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8권, 현종 15년 1674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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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갑오

상이 희정당(熙政堂) 앞뜰에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

 

지평 박원도(朴元度)가 길에서 사명(使命)을 만나 미처 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6월 2일 을미

중전도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6월 3일 병신

홍처량(洪處亮)을 대사헌으로, 이항(李沆)을 지평으로, 김석주(金錫胄)를 부응교로, 강백년(姜栢年)을 예조 판서로 각각 삼았다.

 

장단(長湍) 유생 정탁(鄭鐸)이 내간(內間)에서 대행 왕대비를 위하여 불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수륙재(水陸齋)라는 것을 송도(松都)의 화장사(華藏寺)에서 설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장의 소를 올려 잘못인 것을 극구 말하였다. 이에 삼사·정원이 번갈아 글월을 올려 그만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다가 연이어 사흘을 아뢰자 비로소 그 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정원이 파발말을 놓아 달려가서 정파의 명령을 전달하게 할 것을 청했는데, 막상 갔을 때는 수륙재가 이미 행해진 뒤였었다.

 

6월 4일 정유

신시에 인선 왕후(仁宣王后)를 영릉(寧陵)에 장사하였다. 상이 희정당 알뜰에서 망곡례를 행하였다.

 

시책문(諡冊文)은 이러하다.
"유세차(維歲次) 갑인년 5월 갑자삭(甲子朔) 26일, 애자(哀子) 사왕신(嗣王臣) 아무는 삼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올립니다. 저으기 생각건대 은혜 하늘 같아 끝이 없는데, 마지막 가시는 거창한 일을 다루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 때가 되었기에 옛 사실을 들어 시호를 올립니다. 이것이 어찌 제대로 논의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삼가 더위잡고 울부짖을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효숙(孝肅) 왕대비께서는 예법이 으뜸이시고 마음이 곧고 아름다운 법도를 지니셨습니다. 유상(儒相)013)  의 가르침을 받아 일찍부터 좋은 평판이 있었고, 성조(聖祖)014)  의 간택에 응하여 며느리 직분을 경건히 수행했습니다. 오랜 난리 생활에도 영고(寧考)를 잘 보좌하여 신명(神明)으로부터 말 없는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남의 나라 생활 9년에 모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태연하였고, 10년을 궁궐 속에서 곤위(坤位)에 계시면서 임금을 받드셨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경계의 마음을 간직하시고, 남모르는 덕화가 안에서나 밖에서 두루 퍼져갔습니다.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여 자손들에게 교훈을 남기시고, 효도의 마음을 다하여 대비전에 성의가 극진했습니다. 사랑이 인척 사이에 넘쳤으나 사사로운 길을 막는 데는 절연하셨고, 자녀 기르기에 은혜가 융숭했으나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는 데는 엄하셨습니다. 이 못난 사람이 외람되이 큰 기업을 지키는 데도 가르치심을 따라 허물이 적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서리 내리고 이슬 젖으면 슬퍼질 뿐, 이미 무덤에 계신 부왕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 산같이 오랜 수를 누려 궁궐 안에서 영원히 모시려 했더니, 어찌합니까 이 불초한 자식이 죄가 많아 갑자기 한도 끝도 없는 슬픔을 당했으니. 한 평생 어머님 얼굴 뵈올 수 없어 이제 다시 누구를 믿을 것이며, 낳고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 몸 항상 병을 안고 있어 얼마나 근심 걱정을 끼쳤으며, 연거푸 동기간을 잃은 슬픔이 아직 가시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어이하리까. 진유(眞遊)의 그 길을 뒤쫓아 갈 수도 없고, 아득히 유모(孺慕)를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옛 침소에서 옮기시자마자 지금까지도 마음 허전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고, 이어 새로이 봉(封)하려니 너무 촉박하여 의식을 갖출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장차 합묘(合廟)의 예절을 닦기 위하여 곧 역명(易名)의 절차부터 거행하려고, 여위(輿衛)가 이미 장식되었고 전책(典冊)도 다 갖추어졌기에, 삼가 신 의정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보내 책보(冊寶)를 받들고서 존호(尊號)를 ‘경렬명헌(敬烈明獻)’으로, 존시(尊諡)를 ‘인선(仁宣)’으로 올리오니 소소히 내려보시고 이 충정을 굽어 살피소서. 칭송이 여요(女堯)와 같아서 두 글자가 영원히 전해질 것이며, 경실(京室)에 경사가 면면하여 모든 복을 끝없이 내리우리다. 아, 슬프외다. 삼가 말하나이다." 【강백년(姜栢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82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013] 유상(儒相) : 자기 아버지인 장유(張維)를 말함.[註 014] 성조(聖祖) : 인조(仁祖)를 말함.

 

애책문(哀冊文)은 이러하다.
"유세차 갑인 2월 24일에 효숙 경렬명헌 인선 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가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훙서하여 그 해 6월 4일 경자에 영릉(寧陵)으로 옮겨 모시려고 하는데, 예에 의한 것이다. 찬침(攢寢)을 열고 조온(雕轀)이 출발하려고 희준(犧尊)을 이미 철거하고 신위(蜃衛)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으슥하고 먼 현궁(玄宮)을 지향하여 높고도 큰 자달(紫闥)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에 애자(哀子)인 주상전하께서 망극한 효심으로 아무리 유모(孺慕)하여도 소용이 없으며, 휘음(徽音)을 영원히 들을 수 없고 춘휘(春暉)가 갑자기 빛을 잃은 것을 슬퍼하여, 이에 후래 자손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성대한 덕을 추려 기록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 사(詞)를 이렇게 꾸민 것이다.
바야흐로 삼가 하늘을 받들고, 원숙하게 양도와 짝하셨소. 현숙했던 여인들을 상고해보면 그는 왕업을 일으킨 내조가 있었던 것으로, 전에서는 촉산(蜀山) 여인과 도산(塗山)의 여인015)  을 칭하였고 시경에서는 태임(太任)과 읍강(邑姜)을 읊조렸지요. 아! 소명하신 성모께서는 옛 분들에 비하여 더욱 빛이 있답니다. 증사(曾沙)016)  가 영기를 빛내고 무녀(堥女)별이 상서를 모아 법문(法門)에서 낳고 자랐으며 시와 예를 가정에서 익혔습니다. 이에 성상의 간택에 응하여 종저의 빈이 되시었지요. 의도는 옥같이 따스하고 덕성은 하늘이 주신 그대로였습니다. 평거 때는 도사(圖史)를 완상하시고 움직일 때는 법도를 따르셨지요. 바르게 행동하고 순종의 도를 지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셨습니다. 그 옛날 선왕께서 멀리 삭막(朔漠)에 가셨을 때 험난한 속에서도 형통하게 지내셔서 이국 사람들도 감복하였지만 서로 경계하여 그리 되기까지에는 사실 슬기로운 내조가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북지로부터 돌아오자마자 곧 이극(貳極)에 오르셨는데 더 조심스러운 효도와 공경으로 영예가 끝이 없었으며 대조(大朝)에도 사랑을 보여 기쁜 마음으로 가상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어 태양이 하늘에 빛나고 자리가 중전으로 올라서는 여자의 유순한 도리를 지켜 그로 내치(內治)를 베푸시고, 솔선수범으로 아래를 거느리면서, 단정하고 엄숙하고 정제하였으므로, 궁중이 숙목하였으며 사알이 자취를 감추었지요. 왕도 정치의 근본이 되는 아름다운 덕화가 심히 소소하여 연포(練袍)를 즐겨 입던 한(漢)나라 황후처럼 검소하였고, 닭고 울었다고 아침을 알린 제(齊)나라 왕비같이 부지런하셨지요. 뭇 백성을 어머니처럼 길러주시고 은택은 미세한 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십인의 난신(亂臣)과 똑같이 칭송하였고 주남(周南)·소남(召南) 같은 노래도 일었지요. 그러한 음교(陰敎)에 힘입어 화락한 풍토가 조성되었기에 십년 짧은 세월에 풍속이 달라지고 교화가 빨리 행해졌습니다.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동궁이 대업을 이은 후로는 궁궐 내에서 여생을 즐기게 하시고 큰 책에다 아름다움을 적었으며, 유쾌한 얼굴빛으로 안색을 대하시고 뜻을 받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성상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효도였고 자전으로서는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화기가 훈훈하게 감돌고 하늘은 과연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강릉(岡陵)처럼 오래 사시라는 축원을 온 세상이 다 함께 하였더니, 서운관이 재변을 알려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지요. 약을 쓰지 않아도 기쁜 소식이 있으리라는 기대에 내일이면 낫기를 바랐으며, 뭇 여망이 모두 다 그러하였고, 중죄수까지도 다 용서해주려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건만 어찌하여 그리도 빨리 재앙을 내려, 조금 후 성산(星算)이 영원한 끝을 맺고 운변(雲輧)이 금방 신선되어 올라가시다니, 이 세상 모든 것이 움직여 떨어지고 일월성신도 빛과 궤도를 잃은 듯합니다. 아, 슬프외다. 일인(一人)이 상중에 계시니 군생(群生)이 누굴 믿을 것입니까. 인자(仁者)는 수를 한다고 들었더니 귀신의 섭리란 역시 믿을 수가 없군요. 휘장을 촘촘히 드리우고 용의(容衣)를 길게 늘어놓았으며, 긴긴 밤을 거듭할수록 밝아지지 않으니 머나먼 진유(眞遊)의 길을 어이 그만두리까. 말 고삐를 상포(湘浦)에 드리우고 요수(瑤水)로 향하는 길을 더디 갈 수 있으리요. 옥난간에 기대어 꽃구경하시려고 풍진 세상을 헌신짝처럼 버리셨네. 아, 슬프외다. 좋은 날을 골라 흠의(廞儀)가 장차 떠나려고, 새벽에 자물쇠를 여니 벼슬아치들 구름처럼 모였네. 거둥 길에 슬픈 사연의 만장(輓章)이 섞여 있고 채색 깃발 사이로 흰 상여줄이 보이네. 태양도 빛을 잃어 어둡고 무더운 계절도 변하여 스산합니다. 도문(都門)을 나섰으나 발걸음이 더디고 원륙(原陸)을 가자면 산들이 높답니다. 저 구름 타고 가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니 어머니를 잃은 마음으로 영결을 고합니다. 아, 슬프외다. 저 황려(黃驪)를 바라보니 봉이 춤추고 용이 날고 있네요. 산천이 참으로 아름답고 풍기도 참 좋네요. 난수(灤水)의 새 무덤에 접하여 같은 산등성이에다 따스한 혈(穴)을 마련했습니다. 원묘(原廟)의 함께 제사 모시며 향기로운 서직(黍稷)을 올리오니, 신이 계신 듯하여 슬프지 않고 또 영양히 오르내리시는 듯도 합니다. 아, 슬프외다. 흐르는 시내는 멎지 않고 사마(駟馬)는 틈바구니를 금방 지나치듯이 생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 것은 밤과 낮 같다고 한답니다. 아, 현성(賢聖)이 함께 가시었으니 금석(金石)인들 그리 수하오리까. 후한 덕이 만물을 싣고 있듯이 백성들이 영구히 추모하오리다. 옛 사제장(思齊章) 뒤를 이어 함께 역사에 길이 전하리이다. 아, 슬프외다". 【김만기(金萬基)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82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015] 촉산(蜀山) 여인과 도산(塗山)의 여인 : 황제(黃帝)가 아들 창의(昌意)를 촉산씨(蜀山氏) 딸에게 장가보내 거기에서 아들 고양(高陽)을 낳고, 우(禹)는 도산씨(塗山氏) 딸에게 장가들어 계(啓)를 낳고 왕업을 이루었으므로 한 말임.[註 016] 증사(曾沙) : 춘추(春秋) 시대에 진(晋)의 땅인 사록(沙麓)이 까닭없이 무너져 내려서 진의 사관(史官)이 점을 쳐보고는, 앞으로 545년(일설에는 645년) 후에 그 곳에서 성녀(聖女)가 탄생할 것이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임. 《문선(文選)》.

 

지문(誌文)은 이러하다.
"인선 왕후가 예척(禮陟)하신 그 해 5월에 능소 천광 일을 마치고 나서 우리 전하가 쓴 행록(行錄)을 내려 주며 신 김수항(金壽恒)에게, 현궁(玄宮)에의 기록을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에 신이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 읽고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 지극하신 우리 성후(聖后)의 덕에 대하여 성상이 기록한 내용이 참으로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양하다 못했기에 감히 행록에 의거하여 차례차례 추려 적어 보기로 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면 왕후의 성은 장씨(張氏) 인데, 그의 선조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이가 원래 중국인으로서 원(元)나라 때 선무장군 진변 총관(宣武將軍鎭邊摠管) 자격으로 공주(公主)를 따라 동국에 왔다가 그대로 고려조에서 벼슬하여 여러번 승진 끝에 벼슬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고, 덕수현(德水縣) 채지(采地)로 받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그 곳을 관향으로 삼았던 것이다.
국조에 와서는 장핵(張翮)이라는 분이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하였고, 그로부터 4대를 내려와 장옥(張玉)이라는 이가 문장에 능하고 일찍이 대과 급제로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역임하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 분이 왕후의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장임중(張任重)인데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증조의 휘는 장일(張逸)인데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의 휘는 장운익(張雲翼)으로 형조 판서였는데 역시 장원 급제하여 일찍 현달하였다가 후에 보조 공신 영의정 덕수 부원군(補祚功臣領議政德水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휘가 장유(張維)이며 우의정에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었다. 인조(仁祖)의 지우를 받아 정사훈(靖社勳)에 책봉되고 문장 덕행으로 세상에 큰 이름을 남겼으며, 그의 배위는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였는데 역시 안동(安東)의 망족으로서 충신이며 우의정이요 시호가 문충공인 휘 김상용(金尙容)의 딸이어서 한때의 문제(門第)를 따지자면 갑을(甲乙)로 쳤다.
만력(萬曆)무오년017)   12월 경진일에 경기도 안산(安山) 시골집에서 후(后)는 탄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청숙하여 놀음놀이를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6세 때에 조모인 박부인(朴夫人)이 데려다 길렀다. 언젠가 조모를 따라 자기 계부(季父)가 있는 수원(水原) 아문에 갔었는데 때로 깜깜한 속에서 부모 생각이 나 훌쩍이다가도 조모가 알고 물으면 금방 눈물을 닦고 딴 대답을 하여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조모가 퍽 사랑했었다. 후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얼굴에 부스럼이 나 고민이었다. 혹자가 어린애 똥이 제일이라고 말하였는데, 김부인이 짐짓 손에 묻히기 싫어하는 듯이 하면서 후의 마음을 떠보았다. 후는 즉시 손으로 그것을 발라주면서 조금도 싫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아 문충공은 크게 기뻐하며 특이하게 여겼다. 그의 지극한 성품이 어려서부터 이러했다.
숭정(崇禎)경오년018) 효종이 봉림 대군(鳳林大君) 시절에 인조가 친히 배우자 간택을 했는데 후의 행동거지와 응대하는 것이 예사스럽지 않은 것을 보시고 매우 현숙하게 여겨 드디어 선발이 되고 신미년 가을에 가례(嘉禮)를 치르고는 풍안 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었다.
입궐(入闕) 후로는 밤낮으로 조심조심 하면서 효도와 공경을 다하여 인렬 왕후(仁烈王后)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4년을 지나고 궁중을 나와 사저에 있으면서도 가사 처리에 있어 질서 정연하고 아무리 사소한 집안 일이라도 혼자서 결정하는 일이 없었다. 인렬 왕후에게는 혼자 되어 궁하게 사는 언니가 있었는데 후는 갖은 마음을 써가며 그를 돌보았으며 병자년 겨울에 오랑캐 난리로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1월에 적병이 강을 건너 쳐들어왔을 때는 궁중이 온통 들끓어 너도 나도 울부짖으며 갈팡질팡이었으나 후 만은 조용하고 여유있게 언어 행동을 조금도 틀리게 하지 않아 주위 모두가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그 태도에 감복하였었다.
급기야 효종과 소현 세자가 심양(瀋陽) 볼모로 잡혀갔을 때 후도 따라가서 전후 9년 동안 온갖 험난을 다 겪었지만 처신에 있어 일정한 법도를 잃지 않았으므로 양궁(兩宮) 사이에 끝까지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 을유년에야 비로소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소현 세자가 죽자 효종이 인조의 명으로 세자 위에 오르게 되었고 후는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때부터 후는 더욱 더 자신을 억제하고 조심하면서 몸 단속을 예로써 하고 윗어른 섬기기를 정성으로 하여 색다른 음식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반드시 인조에게 먼저 바쳤다. 기축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후도 자연 중전의 자리를 지키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음교(陰敎)는 더욱 두드러져서 내직(內職) 처리와 빈어(嬪御) 통솔에 있어 온화하면서도 의젓하고 엄한 중에도 사랑이 섞여 거의 규목(樛木)·갈담(葛覃)019)   같은 풍화가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조심하고 유순한 태도를 지키면서 항상 말하기를 ‘여인으로서 스스로 잘난 체하면 국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문 것이다. 암닭이 새벽에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항상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기해년에 효종의 병이 위독하자 후는 하늘을 향하여 자기를 대신 데려가 달라고 호소하였고, 급기야 불휘(不諱)에 이르자 예에 지나치도록 통곡과 몸부림을 하였다. 그러나 송종(送終) 절차에 있어서는 시신 목욕시키는 일 손톱 자르는 일에서부터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친히 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되도록 성신(誠信)을 다하였고, 그 후 기미일 졸곡(卒哭) 때까지 미음만 마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전하가 울면서 음식을 드시도록 청하자, 후는 이르기를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이 사실은 과한 일이지만 살기 위하여 억지로 밥을 먹는 일도 나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하였다.
우리 전하가 왕위를 이어받고는 후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로 모시고, 신축년에는 휘를 효숙(孝肅)으로 올렸는데, 그 책보(冊寶)를 올릴 때 후가 그 자리에 직접 나오려고 하지 않아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굳이 청하니, 후께서도 효종이 평일에 하시던 말을 생각하여 울면서 허락은 하였으나 그 예를 거행하는 날 슬퍼하는 모습이 좌우를 다 슬프게 하였고, 하례(賀禮)에 있어서는 끝까지 받지 않으셨다.
언제나 천재 인변을 만나면 걱정과 두려워하는 빛을 얼굴에 보이면서 우리 전하를 타이르기를 ‘내 마음도 이러한데 네가 소홀히 해서 될 일인가.’ 하면서 경계하는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후가 기축년의 큰 슬픔을 당한 후로 너무 몸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 병이 되어 그것이 드디어 고질화하였으므로 호서(湖西)의 온양(溫陽)을 자주 찾아 온천 목욕으로 다소의 효과를 보아오다가 갑인년 2월에 병이 갑자기 더하여 24일 무오에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훙서하였는데 그 때 춘추가 57세였다. 유사(有司)가 시법(諡法)에 의하여 논의하면서 ‘인(仁)을 베풀고 의(義)에 승복하는 것을 일러 인(仁), 성선(聖善)으로 두루 알려져 있음을 일러 선(宣)이라 하여 시호를 인선(仁宣)으로 올리고, 또 휘호(徽號)를 더 올려 ‘경렬명헌(敬烈明獻)’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효종의 능에 무슨 사고가 있어 계축년 겨울에 능소를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에 자좌 오향(子坐午向)으로 된 산등성이로 옮겨모셨는데, 이때 와서 후의 생전 명령에 따라 6월 4일을 기하여 그 아래에다 부장(附葬)하였는 바, 같은 산줄기에 거리가 가까움을 취해서였다. 그리고 인하여 영릉(寧陵)이라고 칭하였다.
후는 타고난 성품이 원래 정숙한데다 법도 있는 가문의 교훈을 받았기에 몸가짐이나 말 한 마디도 모두 타의 모범이 될 만하였고, 그리하여 비록 병을 앓거나 혼자 사석에 있을 때라도 반드시 예에 의하여 행동을 취하였으며, 심지어 자녀를 대할 때라도 나태하거나 오만한 빛이라곤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친(私親)에 대하여는 비록 돌봐주기도 하고 돈목도 유지하였으나 그러나 옳지 못한 길로 은총을 요구하는 일 따위는 절대 허락치 않아 안과 밖이 절연하였다. 효종이 인평 대군(麟坪大君)에 대하여 우애가 돈독하였으므로 후도 그의 부인을 대할 때 모든 것을 지성으로 일관했고, 자의 대비(慈懿大妃)를 수십 년을 섬겼지만 사랑과 효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궁궐 안에 화기가 넘쳐 흘렀다. 후가 병이 있고부터서는 수시로 나아가 뵈올 수 없음을 한탄하여 늘 말하기를 ‘이렇게 살아 무엇할까.’ 하였으며, 병세가 극도로 위독했던 밤에도 정신이 이미 혼미한 상태였으나 대비가 내림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깜빡 정신을 차리고 빨리 앉을 자리를 마련하도록 재촉하고는 도란도란 하직을 고하면서 그 부드러운 목소리와 화기에 찬 얼굴빛은 다소곳하기 평일과 다를 바 없이 오히려 몸단장을 못하고 뵈옵는 것을 한하였다.
능소를 옮기던 날도 신거(蜃車)가 너무 무거워서 운반 군사가 깔려 죽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후는 얼굴빛이 달라지며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령도 틀림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불안해 하실 것이다.’ 하였고, 그 후 여시(女侍)가 능소로부터 돌아와 다친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알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빛을 보이었다. 이번 발인 때 육로를 두고 뱃길을 택한 것도 사실은 후의 유의(遺意)를 참작해서였다고 한다.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비록 막바지 산골 마을에서도 마치 자기들 부모를 잃은 듯이 두고두고 잊지 못하더니, 지금 후가 훙서했을 때도 백성들이 달려와 울부짖고 사모하는 것이 그때와 똑같았다. 아, 그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럴 것인가.
후가 1남 5녀를 낳아 길렀는데 우리 전하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를 삼았고, 다섯 공주(公主) 중 맏이는 숙안 공주(淑安公主)로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下嫁)하고, 그 다음은 숙명 공주(淑明公主)로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하가하고, 다음이 숙휘 공주(淑徽公主)로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에게 하가하고, 다음은 숙정 공주(淑靜公主)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하가하고, 다음은 숙경 공주(淑敬公主)로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에게 하가하였는데 숙정·숙경은 다 먼저 죽었다.
우리 전하는 1남 3녀를 탄생하였는데 세자는 휘가 아무로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딸을 맞아들여 빈(嬪)을 삼았고, 딸은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명안 공주(明安公主)인데 명선·명혜는 다 성인이 되기 전에 요사하였다. 그리고 홍득기는 1남, 심익현은 2남, 정제현은 1남, 정재륜은 1남 1녀, 원몽린은 1녀를 각각 두었다.
아, 우리 영고(寧考)의 성대한 덕과 웅대한 규모는 백왕(百王)을 능가하고 있지만 그 삼가하고 노력하고 분발하여 대의(大義)를 천하에 소명했던 것은 오직 후의 내조의 공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며, 우리 성상께서도 인자한 마음과 그 소문이 사람들 뼈에까지 스며들어 나라 안 미세한 생물들까지도 모두 우로(雨露)의 은택 속에 젖어 있지만 그 역시 후가 어머니로서의 감싸주신 교화를 받았기 때문으로, 그 넓고도 후한 덕이 높이 건원(乾元)과 짝을 하였으니, 그야말로 당연히 끝없는 복을 받으시고 강릉(岡陵)의 수를 영원히 누리셔야 했는데도 하늘이 돕지 않아 수한이 그렇게도 짧았으니, 아, 슬프외다. 오직 그 사람들 이목(耳目)에 소소히 남아 있는 휘음(徽音)과 의열(懿烈)에 대하여 그것을 아름다운 옥돌에 새겨 깊은 수도(隧道)에다 간직해둠으로써 장차 도신(塗莘)020)  과 함께 그 훌륭함이 만세를 두고 전해지리라. 아, 장도 하여라." 【김수항(金壽恒)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83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017] 무오년 : 1618 광해군 10년.[註 018] 경오년 : 1630 인조 8년.[註 019] 규목(樛木)·갈담(葛覃) : 《시경(詩經)》 주남(周南) 편의 장명(章名). 규목장은 후비(后妃)가 중첩(衆妾)에 대하여 질투하는 마음이 없이 좋은 뜻으로 대하는 덕을 노래한 것이고, 갈담장은 후비가 여자로서의 도리와 여인이 해야 할 일을 잘 함으로써 부도(婦道)의 표본이 되고 있음을 노래한 것임.[註 020] 도신(塗莘) : 도산(塗山)과 유신국(有莘國).

 

지평 이항(李沆)이 병으로 인하여 소명에 응하지 못하고 인피했다가 체직되었다.

 

6월 5일 무술

약방이 정상적인 상선(常膳)으로 다시 들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6일 기해

인선 왕후(仁宣王后) 반우(返虞) 행렬이 서울에 들어왔다. 진시(辰時)에 상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나가 신연(神輦)을 맞고 우주(虞主)를 경사전(敬思殿)에 봉안한 후 재우제(再虞祭)를 모셨는데 상이 초헌(初獻), 왕세자가 아헌(亞獻), 숭선군(崇善君) 이징(李瀓)이 종헌(終獻)을 하였다. 제례가 다 끝나기 전에 큰 비가 내려 종신(從臣)들은 의관이 비에 젖은 자가 많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제(大祭) 시각이 이미 임박하였는데도 모든 것을 정돈하지도 않은 채 지레 예를 행할 것을 청하였고, 혼전(魂殿) 가까이에서 떠드는 소리가 많이 났는데도 그것도 단속하지 않았으니 예조 판서 강백년(姜栢年)과 예방 승지(禮房承旨) 정석(鄭晳)을 둘 다 잡아들여 추고하라."
하여, 정원이 아뢰기를,
"강백년이 종백(宗伯)인 몸으로서 친전(親奠) 시각이 이미 임박했는데도 여러 집사(執事)들을 정돈시키지 못했고, 정석도 자기 자신 해방(該房)이었으면서 떠드는 무리들을 단속하지 못했으니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러나 시각이 차오가 생겼던 것은 다른 곡절이 있어서였습니다. 전정(殿庭) 내에는 바깥 신하들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다만 수복(守僕)들이, 내의(內儀)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여러 집사들 보고 천천히 진행하라고 했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일이 생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재신(宰臣)·근신(近臣)을 취리(就理)하게 하는 일이 체면으로 보아 꽤 중한 일인데 만약 그들 실정을 감안하지 않고 그대로 감죄(勘罪)를 한다면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흠결이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제향(祭享)은 중대한 일이고, 재신 문제는 오히려 경미한 일인데 본원이 그렇게 아뢰는 것은 자못 타당치 못한 일이다."
하였다. 얼마 후 옥당(玉堂)이 또 상차하기를,
"제사 모실 때 여러 집사들을 정돈하는 일은 원래 예조의 소임이 아닙니다. 친제(親祭) 때면 종백은 으레 찬례(贊禮)의 자격으로 모시고서 행례를 인도할 뿐인 것이고, 행례를 계청(啓請)하는 일은 바로 통례(通禮)가 하는 일인 것인데 지금 그 두 가지 잘못된 일을 백년의 죄로 또한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백년으로 말하면 나이 70이 넘어 법으로서도 응당 수금(囚禁)을 면제 받을 자가 아닙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제 의주(儀註)를 보고서, 행례를 계청하는 일이 찬례의 소임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았다."
하고, 이어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며칠 후에 영부사 허적(許積)이 들어와 상께 아뢰기를,
"행례 때 예방 승지가 주선을 잘못한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속을 잘못한 일은 그의 죄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집례(執禮)가 비록 지레 행례 창홀을 했다 하더라도 그 절목을 가지고 있는 예방 승지로서 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인가? 정석을 파직시키고 놓아보내라."
하였다. 이때 상의 각통(脚痛)이 더 심하여 삼우제(三虞祭)까지는 약방의 진청에 따라 대신 행하도록 허락하였고 사우(四虞)에 와서야 친히 행제하였다.

 

6월 7일 경자

약방이 다시 정상적 상선을 드시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8일 신축

박원도(朴元度)을 지평으로 삼았다.

 

처음에 화장사(華藏寺)에서 한 재공(齋供)이 오로지 만수전(萬壽殿)021)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지 상의 본의가 아니었는데도 양사와 정원이 쟁집하면서, ‘숭신(崇信)’이니, ‘존봉(尊奉)’이니 하는 어휘를 썼기 때문에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그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리하여 장령 안후태(安後泰), 대사간 이혜(李嵆), 헌납 이하진(李夏鎭), 정언 조이병(趙爾炳)이 모두 인피하고 심지어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고 두 번씩이나 인피하였으며, 집의 이동명(李東溟), 장령 성진병(成震丙), 사간 어진익(魚震翼), 정언 송최(宋最)는 발인 행렬을 뒤따라 갈 때 그들이 탄 배가 맨 뒤에 있어 영여(靈輿)가 능소에 도착했을 때 미처 배제(陪祭)를 못했다는 이유로 서로 이어 인피하였다. 그리고 대사헌 홍처량(洪處亮)도, 전후 추함(推緘)을 마감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죄과를 진달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면서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6월 10일 계묘

상이 친히 사우제(四虞祭)를 행하였다.

 

김익경(金益炅)을 대사헌으로, 이익상(李翊相)을 대사간으로, 이동명(李東溟)을 집의로, 정재희(鄭載禧)를 사간으로, 최문식(崔文湜)을 헌납으로, 남천한(南天漢)·안후(安垕)를 장령으로, 유담후(柳譚厚)·이우정(李宇鼎)을 정언으로, 이하진(李夏鎭)을 교리로, 정유악(鄭維岳)을 부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6월 11일 갑진

갑자기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선성(先聲)이 있어 서울이 발칵 뒤집히고 근거없는 말들이 들끓어 상이 즉시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영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북사(北使)가 오는 것을 혹자는 병력 요청을 위하여 온다 하고, 혹자는 부음(訃音)을 전하기 위함이라고도 하는데 어찌 되었건 인심들이 흉흉하여 그게 걱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병력이나 군량을 요청해오면 그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여, 김수흥이 아뢰기를,
"군대 징발을 요청해오면 따르지 않기가 어려운 일이나 많은 병력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고, 만약 군량 문제라면 그것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주씨(朱氏) 자손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과연 확실한 것이면 그는 입장이 더욱 난처한 일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이 지나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혹시 우리 주사(舟師)를 징용하여 정경(鄭經)을 치려는 것은 아닐까요?"
하자, 수흥이 아뢰기를,
"그들이 강을 건너와봐야 알 수 있지 미리 예측할 것이야 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부제학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신이 대사성(大司成)으로서 석전(釋奠) 제례에 참사했었는데, 《오례의》 도식에 의하면 대성(大聖) 그리고 네 분 배위(配位) 앞에 모두 예제(醴齊)·명수(明水) 등 그릇 여섯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섯 위패 앞에 다만 사기로 된 그릇 한 벌씩이 있을 뿐이어서 성묘(聖廟)의 제사 의식이 그렇게 결흠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금은 물력이 부족하여 놋쇠 그릇은 비록 갑자기 준비하기가 어려우나 사기 그릇이라도 여섯 벌씩 갖추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선왕(文宣王) 위패에는 우선 놋쇠 그릇 여섯 벌을 마련하고, 배위에다는 사기 그릇을 그대로 쓰다가 점차 놋쇠 그릇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의주 부윤이 치계하기를, ‘청나라 사신이 황후(皇后) 부음을 전할 일로 나오는데 12일에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고 하여, 권대운(權大運)을 원접사(遠接使)로 차출하여 보냈다.

 

전라도 여산(礪山) 등 4개 읍에 우박이 내려 곡식들이 많이 손상되었다.

 

6월 12일 을사

대사간 이익상이 추문을 당하고 그 사건이 마감되지 않았다 하여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사헌부가 전업실(田業實) 사건에 관하여 여러 달을 두고 계속 아뢰어 오다가 이제 와서야 비로소 정계하였는데 업실은 효시(梟示)를 당하였다.

 

6월 13일 병오

김석주(金錫胄)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객사(客使)가 온다는 말을 듣고 중외가 떠들썩하다는데 무단히 놀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그것은 우리 나라로서는 의심스럽고 염려되는 바 있기 때문에 끼리끼리 서로 소동을 피우는 것이겠으나, 고부사(告訃使) 유양(兪瑒)이 장선징에게 보낸 사서(私書)를 신이 보았는데, ‘황후는 5월 3일에 출상하였고 북경(北京)에 다른 놀랄 만한 일은 없다’고 되어 있고, 또 다른 문자 보내온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지금 여기서 떠도는 말은 섬에 있는 정(鄭)이 걱정거리라고 하면서 아울러 우리 나라까지 언급하고 있다’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국이 정경이 섬 속에 있는 것을 걱정거리로 여기면서 우리까지 의심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양 서한에는 또 이러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아역(衙譯)이 관(館)에 와서 말하기를 「운귀(雲貴)가 배반한 후 여러 진(鎭)과 각 성(省)에서는 모두 사신을 보내 위로의 뜻을 표하였는데 왜 당신 나라만은 그렇지 않았는가?」하여,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미처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우의정 이완(李浣)이 겸임하고 있는 수어사(守禦使) 직책을 사면한 상소가 현재 재가를 받고 비국에 내려가 있어 비국이 지금 회계를 해야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이완이 현재 실시하고 있는 일도 있고 하여 그대로 겸임하는 것이 무방하리라고 했더니, 이완이 신의 그 말을 듣고는 자기 자신 말하기를 ‘대신으로서 계속 그를 겸임한다는 것은 사체로 보아 부당하다.’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병세도 위중하고 하니 무슨 변통의 방법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체임시키라고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이완을 갈고 나면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세화(李世華)도 임기가 이미 찼는데 지금 만약 일시에 다 갈고 서투른 솜씨에다 맡겨놓으면 허술한 폐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세화가 치적이 매우 좋으니 금년에 한하여 그대로 유임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 정재희가 아뢰기를,
"산릉(山陵) 역사로 하여 양평(楊平)·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 백성들이 다른 곳과 달리 고생하였고, 지금 보리갈이 이미 지났는데도 아직 수확을 못하고 있다니, 이번 칙사 때 만은 참상(站上)의 부역을 견감하여 다소나마 그들 힘을 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신도 그 생각을 하고는 있었으나 객사 대우에 관하여 날짜가 이미 임박한데 지금 갑자기 다른 읍으로 옮겨 정하고 보면 군박(窘迫)한 일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어서 참상의 모든 일들이 모양이 아닐까 그게 걱정인 것입니다."
하였다. 재희가 아뢰기를,
"칙사가 들어올 때에는 미처 그렇게 못한다 하더라도 돌아갈 때에는 그렇게 주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4일 정미

의정부 우의정 이완이 죽었다. 이완이 임종에 입으로 불러 상소문을 꾸몄는데 그 내용은, 충언(忠言)을 애써 받아들일 것, 공도(公道)를 넓힐 것, 용병(冗兵)들을 태거할 것, 군사들 각종 신역(身役)을 견감하고 입작유민(入作流民)들에게서 벼를 징수하여 그것으로 수요를 충당할 것 등을 청한 것인데, 그 소를 올리지 못한 채 운명하여 그의 아들 인걸(仁傑)이 봉하여 올렸다. 상이 답하기를,
"올려 온 유소(遺疏)를 보니 복받치는 충성스런 마음에서 한 말들이 너무 절실하여 나라 위한 충심이 죽음에 임하여 더욱 독실했음을 감탄할 뿐이다. 아, 그 사람은 이미 갔는데 그의 말은 남아 있으니 이를 띠에다 써서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까보냐."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완은 계림 부원군(鷄林府院君) 수일(守一)의 아들로서 효종조 때 구인후(具仁垕) 대신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었는데, 계해022)   이후 훈척 아닌 사람을 훈련 대장에 기용한 것은 완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완은 성격이 강직하면서 편협하여 교장(驕將)이라는 평판이 꽤 있기는 하였으나 그가 훈국(訓局) 또는 추조(秋曹)에 있을 때나 경성 판윤이 되었을 때 모두 직책 수행을 원만히 한다는 칭언이 있었고, 세 번이나 서전(西銓) 제배를 받고서도 완강히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아 그의 사양에 대하여도 선비들 공론이 좋았으며 도하 군민(軍民)들은 더욱 그를 좋아하고 칭찬하였기 때문에 상도 그 여론에 따라 대배(大拜)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완이 죽고 유혁연(柳赫然)이 그 대신 훈국의 대장이 되어서는 거조가 뒤죽박죽이어서 점점 군으로부터 인심을 잃었고, 그리하여 결국 죄를 짓고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지금까지도 군졸들은 완을 그리워하여 마지 않는다고 한다.

 

6월 15일 무신

대사헌 김익경이 추함이 마감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6월 16일 기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영의정 김수흥, 좌의정 정지화, 영부사 허적을 인견하였다. 상이 원접사 장계를 수흥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황후 상에는 성복(成服) 절차가 예문에는 없지만 그렇다고 성복을 하지 않으면 저들이 틀림없이 노엽게 생각할 것일 뿐만 아니라 칙문(勅文)·자문(咨文)에 ‘효복을 입으라[穿孝]’하는 말까지 있기도 하여 그게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 같아서는 상복을 꼭 별도로 만들 것이 아니라 지금의 시사복(視事服)인 백포(白袍)·백모(白帽)로 대신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여, 상도 그렇게 여겼던 것이다. 상이 허적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졸곡(卒哭)이 지나기는 하였으나 영부사가 물러가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처지가 결코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입장이나 때마침 성상 체후가 편찮으시기 때문에 아직 머뭇거리고 있는데 매우 구차한 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비록 내려가더라도 내 어찌 경을 그냥 산지(散地)에 둬두려고 할 것인가. 경에게 만약 재상 직책을 제수한다면 재상은 오래 비울 수가 없는 직책인데 그리하면 경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천위(天威)를 지척에 두고는 신이 감히 제 심정을 다 아뢸 수가 없습니다. 물러가서 상소로 제 심정을 개진하겠습니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우상 이완이 삼조(三朝)를 섬겼던 노신(老臣)으로서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국가의 불행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 위한 정성이 이완만한 사람을 얻기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산릉(山陵) 일을 살피면서 건강을 해친 것이 그만 일어날 수 없게까지 되어 더욱 더 마음 아픈 것이다."
하였다.

 

6월 17일 경술

상이 친히 졸곡제(卒哭祭)를 경사전(敬思殿)에서 행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다.

 

예조 판서 강백년(姜栢年)이 상차하기를,
"엎드려 듣건대 자문(咨文) 내에 ‘곡림(哭臨)’, ‘천효(穿孝)’ 등 어구가 있다 하여, 거애(擧哀) 후 4일 만에 성복(成服)하기로 여쭈어 정하고 재가가 났다고 하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황후 상에 거애한다는 기록이 《오례의》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묘년에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거애했던 일도 그것이 예문에 없는 예였는데 오늘 와서는 계묘년에도 쓰지 않았던 예까지 쓴다는 것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묘당에 다시 물어 보다 선처의 방법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백년은 또 영상 김수흥, 호조 판서 민유중과 함께 청대하여, 성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면전에서 아뢰었다. 유중이 아뢰기를,
"오늘 칙사가 말을 전하기를 ‘당신나라 백관(百官)들이 옷차림을 바꾼 것은 내 이미 보았거니와 그 이후의 예절에 대하여도 내가 알고 가서 황제에게 보고했으면 좋겠다.’ 하여, 그 문제를 여쭈어보고 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신도 청대를 한 것입니다."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이왕 옷차림을 바꾸지 않을 바에는 지금 바꿔입은 복장 그대로 날 수만 정하여 27일 만에 벗으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수(日數)를 황제 상과 똑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13일 만에 벗으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좋겠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지난번 북경에 화재가 있었고, 뒤이어 오삼계(吳三桂)가 남방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위로의 뜻을 표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저들이 꽤 의심을 하고 있다가 고부사(告訃使)가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는 위로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온 것으로 알고 매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고부를 위하여 왔다고 듣고는 청주(淸主)도 매우 무료하게 여기더라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길에서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미처 위로의 뜻을 표하지 못했노라는 뜻으로 칙사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자기 자신 부음을 전하러 온 사신이기 때문에 잔치 대접을 받을 수 없다 하여 강을 건너온 후로 한 번도 영위연(迎慰宴)를 받지 않고 서울에 들어와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별도의 다담(茶啖) 및 별도의 자우(雌牛)는 으레 받아가지고 방에 들어가 나누어 먹었다.

 

지평 신완(申琓), 장령 안후(安垕)가 친제(親祭) 때 집사를 하면서 주선을 민첩하게 못했다 하여 인피하였다가 다 체직되었다.

 

6월 18일 신해

홍처량(洪處亮)을 대사헌으로, 남이성(南二星)을 대사간으로, 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강석구(姜碩耉)를 지평으로, 이우정(李宇鼎)을 문학으로, 신완(申琓)을 사서로, 송최(宋最)·이항(李沆)을 정언으로, 이훤(李藼)을 검상으로 각각 삼았다.

 

영의정 김수흥, 호조 판서 민유중이 청대하여 말하기를,
"진위사(陳慰使)를 차출하여 보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통역관을 시켜 칙사에게 탐문하게 하였더니, 칙사는 별로 가부간의 말이 없었는데, 대통관(大通官) 김덕생(金德生)이 하는 말이 ‘본국이 상국(上國)에 대하여 환난을 당하면 서로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 사신을 보내 위로의 뜻을 표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한 일이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국 사신이 북경에 갔을 때 약간 들은 말이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도청 도설로서 믿을 것이 못 되었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진위사를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칙사 행차로 인하여 그 사실을 자세히 들은 이상 어찌 감히 진위사를 보내지 않겠는가’라는 뜻으로 내용을 꾸며 다시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어제 정한, 13일 만에 제복(除服)한다는 설을 청사가 듣고서는, 매우 합당한 일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부사(副使)는 말하기를 ‘나도 글을 읽고 예를 아는 사람이지만 그 제도가 가장 알맞은 제도이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 화장사(華藏寺)에서 재(齋) 올린 일은 그것이 부시(婦寺)가 한 일이었지 전하가 그를 숭봉(崇奉)하는 뜻에서 하신 일은 물론 아니겠으나 그러나 삼사의 청이 있었을 때 전하께서 즉시 윤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책망까지 하셔 신으로서는 그를 저으기 애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이른바 숭봉이니 하는 말들이 극히 괴이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기기를 좋아하는데 내가 만약 여러 말을 해가며 기어이 변명을 하려 하면 나 역시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으니 그 문제는 그대로 둬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들은 말인데, 성종조 때 벽송정(碧松亭)  【성균관(成均館) 뒤에 있음.】 에다 신사(神祀)를 차린 일이 있어 반중(泮中)의 제생들이 그를 내쫓았으므로 성종께서 그들을 적발하여 죄로 다스리려고 하자 제생들은 모두 피해버리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때 이목(李穆) 혼자서 자수(自首)를 하여 성종은 그를 가상히 여기고 장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성종의 그 성대한 덕화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하지만, 지금 그 숭봉(崇奉)이라는 두 글자도 말을 꾸미는 과정에서 생각 없이 놓은 글자에 불과한 것이지 어찌 꼭 이기기 위하여 한 뜻이겠습니까."
하고, 유중도 아뢰기를,
"말이 비록 과격했더라도 상께서는 일단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뜻을 보여야 했습니다."
하였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 강학(講學) 문제는 하루가 급합니다. 지금 졸곡(卒哭)도 이미 지났으니 즉시 개연(開筵)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으나 지난번에는 성중에 많은 구기(拘忌)의 질환이 있었기 때문에 궁관(宮官)들도 반드시 재숙(齋宿)을 하고서야 입시할 수 있었고, 빈객(賓客)들도 그 때문에 진강(進講)을 중지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여염(閭閻)들이 깨끗해졌으니 전례대로 진강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윤허하였다.

 

6월 19일 임자

대사헌 홍처량, 정언 이항, 지평 강석구가 추함이 마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체직되었다.

 

영의정 김수흥이 청대하여 말하기를,
"북경 성내의 실화 사건은 통역관 무리들이 숨김없이 말하면서도 남방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답니다. 역관 무리들이 운남(雲南) 사건에 대하여 물으면서 ‘광덕(廣德)으로 개원(改元)한 것이 오삼계(吳三桂)가 자칭한 것인가, 아니면 누가 그를 추대한 것인가?’
하였더니, 과연 추대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대답하고, 정경(鄭經)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하더랍니다. 역관들이 전한 것은 대체로 같은 내용들인 모양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고부사가 말한, ‘섬 안의 정씨’ 운운한 말은 어디서 들었다는 것인가?"
하였다.

 

6월 20일 계축

사간 정재희(鄭載禧) 등이 아뢰기를,
"안동 영장(安東營將) 김부영(金阜榮)이 종반(宗班) 고 청평군(淸平君) 이전(李佺)과 친족 연분이 있다 하여 가까이 드나들었는데 급기야 전이 죽고 난 후에는 그의 첩과 간통을 하고 아예 데리고 살기까지 하면서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행검 없는 사람을 의관(衣冠)의 축에다 끼워둘 수 없는 일이니 그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1일 갑인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김빈(金賓)을 지평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정언으로, 이동로(李東老)를 필선으로, 이훤(李藼)을 사인으로 각각 삼았다.

 

영의정 김수흥이 청대하고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을 보내 위로를 표할 문제에 관하여 밖에서 상의해 보았는가?"
하여, 수흥이 대답하기를,
"허적과 상의하였더니, 그 역시 보내지 않을 수 없는 형세라고 말하면서 혹 그를 계기로 하여 병력 요청이 있을까를 걱정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만약 그러한 요청을 하려고 했으면 진위사는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6월 22일 을묘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영신군(靈愼君) 이형(李瀅)을 진위사로 삼고, 초천으로 정2품을 승서하였다.

 

6월 23일 병진

충청·전라·경상·강원 4개 도에 큰물이 져서 곡식을 손상하였다.

 

6월 25일 무오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이 병이 있어 소를 올리고 체직되었다.

 

6월 26일 기미

경상 감사 이관징(李觀徵)이 도내 기민(饑民)이 3만 8천 7백 20명인데, 하도(下道)는 5월 10일부터 진정(賑政)을 정지하였고, 상도(上道)는 20일에 정지했다는 뜻으로 계문하였다.

 

6월 29일 임술

김익경(金益炅)을 대사간으로, 조형(趙珩)을 예조 판서로, 이원정(李元禎)을 호조 참판으로, 이유(李濡)를 부교리로, 서문상(徐文尙)을 부응교로 각각 삼았다.

 

세 도감(都監)의 제신들에게 상을 내렸는데, 총호사(摠護使) 김수흥,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 김수항에게는 안장갖춘 말을 각각 하사하고, 식재궁관(拭梓宮官) 이완(李浣), 장생전 도제조(長生殿都提調) 허적에게는 각기 길들여진 말을 하사했으며, 지문 서사관(誌文書寫官) 심익현, 애책 제술관(哀冊製述官) 김만기, 애책 서사관(哀冊書寫官) 윤심(尹深), 시책 제술관(諡冊製述官) 강백년, 시책 명정 서사관(諡冊銘旌書寫官) 이정영(李正英), 보전 서사관(寶篆書寫官) 여성제(呂聖齊), 우주 제주 개명정 서사관(虞主題主改銘旌書寫官)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그리고 제조(提調) 권대운(權大運)·김우형(金宇亨)·홍처량(洪處亮)·장선징(張善瀓)·민점(閔點)·민유중(閔維重)·정익(鄭榏), 그리고 도청(都廳) 정재희(鄭載禧)·이당규(李堂揆)·서문상(徐文尙)·이명익(李溟翼)·이동로(李東老), 그리고 수로도청(水路都廳) 정유악(鄭維岳), 현궁 봉쇄관(玄宮封鎖官) 이동명(李東溟)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 관원·공장들에게도 혹은 벼슬을 승서하고, 혹은 말, 활, 쌀과 베를 각기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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