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5년 1674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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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인

정언 한태동(韓泰東)이 아뢰기를,
"김휘(金徽)가 음험하고 사특하게 마음대로 굴었는데도 파직하는 죄 정도로 그쳤으니, 이는 좋고 나쁨을 분명히 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미 시비가 정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이 형편없는 탓으로 대각을 대우하는 성조(聖朝)의 체통을 손상시켰는데, 신이 또한 무슨 마음으로 성세(聖世)에서 대우하는 대각의 인물로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지평 박원도(朴元度), 장령 이휘진(李彙晋)이 아뢰기를, "신들은 김휘의 벌이 일단 대충 시행되었고 한 해도 저물어가기에 줄곧 서로 버티기만 하는 것은 사체상 미안하게 여겨져 정계(停啓)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간신(諫臣)이 파직하는 죄 정도로 그쳐서 좋고 나쁨을 밝히지 않았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은연중 비난하며 배척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고, 또한 인피하였다. 지평 신완(申琓)이 ‘공의(公議)가 일단 펼쳐진 이상 오래도록 버틸 필요는 없는 것으로서 저쪽에서 배척했다 하더라도 이쪽엔 역시 잘못이 없다.’는 이유로 휘진의 출사를 청하고, 또 ‘이미 정지된 논을 제기한 것은 경솔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태동의 체차를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월 2일 정묘

노산군 부인(魯山君夫人)을 위해 수묘군(守墓軍)과 제전(祭田)을 지급하라고 명했는데, 응교 이선(李選)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이선이 또 사당을 세워 민가에 뒤섞여 있지 않도록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민신(閔愼)의 집안을 사핵(査覈)하는 공사를 형조에 내리며 이르기를,
"민세익(閔世翼)이 완전히 미치지 않았는데도 그 아들이 대신 할아비의 상에 복을 입었다면, 아무리 조객(吊客)의 지휘에 쫓겼다 하더라도 민신이 어떻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사핵한 것을 보건대, 세익을 추문하지 않아 격례(格例)에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모호하기 그지없어 정말 의거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다시 더 자세히 조사해 아뢰어라."
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가 형조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처결해 주는 것이 없었고, 송시열(宋時烈)도 교외에 있으면서 감히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에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변례(變禮)에 대해 묻고 강구하는 것은 사부(士夫)의 집안에서 늘상 행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민신의 일 때문에 송시열이 이미 불안해하고 있고, 박세채도 유일(遺逸)로 발탁되어 몇 개월이나 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보고 듣기에 아름답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상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다가 마침내 다시 조사토록 한 것이었다.

 

1월 3일 무진

남양부(南陽府)를 현(縣)으로 강등하고 청양현(靑陽縣)을 혁파하였는데, 10년이 차서 모두 복구시켰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선재 어사(船材御史)의 파견 여부에 대해 대계(臺啓)에 따라 품처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이번 어사의 행차는 단지 형세를 살펴보기 위한 것일 뿐이니 어찌 대계에서 말한 것처럼 오래도록 머물러 폐를 끼치기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전에 결정한 대로 떠나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뒤에 대계로 끝없이 쟁집하고 농사철이 박두했으므로 실제로는 보내지 않았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문관 중에 당상으로 변방의 방백이 되는 자는 대간과 시종을 거친 사람을 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재주가 있어도 이 예에 구애받아 의망하지 못하는 경우도 혹 있는데, 이는 재주에 따라 선임하는 뜻이 전혀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비록 대간과 시종을 거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목(州牧)으로 천거된 문관은 모두 의망토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신완(申琓)이 아뢰기를,
"무릇 인견할 때 장관에게 유고가 발생하면 차관이 입시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장령 이휘진(李彙晉)과 지평 박원도(朴元度)가 모두 들어오지 않아 아랫 관원이 입시하도록 만들었으니 사체로 볼 때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는데, 부교리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이휘진은 금란(禁亂)하는 일로 민간을 많이 소요스럽게 하였으므로 대신(臺臣)이 논하여 체차시키지 않더라도 신이 역시 그의 체차를 청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완이 또 아뢰기를,
"대간을 처치하는 규정을 보건대, 그날 유고가 있으면 다음 날 처치하는 것이 예입니다. 그런데 정언 한태동(韓泰東)이 피혐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린 뒤에, 헌납 홍만종(洪萬鍾)이 정고(呈告)를 핑계대어 곧장 처치하지 않고는 사직 단자가 봉입되기를 기다려 헌부에 이송하였으니, 이는 규례에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회피하려는 자취를 보인 것입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통영(統營)에 풍토병이 발생해 무신들이 대부분 이 병으로 인해 못 일어나고 있다.’는 이유로 임기를 1년으로 감하라고 명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을 대사헌으로, 어진익(魚震翼)을 사간으로, 이무(李堥)를 헌납으로, 이하진(李夏鎭)을 장령으로, 권적(權迪)을 지평으로, 이인환(李寅煥)을 정언으로 삼고,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으로 어영 도제조(御營都提調)를 겸하게 하였다.

 

1월 4일 기사

정언 이인환이 ‘몇 차례 추함(推緘)을 받았는데 모두 그에 따른 처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뜸을 떴다.
처음에 경상 감사 이관징(李觀徵)이 치계하기를,
"제반 군사 및 각사(各司)의 노비·장인들로서 신해년 이전에 물고(物故)된 자에 대해서는 신역을 탕감해 주도록 하라는 조정의 분부가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이들 중에는 혹 족속이 없어서 아직 입안(立案)001)  을 내지 못한 경우도 있고, 혹 족속은 있다 하더라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즉시 알리지 못한 탓으로 아직 입안을 내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와서는 검시(檢屍)할 길이 없는데, 만약 반드시 검시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입안을 작성해 준다면 인족(隣族)을 침해하는 폐단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니, 변통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해년의 도고자(逃故者)에 대한 제반 신역과 관련, 계축년 이전의 것은 이미 탕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인년 이후의 방군(防軍) 번포(番布)에 대해 변통해 주지 않는다면 형세상 인족에게 포목을 거둘 수 밖에 없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매월 방군을 배치하는 숫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달리 충원해 줄 길이 없으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하니, 비국에 계하(啓下)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김수흥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물고와 관련된 입안을 만약 날짜를 물려 내도록 허락한다면 허실이 뒤섞여 허위로 속이는 일을 막기 어려울 것인데, 그렇다고 허락하지 않으면 정말 도신(道臣)이 말한 것처럼 인족이 피해를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월 방군을 배치하는 일은 한 명도 궐원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되는데, 조정에서도 매번 대신할 자를 주기 여러운 형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물고된 자들에 대해서는 다시 조사한 다음에 변통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주서(注書)가 일기(日記)를 수정하지 않는 일이 요즘 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다. 지금 이후로는 실주서나 가주서를 막론하고 일기를 수정하지 않은 자는 6품으로 승진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이미 6품으로 오른 자도 서용하지 못하게 하라."
하고, 【상이 일찍이 정원에 명하여 어떤 달의 일기를 들이도록 하였는데, 아직 수정을 못했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이렇게 분부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한림(翰林)이 시정기(時政記)를 수정하지 않았을 때에도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승전(承傳)을 받들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승전을 받들었다면 신익상(申翼相)을 어째서 6품으로 승진시켰단 말인가? 정원은 조사해 아뢰어라."
하였다. 정원이 익상을 승진시켜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전을 받든 사실이 이처럼 명백하다면 아무리 승진시켜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해조에서는 당연히 계품(啓稟)했어야 할 것인데, 관례에 따라 승진시켰으니 부당하기 그지없다. 당해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고 익상을 개정하라."
하였다.

 

1월 5일 경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가 갑자기 요절하였으니 그 놀랍고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그리고 생각하면 선조(先朝)에서 관심을 쏟아 사랑한 것이 보통을 훨씬 뛰어넘었고 시강관(侍講官)으로 나를 보좌하는 등 정의가 친밀했으니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해조로 하여금 제수(祭需)를 넉넉히 지급하여 나의 뜻을 나타내도록 하라."

 

지평 신완이 아뢰기를,
"형조 참의 조성(趙䃏)은 지체와 명망이 본래 낮은데도 외람되게 본직을 제수받았으므로 물의가 떠들썩한데 태연히 못 들은 체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염치없는 짓은 없을 것입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6일 신미

헌납 이무가 추고받는 조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차사원(差使員)으로 올라온 수령을 인견한 뒤 민간의 병폐를 두루 묻고 면려하여 보내었다. 동부승지 이단석(李端錫)이 나아가 아뢰기를,
"사관(史官)으로서 역사 수정하는 일을 끝내지 않고 6품으로 지레 오른 자가 유독 신익상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조 참의 신정(申晸), 정랑 이훤(李藼), 수찬 이유(李濡)도 모두 수정을 미처 마치지 못했는데 익상만 개정토록 한다면 벌을 주는 것이 균등치 못합니다. 그리고 익상이 일을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홀연히 이런 명을 내린다면 듣는 자들이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폐단이 있을까 염려해서 그런 것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 사람을 모조리 개정할 수는 없으니 모두 현직에서 해임시키되 그렇다고 송서(送西)002)  하지는 말고 수정 작업을 완료케 한 다음에 서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7일 임신

우승지 정석(鄭晳)과 대제학 김만기(金萬基)를 태학(太學)에 보내어 황감(黃柑)을 유생에게 하사하고 이어 제술 시험을 보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진사 안규(安圭)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내리고 나머지 3인에게는 모두 점수를 주었다.

 

조사석(趙師錫)을 헌납으로, 유담후(柳譚厚)를 정언으로, 이인환(李寅煥)을 부교리로, 이하진(李夏鎭)을 부수찬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장령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월 9일 갑술

평안도 용강현(龍岡縣)에 적통지(赤筒池) 방죽이 있었는데 백성의 전지 수천 경(頃)에 물을 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집에서 떼어 받아 장차 방죽을 허물고 전지로 만들려 하였다. 도신(道臣)이 계문하니 이 일을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복계하기를,
"방죽을 쌓은 것은 본래 백성을 이롭게 해 주기 위함이니 공주의 집에 떼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0일 을해

상이 손가락이 붓고 아픈 증상 때문에 연일 뜸을 떴다.

 

1월 11일 병자

나주(羅州) 지역에 긴 무지개가 나타났다.

 

1월 15일 경진

심재(沈梓)를 도승지로, 이혜(李嵆)를 대사간으로, 윤형성(尹衡聖)을 사간으로, 조사석(趙師錫)을 교리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참의로, 김우형(金宇亨)을 호조 참판으로, 윤지선(尹趾善)을 헌납으로, 권도경(權道經)을 경상 좌병사로, 양우급(梁禹及)을 좌수사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범한 죄가 이미 중한 만큼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머금은 채 죽어야 마땅하나 성상께서 일단 성심을 펼치시어 미천한 신을 깨우쳐 주셨고 보면 신이 어떻게 감히 시종일관 침묵만 지킴으로써 우리 성상의 덕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보건대, 구릉(舊陵)의 변고는 경자년부터 유래하는데, 그때부터 14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단지 하자만 보수해 왔던 것은, 외면은 설혹 그와 같다 하더라도 내면의 석회는 절대 걱정할 것 없이 견고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석회의 효력에 대해서 논하여 말하기를 ‘세월이 흘러 굳어지면 금석(金石)처럼 된다.’고 하였는데, 대저 일단 금석처럼 굳어지면 벌어진 틈새로 새어 나오는 것이야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몇 자 정도 파들어가고 보니 그 견고하게 굳어진 것이 과연 주자가 말한 것과 같았는데도 오히려 그대로 공사를 진척시키며 중지하지 않고 성상에게 품달했었습니다. 그때 일을 맡았던 신하들의 생각에도 뭔가 분명히 잡히는 것이 있었겠습니다만, 신처럼 형편없는 자 역시 남의 말이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팔짱을 끼고 아무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었고 보면 신의 죄를 돌아보건대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어떤 말이든 일단 재궁(梓宮)에 언급되기만 하면 정신(廷臣)에게 견책을 내리시곤 하는데, 신은 이것이 성상의 보통을 뛰어넘는 효심에서 나와 엄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이 어디든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을 진정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 역시 감히 능을 헐 때의 상황을 바로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만, 일찍이 정자(程子)가 소릉(昭陵)에 대해 논한 소를 보건대, ‘인종(仁宗)의 유골과 성체(聖體)가 큰 돌 밑에서 부서지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정자는 대현(大賢)이니 군부를 엄하고 공경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어찌 신자(臣子)된 자의 절박한 심정에서 차마 직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가 진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신도 당시의 절박했던 심정으로 대략 한 두 가지 일을 진달드리면서 전에 올린 소에서 자신도 모르게 피해야 할 일을 범한 실상을 토로할까 합니다.
대개 9월 29일에 신은 종적이 불안해서 처음 공사할 때 감히 들어가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날 저녁에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성상의 뜻을 전유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에 능 앞에 이르러 총호사 김수흥(金壽興)에게 급히 묻기를 ‘어제 처음 공사했을 때 흙 색깔이 어떠하던가?’ 하니, 수흥이 말하기를, ‘상하석(裳下石)의 벌어진 두 틈새로 물이 샌 흔적이 있었는데, 한 자 정도 파들어 가니 건조하고 견고했다.’ 하였습니다. 신이 마침내 들어가 살펴보니 한창 퇴광(退壙)을 허는 중이라서 김같은 기운이 나오는 것만 보였는데, 뒤에 퇴광을 철거하고 나서 다시 역부(役夫)를 불러 물으니, 현궁(玄宮)을 향해 공사를 시작할 때 보니 사용했던 석회가 그렇게 딱딱할 수 없이 굳어져서 도끼와 자귀로 칠 때에 불꽃이 튀는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당하여 신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면서 놀랍고 아픈 것이 실제로 도끼와 자귀로 신의 가슴과 배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때 가령 전하께서 친림하셨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지휘하셨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위에서 진달드린 구릉의 일을 다시 한번 굽어 살펴 주소서. 그리고 만약 다시 패려스럽게도 무망(誣罔)한 죄를 범했다고 여겨지시거든 중하게 따지시어 국가의 형장(刑章)을 밝히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소를 들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1월 16일 신사

수찬 신익상이 ‘역사를 수정하는 일 때문에 개정할 때 일기(日記)를 수정하지 않은 주서는 서용하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셨다.’는 이유로 헌납 조사석, 장령 안후, 지평 신완이 모두 ‘일찍이 사변주서(事變注書)로 있을 때 일기 수정 작업을 끝내지 못했었다.’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이에 정언 유지발(柳之發)과 장령 서문상(徐文尙)이 ‘사변주서가 수정하는 것은 청(廳)의 주서가 수정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지발과 문상도 곧 이어 물의가 비난한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사석 등도 재차 인피하였다. 이에 정언 유담후와 집의 이동로(李東老)가 ‘출사를 청한 논이 안 될 것이 없다.’고 처치하며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사석 등이 소패(召牌)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채 또 인피하자, 담후와 동로도 인혐하였다. 이에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사석만은 이미 옥당에 옮겨 임명된 상태였다.

 

1월 17일 임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경평군(慶平君)의 녹봉을 3년 동안 그대로 지급하라."

 

신정(申晸)을 발탁하여 평안 감사로 삼고, 윤증(尹拯)을 집의로, 안후태(安後泰)·정유악(鄭維岳)을 장령으로, 유담후(柳譚厚)를 지평으로, 권해(權瑎)·박원도(朴元度)를 정언으로, 서문상(徐文尙)을 교리로, 윤진(尹搢)를 보덕으로, 정중휘(鄭重徽)를 수찬으로 삼았다. 중휘는 홍문록(弘文錄)에 참여한 지 몇 년만인 이제야 비로소 제수되었는데, 물의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월 18일 계미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상이 장차 여주(驪州)에 거둥하여 영릉(寧陵)을 참알하려 하여 마침내 예조로 하여금 2∼3월 사이에 날짜를 택하라고 하였는데,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능을 참배한 뒤에는 조종조의 고사에 따라 여주에서 보여야 하는 일을 일찍이 진달드렸습니다. 그런데 문과와 무과의 합격자 발표 날짜가 늦고 빠른 차이가 있으니 미리 품정(稟定)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종조(中宗朝) 때 여주에서 과거를 보일 당시의 절목(節目) 및 과거 응시자의 자격을 본주(本州)에 대해서만 허락했는지 아니면 도 전체를 허락했는지의 여부에 관해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을 상고해 내게 한 뒤에 품정토록 하라."
하였다.

 

1월 19일 갑신

헌납 윤지선(尹趾善)이 ‘계사에 동참하기 어려운 혐의가 예전과 다름이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월 21일 병술

상이 뜸을 떴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앞으로 능에 거둥하실 때 남한 산성을 숙소로 삼으셔야 하는데, 성 안에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사당이 있으니 제사를 올려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험천(險川)과 쌍령(雙嶺) 모두 병자 호란 때의 전쟁터이니 거가가 지나가실 때 역시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유사에게 이르라고 명하였다.

 

서문상(徐文尙)을 헌납으로, 유지선(尹趾善)을 부교리로, 이후항(李后沆)을 검열로, 조종저(趙宗著)를 문학으로, 이명익(李溟翼)을 사간으로, 신완(申琓)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22일 정해

정언 신완이 인피하기를,
"신이 헌부에 재직하고 있을 때 선재 어사(船材御史)를 파견하지 말라고 논계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에 품정하라는 분부를 인하여 잠정적으로 정지했다가 곧이어 인대하던 날 결정을 내린 바가 있었으므로, 신의 생각에 ‘처분이 일단 정해진 이상 꼭 고집부려 떠들 것은 없다.’고 여겨지기에 그대로 정계(停啓)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정계한 것을 물의가 비난한다고 하니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대간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고, 지평 유담후도 이 일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켰다.

 

1월 23일 무자

상이 뜸을 떴다.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약방 제조로서 입시하여 아뢰기를,
"앞으로 능에 거둥하실 때 대가(大駕)를 수행하는 군병의 숫자를 미리 정해놓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읍(畿邑)의 군병을 이런 농사철에 조발한다면 폐가 될 것이니, 단지 어영군과 훈국의 별대(別隊)로 대가를 수행하게 하되 금군(禁軍)의 숫자 역시 3백 50인을 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어공(御供)하는 찬물(饌物)도 미리 기읍에 나누어 정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에서는 단지 토산(土産)만 공상(供上)하되 열 가지 종류를 넘지 못하게 하고 선혜청에서 그 값을 따져 지급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가 김만중(金萬重)을 정배한 일, 이숙(李䎘)을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한 일, 이선(李選)을 삭탈 관작한 일, 민정중(閔鼎重)을 삭직한 일, 성호징(成虎徵)을 멀리 유배보낸 일 등을 환수하도록 해를 넘기면서 논계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자 이때에 이르러 정지하였다.

 

1월 24일 기축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 지화(地火) 현상이 발생했다. 연기가 땅 속에서 솟아오르고 땅과 암석이 모두 뜨거워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었는데 그 지역의 면적은 세로가 8척, 가로가 1척 남짓되었다.

 

1월 25일 경인

우의정 김수흥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전일 통제사의 임기를 일단 1년으로 개정했었는데 이는 실로 아랫사람을 보살피려는 상의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이완(李浣)의 말을 듣건대, 통영(統營)의 재력이 거의 고갈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합니다. 따라서 1년마다 교체할 경우 수습할 겨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임과 구임을 맞아들이고 전송할 때의 폐단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니, 그 가운데 질병이 우심한 자는 임기가 만료되지 않았어도 변통할 수 있도록 하되, 현재 통제사로 있는 노정(盧錠)의 경우는 1년의 기한이 이미 찼어도 아무 질병이 없다고 하니 잉임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뒤로 통제사의 임기는 2년으로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이최만(李最晩)을 나수(拿囚)하던 초기에 그대로 가두어두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라는 명이 계셨었습니다. 지금은 감독한 여러 신하들에 대해 이미 죄벌을 적용하였으니 이 사람에 대해서도 처분이 계셔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는 최만의 죄가 여러 사람들보다 중할 듯하기에 극변(極邊)에 유배보내려 했었는데, 구릉(舊陵)을 헌 뒤에야 비로소 석물(石物) 공사에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최만을 삭직하고 놓아 보내라."
하였다. 수흥이 또 정지화(鄭知和)와 이준구(李俊耉) 등을 서용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가 매우 참혹하게 재해를 입었으므로 전세의 반을 감하도록 명하였는데, 감사 남구만(南九萬)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1월 26일 신묘

김빈(金賓)·안후(安垕)를 정언으로, 조이병(趙爾炳)을 지평으로, 이합(李柙)을 형조 참의로, 이하진(李夏鎭)을 필선으로, 유담후(柳譚厚)를 사서로 삼았다.

 

1월 29일 갑오

금화(金化)의 품관(品官) 진계창(秦繼昌)의 집에 도적이 밤에 들어 와 계창을 해치려고 하자 그의 처 권씨(權氏)가 몸을 빼어 앞으로 곧장 나서서 남편의 몸을 막아 보호하고 대신 적의 칼날을 받는 바람에 계창이 끝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본도가 계문하자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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