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병신
김우형(金宇亨)을 도승지로, 정중휘(鄭重徽)를 집의로, 홍만종(洪萬鍾)을 장령으로, 이명익(李溟翼)·민암(閔黯)을 지평으로, 조성(趙䃏)을 형조 참의로, 이원정(李元楨)을 병조 참판으로, 이동명(李東溟)을 사간으로, 이훤(李藼)을 이조 정랑으로, 이집(李鏶)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12월 2일 정유
정언 박상형(朴相馨)이 민간의 집에서 꾸어 들인 일 때문에 이름이 사계(査啓) 가운데 올랐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도성 백성들이 이미 큰 공사를 치른 데다가 흉년까지 만났으니 진휼해 주는 것이 도리입니다.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氷庫)에 저장할 때는 으레 호미(戶米)를 거두어 들이는 일이 있었는데 예전부터 혹 흉년을 만나기라도 하면 진청(賑廳)에서 요리하여 거행하였으니, 지금도 특별히 호미를 감해 주고 진청으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제급(題給)케 해서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사서(司書) 조종저(趙宗著)가 상소하기를,
"세자가 질병을 앓는 탓으로 오래도록 서연(書筵)을 폐하고 있으니, 궁관(宮官)으로 하여금 재(齋)에서 묵으면서 권면 계도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춘방(春坊)의 관원으로서 교회(敎誨)할 방도를 진달하였으니 근실하고 간절한 그 뜻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12월 3일 무술
호조 참판 김휘(金徽)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관례에 따라 임용하는 것은 전조(銓曹)의 책무이고 뽑아 올려 발탁하는 것은 임금의 권한입니다. 격외(格外)의 은혜를 사람들 모두에게 가벼이 내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쓸 만한데도 의지할 힘이 없고 뒤를 받쳐줄 세력이 없어 자력으로 올라올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인군이 더 의망(擬望)하게 할 수도 있고 특별히 제수할 수도 있는 일이니, 그것이 정사하는 도리에 있어서 무슨 손상이 될 것이며 신중히 가려 뽑는 의리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유연(柳㝚)이 기필코 전하로 하여금 쓸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쓰지 못하게 하고 일체 전조의 주의(注擬)에만 내맡긴 채 이에 거스르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그가 유독 무슨 뜻에서 그런단 말입니까. 가령 유연의 주장이 행해져서 조정이 앞으로 온통 일색(一色)이 된다면 그네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그 사이에 끼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법이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유연이 심지어는 ‘궁금(宮禁)과 서로 통하면서 암암리에 결탁하고 있다.’고까지 하였는데, 그것이 국가에 있어서는 얼마나 큰 혼란상이며 사부(士夫)에 있어서는 얼마나 큰 추태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신분으로서 즉시 곧바로 배척하며 명확하게 지목해야 온당할 텐데, 속에 계략을 숨기고 밖으로는 범연하게 논하는 척하면서 위로 임금의 마음을 미혹케 하고 아래로 신하들을 두렵게 만들고 있으니, 그 뜻을 알기가 어렵지 않다 하겠습니다.
가령 정신(廷臣)으로 하여금 허적(許積)을 배척해 물리치는 것처럼 죽을 힘을 다해 왕실을 위하고 마음을 쏟아 나랏일을 해 나가게 한다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아,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자들이 밤낮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배척해 제거하는 데 있을 뿐 백성의 근심이나 나라의 계책 따위는 소홀히 여긴 채 유념하고 있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신이 한밤중에 일어나 근심하고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근일 대관(臺官)이 이숙(李䎘)을 삭탈시키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청한 계사(啓辭)를 보면 그의 풍채를 허락하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숙이 논한 세 사람 모두가 이숙과는 반대 편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는 이름을 피해 볼 목적으로 조형(趙珩)까지 논급하였으니, 조형의 입장에서 보면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그 마음 씀씀이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데 대해 사부들이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는데 환수하라는 요청을 몇개월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목(耳目)을 담당한 대관이 공의(公議)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처럼 패거리를 짓는 일만 하고 있으니, 나라의 형세가 날로 쇠퇴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장령 유연이 상소하여, 중비로 더 의망하라고 비답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진달하고, 또 광해(光海) 때 궁금과 서로 통하면서 은밀히 결탁했던 폐단을 거론하였는데, 그 의도가 허적에게 있었기 때문에 김휘가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김휘가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면서 애원했다고 비웃었으나, 그가 말한 ‘곧바로 배척하며 명확하게 지목하지 않고 있다.’고 한 것이야말로 근래 대각에서 장주(章奏)를 올릴 때의 병통을 그대로 맞춘 것이라 하겠다.
집의 정중휘(鄭重徽)는 ‘이숙을 삭탈한 명을 환수하라는 본부의 논에 감히 따라 참여할 수 없는 혐의가 예전과 다름이 없다.’는 이유로, 지평 민암(閔黯)은 ‘신의 형 민희(閔熙)가 이숙에게 탄핵을 받았는데 이숙이 견책을 받은 이유가 꼭 이 일에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만큼 신은 이숙을 논하는 데에 감히 동참할 수 없는 점이 있다.’는 이유로, 지평 이명익(李溟翼)은 ‘전에 공산 판관(公山判官)에 재직할 때의 일로 추고받은 일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2월 4일 기해
상이 비국의 신하들을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고 제도(諸道) 감사의 장계에 따라 민역(民役)을 감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삼남(三南) 지방의 재해가 우심한 고을은 미포(米布)의 반을 감하고, 그 다음 고을은 3분의 1을 감하고, 제도는 모두 월과미(月課米)를 받지 말거나 감해 주도록 하였다.
충청 감사 맹주서(孟胄瑞)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서 본도 백성의 일을 물어보고 면려시켜 보내었다.
12월 5일 경자
이합(李柙)을 집의로, 유명현(柳命賢)·김총(金璁)을 지평으로, 한태동(韓泰東)·임상원(任相元)을 정언으로, 조형(趙珩)을 좌참찬으로, 장선징(張善瀓)을 우참찬으로, 정중휘(鄭重徽)를 보덕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참지로, 박세당(朴世堂)을 응교로, 김만기(金萬基)를 겸 지경연으로 삼았다. 이합은 추고받는 일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2월 8일 계묘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에 관(冠)·배(背)·이(履)·극(戟)이 있었다. 무지개같은 흰 기운이 양이에서 나와 구불구불 북쪽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각각 10여 길이 되었다.
12월 10일 을사
이때 헌부가 박진한(朴振翰)을 파직시킬 일로 연계(連啓)하자, 상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케 했는데, 장령 안후(安垕)가 또 아뢰기를,
"이는 범연한 풍문이 아니니 사핵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사계(査啓)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뒤 폐단과 관계가 있다고 비답을 내렸다. 안후가 미안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안후가 소패(召牌)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채 재차 피혐하여 체차되었다.
이무(李堥)를 집의로, 신익상(申翼相)을 부교리로, 유상운(柳尙運)을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12일 정미
장령 홍만종(洪萬鍾)이 소패(召牌)를 받고 응하지 않아 추고받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정면(鄭勔)·유상운(柳尙運)을 장령으로, 이명익(李溟翼)을 필선으로, 심수량(沈壽亮)을 검열로, 조사석(趙師錫)을 이조 좌랑으로, 이훤(李藼)을 헌납으로 삼았다.
12월 13일 무신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에 대해 초복(初覆)087) 을 행하였다. 장령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근래 인심이 맑지 못해 날로 교묘하게 꾀를 부리면서 틈을 타고 들어와 요행수를 엿보는 자들이 전후로 잇따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에 김휘(金徽)가 소를 올려 허다한 언설을 늘어놓으면서 유연(柳㝚)을 공격한 것은 지극히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유연이 ‘궁금(宮禁)과 서로 통하고 암암리에 결탁했다.’고 한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이 모르겠습니다만, 김휘가 이에 대해 무턱대고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불쑥 나서서 변호하려 한 그 뜻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안에서 비답을 내려 관원을 임명하는 일이 예로부터 더러 있어 왔습니다마는 그 말류(末流)에 미쳐서는 끝내 폐단이 있게 마련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역시 이에 대해 비난하는 의논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휘는 오히려 안에서 내리는 비답이 행해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마구 말을 늘어 놓으면서 끌어당겨 관원 발탁하는 권한이 안에서 내리는 비답에 전적으로 귀결되도록 하려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권유하며 이끌 도리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가 ‘온통 일색’이라느니 ‘외로운 샛별 같다’느니 한 말들을 보면 이미 고자질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인데, 또 애원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구차하고 그 정태(情態)가 가증스럽습니다.
그리고 이숙의 경우는 바야흐로 말한 일 때문에 죄를 얻었는데 또 따라서 억지로 억측을 가하여 죄안을 얽어 만들었으므로 환수하라고 대간이 아뢰는 것이야 말로 공의를 따른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자를 끄집어내어 공공연히 멋대로 훼방하고 비난하였으니, 그의 엿보려는 계책과 요행을 바라는 태도가 분명하여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호조 참판 김휘를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하소서."
하니, 상이 단지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사간 이동명(李東溟)이 김휘를 논하지 않아 무기력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인피할 성격의 일이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동명이 또 김휘의 상소 가운데 대간을 비난하며 배척한 말이 있었다는 이유로 재차 인피하였는데, 상운이 아뢰기를,
"대간이 피혐했어도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지 않는 이상에는 그대로 일을 논하는 것이 예입니다. 그런데 이동명은 인혐해서는 안 될 일을 억지로 인용하여 기필코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려고 하면서 똑같은 일로 재차 피혐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미 대체(臺體)에 어긋나게 되었을 뿐더러 규피(規避)하는 일이 되는 듯싶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수찬 최후상(崔後尙)이 아뢰기를,
"고 참판 이신의(李愼儀)는 혼조(昏朝)에서 폐모(廢母)에 대한 의논을 거둘 때 절개를 세웠으므로 일찍이 고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탑전에서 진달함에 따라 증시(贈諡)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호를 의논하는 규정을 보면 반드시 시장(諡狀)이 있은 뒤에야 의논해 정할 수 있는데, 신의는 이미 시장도 없는데다가 자손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본관(本館)에서 아직 거행치 못하고 있습니다만, 금부에 소장된 수의(收議) 문서를 가져다 보면 그가 절개를 세운 일이 정말 탁월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장도 없이 시호를 의논한다면 뒤폐단에 관계되겠지만, 이 경우는 관아에 소장된 문서가 있어 시장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호를 의논토록 하라."
하였다. 후상이 또 아뢰기를,
"고 영상 정태화(鄭太和)의 상(喪)에 3년 동안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를 듣고서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고 좌상 이경억(李慶億)의 상에도 휼전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녹봉을 역시 3년 기한으로 그대로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기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헌납 이훤(李藼)이 추고받는 조사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2월 17일 임자
주인을 시해한 천안군(天安郡) 죄인 생금(生金)을 복주(伏誅)하고, 군을 현(縣)으로 강등하는 한편 군수 조경빈(曹敬彬)을 파직하였다.
형조 판서 권대운(權大運)과 공조 판서 이정영(李正英)을 겸 비국제조(兼備局提調)로 삼았다.
12월 18일 계축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사형수에 대한 3차 심리를 행하였다. 어부(御府)의 생사(生絲)를 훔쳐 사형을 받게 된 자가 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어리석고 무지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를 사형으로 단죄한다면 원통한 일이다. 감사(減死)하여 정배하라."
하였다. 또 밤에 인가에 들어갔다가 잡히지 않으려고 저항한 율을 범한 자가 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흉년에 배가 고픈 나머지 두 묶음의 벼를 훔친 것은 죽지 않으려는 꾀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정상이 애처롭고, 칼을 빼들고 저항한 것은 그저 자신을 구해 보려는 것이었을 뿐 남을 해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니니, 그도 정배(定配)를 명하라."
하고, 나머지 9인은 사형으로 논단하였다. 3차 심리를 끝낸 뒤에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은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호서(湖西) 유생이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지 말고 2두(斗)씩 더 바치도록 해 줄 것을 청했으니 온 도내의 민심이 어떠한지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변통하지 않으면 선혜청이 결코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임 감사가 내려갈 때 역시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청주(淸州) 백성들이 가장 완악하고 사납기로 이름이 났습니다. 대동법을 시행한 이후로는 제반 공물(貢物)이 모두 대동미(大同米)에서 나오는데, 지금 만약 혁파할 경우 수령의 일용(日用) 경비도 장차 민간에 책임지워 징수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청주 백성들도 대동법을 혁파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고, 교리 이인환(李寅煥)은 아뢰기를,
"신이 지금 막 호서에서 돌아 왔는데, 들어 보니 더 바치도록 해 달라는 청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만약 다시 더 바치도록 한다면 실제로 혁파하는 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것 역시 청주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인환이 연소하여 사세를 모르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인환의 집이 청주에 있기 때문에 수흥이 그처럼 말한 것이었다. 상이 인환의 말 때문에 오래도록 주저하였는데, 대신이 누차 더 받아들이도록 청하자 마침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대동법이 비록 토지의 등급에 따라 과세하는 선왕의 뜻과 다르다 할지라도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풍족하게 하는 정사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니, 참으로 제도를 가지고 조절하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도록 한다면 부족하게 되는 걱정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 거듭 기아에 시달리며 헐벗은 백성들에게 더 과세를 하려고 하는가 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또 장차 이미 시행한 양법(良法)을 혁파하여 이 백성을 더욱 고달프게 하면서 보살펴 주려 하지 않으니, 나라를 위해 꾀하는 도리로 볼 때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대저 공부(貢賦)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고 용도는 한이 없는 법이니, 진실로 절약하지 않는다면 매년 공부를 증가시킨다 해도 어떻게 풍족하게 쓸 수 있겠는가. 인환이 단지 백성이 원하지 않는다고만 말했을 뿐 용도를 절약해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설을 반복해 개진함으로써 임금과 상신(相臣)의 마음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고 보면, 수흥으로부터 곧바로 연소하다고 가볍게 여겨지고 모욕을 받게 된 것도 대체로 스스로 취한 것이라 할 것이다.
상이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의 장계를 가지고 신하들에게 하문하기를,
"통영(統營)도 격군(格軍)에게 지급할 비축곡이 없는가?"
하니,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대답하기를,
"통영에 비축곡이 고갈된 것이 근년들어 더욱 심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제포(諸浦)에 제방을 쌓고 전답을 만들어 토병(土兵)으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서 경작하게 한 뒤 그 포(布)를 거두어 격군에게 지급토록 한다면 가장 편리하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영남은 조수(潮水)가 멀리까지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제방을 쌓을 곳이 적지만, 호남은 신이 직접 확인한 것만 해도 개간만 하면 수백 석을 생산할 곳이 많았습니다. 만약 승군(僧軍)이나 연군(烟軍)을 사용하여 제방을 쌓게 하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모두 양전(良田)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군량도 넉넉해지고 해방(海防)도 굳건해질 것입니다."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해방의 일에 대해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해 간심(看審)하지 않은 지가 거의 30여 년이나 되니 지금 별도로 어사(御史)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기르는 목장과 선재(船材)용 나무를 기르는 곳을 당초 구별하지 않아 서로들 불편하게 되어 있으니 이 점도 자세히 살펴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고, 마침내 선재적간 어사(船材摘奸御史)라는 칭호를 붙여 삼남(三南)에 어사를 파견하면서 사복시의 관원도 동행하게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왜역(倭譯) 한시열(韓時說)을 현재 나수(拿囚) 중인데, 중률(重律)을 적용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역(首譯)을 처참(處斬)하여 영원히 정률(定律)로 삼게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왜역 김근행(金謹行)의 범죄 사실이 시열과 조금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나 그도 그냥 놔둘 수 없으니 똑같이 나문(拿問)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왜인이 관소(館所)를 옮겨달라고 요청한 것이 왜역들의 은밀한 사주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시의(時議)가 모두 분개하였는데, 시열의 무리가 결국에는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좌승지 심재(沈梓)가 나아가 아뢰기를
"조가(朝家)가 불행하여 기구(耆舊)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형편입니다. 정2품 이상으로는 나이가 70에 찬 사람이 없고 기로소(耆老所) 당상으로 오직 이구원(李久源) 한 사람 밖에 없는데 그도 외방에 나가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선조조(宣祖朝) 때 대신이 진달함에 따라 종2품 중에서 선조(先朝)의 시종(侍從)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나이가 70이 넘은 자는 기로소에 들어가 참여하도록 특별히 허락했다 하는데, 이는 매우 성대한 거조였습니다. 현재 종2품 가운데 3조(朝)의 시종을 거친 사람이 없지 않은데, 대신이 바야흐로 입시하고 있으니, 당부(當否)를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수흥도 그렇게 하도록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조 참판 강백년(姜栢年)을 기로소 당상으로 삼았다.
상이 천릉(遷陵)한 뒤에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가자(加資)를 명하였다.
부교리 신익상(申翼相)이 일찍이 사관(史官)의 임무를 수행했으면서 사책(史冊)의 편수를 끝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이어 시사(時事)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백성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도 정사를 보면 백성을 보호하는 실상이 없는데, 기근마저 잇따라 천명(天命)이 거의 끊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무릇 독촉하며 징수하는 것 모두가 백성을 학대하는 일인데, 심지어 어린아이의 이름을 군사 명부에 올리는가 하면 이미 죽은 사람에게 포목을 징수하고 일족(一族)을 침해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런 폐단이야말로 천하의 지극한 아픔으로서 재해를 불러들이는 큰 원인이라 할 것입니다. 한 번 더 조사해 바로잡아 어린아이나 이미 죽은 자는 모조리 탕척토록 하고, 도망한 자의 부자나 형제 외에는 먼 친척들까지 침해하여 요구하는 폐단을 모두 제거토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에서 백성의 일에 관심을 기울여 환자곡[還上穀]을 감해 받으라는 명령을 어느 해이고 내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만, 토호(土豪)는 독촉하며 징수하는 상황에서도 태연한 반면 소민(小民)은 전답까지 팔아 모두 상환하면서 밤낮으로 원통함을 부르짖어도 호소할 곳이 없으니, 백성을 돌보는 혜택이 정작 그 혜택을 받아야 할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탄식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1, 2년 동안 미납된 것들을 뽑아내어 모조리 탕감해 줌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의 행 불행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 만큼 수령을 정밀하게 선발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급무라 할 것인데 자주 장리(長吏)088) 를 바꾸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큰 폐단이라 하겠습니다. 비록 시종신(侍從臣)으로 있다가 나온 자라 하더라도 3년 이내에는 바꾸지 못하게 한다면 소민이 혜택을 받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사론(士論)이 분열되어 색목(色目)이 두 갈래로 갈라진 지 지금 1백년이 지나도록 일치될 기약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습관을 타파하려고 하는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붕당을 깨뜨리는 데에는 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을 비워 대처하며 자신을 바르게 하여 이끌어 나가면서 남이니 북이니 동이니 서니 하는 차이를 일체 잊어버린 채 오직 사정과 시비를 나누는 것만 분명히 하신다면, 오늘날 신하들로서 그 누가 마음과 뜻을 깨끗이 씻고서 우러러 전하를 몸받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만 그렇지 않아 사람의 현부(賢否)나 일의 시비에 대해서는 도무지 살펴보려 하시지 않고 그저 당파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온통 가슴속을 채우신 채 사람마다 의심하고 일마다 억측하고 계시는데, 근래의 일을 가지고 한 번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송준길(宋浚吉)은 사림의 숙덕(宿德)으로서 임종할 때에도 말씀을 곡진히 올렸습니다. 이 사람이 당론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렇게도 의심하고 그렇게도 박하게 대우하셨단 말입니까. 비답 한 글자도 생전에 내리지 않으셨고 의원을 보내 병을 물어보는 것도 제때에 하지 않으셨으니, 두 조정에 걸쳐 스승으로 존경받던 신하가 속마음을 펴 보이지도 못한 채 지하에서 한을 머금고 있을 것입니다.
이상(李翔)은 절도있게 말할 줄을 몰라 경솔하게 행동한 것에 불과한데 중한죄를 적용하였고, 이민적(李敏迪)이 소회를 대략 진달한 것은 다른 뜻이 결단코 없는 것이었는데도 한번 폐고(廢固)되어 죽음에 이르고 말았으며, 기타 견책을 받은 조신(朝臣)들이 전후로 줄을 잇고 있습니다.
전하의 처분이 이미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잃었고 보면 김휘(金徽)가 틈을 타고 상소를 올린 것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되고, 민희(閔熙)가 조금이라도 염근(廉謹)한 지조를 갖고 있었던들 이숙(李䎘)의 논핵이 꼭 발동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설이 대신에게서 나오지 않았던들 김만중(金萬重)의 말이 꼭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비의 근원을 따지지는 않고 꼭 다른 편을 공격하는 죄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니, 이것이 어찌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되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민정중(閔鼎重)을 죄준 것이 일단 타당함을 벗어난 거조였고 보면 성호징(成虎徵)이 쟁집한 것이야말로 그의 직분에 따라 한 것일 뿐이었는데도 아침에 간하는 글을 아뢰었다가 저녁에 먼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국가가 대간을 둔 목적은 과실을 듣고자 함이니, 과실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 죄가 중하다 할 것인데, 어찌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 죄를 찾아 나라 사람들에게 넓지 못한 자태를 보여주어서야 되겠습니까.
전일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드려야 한다.’는 의리를 가탁하여 소장을 올리고 청대(請對)하는 등 거조가 분분하였는데, 그 말의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국구(國舅)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이 전하로부터 시작되어 말세의 위태롭고 어지럽게 되는 조짐을 열어 놓으셨으므로 보고 듣는 이들마다 모두 놀라며 탄식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국가를 위해 우려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동기(同氣)처럼 보라는 선왕의 분부를 회상하여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을 보통이 훨씬 넘게 총애하고 계시는데, 정 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행동을 단속하여 겸손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세상에 드문 융숭한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방향으로 계책을 내지는 않고 거꾸로 교만한 자세로 으시대면서 성상으로부터 받는 한때의 총애를 빙자하여 자기들의 방종하고 사치하는 밑천을 삼고 있습니다. 공자(公子)는 나라의 성곽과 같은 만큼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더구나 아무 거림낌없이 방자하게 조정을 시비하고 인물을 비평하면서 당연한 것인 양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심지어는 조사(朝士)와 결탁하여 방금(邦禁)을 업신여기기까지 하고 있는데, 저 염치없는 조신(朝臣)은 그와 교제하는 것을 기쁘게 여긴 나머지 발 벗고 그를 위해 뛰어다니면서 혐의도 잊은 채 대방(大防)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 진신(搢紳)의 수치라 하겠습니다만, 정 등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데에는 성상 역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숭선군(崇善君)이 집을 지을 때 국가가 명례궁(明禮宮)을 떼주어 정원을 넓히게 하고 정해진 제도를 준수하지 않은 채 그 저택을 넓히게 하였는데, 이는 이미 밝은 시대의 아름다운 전범(典範)과 어긋날 뿐더러 예(禮)를 가지고 사랑해야 하는 도리도 못 된다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에 시비가 밝혀지지 않고 흑백이 정해지지 않아 현사(賢邪)가 뒤섞여 있는데, 신은 이상진(李尙眞)과 정유악(鄭維岳)의 일에 대해서 괴이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유악이 상진을 논핵한 것은 관원들끼리 서로 바로잡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상진이 과연 선릉(先陵)을 봉심(奉審)하는 행차에 병을 칭탁하였다면 파직만 시킨 것은 가벼운 처벌이라 할 것이고, 영예를 욕심내고 염치가 없이 거드름을 피우며 윗 사람에게 거만한 행동을 한 것이 유악의 말과 똑같다면 폐척(廢斥)해야 마땅할 것이나,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상진이 유악을 천하게 여겨 싫어한 것은 사람들이 다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유악이 먼저 남을 제압할 술수를 발동하여 단번에 요절을 낼 목적으로 꾀를 내고 종이 가득 별별 사실들을 주워 모아 위태롭게 만들려 했던 작태를 숨기기 어려운데 그로 하여금 삼사(三司) 시종의 반열에서 활개치고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가령 유악이 참으로 공정한 마음으로 직언하여 조정을 바로잡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켰을 경우엔 모르겠습니다만 장차 어떤 상으로 그를 대우해 주시렵니까.
과거에 신경윤(愼景尹)이 김익훈(金益勳)을 논핵했을 당시에 논하는 자들은 경윤을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았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익훈은 탄핵을 배겨내고 발탁되어 중임(重任)을 맡은 반면 경윤은 외방 고을로 내침을 받고 다시 청직(淸職)의 반열에 끼이지 못했으니, 부자(夫子)가 ‘굽은 사람을 쓰고 정직한 사람들을 버려둔다.’089) 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 것으로써 신은 삼가 조정을 위해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김익렴(金益廉)이 간사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그를 버릴 뿐만이 아니라 성상께서도 통촉하고 계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전일 전조(銓曹)가 공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잇따라 사유(師儒)의 관직에 의망하였으니, 공정하게 전선(銓選)해야 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그 잘못이 작지 않은데도 대각에서는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니, 저 전관(銓官)이 무엇을 꺼려 신중히 하겠습니까. 그때의 대관에 대해서는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었다 해도 될 것입니다.
박천영(朴千榮)의 시권(試券)에 이미 덧붙여 고친 흔적이 있었고 보면 대간이 아뢰어 삭제할 것을 청했던 것은 단지 국법을 엄히 하고 뒤 폐단을 염려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이 천영을 위해 변호하는 소장을 올리자 대신과 연신(筵臣)이 중언부언하며 기필코 복과(復科)시킨 뒤에야 그만두려 하는데, 과장(科場)의 중한 법을 문란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조금만 기강이 있다면 이런 말이 성상의 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번에 천릉(遷陵)하게 된 변고야말로 전에 없었던 일인 만큼 감독한 신하들이 죄를 면할 길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정치화(鄭致和)는 일찍이 대신의 반열을 거친 사람인데 어찌 꼭 감옥에 가두어 모진 모욕을 보인 뒤 법을 적용해야 합니까. 전하께서 치화를 대우하시는 것이 너무 야박한데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하고 내리신 분부는 더더욱 대신에게 가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명규(申命圭)와 이정기(李鼎基) 등에 대해 전하께서 뭇 의논들을 배격하고 꼭 죽이려 하시는데 오늘날 쟁집하는 자들이 어찌 감히 두 사람을 위해 애석하게 여겨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단지 천지처럼 살리기 좋아하는 전하의 덕에 누를 끼치게 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명규 등으로 하여금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음의 길에 나아가게 하신다 하더라도, 지하의 혼령이 군친(君親)과 영결하면서 슬프게 울부짖고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생각이 미치신다면, 어찌 성상의 마음에 측은하게 느껴지고 두려운 생각으로 후회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과인을 경계시키는 말을 계속해서 자상하게 해 준 것에 대해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그 가운데 의논해 처리할 만한 한두 가지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토록 하겠다만, 기타의 이야기들은 자못 억양(抑揚)하는 뜻이 있는데 그것이 온당한 것인지 내가 모르겠다. 그리고 사책을 편수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막중한 일인데 재촉한 뒤에도 지금까지 지체시키고 있으니 위촉한 것이 온당치 못했다. 이 때문에 사직한다면 더욱 안 될 일이다."
하였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신익상(申翼相)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그중 한 조목에서 신들을 매우 각박하게 몰아세웠습니다. 첫째는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종하다 하였고, 둘째는 조정을 시비하며 인물을 비평한다 하였고, 셋째는 조사(朝士)와 결탁하여 국가의 금법을 무시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것도 부족하여 또 말하기를 ‘정 등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한 데에는 성상에게도 허물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경악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절박한 심정을 진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들이 외람되게 선록(璿錄)에 끼인 몸으로 분수에 넘치게 큰 사은(私恩)을 받고 있으니, 생활 수준이 한사(寒士)와는 본디 같지 않은 만큼, 신익상이 만약 사치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신을 꾸짖었다면 신은 당연히 그런 점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노력하는 자세를 견지하면서 조리있게 전개하는 그의 말에 감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익상이란 자는 이런 의도에서 출발하지 않고 거꾸로 총애를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종하다고 지목하면서 이를 성덕(聖德)의 하자로 귀결시키고는 공동(恐動)시키려는 계책을 이루려 하였으니, 서로 적대시하게 하여 화란의 계제를 만들려 하는 그 의도가 아, 또한 지독하다 하겠습니다.
신들이 성상과 가까운 친척인 관계로 성상으로부터 세상에 드문 은혜를 받고 있으므로 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마치 깊은 연못이나 골짜기에 떨어질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하인들과 같은 천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일찍인 교만한 자세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신들이 겸손하고 공경할 줄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정의 법도가 그러하여 본래부터 명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정을 시비하고 인물을 비평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더욱 신들을 책망할 성격의 것이 아닌데도 신들을 죄준 말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신들이 경솔하고 망령된 나머지 입 조심을 하지 않고 방안에서 한가하게 이야기한 것을 몰래 엿들은 자가 있다 할지라도, 일찍이 어떤 정사의 득실이나 어떤 인물의 현부(賢否)를 장주(章奏)에서 발언한다든가 공회(公會)에서 이야기한 일이 없었고 보면, 신들의 죄는 원래 드러난 것이 없다 할 것입니다. 마음 속의 잘못을 금하고 민간의 의논을 벌준 것이야말로 진(秦)나라 때의 가혹한 법이었는데, 익상이 관대한 정사를 펴는 성조(聖朝)에서 사실(私室)의 한담조차 금하려 하다니, 이 또한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조사(朝士)와 결탁하고 국가의 금법을 무시했다고 한 것은 한 번 웃어 줄 가치도 더욱 없습니다. 종척(宗戚)의 신하도 하나의 사람으로서 본래 멀고 가까운 내외의 친척이 있고 인척과 친구들이 있으니 경사가 있을 때 찾아보고 상을 당했을 때 조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령 익상의 말이 세상에 행해져서 친척도 감히 찾아보지 못하고 붕우도 감히 종유하지 못하게 된다면, 공족(公族)의 행동을 제한하는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공성(公姓)을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공족과 공성이 된 자들이 또한 곤액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당(唐)나라 곽왕(霍王) 원궤(元軌)는 처사(處士) 유현평(劉玄平)과 포의(布衣)의 교분을 맺었는데,090) 당시에도 미담으로 여겼고 후세에도 비평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신들에게 설령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피차 누를 끼쳐서는 안 될 입장인데, 더구나 발벗고 나서서 신들을 추종하는 그런 조사가 한 사람도 없는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 신의 집안에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다가 거꾸로 세상의 심한 질시를 받게 되었는데, 이렇게 된 것은 일조 일석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유래가 깊습니다. 그런데 신들의 몸에 이르러 과거에 누적되었던 노여움이 해소되지 않은 채 점점 무함하는 일이 굳어져 이미 방아쇠가 당겨졌으니, 지금 이후로 신들이 어디에서 안식을 찾아야 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신들을 삭직하시고 도성 문 밖으로 축출하소서. "
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처음에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가 감사(監司) 오단(吳端)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인조(仁祖)정축년091) 이후로 효묘(孝廟)와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오래도록 요계(遼薊)에 인질로 잡혀있게 되자 인평 혼자서 사랑받는 아들로 옆에서 모시게 되었었다. 그런데 오단은 평소 어리석고 경솔하며 근실하지 못하다는 평판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기면서 자못 지나친 생각을 품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효묘가 즉위하여 요를 매우 돈독하게 사랑하며 그의 말이라면 모두 들어 주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오단의 아들 정위(挺緯)를 축출하여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삼자, 미처 사조(辭朝)하기도 전에 안에서 비답을 직접 내려 승지로 제수하였다. 시열이 임금의 총애를 얻고 있었을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다.
유도삼(柳道三)이 인평 대군과 밤에 술을 마시다가 취중에 칭신(稱臣)을 하자, 이로 인해 서변(徐忭)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다행히도 인평 대군은 효종조에 제 수명대로 살다가 죽을 수 있었다.
현종은 성스러운 성품에 더욱 인자하여 요의 아들인 이정과 이남 등을 너그럽게 대하면서 효묘가 요를 대하던 것과 똑같이 하였다. 이에 이익만 좋아하고 염치는 모르는 사부(士夫)들이 모두 빌붙어 따랐는데, 상은 대체로 그린 사실을 알면서도 제대로 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금상(今上)092) 초에 이르러 정과 남이 그들의 외삼촌 오정창(吳挺昌) 및 윤휴(尹鑴)·이원정(李元禎) 등과 함께 역모를 꾀하고 또 허적(許積) 부자와 서로 의기 투합했는데 한 나라의 절반을 나누어 먹을 때에 그들의 사인(私人) 아닌 자가 없었다. 인평 부자가 한쪽 편 사람들의 종주(宗主)가 되어 4조(朝)에 걸쳐 40년 동안 군림하다 이때에 비로소 패몰하였는데 전(傳)093) 에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는 것은 일조 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동안 점차 그러한 요소가 쌓여 왔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 정말 맞다고 하겠다. 남 등의 역모가 발각되자 상이 괴수만 죽이고 그 패거리들은 사면하여 함께 유신(維新)에 참여토록 하였는데, 어찌 옛 사람이 말한 바 ‘흉역한 무리들이 넓은 하늘에 포용되어 뻔뻔스럽게 살아 있다.’고 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12월 19일 갑인
조형(趙珩)을 예조 판서로, 신정(申晸)을 대사성으로, 이합(李柙)을 교리로, 이훤(李藼)을 이조 정랑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집의로,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이휘진(李彙晋)을 장령으로, 강석구(姜碩耉)·박원도(朴元度)를 지평으로, 윤지선(尹趾善)을 헌납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수찬으로, 남익훈(南益熏)을 설서로, 이단석(李端錫)을 승지로, 전동흘(全東屹)을 함경남도 병사로, 김환(金煥)을 황해 병사로 삼고,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를 명선 대부(明善大夫)로 가자(加資)하고 특별히 도정(都正)에 제수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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