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을축
우의정 김수흥이 총호사가 되어 내의원 도제조에서 체직되고, 허적이 대신하였다.
3월 2일 병인
대왕 대비 병세가 아직 정상 회복이 안 된데다 중전은 증세가 매우 위중하여, 약방 제조가 여러 의관을 거느리고 직숙(直宿)하면서 김석주(金錫胄)로 하여금 약방을 드나들며 약 조제하는 일에 동참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석주가, 자기 직책이 사헌부 관원이어서 다른 관리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사체로 보아 서로 구애되는 점이 없지 않다 하여 체직을 청하니 역시 따랐다.
이날 대행 대비의 시호를 의정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부름을 받고 궐문 밖에 이르니, 상이 승지 윤심(尹深)을 보내 명소패를 전해 주면서 이르기를,
"걱정거리가 이렇게도 많은 이때 망극한 슬픔을 당하고 보니 난처한 일들이 종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많은데, 우상은 지금 나가게 되어 있으니 산릉과 국사를 함께 의논할 사람이 없다. 경은 전일 불안했던 그 일로 하여 계속 겸양하지만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를 받으라."
하였다.
영의정 허적 등이 빈청에 모여 논의한 후 대행 대비 시호를 ‘인선(仁宣)’으로 올렸는데, 사랑을 베풀고 의리에 승복하는 것을 일러 인(仁), 성스럽고 착함이 널리 알려진 것을 일러 선(宣)이라는 뜻이다. 전호(殿號)는 ‘경사(敬思)’로 하였다.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을 궐내에서 직숙하도록 명했는데 중전 병세가 위중하기 때문이었다.
사은사 김수항 등이 통역관 김시징을 먼저 보내 청나라 사정에 관하여 장문하기를,
"오삼계(吳三桂)가 진촉(滇蜀)을 진수하다가 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사자(使者)를 잡아 묶어두고 군대를 일으켜 반기를 들었습니다. 삼계의 아들 응웅(應熊)은 일찍이 순치주(順治主)011) 의 매부가 되어 북경(北京)에서 벼슬하고 있었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궐내에다 가두어 두었다가 마침내 죽이고 말았으며 서산(西山)에서는 성씨가 주(朱)인 사람이 숭정(崇禎) 황제의 셋째 아들이라고 사칭하고 무리 1만여 명을 모아, 12월 23일을 기하여 북경성 안에다 불을 지르고 이어 난을 일으킬 것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주(淸主)는 팔왕(八王)의 손자 다하소홍왕(多夏所紅王)을 상장(上將)으로 삼아 군대 10만을 거느리고 삼계를 치게 했는데, 삼계는 섬서 제독(陝西提督) 왕보신(王輔臣)에게 밀서를 보내 함께 배반할 것을 권했으나 보신은 오히려 그 밀사를 잡아두고 연경(燕京)에 치주(馳奏)하였으므로 청주가 전지를 내려 찬양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3월 3일 정묘
각 도의 승군(僧軍)을 징발하도록 명하여, 경기가 50명, 충청도가 1백 50명, 황해·원양(原襄)012) ·평안·함경 등 도가 각 1백 명, 전라도와 경상도가 각각 8백 명을 징발하고 1개월 식량을 자체 준비하여 산릉 역사에 부역하게 하였다.
국장 도감 제조 민유중을 체임하고 김우형으로 대신하였다.
중전이 가슴이 답답하고 현기증이 나고 깜짝깜짝 놀라는 증세로 하여 백회혈(百會穴)에다 뜸을 떴다.
3월 4일 무진
구전(口傳)으로 이규령(李奎齡)을 호조 참의에, 유창(兪瑒)을 공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총호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작년에 능을 옮길 때 재신들의 아룀에 따라 구워 만든 지석(誌石)을 겸용하였었는데 두 가지를 겸용하는 것이 예문에 기록된 것은 아니나 혹자의 말에 의하면, 오래 가기로는 구워 만든 것이 더 오래 간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성상께서 결정하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돌에다 새긴 것으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작년에 능을 옮길 때 썼던 도구들이 새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많아 지금 그것을 그냥 써도 미안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도감(都監)의 단자(單子) 내에다 계하(啓下)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 5일 기사
유창을 고부사(告訃使)로 권해(權瑎)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내상(內喪)에는 고부한 예가 일찍이 없었는데, 상이 대신들과 상의하고 이들을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사은사 김수항, 부사 권우, 서장관 이우정이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3월 6일 경오
총호사 김수흥, 예조 판서 홍처량, 도감 당상 민유중이 새 능소의 재혈(裁穴)을 위하여 여주(驪州)로 갔는데 수흥이 전 목사 정창도, 전 정랑 신경윤 등과 함께 가게 해줄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상이 목이 잠기고 두통에 오한 증세가 있어, 대왕 대비가 언서(諺書)로 약방에 하교하기를,
"대전(大殿)이 근래 병환이 많고 기력도 그전만 못한 데다 불행히 망극한 슬픔을 당하여 그 애통 속에서 지탱해 나가기가 사실 어려운 형편이다. 더구나 평상시에도 소선(素膳)을 잘들지 못했는데 지금 며칠째 지내면서 점점 원기를 잃어가고 있어, 반찬을 갖추어 들게 하는 일이 일각이 급하다. 자전이 위독했을 때에도 소선을 잘 들지 못하는 대전을 못잊어서 이 몸에다 성궁(聖躬) 보호의 책임을 맡기면서 두 번 세 번 간곡히 부탁한 말들이 지금도 내 귀에 남아 있다. 지금 당장 권도를 따라야지 만약 조금 늦다가는 후일 끝없는 후회를 가져올 염려가 있고 또 자전이 부탁한 뜻을 저버릴까 걱정도 되어 이렇게 고유하는 것이니, 약방에서는 서둘러서, 권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아뢰라. 그러면 나도 당연히 극력 권유하겠다."
하였다.
3월 7일 신미
약방 도제조 허적이 상의 체후가 편찮았던 관계로 입진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허적 등이 합문 밖에 이르러 다시 청하자, 상이 이에 사현합(思賢閤) 여차(廬次)에서 인견하였고 허적 등이 들어가 엎드리니, 상이 통곡하였다. 한참 있다가 허적이 아뢰기를,
"상께서 묵은 병환이 점점 심해가는 속에서 이 망극한 슬픔을 당하였으니 민망스럽고 절박한 이 심정을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의관들이 연일 입시하였기 때문에 대체적인 증세는 들어 알고 있으나 의관들 말만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어서 신들이 두세 번 입진을 청했던 것인데 지금 이렇게 윤허하여 너무 감격하고 다행스럽습니다. 뵙기에 얼굴이 약간 부기가 있고, 눈도 전일만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오한 증세가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나은 것 같다."
하였다. 제조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망극하신 중이라서 자신은 대단한 것을 못 느끼는 것이지만 얼굴을 우러러 뵙기에 너무 새까맣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목이 잠긴 증상은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더했다 덜했다 종잡을 수가 없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들이 음성을 듣건대 목소리가 이토록 잠겼으니 이는 틀림없이 인후 질환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들은 침실로 입시할 뜻으로 아뢰었는데 지금 이렇게 최질(衰絰) 차림으로 인견하시니 그리하면 병 조섭에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의관으로 하여금 입진하게 하였다. 진찰을 마친 후 허적이 아뢰기를,
"신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아뢰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의관들 말을 들어보면 모두가 상의 위(胃)가 아주 나빠 그것이 무엇보다도 염려스러운 증세라고들 합니다. 어제 대왕 대비께서 언서로 약방에 하교하기를 ‘대전이 평상시에 하루도 소식을 못하기 때문에 자전이 위독한 상황 중에서도 그것을 못잊어 두 번 세 번 이 몸에다 부탁하였는데 지금 대전의 병환이 저러하니 만약 권도를 따르지 않고 더 더치기라도 하면 자전의 부탁을 저버릴까 걱정이다.’하였습니다. 신들은 그 글을 읽고 자신도 모르게 실성 통곡을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또 한참을 통곡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이 유교(遺敎)는 바로 전하께서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전하가 이걸 보시고도 깜짝 마음의 감동을 받아 그대로 따를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위로 종묘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신민들 여망에 따라 벅찬 감정을 애써 억제하시고 서둘러 권도를 따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지금 음식을 잘 하는데 경은 어찌 차마 그런한 말을 들려주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 참찬 장선징에게서 들은 말인데, 상께서 때로 매우 짠 음식을 드시면서도 그것이 짠지를 모르고 금방 상을 물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위가 상한 소치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평소 식성이 원래 짠 것을 좋아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강백년이 아뢰기를,
"옛분들도 몸을 망치고 죽고 하는 것을 불효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제왕은 그 효도 방법이 필부와도 다른 것이고, 또 자전의 유교까지 있는데 전하께서 이점을 염려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그 유교를 자주 들먹이면 성상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도 민망스럽고 절박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가 만약 윤허하지 않으면 신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합문에서 울부짖으면서 기어이 윤허를 얻고야 말 것인데 그리 하자면 많은 날짜가 걸리게 될 것이어서 그 더욱 민망할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다시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자신 기력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차마 그렇게 따르겠는가."
하였다. 허적·강백년이 부제조 심재와 함께 애써 청하였으나 상이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들이 감히 억지로 다그칠 수만은 없는 일이니 물러가서 다시 그 뜻으로 아뢰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자리를 나왔다.
약방이 다시 권도를 따를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은 다시 번거롭게 말라고 답하였다.
3월 8일 임신
영의정 허적이 문무관 2품 이상을 거느리고 빈청에 이르러, 빨리 권도를 따를 것을 청하였고, 정원·양사(兩司)·옥당(玉堂)이 뒤를 이어 계속 청했으며,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도 여러 종실을 거느리고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다가, 삼사(三司)가 복합(伏閤)하고 뭇 신하들이 정청(庭請)하기를 여러 날을 하고 대왕 대비도 간곡히 권유하자, 상이 마지 못해 그대로 따랐다.
3월 11일 을해
예조가 6월 3일에 발인하여 7일에 하관하기로 날짜를 골라서 아뢰었다.
3월 14일 무인
사헌부가 내상에 고부하는 일이 조종조에서는 없었던 일이라 하여 고부사를 보내지 말 것을 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비변사가 이미 평안도 감영에 분부하여 사신을 보낸다는 뜻을 먼저 봉성(鳳城)에 통보하도록 하였으므로 지금 와서는 더 논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그 전부터 국상 진향(進香) 때 제찬 그릇 수가 제한이 없기 때문에 궁가 및 각관아에서 서로 더 잘 차리려고 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깨끗하고 정중하지 못한 감이 있습니다. 듣는 바로는 작년에 능을 옮길 때 한 차례 제수 값이 몇 백금이 넘기도 하였다니 사체로 보아 매우 타당치 못한 일입니다. 바라건대 종친부(宗親府) 이하 내외의 각 관아 또는 여러 궁가로 하여금 모두가 정부에서 진향하는 의식과 똑같이 하고 너무 풍성하게 말도록 하여, ‘사치스러움보다는 차라리 검소하라.’하는 뜻을 따르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기해년 등록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3월 15일 기묘
이조 판서 이상진(李尙眞)이 인산(因山) 재혈에 있어 한 산 등성이에다 위 아래로 능을 쓰려고 한다 하여 소를 올려 강력히 말리면서,
"땅의 맥(脈)이라는 게 원래 한 줄로 되어 있어 위를 파버리면 그 아래는 맥이 끊기는 것입니다."
하고, 또 주자(朱子)가 자기 부모를 서로 1백 리나 떨어진 곳에다 따로따로 장사한 설을 인용하면서 별도의 다른 산 등성이에서 찾을 것을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하릉으로 하기로, 능을 옮길 때 이미 정한 것이어서 신자로서는 오늘 와서 가볍게 논의할 일이 결코 아닌데 경의 그 말이 자못 경솔한 감이 있다. 살펴보면, 합장(合葬) 제도를 주공(周公) 이후로 아직 고친 이가 없는데 한 등성이에다 상하릉으로 하면 바로 그것이 합장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진은 꼭 다른 산 등성이에서 찾으려고 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주자가 자기 어버이를 따로따로 장사한 것은 예가 변형된 것으로 사람마다 그것을 구실로 삼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파면 맥이 끊긴다는 말은 장사(葬師)라도 조금만 지식이 있는 자면 그런 말 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인데 하물며 사대부란 말인가. 신하가 임금 섬기는 도리가 따로 있는 것인데 왜 꼭 이렇게 하는가."
하였다.
상이 음식이 가슴에 적체된 증세로 하여 뜸치료를 받았다.
3월 16일 경진
상이 뜸치료를 받았다.
사헌부가 사신을 보내 고부하지 말 것을 연거푸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요즘 하는 일들이 내용은 없고 형식만 숭상하고 있어 자못 한심스럽다."
하니, 대사헌 남용익(南龍翼), 장령 정면(鄭勔)·정유악(鄭維岳), 지평 민암(閔黯)·이익태(李益泰) 등이 모두 인피하였다.
옥당의 처치로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는데, 이유는 재자관(齎咨官)이 이미 사신이 간다는 소식을 봉성에다 통보한 뒤여서 중지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도 헌부가 억지로 논했기 때문이었다.
사간원이 각 관아와 여러 궁가들 진향 문제를 들어 연거푸 아뢰고, 또 아뢰기를,
"여러 도감(都監)의 감조관(監造官)을 차출할 때, 매우 힘든 임무인 것도 따지지 않고 서로들 청한 자가 많아 한 관아에다 두 사람씩이나 혼동으로 채워 임명하였기 때문에 사무 처리에 있어 이쪽 저쪽 모두가 서로 구애를 받고 게다가 또 차례차례 군직(軍職)을 붙여준 자가 13명이나 되어, 하는 일이 전도되었다고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감조관으로서 군직이 붙여진 무리들은 그를 모두 갈아 임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라면서 어쩌면 그렇게 동인지 서인지도 알 수 없는 근거없는 맹랑한 말을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가. 감조관이 비록 하찮은 직책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용렬한 위인들로 구차하게 숫자만 채워서는 안 될 일인데 그대들이 꼭 갈아 임명하고 싶어하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하니, 이에 대사간 이익상, 사간 박세당, 헌납 윤지선, 정언 김빈·이항이 모두 인피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훈부(勳府)가 진향을 풍성하고 화사하게 한 것이 과연 그대들이 들은 바와 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 전례를 따른 것뿐이다. 그리고 여러 궁가가 진향한 것은 능을 옮길 때 날짜가 너무 촉박하여 세 공주가 합동으로 차렸는데 그들이 비록 시새워 하고 싶었더라도 되었겠는가. 내가 근거없는 맹랑한 말이라고 한 것이 그래서 한 말이다. 사직하지는 말라."
하여, 옥당이 처치하기를,
"궁가가 시샘했다는 말이 사실을 잘못 알고 한 말이 되었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3월 17일 신사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이 죽었다. 몽린은 원두표의 손자요 원만리(元萬里)의 아들이다.
호남 지방 7개 읍에 지진이 일어 소리가 벼락치는 것 같았고 집들이 흔들렸다.
3월 20일 갑신
상이 다리에 습창(濕瘡)으로 하여 침을 맞았다.
영의정 허적이 진정을 하고 체직을 빌어, 그를 허락하였다.
이때 시릉관(侍陵官) 김여건(金汝楗)이 중풍으로 병이 대단하여, 그를 개차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상이 대신에게 문의하였는데 허적이 처음에는 헌의하지 않다가 두 번째 물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대답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허적이 내의원 도제조로서 상이 침을 맞을 때 입시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상이 허적에게 처음에 헌의하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 허적이 답하기를,
"신이 올라올 때는 원래 공제(公除) 후에 곧 물러가려고 했던 것인데 뜻밖에 외람되이 약방 책임을 맡게 되었고, 불행히 또 상이 체후가 편찮으시고 중전까지 병세가 위중하여 감히 지레 돌아가지 못하고 오늘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국가 정사에 대해서야 신이 어찌 감히 대신으로 자처하여 간예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시골에 있으면서 언제나 죄를 지고 있는 사람으로 자처한다니 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선조조 구신들이 이미 다 죽고 없고, 지금 노성(老成)한 대신이라곤 오직 경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니 내가 경을 두고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비록 불안한 일이 있더라도 나라 일이 그렇고 내 병이 또 이러하니 경이 지금 물러가서는 결코 안 된다. 만약 재상직을 그대로 띠고 있고 싶지 않으면 우리 서로 믿는 사이에 그 정도를 들어주는 것은 어렵잖으니 그냥 원임(原任)으로 서울에 있으면서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 달라."
하고, 드디어 영상직 체면을 허락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세 곳 도감에서 써야할 각색 비단이 꽤 많은 수량이 필요한데 본조가 비축했던 것은 작년에 능을 옮길 때 다 써버려서 지금 현재는 시전에서 사오게 하고 있으나 그것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작년에 했던 대로 관향사가 비축하고 있는 30필을 평안 감사와 의주 부윤으로 하여금 정밀하게 골라 올려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1일 을유
허적을 영중추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심재(沈梓)를 대사간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집의로, 윤형성(尹衡聖)을 사간으로, 정중휘(鄭重徽)를 헌납으로, 강석구(姜碩耉)·조종저(趙宗著)를 정언으로, 안후(安垕)·조이병(趙爾炳)을 장령으로, 목내선(睦來善)을 형조 참의로, 윤지선(尹趾善)을 부교리로, 이원정(李元禎)을 도승지로, 홍만종(洪萬鐘)을 부수찬으로, 송최(宋最)·유담후(柳譚厚)를 지평으로, 정유악(鄭維岳)을 필선으로, 김석주(金錫胄)를 겸 보덕으로 삼았다. 장령 조이병은 대사헌 강백년과 구생(舊甥) 사이로 상피할 혐의가 있다 하여 인피하고 체직되었다.
3월 22일 병술
총호사 김수흥이 청대하여, 상이 사현합 여차에서 인견하고, 영부사 허적도 함께 입시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애책(哀冊)을 쓸 관원으로 함경 감사 남구만(南九萬)을 차출했었는데 이 시기에 바꾸는 것이 폐단이 있겠으니 구만을 가을까지 그대로 있게 하라."
하고, 곧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으로 대신하였다. 상이 두 상신에게 이르기를,
"발인을 너무 더울 때 하게 되어 대여 운반하는 군사들이 사상자가 많이 날 것인데 수로(水路)를 따라 행상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바깥에서도 수로가 편리할 것이라는 논의들이 많기 때문에 신이 허적과 상의하여 진달하려던 참이었는데 성상께서 먼저 물으시니 너무 다행입니다. 만약 수로로 가기로 하면 강물이 비록 불더라도 행상은 할 수 있을 것이고 편안하기로 사실 육로보다는 나을 것이나, 다만 육로로 가는 것이 정상의 길이지 수로는 정상의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물을 거슬러 올라 가자면 배들이 나란히 가기가 어려워서 의물(儀物)들이 서차를 잃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하기 어려워 그때문에 혹 불편을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여는 극히 무겁고 칸수는 너무 좁아 운반하는 군사들이 발을 마음대로 못 놀릴 것이니, 만약에 한 쪽에서 실족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 수 전체가 쓰러질 것이어서 틀림없이 사상자가 많이 날 것이다. 그 어찌 염려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요즈음 바깥 논의들은 혹은 육로를 주장하고 혹은 수로를 주장하여 매우 분분합니다. 신은 집이 상류에 있어 평소 수로를 잘 아는데, 만약 장맛비를 만나면 수로가 물론 낫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날이 가물어 물이 얕으면 여울 타기가 매우 어려워 육로만큼 편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수로는 여울을 파헤치고라도 배가 갈 수 있지만 만약 오랜 비로 교량이 다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육로의 낭패스럽기가 가물었을 때의 수로보다 갑절이나 더 한 점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수로 육로가 다 염려는 있는데 육로가 더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여 운반 군사에 대하여, 그 배를 해당 부로 하여금 계정하게 하고, 해조에서도 배를 새로 만들어 대기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예조가 무신년 국상 때의 전례대로 경기 감사와 개성 유수·강화 유수 이외의 각도 감사들은 직접 와서 진향하지 말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3월 23일 정해
대사간 심재가 헌납 정중휘, 정언 강석구에게 상회례(相會禮)를 청했는데 두 사람 다 복제(服制)로 인한 식가(式暇)를 이유로 끝까지 오지 않았다. 그 후 곧 대신들이 국상 졸곡(卒哭) 전에 복제 식가를 말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하여 연석 중에서 그들을 공척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정중휘·강석구가 다 인피하였는데, 심재가 처치로 그들 체직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4일 무자
이조 참판 이유태가 국상 소식을 듣고 올라와 도문 밖에서 글월을 올리고 직을 사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또 빨리 들어오라고 하였다.
3월 25일 기축
이준구(李俊耉)를 예조 참판으로, 정유악을 장령으로, 윤지선을 헌납으로, 신완(申琓)을 정언으로, 이우정(李宇鼎)을 문학으로, 이항(李沆)을 사서로, 김석주를 응교로, 신유(申瀏)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각각 삼았다.
경기 포보(砲保)의 건장한 자들을 훈련 도감으로 소속을 옮기고 별도의 부대로 8개 초(哨)를 편성하고는 조총을 관급(官給)하였는데, 대장 유혁연(柳赫然)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사관을 보내 지문(誌文) 찬술 문제로 판중추 송시열에게 가 유시하게 하였는데 시열은 병세가 날로 더하여 아침 저녁 죽기만 기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일에 올린 두 상소문에 대한 비답을 아직 다 받지 못하여 현재 대죄가 마감되지 아니한 상태이므로 사체로 보아서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상이 사현합 여차에서 뜸치료를 받고 이어 총호사 김수흥을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도감 당상과 함께 수로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수로 사정을 자세히 아는 자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광나루[廣津]에서 여주(驪州)까지 여울진 곳이 25군데인데 그 중의 양근(楊根) 여울이 제일 크고 험하고 두 바위 사이로 물길이 좁아 물살이 매우 세다는 것입니다. 빈 배를 가지고 먼저 시험을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겉 재궁(梓宮)을 싣고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지금 변경이 저렇게 시끄러워 인재 수습이 무엇보다 급선무인데 무신들 중에서도 성익(成釴)·이중신(李重信)같은 사람은 다 쓸 만한 인물들입니다. 한 때 잘못한 일로 하여 오래도록 죄적(罪籍)에 있는데 그들을 수용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하자,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비국의 제신들과 함께 상의하여 그들을 죽 써서 들여와 재처를 기다리기로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수흥이 아뢰기를,
"정주(定州)는 서로(西路)의 요충지인데 목사 김우석(金禹錫)이 이 시기에는 그 직임이 맞지 않고, 평안 감사 신정(申晸)의 말에 의하면 용강 현령(龍岡縣令) 임상원(任相元)도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 다 내직(內職)을 제수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이유는 당시 오삼계(吳三桂)가 남방에서 난을 일으켜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꽤나 시기하고 의심하는 눈치였고, 그리하여 서쪽 지대는 소요가 특히 심했기 때문에 김수흥의 말이 그러했던 것으로 무신(武臣)을 골라 보내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상도 그렇게 여겼다. 상이 이르기를,
"기년(期年) 이후의 백관들 배제(陪祭) 또는 진현(進見) 때의 복색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국기일(國忌日)에 날 거동이 있으면 백관들 모두가 천담복(淺淡服)을 입는데 그로 미루어 보면 군부가 상을 마치기 전에는 신자들이 길복(吉服) 차림으로 입시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배제 때도 당연히 천담복을 착용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년 후에는 공주는 길복을 착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순길복은 결코 입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오례의》에 ‘내상(內喪)이 앞에 있으면 전하는 천담복을 착용한다’한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 내용이 오늘의 일과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논거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배제 때는 곡읍(哭泣)의 절차가 있어 그냥 하는 입시와는 차이가 있으니 백포(白袍)를 착용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백포에 오모(烏帽)·각대(角帶)가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년 후의 백관들 배제 또는 진현 때의 복색과 공주가 착용할 복색을 예관으로 하여금 분부를 받아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6일 경인
상이 뜸치료를 받았다.
3월 27일 신묘
처음에 대사간 심재가 정언 조종저(趙宗著)와 대청(臺廳)에 모여 전번 아뢰었던 것을 정지하려면서 날이 저물어 내일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자리를 파하였는데, 종저가 그 후 곧 전일 지어 올렸던 문자가 체모를 잃었다 하여 도로 내주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히 태연이 있을 수 없어 즉시 사직 단자를 올렸다. 그런데 심재는 그것이 그가 핑계 삼으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는 헌납 정중휘, 정언 강석구에게 간통을 보내 종저를 체직으로 논하려고 하였다. 그 두 사람은 복제 식가를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가 곧 나와서 인피하였는데 심재가 처치로 그들을 체직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물의를 들으니, 심재가 당초에 혐의를 피하지 않고 곧바로 처치한 것은 규례에 어긋난 일이라고 하여 심재도 인피하고 종저도 인피하였던 바 헌부가 그들을 다 체직시킬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종저가 지제교(知製敎)로서 평안 감사 신정에 대한 교서를 찬술하면서 문장이 길기가 1백여 구절이나 되었고 상대를 찬미한 내용도 10여 구절이나 되어 【 시속에서 변려문 대구(對句)를 한 구절로 쳤음.】 상이 그 문장이 용잡할 뿐 아니라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 만하다고 하면서 도로 내주라고 하였던 것이다.
총호사 김수흥이 배를 타고 수로를 살펴보기 위하여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면서 좌부승지 윤심(尹深)이 수로를 익히 안다 하여 함께 가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8일 임진
김우형(金宇亨)을 대사간으로, 이익태(李益泰)를 정언으로, 안후태(安後泰)를 필선으로 삼고, 권대재(權大載)를 발탁하여 동래 부사로 삼았다.
지평 유담후(柳譚厚)가 동료와 서로 모이기로 약속했다가 가지 않고는 곧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3월 29일 계사
사간 윤형성(尹衡聖)이 부름을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총호사 김수흥이 안산 군수(安山郡守) 유명재(柳命才)가 미처 뱃길을 닦아놓지 않았다 하여 파출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그를 잡아들여 국문한 후 죄를 부과하도록 명하고, 경기 감사 이홍연(李弘淵)을 파직시켰다.
3월 30일 갑오
상이 뜸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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