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병인
조형(趙珩)을 판의금으로, 박순(朴純)을 정언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11월 2일 정묘
의금부가 정치화(鄭致和)를 훼대사구단(毁大祀丘壇)의 율(律)로 조감(照勘)하니, 상이 판하(判下) 하였다.
"이처럼 막중한 죄는 비율(比律)081) 로 단죄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산릉(山陵)의 공사를 감독하는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가. 그런데 좌우 석물(石物)의 제도가 그처럼 같지 않았는데도 당상의 신분으로 한 번도 검사하여 바로잡지 않음으로써 오늘날 옮겨 모시는 일이 있게 하였으니, 국법으로 논한다면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정치화는 능을 봉분하는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병조의 일이 많은 관계로 먼저 조정에 들어왔었으니, 도리상 참작하여 죄를 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減死)하여 안치(安置)하라."
금부 죄인 신명규(申命圭)·이정기(李鼎基)의 공사(供辭)를 가지고 상이 판하하였다.
"산릉의 공사를 감독하는 책임이 얼마나 중한가. 그런데도 담당 관원의 신분으로서 공장(工匠)의 손에 내맡겨 두었을 뿐 아니라 직접 수고하는 것을 꺼린 나머지 좌우의 석물(石物)이 정(精)한지 정하지 않은지 땅을 고르는 일이 견고하게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돌아보지 않고서 그저 공사를 속히 끝마칠 꾀만 내었으니, 이런 일도 차마 할진대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국법으로 논한다면 그 죄가 죽어도 모자라다. 명규와 정기 모두 일죄(一罪)082) 로 논단하라."
좌승지 심재(沈梓), 우의정 정석(鄭晳), 동부승지 윤심(尹深), 부교리 정유악(鄭維岳) 등이 청대하니,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심재 등이 아뢰기를,
"삼가 금부의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정치화(鄭致和)를 감사(減死)하여 안치(安置)하라고 판하하셨습니다. 그러나 치화는 산릉 도감 당상으로 있을 때 마침 병판에 임명되었는데 그 직무가 긴요하고 중하여 왕래하면서 공사를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보토(補土)하는 일만 주관했을 뿐 석물(石物)을 배설하는 일은 일찍이 감독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능을 옮기게 된 것이 석물 공사를 성실하게 하지 않은 탓이고 보면, 치화의 죄를 적용한 것이 너무 과중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릉의 석물을 배설한 날짜와 치화를 병판에 임명한 날짜를 정원에서 조사하여 품하라."
하였다. 심재 등이 또 아뢰기를,
"신명규(新命圭) 등이 성실하게 감독하지 않은 그 죄야 물론 중합니다만, 그 정상을 살펴볼 때 고의로 범한 것은 아니니 의당 정상과 법문을 참작하여 타당한 율(律)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일죄(一罪)로 논단케 한 것은 정말 너무도 과하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고의로 범했다면 모훼종사(謀毁宗社)의 율로 단죄해야 할 것이다. 이미 장인(匠人)의 일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으면서 전적으로 공인(工人)의 손에 내맡긴 채 직접 감독하지 않았으니, 그 정상으로 볼 때 고의로 범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죄는 역시 죽어도 모자라다."
하였다. 심재 등이 물러가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하였는데, 산릉의 석물을 배설한 날에 마침 정사(政事)가 있어 치화가 병조 판서의 신분으로 나아와 참여했었다. 이를 가지고 보고하니, 상이 치화의 죄를 감하여 아산현(牙山縣)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박순(朴純)이 또 ‘이숙(李䎘)을 삭출(削黜)시킨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논에는 혐의가 있어 뒤따라 참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사간 조원기(趙遠期) 등이 ‘환수하도록 청하는 논에 대해 원래 혐의할 것이 없는데, 누차 인피하였으니 이는 구차하게 되는 일인 듯싶다.’는 이유로 체차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맹만택(孟萬澤)의 위호(尉號)를 환수하라는 헌부의 청을 이때에 이르러 윤허하였다.
11월 3일 무진
의금부가 아뢰기를,
"방금 신명규(申命圭)와 이정기(李鼎基) 등을 일죄(一罪)로 논단하라는 분부를 삼가 받들고 신들을 지극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명규 등이 석물(石物)을 감독하는 관원의 신분으로 제대로 정밀하게 다스리지 못해 이런 결과를 초래했으니, 그 죄가 정말 큽니다. 다만 생각건대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이 의도적으로 나오는 것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도 있는데, 의도적인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죄라도 용서해 주지 않고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아무리 큰 죄라도 용서해 주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성인께서 무엇을 믿고 저지르거나 재범한 것[怙終]과 실수나 불행한 사태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것[眚災]을 분별하여 죄를 주신 소이입니다. 이번에 명규 등의 범죄 사실이 중하기는 합니다만, 정상과 법문을 참작할 경우 일죄로 판결하는 것은 결코 타당한 율이 못 된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화(鄭致和)의 경우는 비록 비율(比律)했다고는 하지만 경중에 맞게 하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실로 어긋나는 점이 없는데, 율 외에 감단(戡斷)하여 감사(減死)해서 안치(安置)케 하셨으니, 이는 형장(刑章)에 있어 타당성을 잃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뒤 폐단과도 관계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신들이 죄를 평의(評議)하는 자리에 있는 몸으로 법령을 고수하는 외에는 감히 받들 수 없기에 황공한 심정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 초기(草記)를 보건대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만약 해당되는 율 외에 다른 율을 더 가했다면 법을 고수해야 할 신하로서 당연히 쟁집해야 할 것이니, 옛 사람 중에도 그렇게 행했던 경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명규 등이 범한 죄의 경우, 이미 해당되는 율이 없고 보면 지은 죄를 참작해서 정해 영갑(令甲)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수교(受敎)와 같은 유(類)이다. 유사(有司)가 어떻게 감히 그 사이에 간여한단 말인가. 옛 일로 논하더라도 이렇게 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당해 당상을 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집의 이단석(李端錫)과 장령 유연(柳㝚)이 아뢰기를,
"단죄할 때에는 오직 정상을 살펴 그에 타당한 죄를 정해야 합니다. 신명규(申命圭)와 이정기(李鼎基) 등의 범죄 사실이 산릉과 관계된 것인 만큼 원래 가벼이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생각건대 명규 등도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꺼려 소홀히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정상과 그에 타당한 법문이 어떠한지를 따지지 않은 채 무턱대고 일죄(一罪)083) 로 논단한다면, 이 어찌 생재(眚災)084) 를 분별하여 형장(刑章)을 신중히 적용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아조(我朝)는 인후함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웠고 함부로 대벽(大辟)085) 을 적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희릉(禧陵)을 옮기는 공사와 효릉(孝陵)의 석물이 갈라지는 변고가 일어났을 당시 그때 감독했던 신하들의 죄도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으니, 이 어찌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시어 긍휼히 여겨 용서하실 점이 아니겠습니까. 신명규 등을 일죄로 논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명규 등의 죄를 어찌 생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명규 등이 조금이라도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졌었다면 좌우의 석물과 땅을 바르게 하는 제도가 그처럼 현격히 달랐는데도 한결같이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범죄를 논한다면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일어난 일은 3백 년 동안 있지 않았던 일인데, 희릉과 효릉의 일을 어찌 인용하여 비유할 수 있단 말인가. 환수하라는 청을 듣고 보니 정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린다."
하였다. 사간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신명규와 이정기 등이 기한에 쫓겨 공사를 급히 진척시킨 나머지 상세히 검사를 하지도 못한 채 점점 헤아릴 수 없는 죄의 골짜기로 스스로 빠져들고 말았는데, 그 자취를 논한다면 죄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겠습니다만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용서할 만한 이치도 있다 할 것입니다. 지금 대신 이하와 삼사(三司)의 신하들 모두가 번갈아가며 쟁집(爭執)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명규와 정기를 위해 변호해 주려 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단지 그 죄에 타당한 율이 적용되지 않아 조종(祖宗)의 인후한 은택에 어긋나고 살리기 좋아하는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의 인후한 은택과 선왕을 잊어선 안 될 의리로 말한다면, 선릉(先陵)의 공사를 감독하는 자들이 어찌 그렇게 형편없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석물과 땅을 바르게 하는 공사에 대해서는 일체 염두에도 두지 않고 오로지 빨리 완결지으려고만 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감독한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도 상차하여 명규 등에게 일죄를 적용한 것은 너무 과중하다고 극력 말하면서 아뢰기를,
"감독한 신하들의 죄가 중하긴 합니다만, 법문을 보면 정해진 율(律)이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한때의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율에서 벗어나는 과조(科條)를 가벼이 적용하여 끝내 극형에 처한다면, 어떻게 조종을 본받고 후세에 모범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뜻은 그저 그들이 죽는 것이 애처로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가. 신명규 등이 말단 관원의 신분으로 막중한 공사를 감독하면서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결과 왼쪽의 여섯 방향 가운데 어느 곳 하나 견고하게 된 곳이 없다.
아, 필부가 자기 어버이를 장사지낼 때에도 반드시 견고하게 하려 할 것이니, 이는 사람이라면 공통으로 갖는 마음이다. 그런데 더구나 신하된 입장에서 임금을 장사지내는데 필부보다도 오히려 못하게 한단 말인가. 이는 참으로 국조(國朝)에 있지 않았던 큰 변고이다. 그런데 어떻게 법문에 정해진 율이 없다고 하면서 구차하게 비율(比律)을 따라 쓰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의 이 거조는 그야말로 조종을 본받고 후세에 모범을 보이려고 하는 것인 만큼 결코 사부(士夫)라고 해서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양사가 해를 넘기도록 논계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뒤에 한재(旱災)로 인하여 명규 등을 관대하게 처결하면서 감사(減死)하여 제주(濟州)에 유배보내었다.
밤에 금성(金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11월 4일 기사
충청도 공산(公山) 등 고을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11월 5일 경오
남편을 시해한 죄인 향이(香伊)를 복주(伏誅)하였다.
11월 6일 신미
밤에 번개가 쳤다.
11월 8일 계유
영의정 허적이 또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11월 9일 갑술
정륜(鄭輪)을 승지로 임상원(任相元)을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조사석(趙師錫)을 부교리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천릉(遷陵)한 뒤 백의(白衣)로 3개월을 마치고 복을 벗도록 하는 일에 대해 이미 계하하셨는데, 복을 벗을 때는 특별히 모여 곡하는 예가 없습니다. 각전(各殿)에서 백의를 입는 복제가 이 달 말일에 끝나는 만큼 12월 1일에 비로소 복을 벗으면서 상복(常服)으로 바꿔야 할 텐데, 백관들도 이와 똑같이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외방에 대해서도 이런 뜻으로 기일에 앞서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1일 병자
헌납 이훤(李藼)이 인피하기를,
"근일 신하들이 아뢴 것이 매우 많은데도 비국의 구실아치가 아직 회계(回啓)하기 전이라고 핑계대면서 등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그자들이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등사하여 중외에 전파하면서도 유독 간원에서 등사하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일이 매우 해괴해서 그자들을 붙잡아 오게 하여 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대신이 ‘회계하기 전에는 등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일찍이 품정(稟定)하였다.’고 하면서 간원의 아전을 수금(囚禁)하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당초 품정한 일이라는 것을 신이 실로 미처 몰랐습니다마는, 다만 생각건대 장주(章奏)를 먼저 재상에게 알리고 간관(諫官)을 모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당(唐)나라 말기의 폐풍이었는데, 오늘날 그런 일을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재상에게 허물이 있으면 간관이 또한 말을 해야 마땅한데, 죄가 있는 구실아치에 대해서 유독 다스릴 수 없단 말입니까. 그러나 신이 이미 대신의 노여움을 샀으니,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대간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기를,
"전에 품정했던 일을 미처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무턱대고 구실아치를 다스린 것은 자못 경솔한 행동이라 할 것이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12일 정축
목성(木星)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11월 13일 무인
여성제(呂聖齊)를 승지로, 박순(朴純)을 필선으로, 심지명(沈之溟)을 좌윤으로 삼았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에 천둥이 치고 비가 왔다.
날이 춥기 때문에 해조로 하여금 얇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솜옷을 나누어주게 하였다.
정언 윤지선(尹趾善)이 추고받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1월 16일 신사
신후재(申厚載)를 헌납으로, 박상형(朴相馨)을 정언으로, 이훤(李藼)을 교리로, 정석(鄭晳)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충청도 생원 김민도(金敏道) 등이 상소하여 본도의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지 말고 호남과 경기의 예에 따라 2두(斗)씩 더 바치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때 호서(湖西)의 대동미만으로는 경비를 충당하기에 부족하였는데, 조정에서 더 부과하는 것은 어렵게 여겨 바야흐로 혁파할 것을 의논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민도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대동법을 실시하기 이전에는 1년에 1결(結)당 부과하는 양이 혹 80, 90두에 이르렀는데, 대동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은 1년에 부과되는 양이 1결당 10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지금 호남이나 경기의 예처럼 2두씩 더 납부한다 하더라도 전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우니, 백성들도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를 비국에 내렸는데, 비국이 회계한 대로 따른 것이었다.
11월 18일 계미
정원이 청대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요즘 들어 기운이 매우 고르지 못한데 무슨 일로 청대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자, 대답하기를.
"근일 대신이 오래도록 행공(行公)하지 않은 탓으로 비국이 개좌(開坐)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됩니다. 그래서 외방의 장계를 대부분 회계(回啓)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연분 사목(年分事目)086) 역시 품정치 못하고 있으니, 나랏일이 오늘날보다 더 지지부진하게 된 적은 없습니다. 이에 신들이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을 참지 못해 감히 이렇게 청대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국 당상으로 하여금 대신의 집에 가서 의논하게 하되 급속히 회계하고 지체되는 일이 없게끔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안동 부사(安東府使) 신후재(申厚載)를 헌납으로 옮겨 임명했습니다마는, 현재 수령들이 그야말로 적곡(糴穀)을 거두고 역가미(役價米)를 징수해야 할 때를 당했으니, 결코 이동시켜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올해 흉년이 든 가운데에서도 안동이 더욱 심하니, 앞으로 진휼하는 정사 역시 잘 요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후재를 옮겨 제수한 직책이 비록 대간이라 하더라도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기타 수령들도 내년 보리가 익을 때까지는 옮기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후재를 잉임시키도록 하였다.
11월 19일 갑신
예조가 아뢰기를,
"오는 12월 1일에 백의(白衣)로 입는 복을 벗기로 이미 품정하였습니다만 그렇다고 무단히 변복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날 이른 아침에 상께서는 별전에 납시어 백의를 벗은 뒤 길복(吉服)으로 갈아 입으시고, 정신(廷臣)은 2품 이상이 궐내에 모여서 복을 벗은 뒤 이어 문안토록 하고, 기타 백관은 각각 해사에 일제히 모여 변복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0일 을유
밤에 달이 헌원(軒轅) 왼쪽 모서리를 범했다.
경기도 여주(驪州) 등 고을에 천둥 번개가 쳤다. 수원부(水原府)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11월 21일 병술
장령 유연(柳㝚)이 아뢰기를,
"지평 권두기(權斗紀)는 언책(言責)의 직책에 있는 몸으로서 직무를 극진히 수행해야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일 처리를 피했으므로 물의에 비난을 받고 있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 유연이 두기에게 상회례(相會禮)를 행하자고 청하였는데 두기가 일이 있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신명규(申命圭) 등에게 가해진 일죄(一罪)의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본부(本府)의 계사에 두기가 빠지려는 생각이 아닌가 하고 유연이 의심하여 이렇게 탄핵한 것이었다.
안후(安垕)를 장령으로, 조사석(趙師錫)을 헌납으로, 유상운(柳尙運)을 필선으로 삼았다.
11월 22일 정해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영부사 정태화(鄭太和)는 원로 대신으로서 선왕으로부터 세상에 보기드문 지우(知遇)를 받았는데 내가 그를 의지하면서 주석(柱石)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 번 병에 걸려 갑자기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나랏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기운이 없어지면서 애통스럽기만 하다. 근래 내 병이 낫지 않고 오래 끄는 바람에 즉시 나의 마음을 나타내지 못했으므로 늘 아쉬운 생각을 지녔었다. 해조로 하여금 3년 치의 봉급과 제수를 넉넉히 지급하여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전 참판 이민적(李敏迪)이 죽었다. 민적이 상소하여 이상(李翔)을 구하려 한 일에 걸려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되었는데, 부임하는 것을 지체하였다는 이유로 또 죄를 받아 해가 지나도록 폐고(廢固)되었다가 죽은 것이다. 상이 그의 부음을 듣고 경연에서 애석해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일찍이 그를 끝내 버리려는 마음이 없었기때문이었다.
민적은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서 병신년 과거에 장원으로 발탁되었는데 효종(孝宗)이 그의 대책문(對策文)을 보고는 훌륭하다고 칭찬했었다. 장주(章奏)를 짓는 솜씨가 뛰어났으며 삼사에 있으면서 논열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사리가 밝고 표현이 간절하여 전배(前輩)의 풍도가 있었다. 진솔하게 행동하면서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직 성실하고 온화하였으며 비속한 태도는 조금도 볼 수 없었다. 평소 자신의 생활을 담박하게 하였으며 거처와 의복이나 음식 때문에 마음에 누를 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동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모두 자신들이 미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죽을 때의 나이가 겨우 49세였다.
11월 24일 기축
지평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은 지난번 노복이 법을 범한 일 때문에 헌부가 금법(禁法)대로 행한 것에 오히려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뒤에 그 관리를 본부(本府)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받게 하고는 마침내 배리(陪吏)로 옮겨 소속시킨 뒤 며칠 동안 가둬 두면서 스스로 목을 매 죽게 했다가 도로 소생케 하였습니다. 이는 뒤 폐단에 관계되는 일로서 그냥 놔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추고하소서.
충청 병사(忠淸兵使) 박진한(朴振翰)은 군정(軍政)을 닦지는 않고 오직 자기를 살찌우는 일만 하여 집으로 짐바리를 실어가는 수레가 끊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며, 형장(刑杖)을 함부로 써서 사람을 많이 죽게 했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1월 25일 경인
천릉(遷陵)할 때의 총호사(摠護使) 이하 여러 집사(執事)에게 차등있게 논상하였다. 영의정 허적은 애책(哀冊)과 옥백(玉帛)을 받들어 올린 것으로 숙마(熟馬)를 하사받고, 지문 제술 서사관(誌文製述書寫官)인 판중추부사 송시열과 총호사인 우의정 김수흥은 각각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고, 지방 서사관(紙謗書寫官)인 김우형(金宇亨)과 도감 제조인 민유중(閔維重)·김휘(金徽)와 도청인 이유상(李有相)·홍주국(洪柱國)·조원기(趙遠期)와 현궁 봉폐관(玄宮封閉官)인 이단석(李端錫) 등은 모두 가자(加資)되었다. 【유상은 이미 죽었으므로 근래의 예에 따라 증직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66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11월 25일 경인
우의정 김수흥이 송시열의 소에 내린 비답 가운데 미안한 분부가 있었다는 이유로 상차하여 진계(陳戒)하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 가운데 다른 일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유시하였다. 그런데 소에 내린 비답의 경우는 단지 나의 소회를 개진하고 싶어서 그런 것일 뿐이니, 어찌 간인(奸人)이 이를 구실로 삼을 수가 있겠는가. 전일 경연에서 경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경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보면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이번에 천릉(遷陵)한 일이야말로 사람의 자식으로서는 애통해하고 망극하게 여겨야 할 일이니, 참으로 조금이라도 영혼을 놀라게 해 드리지 않을 길이 있었다면 어찌 충분히 상의하여 기필코 미진한 일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만약 개봉(改封)을 해야 했는데도 개봉을 하지 않고, 풍수설에 미혹된 나머지 함부로 놀라게 해 드렸다고 한다면, 몸둘 바 없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데도 전혀 속 생각을 털어놓지 않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인정이겠는가. 경은 한번 생각해 보라. 어찌 꾸짖는 뜻이 있었겠는가."
11월 27일 임진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가 죽었다.
11월 28일 계사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이 죽었다.
우의정 김수흥이 또 상차하여 병든 상태를 진달하면서 면직을 청하고 아뢰기를,
"군국(軍國)에 관한 제반 업무를 일체 폐기했으니 이것이 신의 첫번째 죄이고, 진대(賑貸)할 계책을 하나도 강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죄이고, 옥후가 불편하신데도 문안드리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죄이고, 부질없는 말을 망령되이 진달했을 뿐 성상의 덕을 보좌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네 번째 죄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속히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이미 남김없이 모두 말했었다. 안심하고 행공(行公)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추함(推緘)하는 일이 요즘보다 더 적체된 적이 없었는데, 10월 이후로 헌부의 관원이 개좌(開坐)한 날을 보면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현재 추고 대상자로서 조사가 완료되지 않은 자가 2백 20여 인이나 되는데, 그중에는 파산인(罷散人)으로서 세초(歲抄)에 써 넣을 수 없는 자도 48인이나 됩니다. 모든 관사를 규찰하는 관아가 이와 같다면 다른 데야 말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현재 헌부에 행공하는 관원이 없어 언제나 조사가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데, 세초를 끝내야 할 기한이 임박했으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일체 세초 가운데 써 넣도록 하였다.
11월 30일 을미
장령 유연(柳㝚)과 지평 이인환(李寅煥)이 정원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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