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병신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홍처대(洪處大)를 병조 참판으로, 박세견(朴世堅)을 병조 참의로, 조가석(趙嘉錫)을 장령으로, 이하진(李夏鎭)·정재희(鄭載禧)를 수찬으로, 조근(趙根)을 부수찬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이조 좌랑으로, 정중휘(鄭重徽)를 필선으로, 나이준(羅以俊)을 보덕으로, 김석주(金錫胄)를 부응교로 삼고, 대사성 이단하(李端夏)를 부제학으로 삼으면서 그대로 대사성을 겸하게 하고, 특별히 신여철(申汝哲)을 제수하여 우윤으로 삼았다.
장령 안후태(安後泰)가 아뢰기를,
"형조의 죄인 전업실(田業實)에 대해 결안(結案)003) 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곧바로 효시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특별히 중하게 처단하여 뒷날을 경계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사형수는 결안한 뒤에 형을 집행하는 것이 본래 법례(法例)이니, 법에 따라 취초(取招)한 뒤에 처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결안 없이 처단한 전례가 있는데 안 될 것이 뭐가 있는가."
하였다.
처음에 김수흥이 상에게 아뢰기를,
"천릉(遷陵)할 당시 여사군(轝士軍)을 뽑아 낼 때 남부(南部)의 하리(下吏)가 뇌물을 받고 문란하게 처리했다는 설이 파다하기 때문에 이미 해조에게 조사토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엄격하고 분명하게 조사해내어 곧바로 효시하라."
하였다. 형조가 조사하여 업실이 개인적으로 방민(坊民)에게 은(銀) 7냥을 받은 실상을 밝혀냈는데 업실이 억울하다고 하면서 결안하는 초사(招辭)에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형조가 다시 엄히 형신하여 정상을 얻은 다음에 처단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품정한 대로 효시하라."
하였다. 형조가 율문(律文)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거듭 품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자, 후태가 마침내 이 논을 꺼내었던 것인데, 대간이 잇따라 쟁집하다가 6월에 이르러 비로소 정지하였고, 업실은 끝내 효시되고 말았다.
강원도 정선(旌善)의 대음강(大陰江)이 10리나 흐름이 끊겼다.
2월 9일 계묘
김석주(金錫胄)를 집의로, 이하진(李夏鎭)을 장령으로 삼았다. 석주가 ‘전에 전랑(銓郞)으로 재직할 때 김익렴(金益廉)을 의망했던 일로 유신(儒臣)에게 배척을 받았고, 또 바야흐로 영해(嶺海)의 일을 담당토록 명을 받은 상황에서 본부가 우선 떠나보내지 말라고 말하고 있어서 이 계사(啓辭)에 감히 간여치 못할 점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지평 조이병(趙爾炳)이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따랐다.
상이 쑥뜸으로 생긴 종창의 통증 때문에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김수흥이 나아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렇게 종창을 앓고 계시고, 또 듣건대 일로(一路)에 퍼진 천연두가 아직 말끔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이런 때 거둥하시는 것이 참으로 염려되기만 합니다. 영릉(寧陵)에 참배하시는 일을 가을로 물려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조금 물려 택일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바야흐로 선재 어사(船材御史)를 우선 떠나보내지 말도록 연계(連啓)하고 있는데 늘 윤허하지 않는다고 분부하고 계십니다. 대개 어사가 한번 갔다가 돌아오려면 4개월은 걸릴텐데 농사철이 점점 다가와 필시 민폐를 많이 끼칠 것이니 대관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을철로 날짜를 물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병술년 전세(田稅)를 모두 탕척토록 했는데, 충청도의 경우는 바치지 않은 양이 가장 많기 때문에 각읍에서 바치고 바치지 않은 양을 뽑아내어 다시 품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지금 듣건대 본도 각읍에서 바야흐로 독촉하며 징수하고 있는데 죽거나 도망을 가 받아낼 수 없는 자가 너무 많아서 재촉할 즈음에 민간에 소요가 일어나고 있다 합니다. 이러한 부류는 실제로 형세상 받아낼 길이 없으니 차라리 특별히 탕척해 주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영(嶺) 밑 11개 읍의 경술년 전세의 경우, 바치는 날짜를 물린 것은 원래 각읍이 태만해서 저지른 죄가 아닙니다. 영남이 몇 년 잇따라 흉년이 들었는데 영 밑 고을이 더욱 심하니 일체 탕척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은 호서에서 시간을 끌며 바치지 않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니 특별히 탕척하라. 호서의 도망가거나 죽어 받아 낼 수 없는 자도 모두 탕척해 주되 아직 바치지 않은 호서의 수령들은 조사한 뒤 경중에 따라 논죄토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신에게 소회가 있는데 비록 외설스러울 듯하기는 합니다만 국체(國體)와 관련이 있는 일인 만큼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부(士夫)가 상을 당한 친지의 집에 부의를 하는 것은 본디 명분이 있게 보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이 지난 겨울에 10세 된 아이의 상을 당했는데, 이것은 하상(下殤)의 상이니 어찌 물건을 부의하는 예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청 병사 박진한(朴振翰)은 군목(軍木)을 1동(同)이나 보내어 부의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아첨하는 뜻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면 필시 탐지해 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 정상이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으면 뒷날을 징계할 수가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율(律)을 상고하여 죄를 주게 하소서."
하였는데, 진한을 체포하여 금부에 내린 뒤, 소결(疎決)로 인하여 도배(徒配)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관향(管餉) 모곡(耗穀)을 바치는 일이 양서(兩西)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삼남(三南) 지방은 각영(各榮)의 모곡을 이미 변통해 주었는데, 유독 이곳의 관향곡만 감모(減耗)하라는 영이 없으니, 조정의 정령(政令)이 균등치 못하다 하겠습니다. 일체 삼남 지방 영곡(榮穀)의 예에 따라 감모해 줌으로써 서쪽 백성들이 받는 피해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2월 11일 을사
지평 조이병(趙爾炳)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능에 거둥하는 날짜를 물려 정할 일로 초안을 작성한 뒤 계사를 전달했더니, 정원이 말하기를 ‘이미 탑전에서 결정했으니 봉입(捧入)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정지하였는데 인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물의가 즉시 인피하지 않은 것을 비난한다고 하니, 체척을 명해 주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기를,
"당초 인피하지 않은 것이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데 다시 인혐하는 일을 하여 거꾸로 소요를 일으켰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정박(鄭樸), 고사리 첨사(高沙里僉使) 이박(李珀), 노량 권관(老梁權管) 이상호(李尙豪)가 월경(越境)한 자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로 모두 체포되었는데, 정박은 고신(告身)을 뺏고, 이박과 이상호는 장배(杖配)하였다.
2월 13일 정미
집의 김석주 등이 아뢰기를,
"신릉(新陵)에 거둥하실 때 미리부터 자주 열읍에 분부하여 연도에 설치하는 여러 기구를 혹시라도 너무 사치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도로의 제반 공사를 혹 지나치게 행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혹시라도 능력을 다투어 칭찬받으려고 백성들의 힘을 상하게 하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중하게 따지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군정(軍政)을 변통할 계책을 강구하게 하되 국내의 신역에 응해야 할 자들을 모두 먼저 본병(本兵)의 정원에 보충토록 한 뒤에 다른 역(役)에 미치게 함으로써 그 동안의 폐단을 제거해 민생을 보호하고 문란된 질서를 바로잡아 군정이 알차게 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밤에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2월 14일 무신
민암(閔黯)·이익태(李益泰)를 지평으로, 유상운(柳尙運)·조근(趙根)을 교리로, 서문상(徐文尙)을 부응교로, 이하진(李夏鎭)을 수찬으로, 이무(李堥)를 헌납으로, 정면(鄭勔)을 장령으로, 민종도(閔宗道)를 병조 참지로, 안여석(安如石)을 주서로, 이상경(李尙敬)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그리고 무신 강열(姜說)에게 가선 대부를 가자(加資)하였는데, 우상 김수흥이 경연에서 그의 청백함을 칭찬하며 우로(優老)의 은전을 베풀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뜸으로 생긴 종창 때문에 침을 맞았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능에 거둥할 날짜를 다시 택하라고 명하셨는데, 3월 20일 즈음은 농사철이 이미 박두해 있는 때이고 여주(驪州)와 이천(利川) 사이에 천연두가 한창 번지고 있으며, 게다가 상의 뜸뜬 자리의 종기가 완전히 아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니, 이때 거둥하시면 여러 가지로 불편할 것입니다. 효심을 억지로라도 누르시고 가을철로 날짜를 물려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8월 중의 날짜로 택하라."
하였다.
무주현(茂朱縣)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사목(事目)을 내려보내 장성 부사(長城府使)의 예에 따라 소속된 읍들을 절제(節制)토록 하였는데, 읍에 적상 산성(赤裳山城)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산(釜山) 왜관(倭館)에 불이 나 거의 모두 연소되었는데, 전례에 따라 포(布) 5동(同)과 쌀 1백 석을 지급토록 하였다.
2월 18일 임자
대사헌 남용익(南龍翼)과 집의 김석주(金錫胄) 등이 아뢰기를,
"호서(湖西)는 신축년 이래로 재해와 흉년이 잇따라 전결(田結)이 날로 축소되었고, 또 온정(溫井)에 다녀오신 이후로 봄 가을에 거두는 미곡을 혹 은전을 내려 감해 주기도 하고 혹 재변을 인하여 감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청(該廳)에 상납하는 양이 많이 삭감되고 본도에 비축된 양 또한 점점 소모되었는데, 졸지에 다시 경술년과 신해년의 대홍수를 만나 내외가 결딴나면서 어떻게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 호서가 호조와 기청(畿廳)·진휼청·상평청에서 빌려 쓴 것을 계산해 보면 포목이 1천여 동(同), 미곡이 3만여 석, 은이 4천여 냥이나 되는데, 이 모두에 대해 증서대로 집행하여 갚을 때까지 끊임없이 거두어들이고 독촉해야 한다는 의논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나름대로 그 수량을 계산해 보건대, 지금 한 도 전체의 부세를 더하고 1년치 납세분을 모조리 집어 넣는다 하더라도 그 부채를 충당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입니다.
당초 진휼청이 각종 재물과 곡식을 모아들인 목적은 바로 이렇게 흉년이 들고 재해를 입은 지역을 구휼해 주기 위해서인데 지금 물건대로 계산하여 받아들이려 하다니 이는 실로 환란을 구제하고 혜택을 널리 펼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평청은 단지 모곡(耗穀)을 점점 증식시켜 격외로 쓰는 자본을 마련하려는 것일 뿐이니 여기서도 어찌 빌려준 것을 모조리 찾아내 가져가서야 되겠습니까. 양청(兩廳)으로 하여금 모두 즉시 호서에서 쓴 은과 미곡을 탕척해 주도록 하시고, 호조와 기청에서 빌려준 미곡과 포목도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경비를 짐작해서 반절을 감해 주거나 분수(分數)를 감해 주도록 함으로써 양법(良法)이 폐지되지 않게 하고 궁한 백성을 크게 위로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창덕궁(昌德宮) 안에 전각(殿閣)을 한창 수선하면서, 나무를 운반하고 돌을 끌어나르는 등 상당히 큰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야기하는 자 중에 어떤 이는 ‘비용이 내탕(內帑)에서 나오니 외부(外府)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공사도 고작 한 달 정도면 끝나니 백성을 괴롭히는 일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만, 아껴야 할 재물이라면 안의 재물과 밖의 재물이 뭐가 다를 것이며, 혹 제때에 하지 않는 일이라면 오래하고 잠깐하는 차이를 논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들이 일찍이 삼가 듣건대, 편전(便殿)의 터전이 기울어져서 개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런 부득이한 경우 외에 간가(間架)를 더 늘려 짓는 등의 일은 모두 즉시 도로 중지시켜 검소한 덕을 밝히시고 운대한 계책을 생각하도록 하셔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공사를 일으킬 때는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전각을 수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래도록 병이 들다 보니 신료들을 늘 소합(小閤)에서 인접(引接)하곤 하였는데 자전(慈殿)이 계신 방과 겨우 벽 하나 사이여서 마음에 항상 미안했다. 단지 가끔만 가는 곳이라서 실제로 변통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저쪽을 철거해 이쪽에 세우려고 8칸짜리 집 공사를 일단 거행했다. 이밖에 어찌 더 짓는 일이 있겠는가. 이것이 부득이하게 나온 일이긴 하나 지금 계사를 보니 마음이 몹시 미안하다."
하였다.
홍문관 부교리 윤지선(尹趾善)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모든 관료가 나태하여 온갖 일을 좀스럽게만 처리하고 구차하게 안일함만 추구하는 것이 마치 물이 더욱 하류로 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전하의 이목(耳目)을 맡은 자로서는 본디 떨쳐 힘쓰게 할 방도를 다 강구해야 옳지 먼저 스스로 편할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간원의 많은 관원들이 무단히 인혐하고 들어가 한 사람도 행공(行公)하는 자가 없으니, 신들은 정말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무릇 사직하는 자가 비록 질병이 없다 하더라도 불편한 정세가 있으면 혹 단자(單子)나 소를 올릴 수 있으나 그때 형세가 부득이한 점이 있어야 그것을 보는 사람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신하들을 돌아보건대 피혐할 만한 일이 조금도 없는데 한결같이 정고(呈告)를 하며 며칠이 되도록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사체상 정말 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사간 이혜, 사간 이명익, 헌납 이무, 모두를 체차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합(李押)을 승지로, 이익상(李翊相)을 대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윤지선(尹趾善)을 헌납으로, 이항(李沆)을 정언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장령으로 삼았다.
자전(慈殿)이 설사로 고생하자 약방 제조 김만기(金萬基)가 의원들을 거느리고 입직하였다.
관학 유생 김만길(金萬吉) 등 2백여 인이 상소하여 송조(宋朝)의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동(李侗)과 본조(本朝)의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대들은 번거롭게 청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2월 21일 을묘
헌부의 계사에 따라 지금 이후로는 의관과 역관의 아비를 추증할 경우 육조·의금부·한성부·총관(摠管)의 직함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게 하였다.
자전의 환후가 악화되자, 약방 도제조 김수흥(金壽興) 역시 직숙(直宿)하면서 이어 아뢰기를,
"본원 의원들의 소견이 고루하니, 방외(方外)에서 의술로 이름난 창성군(昌城君) 이필(李泌), 집의 김석주(金錫胄), 장령 정유악(鄭維岳) 같은 이들을 모두 불러 와 약을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밤 2경에 상이 사현閤(思賢閤)으로 나아가니, 약방 도제조 김수흥 등과 창성군(昌城君) 이필, 집의 김석주, 장령 정유악이 입시하여 약을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자전의 맥박이 잠깐 멈추는 때가 있었는데 의녀(醫女)가 말하기를 ‘이런 증세가 앞으로 계속되면 반드시 걱정스러운 일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지금 맥박이 뛰었다 안 뛰었다 하는 것이 당초부터 좌관맥(左關脈)004) 에서 우관맥(右關脈)에 이르기까지 촌맥(寸脈)의 부위를 재거나 척맥(尺脈)의 부위를 재거나 모두 그러하다."
하니, 이필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곧 중기(中氣)가 크게 허해서 빚어진 결과입니다."
하였다.
2월 22일 병진
약방이 아뢰기를,
"의녀 정옥(正玉)이 몇 년 동안 계속 시약(侍藥)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맥후(脈候)를 확실하게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창성군(昌城君) 필은 곧 왕실의 지친으로서 밖의 조신과는 차이가 있으니, 그로 하여금 들어가 진찰하게 하여 맥후를 상세히 알도록 하면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약방이 내반원(內班院)에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기를 청하고, 창성군(昌城君) 이필과 집의 김석주 모두 궐내에서 직숙(直宿)하였다.
2월 23일 정사
자전의 병세가 갈수록 위독해져 백회혈(百會穴)에 뜸을 떴다. 상이 도제조에게 하교하기를,
"지금 자전의 병세가 변함없이 위독하니 절박한 심정상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해 보아야 마땅하다. 종묘 사직과 산천에 기도하는 일을 거행해야 하겠다."
하고, 마침내 중신들을 각처에 나누어 보내 다음날 새벽 제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신하들이 부음을 듣고는 제사도 미처 올리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김수흥이 또 경인년의 예에 따라 죄수를 보살피는 일을 행하여 경중을 막론하고 특별히 대대적인 은전을 베풀도록 청하니, 상이 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급히 불러 죄수를 관대히 처결토록 명하였는데, 이 일 역시 거행하지 못하였다.
밤 2경에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을 급히 대내(大內)로 불러 들였다.
2월 24일 무오
축시에 왕대비 장씨(張氏)가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전 참봉 장선(張楦)을 급히 대내로 불러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장선은 장선징(張善瀓)의 아들이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澄), 낙선군(樂善軍) 이숙(李潚),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이 궐외에 도착하자 궐문을 열고 들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양국(兩局) 대장에게 분부하여 궐문 밖에 머물며 지키게 하고, 호위 대장 김우명(金佑明)으로 하여금 군관을 거느리고 궐내에서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진(辰)·사(巳) 사이의 손시(巽時)005) 에 습의(襲儀)를 행하였다. 혼백함(魂魄函)과 교의(交椅)·명정기(銘旌機)를 제때에 배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해관을 나추(拿推)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상의 건강이 오래도록 좋지 않은 상태에서 뜸뜬 자리의 종기 역시 완전히 아물지 않았는데, 며칠동안 계속 시약하며 수라도 전혀 들지 않다가 갑자기 큰 슬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아랫사람들이 모두들 걱정하였다.
김수흥(金壽興)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구례(舊例)에 따르면 총호사는 좌상이 맡게 마련이었으나 이때 영상과 좌상의 자리가 모두 공석이었고 우상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를 수릉관(守陵官)으로,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을 대전관(代奠官)으로 조형(趙珩)·장선징(張善瀓)·민점(閔點)을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유연(柳㝚)·서문상(徐文尙)을 낭청으로, 조형(趙珩)·민유중(閔維重)·권대운(權大運)을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로, 정재희(鄭載禧)·이당규(李堂揆)를 낭청으로, 이정영(李正英)·민유중(閔維重)·김익경(金益炅)을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로, 이명익(李溟翼)·이무(李墅)를 낭청으로 삼았다. 조형과 김익경은 곧 이어 죄를 받았으므로 김만기(金萬基)와 정익(鄭榏)으로 대체하였다.
2월 25일 기미
묘시에 소렴(小斂)을 행하였다. 상이 우의정 김수흥에게 하교하기를,
"옥체가 보통 때에도 일반인과 달랐는데 더구나 약물을 많이 복용하셨음이겠는가. 봉심(奉審)한 사람들 모두가 점점 부기(浮氣)가 퍼지고 있다고들 하는데, 만약 예문(禮文)에 따라 3일 뒤에야 소렴을 행한다면 필시 의외의 걱정이 생기게 될 것이니, 변통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경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수흥이 대답하기를,
"기축년에 인조(仁祖)의 상을 당했을 때 선왕(先王)께서 하교하시기를 ‘부기가 점점 퍼지고 있으니, 오늘 소렴을 하지 않는다면 망극한 걱정이 있게 될까 두렵다.’ 하였는데, 신의 조부 상헌(尙憲)이 대답하기를 ‘이틀 만에 소렴하는 것이 예(禮)에 미안하기는 하나 일에는 정상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과 임기응변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 있는 만큼 융통성없이 하나만 고집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양사의 장관들도 그 말에 동의하였으므로 둘째 날에 소렴을 행하였습니다. 이미 선조(先朝)에서 행했던 예가 있는 만큼 변통해서 안 될 것은 없을 듯합니다만, 변례(變禮)와 관계된 일이니 예관으로 하여금 삼사의 장관들에게 문의한 뒤 다시 품하게 해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대사헌 남용익(南龍翼), 대사간 이익상(李翌相), 부제학 이단하(李端夏) 등이 말하기를,
"3일만에 소렴하도록 예전(禮典)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축년에 날짜를 앞당겨 행한 것은 마침 여름철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그것을 예로 원용할 수는 없다."
하였다. 이에 양사가 합계(合啓)하여 예전에 따라 셋째 날에 거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말 부득이한 일만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그 일에 대해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윽고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부기가 너무 부어 올랐으니 부득이 지금 소렴을 해야 하겠다."
하였다.
재궁(梓宮)을 조금 늦게 올렸다는 이유로 장생전 당상을 추고하고 색낭청은 나추(拿推)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재궁에 합당한 판자(板子)를 급히 찾으라고 대신과 장생전 제조에게 이미 말했다만, 정원도 이런 뜻을 알고서 반드시 오늘 밤 안으로 찾아 오라는 뜻으로 신칙하라."
하였다. 이에 외간에서는 모두 재궁이 너무 길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인가 하고 의심한 나머지 대신과 삼사가 번갈아가며 진계(陳啓)하여 장생전에서 올린 재궁을 그대로 쓰라고 청하였는데, 빈전 도감(殯殿都監)에 내린 분부를 보고서야 그 재궁의 넓이가 부족해서라는 것을 알고 이에 그 청을 정지하였다.
정원에 하교하기를,
"임신년006)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국휼(國恤)을 당하고 나서 13개월 뒤 신료를 인접했을 당시 상하의 복색을 상고해 내어 아뢰라."
하였는데,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상에 선묘(宣廟)께서 ‘왕후가 일찍이 조정에 임하여 청정(廳政)하였다.’는 이유로 신하들로 하여금 삼년상을 행하게 하려 하였는데, 대간이 예가 아니라고 쟁집하여 도로 성명(成命)을 중지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이 논 역시 분명히 의거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지금은 절목 가운데 불편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3개월 지난 뒤 일단 길복(吉服)을 입게 되면 신하들이 상에게 나아가 볼 때 도대체 어떤 복장을 착용하는지, 그리고 혼전(魂殿)에 제전(祭奠)을 드릴 때 크게는 상제(祥祭)·담제(譚祭)로부터 작게는 삭제(朔祭)·망제(望祭)에 이르기까지 또 무슨 복장으로 들어가 참여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절목이 상세히 기록되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금 모두 빠져 있습니다. 또 내명부(內命婦)의 복색 역시 명백하게 드러낸 곳이 없으니 본정과 예문을 참작해서 의주(儀註) 중에 첨가해 들이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모두에 대해 예관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2월 27일 신유
부제학 이단하(李端夏) 등이 상차하여 신하들이 성복(成服)할 때 고례(古禮)인 최질(衰絰)의 제도를 사용케 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대신이 차자를 올려 논하며 해조에 문의토록 했다 합니다. 모후(母后)의 상에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제도에 대해서 신들도 처음에는 의심했습니다만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고 나서 비로소 의심이 풀렸습니다.
《의례(儀禮)》 상복(喪服) 부장기장(不杖期章)을 보면 ‘임금의 어미와 처를 위해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을 위해 종복(從服)하는 것뿐으로서 본래 방상(方喪)007) 의 의리가 없기 때문에 기년복 정도로 그치는 것입니다. 또 《오례의(五禮儀)》 소주(小註)를 보건대 ‘내상(內喪)에는 자최(齊衰)로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왕비와 왕대비를 통칭해 말한 것이고, 그 아래에 또 ‘내상에 대해서는 앞에 나와 있다.’는 글이 있는데, 이것은 왕비만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상이라는 용어가 하나만 일컫는 것이 아니고 보면 양쪽 주석을 또한 서로 비교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례의》에 미비한 곳이 본래 많습니다만, 이 부분은 잘못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상에 선묘(宣廟)께서 신하들에게 삼년복을 입게 하려 하였는데, 그때의 양사(兩司) 장관들이 모두 해박한 유신(儒臣)으로서 예를 근거해 쟁집하자 선묘께서 즉시 윤허하셨으니, 여기서도 기년복이 의심할 나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례의》의 내명부복(內命婦服) 소주(小註)에 역시 ‘내상(內喪)엔 자최로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고, 그 아래에 또 ‘내상에 대해서는 앞에 나와 있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빈(嬪) 이하와 상궁(尙宮) 등의 직책을 통틀어 내명부라고 하는데, 그들의 복 역시 기년이 고작이고 보면 외조(外朝)의 신하들과 의리에 있어 차이가 없다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복제의 일은 형세상 성복하기 전에 주선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관학 유생 김진귀(金鎭龜) 등도 소를 진달하여 백관에게 최질로 성복할 것을 명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옥당의 차자에 내린 비답과 같은 내용으로 답하였다.
2월 28일 임술
대렴의(大斂儀)를 처음 행하고 나서 융복전(隆福殿)에 빈소를 설치하였다. 장생전의 재궁은 폭의 길이가 부족했기 때문에 영릉(寧陵)을 옮길 때 예비로 마련해 두었던 재궁을 사용했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복제 절목(服制節目) 가운데 대왕 대비전의 복제를 기년으로 마련하여 계하(啓下)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례(家禮)》의 복도(服圖) 및 시왕(時王)의 제도를 보건대, 자부(子婦)를 위해 입어주는 복에는 기년과 대공(大功)의 구별이 있는데, 기해년의 국휼(國恤)008) 때 대왕 대비전께서 이미 기년복을 입으셨었고 보면 이번의 복제는 대공이 되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황급한 나머지 제대로 자세히 살피지 못해 이렇게 경솔하고 정신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원래의 절목 중에 대공복으로 개정해서 부표(付標)해 들이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처음에 기해년 복제를 기년복으로 정할 때 여러 대신과 송시열(宋時烈) 등이 모두 국제(國制)를 인용하며 의논드렸는데, 시열의 뜻은 미상불 《의례(儀禮)》에 주석한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따른 사종설(四種說)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당초 장자부(長子婦)에게는 기년복을 입어준다는 국제에 따라 작정해 들이자 정신(廷臣)이 처음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박세당(朴世堂)이 그렇게 하면 시열의 의논과 크게 어긋나게 된다고 하면서 옥당에 글을 보내 중자부(衆子婦)의 복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하자 예조 판서 조형(趙珩) 등이 부리나케 대공복으로 개정해 들였는데, 이에 빈청(賓廳)에서 의계(議啓)하는 일이 있게 된 것이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왕 대비전의 복제가 과연 그러하다면 어째서 이제야 부표(付標)해 들인단 말인가?"
하니, 승지 정석(鄭晳)이 아뢰기를,
"예조에 물어 보았더니, 복제 단자(服制單子)가 계하(啓下)된 뒤에야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이제야 부표해 들여 지체시키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예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복제 문제 때문에 내일 성복(成服)을 미처 행하지 못할 염려가 있을 듯하다. 예조의 당상과 낭청 모두를 나문(拿問)해 처리하라."
하였다. 판서 조형(趙珩), 참판 김익경(金益炅), 참의 홍주국(洪柱國), 정랑 임이도(任以道) 전원이 금부에 넘겨졌다.
정원이 성복할 때 예판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구전(口傳)으로 차출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 구전으로 차출하는 것은 미안하다."
하고,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명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겸해 살피게 하였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충주(忠州)에서 올라와 궐외에 도착해 궐외에서 성복(成服)하려 하다가 그대로 물러갔는데, 정원이 아뢰니, 상이 사관을 보내 ‘들어와 성복에 참여하라.’는 뜻을 전유하였다.
2월 29일 계해
진정(辰正)009) 에 의례(儀禮)대로 성복(成服)하였다.
양사가 아뢰기를,
"여러 어의(御醫)들이 시약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해 보호하지 못한 죄를 법에 비추어 볼때 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나국하여 정죄(定罪)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런데 얼마 뒤에 대왕 대비전에게 환후가 있었으므로 그 중 죄가 가벼운 자를 우선 삭직시켜 백의(白衣)로 약을 의논하는데 동참케 하고 결말을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허적(許積)을 봉상시 도제조로 삼았다. 이때 태상(太常)010) 이 모여 대행(大行)의 시호를 의논해야 했는데, 허적이 성복한 뒤에 교외의 촌가(村家)에 나가 있었으므로 상이 사관을 보내어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유시하였다.
홍처량(洪處亮)을 예조 판서로, 이원정(李元禎)을 참판으로, 이혜(李嵆)를 참의로 삼았는데, 구전(口傳)으로 차출한 것이었다.
궐문의 파수와 여러 대장들의 직숙(直宿)을 파하였다.
2월 30일 갑자
대왕 대비와 중전 모두 옥후가 미령하였으므로 약방 도제조 김수흥을 명초(命招)하여 들어와 약을 의논케 하였다. 이때 수흥은 의관들이 붙잡혀 추고 당했기 때문에 감히 내국(內局)에 출사하지 못하고 있어서 이런 명이 있었다.
약방 도제조 김수흥, 제조 김만기(金萬基), 부제조 심재(沈梓) 및 창성군(昌城君) 이필(李泌), 집의 김석주(金錫胄), 장령 정유악(鄭維岳)이 모두 상소하여 여러 의관들과 똑같이 논죄하도록 청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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