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4년 1673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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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정유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총호사(總護使) 김수흥(金壽興)을 인견하였는데, 판서 조형(趙珩)과 대사헌 장선징(張善瀓)도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재궁(梓宮)과 광중(壙中)의 상태가 일단 정상이니, 그 다행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사방의 돌을 파낼 때에는 꽤 습기가 있었습니다만 다시 3척을 파 보니 흙 색깔이 건조하여 조금도 습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 겹의 구의(柩衣)도 모두 금단(錦段)의 본 색깔 그대로인 데다가 굳게 묶여져 있었으며 재궁의 칠 색깔도 정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재궁을 바꾸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다시 거론할 것이 없겠는데, 재궁을 여는 일에는 역시 불편한 일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궁을 여는 것이 사체상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물론 알고 있다만, 혹시라도 뜻밖의 일이 있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아뢰기를,
"의대(衣襨)가 혹 조금 줄어들었을지라도 줄어든 부분이 고작 상면 사방에 불과할 것이고 보면 반드시 바싹 가까이 달라붙어 있을 것입니다. 어찌 흔들릴 근심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일리가 있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송(宋) 판부사의 뜻은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상이 능 밑 도로변에 있기에 신이 올 때 찾아가 보니 그도 열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 신하에게 물어서 의논하라고 이미 분부를 내리셨으니, 재궁을 여는 조목에 대해서는 회계(回啓)를 기다려서 정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 이 이미 두 신하와 상의하고 온 이상 회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열지 않는 것으로 정하라."
하였다. 장선징이 나아가 아뢰기를,
"재궁에 설혹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성상의 몸이 편찮으시면 쉽게 거둥하시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재궁도 아무 일이 없고 현재 성상의 건강도 불편하신 중에 계십니다. 꺼려야 할 질병이 성안에 가득 돌고 있으니, 이런 때 어가(御駕)를 움직이시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명백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구릉(舊陵) 행차를 속히 정지시키소서."
하고, 김수흥 등이 모두 강력히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애통하고 망극한 정으로 볼 때 재궁을 성알(省謁)하는 예를 차마 폐하지 못하겠기에 약방이 누차 아뢰었어도 따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병세가 줄어들지 않고 경들이 또 이렇게까지 간곡히 말하니 서서히 날씨가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릉(新陵)에 가서 전알(展謁)할 수밖에 없다."
하였다.

 

10월 2일 무술

영의정 허적(許積)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면서, 죄를 진 더러운 신하의 몸으로 감히 막대한 예를 주선하며 일을 집행할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하니, 상이 답하기를,
"불행히도 병 때문에 망극한 회포를 펼 수 없게 되어 오장이 찢어지는 듯한데 그저 눈물만 혼자 흘릴 따름이다. 경이 굳이 사양하는 것이 비록 편안하게 여기기 어려운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이렇듯 막중한 예를 당하여 현궁(玄宮)을 봉폐(封廢)하는 일을 예(禮)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면 경의 마음에도 어떠하겠는가. 제때에 즉시 거행하여 미진하게 될 근심이 없게 함으로써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케 하였다.

 

10월 3일 기해

밤에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왔는데, 모양이 말[斗]과 같았고 꼬리 길이가 7, 8척쯤 되었으며 소리가 났다.

 

평안도 가산(嘉山) 등 3읍에 천둥이 쳤다.

 

10월 4일 경자

재궁(梓宮)이 구릉(舊陵)에서 출발하니, 상이 흥정당(興政堂) 앞뜰에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10월 5일 신축

대여(大轝)가 오시(午時)에 신릉(新陵)에 도착했다고 총호사 김수흥이 치계하였다.

 

10월 7일 계묘

사시(巳時)에 하현궁(下玄宮)하였는데, 총호사가 치계하니 상이 망곡례를 행하였다.

 

10월 8일 갑진

정원에 하교하였다.
"지금 총호사 및 승지의 치계를 보건대, 재궁(梓宮)을 현궁(玄宮)에 모셔 들일 때 내외(內外) 격목(隔木)의 치수가 차이가 나는 바람에 모셔 들이지 못하고 도로 꺼내는 일이 있게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장생전(長生殿)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나문(拿問)하여 처리하라."

 

지평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장응일(張應一)의 죄상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통촉하시는 바이고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개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전 사서 김환(金奐)이 일개인의 사적인 견해를 가지고 한창 전개중인 논을 막으려고 하다가 누차 어긋나고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배척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채 못되어 곧바로 청반(淸班)에 의망하다니 시비를 분별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이조의 당해 당상과 낭청을 모두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다가 누차 아뢰자 따랐다.

 

원임 영의정 영중추부사 정태화(鄭太和)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정태화의 자(字)는 유춘(囿春)이다. 재지(才智)가 넉넉하고 총민(聰敏)함이 뛰어났으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처하였으므로 낭패당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가정을 법도로 다스렸고 자제들을 단속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치 못하게 하였으며 붕당을 맺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비(黃扉)079)  에 출입한 기간이 25년이나 되었는데도 대단하게 세력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과 더불어 적응하며 처신할 뿐 국사를 떠맡은 일이 없었고 게다가 뇌물이 상당히 통했다는 비난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점을 부족하게 여겼다. 향년 72세에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하나는 공주에게 장가들고 하나는 명관(名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도 모두 음관(蔭官)으로 벼슬하여 온 집안이 벼슬아치로 가득하였다. 그리고 아우 치화(致和)와 바꿔가며 정승의 자리를 차지했으므로 사람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복록을 누렸다고 말하였다. 사신이 살피건대, 국가가 효묘(孝廟) 이래로 조정에 청의(淸議)가 크게 행해졌는데 식자들은 사화(士禍)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상당히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정태화가 수상(首相)으로서 그 사이를 잘 주선하였다. 구차하게 동조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대립하지 않아 조정의 논의로 하여금 마구 터져나와 결렬되지 않게 한 점은 대체로 볼 때 모두가 그의 힘이었다 할 것이다. 기해년 국휼(國恤) 때에 송시열(宋時烈)이 《의례(儀禮)》 소(疏)의 사종설(四種說)을 인용하여 왕대비의 복제(服制)를 의정(擬定)하려 하자 태화가 재빨리 손을 저으며 제지하고 마침내 국제(國制)로 정했었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이때를 당하여 만약 태화가 없었던들 응당 을사·기묘년 정도에 그치지 않는 참혹한 사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춘궁(春宮)을 일찍 세워 국본(國本)을 정하자고 청하면서 상의 마음을 탐지하려 했었는데, 상이 묘당(廟堂)에서 의논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을 때 사람들은 모두 이에 대답하기를 어렵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태화가 의논드리면서 ‘원자(元子)가 탄생한 날이 바로 국본이 정해진 때이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며 ‘옛사람이 이 일을 처리했어도 이보다 낫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정태화의 지술(智術)을 허적(許積)이 가장 꺼렸었는데, 태화가 죽고 나자 허적이 더욱 멋대로 행동했는데도 온 조정 안에 그에게 대항할 자가 없었다. 금상(今上) 초에 익헌(翼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추가로 배향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63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


[註 079] 황비(黃扉) : 황각(黃閣), 즉 재상을 말함.
사신은 논한다. 정태화의 자(字)는 유춘(囿春)이다. 재지(才智)가 넉넉하고 총민(聰敏)함이 뛰어났으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처하였으므로 낭패당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가정을 법도로 다스렸고 자제들을 단속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치 못하게 하였으며 붕당을 맺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비(黃扉)079)  에 출입한 기간이 25년이나 되었는데도 대단하게 세력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과 더불어 적응하며 처신할 뿐 국사를 떠맡은 일이 없었고 게다가 뇌물이 상당히 통했다는 비난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점을 부족하게 여겼다. 향년 72세에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하나는 공주에게 장가들고 하나는 명관(名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도 모두 음관(蔭官)으로 벼슬하여 온 집안이 벼슬아치로 가득하였다. 그리고 아우 치화(致和)와 바꿔가며 정승의 자리를 차지했으므로 사람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복록을 누렸다고 말하였다. 사신이 살피건대, 국가가 효묘(孝廟) 이래로 조정에 청의(淸議)가 크게 행해졌는데 식자들은 사화(士禍)가 일어나지나 않을까 상당히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정태화가 수상(首相)으로서 그 사이를 잘 주선하였다. 구차하게 동조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대립하지 않아 조정의 논의로 하여금 마구 터져나와 결렬되지 않게 한 점은 대체로 볼 때 모두가 그의 힘이었다 할 것이다. 기해년 국휼(國恤) 때에 송시열(宋時烈)이 《의례(儀禮)》 소(疏)의 사종설(四種說)을 인용하여 왕대비의 복제(服制)를 의정(擬定)하려 하자 태화가 재빨리 손을 저으며 제지하고 마침내 국제(國制)로 정했었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이때를 당하여 만약 태화가 없었던들 응당 을사·기묘년 정도에 그치지 않는 참혹한 사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춘궁(春宮)을 일찍 세워 국본(國本)을 정하자고 청하면서 상의 마음을 탐지하려 했었는데, 상이 묘당(廟堂)에서 의논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을 때 사람들은 모두 이에 대답하기를 어렵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태화가 의논드리면서 ‘원자(元子)가 탄생한 날이 바로 국본이 정해진 때이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며 ‘옛사람이 이 일을 처리했어도 이보다 낫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정태화의 지술(智術)을 허적(許積)이 가장 꺼렸었는데, 태화가 죽고 나자 허적이 더욱 멋대로 행동했는데도 온 조정 안에 그에게 대항할 자가 없었다. 금상(今上) 초에 익헌(翼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추가로 배향하였다.

 

10월 9일 을사

구릉(舊陵) 봉릉(封陵)의 기지(基址)를 적간할 일로 내관을 떠나 보내면서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하여금 군사를 인솔해 부역케 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였다.
"구릉에 차지 내관(次知內官)을 방금 내 보냈는데, 천릉 도감(遷陵都監)의 당상 1명과 일을 아는 낭청 1명을 곧장 구릉에 보내도록 분부하고, 우승지도 나아가라."

 

10월 10일 병오

천릉 도감(遷陵都監)의 당상 김휘(金徽)와 우승지 심재(沈梓)가 치계하기를,
"구릉(舊陵)을 헐어내어 걷어버리고 보니, 묘(卯)·인(寅)·축방(丑方)으로부터 미(未)·오방(午方)에 이르기까지 축축한 물기가 있었으며, 기와 두 조각과 나무 조각 여섯 개와 잡석(雜石)이 매우 많았고, 벌레와 뱀이 기어다닌 흔적이 있었습니다."
하고, 이어 별단(別單)으로 서계하기를,
"묘방 상석(裳石) 아래에 물이 샌 흔적이 현저하였고 유회(油灰)가 아직도 축축하였으며, 난간 대석(臺石) 아래에도 물이 흐른 자취가 있었고 기와조각 두 개가 틈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인방과 묘방 사이의 상석 아래에 빗물이 고인 형상을 이루었고, 상석과 지대(地臺)가 서로 연결된 부분에 채워진 넓이 2촌(寸)여의 석회도 물이 젖어 있었으며 인방 상석 아래에 푸른 잡석이 가장 많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인방으로부터 자(子)·축방(丑方) 사이도 마찬가지로 물에 젖어 있었고, 해방(亥方)과 자방 사이는 약간 건조했으며, 해방이 물에 젖은 상태는 인·묘방과 같았습니다. 술방(戌方)과 해방 사이의 상석에는 물기운은 없었으나 푸른 색의 작은 돌이 거의 한 말 정도 쌓여 있었습니다. 술방의 상석 아래에 나무조각 하나가 있었고, 유방(酉方)과 술방 사이의 상석 둘이 연결된 공간에 푸른 잡석이 거의 몇 말 정도나 쌓여 있었으며 나무조각 하나가 있었습니다.
유방의 상석 아래에 큰 나무조각 하나가 있었고 잡석이 쌓여 있었는데 흙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가 텅 비어 벌레와 뱀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었습니다. 신방(申方)과 유방에는 푸른 색의 작은 돌이 거의 한 말 가량 쌓여 있었으며, 신방의 상석 아래에는 나무조각 네 개가 있었고 유회(油灰)가 상당히 축축하였습니다. 미방(未方)과 신방 사이의 상석 아래에는 푸른 잡석이 거의 두 말 가량 되었습니다. 묘방(卯方)에서 건방(乾方)까지는 석회를 쌓아 지대(地臺)를 안치하였는데, 건방에서 미방(未方)까지는 석회를 쌓지 않고 지대를 안치하였기 때문에 왼쪽의 틈 벌어진 것이 더욱 심했습니다. 해·자·축 세 방향의 지대석이 서로 연결된 부분에 깊이 4척, 넓이 2척의 구멍이 있었는데 그 속이 축축한지 건조한지는 모두 헐어낸 뒤에야 알 수 있겠습니다.
대개 하지대(下地臺)와 정지대(正地臺) 사이에는 요(凹) 모양으로 돌을 깎아 상석을 삽입하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유지되어 뒤로 물러나는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왼쪽은 전혀 돌을 깎아 요(凹)의 모양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석이 쉽게 뒤로 물러나 앉아 틈이 생기는 결과를 빚었고, 게다가 사면에 모두 엄석(掩石)이 없습니다."
하였다.

 

10월 11일 정미

천릉 도감 당상 김휘(金徽)와 우승지 심재(沈梓)가 또 별단(別單)으로 서계하였다.
"인방(寅方)과 묘방(卯方)의 병풍석(屛風石)을 걷어내고 보니, 물의 흔적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나무 조각 하나가 있었으며, 인정(引釘)으로 맞물린 정지대석(正地臺石)이 끌어당겨지면서 파열되었는데 그 길이가 2척(尺)이었습니다. 축방(丑方)과 인방 사이의 정지대석도 갈라졌는데 그 길이가 2척이었으며, 두 돌 사이에 푸른 잡석과 진흙이 많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자방(子方)과 축방 사이의 병풍석을 걷어내고 보니, 물의 흔적이 똑같았으며, 두 돌이 서로 연결된 부분에 푸른 잡석과 진흙이 채워져 있는 것은 축방 인방 사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왼쪽의 병풍석을 걷어내고 보니, 단지 인정(引釘)에 맞물린 정지대석이 물러나 갈라지면서 틈을 이루기만 했을 뿐 나머지는 결함이 없었습니다. 자방 하지대석(下地臺石) 아래의 물 흔적은 다른 곳에 비해 더욱 현저하게 안쪽으로 유입(流入)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엎어놓은 솥 형태로 쌓은 석회는 가로 세로로 갈라져 완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능 위의 실토(實土)는 건방(乾方)에서 손방(巽方)까지 가운데가 균열되었고 자방과 축방 사이 역시 정자(丁字) 형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건방 오른쪽은 하지대석 아래를 석회로 견실하게 쌓은 데 반해 왼쪽은 약간 석회를 뿌린 흔적이 있을 뿐 견실하게 쌓지 않았습니다. 왼쪽 지대석 아래에 배치한 잡석에는 간간이 연기에 그을린 구들장도 있었습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구릉(舊陵) 능 위의 석물(石物)을 이미 헐어내 걷어버리고 간심(看審)하였다. 당시 도감 당상과 낭청 등의 범죄에 대해 법률에 의거해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즉시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 가두게 하라."

 

10월 12일 무신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신은 이같은 자취를 지녔는데 성상의 은혜를 받고서 외람되게 제신(諸臣)의 뒤를 따라 조금이나마 한없는 애통함을 풀었으니, 이제 저녁에 죽더라도 결코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구릉(舊陵)의 신혈(神穴)을 보건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기(二氣)가 순조롭게 운행되고 여러 신령들이 상서롭게 해 준 결과라고 하더라도, 또한 성상의 독실한 효성에 신령스러운 반응이 저절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주자(朱子)가 재차 아비의 묘를 옮겼으면서도 산릉(山陵)에 관해서는 경동(驚動)케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였습니다. 아마도 제왕가(帝王家)의 사체(事體)는 범인들과 자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초 흙을 1척(尺) 정도 파내려 간 뒤에 벌써 수내(隧內)에는 아무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일을 맡은 신하들이 망극한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한 나머지 개봉(改封)하자는 의논을 끝내 감히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새로 잡은 능이 예로부터 칭해오던 길한 곳이라 하더라도 어찌 지극히 편안한 곳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과 같기야 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견해를 이미 경자년에 의논드릴 때 다 말씀드렸는데 여러 대신들에게 저지당하는 바람에 시행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종적이 위태롭기가 나무 끝에 앉아 있는 정도일 뿐만이 아닌데 또 국구(國舅)에게 중한 죄를 얻은 관계로 혼이 빠지고 몸이 새파랗게 질려 감히 그 사이에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선왕을 저버린 신의 죄야말로 만 번 죽어도 갚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은 표석(表石)의 한 조목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간원에 내린 비답에서 이처럼 말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복이 아니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국구가 한 말은 바로 신을 배척한 말로서 표석에 관한 일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정지하고 시행치 말라는 명을 아직까지 듣지 못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마음 속으로는 실로 이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시면서 억지로 행하려 하시는 것이니, 후회하지 않도록 성신(誠信)으로 대하는 도리가 못될 듯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조정의 신하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 가부를 상세히 살펴, 시행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를 결정하소서. 그런 뒤에야 사리에 맞고 명분도 바르게 될 것인데, 행여 주저하며 구차하게 처리하여 사람들의 말을 초래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신은 또 성명의 뜻에 대해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성명께서 신에 대해 전후로 위유(慰諭)하신 것이 간절할 뿐만이 아니었으므로 신은 그 은혜를 늘 가슴에 품고 감격하였습니다. 몸이 가루가 된다 한들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신의 행위에 대해 나라를 해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간원에 비답을 내리실 때 이처럼 엄히 하신 것입니다. 성상의 뜻이 과연 그러하시다면 또한 상세히 말씀해 주시고 분명히 가르쳐 주시어 우매하고 미혹된 성품으로 하여금 깨닫는 바가 있게 하여 자처(自處)하도록 하셨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실로 덮어주고 보호해 주는 천지(天地)의 마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한편으로는 신을 논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복이 아니라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신이 아무 죄도 없는 자인 것처럼 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신을 나아오게 하여 면유(面諭)하려고까지 하시니, 어리석은 신의 마음에는 더욱 의혹되기만 합니다.
신이 또 삼가 듣건대, 성명께서 김만중(金萬重)이 상신(相臣)을 공격하여 배척한 것은 믿는 자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하는데, 외간에 전파된 소문에 의하면 만중이 믿는 자는 바로 신이라고 한다 합니다.
아, 만중이 아무리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라 하더라도 어찌 신의 종적이 제 한 몸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리라는 것을 모르고서 신에게 의지하려 했겠습니까. 성상께서 과연 하교하신 중에 신을 염두에 두고 지적하신 것이라면, 이는 성명께서 신의 정적(情迹)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만중의 사람됨을 또한 살피지 못하신 것입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있어서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부하셨는데, 오늘날 그만 이렇게까지 성명께서 알아주지 못하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은 다시 얼굴을 쳐들고 염치없이 전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왔다갔다 망설이기만 할 뿐 끝내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소이입니다. 신이 신릉(新陵)에 곡하고 하직한 뒤 애통한 심정이 끝이 없었는데 영원히 전하와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심사(心事)가 아득하게만 느껴지기에 감히 하나의 소를 올려 명을 어긴 죄를 기다립니다. 삼가 성명께서 재처(裁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또 향사(享祀)의 축사(祝辭)에 청(淸)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소를 살펴보고 나도 모르게 놀랍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경이 선조(先朝)의 은혜를 받은 것이 보통을 훨씬 넘은 것이었으므로, 나는 경이 선릉(先陵)의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어떤 어려움도 피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날의 일을 보면 경에게 바라던 것과 크게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다. 능 안에 빗물이 스며들고 고인 상태나 석물(石物)에 탈이 생긴 일 등에 대해서는 경이 충분히 보고 들었을 것이다. 현궁(玄宮)에 흠이 없는지는 외면만 보고선 알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개봉(改封)하자는 의논을 용납하겠는가. 이것이 내가 의혹을 가지는 동시에 경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다. 그리고 오늘날 능을 옮긴 일이 풍수설(風水說)에 현혹되어 한 것이 아닌데도 경의 소를 보면 마치 이 때문에 그렇게 한 것처럼 되어 있으니 더욱 놀랍고 의혹이 가는 동시에 경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간원에 답한 비답의 경우는 체례(體例)에 관계되는 일을 가지고 최후상(崔後尙)을 꾸짖은 데 불과할 뿐이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경을 논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는 뜻이 있었겠는가. 더구나 김만중의 말이야말로 너무나도 형편없는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경을 믿고서 그런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억측만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경에게 말을 전한 사람은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경의 상소 내용은 불평하는 말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의 말을 거꾸로 의심하다니, 이는 실로 나의 성의(誠意)가 부족해 서로 믿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데에서 나온 것인 만큼 부끄럽고 한스러운 생각이 들 뿐이다. 다시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경은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3일 기유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릉(舊陵)의 석물(石物)을 이미 헐어내 걷어버리고 간심(看審)하였는데, 오른쪽은 빗물이 새지 않은 반면 왼쪽은 스며든 흔적이 현저하였다. 당초 보토(補土)한 관원의 책임으로 돌려 중하게 논죄했었는데, 지금 보면 보토를 잘못한 죄가 아니고 본래 석물(石物)을 주관한 자의 죄가 중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석회 공사 역시 형편없기 짝이 없는데, 엎어 놓은 솥 형태로 쌓은 곳이 가로 세로로 갈라져 터진 것은 모두 삼물(三物)080)  을 잘 섞지 않아서 생긴 결과이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회를 잘 섞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힘들여 쌓지 않아서 이런 결과를 빚은 것인데, 대체로 볼 때 모두가 사람들이 일을 잘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宋) 판부사의 소 중에 ‘흙을 몇 자 파내려 갔을 때 벌써 수내(隧內)에는 아무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일을 맡은 신하들이 망극한 사람들의 말을 겁낸 나머지 개봉(改封)에 관한 의논을 끝내 감히 내놓지 못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때 일을 맡은 신하들이 과연 이런 의논을 하고서도 감히 꺼내지 못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들은 이런 의논을 하지 않았습니다. 설혹 현궁(玄宮)에 아무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지경에 이른 이상 어떻게 감히 개봉할 생각을 갖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령 수내(隧內)가 무사하다 하더라도 흙을 파낸 뒤에는 옛날의 석물을 쓸 수 없는 데다 새로 만들려면 필시 몇 개월이 걸릴 상황에서 어떻게 처리했어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현궁을 열어보기도 전에 이미 축축한 물기가 사방의 석물 밑에까지 번졌다 하는데, 그 안이 무사하리라는 것을 또 어떻게 안단 말인가. 옮겨 모시는 대례(大禮)를 다행히 무사하게 마쳤는데 지금 와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니 매우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리고 심지어는 표석(表石)의 일과 관련하여 내가 주저하며 구차하게 여기면서도 자기 말을 채용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진정 행해선 안 될 일이라면 아무리 판부사의 말이 중하다 하더라도 어찌 구차하게 따르겠는가. 전일 우상의 물음에 대해 내 뜻을 이미 모두 말했는데, 판부사가 어찌 이를 듣지 못했겠는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것 역시 성상의 뜻을 모르고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주(楊州)와 여주(驪州) 두 읍은 별도로 우대하여 구휼해 주어야 마땅하니, 올봄 대동미(大同米)를 전액 감면토록 하라."
하였는데, 수흥이 또 죽산(竹山)·음죽(陰竹)·지평(砥平)·용인(龍仁)·양지(陽智) 등 5개 읍도 대동미를 2두(斗)씩 감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수흥이 아뢰기를,
"적곡(糴穀)은 역시 정식(定式)대로 거두어들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 나눠 준 것은 3분의 1만 받아들이고 새로 나눠 준 것은 정식대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규령(李奎齡)을 승지로,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정중휘(鄭重徽)를 헌납으로, 권두기(權斗紀)를 지평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이훤(李藼)을 교리로, 홍만종(洪萬鍾)을 사서로, 조원기(趙遠期)를 수찬으로, 민종도(閔宗道)·이합(李柙)을 응교로 삼았다.

 

집의 이단석(李端錫) 등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게도 잇따라 흉년을 만나 현재 백성들의 목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고 있는데, 기읍(畿邑)의 경우는 또 능을 옮기는 일을 치르게 되어 어깨가 벌겋도록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적곡(糴穀)을 곧바로 납부하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경술·신해 두 해의 포흠(逋欠)을 한꺼번에 독촉해 받아낸다면 헐벗은 백성들이 참으로 보존하기가 어려우니, 묘당으로 하여금 되도록 좋은 쪽으로 품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다."
하였다.

 

대사헌 장선징(張善瀓)이 병 때문에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0월 15일 신해

정언 정유악(鄭維岳)과 헌납 정중휘(鄭重徽)가 현재 추감(推勘)받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0월 16일 임자

홍처량(洪處亮)을 대사헌으로, 이훤(李藼)을 헌납으로, 유명현(柳命賢)을 정언으로, 정유악(鄭維岳)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진사(進士) 여필세(呂必世) 등 60인이 상소하여 송시열(宋時烈)을 머물게 하도록 청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아뢰기를,
"시열이 3조(朝)에 걸쳐 예우를 받은 신하로서 척완(戚畹)에게 배척을 당한 나머지 조정에 대해 끝낸 불안한 생각을 갖게 된다면 이는 또한 사문(斯文)의 큰 재앙인 동시에 국운(國運)으로 볼 때에도 불행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뒷날 사씨(史氏)가 기록하기를 ‘유현(儒賢)이 국구(國舅)에게 축출당했다.’고 한다면, 장차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
예가(禮家)의 시비(是非)는 원래 공적인 의리입니다. 설령 민가(閔家)의 상제(喪制)에 잘못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예관(禮官)에 회부하여 선성(先聖)의 글을 상고하고 학술이 깊은 선비에게 자문을 구하게 한 뒤 가능한한 지극히 타당한 결론을 얻도록 하여 한 시대 임금의 전범(典範)으로 삼아야 본래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 강제로 형부(刑部)에 내려 마치 결송(決訟)이나 하는 것처럼 끝까지 따져 묻고 대질 신문을 하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고(千古)에 없었던 일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예에 대해 기휘(忌諱)한 나머지 송조(宋朝) 때 위학(僞學)이라고 덮어씌워 금했던 일과 불행히도 가깝게 될까 삼가 두렵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정의 시비는 자연히 귀결될 곳이 있다. 그대들이 간여할 일이 아니니,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8일 갑인

사간 박세당(朴世堂)이 인피하기를,
"민정중(閔鼎重)이 조명(朝命)에 응하지 않은 것 때문에 이미 엄한 견책을 받았는데, 스스로 생각건대 책임을 피하고 태만하게 군 죄는 정중에 비해 더 한 점이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본원에서 정중의 일을 한창 논하고 있으니, 더욱 감히 뒤따라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세당이 소명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은 채 재차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0월 19일 을묘

처음에 대마도(對馬島)의 차왜(差倭)가 부산(釜山)의 관소(館所)에 오래 머물면서 관소를 이전해 줄 것을 고집스럽게 청했으나 조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차왜 등이 그들의 요청을 절대로 들어 줄 수 없다고 회답한 서계(書契)를 보고는 펄쩍 뛰며 화를 내면서 상경해서 간청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며 행장을 꾸리는 등 곧 떠날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역시 금지하지 않고 하는 대로 내버려두자 차왜 등도 어떻게 해볼 계책이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접위관(接慰官) 조사석(趙師錫)에게 면담을 청하고 말하기를 ‘다대포(多大浦)나 초량항(草梁項) 등 포구라도 이전을 허락해 주었으면 한다.’ 하자 사석이 이를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의논드리기를 ‘웅천(熊川)은 결코 허락해 줄 수 없지만 초량항이나 다대포는 허락해 주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상이 비로소 허락하도록 명하면서 차왜로 하여금 다대포 목장과 초량항 중에서 한 곳을 직접 고르게 하여 뒷말이 없게끔 하였다. 차왜가 초량항으로 이전하기를 원하자 허락해 주었다.

 

10월 20일 병진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나라를 위해 수고한 지 거의 반년이 되어 가는데 능을 옮기는 큰 역사도 이제 막 예(禮)를 끝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올해의 농사가 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민역(民役)과 관련하여 의논해 처리할 일들이 매우 많다. 국가에 잇따라 사고가 발생해 삼공(三公)의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한 채 경이 홀로 행공(行公)하고 있는데, 이런 때를 당하여 또 병을 이유로 인입(引入)한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몸받아 속히 나와 행공함으로써 현재의 어려운 사태를 해결토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케 하였다.

 

10월 22일 무오

밤에 천둥이 쳤다.

 

10월 23일 기미

이세익(李世翊)을 승지로, 조원기(趙遠期)를 사간으로, 장선징(張善瀓)을 좌참찬으로, 정유악(鄭維岳)을 교리로, 정중휘(鄭重徽)를 문학으로, 이유(李濡)를 수찬으로, 유상운(柳尙運)을 부수찬으로, 조종저(趙宗著)를 사서로 삼았다.

 

교리 윤지선(尹趾善)과 부수찬 이유(李濡)가 청대하니,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지선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 양주(楊州)에 갔던 날 마침 겨울철에 천둥치는 변고를 만났기에 관상감이 왜 보고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 뒤 외방의 장계를 보고서야 과연 그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변고가 또 어제 밤에 발생했는데도 조가(朝家)에서 천변(天變)에 응하는 거조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무척 안타깝습니다.
기내(畿內)에 흉년든 상황이 경술·신해년과 다를 것이 없는데, 게다가 능을 옮기는 공사까지 치루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처지가 이미 갈 데까지 다 갔으니, 그들을 구제하고 살리는 대책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난번 경연에서 기읍(畿邑)의 예전 조곡(糶穀)을 줄여서 받으라는 명이 계셨습니다만, 민간의 형세로 볼 때 마련해 낼 길이 전혀 없으니 시기를 늦추어 거두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선이 또 아뢰기를,
"올해 적곡(糴穀)은 모곡(耗穀)을 제하고 거두라는 명이 계셨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그 덕의(德意)에 감격하고 있는데, 나름대로 들으니 외방에서 모곡까지 아울러 거두는 경우가 간혹 있다 합니다. 호조가 만약 이미 반포했는데도 수령들이 조정의 뜻을 체득하지 못했다면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아뢰기를,
"사핵(査覈)토록 하라."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근일 여러 신하들을 지나치게 견책하고 벌하는 것에 대해 삼사(三司)가 쟁집하였는데도 전하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습니다. 현재 군신(君臣) 상하의 정의(情意)가 돈독하지 못한데, 국사(國事) 가운데 우려할 만한 일로서 그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그리고 건강(乾剛)함이 부족하신 것이야말로 오늘날 아랫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우려하던 것이었는데, 삼가 듣건대 전일 경연에서 ‘나는 벼락치듯 태풍이 몰아치듯 하시던 선왕(先王)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상께서 이르셨다 하기에, 아랫사람들 모두가 전하께서 앞으로 무기력한 습성을 통렬하게 고치시고 선왕의 정치를 다시 이루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근일 행해지는 일을 보건대 크게 그렇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옛날 선조(先朝) 때에는 죄를 지으면 죄를 주고 쓸 만하면 썼기 때문에 신하들 모두가 일에 나아가 공을 세우려고들 했었는데, 전하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성지(聖旨)에 어긋나기만 하면 끝내 마음 속으로 풀지 않고 계시다가 혹 사소한 일을 가지고 견책하며 내쫓는 등 조금도 가차가 없으신데, 한편 살인이나 범장(犯贓) 등 중한 죄를 지은 자에게는 세월을 미루면서 법에 저촉되도록 한 경우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한때 지나친 거조를 하시는 것으로 진작시킬 소지를 삼으려 하신다면, 장차 인심이 복종치 않고 국가의 형세가 날로 비하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니, 벼락치듯 태풍이 몰아치듯 하셨던 선조(先朝)의 도가 결코 못된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법(贓法)이 엄하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간혹 풍문으로만 듣고 증거할 만한 명백한 사실이 없는데도 대뜸 법을 적용한다면 이보다 큰 원통함이 없겠기에, 사실을 조사하려고 생각하다 보니 세월이 자연 지체된 것이지 내가 그를 용서해 주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송시열(宋時烈)의 정적(情迹)이 편안키 어려운 정상에 대해서는 이미 성명께서 통촉하고 계실 텐데, 그의 소에 대한 비답을 지금까지 내리지 않고 계시므로 대소 인정(人情)이 상당히 답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다른 뜻은 없다. 종당에는 비답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이유가 또 아뢰기를,
"근래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해 외부인이 궐내를 출입한 결과 궐내의 말이 밖으로까지 나가고 있으니, 더욱 엄히 방지해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병조로 하여금 단속케 하였다.

 

상이 날씨가 혹심하게 춥다 하여 해조로 하여금 얇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솜옷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다시 상차하여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다.

 

개성부(開城府) 및전라도 담양(潭陽)·김제(金堤)·고부(古阜)·해남(海南)·정읍(井邑) 등 읍에 천둥이 쳤다. 담양에 무지개가 떴다.

 

10월 27일 계해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천둥친 변고를 인하여 상차해 견책받은 신하들을 풀어주기를 청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 28일 갑자

이혜(李嵆)를 대사간으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수찬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충청 감사로, 오두인(吳斗寅)을 병조 참의로 신정(申晸)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10월 29일 을축

밤에 천둥이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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