)의 순서를 볼 때 고기(告期)는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 다음에 있고 친영(親迎) 앞에 있다. 이것이 《예기(禮記)》의 이른바 ‘딸을 시집보낼 길일(吉日)이 정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소위 ‘길일을 가려 뽑았다.’고 한 것은 단지 장차 육례를 행할 날짜를 가려 뽑은 것일 뿐이지 실제로 납채의 예도 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고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김수흥이 길일을 가려 뽑은 것을 가지고 ‘딸을 시집보낼 길일이 정해졌다.’고 한 것에 해당시킨 것은 본래 큰 착오였다. 예조의 계사(啓辭)가 그뒤에 나온 것은 대개 김수흥의 잘못을 또한 깨달아서 그런 것인데, 그러면서도 ‘자최복을 입게 하는 것은 어쩌면 혹시 가능하다.’고 말했으니 너무도 구차하다 하겠다.
홍문관 응교 윤심, 교리 이훤·임상원, 수찬 홍만종 등이 상차하여 신안위(新安尉)의 작호를 그대로 두도록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다. 그 대략에,
"살아서 얼굴 한번 못보았는데 죽어서 복을 입게 하는 것은 비정지정(非情之情)이고, 길(吉)할 때는 끼지 못하다가 흉(凶)할 때에 친족시(親族視)하는 것은 비례지례(非禮之禮)입니다. 이렇게 끌고 나가다 보면 입후(立後)하고 같은 묘소에 묻히게까지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일마다 구애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김수흥도 상차하여 논집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8월 5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6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좌의정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외람되게 덕의(德意)를 받들어 지문(誌文)을 지어 올렸는데 일찍이 또 글씨를 쓰라는 명까지 아울러 받게 되었습니다. 성자(聖慈)께서 신의 미천한 소원을 헤아리셨기 때문에 변변찮은 기예나마 스스로 보잘것없는 정성을 펴도록 하신 것이라고 신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다된 근력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죽을 힘을 다해 길에 올랐는데, 기보(畿輔)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신명(新命)064) 이 내렸다는 것을 갑자기 듣고 신이 넋이 나갈 정도로 놀랍고 당황스러웠고 앞에 말씀드렸던 미천한 정성을 스스로 완수할 수 없게 된 것을 혼자 한탄했습니다. 신은 그 길로 도망쳐 곧장 향리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습니다만, 나름대로 혼자 생각건대, 성고(聖考)를 영원히 모실 지역을 끝내 봉심(奉審)하지도 못한 채 돌아간다면 신이 죽어도 눈을 감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신이 그래서 감히 홍제동(弘濟洞)까지만 가기로 기약을 하고 전진하면서 아울러 비답을 내려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 비답에서 새로 내리신 제수를 개정하신다는 명이라도 듣게 되면 삼가 그 길로 대궐 아래에 나아가 끝내 글을 쓰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또 그 기회에 전하의 얼굴을 한번 뵙고 또 인하여 난수(變水)의 조정065) 에서 애통함을 다 펴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지금 이미 상신의 직임을 띠고 있는데 이렇듯 면례(緬禮)를 행하는 때를 당하여 어찌하여 직접 일을 집행해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경이 필시 고사(固辭)할 리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경의 소를 보고 내가 정말 놀랐다. 속히 올라와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피차 정의(情意)가 도탑게 될 것이고, 또 지석(誌石)의 공사를 제때에 마치지 못하는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 경은 유념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토록 명하였다.
8월 8일 을사
안후(安垕)를 정언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집의로 삼았는데, 안후는 추고당한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장령 유연·박상형이 아뢰어 신안위(新安尉) 맹만택(孟萬澤)의 작호를 그대로 두도록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몇 달 동안 쟁집하니, 비로소 따랐다.
8월 9일 병오
상이 본궁(本宮)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8월 10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유연·박상형이 ‘대신이 경연에서 대정(大政)을 행한 뒤 전관(銓官)의 추고를 청한 것은 과중하다고 배척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지평 유송제(柳松齊)가 처치하기를,
"추고를 청한 논이 서로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문장 표현상 타당성을 잃었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그러나 송제 역시 곧 이어 ‘발론한 대관(臺官)을 경솔하게 체차시켰다고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8월 12일 기유
좌의정 송시열이 또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8월 14일 신해
안진(安縝)을 승지로, 박세채(朴世采)·성호징(成虎徵)을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송시열(宋時烈)을 행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상이 요통(腰痛)을 앓아 뜸을 떴다.
대사간 이숙, 사간 윤형성, 헌납 어진익 등이 아뢰기를,
"김포(金浦)에 사는 허정(許炡)이라는 사람이 반노(叛奴)에게 해를 당해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고 일가족이 거의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포도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비밀리에 정읍현(井邑縣)에 관문(關文)을 보내 반노를 체포하게 하고 전주(全州)로 이송해 수금한 뒤 대략 이미 자복(自服)을 받아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읍의 향소(鄕所) 유진형(柳振亨) 등이 현을 혁파하는 폐해가 있게 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영하(營下)에 뇌물을 써 고의로 옥사(獄事)를 느슨하게 한 탓으로 반노의 무리들이 탈출하는 결과를 빚었고 도망자 5인 중에서 겨우 3인만 체포하였습니다. 그러니 제때에 즉각 계문하며 법대로 집행해야 할 일인데 당시의 감사가 그저 본현에 도로 수감토록 하였습니다. 유진형 등이 공주(公州) 사람을 사주하여 스스로 반노의 주인이라고 칭하게 한 뒤에 송사(訟事)의 단서를 야기시켜 시간만 지연시킨 채 결말이 나지 않게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 모두가 놀라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해도로 하여금 기찰(譏察)하여 반노를 잡게 하고 율(律)대로 적용하며 처단케 하소서. 그리고 진형 및 형리(刑吏) 옥졸(獄卒)은 경옥(京獄)에 잡아들여 각별히 엄하게 형신토록 하고, 당시 감사였던 오시수(吳始壽)는 파직하고 서용치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감사를 파직하는 일은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도승지 정익은 인재가 모자란 탓으로 외람되이 제수되어 물정이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판의금 조형(趙珩)은 유선(柔善)하다고 칭해지기는 하지만 본디 강과(剛果)한 면이 부족하니 옥사를 의논하는 임무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형조 판서 민희증(閔熙曾)은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있을 때 탐욕스럽고 잗단 짓을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소를 도살해 팔고 어부들을 침탈하면서 한 두 푼의 이익을 모두 자신이 독점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열 마리의 소와 다섯 대의 수레를 서울 저택으로 갖춰 보내면서 기인(其人)의 시목(柴木)을 실어 보내고 고가(雇價)를 많이 받아내어 자기를 살찌울 밑천으로 삼았으므로 부(府)의 사람들 모두가 침을 뱉으며 매도하고 있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면서 하교하기를,
"유선(柔善)한 것은 그다지 일에 해롭지 않다. 반드시 괴독(怪毒)한 뒤에야 일을 맡을 수 있는가. 정익의 일은 나도 모르게 놀라운 생각이 든다. 같은 패거리는 옹호하고 다른 쪽은 내치는 그대들의 뜻으로 논한다면 과연 그가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다. 이런 논은 정말 매우 증오했던 것인데 지금 또 보게 되니, 나도 모르게 놀랍다."
하였다.
8월 15일 임자
대사간 이숙 등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삼가 근일 조정에 공의(公議)가 펼쳐지지 못하고 명기(名器)가 대부분 외람스럽게 되는 모습을 보고 대간의 이름을 지닌 관원의 입장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없기에 한번 규핵하였으니 그 뜻은 격탁양청(激濁揚淸)하는 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문득 패거리를 옹호하고 다른 쪽을 치는 행위로 의심하시어 크게 노여워하시며 조금도 용서치 않으셨습니다. 이는 신들이 형편없이 임금을 섬긴 결과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가령 두 신하가 이 임무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신들이 어찌 고달프게 마구 이의를 제기하여 기필코 위로는 군부(君父)의 뜻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뭇 사람들의 화를 돋군 연후에야 시원하게 여기겠습니까.
아, 호(胡)와 월(越)도 같은 배를 타면 그래도 함께 건너갈 마음을 먹는 법입니다. 신들이 매우 어리석다 하더라도 속 마음은 있는데, 지금이 어떤 때라고 감히 패거리끼리 대립하며 배격하기만 하고 서로 이해하며 협력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전하께서 쓰시는 사람들을 보건대 흐물흐물한 인물이 아니면 매끄럽기 짝이 없는 인물들입니다. 전하를 위해 이목(耳目)의 책임을 맡은 자로서 어찌 감히 날로 타락하도록 맡겨만 두고 말 한 마디 없이 입을 다문 채 똑같이 데면데면 행동해서야 되겠습니까. 설령 신들에게 다른 쪽을 치려는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저 잔약한 일개 정익의 체차를 청한 것이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이미 엄한 분부를 받든 이상 그대로 있기는 결단코 어려우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공의가 펼쳐지지 않고 명기가 많이 외람스럽게 된 것은 오로지 그대들이 청요직(淸要職)을 도적질하며 당론(黨論)만 힘썼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다. 나는 차라리 흐물흐물하고 매끄러운 무리를 쓸지언정 괴독(怪毒)스럽고 형편없는 무리들은 기필코 쓰지 않을 것이다. 요즘 그대들의 행위를 보면 호(胡)와 월(越)보다도 훨씬 못한데, 어느 겨를에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건너가는 의리를 논한단 말인가. 일이 매우 통탄스럽다. 우선은 사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날 대관(臺官)이 인피하는 것이 이렇듯 느릿느릿하기만 하니, 이것이 곧 엄한 분부를 받고서 황공해하는 뜻인가, 아니면 분노가 치솟은 나머지 방자하게 구는 뜻에서 나온 것인가? 와서 인피한 대관에게 물어서 아뢰어라."
하니, 승지 오두인(吳斗寅)·안진(安縝) 등이 아뢰기를,
"삼가 간원의 여러 관원들이 인피한 데 대해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말씀이 준엄하시어 괴독(怪毒)하다고까지 지목하셨으니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리에 있어 이미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 별도로 비망기를 내리시어 와서 인피한 대관에게 물어보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신들은 더욱 놀랍고 의아해지는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국가에서 대관을 대우하는 도리는 일반 관원과는 자별한 법인데, 지금 조금 늦게 인피했다는 이유로 힐문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어찌 성스러운 조정에서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에 손상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답하기를,
"지금 이렇게 물어서 아뢰도록 한 일이 만약 일반 관원과 관련된 일이라면 금부에 내려 국문하도록 해야지 이렇게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대각을 우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신하된 자가 임금에게 고하면서 이렇게 형편없이 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또 아뢰기를,
"하교하신 뜻으로 즉시 대사간 이숙 등에게 물어 보았더니, 대답하기를 ‘신들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조방(朝房)에 와서 상의해 초안을 만들고 글을 전하다 보니 자연 시간이 지체되었다. 군신 관계는 부자 관계와 같은데, 아비가 노했다 하여 아들이 불경스럽게 대하는 그런 이치는 있을 수가 없다. 신들이 형편없기 그지없지만 어떻게 감히 군부의 앞에 조금이라도 분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겠는가. 그저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뜸을 떴다. 상이 약방 도제조 김수흥(金壽興)에게 이르기를,
"정익(鄭榏)이 과연 도승지에 부적합한가? 자연히 공적인 시비가 있을 것인데, 경이 말해 보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은대(銀臺)066) 의 장관은 그 임무가 매우 중하니 원래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찍이 이 직책을 역임한 자 중에 정익보다 못했던 자가 또한 어찌 없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대관(臺官)을 둔 목적은 바른 소리를 듣기 위해서인데, 근일 탄핵하는 것을 보면 모두 당론(黨論)에서 비롯되고 있으니, 이런 식이라면 대간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이 논은 모두 이숙이 앞장서서 주장한 것인데 연명(聯名)으로 인피하니 곧 그 자취를 감히 뒤섞어 놓으려고 계책한 것이다. 내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이숙이 경상 감사를 굳이 사양한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고 요로(要路)를 차지해 당론을 멋대로 행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말씀하실 때 이런 식으로 하셔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자,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수흥이 물러가 경계하는 차자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유의해 성찰하겠다."
하였다.
평안도 연변(沿邊)의 각읍에 매우 심하게 우박의 재해가 발생하였다.
8월 16일 계축
이유(李濡)를 부수찬으로, 이훤(李藼)을 지평으로 삼았다.
수찬 홍만종 등이 상차하여 이숙 등을 처치하기를,
"규핵(糾劾)한 논에 대해서 말의 책임을 질 것은 없습니다. 비록 엄한 분부를 받았다고는 해도 혐의로 삼을 필요는 없으니,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지가 불공정하고 처사가 무성의하니, 모두 체차시키라."
하였다.
8월 18일 을묘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향리에서 서울에 들어오니, 상이 사현합(思賢閤)에서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과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도 입시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하문하기를,
"지문(誌文) 가운데 공주 5인의 작호를 쓰지 않아 매우 모양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고례(古例)는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당(唐)나라 때에는 자손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당나라 이후로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전 지문 가운데에서 부마의 이름만 쓰고 공주의 작호를 쓰지 않은 이유는, 대체로 지어미는 지아비를 따라야 하는 반면 지아비가 지어미를 따르는 의리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공주의 작호를 써 넣으려 한다면,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예(禮)에 일체 따라서 그 명자(名字)를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상께서 명자(名字)를 써내려 주셔야 할 텐데, 모르겠습니다만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원록(璿源錄)》에도 공주들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여기에 이름을 쓴다고해서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전조(前朝)067) 의 능묘(陵墓)를 보건대 일단 표석(表石)이 없고 보니 그 자취가 불분명합니다. 현재 국운이 바야흐로 형통한 때에 흥폐(興廢)에 대한 일을 신자(臣子)가 감히 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은 세세 생생 끝나는 때가 없지만 국가는 이치상 반드시 흥폐가 있게 마련이다. 꼭 있게 마련인 일을 숨기고 그 대처 방법을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릉(新陵)에 표석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여러 능에 모두 세워야 할 것이다."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마는, 일에는 완급이 있는 법이니 우선 신릉에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문(篆文)으로 써서 새기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국릉(國陵)의 표석은 사서(士庶)와는 달라야 하니, 명정(銘旌)의 규정에 의거하여 전문으로 쓰는 것이 매우 타당하겠습니다."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국장(國葬)때 땅 위에 석회를 쓰는 일은 어찌 정할까요?"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시신의 살갗에 흙이 가까이 닿지 않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가장 절실합니다. 지금 땅 위에 요 하나만 깔고 외재궁(外梓宮)을 안치한다면 이는 매우 안 될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석회를 3척(尺)이나 쓴다면 이것 역시 너무 지나칩니다. 5, 6촌(寸)정도만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시열이 또 백관에게 관질(冠絰)과 최상(衰喪)의 제도를 행하게 하여 고례(古禮)를 복구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김수흥이 시열에게 월봉(月俸)을지급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8월 20일 정사
정륜(鄭錀)을 승지로, 최후상(崔後尙)을 교리로, 김환(金奐)을 사서로, 신정(申晸)을 예조 참의로, 여성제(呂聖齊)를 호조 참의로, 윤심(尹深)을 집의로 삼았다. 윤심은 추고당하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8월 23일 경신
이혜(李嵆)를 대사간으로, 윤증(尹拯)을 집의로, 최후상(崔後尙)을 사간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정언으로, 이동명(李東溟)을 보덕으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이선(李選)을 부응교로, 심재(沈梓)를 승지로, 김만중(金萬重)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번 산릉의 공사에서 기전(畿甸) 백성들이 분주히 복역하는 것이 외방과는 자별하니, 올해 거두어들이는 미곡을 양감(量減)해주는 조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특히 여주(驪州)·광주(廣州)·이천(利川)·양근(楊根)·양주(楊州) 등 5개 읍 백성들의 경우는 노역이 다른 읍보다 또 배나 되니, 따로 너그럽게 휼전(恤典)을 베풀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5개 읍에서 거둘 대동미(大同米)는 각각 3두(斗)씩 감하고, 다른 읍은 각각 1두씩 감해주되 봄에 거둘 미곡에서 계산해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능풍군(綾豊君) 구인기(具仁墍)가 훈구(勳舊)의 신하로서 병이 위중해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 구일(具鎰)은 외아들로 현재 경기 수영(京畿水營)의 임소에 있어 와 보지 못하고 있으니, 그 정상이 애처롭습니다. 지난 무진년 간에 고(故) 판서 신 이수광(李晬光)이 병이 위중하다는 내용으로 소장을 진달하자, 당시 전라 감사로 있던 그의 아들 고(故) 상신(相臣) 성구(聖求)에게 교대할 필요없이 올라와 간호하라고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허락하셨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일을 개차(改差)하고 교대할 필요없이 와서 아비의 병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익형(李益亨)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밤에 서리가 내렸다.
8월 24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뜸을 떴다. 상이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이르기를,
"북관(北關)이 전에 비해 더욱 심하게 흉년이 들었으니, 내년 봄에 진구(賑救)할 일을 미리 조처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지방관을 교체하노라면 지체될 염려가 있으니, 함경 감사 남구만(南九萬)은 보리가 익을 때까지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근래 재상 반열의 인물이 부족합니다. 대사헌 민정중(閔鼎重)이 가까운 지역에 와 있으면서 소장을 진달해 사직했는데도 아직 비답을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을 옮길 시기가 이미 박두했으니, 내외의 신하들 모두가 분주하게 직무를 수행해야만 할 것이다. 송 판부사도 이미 들어 왔는데 정중 혼자 태연하게 들어 오려 하지 않으니, 이것은 무슨 의도인가."
하자, 수흥이 아뢰기를,
"이것은 실제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는 산림(山林)의 선비가 아니니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8월 25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7일 갑자
상이 뜸을 떴다.
8월 28일 을축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소패(召牌)를 받고도 나아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간 최후상(崔後尙)이 추고받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권대운(權大運)을 형조 판서로, 유연(柳㝚)을 장령으로, 이규령(李奎齡)을 병조 참지로, 윤심(尹深)을 응교로, 윤지선(尹趾善)을 교리로,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삼았다.
공조 참판 홍처후(洪處厚)가 죽었다.
처후는 감사 홍명원(洪命元)의 아들이다. 성격상 논의를 벌이며 각축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길에 나선 지가 가장 오래 되었으면서도 벼슬은 늘 다른 사람의 뒤에 처졌는데 사람들이 더러 이 점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나이 75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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