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무진
상이 뜸을 떴다.
대사간 이혜가 추고받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9월 3일 기사
영의정 허적(許積)이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면직을 청했는데, 그 대략에,
"전에 신이 법대로 처벌받는 일을 요행히 면한 것에 대해서 시배(時輩)가 탄식하였고, 다시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온 나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께서 천만 뜻밖에도 이렇게 작은 실수를 하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저 스스로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모진 목숨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아 청명한 조정을 욕스럽게 하고 성덕(聖德)에 거듭 누를 끼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실로 신의 죄이니, 다른 것이야 또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을 소생시켜 준 성고(聖考)의 은혜에 대해 신은 몸이 가루가 되도록 노력해도 만분의 일을 갚기에 부족한데, 과거 승하하셨을 때에 같이 따라 죽지도 못한 채 늙도록 살아남아 있다가 지금 또 천릉(遷陵)하는 때를 만났습니다. 죄를 진 몸으로는 공사를 집행하는 말미에 스스로 끼일 수 없기에 죄수복 차림으로 영구가 떠나가는 행렬 뒤에서나 통곡하고 모시면서 천릉하는 예를 멀리서 지켜 본 뒤에 고향에 돌아와 형벌을 청하겠다고 밤낮으로 늘 이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이렇게 낭패스러울 수 없는 일을 당해 장차 이런 계획까지도 아울러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고신(孤臣)이 하늘에 죄를 진 관계로 변변찮으나마 충성을 바치려는 신의 뜻을 조금도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니 마음이 에이는 듯하여 할 말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 옮겨 모실 날짜가 겨우 몇십 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애통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경이 선왕으로부터 세상에 드문 은혜를 받고서도 이런 때를 당하여 끌어대면 안 될 지난날의 혐의를 가지고 인혐하면서 기필코 오늘날에 와서 굳이 사양하려 하다니, 나는 그것이 의리에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선릉(先陵)을 다시 쌓는 날에 인혐하고 오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리(情理)에서 벗어나는 일이니, 경이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는가. 목마른 듯한 나의 뜻을 체득하여 다시는 굳이 사양치 말도록 하라."
하였다.
9월 4일 경오
상이 뜸을 떴다. 총호사(摠護使) 김수흥(金壽興)이 신릉(新陵)의 광중(壙中)을 판 뒤에 들어오니, 상이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광중의 토질이 아주 미세하고 견고한데다 색깔도 윤택이 났으며, 광중을 팔 즈음에 마치 시루에서 나오는 기운처럼 훈훈하게 온기가 올라 왔는데, 반호의(潘好義) 등 여러 지관(地官)들이 모두 길(吉)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화소(火巢)068) 로 정해진 제한 구역 내에 25호(戶)의 인가와 60여 기(基)의 총묘(塚墓)와 민전(民田) 5, 6결(結)이 있었습니다. 인가는 이런 한절기(寒節期)에 철수해 옮기도록 하기가 어려울 듯한데, 그들 역시 봄이 되기를 기다려 옮겼으면 하니, 그들의 소원대로 해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총묘는 예전 화소의 밖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 파낼 필요는 없겠습니다. 전토(田土)는 모두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기를 원하고 그 값을 받기를 원하지는 않는데 이 역시 억지로 윽박지르기가 어렵습니다. 능원 대군(綾原大君) 집안의 면세전(免稅田)은 화소 밖에 있는데 공전(公田)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 국휼(國恤) 때에 대왕 대비께서 초기(初朞) 때까지는 흰 옷차림을 하셨고 재기(再朞)때까지는 천담복(淺淡服)을 입으셨었다. 이번에 능을 옮길 때에 시복(媤服)의 절목은 없다 하더라도 역시 천담복으로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 뜻을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의논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5일 신미
신정(申晸)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6일 임신
상이 뜸을 떴다.
9월 8일 갑술
상이 뜸을 떴다. 상이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하문하기를,
"대왕 대비의 복색(服色)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역시 3개월에 마치시도록 해야 하는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의 복제(服制)는 삼년복을 입어야 할 사람의 경우 마복을 입고 나머지는 조복(弔服)에 가마(加麻)합니다. 조복은 곧 소복(素服)입니다. 대왕 대비께서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3개월만에 마치셔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면 예(禮)의 본의에도 어긋나지 않게 될 듯합니다."
하였다.
9월 9일 을해
성호징(成虎徵)을 정언으로, 이혜(李嵆)를 예조 참의로, 최후상(崔後尙)을 부교리로 삼았다.
장령 유연이 아뢰기를,
"여사군(轝士軍)을 뽑아 낼 즈음에 오부(五部)의 관리들이 많이 농간을 부렸습니다. 뇌물받은 액수에 혹 차이가 날지는 모르나 그 범행을 논한다면 죄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서(西)와 남(南) 양부(兩部)의 관리가 이미 죄를 받았고 보면 나머지 3부도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되니, 동(東)·중(中)·북(北) 3부의 해당 관리를 모두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이 청대하니, 상이 사현합(思賢閤)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품정(稟定)할 일이 무엇인가?"
하니, 김우명이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 면복(冕服)과 옥규(玉圭)를 상방(尙方)에서 갖춰 올려야 합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청옥(靑玉)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기해년 국장 때에는 백옥(白玉)을 썼습니다. 지금도 백옥을 써야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에 썼던 옥규가 파손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그대로 쓰도록 하라."
하였다. 김우명이 이때 상의원 제조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뢴 것이었다. 우명이 이어 품은 생각을 진달하기를,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이야말로 산림(山林)의 중망(重望)을 지닌 대신이니, 어찌 한 마디라도 잘못된 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요(堯) 순(舜)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일마다 모두 옳을 수 있겠는가. 아성(亞聖)이하로는 본래 잘못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발언한 것은 사람들이 감히 의논을 하지 못하니, 이는 마치 ‘경대부(卿大夫)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아무도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는 자가 없다.’고 한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국릉(國陵)에 표석(表石)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3백 년 동안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리고 송시열 역시 소 가운데에서 ‘신릉(新陵)의 석물(石物)은 한결같이 영릉(英陵)에 의거해 법식을 삼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는 영릉에 없는 표석을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말이 서로 어긋난단 말입니까. 신릉에 일단 표석을 설치하게 되면 각능에도 모두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돌들을 마련하기 위해 공사를 벌이노라면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강도(江都)는 바로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니만큼 민폐를 더욱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 판부사가 차자에서 말한 것은 대체로 오래고 먼 계책을 삼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우명이 아뢰기를,
"국가의 능침(陵寢)에 표석이 없다한들 어떤 사람이 모르겠습니까. 알 수 없게 된 후가 되어서는 표석이 있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송시열이 강정(講定)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 타당성을 의논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왕(帝王)의 덕업(德業)이 후세에까지 빛을 드리우게 되는 것은 표석이 있든 없든 본래 상관이 없습니다. 옛날 명(明)나라 홍무(洪武)069) 초에 역대 제왕들의 35개 능을 거슬러 제사올렸는데, 위로는 복희씨(伏羲氏)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복희씨 때로부터 홍무 때까지는 연대가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 묘를 알아 내었는데, 이것이 과연 그 곳에 비표(碑表)가 세워져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 이 돌아오면 상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김우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현재 효(孝)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성에서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나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전하께서만 홀로 듣지 못하고 계십니다. 전(前) 교관(敎官) 민업(閔嶪)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 민세익(閔世益)은 정신 질환이 있기 때문에 세익의 아들이 할아비 초상에 대신 복을 입었는데, 방제(旁題)하고 체천(遞遷)하는 절목에 이르러 일에 구애되는 바가 있어 결정을 짓지 못했다고 합니다.
민세익이 실성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옷을 입으며 심지어는 인도(人道)가 있어 잇따라 자녀까지 생산하였고, 상을 당한 뒤에도 더러 포의(布衣) 차림으로 통곡할 때가 있었다고 하니, 전혀 의식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禮)에 ‘할아비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아비가 죽었을 경우 아들된 자는 장례가 끝나기 전에 감히 곧바로 그 상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글이 있고 보면, 아비가 아직 살아 있는데 손자가 대신 참최복(斬衰服)을 입는 이러한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되면 민업이나 세익 모두 아들이 없는 것과 같고 세익이나 그 아들 모두 아비가 없는 셈이 됩니다.
제왕가(帝王家)는 종사(宗社)가 중한 만큼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지만 사가(私家)는 이와 달라 부자(父子)가 있은 뒤에야 군신(君臣)이 있는 법인데 부자의 큰 윤리를 어떻게 교란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민세익의 아들은 살아 있는 아비를 죽은 것으로 여기는 차마 못할 짓을 하여 스스로 그 복을 대신 입었습니다. 성명(聖明)의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자를 도성 아래에서 살아 숨쉬도록 용서해 주고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자의 윤리가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될 경우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해조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토록 하라."
하였다.
살피건대, 민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세익이 정신병에 걸려 상주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박세채(朴世采)가 민세익의 아들 민신(閔愼)을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주자(朱子)의 상복(喪服)에 관한 차자를 인용하여 증거하였다. 민정중(閔鼎重)도 세채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신이 마침내 참최복을 입게 되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의아해 하였다. 그러다가 방제(旁題)와 체천(遞遷)에 관한 의논이 나오게 되면서 사람들이 더욱 떠들썩하게 되었다.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윤증(尹拯) 등 여러 사람도 모두 이를 힐난하였다. 이에 반해 송시열은 세채의 말이 옳다고 본래부터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방제와 체천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역시 의심을 품고 결정짓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우명이 조사할 것을 경연에서 청하여 세채가 형조에서 명을 기다리게 되었다. 시열이 마침내 결심하고 소장을 진달하여 모두가 일관된 일이라고 하면서 아무 의심없이 행해야 할 것처럼 주장하였다. 그런데 언젠가 이유태가 방제에 관해 주자가 논한 한 대목 중 ‘이와 같은 경우에는 역시 행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거론하여 질정하자 송시열이 불쾌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상 역시 기해년에 예를 의논할 때 대체로 송시열이 인용한 가소(賈疏)070) 의 설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대신들이 이미 국제(國制)라고 말한 데다가 시열이 평소 예를 잘 안다고 나랏사람들이 떠받들었기 때문에 의심을 하면서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민가(閔家)의 예에 대해서는 평소 시열을 존경하고 믿던 자들도 대부분 그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았는데, 우명이 이에 아무 거리낌없이 곧장 배척하여 정밀 조사하는 일이 있게까지 된 것이었다. 그뒤 금상(今上)071) 초에 이르러 민신을 먼 지역에 유배보내라고 명했는데, 을묘년의 화(禍)는 대체로 여기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9월 10일 병자
예조가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의 대왕 대비의 복색(服色)을 해조로 하여금 강정(講定)케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가례의절(家禮儀節)》의 개장의(改葬儀)에는 ‘주인은 시마복(緦麻服)을 입고 나머지는 모두 소복(素服)을 입는다.’ 하였고, 《두씨통전(杜氏通典)》의 개장복의(改葬服儀)에는 ‘주제상복(周制喪服)에 「개장할 때에는 시마복을 입는데 삼년복을 입어야 할 사람만 시마복을 입고 주친(周親)072) 이하는 복을 입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고, 《대명집례(大明集禮)》에는 ‘개장할 경우, 효자(孝子) 이하 및 처첩(妻妾) 등 여자들은 모두 시마복을 입고 주친 이하는 소복을 입는다.’ 하였습니다. 《대명집례》의 ‘주친은 소복을 입는다.’는 뜻으로 보건대, 참작해서 변복(變服)해도 원래 임시 방편의 도리에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일이 변통하는 것과 관계되는 만큼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 입는 시마복과 백의(白衣)를 우제(虞祭) 뒤에 모두 벗어야 되는지의 여부에 관해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에게 의논했더니, 그가 의논드리기를 ‘찬궁(欑宮)을 허는 때부터 하현궁(下玄宮)할 때까지 고작 6, 7일밖에 안 되는데 그동안 입었다가 바로 벗는 것은 군부(君父)를 극진하게 높혀야 하는 신자(臣子)의 도리가 아닐 듯하다. 이 문제는 얼마나 진선 진미하게 성상께서 재량하여 조처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는데, 상께서 ‘3월의 복제를 따르되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3월의 복제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상께서 입으시는 시마제복 및 백관이 입는 숙포 단령(熟布團領)을 모두 3개월 뒤에 벗는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우제를 지낸 뒤에 바로 벗고 단지 백의 차림으로 3개월을 마친 뒤에 벗는다는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오년의 예를 의거하여 참작해 정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정언 강시경(姜時儆)이 ‘조형(趙珩)과 정익(鄭榏) 등의 사직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 대관을 준엄하게 배척한 말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시경의 출사를 청했다.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고 재차 인피하여 관례에 따라 체차되었다.
9월 11일 정축
상이 안질 때문에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나아가 아뢰기를,
"영돈녕 김우명(金佑明)이 표석(表石)의 일로 진달한 것이 있다고 삼가 들었습니다만, 송시열(宋時烈) 역시 민멸되어 전하지 못하게 될까봐 이런 청을 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초에는 능침에 신도비를 세웠다가 중엽에 와서 다시 세우지 않았는데, 표석의 경우는 다른 의물(儀物)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표석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도 그러하다. 다른 능은 뒤따라 세운다 하더라도 영릉(英陵)은 같은 산 안에 있으니 새 능과 동시에 표석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선왕으로부터 끔찍하게 사랑을 받은 것이야말로 옛적에 없었던 일인데, 지금 선왕의 능침에 관한 일로 사실무근한 비방까지 받게 되어 감히 스스로 도성 아래에서 편안하게 있지 못할 형편입니다. 지문(誌文)을 쓰고 일을 마친 뒤에는 곧바로 교외로 나가 이어 구릉(舊陵)의 밖으로 가려 한다 하니, 별도로 유시하시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즉시 승지 정륜에게 명하여 시열이 있는 곳에 가서 보고 싶다는 뜻을 유시하도록 하였다.
9월 12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9월 13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부수찬 김만중(金萬重)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진달할 것이 무엇인가?"
하니, 만중이 아뢰기를,
"듣건대, 김우명(金佑明)이 민업(閔嶪)의 집안 일을 가지고 경연에서 진달하자 해조로 하여금 조사해 구명하도록 명하셨다 합니다. 대체로 민업의 아들 민세익(閔世益)이 정신 질환에 걸려 상주 노릇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집에서 예(禮)를 아는 사부(士夫)에게 물어 본 뒤에 세익의 아들 신(愼)에게 참최복을 입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신(臣)은 예경(禮經)은 알지 못하나 그저 상식적인 수준에서만 의심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주자(朱子)의 글을 보건대, 송(宋)나라 광종(光宗)과 영종(寧宗) 무렵에 상복 마련에 관한 주자의 차자(箚子)가 있습니다. 그 차자에서 말하기를 ‘삼년상은 서인(庶人)에게도 통한다.’ 하고, 또 ‘적자(嫡子)가 병이 있을 때는 적손(嫡孫)이 대신하여 상을 주도한다.’ 하였는데, 그때 광종에게 정신병이 있어 영종이 상을 대신했었습니다. 신은 민신의 일이 과연 주자의 뜻에 부합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경우는 옛글을 융통성없이 따른 나머지 생긴 결과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설혹 미진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재물을 다투거나 적통(嫡統)을 빼앗는 일과 비교할 성질의 것은 못되니, 신의 생각에는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주자는 사서인(士庶人)의 예를 자세하게 논했지만 이에 대해 논한 것은 없었으니, 이는 필시 영종(寧宗)의 경우만 지적한 것일 것이다. 제왕가(帝王家)는 사직을 중요시해야 하는 만큼 사서인과는 본래 같지 않은 점이 있다."
하였다. 만중이 아뢰기를,
"민신의 일을 사문(査問)하면 사체만 손상시킬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자의 윤리에 관계되는 일인 만큼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미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어떻게 정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만중이 또 아뢰기를,
"영의정 허적(許積)을 복상(卜相)할 때 당초부터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었는데, 상께서 쓰신 것도 괜찮은지 한번 시험해 보시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급기야 그가 송준길(宋浚吉)에게 배척을 받자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 변명하면서 ‘위복(威福)을 내리는 권한이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준길이 죽고 난 뒤에는 그만 이 설을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또 금년 봄에 소장을 올렸으니, 허적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코 군자인(君子人)은 못됩니다. 오늘날 정신(廷臣) 가운데 어떤 사람이 위복의 권한을 행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람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단서만 꺼내어 상의 뜻을 엿보려 하였습니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은데 어떻게 미끼를 던져 슬쩍 떠보려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뇌성벽력이 내려치듯 하시던 선왕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근일 조정이 선조(先朝)와 같지 못하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런데 허적이 처음 정승으로 임명될 때 어떤 일이 인망(人望)을 만족시키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 나라는 각 집안 대대로 사람들을 등용한 관계로 서로 나뉘어 붕당을 세우고는 서로들 공격한다. 같은 패거리일 경우에는 아무리 허물이 있어도 엄호한 채 내 귀에 들리지 않게 한다."
하자, 김만중이 아뢰기를,
"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잘못이라고 하시면 그만이지 색목(色目)으로 의심하셔서는 안 됩니다. 허적이 위로 임금의 뜻을 엿보고 현혹시키려 하였는데, 예로부터 어찌 이와 같은 군자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적이 소장을 진달한 것이 또한 이미 오래 전의 일인데, 그대가 이제와서 논척(論斥)하는 것은 그가 다시 정승으로 들어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니, 김만중이 아뢰기를,
"허적의 정태(情態)가 이미 문자 사이에 드러났으니 남곤(南袞)이나 심정(沈貞)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백관의 위에 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이와 같이 진달드린 것입니다."
하자, 상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대신의 체차를 논하는 것이 어찌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할 일인가. 민신(閔愼)의 일에 대해서는 기필코 청하여 조사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에 대해서는 독자적으로 나서서 체차를 논하다니, 나라꼴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이어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만중이 종종걸음으로 물러 나갔다. 상이 이르기를,
"만중이 필시 남의 사주를 받았을 테니, 나문(拿問)토록 하라."
하니,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만중이 독자적으로 대신을 논한 이것은 안 될 일입니다마는, 이 사람이 어찌 남의 사주를 받기야 했겠습니까. 부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4일 경진
정언 성호징(成虎徵)이 아뢰기를,
"전 수찬 김만중(金萬重)은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는 몸이라서 일에 따라 진언한 것이니 그 본마음을 헤아려 보면 걱정하고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한 마디 말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금부에 내리셨으니, 이것이 어찌 대성인의 포용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만중이 경악(經幄)에 출입한 지 어언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충분히 아셨을텐데 그가 어찌 남의 사주를 받을 자이겠습니까. 듣기에 놀라운 일로서 뭇 사람들이 의구심에 차 있습니다. 김만중을 나문(拿問)토록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옥당도 상차하여 쟁집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을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근래 조정은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도감(都監)의 신하들이 모두 맡은 일 때문에 능소(陵所)에 나가 있어 조정에 있는 경재(卿宰)가 적은 관계로 문안할 때에 종2품이 반열의 우두머리가 되는 상황입니다. 지금보다 더 사체(事體)가 구차하게 된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지난날 논박을 받은 사람을 무턱대고 나오게 해 행공(行公)하게 하기가 형세상 어렵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때문에 그 사람을 폐고시킬 수도 없습니다. 변통하는 도리는 오직 상께서 어떻게 지휘하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헌 및 밖에 나가 있는 대간은 모두 체차하고, 오늘 안으로 정사(政事)를 열어 차출토록 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김만중(金萬重)의 일은 너무도 근거가 없다. 그래서 나문하여 사주한 사람을 알아내려고 하였는데, 다시 생각해 보건대 만약 그 사실을 규명하지 못하면 거꾸로 사체만 손상될 것이니, 김만중은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라.
전일 이숙이 여러 신하들을 논핵했을 때 반드시 뒤이어 문제를 제기할 자가 나올 줄을 내가 본래 알고 있었다. 만중이 논한 것은 필시 이숙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이숙도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라.
이선(李選)의 상소 가운데에 ‘광중(壙中)에서 물이 나오거나 재궁(梓宮)에 틈이 벌어지기를 밤낮으로 기원하고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선이 장응일(張應一)의 소에 노한 나머지 차마 말하지 못할 말까지 모진 마음으로 꺼낸 것이다. 사체가 지중한 능침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선을 삭탈 관작하라.
민정중(閔鼎重)은 대대로 녹봉을 받아온 신하로서 산림(山林)에 숨어 고상하게 지조를 지키는 선비와 입장이 같지 않다. 그런데도 이러한 때를 당하여 먼 외방에 물러가 앉아 누차 소를 올려 사직하면서 송 판부사의 행동을 본받으려 하고 있다. 판부사는 정승의 직책을 사직하여 면직되었기 때문에 이런 거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중은 여러 차례 미안한 분부를 내린 뒤에야 비로소 올라 오면서 이르는 곳마다 소장을 진달하는 등 교만하고 방자한 모습을 너무 보이고 있으니, 그 역시 삭직토록 하라.
나는 당초 이선의 소가 들어 왔을 때 중률(重律)로 시행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바야흐로 장응일을 멀리 유배보내자는 계사(啓辭)를 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필시 내가 응일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까봐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지금 이선에 대한 죄를 이미 논했는데, 장응일도 간사하고 바르지 못하니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김만중에게 멀리 유배보내는 율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 과중합니다. 그리고 이숙의 경우 어떻게 지레 짐작하여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또 이선의 상소에 나오는 말은 각박한 듯하기는 합니다만 이선이 독자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 이런 말이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민정중의 질병이 매우 고질화되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오래도록 부름에 응하지 못한 것은 실로 병세 때문에 그런 것인데 어찌 이를 이유로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수흥이 또 이숙과 김만중의 일을 가지고 재삼 간절히 청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소신을 불러들여 삼사 신하들의 죄를 의논케 하시면서 이토록까지 지나치게 하신다면, 이제 장차 물러 나가 어떻게 반열에 서서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 의 말이 이러하니, 김만중은 정배하고, 이숙은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하라. 그리고 응일만 그대로 멀리 유배보낼 수 없으니, 그도 정배하라."
하였다. 김수흥이 물러나와 차자를 진달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구해 풀어주지 못했다고 인구(引咎)하며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집의로, 김환(金奐)을 장령으로, 이인환(李寅煥)을 정언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이훤(李藼)을 헌납으로 삼고, 윤심(尹深)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9월 15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성호징(成虎徵)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김만중(金萬重) 나문(拿問)의 명을 환수하시라고 감히 청했는데, 전하께서 따르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정배하라고 명을 내리셨으니, 신은 정말 놀랍고 의혹스럽습니다.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등대(登臺)했을 때의 이야기에 대해 상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알고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근신(近臣)의 직책이고 보면, 소회(所懷)를 터놓고 말씀드리는 가운데 어찌 다른 속셈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명께서 이토록까지 죄를 주셨으니, 신은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인순고식적으로 침묵만 일삼아 언로(言路)가 두절될까 걱정됩니다. 이대로 놔둘 경우 뒷날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될 것입니다. 김만중을 정배토록 한 명을 환수하소서.
전 응교 이선(李選)이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어 상소하여 진언하되, 깊이 우려하고 멀리 생각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 뜻은 단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사림(士林)을 보호하는 데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신경을 거스르는 하나의 일 때문에 진언한 신하에게 뒤미쳐 죄를 주시다니, 성명께서 이렇게 지나친 거조를 취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선이 상소한 내용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이렇게까지 제 삼자에게 엉뚱한 화풀이를 하셨습니다. 뭇 사람들이 놀라고 의혹하며 분위기가 참담하기만 합니다. 이선을 삭탈 관작토록 한 명을 환수하소서.
전 대사헌 민정중(閔鼎重)은 전야에 물러가 살면서 여러 차례나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았으니,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가기를 쉽게 여기는 그 태도야말로 사군자(士君子)의 풍절(風節)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산릉(山陵)을 장차 옮기게 되자 나아와 서울 교외에 있으면서 면례(緬禮)할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초 어찌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를 몰랐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중로에 질병이 발작하여 들어와서 은명(恩命)에 배사(拜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질병이 찾아오는 것은 사람으로서 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그만 교만 방자하다는 이유로 죄를 주면서 삭직하는 명까지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대저 총애와 작록의 영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바입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어겨가면서 황량하고 적막한 해변가에 스스로 처하는 것은 필시 마음 속에 나름대로 지키는 것이 있어 시의(時義)로 볼 때 대뜸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어떤 인군도 벼슬하지 않고 나아오기를 어려워한다는 이유로 그 신하에게 죄를 가한 경우는 없었으니, 전하의 이번 거조야말로 천고(千古)에 있지 않았던 일이라 할 것입니다. 민정중을 삭직토록 한 명을 환수하소서.
부호군 이숙은 간장(諫長)의 신분으로서 일에 따라 논열(論列)하며 그 직책을 다했으니 풍채가 가상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모욕을 가하고 꺾어버리시며 특별히 명해 체차까지 시켰습니다. 그것만도 이미 대신(臺臣)을 대우하여 언로(言路)를 여는 인군의 도리가 못되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김만중의 일 때문에 갑(甲)에게서 화가 난 일을 을(乙)에게 화풀이하며 그 마음을 억측하여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시키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이켜 생각해 보신다면 신의 한두 가지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도 없이 그것이 지나친 거조였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숙을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토록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정언 성호징(成虎徵)이 민정중(閔鼎重)에게 아부하며 군상(君上)을 멸시한 그 정상이 정말 놀랍기 그지 없으니, 체차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민정중은 행실이나 일처리에 있어 조금도 볼만한 것이 없고,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갔지만 그것도 명분이 없는 일이고, 외방에서 소장을 올린 것 또한 사군자(士君子)의 올곧은 풍절(風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전 정언 성호징은 감히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으면서 정중을 찬양하였다. 하나는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니 사군자의 풍절이다.’ 하였고, 하나는 ‘황량하고 적막한 해변가에 스스로 처한 것은 필시 나름대로 지키는 것이 있어 시의(時義)상 무턱대고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고, 하나는 ‘전하의 이 거조야말로 천고(千古)에 있지 않았던 일이다.’ 하였다.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정중에게 아부하고 군상을 멸시한 그 정상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으니, 통렬한 징계를 엄히 가하여 그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극변(極邊)에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라."
하니, 승지 김우석(金禹錫) 윤심(尹深)이 세 차례나 봉환(封還)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장령 유연이 아뢰기를,
"전 부수찬 김만중이 경악의 신하로서 청대(請對)하여 일을 아뢴 것은 임금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 마디 말이 합치되지 않자 문득 실정 밖의 분부를 내리시어 일단 정위(廷尉)에게 심문토록 하시고는 또 편배(編配)를 명하셨습니다. 포용해야 하는 대성인의 도리로 볼 때 이렇게 하셔서는 안 될 듯합니다. 붕당(朋黨)이라는 두 글자야말로 인군(人君)이 듣기 싫어하는 말입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먼저 의심하는 단서를 품고 억측해서 꺾어버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전 부호군 이숙이 일찍이 언책(言責)을 맡았을 때 일에 따라 논열(論列)한 것이야말로 명기(名器)를 아끼고 정관(政官)의 사사로운 행태를 규핵하려는 데서 비롯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규명해 보시려고는 조금도 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처음에는 특별히 체직시켰다가 잇따라 삭출하였습니다. 이를 듣고서 경악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언로(言路)가 막혀버린다면 그야말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장응일(張應一)의 상소 내용은 음흉하였는데 그 의도가 전하의 뜻을 탐색해 보려는 데 있었다는 것은 이미 성명께서 통촉하신 바입니다. 그래서 전 부응교 이선(李選)은 충분(忠憤)에 격발되어 강개한 심정으로 진언하였습니다. 마음 속으로 우려하고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그 말이 혹 타당성을 잃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이선 일개인의 소견이 아닙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말하고 싶어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던 것을 이선 홀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말을 듣는 전하의 도리로는 너그럽게 용납하고 관대하게 용서해 주어야 본래 당연한데, 어떻게 문자 사이에서 흠을 들춰내어 억지로 그의 죄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와서 그의 죄를 뒤미처 거론하는 것은 다른 일로 화가 난 것을 그에게 화풀이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순리에 따라 반응하는 도리가 못되는 듯싶습니다.
전 대사헌 민정중(閔鼎重)은 양조(兩朝)에 걸쳐 지우(知遇)를 받고 육경(六卿)의 지위에까지 몰랐으니, 보답하려는 그의 정성이 어찌 보통 사람보다 뒤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향리에서 병이 위중해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다가 급기야 면례(緬禮)할 날짜가 점점 임박해지자 질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소장을 올리면서 자신의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그것은 병 때문에 지체되어 감히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뜻을 개진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어찌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하고 방자하게 구는 행태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그 실정을 따져보지도 않으시고 억지로 견책을 가하셨으니, 이는 실로 신하를 예로 부려야 하는 성조(聖朝)의 도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김만중을 정배시키고 이숙을 삭출시키고 이선을 삭탈하고 민정중을 삭직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6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유연(柳㝚)이 아뢰기를,
"민정중(閔鼎重)의 질병이 심각하게 고질화되어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했던 정상에 대해서는 같은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헤아리지 못하시고 느닷없이 중한 견책을 가하셨으니, 환수하시도록 청하는 일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전 정언 성호징(成虎徵)이 언책(言責)의 직책에 있는 몸으로 전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할 뜻을 갖고서 일이 발생하자 공의(公義)에 따라 쟁집하였습니다. 문장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혹 타당성을 잃었더라도 한 마디 말이 뜻을 거스르자 실정 밖의 분부를 내리시어 특별히 체직시켰는가 하면 잇따라 멀리 유배보내라는 명까지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세(盛世)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한 사람이 죄를 받는 것이야 본래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만, 신은 이로부터 언로(言路)가 영원히 두절될까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으로 국가의 복이 아닐 것입니다. 성호징을 멀리 유배보내도록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 역시 성호징을 멀리 유배보내도록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교리 임상원(任相元), 부수찬 이유(李濡)도 상차하여 논집하고 양사에서 해가 넘도록 쟁집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9월 17일 계미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어제 삼가 듣건대, 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이 능 앞에 표석(表石)을 세우자고 신이 건의한 것을 그르다고 하였다 합니다. 대저 표석을 세우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도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열성(列聖)의 세 능 및 북로(北路)의 제릉(諸陵)에 모두 비표(碑表)가 있고 보면 오늘날 처음으로 정당하지 못한 예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자(臣子)된 도리에서 군부(君父)를 위해 만세(萬世)토록 전하기 위해 신경쓰는 것이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고 보면 그만 두어서도 안될 듯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망령되게 진달했는데 다행히 채택되는 은전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 김우명이 복희(伏羲)의 묘를 가지고 말했는데, 복희의 묘에 표석이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과연 모르겠습니다만, 공자(孔子)가 계찰(季札)의 묘에 전각(篆刻)했고 보면 묘표(墓表)를 설치하는 도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계찰이 나라를 사양했던 의리야 말로 태백(泰伯)이나 백이(伯夷)와 서로 동등한 것이고 보면 그의 이름 역시 백세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가 오히려 그 묘에 전각을 했으니, 이것이 어찌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을 것을 전적으로 염두에 두고 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마다 각자 소견이 잇는 법이니, 이것을 가지고 시비의 단서를 삼는다 해도 각각 자기 의견을 개진한다는 뜻에서 보면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만 말하기를 ‘송시열이 무슨 말을 꺼내든지 간에 사람들이 논의를 하지 못하니, 이는 「경대부(卿大夫)가 말을 꺼냄에 사서인(士庶人)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은 점이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번 경우는 곧 시열이 말한 것이기 때문에 신하들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렇고 보면 은연중에 진(秦)나라 때의 조고(趙高)와 같은 모양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조고의 경우는 당시 신하들 중에 그래도 말[馬]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신의 위세가 조고보다도 더한 점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신의 처지가 외롭고 약한 상황에서 이토록 잘못을 많이 범하였으므로 윤선도(尹善道)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소를 올려 신을 논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유세철(柳世哲)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연명(聯名)한 자가 무려 1천여 인에 달했습니다. 이는 실로 근세(近世)에 없었던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이 늘 예로부터 살펴 보아도 신처럼 남의 말을 많이 들은 자는 없었습니다. 만약 성자(聖慈)께서 긍휼히 여겨 보호해 주시지 않았던들 신의 집안은 벌써 오래전에 멸망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사람들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신은 그 의도를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민업(閔嶪)의 집안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이야기가 매우 길어지니 상세히 진달할 수는 없습니다만, 신이 이와 관련하여 실로 죄가 있으니 어떻게 감히 대략이나마 그 대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업의 맏아들 민세익(閔世益)은 정신 질환에 걸린 자로서 일찍이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민업이 죽은 뒤에 집안에서 시험삼아 그에게 복을 입게 해 보려고 하자 세익이 말하기를 ‘민업은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인데 내가 어떻게 그를 위해 복을 입어 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너무도 심하게 정신병에 걸린 자이고 사람의 도리를 가지고 책망할 수 없는 자라 할 것입니다.
신은 그의 동생 민광익(閔光益)과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그일을 듣고 말하기를 ‘세익이 이미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보면 그의 아들 민신(閔愼)이 상복을 대신 입어야 주자(朱子)가 분명히 밝힌 교훈에 위배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주자가 일찍이 임금에게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삼년상은 천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귀천의 차이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것으로서 적자(嫡子)가 마땅히 아비의 후사가 되어 대종(大宗)의 중함을 받들어야 한다. 그러나 적자가 그 지위를 이어받지 못해 상주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적손(嫡孫)이 통서(統緖)를 계승하여 대신 상주가 되는 것이 의리상 당연하다.’ 하였고, 그뒤 주자가 또 주소(註疏)중의 설에서 ‘임금이 할아비로부터 나라를 이어받은 경우에도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증거를 찾아 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자께서 말하기를 ‘당초 차자의 설은 단지 인정(人情)과 예율(禮律)에 입각하여 단안을 내리면서 인군이나 사서인(士庶人) 모두 공통적으로 행해야 할 교훈으로 삼게 하였고 보면 후세의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준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민씨 집안에 그렇게 말하고 민씨 집안에서 단연코 행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 우명이 ‘아비가 없는 것이 된다.’고 한 것은 아비를 대신해서 할아비의 상을 치루는 것이야말로 이른바 아비가 있다는 것이 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어찌 아비가 없게 되는 도리를 주자가 말했겠습니까. 그리고 우명이 말한 바 ‘할아비의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아비가 죽었을 경우, 아들된 자가 장사지내기 전에는 감히 곧바로 그 상을 대신하지 못하는 법이다.’고 한 것은 본래 고설(古說)에 있는 말이긴 합니다만, 따로 적용될 곳이 있는 하나의 주장이라 할 것입니다. 주자도 이런 설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그래도 이와 같이 차자에서 주장하였고 보면 그 사이에 필시 절충하고 재처(裁處)한 도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어떻게 감히 주자의 정론(定論)을 놔두고 구차하게 다른 설을 따르겠습니까.
그 당시 신은 또 민씨 집안에 말하기를 ‘이것은 변례(變禮) 중에서도 큰 것으로서 남들이 흔히 보지 못한 내용이다 모름지기 해조(該曹)에 정장(呈狀)하여 조정의 처치를 청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일대(一代)의 왕자(王者)가 세운 법제로 정해져야만 후회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그 집에서 즉시 신이 말한 대로 하였는데, 해조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으므로 그집에서도 끝내 어찌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있다가 들어 보건대,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의논하며서 신을 공격할 뿐만이 아니라 주자까지도 싸잡아 공격하였다합니다. 어떤 사람이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와 민씨 집안이 죄를 받게 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남몰래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주자의 설인데, 말을 내놓은 자가 나이기 때문에 이렇게 분분하게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 일이 잘 되었든 잘못 되었든간에 당초 민씨 집안에서 스스로 알아 처리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와서 그만 서울 안에 용납되지 못하고 또 장차 중하게 처벌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주(神主)의 방제(旁題)와 체천(遞遷)에 관련하여 모두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결단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자의 차자에는 복상(服喪)에 대한 말만 있고 방제나 체천에 대한 글이 없기는 합니다만, 성경(聖經)을 보건대 늙으면 전해준다는 예(禮)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사람이 나이 70이 되고 보면 혈기가 이미 쇠해지기 때문에 집안 일을 아들과 손자에게 전해준다는 것인데, 무릇 상제(喪祭)에도 다시 참여하지 않고 아들과 손자가 일을 대행하게 하였고 보면 할아비와 아비가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아들과 손자가 상제를 대행한 일은 예로부터 있어 온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도 장차 선조에 대한 제사를 적손(嫡孫)에게 물려주려고 하여 고묘(告廟)하는 글을 지었었고, 또 조천(祧遷)에 대해 어떤 사람에게 답한 글을 보면 ‘장래 소손(小孫)이 봉사(奉祀)하게 할 경우에는 그 형세상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아들과 손자가 할아비와 아비에 대해 오히려 그들이 쇠하고 늙었다고 하여 상제를 대행하였는데 정신병에 걸린 경우에만 유독 대행할 수 없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른바 ‘구애되는 바가 있어 결단하지 못했다.’고 한 것에 있어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민업에게 말하기를 ‘대개 일단 상주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면 장차 봉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일단 봉사하게 되었다면 신주(神主)의 방제(旁題)와 선세(先世)의 조천에 관한 문제도 모두 이에 따라 일관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서질(敍秩)과 관련된 중대한 일인 만큼 모름지기 해조에 다시 품(稟)해서 허락을 받은 뒤에 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신의 말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끝내 감히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꼬투리를 잡히는 소지가 되었다 하겠습니다. 전후의 곡절은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김우명이 생각하기를 불가하다고 여겼다면 곧장 신의 죄를 청해야 마땅하지 무슨 이유로 이렇듯 머리를 숨긴 주장을 하여 민씨 집안으로 하여금 신 대신 중한 처벌을 받게 한단 말입니까. 어쩌면 이것 또한 신에 대해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감히 그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는 뜻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부(士夫)가 남의 집을 빼앗았다고 한 것에 있어서, 신이 또한 이를 범한 것이 있습니다. 신의 식구가 가는 곳마다 상당히 많고 또 신에게 배워 보려는 자들이 약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서울과 교외에 점유한 것이 꽤 있게 되고 그 결과 사람들의 말을 초래했으니, 우명의 상달이 또한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저 한번 나왔다가 이런 비방을 받게 되었으면 의리상 일단 떠났다가 다시 와서 능을 헐 때 개인적인 의리를 다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채비를 차리고 길을 떠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 또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매우 간절하게 타이르셨으므로 차마 바로 헤어지지를 못하고 다시 이렇듯 머뭇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볼 때에는 신이 장차 다시 들어와서 공사(公事)를 그르치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지은 죄가 이렇듯 크기만 하니,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속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신의 죄를 의논해 처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인심과 세도(世道)가 날로 야박해지고 있는데, 근거없이 떠돌아다니는 말을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상소 가운데 인구(引咎)한 일을 보건대, 내 생각에는 경이 너무 지나치게 말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경이 뭐라고 운운한 것이 이미 복상(服喪) 뒤의 일이었고, 또 품정(稟定)토록 하라는 말을 했으니, 경이 단정을 내려 그렇게 하라고 한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집 건물에 대한 일은 더욱 그렇지 않다. 조가(朝家)에서 명한 것과 경조(京兆)에서 정한 것에 경이 저촉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모두 혐의할 일이 없다. 의당 전일의 비답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들어와서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토록 하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차자를 올려 성호징(成虎徵)을 멀리 유배보내도록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 김환(金奐)이 아뢰기를,
"장응일(張應一)을 멀리 유배보내자는 본부(本府)의 청에 대해 상하가 서로 버텨 온 지 지금 벌써 4개월이 지났습니다. 현재 간쟁할 일로 이보다 더 큰 것들이 매우 많은 만큼 응일의 일만 줄곧 쟁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이 오늘 조방(朝房)073) 에서 서로 모여 동료와 상확(商確)해서 정계(停啓)하려 하였는데, 동료의 의견이 신과 서로 어긋났습니다. 어찌 감히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유연(柳㝚)이 아뢰기를,
"장응일을 멀리 유배보내자는 논이 일단 공의(公議)를 따른 것인 만큼 대뜸 정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동료가 기필코 정계시키려 하기에, 신이 다시 물의(物議)를 수합하여 뒷날을 기다리도록 하자는 뜻으로 반복해서 같은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료가 굳게 고집하여 끝내 소란을 일으키게까지 되었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사간 최후상(崔後尙)과 정언 이인환(李寅煥)이 처치하여, 중론(重論)을 정지시키려 한 것은 잘못된 의견이라는 이유로 김환을 체차시키기를 청하고, 다시 물의를 수합하자고 한 것은 대각의 체모를 매우 얻은 것이라는 이유로 유연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방금 서쪽에서 온 자문(咨文)을 보건대, 배·잣·꿀을 영원히 견감(蠲減)해 주기로 허락했다 하였으니, 사은(謝恩)하는 행차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신은 동지사(冬至使)를 겸해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수흥이 이어 아뢰기를,
"성호징(成虎徵)의 계사를 보건대, 모두 쓸데없는 말만 잔뜩 늘어 놓았습니다. 성명께서 가소롭다고 생각하시고 그냥 놔두는 것이 좋지 멀리 유배까지 보내시는 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환수하라고 아뢴 것을 죄로 삼은 것이 아니다. 그날 헌부도 이런 계사를 올렸었다. 그런데 호징의 경우는 ‘시의(時義)에 합치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아오지 않는 것이다.’는 등의 말로 민정중(閔鼎重)을 추켜 올렸는데, 계사의 문자치고 정중의 행장(行狀) 아닌 것이 없었다. 대관(臺官)을 설치한 본래의 뜻이 있을 텐데, 어찌 정중이나 찬양하게 할 목적으로 이 관직을 제수했겠는가. 그러니 아부한 죄를 그가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정중이 불안한 정세에 놓여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일찍이 진달드리지 못했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색목(色目)의 폐단이 고질화되어 뜬 소문이 많이 퍼지고 있습니다. 전일 허적(許積)의 소에 나온 위복(威福)의 설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송준길(宋浚吉)을 지목해 배척하면서 당세의 모모인(某某人)까지도 언급한 것인데 정중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하였습니다. 이런 말이 진신(搢紳)들 사이에 퍼졌으므로 정중이 이 때문에 위축되면서 실로 불안한 마음을 갖게끔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중은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와서 관직을 이미 많이 역임하였으니, ‘나아오기 어려워한다.’는 말을 가지고 어떻게 정중의 제목(題目)을 삼을 수야 있겠습니까. 성호징은 대체로 정중이 불안해하는 실상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이 일과 관련하여 또 거북한 점이 있습니다. 비망기(備忘記)에서 이르시기를 ‘정중은 행실이나 일 처리에 있어 조금도 볼 만한 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볼 만한 일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중임(重任)을 제수했단 말입니까. 군신은 부자와 같은 만큼 간격이 없어야 옳은 것인데, 성상께서 마음 속으로 늘 이와 같은 의사를 품고 계시면서도 우선 쓰고 계신다고 한다면, 이 어찌 성신(誠信)의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신처럼 형편없는 자가 외람스럽게 이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어쩌면 성명께서 신에 대해서도 볼 만한 점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실까 두렵기만 합니다. 아랫사람의 마음에는 그저 황공스러워 스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다만 현재 일처리하는 것을 가지고 논했지, 정중의 평생의 행적까지도 그렇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수흥이 또 여러 신하들에게 내린 벌이 지나치다고 진달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9월 18일 갑신
이에 앞서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무록관(無祿官) 등에 대해서는 의주(儀註) 중에 성복(成服)케 하는 절목(節目)이 없는데, 앞으로 거동하실 때나 제사에 차견할 때 흰 옷에 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 차림으로 나아가 참여케 한다면 일이 매우 타당치 않습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강정(講定)케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의주는 일체 경자년의 등록(謄錄)에 의거해 마련해서 들였었습니다. 비록 무록관이라 하더라도 성복 중에 포함되지 않게 되면 일이 매우 미안하게 될 것입니다. 무록관 등을 부표(付標)하여 백관이 성복하는 가운데에 추가로 포함시킴으로써 똑같이 성복케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을 이조 판서 겸 판의금으로, 김휘(金徽)를 대사헌으로, 이원정(李元禎)을 도승지로, 정석(鄭晳)을 승지로, 박순(朴純)을 장령으로, 홍만종(洪萬鐘)을 지평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정언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우참찬으로, 윤지선(尹趾善)을 부교리로, 이우정(李宇鼎)을 필선으로 삼고, 김수항(金壽恒)을 특별히 서용(敍用)하여 판중추로 삼았다.
상이 다리 부위의 산통(酸痛) 때문에 연일 뜸을 떴다.
9월 20일 병술
정언 서문상(徐文尙)이 헌납 이훤(李藼)과 혼가(婚家)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대사헌 김휘(金徽)가 인피하기를,
"신은 장응일(張應一)을 논하는 것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기했기 때문에 바로 얼마 전에 이미 간원의 배척을 받았는데, 지금 어떻게 구차하게 헌부에 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유연(柳㝚)이 아뢰기를,
"삼가 장관이 인피한 사연을 보건대, 간원의 배척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전일 처치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응일을 멀리 유배보내라는 논계를 양사(兩司)가 함께 발론하여 이미 4개월이 지났고 보면, 한 사람의 의견 때문에 다시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 장관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견을 제기한 것은 유독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응일의 흉측한 정상에 대해서는 성명께서도 환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론을 내세우며 공의(公議)를 배척하려 하니, 애석할 따름입니다. 장관은 세 조정을 섬긴 노성(老成)한 신하로서 나이도 이미 흰 머리가 날리는 노년에 접어들었습니다. 일을 말한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유배당하고 축출되는 이런 날을 당하여, 마음과 뜻을 합쳐서 임금의 뜻을 감동시켜 되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거꾸로 일개 흉측한 자의 편을 들면서 절개를 세우는 일인양 행동하고 있으니, 아, 또한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전후로 인피한 것이 실로 일컬을 것이 없는데 구차하게 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이미 한 이상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처치하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사간 최후상(崔後尙)이 처치하기를,
"중론(重論)에 이론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일찍이 배척을 받고 체차되었으니, 형세상 그대로 자리에 있기가 어려운 것은 예전과 다름이 없으니, 김휘를 체차하소서. 유배보내자고 청한 논이야말로 공공(公共)의 입장에서 나온 것인 만큼 이의(異議)가 있다 하더라도 내쪽에서 혐의할 것이 없으니, 유연을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박순(朴純)이 스스로 ‘정익(鄭榏)은 나에게 고모부가 되는데, 정익이 이미 이숙(李䎘)에게 논박을 받았고 보면, 이숙을 삭출(削黜)시킨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는 계사(啓辭)에 동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했으나, 박순이 소명(召命)을 받고도 응하지 않은 채 재차 인피하여 관례에 따라 체차되었다.
9월 21일 정해
조사석(趙師錫)·김환(金奐)을 정언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사서로, 맹주서(孟胄瑞)를 병조 참의로, 정익(鄭榏)을 형조 참판으로, 이인환(李寅煥)을 지평으로, 윤진(尹搢)을 부교리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경술년 조(條)의 전세(田稅) 가운데 미납된 수를 보건대, 경기는 4개 읍뿐이고, 원양(原襄)·황해·전라도 등도 매우 적은데, 경상도 조령(鳥嶺) 밑의 11개 읍과 충청도의 경우는 전혀 수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또 다시 흉년이 들었으니 형세상 다 거두어들이기는 어렵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도(諸道)의 미수(未收)된 수량은 모두 탕척해 주도록 하라. 충청도의 경우는 미수된 수량이 이렇게까지 많으니, 이는 필시 수령들이 착실하게 거두어 들이려 하지 않아서 생긴 결과일 것이다. 각읍(各邑)의 납부하지 않은 수량을 뽑아내어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 기읍(畿邑) 백성들의 노역이 배나 심합니다. 여주(驪州) 등 5개 읍의 대동미(大同米)를 이미 3두(斗)씩 감하고 기타 읍도 각각 1두씩 감해주기로 했습니다만, 지금 다시 1두씩 더 감해주어 너그럽게 보살펴주는 뜻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하니, 부교리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거두는 미곡만 감해줄 경우 전토(田土)가 없는 소민(小民)은 혜택을 받지 못하니, 이전(移轉)해준 적곡(糴穀)을 탕감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그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적곡을 받아들일 때에 모곡(耗穀)을 덜어주도록 허락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혜택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2일 무자
상이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을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의 상소를 얻어 보건대, 스스로 불안하게 여기는 말이 많이 있었는데, 그 소에 대한 비답을 아직도 내리지 않으셨는지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김우명(金佑明)이 뭐라고 진달드렸는지 신이 상세히 듣지 못하였습니다만, 송시열이 이처럼 불안해하는 것은 대체로 민신(閔愼)이 끝내 복상(服喪)한 것이 바로 시열이 정해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소의 내용을 보건대, 자못 범연치 않았으니 모두가 스스로 감당하는 말들이었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은 이 일의 시비와 곡직(曲直)을 모르겠습니다마는, 다만 생각건대 김우명은 바로 전하의 사인(私人)이고 시열은 곧 외방의 유신(儒臣)입니다. 윈래 대단치도 않은 이런 일 때문에 그가 불안하게 여겨 떠난다면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소에 대한 비답 중에 별도로 더 위유(慰諭)하시고 간곡하게 설파하심으로써 그가 안심하고 물러가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동의하였다.
9월 24일 경인
밤에 달이 헌원(軒轅) 남쪽의 소성(小星)을 범하고, 금성(金星)이 태미원(太微垣) 좌측 액문(掖門) 안으로 들어갔다.
홍처량(洪處亮)을 대사헌으로, 송기후(宋基厚)를 장령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수찬으로, 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박순(朴純)을 문학으로 삼았다.
9월 25일 신묘
사간 최후상(崔後尙)이 아뢰기를,
"국구(國舅)는 사체가 조신(朝臣)과는 자별하니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원래 간여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능침(陵寢)의 표석(表石) 및 민업(閔嶪) 집안의 상례(喪禮)를 가지고 청대하여 진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개 표석에 대한 한 조목은 대신의 건백(建白)에 따라 이미 성명(成命)이 계셨으니 사체가 얼마나 중하다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만 감히 위치를 벗어나고 분수를 뛰어넘어 앙달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업의 집안과 관련된 상복의 예는 원래 민간에서 발생한 일로서 국가에서 관여할 바가 더욱 아닌데, 외람스럽게도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한 결과 조사하여 처리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어찌 너무나도 사체를 잃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김우명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지금의 대각(臺閣)은 한심하다고 하겠다. 부자 관계야말로 오륜(五倫)의 첫째이고 삼강(三綱)의 으뜸이니 한번 무너지면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민간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경악(經幄)의 신하와 대각의 관원이 서로 잇따라 엄호하며 이 일을 중시하려 하지 않으니, 도대체 그 의도가 무엇인가. 지난번 계후자(繼後子)가 승중(承重)하는 문제 역시 민간의 일이었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대간이 달을 넘기고 한 해가 다 가도록 쟁집했었다. 똑같이 인륜(人倫)과 관련된 막대한 일인데 전후의 논이 마치 흑백처럼 다르기만 하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표석에 관한 일이 비록 대신이 건백해서 이미 성명이 있게 된 일이라 하더라도, 만약 이런 핑계를 대고서 감히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국가의 복이 아닐 것이다. 이 어찌 대신(臺臣)으로서 할 말이겠는가. 지금 사체를 잃은 그 책임을 그대가 어떻게 감히 면할 수 있겠는가. 위치를 벗어난 혐의를 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외람스럽게도 나를 번거롭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실로 놀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하였다.
9월 26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최후상(崔後尙)이 인피하기를,
"국구(國舅)가 외부의 일에 간여하는 것은 실로 뒷날의 폐단과 관계되기에 신이 언지(言地)에 있는 몸으로서 감히 논열(論列)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이 지극히 준엄하였으므로 몸이 떨리며 황공하여 뭐라고 말씀드릴지를 모르겠습니다. 무릇 소견이 있을 때 각자 진달해 아뢰는 것이 원래 조신(朝臣)의 일입니다마는, 국구의 입장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위치를 벗어나 일을 논함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신이 논한 것도 이 점에 입각한 것이지, 민간의 일을 위에 아뢰어서 본래 안 된다거나 또는 대신이 건백해서 상으로부터 성명(成命)이 계셨으면 아랫사람들이 감히 의논드릴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엄한 분부를 내리시게끔 수고를 끼쳐 드렸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제 논계한 것과 오늘 인피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으니, 이것이 어찌 대간의 모습이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유연(柳㝚) 등이 아뢰어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민가(閔家)의 변례(變禮)는 비록 인륜(人倫)에 관계된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혹 끝없이 쟁론할 수 있는 일이라고 떠넘길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이 감히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게 한 죄의 경우는 아무리 전하께서 신을 어여삐 여겨 동정해 주신다 하더라도 완전히 용서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권세를 장악하고 위복(威福)의 권한을 행사하여 나라를 망치고 집을 해치는 일인 만큼, 조신(朝臣)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치 독수리가 참새를 쫓듯 축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껏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필시 ‘이 자야말로 실제로 권세를 장악하고 위복의 권한을 행사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와 같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신이 간담이 떨어지는 듯하여 감히 스스로 논열하지 못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국구(國舅)가 장차 남에 대해 무부(無父) 무자(無子)하다고 책망하려 했을 때에는 예법(禮法)상 범할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자기의 개인적인 기일(忌日)로 인해 휴가중인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부리나케 청대(請對)하여 곧장 신의 죄를 발론하면서 맨 먼저 이 문제를 끄집어 내었습니다. 신의 행위야말로 급박한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어서 하루도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시사(時事)가 크게 변한 이래로 늘 승국(勝國)074) 의 일을 생각하며 한심한 느낌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승국 당시에 임금은 약하고 신은 강하였는데 심지어는 연산(燕山)075) 에 참소하여 위세를 부린 자까지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당시의 임금이 앞에서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알지 못하고 뒤에서 해치는 자가 있어도 보지 못하여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신자(臣子)된 자들의 죄를 머리카락 세듯 어떻게 일일이 다 헤아려 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 ‘신이 강하다.’는 설이 만리 밖에서 홀연히 나타나더니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 잇따라 대신의 상소에서 나왔으므로 대소 신료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었는데, 지금 신이 논박받은 말도 그것과 실제로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명칭이야 약간 달리하긴 했지만, 신이 전에 남을 대신해 걱정해 주었던 일을 그만 신도 받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연신(筵臣)이 탑전에서 ‘민가의 일은 조정에서 조사해 처리할 필요가 없다.’고 아뢰자 성명께서 ‘인륜에 관계된 일인 만큼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하기에, 신은 삼가 성학(聖學)이 보통 이상으로 엄청나게 고명하신 점에 대해 찬탄하였습니다. 어쩌면 연신이 장차 죄화(罪禍)가 이를 것이기 때문에 먼저 정신을 뺏긴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언(失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지 않다면 어찌 그리도 평소의 식견과 상반된단 말입니까. 연신의 말을 보면 또 마치 신을 위해 그 일을 저지하여 신의 죄를 덮어주려고 한 인상을 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또 신을 죄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려 하셨습니다. 설혹 성자(聖慈)께서 지극히 어여쁘게 여겨주신다 하더라도 의리를 돌아보고 법을 두려워해야 하는 신의 입장에서는 감히 받들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전후에 걸쳐 신이 범한 죄를 모두 다스리시어 사적인 분수를 편안케 해 주소서.
상소문 작성을 끝낸 뒤에 문득 듣건대, 대간이 국구(國舅)를 논했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하며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있는 곳이 선릉(先陵)과 지척인데, 일을 맡은 내외의 관원들이 모두 모여 있고 보면 이곳도 하나의 조정인 셈입니다. 따라서 신이 감히 이곳에 있지 못하겠기에 약간 위쪽으로 옮긴 뒤 능을 허는 날 염치를 무릅쓰고 다시 와서 멀리서나마 개인적인 회포를 풀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신이 마침내 향리에 돌아갔다고 여길까 나름대로 염려되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진달드립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뜻은 전에 올린 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하겠는가마는, 경의 상소 내용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의당 나의 뜻을 체득하여 예가 끝난 뒤에 속히 들어와서, 만나 이야기하려는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효종(孝宗) 초년에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의논할 때 상신(相臣) 김육(金堉)과 유신(儒臣) 김집(金集)의 의논이 합치되지 않자 김육이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하면서 성내는 말을 많이 하였다. 김집이 이로 인해 서울을 떠나게 되자 사론(士論)이 모두 김육을 비난하였으므로 김육이 마침내 사류(士類)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그 뒤 김육의 아들 김좌명이 재지(才智)로 중용되었는데도 논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척리(戚里)라고 배척하며 억누르자 김좌명이 더욱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민유중(閔維重)이 좌명의 형제가 아비를 장사 지낼 때 수도(隧道)를 썼다고 논하였다. 좌명 등은 양송(兩宋)076) 에게서 그 논이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틈이 더욱 벌어지고 다시는 합할 수 없게 되었다.
상의 말년에 허적(許積)이 날이 갈수록 더욱 총애를 받으면서 나랏일이 장차 잘못되게 되자, 송시열이 김좌명이 아니고서는 허적을 제어할 만한 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좌명이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세상의 원망을 꺼리지 않은 것을 대단하게 여겨 연소배들의 논을 조금 완화시켜 그와 함께 일을 해보려고 하였는데, 좌명이 갑자기 죽고 말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우명이 민가(閔家)의 변례(變禮)를 인하여 시열을 공격하였다. 사림(士林)의 화는 실로 여기에서 발달한 것이었다.
그 뒤 금상(今上)077) 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자 이정(李楨)과 이남(李柟)형제가 늘 안에서 모셨는데, 그들의 말을 대부분 따랐다. 이에 대해 사람들을 상이 정 등을 신임하도록 우명이 힘을 쓴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그 뒤에 시사(時事)가 한번 변하여 허목(許穆)이 중비(中批)로 도헌(都憲)이 되자, 우명이 이때에야 비로소 정 등의 권세가 너무 치성하여 끝내는 국가에 화를 미칠까 우려하여, 정과 이연(李㮒)078) 이 궁인(宮人)과 음란한 행동을 한 일을 발론하면서 그들을 공격해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의 패거리들이 서로 힘을 합쳐 우명을 공격하는가 하면 그에 대한 상의 관심도 점차 시들해지던 때였으므로 우명이 거의 죄에 저촉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 그런데 이 일로 마침내 분이 나서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9월 27일 계사
밤에 유성이 북두(北斗) 아래에서 나와 태미(太微) 서원(西垣)의 안으로 들어갔다.
장령 김환(金奐)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헌직(憲職)에 있으면서 망령되이 의견을 내놓았다가 잘못되었다는 배척을 받았는데 이는 실로 자신이 초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헌직에 몸을 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의 융통성없는 성격은 지금도 다시 고치기 어려운데 유배보내자는 논이 또 본원에 그대로 있고 보면 직위에 있기 어려운 사정이 예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였다. 장령 유연(柳㝚) 등이 처치하여 ‘중론(重論)에 이의(異議)를 제기하여 재차 소요의 실마리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홍처량(洪處亮)도 추고받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9월 28일 갑오
장선징(張善瀓)을 대사헌으로, 권두기(權斗紀)를 정언으로, 김환(金奐)을 사서로, 홍처량(洪處亮)을 우참찬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응교로 삼았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인심과 세도(世道)가 마치 물이 더욱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데, 조정에 당론(黨論)이 만연된 나머지 진퇴(進退)시킬 즈음에 일체 같은 패거리냐 아니냐에만 촛점을 맞춘다. 만약 같은 색목(色目)이 아니면 공격하고 배척하며 그가 쓰일까 두려워하기만 한다. 그러니 더구나 정축(鼎軸)의 직임에 있는 경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경이 황급하게 한번 서울을 떠난 뒤로부터 요망한 무리들이 스스로 계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면서 앞에 나서서 기치를 세우고는 오직 경이 올라올까 걱정하고 있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훤히 속이 들여다 보이는 듯하니, 경이 개의할 것이 뭐가 있는가. 경이 혹시라도 올라오는 일을 지체시킨다면 이들 무리의 계책에 그대로 빠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능을 옮겨 모시는 예를 행하는 날을 당하여 백관들 모두가 공사를 진행시키고 있는데, 경이 관장하는 일은 더욱 중하기만 하다. 그런데 경이 만약 인구(引咎)하며 물러가 있음으로써 막중한 예가 의범(儀範)대로 되지 못하게 한다면 경의 마음에도 또한 어떠하겠는가. 의당 지극한 뜻을 몸받아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9월 29일 을미
상이 흥정당(興政堂) 앞 뜰에 나아가 구릉(舊陵)을 허는 데 따른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상이 요통을 앓자, 약방이 가능한 한 지극한 정을 억제하여 능에 거둥하는 일을 정지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아직 죽지 않고 목숨이 남아 있어 옮겨 모셔야 하는 예를 다시 만났으니, 바야흐로 애통한 생각이 가슴에 가득하다. 그래서 그저 전알(展謁)하여 지난해 하려다 못했던 뜻을 펴 볼 수 있게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불행히도 한질(寒疾)이 잠깐 나았다가 또 허리 통증이 심해지는 증세가 나타났다. 추모하는 망극한 심정에 가슴이 에이는 듯하다. 다시 내일의 증세를 보아 가면서 조금 물리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행 판중추 김수항(金壽恒), 총호사(摠護使) 김수흥(金壽興), 공조 판서 이정영(李正英),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호조 참판 김휘(金徽), 좌윤 권우(權堣), 형조 참판 정익(鄭榏), 예조 참판 이은상(李殷相), 대사간 신정(申晸), 교리 임상원(任相元) 등이 아뢰었다.
"능 앞면의 각종 석물(石物)을 헐어내 걷어버린 뒤에, 예전에 가장 크게 틈이 벌어졌었던 상석(裳石)과 병풍석(屛風石) 안쪽에 탈이 생긴 이유를 알아내려고 신들이 상세히 봉심(奉審)해 보았습니다. 상석 상단(上端)이 정지대(正地臺)와 하지대(下地臺)의 두 돌 사이에 삽입되어 있지 않고 단지 정지대 아래에 부착되어 있었던 관계로 형세상 조금도 유지될 수가 없어 상석이 걸핏하면 물러나 앉아 틈이 생기는 결과를 빚게 된 것이었습니다. 상석 아래의 흙 색깔을 보건대 상당히 습기가 차 있기에 이어 그 습기 찬 흙을 걷어내 보았더니 그 아래의 흙 색깔은 보통과 같았습니다.
진방(辰方)과 사방(巳方) 사이의 만석(滿石)이 이어 맞닿은 부분에 가장 크게 틈이 벌어졌기에 헐어내 걷어버리고 살펴보니 두 돌 사이에 박은 인정(引釘)이 꺾여져 파손된 지 이미 오래였고, 난간의 전석(磚石)도 잡석(雜石)으로 쌓아 그 땅을 바로 잡았을 뿐 엄석(掩石)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능을 봉분하는 흙을 제거한 뒤에 엎어놓은 솥 모양으로 쌓았던 석회도 밖으로 터져 나왔는데 영조척(營造尺)으로 재 보니 가로가 12척(尺)이고 세로가 7척이나 되었습니다. 일체를 본 대로 치계(馳啓)드립니다."
9월 30일 병신
천둥이 쳤다.
재궁(梓宮)을 꺼낼 때 상이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총호사 김수흥,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영양군(領陽君) 이현(李儇),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楠),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좌윤 권우(權堣), 호조 참판 김휘(金徽), 예조 참판 이은상(李殷相), 병조 참판 김우형(金宇亨), 공조 참판 민점(閔點),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시중(閔蓍重), 대사간 신정(申晸), 집의 이단석(李端錫), 장령 유연(柳㝚), 교리 임상원(任相元)·윤지선(尹趾善) 등이 치계(馳啓)하였다.
"재궁(梓宮)을 막차(幕次)에 봉안한 뒤에 봉심해 보니 조금도 손상된 곳이 없이 칠 색깔이 완연하였고, 또 광중(壙中)에 들어가 살펴보니 외재궁(外梓宮) 안쪽이 마르고 깨끗했으며 흠이 없었습니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갑자기 요통을 앓는 바람에 내일 바로 봉심하러 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애통하고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증세를 보아가며 다음달 3일쯤으로 날짜를 늦추어 갈까 하는데, 일기(日期)가 촉박하니 혹시 속히 강정(講定)해야만 할 일이 있거든 총호사(摠護使)가 의당 재궁의 빈소(殯所)를 만든 뒤에 내일 일찍 들어와서 품정(稟定)토록 하라고 그 뜻을 즉시 하유하라."
또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은 일단 재궁(梓宮)을 바꿀 일은 없다마는, 재궁을 여는 한 조목에 대해 아직 확실히 정한 것이 없으니 급히 의논하여 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승지는 문이 열리는 대로 능소(陵所)로 말을 치달려 영상 및 송(宋) 판부사에게 물어 의논하고 오라."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11월 (1) | 2025.12.07 |
|---|---|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10월 (0)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8월 (0)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7월 (0)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6월 (0) | 2025.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