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을미
상이 사현합 여차에 나아가 뜸치료를 받았다. 대사헌 강백년이 아뢰기를,
"신이 약방에서 봉직하고 있는 까닭에 사헌부의 조율 건이 근래 매우 적체되고 있습니다. 김만중도 당초 특별 추고를 하도록 한 것이 아직 대조 검사도 못하였는데 이미 정배를 하고 나서 뒤쫓아 조율한다면 곤란한 점이 있어 감히 이렇게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추고는 예사 추고가 아니니 그대로 조율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만중 사건에 관하여 신이 일찍이 아뢰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만중이 신을 헐뜯은 말이 신에게 딱들어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이 쓸 말이 못 되면 그대로 두면 그뿐이지 정배까지 한다면 어찌 성상의 덕화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만중이 병든 어미와 서로 떨어진다는 것도 정리로 보아 가엾은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중의 말이 매우 괴이했기 때문에 당초에는 멀리 정배를 하려고 했었다가 그 때 대신들의 아룀으로 인하여 가까운 곳으로 정배했던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용렬하나 그래도 일개 노신(老臣)입니다. 어찌 감히 마음에 없는 헛말을 올리겠습니까. 이는 사실 충정으로 한 말입니다. 만약 그가 은석(恩釋)을 입게 된다면 성상에 있어서도 과오를 금방 고치는 일이 되고 신의 마음도 조금은 편안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누누이 그렇게 말하니 경의 마음을 편케 하기 위하여 석방해야겠다."
하였다. 백년이 아뢰기를,
"만중이 석방되면 추고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본죄를 이미 용서받았으면 추고는 거론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조율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일 병신
상이 뜸치료를 받고 이어 침을 맞았다.
4월 3일 정유
간원이 아뢰기를,
"도감이 골회(骨灰)를 쓰기 위하여 백성들이 소 잡는 일을 허락했는데 신들은 이점에 대하여 너무 개탄스럽습니다. 지난해 우역(牛疫)이 지나간 후로 새끼 번식이 잘 되지 않고 있어 농업을 중히 여기는 방법으로서는 그를 엄금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할 것인데 도살을 허락해서 될 일입니까. 더구나 국상 때는 도살을 금하는 것이 법전에도 기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만약 골회를 구하기가 어려워 부득이 취한 조치였다면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그에 필요한 몇 마리의 소를 변통 못하고 곧바로 도살을 허가한다는 말입니까."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세 번을 아뢰자 답하기를,
"졸곡 때까지만 하고 정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 때 우의정 김수흥이 전례에 의하여 도사(屠肆) 열 곳을 허가해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간원이 이같은 논의를 한 것인데, 그 후로도 군기(軍器)를 만드는데 있어 소가죽과 힘줄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연석에서 아뢴 자가 있었기 때문에 상이 선뜻 듣지 않은 것이다.
총호사 김수흥이 수로를 살펴보고 여주로부터 돌아와 상이 인견하였는데, 영부사 허적, 좌부승지 윤심도 입시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상류의 여러 여울들은 별로 험난한 곳이 없는데 큰 여울 만은 비할 데 없이 위험하여 수로 행상의 논의를 쉽게 단정할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번 하교를 들었을 때, 성상께서 대여 운반 군사들이 넘어지는 폐단이 있을까를 염려하여 독자적 단안으로 수로를 택하자는 논의를 하였는데 신이 물러나와 그 말을 밖에서 하였더니 듣는 이들 모두가 성상의 덕화에 감탄하였습니다."
하고, 윤심이 아뢰기를,
"이 문제를 되도록 빨리 결정해야 도감에서 여러 일들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얼마 후 대행(大行)의 휘호를 의정할 때 수로의 편리 여부까지 싸잡아서 2품 이상이 통틀어 논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김수흥이 여주에서 돌아올 때 양주(楊州) 지경을 경유하였는데 목사 정시대(鄭始大)가 미처 나와 문후하지 못했다. 승지 윤심이 추고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잡아들여 추문하고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시대는 관직에 있으면서 꽤 청백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기리는 뜻이 있었다.
4월 4일 무술
김석주(金錫胄)를 사간으로, 김빈(金)을 지평으로, 심재(沈梓)를 경기 감사로, 이훤(李藼)을 부교리로, 이유(李濡)를 부수찬으로, 정중휘를 보덕으로 각각 삼았다.
대사간 김우형, 헌납 윤지선, 정언 이익태가 상차하여 물길로 상여를 운반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아뢰기를,
"대탄(大灘)의 형세는 큰 바위 하나가 강 가운데 가로질러 있어서 뱃길이 매우 비좁은데다 찬궁(欑宮)을 모실 배는 그 규격이 보통 배보다 커서 그 여울을 잘 올라갈 수 있을 것인지 기필할 수 없습니다. 육로를 택하면 가다가 비를 만나더라도 참(站)에서 쉬었다가 길바닥에 고인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려 조용히 길 단속을 해가며 가면 조금도 안 될 일이 없습니다. 험난한 길을 택하여 시험도 해볼 수 없는 곳에서 만일의 요행을 바라는 것에 비하면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형세도 살펴보지 않고 이렇게 망녕된 말들을 하는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4월 5일 기해
대신(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 정부 관각의 당상관, 육조의 참판 이상이 빈청에 모여 회의하고 대행 왕비 휘호를 경렬명헌(敬烈明獻) 【밤 낮으로 경계의 뜻을 가진 것을 경이라 하고, 덕(德)과 업(業)을 굳건히 지킨 것을 열이라고 하며, 사방에 조림한 것을 명이라 하고, 심원하고 명철한 것을 헌이라고 함.】 으로 올렸다. 처음에 뭇 신하들이 대행의 시호를 올렸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인조 임신년 인목 왕후(仁穆王后) 시호 논의 때, 선조조 경자년에 의인 왕후(懿仁王后) 시호 논의 때의 전례에 따라 시호만 올리고 휘호까지는 올리지 않았으므로 지금도 임신년 전례에 따라 시호만 올리고 4자 휘호는 장차 부묘(祔廟)때 의정하려고 했던 것인데, 신들이 다시 《정원일기》를 상고하였더니, 임신년 8월 10일 본조가 아뢴 내용에 ‘경자년에 시효만 올렸던 것은 내상(內喪)이 앞에 있었기 때문이지만 오늘 일은 그때와는 아주 다르므로 당연히 시호와 휘호를 함께 올려야 한다.‘하여, 휘호를 추상(追上)하여 다 함께 시책(諡冊) 시보(諡寶)에다 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조조에 이미 행한 전례가 있으니 그대로 거행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드디어 제신들로 하여금 휘호를 논의하여 올리게 하였다.
상이 사현합에 나아가 약방 제조 및 여러 의관으로 하여금 입진하게 하였는데 우의정 김수흥도 청대하고 입시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며칠 전, 권도를 따르시라는 청에 대하여 다행히도 따라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신들이 물러나와 서로 좋아하였었는데 그 후 자세히 들어보니 상께서는 오히려 반찬 등을 평상시대로 다시 들려고 하지 않아 비위가 허약하고 원기가 크게 손상되게 하였다고 하니 신하들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어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로 그런 일이 없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밖에서 듣는 내간의 일들이 모두 사실일 수는 없지마는 그것만은 분명히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왜 자신을 그렇게 가벼이 여기십니까?"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비록 시골 마을 필부라도 타고 난 기질이 강약의 차이가 있어 끝까지 집상(執喪)을 못하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더구나 제왕은 그 타고난 기질이 보통 사람들과는 만만 번이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애써 권도를 따르겠다고 하시고서 내용으로는 아직도 자미(滋味)를 들지 않으니, 집상하다가 죽는 것을 성인은 불효라고 했는데 혹시 너무 슬픈 중이라서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하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원래 자미를 들지 않을 생각에서가 아니라 모든 음식이 자연 들기가 싫기 때문에 그 중 몇 가지를 과연 퇴각한 일이 있는데 경들 말이 그러하니 애써 따르도록 하겠다."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오늘 빈청 모임에서 수로 발인의 편리 여부를 놓고 제신들과 논의하였더니 병조 참판 홍처대(洪處大), 공조 참판 민점(閔點)은 수로가 편리하다고 하고 그 나머지 제신들도 수로로 발인하는 것이 정상적인 길은 물론 아니지만 무덥고 비 올 때 육로로 가다가 낭패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수로가 낫다고 하고 있어 여론이 어떻다는 것은 알 만합니다. 반드시 분명한 하교가 있어야지만 그때 당해서 허둥대다가 잘못되는 염려가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발인 반곡(返哭)을 다 수로를 택하고, 서반(西班) 중에서 그리 긴요하지 아니한 군직(軍職)과 당하 종반(宗班)들은 모두 광나루 머리에서 뒤떨어졌다가 여주에 도착하여 하선할 때 다시 배종하도록 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배를 끌고 갈 군사를 골라 쓰는 문제를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배 끄는 일은 물 가에 사는 자들이 아니면 익숙하지 못할 것이니 경강(京江) 가에 사는 백성들 또는 양근·광나루 강 가의 백성들을 모두 골라 쓰고, 뒤에 별도의 견감 시켜 주는 일을 하여 그들 노고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지금 지석(誌石)을 강화도에서 가져와야 할 것인데 강화의 돌이 나는 곳에서 사대부 집들이 멋대로 캐 가버려 남아있는 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 후로는 본부에 분부하여 엄히 금단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를 옳게 여겼다.
상이 시강원(侍講院) 초기(草記)에 의하여, 재궁(梓宮)이 빈소에 있을 때에도 세자가 개강(開講)을 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물어왔다. 수흥이 아뢰기를,
"일찍이 기축년에도 그 일로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신의 조부인 상헌(尙憲)이 주장하기를 ‘그 일은 예율(禮律)에도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체로 보아서도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 조부의 논의에 대하여 어찌 의견을 달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이미 장성한 사람으로서 학업이 성숙되었으면 비록 때로 중지하더라도 크게 손실될 것이 없겠으나 만약 어린 시절이면 하루만 학업을 폐하여도 그 해가 매우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자가 현재 《논어(論語)》를 강독 중이라 하니 비록 이러한 시기일지라도 그를 송독(誦讀)시켜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만약 개강을 하는 것이 미안하다면 꼭 궁료(宮僚)를 소대할 것이 아니라 먼저 배웠던 것을 더 찾고 익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도 그렇게 하였으면 싶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자 연거복(燕居服)은 어떤 색으로 해야 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국상 중에는 사대부들의 연거복을 모두 베옷[布]으로 합니다마는 세자의 연거복도 아마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세자가 개강을 하자면 그 문제 역시 난처합니다. 신료들이 포모(布帽)에 마대(麻帶) 차림으로 서연에 입시하게 되면 세자도 당연히 최복(衰服) 차림으로 인접해야 할 것이니 최복 차림으로 강석을 개설하는 것이 어디 예문의 근본 취지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4월 6일 경자
대사간 김우형, 헌납 윤지선, 정언 이익태 등이 차자에 대한 비답이 미안하다 하여 서로 이어 인피하니, 상이 그것은 비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러는 것이라고 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도로 주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와서 두 번째 인피하여, 모두를 체직하였다.
4월 7일 신축
우의정 김수흥이 영악전(靈幄殿) 짓는 문제로 청대하고 입시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조 낭청(監造郞廳)을 골라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왕년에 능을 옮길 때 정유악(鄭維岳)의 사람됨됨을 보았는데 근간하고 일 할 줄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 비록 대직(臺職)을 맡고 있지만 변통의 방법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신정(新晸)의 말이, ‘본도의 범 잡는 아병(牙兵)을 그 수를 늘려 만 5천명으로 하고 싶은데 군기(軍器)와 약환(藥丸)이 부족하여 그것이 가장 염려이다.’라고 합니다. 장전(長箭) 2천 부(部)와 편전(片箭) 2천 부를 만들어 보내야 하겠고, 화약은 강화에 비축된 것으로 5천 근을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서(關西)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조련도 안 된 군대에다 또 군기까지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화약 5천 근도 부족할 것 같다."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김만중(金萬重)이 이미 은혜를 입어 사면되었으니 그와 한 때 죄를 입은 제신들도 죄명은 비록 각기 다를지라도 이렇게 인재가 부족할 때 그들의 죄를 탕척하고 거두어 써야 할 것입니다. 성호징(成虎徵)은 원래 정실도 없는 사건으로 하여 먼 곳으로 귀양살이까지 갔으니 그는 더욱 과중한 느낌입니다."
하자, 승지 윤심이 아뢰기를,
"호징은 일시적인 망발로 인하여 그 죄가 멀리 귀양살이 가기에 이르렀고 또 귀양간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근래 대관으로서 죄를 받은 자가 호징만큼 과중한 자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징을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8일 임인
정유악을 수로 도청(水路都廳)으로 삼아 물 가 두 곳의 영악전과 찬궁(欑宮)을 모실 배를 감조하게 하였다.
이익상(李翊相)을 대사간으로, 최문식(崔文湜)을 장령으로, 조이병(趙爾炳)을 정언으로, 김익경(金益炅)을 호조 참판으로, 김석주(金錫胄)를 부응교로, 이훤(李藼)을 이조 정랑으로, 김우석(金禹錫)을 원양 감사(原襄監司)로, 이무(李堥)를 사간으로, 윤지선(尹趾善)을 부교리로, 이하진(李夏鎭)을 헌납으로 각각 삼았는데, 이무는 현재 추함(推緘)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하진은 익상과 내외종 사이로서 상피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다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4월 10일 갑진
충청도 보령(保寧) 등 관내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54명이나 되어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게 하였다.
이 때 수로로 운상한다는 논의는 상이 마음으로 단안을 내린 것인데 바깥 논의들이 계속 시끌벅적하여 그 전에 수로가 편리하다고 말하던 자들도 이제는 불편하다고 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교리 이인환(李寅煥)·이훤, 응교 김석주 등이 서로 이어 소를 올리고 매우 강력히 쟁집하였으나, 상이 다 답하지 않았다.
이동로(李東老)를 사간으로, 홍만종(洪萬鐘)을 헌납으로, 조형(趙珩)·장선징(張善澂)을 좌우 참찬으로, 이수언(李秀彦)을 봉교로, 이하진(李夏鎭)을 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4월 14일 무신
발인 날짜를 다시 택일하여 5월 28일로 계하였는데 이유는 전에 택일한 날짜가 현궁(玄宮)을 내릴 날짜와 그 사이가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4월 16일 경술
고부사 유창(兪暢), 서장관 권해(權瑎)가 청나라에 갔다.
중전의 숙환인 괴증(塊症)이 갑자기 중하여 약방 제조가 여러 의관들과 숙직하면서 응교 김석주, 창성군(昌城君) 이필(李泌)을 궐내에 입직하게 할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7일 신해
총호사 김수흥이 예궐하여 청대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간에 인후(咽喉) 증세가 더 심하고 또 매우 피곤하기도 하여 인견을 못 하겠으니 품정(稟定)할 일이 있으면 내관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구전하게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지문(誌文)은 아직 찬술도 못하였고 애책문(哀冊文)·시책문(諡冊文)은 이미 찬술하여 올렸는데 그것도 아직까지 계하되지 않아 그를 새기자면 날짜가 부족할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문은 내가 병으로 하여 자성(慈聖)의 평일 행록(行錄)을 미처 써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더디게 만든 것이고, 애책문과 시책문은 지금 곧 계하하리라."
하였다.
4월 18일 임자
상이 침을 맞았다.
4월 19일 계축
중전의 가슴 막히는 증세가 갑자기 심하여, 부사직 정유악을 급히 부르도록 명하였는데, 정유악이 수로 도청으로서 현재 물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약방 제조가 응교 김석주를 입진하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을사년 전례대로 의약청(議藥廳)을 개설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약방이 정유악도 이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의약에 동참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악이 맡은 임무가 매우 긴한 임무다. 만약 시급한 일이면 나가서 감독을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의약도 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도 익산군(益山郡)에서 닭이 병아리를 깠는데 머리는 하나에 날개가 넷, 발이 네 개였다.
4월 21일 을묘
중전이 백회혈(百會穴)에 뜸치료를 받았다.
총호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발인 때 꼭 필요한 배가 150척이 소요되고, 배를 끌 군사는 3천 6백 90명이 필요합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그들 한 사람당 쌀 한 말씩을 주어 구량(口粮)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2일 병진
고 참찬 송준길(宋浚吉)의 손자 송병문(宋炳文)이 준길의 유소(遺疏)를 올려왔는데, 그 대략에,
"저으기 생각건대 전하께서 경연에 드물게 나가심으로 학문이 진전되지 않아 아래를 대하고 정사를 행함에 있어 오직 지계(智計)로 억측 결단하시는데, 설사 억측이 자주 적중되더라도 그게 이미 공자가 허여한 바 아니거늘 하물며 적중도 못하고 걸핏하면 사리에 어긋남이 많은 데이겠습니까. 자사(子思)가 이르기를, ‘숨어있는 곳보다 더 잘 보이는 데가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는 혼자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말이야말로 천고를 두고 성현(聖賢)들이 서로 전수한 지결(旨訣)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이상 두어 마디 말에 대하여 더욱 더 체험을 하시고 반드시 정성과 공경으로 일관하여 아침에도 그렇게 저녁에도 그렇게 하소서.
청명(淸明)한 기상이 몸에 있고, 지기(志氣)가 귀신과 같이 되면 당연히 해야 할 일과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모두 심목(心目) 사이에 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연에도 자연히 자주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학문에도 진작되도록 노력하지 아니할 수 없어, 모든 하는 일들이 마치 그물의 벼리를 들면 코들이 저절로 펴지는 것처럼 될 것이고, 옛날 받았던 천명이 이어질 것이며 새로운 경사가 다 이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오직 거친 마음 속된 생각으로, 게다가 편사(偏私)한 뜻과 당붕(黨朋)에 관한 의심까지 섞어 거기에서 현부(賢否)를 가리고 취사(取舍)를 정하려고 하면 아마 사(邪)와 정(正)이 더욱 뒤섞이고 조정이 더욱 어지럽게 되어 결국 멸망에 이르고야 말지 않을까 신은 그것이 염려인 것입니다. 아, 전하의 타고 난 바탕이 가석한 것입니다. 나라 일이 아직은 할 만합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마시고 자신을 업신여기지 말아, 자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불태웠던 선왕을 표본으로 하여 그를 계술(繼述)의 방법으로 삼으시면 그보다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오자 보류해두고 처리하지 않았다.
4월 23일 정사
상이 대행 대비 행록을 써서 정원에 내리니, 정원이 아뢰기를,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으로 실차(實差)는 바로 판중추 송시열(宋時烈)인데, 전일 사관이 전한 유지에 대한 그의 서계가 있었으나 아직 비답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행록이 이미 내려와 제술 문제가 매우 시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할까요?"
하니, 답하기를,
"예차(預差) 판부사 김수항(金壽恒)으로 하여금 제술하여 올리게 하라."
하였다.
4월 24일 무오
중전 환후가 조금 수월하여, 약방 제조의 숙직을 그만 하도록 명하였다.
경기도 고양(高陽) 등지에 연일 서리가 내려 곡식을 상하였다.
4월 25일 기미
박상형(朴相馨)을 장령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수흥이 상차하기를,
"삼공(三公) 인원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한 지 지금으로 몇 해인데 신 혼자서만 자리를 더럽히고 있어 심사가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더구나 지금 빈전(殯殿)의 찬궁을 열 때나 능에 복토(復土)할 때 삼공이 할 일이 각기 따로 있는데, 아직도 대상자를 물색하라는 명령이 없으니 신으로서는 참으로 민망스럽고 답답하여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한 번 고약한 병에 걸리고 나서 지금까지 5년이 되도록 한 해도 편할 날이 없다가 갑자기 종천(終天)의 슬픔을 당했는데 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것만도 참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바이다. 병이 이 모양이니 무슨 일을 해내겠는가. 말이 이에 미칠 때 나도 모르게 기가 막히는 것이다. 여쭈어야 할 일이 있거던 경이 들어와서 면품(面稟)으로 하라."
하였다.
4월 26일 경신
박세당(朴世堂)을 보덕으로, 윤지완(尹趾完)을 부수찬으로, 신여철(申汝哲)을 포도 대장으로, 김수흥을 영의정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좌의정으로, 이완(李浣)을 우의정으로 각각 삼았다. 무신(武臣)으로서 훈벌(勳伐)을 거치지 않고 삼공 지위에 이르기는 근세에 없었던 일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양맥(兩麥) 이삭이 나올 이 때 가뭄이 이렇게 심하니, 이 때는 모든 제사를 정폐한다는 제도가 비록 문서에 있기는 하지마는 달리 변통의 방법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기우제를 서둘러 설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가 대여 운반 군사를 뽑을 때 한성부(漢城府) 관리들이 많이 조종을 했다 하여 담당관을 추고할 것을 청했다가, 곧 듣기를 잘못 들은 것이라 하여,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집의 서문상(徐文尙), 장령 안후(安垕), 지평 송최(宋最)·김빈(金)이 서로 이어 인피하고, 장령 박상형도 마을 집을 빌려 들었던 까닭으로 자기 이름이 사계(査啓)에 올랐다 하여 역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처치로, 모두를 체차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4월 29일 계해
이무(李堥)를 집의로, 정면(鄭勔)·이우정(李宇鼎)을 장령으로, 이항(李沆)·강석구(姜碩耉)를 지평으로, 이수언(李秀彦)을 정언으로, 남용익(南容翼)을 대사헌으로, 윤형성(尹衡聖)을 사간으로, 홍주국(洪柱國)을 공조 참의로 각각 삼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28권, 현종 15년 1674년 6월 (0) | 2025.12.08 |
|---|---|
| 현종개수실록28권, 현종 15년 1674년 5월 (0) | 2025.12.08 |
| 현종개수실록28권, 현종 15년 1674년 3월 (0) | 2025.12.08 |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5년 1674년 2월 (0) | 2025.12.08 |
| 현종개수실록27권, 현종 15년 1674년 1월 (0) | 2025.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