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8권, 현종 15년 1674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8. 13:33
반응형

7월 1일 계해

윤휴가 밀소(密疏)를 올렸는데 답하지 않았다.
윤휴는 얼신(孽臣)의 자식으로서 유자의 이름을 빌어 집에 있으면서도 불의를 자행하였고, 또 선유(先儒)의 학설을 공척하였다. 송시열 등도 처음에는 그에게 속아 추중 장허를 하였고, 민유중은 심지어 율곡(栗谷)이 다시 태어났다고까지 칭도하였는데 그 후 시열이 그의 마음 씀씀이에 의심이 가 그 길로 절교를 하였던 것이다. 급기야 기해년 예론(禮論)이 있은 후로는 사람들도 모두 그가 화심(禍心)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다 곁눈으로 보았으며 제명(除命)도 끊기고 말았는데, 그는 암암리에 이정(李禎)·이남(李柟) 두 형제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의 집이 이정·이남이 사는 곳과 멀지 않았기 때문에 밤이면 서로 찾아 그들 사이가 매우 비밀스러웠다.
언젠가는 정의 집 어귀에서 나졸들에게 체포되었다가 스스로 윤 장령(尹掌令)이라고 말하고 풀려난 적도 있었으며, 금상(今上) 초기에는 정을 위하여 모사를 꾸미고 양궁(兩宮)을 이간질하기 위하여 상에게 자전(慈殿)의 동정을 잘 살필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사람을 시켜 익명으로 상변(上變)을 하게 하고 자기는 밀소를 올려 자기와 의견을 달리 한 조정 신료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였는데 경신년에 이르러 대신(臺臣)이 그의 죄상을 논하였고, 상은 그에게 사사(賜死)를 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휴가 죽고 나자 그가 이정·이남과 역모를 꾀했던 일이 점점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오히려 그에게 정형(正刑)을 집행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갑인년023)  에 조정 논의가 크게 달라지고 있을 때 민정중이 숭릉(崇陵)024)  의 장사(匠事)를 감독하고 있으면서 저보(邸報)를 보고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윤희중(尹希仲)025)  이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근래에 비록 잘못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염치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어서 그가 이번에 틀림없이 나오지 않을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하여, 그 말을 듣고 웃지 않은 자가 없었다. 혹자는 이 일을 두고서, 소인(小人)에게 속임을 당한 군자(君子)가 옛날부터 얼마나 많은데 이번 일이 정중 등에게 흠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채경(蔡京)에게, 문정호공(文定胡公)이 진회(秦檜)에게 다 속임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그 당시는 이 두 사람의 악한 점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재주는 쓸 만한 점이 있었으므로 두 공(公)이 사람을 잘못 알아본 과실을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연하지만, 윤휴는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고 많은 불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을 김좌명(金佐明) 이하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여 말한 이가 많았고, 이일상(李一相)의 아우 이단상(李端相) 등도 처음에는 윤휴를 좋은 선비로 여겼었는데 이일상은 극구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보통 말할 때도 반드시 윤휴가 역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일상이 사람을 알아보는 지감이 꼭 정중 등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다만 윤휴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본 것이 분명했고 그가 말한 것이 공정했던 것이다.
대체로 사대부로서 윤휴를 사실 이상으로 추켜세웠던 자들은 모두가 윤휴와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여 자기 이름을 높이기에 노력한 자들이었다. 윤휴같이 허풍스럽고 망녕스럽고 어리석은 패륜자로서 몇 해 사이에 포의(布衣)로 시작하여 경상(卿相)이 되고, 오만하게 대현(大賢)으로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정·이남 무리들이 끼어 올려준 힘 뿐만이 아니라 평일에 사류(士類)들이 역시 그를 추중하고 장허해왔기 때문에 그가 허명을 키워 천총(天聰)을 형혹할 수 있었으니 아마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7월 2일 갑자

지평 김빈(金賓), 집의 이명익(李溟翼)이 법률 적용을 잘못하여 비난의 물의가 일었던 관계로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7월 3일 을축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지난날 사헌부가 아뢰었던 신역(身役) 변통은 누구나 다 말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시험 삼아 비국의 유사 당상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낭청을 더 차출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낭청은 아직 차출하지 말고 우선 유사 당상으로 하여금 요리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부제학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사헌부가 아뢴 의논에 신도 참여했었으며, 고 상신(相臣) 이완의 유소(遺疏) 역시 같은 내용입니다. ‘도고(逃故)’의 문제가 나라 전체의 큰 폐단이 되고 있어 유민(流民)들을 반드시 찾아내어 모아놓아야지만 궐원을 채워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영부사 허적도 아뢰기를,
"옛부터 나라치고 백성들 수를 파악 못한 나라는 유일하게 우리 나라일 것입니다. 호패법을 반드시 시행해야지만 무슨 일이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태(李惟泰)의 상소에서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각자에게 베 1필씩 받는다.’한 그 뜻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신도 선왕조에서 언젠가 그 문제를 아뢴바 있는데 당시 논의들이 걸림대가 많아 결국 시행을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지사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정묘년026)   난리가 호패법을 시행하자는 논의가 있은 이후에 터졌기 때문에 항간에서는 그 호패법이 난리를 부른 원인이었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만약 국가에서 그것을 단연 시행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시끄러움이 틀림없이 심할 것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호패법을 시행하려면 성상께서 단안을 내리시면 되지 떠도는 말에 동요될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유혁연이 아뢰기를,
"교생(校生)이라고 이름을 붙인 한유(閑游)의 무리들의 수가 너무 많아 중화(中和)·안동(安東)·남원(南原) 같은 데는 혹 1천 명에 이르고 있다는데 그러한 부류들을 군액(軍額)에 채워넣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신역(身役)도 고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교생들의 폐단은 혁연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만약 낙강(落講)한 무리들을 도태하여 군액에다 채워넣으면 부족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하자, 혁연이 아뢰기를,
"서원(書院)이 백성들을 모집하여 들이는 폐단도 대단합니다. 일단 서원에 소속이 되면 잡역(雜役)을 영구히 면제받기 때문에 신역을 도피한 백성들이 너도나도 그리로 들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선재 어사(船材御史)를 지금 내보내야 하는데, ‘선재(船材)’라고 명명하지 말고 바로 순안(巡按)이라고 칭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제주(濟州)에는 어사를 당상(堂上) 가선(嘉善) 품계 내에서 차출하여 정하도록 이미 결정을 보았으나 그것이 처음으로 아뢰는 일이어서 항간에는 꽤 시끄럽다고 합니다."
하여, 허적이 아뢰기를,
"항간에서 시끄러운 것이야 걱정할 것이 없으나 혹시 저들[彼中]에까지 전파될까 그게 염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꼭 당상이 아니더라도 그 재능이 어떠한지 그것을 볼 일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수어사(守禦使)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워 오래도록 차출을 못하고 있는데, 이완(李浣)이 살아 있을 때 신이 그에게, ‘그대를 대신할 만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완이 민정중(閔鼎重)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즉시 건백(建白)을 않았던 것은 이완의 병이 조금 나으면 그와 함께 등대(登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완이 이미 고인이 되어버렸지만, 그의 뜻은 사실 보통으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정중이 지금 당하고 있는 죄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므로 이렇게 인재 구하기가 어려울 때 그를 거두어 쓰도록 명령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지화도 아뢰기를,
"정중 같은 사람은 사실 쉽게 얻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경신·신유년 진휼 때도 진휼을 감독하기 위하여 왕래하면서 전염병이 유행한 것도 마다 않고 끝까지 권태의 빛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나라 위해 몸 바친 지성을 그 일 만으로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으나, 상은 답이 없었다.

 

7월 4일 병인

홍처량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경상도 금산(金山) 선비 최계완(崔繼完)의 아내 허씨(許氏)는 갑자기 강도를 만나 자기 몸으로 지아비의 몸을 가리우고 칼날을 자기가 받아서 지아비가 죽음을 모면했고, 예안(禮安) 백성 이막동(李莫同)이 호랑이에게 물려갈 적에 그의 아내 건리금(件里金)이 한 손으로 자기 지아비 발을 잡아끌고 또 한 손으로 호랑이의 등을 쳐서 지아비 시체를 온전히 찾았다. 그 사실이 알려져 둘 다에게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7월 5일 정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신역(身役) 변통 문제를 놓고 여러 재상들과 상의하였더니, 신포(身布)의 법이 시행할 만한 법이라고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포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생원·진사는 제외하고 유학(幼學)부터 그 이하로 매 한 사람 당 각기 베 한 필씩을 징수하면 군액(軍額)은 비록 정원 충족을 못하더라도 징수된 베의 수는 넉넉할 것이고 민역(民役)도 자연 균등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절목(節目)을 의정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좌의정 정지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신포가 호포(戶布)만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 만약 매 한 사람마다 베를 징수하기로 하면 한 집에서 혹 여러 필을 바치게 되어 좌호(左戶)027)  로서는 갖추어 낼 능력이 없을 염려가 있습니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그것은 또 달리 변통하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호수(戶數)에 의하여 베를 징수하면 틀림없이 누락자가 많아서 신포같이 확실하지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지화가 아뢰기를,
"지금 삼대(三代) 제도를 다시 행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현재 논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 힘을 펴주기 위함인데 비록 재신(宰臣)의 집이라 하더라도 바치지 않아야 할 이치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신의 집부터 우선적으로 베를 바친다면 어찌 호포의 법이 시행되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포와 호포가 수로는 어느 것이 더 많겠는가?"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그야 신포가 호포보다는 많습니다. 만약 호포로 하면 틀림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승지 윤심(尹深)이 아뢰기를,
"호적법(戶籍法)에 대하여 국가가 알아듣도록 거듭거듭 타이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락자가 없지 않은데 만약 신포를 징수하기로 하면 틀림없이 드러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
하여,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처음에 비록 호적에는 누락 되었더라도 만약 신포 징수 때 자발적으로 나타나면 그 죄를 면제해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신의 형 김수증(金壽增)이 현재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있는데, 듣자니 본읍에 입작 유민(入作流民)의 수가 4천여 명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전 부사 허정(許珽)이 그 중에서 재예(才藝)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 포수(砲手) 40∼50명을 얻어냈는데 그들 무예가 무쌍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요를 일으키지 말고 서서히 모집하면 좋을 일이다."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호서(湖西) 대동청(大同廳)이 한 해에 받은 것으로 그 한 해의 지용을 충당하지 못 하여 부득이 호남 대동청에서 빌어 쓰고 오래도록 상환을 못했다가 이어 탕감을 했답니다. 그 구차하고도 불성모양인 꼴에 대하여는 누구나 다 말하고 있는 것으로 장차 도로 파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는데 지난번에 본도 사민(士民)들의 진정소에 따라 12말로 개정하고 그후 그 편리 여부를 본도에 물었더니 산군(山郡)에서는 많이들 불편하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그 법이 원래 균역(均役)을 위하여 시행하려고 한 것이므로 그것을 불편히 여기는 백성이 있다 하여 경이하게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냥 12말 그대로 단행하고, 본청이 빌어 쓴 쌀과 콩, 은냥과 베는 그 모두를 빨리 탕척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수흥이 아뢰기를,
"별도 서용할 사람을 뽑아 올리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이제야 비로소 수정했습니다."
하고, 이어 상의 앞에 나아가 차례차례 읽으면서, 윤경교(尹敬敎)·이상(李翔)을 서용할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았고, 또 민정중(閔鼎重)·이선(李選)·김만중(金萬重)을 서용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만중을 서용하기로 하면 경교도 서용할 만합니다. 신이야 스스로를 반성할 뿐 어찌 남의 탓을 하겠습니까."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만약 경교를 서용하면 허적의 마음도 편안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수흥이 아뢰기를,
"김징(金澄)은 꽤 재국(才局)이 있으니 끝까지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자, 지화가 아뢰기를,
"징도 죄는 없습니다. 다만 원정(元情)이 곧지 못한 것 그게 바로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김징을 미워하는 것도 역시 그 때문이다. 사대부의 풍습(風習)이 어디 그럴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시중(閔蓍重)이 강화도 연해에 목책(木柵)을 설치할 것을 청하여, 상이 제신들을 돌아보며 물으니, 김수흥 등 모두가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황해 감사(黃海監司)에게 분부하여 장산곶 목재를 가져다 쓰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남(三南)의 어사(御史)에 선발된 자로서 조사석(趙師錫)만은 이미 왜인 접대 때 시험해보았으므로 일을 맡겨도 될 듯하나 그 나머지 두 사람은 일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 재능이 과연 어떠한가? 만약 정밀하게 고르지 않았다가는 민폐만 끼칠 뿐이어서 차라리 안 보내느니만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제주에 갈 어사는 또 어떠한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제주 어사 이하진(李夏鎭)이 문한(文翰)은 넉넉하지만 일 처리하는 재간에 있어서는 신으로서도 어떻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일찍이 재신(宰臣) 중에서 골라 보내자는 뜻으로 진달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남 어사에 있어서는 윤지선(尹趾善)·신익상(申翼相)이 모두 정하게 골라졌다고 할 수는 있는데 그들이 직무 수행을 잘 할 것인지의 여부야 어떻게 미리 알겠습니까. 만약 모두가 성상 마음에 맞지 않으시면 단자(單子)를 내주어 더 많은 수를 써서 들여오게 하여 직접 간발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여, 상이 그렇게 하였다. 지화가 아뢰기를,
"요즘 윤휴의 밀소로 하여 바깥이 꽤 시끄러운 모양인데 게다가 나석좌(羅碩佐) 소본(疏本)까지 등초하여 전파하고 다니는 자가 있어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인조조에서는 저들과 관계된 문제이면, ‘청문을 번거롭게 할 상소문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하신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단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 소본들이 전파되는 것은 꼭 정원에서 누설해서가 아니라 상소한 그들이 큰 명예를 얻기 위하여 저들 스스로 바깥에다 말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혹 채택할 만한 말도 없지는 않아 일체를 물리친다는 것도 역시 합당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하였다. 교리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임진 왜란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과 함께 절의에 죽은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천일 만이 시호 추증이 빠져 있어 추장(追奬)의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똑같이 시호 추증을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해조가 민신(閔愼)에 관한 공사(公事)로 입계한 지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재가가 나지 않아 너무 지체된 느낌입니다."
하고, 지화도 아뢰기를,
"박세채(朴世采)가 형조(刑曹)에서 대명(待命)하고 있은 지도 역시 해가 이미 지났으니 그도 어떻게든지 처치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원이 세채 상소를 받아들인 일이 극히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일이 결말이 나기도 전에 어떻게 감히 소를 올릴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감히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그리고 대명 여부는 국가에서 분부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였다. 부제학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그 문제에 있어 국가에서 예제(禮制)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민신으로 말하면 자기 아비에게는 맏아들이고 게다가 재물을 다투었거나 적전(嫡傳)을 빼앗은 일도 없이 소위 예를 아는 자의 말이 ‘고례(古禮)가 그렇다.’고 했다면, 그 자신이 최복(衰服) 입는 것을 누가 말릴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기 아비가 있는데도 자기가 대신 상을 입었다는 것은 그게 아비를 없는 것으로 친 것이다. 성인이 말씀하신, ‘네 마음에는 편하겠는가?’ 한 말씀이 바로 그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하였다.

 

패초에 응하지 않아 추문해야 할 자는 곧바로 금부가 추문하도록 전지(傳旨)를 받으라고 명하고, 그를 항식(恒式)으로 정하였다.

 

이단하를 이조 참의로, 이은상(李殷相)을 형조 판서로, 이훤(李藼)을 집의로, 안후태(安後泰)를 정언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이조 좌랑으로,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이익(李翊)을 공조 참의로, 김우형(金宇亨)을 판윤으로, 유지발(柳之發)을 지평으로, 안후(安垕)를 필선으로, 정재희(鄭載禧)를 승지로, 윤심(尹深)을 도승지로, 이인하(李仁夏)를 북병사(北兵使)로 각각 삼았다.

 

효자(孝子)로는 현감 김수민(金壽民) 등 6인을, 열녀(烈女)로는 유학(幼學) 이광진(李光進)의 처 이씨(李氏) 등 5인을, 효녀(孝女)·양녀(良女)로는 왕씨(王氏)등 3인을 정문(旌門)하도록 명하였다.

 

7월 6일 무진

경상도 대구(大丘) 사는 유학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였다.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자성(慈聖)이 승하하셨으니 이 땅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자 그 누가 슬퍼 울부짖고 견딜 수 없이 가슴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예제(禮制)에 있어 그를 깎아내린 잘못이 있었고 행상(行喪) 때에도 위태롭게 배를 이용하였으니 그를 듣고는 모두가 놀랐던 것입니다. 나라를 예(禮)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성인(聖人)의 분명하신 훈계여서 예가 한 번이라도 빠지면 뒤이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니 신중하지 않아서 될 일입니까. 이 말을 제 때에 하지 못하고 이미 발인(發靷)이 지났지만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감동하여 하늘도 사람도 잘 도왔기 때문에 대례(大禮)를 이미 마쳤는데 그 일이 오늘로 보아서는 큰 다행이었으나 사실 후세에 보여줄 만한 원대한 계획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말라는 부자(夫子)의 말씀이 있기에 지금 그 문제는 놓아두고 다만 예제의 잘못된 것만을 거론하겠습니다.
대왕 대비가 인선 왕후(仁宣王后)를 위하여 입을 복제를 처음에는 기년(朞年)으로 정했다가 뒤에 대공(大功)으로 고쳤는데 그게 어느 전례(典禮)를 따른 것입니까. 맏아들과 맏며느리 복은 모두 기년으로 정한 것이 국조 경전(經典)에 기록되어 있고 기해년 대상(大喪) 때도 대왕 대비 복제를 기년으로 하면서, 국전(國典)을 거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오늘 와서는 국제 외에 대공의 복제가 또 나왔으니 어찌하여 앞 뒤가 그리 다른 것입니까. 만약 주공(周公)이 예를 만들면서, 맏며느리 복은 대공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 한 것이라고 핑계를 댄다면, 《주례(周禮)》 내에 시아버지·시어머니 복은 기년이고 맏며느리 복은 대공이라고 한 것이 증거가 없어 모두 후세에 준행되지 않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당(唐)의 위징(魏徵)이 그를 건의하여 바로잡았고, 송(宋)의 주자(朱子)도 고전(古典)을 수집하여 《가례(家禮)》를 만들면서 맏며느리 복을 기년으로 하였으며, 명(明)의 구준(丘濬)의 《가례도감》역시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조의 선정신(先正臣) 정구(鄭逑)가 오복도(五服圖) 내에다 《주례》의 ‘맏며느리 복은 대공이다.’ 한 것을 빼버리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그것이 ‘의심은 의심으로 전한다[傳疑].’라고 한 《춘추(春秋)》의 규례를 지킨 것뿐이지 후세에 준행하게 하기 위하여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맏며느리 복이 기년인 것은 일찍이 역대 여러 유현들이 마련하여 정해놓은 제도이고 비록 성인이 다시 나더라도 바뀌지 아니할 것이 그렇게 분명한데도 지금 와서 자기 사견(私見)을 내세워 가까이 있는 시왕(時王)의 정한 제도를 버리고 멀리 삼대(三代)시절의 고례(古禮)를 취택한다는 것은 거꾸로 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맏아들 복은 기년으로 하는 국제에 의하여 일찍이 기해년이 그리 하고서는 이제 와서 도리어 국제의, 중서부(衆庶婦)를 위하여 입는 복을 입고서도 그것이 《예경(禮經)》으로 보아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니, 뒷날에 관계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하가 대왕 대비로 보아 만약 대왕 대비의 중서부에게서 탄생했다고 한다면 그는 전하가 중서손(衆庶孫)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 대비도 언젠가는 나이가 한계가 있을 것인데 그때 가서 전하가 대왕 대비에 대한 입장이 적장손(嫡長孫)으로서 전중(傳重)을 받은 분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막중한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종묘사직의 주인이 되고서도 적장자가 될 수 없는 경우가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가 적장손으로 자처하면서 두 대에 걸쳐 복(服)으로 보답하는 의의에 있어서는 앞 뒤가 다르다면 그게 바로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에 어긋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릇 혈기를 가진 자이면 누가 놀라고 분개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속으로 억울함을 품고서도 겉으로는 서로 경계하고 조심하면서 아직까지 뉘 하나 전하를 위하여 입을 열고 말한 자는 없었으니 이렇고서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오직 그 예(禮)라는 글자 하나가 세상이 쉬쉬하는 물건이 되어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아끼느라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막중 막대한 시기를 당하여서도 모두 입 다물기를 숭상하여 조정에서는 공론이 싹 없어졌고 초야에서는 사기가 죽어 있습니다. 나라 일이 이 지경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번뜩 깨닫고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반성한 다음 예관(禮官)에게 분명히 하교하여, 전례를 자세히 살펴 틀렸던 점을 바로잡고 올바른 제도를 되찾게 하시고 이어 회오(悔悟)의 뜻이 담긴 하교를 속 시원히 내리시어 중외의 유감스러웠던 점을 쾌히 풀어주신다면 송종(送終)의 예에도 유감된 점이 없을 것이며 적장의 뜻도 환히 밝아질 것입니다. 경(經)이 바로되고 도(道)에 맞게 되는 길이 오로지 이번 일에 달려 있으며, 말 한 마디로 나라를 일으킨다는 것도 바로 오늘이 그 기회인 것입니다.
신은 지금 다만 오늘의 강복(降服)이 잘못이라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인데 정원(政院)에서는 억압과 위협을 가하면서, 금령을 범하고 예를 논한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퇴각을 하였습니다. 아, 기해년에는 기년복 문제로 하여 과연 영남 유생들의 진소가 있었기 때문에 반교(頒敎)를 하여 금령을 내렸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오늘 대공 복제에 있어서는 금령을 내린 사실도 없는데 지레 앞질러서 막고 있으니 정원이 하는 심사가 아, 참으로 이상합니다. 전자의 기년 복제는 국전에 의거하여 정했던 것이나 오늘의 대공 복제에 대하여는 이를 상고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이른바, 예가 아닌 예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공 복제가 틀렸다는 것은 종과 하인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를 더 분명히 알 정원이 그렇게까지 사실을 은폐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너무 고립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실천하여 좋을 말들이 어디에서 들려오겠습니까. 진(秦)이 시서(詩書)에 대한 금령을 두었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았는데 이 성스러운 세상에, 《예경(禮經)》에 관한 금령을 새로 만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은 이 소를 올려 한번 깨닫기를 바랐던 것인데 중간에서 저지를 당하고 뜻을 풀지 못한 채 왔던 길을 다시 가다가 쓰러져 죽으면 그 뿐이지만 국가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을 모를 일입니다."

 

대사간 김익경(金益炅)이 아뢰기를,
"엎드려 듣건대 유생이 상소하여, 해조가 정했던 대왕 대비의 복제가 예가 아니라는 것을 논했다고 합니다. 소를 해당 관서에 내리지 않았으니 그 내용이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또 그 시비 득실에 관하여도 지레 이렇다 저렇다 할 것까지는 없지만, 신은 그 당시 예관의 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에 대하여 사간 이하진(李夏鎭), 정언 안후태(安後泰)가 처치하기를,
"황급한 상황에서 정해진 예제이고 또 고례(古禮)에 의거하여 한 일인데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꼭 혐의를 둘 게 무엇이겠습니까.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7월 8일 경오

상이 경사전(敬思殿)의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모시려다가 갑자기 치통이 심하여, 약방이 대신 모시도록 할 것을 아뢰어 청했는데 그대로 따랐다.

 

7월 10일 임신

정원이 ‘영부사 허적(許積)이 행장을 챙겨가지고 내려가려고 한다.’고 아뢰니, 상이 가주서 이담명(李聃命)을 보내 들어오도록 유지를 전했는데, 허적은 이미 길을 뜨고 없어 중로까지 뒤좇아가서 상의 유지를 전달하였다. 허적이 답하기를,
"도리로서는 당연히 종종걸음으로 예궐하여야 할 것이나 착용하던 관대(冠帶)를 이미 먼저 멀리 보내버렸기 때문에 명령을 받들 수 없으니 너무 황공합니다."
하여, 담명이 그대로 돌아와 아뢰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경이 오늘 떠난 것이 비록 마음에 불안을 느껴 그런 것이겠으나, 지난 날과는 사정이 크게 다르고, 또 행장을 멈추고 의관을 정제하는 일도 잠깐이면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쩍 떠나 나로 하여금 면유(面諭)도 할 수 없게 하였으니, 경이 만약 생각을 깊이 했더라면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빨리 들어와 내가 바라는 뜻을 헛되게 말라."
하여, 승지가 즉시 가서 그 유지를 전하고, 동부승지 정재희(鄭載禧)는 둑도(纛島)까지 쫓아갔는데 허적은 이미 배에 올라 있었다. 재희가 성상의 유지를 전하자, 허적이 상소하기를,
"신이 죄를 짓고 겨우 살아 남은 목숨으로 전리(田里)에 엎드려 있을 때 어찌 두 번 다시 수문(脩門)에를 들어갈 생각을 갖기나 했겠습니까. 천만 생각 밖에 자성(慈聖)이 승하하여 신이 비록 세상에 큰 죄는 짓고 있을지라도 그렇다고 감히 집에서 누워 지낼 수 만은 없었기 때문에 황급히 길을 떠나 겨우 성복(成服) 시기에 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궐문 밖에서 한번 곡하여 망극한 심회를 조금이나마 풀고는 물러와 구덩이를 메우는 것이 그게 신의 본분이며 또 신의 당초 계획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빈번히 불러주시고 뒤이어 내국(內局) 제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옥체가 시일을 끌며 편찮으셨고, 중전의 병세 또한 매우 위독하여 밤낮없이 마음을 태우고 속을 졸였기 때문에 미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방황하며 입을 다물고 있은 지 어느새 반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면례(緬禮)도 이미 끝났고 졸곡(卒哭)도 지났으며, 성상 환후도 조금은 풀리셨는데 신 같이 몸에 큰 죄를 지고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는 자가 어떻게 오래도록 연곡(輦轂)에 머물면서 또다시 조신(朝紳)을 더럽힐 것입니까. 돌아갈 생각이 날이 갈수록 급하여 행장을 재촉하여 지레 나왔던 것입니다. 지금 강 위에 도착하여 배를 빌어 동으로 돌아가면서 감히 이 한 소를 남겨 자신의 심정과 죄상을 폭로하는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이 절박한 충정을 굽어 이해하시고 이어 신의 포만(逋慢)한 죄를 다스리실 것이며, 신이 가지고 있던 내국 제조(內局提調)와 서추(西樞) 각 아문의 모든 겸직을 일체 면직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편맹(編氓)과 똑같은 신분으로 여생을 보내게 해주시면 그 깊고도 후한 덕이 하늘처럼 느껴질 것이며, 살아 목숨 바치고 죽어 결초보은을 신이 감히 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이 사세가 절박하여 전하께 나아가 하직을 올리지 못했고, 또 모든 어려움이 눈에 넘치는 이 시기를 당하여 깊은 걱정 지나칠 정도의 염려가 한 두 가지가 아니면서도 미처 인접의 기회를 기다려 얕은 소견이나마 모조리 올리지 못했던 것 그것이 신의 죄입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오자, 정원에 전교하기를,
"허 영부사가 이미 길을 떴다고 하니 육도로 갔으면 말을 내주고 수로로 갔으면 배를 끌 군사를 내주라. 그리고 두 도의 감사에게는 그를 호송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경상도에 큰물이 졌다.

 

7월 11일 계유

홍문관이 천하 지도(天下地圖)를 올렸다.

 

정유악(鄭維岳)을 승지로, 홍만종(洪萬鍾)을 헌납으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응교로, 윤지완(尹趾完)을 교리로, 권유(權愈)를 부수찬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좌참찬으로, 강석구(姜碩耉)를 지평으로, 이민서(李敏敍)를 호조 참의로, 윤계(尹堦)를 황해 감사로, 박신주(朴新胄)를 전라 좌수사로 각각 삼았다.

 

고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에게 시호 충익(忠翼)을 내렸다.

 

도승지 윤심(尹深)이 상소하기를,
"중종조의 박영(朴英)이 동부승지로서 내국 제조(內局提調)를 겸임했었는데 그가 의술에 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띠고 있는 약방 부제조 직임을 우부승지 김석주(金錫胄)에게 옮겨 제수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아뢰기를,
"황간(黃澗)의 죄인 장응일(張應一)이 제 스스로 석방을 받았다고 하면서 배소(配所)를 멋대로 이탈하여 역말을 빌어 타고 친구들 집을 왕래하고 있다고, 남쪽에서 온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러한 말을 하는데 황간 현감은 그 사실을 덮어두고 보고하지 않았고, 본도의 감사도 그를 아뢰지 않았습니다. 응일은 해당 법률에 의하여 죄를 과하고, 현감 윤의(尹漪)는 잡아들여 추문하며, 본도 감사는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그 자신 석방을 받았다고 하는 그 문제는 자못 아리송한 바 있으니 사실을 분명히 밝혀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이하진, 정언 안후태가 김익경에 대한 처치를 하면서 조어가 투철하지 못했다 하여 공론으로부터 비난을 받고는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에 대하여 장령 이광적이 아뢰기를,
"복제(服制) 문제는 전례(典禮)가 이미 정해진 것인데 유생이 그것을 소론(疏論)한 것은 사실 유망(謬妄)한 점이 있으며, 처치하면서의 조어 역시 자못 분명하지가 못하여 공론으로부터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를 체차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7월 13일 을해

송창(宋昌)을 사간으로, 이옥(李沃)을 정언으로, 여성제(呂聖齊)를 함경 감사로 삼았다.

 

전 참판 조수익(趙壽益),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후산(李後山)을 기로소 당상으로 삼았다. 그것은 승지 심재(沈梓)의 건백에 의한 것으로 강백년(姜栢年)에게 적용했던 전례를 원용한 것이었다. 조수익은 이때 나이 79세였고, 이후산은 78세였다.

 

공조 정랑 정동설(鄭東卨)에게 준직(准職)을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대탄(大灘)의 바위를 깬 공로 때문이었다.

 

대사헌 강백년이 상차하기를,
"전해 듣기에, 국가에서 장차 유생들에게서도 베를 징수하기로 하고 미처 반령(頒令)만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하여 뭇사람이 의혹에 잠겨 있으니 시끄러울 것이 뻔합니다. 일 없이 노는 선비들이 각기 베 한 필씩을 내어 많은 군정(軍丁)들의 도고(逃故)로 인한 이웃 살붙이에의 피해를 덜어주는 것이 띄워놓고 말하자면 썩 편리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보탬이 되는 것은 매우 경미하고 손해 되는 것이 너무 많으리라고 신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조(國朝) 3백년 동안에 선비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해왔는데 개중에는 혹 부역 면제를 위하여 이름만 붙여두고 지내는 자도 없지 않았지만 그를 구별하기가 어려워 그냥 일체를 장보(章甫)로 대우했던 것입니다. 만약 똑같이 베를 징수하기로 하면 정역(定役)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찍이 시행하지 않았던 일을 갑자기 오늘에 와서 시행한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시끄러움이 일 것이어서, 무슨 일을 잘 생각해서 시작 하는 방법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묘당에다 다시 물으시고, 또 밖에 있는 유상(儒相)들과도 논의하여 중지를 모아 절충을 취하소서."
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전번 아뢰었던 베 징수 건에 관하여, 그 절목을 마련하여 들여오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거기에 불편한 점이 또 있어 다시 품정하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백년도 그에 대한 차론(箚論)이 있었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한 가정에 혹 열 명 또는 대여섯 명씩 있으면 그 베를 일일이 다 받을 수는 없을 것이나, 만약 한 집에 세 필을 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울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시골 가난한 무리들은 비록 양반이라 하더라도 의관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들이 많아 출입할 때면 의관 한 벌을 가지고 부자 형제가 서로 바꿔가며 입는 자가 있고, 한 두 섬의 적곡(糴穀)도 상환을 못하는 이가 있는데, 일단 그 법을 시행하고 나면 그러한 무리들에게도 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틀림없이 그를 마련하여 바칠 형편이 못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을 잡아다가 형옥(刑獄)에 가두어야 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원망과 소요가 신역(身役)을 과한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논이 있고부터 바깥에서 떠들어대는 말들은 다 아뢸 것도 없지마는 만약 법령 반포를 하고 나서 다시 그만둘 수 밖에 없게 되면 이만저만 손상이 아닌 것으로 차라리 애당초 시행을 않은 것만 못할 것이니, 그 법은 끝내 시행할 법이 못 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시행할 만한 제도를 생각해보아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제신들 의사를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제신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각기 의견을 말해 보라."
하였다. 예조 판서 조형이 대답하기를,
"신포(身布)에 관한 논의가 병자년 이전에도 있었으나 결국 시행을 못했으니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의 빈부(貧富)가 다른데 지금 똑같이 베를 징수하려 한다는 것은 역시 불편할 것 같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민유중은 아뢰기를,
"그 법도 폐단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바깥에서 떠들면 묘당이 먼저 동요하니 신은 그 일이 틀림없이 안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부터 시행하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처음 보는 것이라서 놀라고 있는데, 만약 무슨 일인가 하려고 하면 일시적 소요야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신포 제도를 시행할 수 없다면, 정원 이외의 교생(校生) 또는 각 아문의 군관(軍官)·보직(保直) 등 각종 명목 없이 놀고 있는 자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군액(軍額)에 충정하면 오늘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지금 유중이 아뢴 말이 바로 신이 아뢰고 싶었으면서 미처 못했던 말입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지사 유혁연(柳赫然), 우윤 신여철(申汝哲)이 다 신포 제도는 시행이 어렵다고 말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십수년 이래로 입 달린 사람이면 모두, 재변이 거듭 닥치고 민생이 곤궁한 원인이 다 신역(身役)의 폐단에서 유래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변통을 하려고 하면 논의하는 이들이 다만 그 폐단에 대해서만 말하고 그 폐단으로부터 구제할 방법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아 참으로 딱합니다. 지금도 만약 베를 징수하는 일이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입작 유민(入作流民)에게 오가통(五家統)의 법을 실시하여 그 통장(統長)으로 하여금 각기 자기 통 내의 입작포(入作布)를 받게 하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원 이외의 교생 및 일 없이 놀고 먹는 부류들 수가 매우 많은데 그들을 만약 민유중이 건백한대로 전원 군액에 충정하면 그것이 비록 대단한 변통은 아닐지라도 목전의 다급함은 구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수흥이 삼남(三南)의 어사 단자(單子) 문제로 아뢰기를,
"추가로 뽑은 자가 이선(李選)·최후상(崔後尙)·이우정(李宇鼎)·조세환(趙世煥)·임규(任奎)·신후재(申厚載) 이상 여섯 사람입니다. 저번에 뽑아서 아뢴 윤지선·신익상도 그들 사람됨됨으로는 다 합당한 인물들이라 하겠으나 다만 일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신이 감히 그들이 직무 수행을 틀림없이 잘 할 것이라는 보장을 못하는 것이고 이하진 역시 그렇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가로 뽑은 여섯 사람 중에서는 누가 가장 우수한가?"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인재의 고하는 쉽게 알 수 없는 일이고, 이사(吏事)의 숙련도로 말하자면 이선·임규·신후재가 나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 세 사람을 차출 보직하라."
하였다. 상이 수흥에게 이르기를,
"대왕 대비 복제를 예조가 처음에 기년으로 마련하여 들여왔다가 금방 대공으로 고쳐 정했는데 무슨 곡절이 있어서였던가?"
하여, 수흥이 대답하기를,
"기해년의 복제를 기년으로 정하여 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 말들을 지금 다 기억할 수는 없으나 판부가 송시열이 기년으로 헌의(獻議)했기 때문에 그후로 많은 풍파가 있었다. 판부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기년으로 수의(收議)할 때 영의정 정태화 말이 「지금 비록 국제(國制)를 쓰고 있지만 뒤에 틀림없이 이를 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하더니, 지금 와서 과연 이렇고 보니 정태화가 과연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했었다. 그걸 보면 그 당시 고례(古禮)를 쓰지 않고 국조의 예를 썼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대공으로 정한 것 역시 국제인가?"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대전》의 예전(禮典) 오복(五服) 조항의 자(子) 아래에, 기(朞)라고만 기록해두고 장자(長子)·중자(衆子)를 구분해놓지 않았습니다. 기해년 초상 때는 신이 명을 받들고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곡절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송시열이 헌의한 대의를 간추리면, 틀림없이 고례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시 국제를 쓰는 것이 옳다고 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 영의정 정태화가 수의하면서도 국제를 써야 한다고 했고, 판부사도 사실 그와 상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복제는 고례로 하자면 대개 무슨 복이어야 할 것인가?"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가장 옛날 예로 하면 대공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에는 국제로 하고, 오늘은 고례로 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기해년에도 고례와 금례를 참작하여 썼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아니다. 기해년에는 사실로 국제를 썼던 것인데, 그후 시끄러움이 일어나면서 고례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던 것 아닌가."
하여, 민유중이 아뢰기를,
"그때는 고례와 금례를 참작 적용했던 것인데 다투는 자들이 오로지 고례만을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복제를 국제로 한다면 무슨 복제로 할 것인가?"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국제에 맏자부 복은 기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오늘의 대공 복제와 국제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기해년에 쓴 복제는 그것이 국제였지 고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기해년 복제를 고례와 국제를 참작 적용했다고 한다면 오늘의 대공에 있어서는 어느 것을 국제와 참작하고 있는 것인가? 나로서는 사실 모를 일이다."
하여, 유중이 아뢰기를,
"기해년의 기년 복제는 우연히도 국제가 고례와 서로 맞았기 때문에 정태화 등이 수의를 그렇게 했던 것이겠으나 그러나 그때라고 어찌 고례를 참작하지 않고 하기야 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정하면 그것이 바로 국제인 것이다."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고례로 정했기 때문에 그를 다투는 자들이 저러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례로 하면 맏아들 복은 무슨 복을 입는가?"
하여, 수흥이 아뢰기를,
"그야 참최(斬衰) 3년입니다."
하자, 유중이 아뢰기를,
"그때 기년복이 틀렸다고 한 것은 그들 주장이, ‘왜 맏아들인데도 3년으로 하지 않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복제 개정이라는 것이 그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설사 부득이하여 개정을 하더라도 당연히 대신들과 논의하여 품정(稟定)해야 할 것인데 지금 예조가 곧바로 부표(付標)를 하고 고쳐 들여온 것은 무슨 짓인가?"
하여, 예조 판서 조형이 아뢰기를,
"기해년에 이미 기년으로 정했으면 오늘은 당연히 자동적으로 강등이 되어 대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하교가 그러하시니 다시 품정하는 것이 옳을 것 같으나 바깥 논의들도 모두, 기해년 논의가 사실은 고례를 응용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국제만 썼던 것이 확실하다면 무엇 때문에 다툼 말들이 일어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 수의에 대하여 예조도 어찌 그것을 모를 이치가 있는가?"
하여, 조형이 아뢰기를,
"기록이 틀림없이 있기는 있을 것이나 신은 사실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당연히 국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정태화의 말이었다고만 들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세히 모르면서 어찌하여 대공으로 부표를 하였는가?"
하였다. 조형이 아뢰기를,
"도신징(都愼徵) 상소를 신도 보았는데 그 내용에, ‘대왕 대비가 천추(千秋) 이후에……’의 말이 있었으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그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대왕 대비께서 기해년에는 천담복(淺淡服)으로 3년을 마치셨고, 천릉(遷陵) 때도 역시 천담복으로 3개월을 마치셨는데 지금은 9개월 복제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이어 도신징 상소를 내보였다. 수흥이 그를 다 읽고 나자,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에 과연 차장자(次長子)로 의정(議定)이 되었던가?"
하여, 승지 김석주(金錫胄)가 아뢰기를,
"송시열(宋時烈) 수의에,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庶子)라고 하여 나쁠 것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서(庶)라는 글자 뜻을 분석하면서 다투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조가 한 일이 참으로 너무 사리를 몰각하고 실정에 안 맞는 일을 했다. 당연히 기해년 일을 자세히 고찰하고 증거를 제시하여 개정했어야 했는데 다짜고짜 대공으로 개정하였다. 자세히 알지도 못한다면서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하여, 조형이 아뢰기를,
"갑자기 당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가 기년을 입는 아들이면 그 며느리는 당연히 대공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 개정하여 들여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해년 복제가 왜 기년으로 정해졌던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미처 상고해내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 일을 끝까지 상고해보지 않고서 범연히 개정하여 들여오다니 그게 무슨 도리란 말인가. 그뿐 아니라 기해년 복제 의정 때 말들이 비록 많았으나 내가 모인의 헌의대로 시행하라고 답했었으니, 그 사람 헌의가 바로 국가에서 원용했던 예였던 것이다. 예조는 자세히 상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기해년 일에 관하여 예조로 하여금 상세히 상고한 후 아뢰어 처리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중대한 문제이니 예조만 논의하게 할 것이 아니라 육경(六卿)이 모여 오늘 중으로 논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오늘 한다는 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느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시간을 끌 수 없는 문제이다."
하여, 김석주가 아뢰기를,
"오늘은 삼성 추국(三省推鞫)도 있고 하니, 내일 모여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추국을 내일로 물리고, 대신(大臣)·원임 대신·육경, 삼사의 장관, 참찬·판윤을 다 불러들여 회의하게 하고 예조의 참판·참의도 동참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밤 행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행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행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형조 판서 이은상(李殷相), 한성부 판윤 김우형(金宇亨),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耉), 예조 참의 이규령(李奎齡), 홍문관 부응교 최후상(崔後尙)이 빈청에 모여 의계하기를,
"신들이 탑전 하교에 의하여 빈청에 모여, 기해년 대왕 대비 복제 의정 때의 제반 문서를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처음에 예조 계사(啓辭)에 의하여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연양 부원군 이시백(李時白), 완남 부원군 이후원(李厚源),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중추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의 주장이 ‘신들이 고례에 대하여 비록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시왕(時王) 제도로 상고해볼 때 기년복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같습니다.’하였고, 이조 판서 송시열(宋時烈), 우참찬 송준길(宋浚吉)의 주장도 ‘예율(禮律)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를 수 밖에 없고, 제왕(帝王)의 복제에 대하여는 경솔하게 논의하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지만 여러 대신들이 이미 시왕 제도로 헌의한 이상 감히 다른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하여, 그 헌의대로 시행하도록 재가가 났었습니다.
경자년 3월에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3년 복제로 할 것을 청했을 때 예조의 복계로 대신 및 유신과 논의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제신들 의견이 서로 엇갈리기도 하였고, 우찬성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은 《의례(儀禮)》 주소의 사종설(四種說)을 끌어 대어 논변하였으며, 영의정 정태화는 정희 왕후가 예종 대왕에 대하여와 문정 황후가 인종 대왕에 대하여 이미 행했던 제도를 모두 자세히 상고하여 참작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실록을 상고해 보았더니, 정희 왕후가 덕종 대왕·예종 대왕에게는 다 기년 복제를 행하였는데, 문정 왕후가 인종 대왕에 대한 복제는 나와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시 대신·유신과 논의할 것을 명했는데, 영의정 정태화는 ‘애당초 고례에 대한 지식이 없어 다만 국전에 의거하여 대답했다가 오늘의 논의가 있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감히 다시 껴들겠습니까.’하였고, 좌의정 심지원의 주장은 ‘당초 헌의 때도 《오례의(五禮儀)》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고 실록의 기록도 그러한데, 상제(喪祭)는 선조가 하던 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신이 무슨 다른 소견이 있겠습니까.’하여, 여러 대신들 헌의대로 시행하도록 재가가 났던 것입니다.
그해 5월에 또 우의정 원두표가 차자를 올려 3년 복제로 행할 것을 청하고, 또 여러 유신들에게 물어 볼 것을 청함에 따라 예조의 복계로 이유태(李惟泰)·심광수(沈光洙)·허후(許厚)·윤휴에게 물었던바, 이유태는 ‘그 예에 대하여는 신이 송시열·송준길과 오랜 기간 논의했던 것으로 피차의 소견이 처음부터 차이가 없었습니다.’하였고, 심광수는 ‘제신들이 서로 강론하면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는 내용들을 보면 모두가 예경(禮經)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인데 그 중에서는 종통(宗統)을 중히 여기는 쪽이 더 옳은 것 같습니다.’하였으며, 허후는 ‘예를 논의하는 제신들이 각기 자기 소견을 들어 남김없이 논변하고 있으니 그 두쪽 논의를 십분 참작하여 지극히 온당한 쪽을 택하도록 하소서.’하고, 윤휴는 ‘제신들이 각기 자기 소견을 고집하여 모두 말들을 하고 있는데 오직 성상께서 자신의 판단으로 어느 쪽이든 택하실 일입니다. 다만 인심(人心)과 직결되고 대경(大經)에 관계되는 일이니, 선왕(先王)의 예에 어긋나지 않는 쪽을 택하여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돈녕부사 이경석은 ‘국제는 바로 성조(聖祖)가 정하신 것이며 열성(列聖)이 준행하던 것으로 인조가 소현(昭顯)의 상에 일찍이 그대로 행했던 것인데 대왕 대비에 와서 그것을 변경한다면 그것이 예로 보아 잘된 일이겠습니까. 못 된 일이겠습니까?’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은 ‘당초 의정할 때도 다만 국제에 의거하여 헌의했던 것이고 실록의 기록을 상고하여도 3년 복제를 행한 예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탑전에서도, 상제는 선조가 하던 대로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아뢴 바 있는데 지금 와서 다시 개정한다는 것은 사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일로서 어떻게 감히 입을 다시 놀리겠습니까.’ 하였으며, 영중추부사 정유성은 ‘실록을 상고하여도 3년을 행한 예가 일찍이 없었고, 상제는 선조가 하던 대로 따른다는 것이 바로 예경에 명시된 교훈입니다. 당초에 기년 복제로 의정했던 것이 예경에도 근거가 있어서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선조를 따르자는 뜻이었던 것입니다.’하여, 다수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도록 재가가 났었습니다.
신들이 지금 제신들의 헌의한 내용을 가지고 보았을 때, 《대전(大典)》의 복제(服制) 조항에는 ‘아들을 위하여 기년을 입는다.’라고만 되어 있고, 장자(長子)·중자(衆子)의 구별이 따로 없으며, 기해년 국상에 처음 복제를 의정할 때도 대신·유신들의 헌의 내에, 역시 시왕의 제도인 것만 말하였지 장자·중자에 관한 논변이라곤 없었던 것입니다. 3년이라는 논의가 있고부터 비로소 장자니 차장자니 하는 설이 있기 시작하여 논의가 분분하다가 여러 차례 수의 끝에 결국 국제에 의한 기년복으로 할 것을 정하였고, 맨 뒤에도 제신들 헌의 내용에 3년 복제를 말한 자도 비록 있기는 있었지만 역시 장자·중자 문제에 관하여는 거론한 자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보아 장자를 위하여는 3년, 중자를 위하여는 기년을 입는 것은 바로 고례이고, 장자·중자에 관계없이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은 국제인데, 당초에 정하기는 비록 국제에 의하여 한 것이었으나 그후 제신들이 다툰 것은 고례를 가지고 다투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기년 복제를 행했기 때문에 중외의 사람들 모두가 주장하기를 ‘3년으로 하지 않고 기년으로 한 것은 고례의 중자에 대한 복의 제도에 의한 것이다.’하였고, 이번 복제 개정 때 해조가 곧바로 부표(付標)를 청했던 것 역시 그러한 뜻에서였던 것입니다. 이밖에 달리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은 없어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구전으로 묻기를,
"아뢴 내용이 분명치가 못하다. 대왕 대비전이 기년을 입어야 할 것인지 대공을 입을 것인지, 하나로 끊어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이 무슨 까닭인가?"
하여, 수흥이 대답하기를,
"신들은 오늘 탑전에서, 기해년 복제 의정 때 고례를 원용했는지 아니면 시왕 제도를 쓴 것인지, 그 여부를 찾아보라는 뜻으로만 하교를 받았기 때문에 대왕 대비전이 기년을 입어야 할 것인지 대공이어야 할 것인지의 문제까지는 감히 지레 논의하여 아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대왕 대비전의 대공 복제가 아무래도 미안한 것 같기 때문에 오늘 탑전에서 그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등록(謄錄)을 상고할 뿐이라면 해방(該房) 승지로 족하지 무엇하러 꼭 대신과 육조·삼사의 장관들이 모여 논의하게 했겠는가."
하여, 수흥이 대답하기를,
"신들이 탑전에서 하교받을 때는 그 하교하신 뜻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서 기해년 복제만을 상고하여 아뢴 것인데 너무 황공합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당초 탑전에서는 하교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알고 있을 것인데 아직까지 명백하게 아뢰지 않고 있으니 그 내용을 모르겠다. 만약 시왕의 제례(制禮)로 말한다면 대왕 대비전 복제가 어느 복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여, 수흥이 대답하기를,
"지금은 이미 하교를 받았지만 중대한 문제라서 감히 구전으로 올릴 수가 없고 문자로 써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빈청에서 다시 아뢰기를,
"신 수흥, 신 유중, 신 처량이 탑전에 입시했을 때 복제 문제를 물으시면서, 기해년 초상에 복제를 의정할 당시 고례를 원용했는지 시왕 제도를 썼는지, 그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겠으므로 그때 수의(收議)한 문서 및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하여 아뢰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때 신들의 생각은, 그 문서들을 상고하여 아뢰면 틀림없이 무슨 처분인가 있으려나보다 하고서 다시 여쭙지도 않고 물러나왔던 것인데 지금 비답 내리신 내용을 보니 신들이 미련하여 잘못 알았다는 죄스러운 생각이 들어 너무도 황송하고 놀라 떨리는 것입니다. 기해년에 헌의했던 제신들 혹은 고례, 혹은 시왕 제도를 들어 논변했던 말들과, 상께서 재가를 내리고 시행하도록 하신 하교에 대하여는 처음 아뢸 때 이미 말씀 올렸으므로 다시 번거롭게 되풀이할 것이 없겠고, 지금 시왕 제도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대전(大典)》 오복(五服) 조항의 자(子) 아래에는 기년(朞年)이라고만 기록되었을 뿐 장자·중자를 구별해놓지 않았으며, 또 그 아래는, 장자의 처는 기년, 중자의 처는 대공이라고만 기록되었지 승중(承重) 여부에 관하여는 역시 거론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왕 대비로서는 그 복제가 대공이어야 옳을 것 같으나 그러나 그는 막중한 예라서 신들이 감히 국전(國典)에 기록된 것만을 의거하여 경솔하게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정희 왕후(貞熹王后)028)  가 장순 왕후(章順王后)029)   상사 때, 소혜 왕후(昭惠王后)030)  가 공혜 왕후(恭惠王后)031)   상사 때에 이미 행한 복제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니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서둘러 《실록》에서 찾아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날 인견 때 헌납 홍만종(洪萬鐘)이 아뢰기를,
"복제 개정 때 해조로서는 당연히 전례를 자세히 상고하여 명백하게 아뢰었어야 했는데도 범연하게 부표를 하였으니 너무 경솔했던 잘못이 있습니다. 예조의 해당 당상을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윤허하였고, 대사간 김익경(金益炅)도 그 당시 예관(禮官)이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7월 14일 병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어제 빈청에서 두 번째로 아뢴 내용도 역시 명백하지가 못하였다. 그러나 밤도 이미 깊었고 하여 춘추관이 《실록》에서 찾아낸 다음 그 처분은 사례에 따라 비답을 내리려고 했던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실록》을 제때에 찾아내기는 이미 틀렸으니 【양조(兩朝)의 《실록》이 강도(江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뢴 내용 중에서 분명치 못한 부분을 우선 다시 분석하여 아뢰도록 하고 《실록》이 어떠한지는 다음에 보아야겠다. 오늘 다시 모여 헌의하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대신 이하가 모두 빈청에 모였다고 아뢰니, 상이 좌부승지 김석주, 동부승지 정유악을 불러 이르기를,
"어젯밤 빈청에서 두 번째 아뢰면서 《실록》을 상고할 것을 청했을 때 나는 그것을 춘추관에서 하는 것으로 알았었는데 지금 강도(江都)까지 가서 찾아야 한다니, 그리되면 일이 너무 지연되어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모여 논의하도록 한 것이다. 예제(禮制)가 비록 알기 어려운 것이라고는 하지만 대신과 육경·삼사의 관원들이 조당(朝堂)에 모두 모여 있으면서 감히 예를 모른다는 핑계로 분명한 말을 끝까지 하지 않을 것이란 말인가? 기해년에 이미 시왕 예제대로 했으면 이번 회의에서 이런 까닭으로 당연히 대공이어야 한다거나, 저런 까닭으로 당연히 기년이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두 번씩이나 아뢰면서도 내용이 고작 국전(國典) 몇 마디 초록하여 구차하게 책임 면제나 하려고 하니 매우 부당한 처사이다. 그리고 ‘당연히 대공이어야 할 것 같다.’라는 말은 또 어찌하여 나온 말인가? 극히 놀랍고 괴이한 일이다. 빈청에서 아뢴 내용을 가지고 보더라도 ‘장자·중자의 구별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또 ‘장자·중자에 관하여 논변한 말이 없었습니다.’라고 하고서는 오늘 와서 감히, 당연히 대공이어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그것은 기해년에도 감히 분명하게 정해놓지 못했던 것을 오늘 빈청에서 처음으로 갈라놓은 것이다.
또 고례는 중자를 위하여 기년을 입고, 국제는 비록 장자라도 기년을 입는다. 때문에 기해년 기년 복제에 대하여, 나는 ‘국제를 쓴 것’이라고 했고, 제신들은 ‘고례까지 참작 원용하였다.’고 했는데 급기야 찾아내놓고 보니 국가에서 정한 것은 국제이지 고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빈청에서 아뢰기는 ‘당초에는 비록 국제를 썼지만 그후 제신들이 다툰 것은 고례를 가지고 다툰 것입니다.’라고 감히 말하여, 국가가 정한 것을 주로 삼지 아니하고 도리어 시끄럽게 모여 입싸움이나 했지 국가에서는 채택하지도 않은 말을 더 중히 여겼으며, 중자·장자 문제도, 분리해서 논의하다가 결론에 가서는 해조가 곧바로 부표를 청한 것도 역시 그 때문이었다고 하고 있으니, 해조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빈청에서도 어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해조가 한 짓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짓이었는데도 그에게 죄를 내릴 것을 청하지 아니할 뿐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감싸려고 하고 있으니 빈청에서 한 일도 나로서는 이해를 못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두 번째 아뢸 때의 이른바 정희 왕후에 관한 문제는 아마 기해년에도 그것을 《실록》에서 찾아보았었는데 오늘도 똑같이 왕후의 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운운한 모양이나 예종(睿宗)과 그 왕후 문제는 그렇지 않은 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종이 비록 세조의 대통을 계승하기는 하였으나 성종(成宗)이 즉위한 후에는 덕종(德宗)이 도리어 대통이 되어 그는 오늘 인증(引證)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대왕 대비가 폐빈(廢嬪) 강씨(姜氏)가 죽었을 때 복을 입지 않았으므로 오늘의 예제는 그렇게 해서 안 되는 것이다. 승지는 내 말을 분명히 듣고 빈청에 가서 전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수항, 영의정 김수흥, 행 호조 판서 민유중, 병조 판서 김만기, 이조 판서 홍처량, 행 대사헌 강백년, 형조 판서 이은상, 예조 참판 이준구, 참의 이규령, 응교 최후상, 헌납 홍만종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몽매한 사람으로서 막중한 예제를 강정하라는 명령을 갑자기 받고서는 명백하게 뜻을 밝혀 아뢰지 못하고 성상께서 누차에 걸쳐 하교가 있게 만들었으니 신들이 죄를 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금 근시(近侍)가 또 성상의 유지를 전했을 때 혼미하고 착란한 신들의 잘못이 더욱 더 드러나 황공 운월하다 못해 몸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어 엎드려 생각건대 예부터 예를 논의하는 사람들을 일러, ‘입싸움하는 자[聚訟]’라고 했으니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예율(禮律)임을 알 만합니다. 지금 이 국가적 중대한 예제를 어찌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강정하겠습니까마는 이미 명을 받았기에 부득이 시왕의 예제를 상고하고 그에 의거하여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전》에 의하면 아들을 위한 복제에 있어 장자·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다 기년으로 복제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기해년 복제 강정 때도 장자·중자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다만 기년 복제를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복제는 《대전》에서 며느리 복에 대해 이미 장자·중자를 구별하여 ‘중자의 처는 대공이다.’하고, 그 아래에 ‘승중(承重)이면 기년을 입는다.’하는 말은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대왕 대비전 복제가 대공이어야 한다는 것이 근거없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해년에 장자·중자를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그 복제가 똑같이 기년이기 때문이었던 것이지만 그러나 만약 윤서(倫序)를 따진다면 장자·중자의 구별이야 물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자라도 대통을 이으면 곧 장자가 된다.’ 하는 기록은 국전에는 나와 있는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 복제는 국전에 나와 있는 대공 이외에는 근거 없는 자기 견해만으로 가벼이 논의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였다.

 

빈청에서 아뢴 내용에, ‘중자라도 대통을 이으면 곧 장자가 된다.’ 한 구절에 부표를 하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문구의 출처를 찾아내어 아뢰라."
하였다. 좌부승지 김석주, 우부승지 정유악이 아뢰기를,
"국전에는 나와 있는 곳이 없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고례를 상고해볼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내가 언제 국전을 상고하라고 했던가? 여기 이른바 대통을 이으면 곧 장자가 된다는 기록이 틀림없이 나온 곳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찾아내어 아뢰라는 것이다."
하였다. 석주 등이 아뢰기를,
"그 설이 틀림없이 일기(日記) 속의 논변한 장소(章疏)에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비록 대통을 이어도 장자는 될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대통만 이으면 당연히 장자가 된다.’고도 하였을 것이니, 그러한 말들을 꼭 찾아내어 조목조목 아뢰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장소에서도 찾아낼 것은 물론이지만 ‘중자가 대통을 이으면 장자가 된다.’는 문구가 오늘 빈청에서 처음 만들어 낸 말은 틀림없이 아닐 것이다. 그 문구가 나온 곳을 찾아내어 아뢰라."
하여, 석주 등이 아뢰기를,
"감히 명령대로 않겠습니까."
하였다.

 

정원이 경자년 허목(許穆)의 상소, 병오년 유세철(柳世哲)의 상소, 그리고 《의례경전(儀禮經傳)》의 참최장(斬衰章)을 올리니, 상이 좌부승지 김석주를 명하여 경전의 주소(註疏)를 구절구절 해석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석주가 자기가 해석한 것을 남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나는 공정한 논리의 사람이다. 지금 이 주해 역시 그 문장에 의거하여 그대로 해석하였을 뿐이다."
하였는데, 그는 주해에서 주소 내의 앞의 서(庶) 자와 뒤의 서자를 구분하여 각기 하나의 다른 뜻으로 풀이하였던 것이다.

 

상이 하교하기를,
"밖에 나가 있는 승지들도 즉시 다 패초하여, 빈청에서 아뢴 내용 중의, ‘중자도 대통을 이으면’하는 그 문구의 출처를 찾아내어 들여오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였다.
"아침에 입시했던 승지와 영의정을 모두 합문(閤門) 밖에 와 대기하게 하라."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영의정 김수흥, 좌부승지 김석주, 동부승지 정유악을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소신이 흐리멍덩한 관계로 어제 성상의 하교를 받고서도 자세히 기억을 못하여 제대로 거행을 못 하였습니다. 너무나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내가 한 말을 대신은 혹 기억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함께 들은 제신들까지 왜 그 말을 아무도 못들어서 하교한 뜻과는 다른 회의를 했다는 말인가? 너무 타당성을 잃은 처사이다. 기해년에 기년 복제를 의정할 때 수의한 내용들이 장자·중자를 구별한 말들이 없이 결국 국제로 기년을 정했던 것은 그게 바로, 상제는 선조가 하던 대로 따르자는 뜻인 것이지 선왕(先王)이 중자였기 때문에 기년으로 한 것은 아닌 것이다. 급기야 3년 문제가 나오고 나서야 중자(衆子)니 서자(庶子)니 하는 말들이 혹 소장(疏章)에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국가에서는 그것들을 채택하거나 시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빈청에서는 그 당시의 유신(儒臣)들 상소가 마치 복제를 정하는 데 있어 바로 밑바탕이라도 되었던 것 처럼 생각하고, 조금도 어렵게 여기는 기색 없이 곧바로 ‘중자’로 호칭하고 있으니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중자라도 대통을 이으면 곧 장자가 된다.’라는 문구가 국전에는 나와 있는 곳이 없다 하여, 그때문에 당연히 대공이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 국전에 기록된 것이 혹 미비한 점이 있으면 고례를 참고하여 완전무결하도록 만들어야 옳을 일이다. 지금 그렇지는 않고 곧바로 ‘중자’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게 무슨 도리인가. 상제에 있어서는 비록 선조가 하던 대로 따라야 한다고는 하지만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곳은 다 따를 수 없는 것 아닌가. 지난번, 최복(衰服)을 옛 제도대로 따르라고 했을 때도 그렇게 말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와서 국전에 나와 있는 곳이 없다는 핑계로 대공이어야 한다고 단정을 하니, 아니 그게 무슨 뜻인가? 예조가 부표를 고쳐 들여올 때도 일찍이, 국제가 그렇다거나 고례가 그렇다거나 하는 말 한 마디 없이 곧바로 중자 차자로 논정(論定)하였으니 예조가 한 짓도 너무 예모없는 짓이었다."
하였다. 석주가 아뢰기를,
"예조가 아뢴 내용 중에는 중자 차자의 말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때 정신이 혼미하여, 예조의 부표가 《대전》에 의거하여 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그대로 따랐던 것인데 지금 와서 제신들이 끝내 예조가 부표 고친 것을 옳다고 한다면 일이 제대로 안 풀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에 온당치 못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숨겨두고 말하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어제 연중(筵中)에서, 즉시 모여 논의하라고 했을 때 제신들 의향이 일을 미루려고 했기 때문에, 심지어 삼성 추국(三省推鞫)도 물리라고 했던 것이 바로 그래서 그랬던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올리고 아뢰기를,
"신들이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에 와서 감히 장자·중자의 설을 꺼내고 있는데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그 말이야말로 기해년에 예를 논하고 나서 그 논리를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에 불과한 말인 것이다. 대왕 대비전이 역모를 한 강빈을 위하여 복 입은 사실이 없는데 그러면 그 기년복을 누굴 위해 입을 것이란 말인가?"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며느리 복은 아들을 따라 결정하는 것으로서 중한 쪽이 당연히 아들이기 때문에 의계(議啓)한 말이 그러했던 것이고, ‘중자가 대통을 이으면’이라는 말은, 고례를 들어 논변하는 과정에서는 오늘의 일에 대하여 입증될 만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고례는 거론하지 말고 시왕의 제도만 가지고 논하자고 한 것이 바로 성상의 하교였기 때문에 감히 섞어 말할 수 없어서 그렇게 의계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내 말에 구애를 받아 그랬다고 하더라도 빈청에서 만약 아뢰기를, ‘둘째아들이 대통을 이어도 역시 장자로 명명한다는 설이 고례에는 있으나 그것이 국전에 기록된 것이 아니어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했다면 그것은 말이 된다. 그러나 지금 바로 ‘국제에는 나와 있는 데가 없어 대공 이외에는 가벼이 논의하기가 어렵습니다.’했으니, 그러한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대체로 국전에 미비된 점이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마는 고례는 원용하지 말라는 하교를 하셨기 때문에 신들로서는 참작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어 그렇게 의계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에는 적서(嫡庶)를 구별한 일이 없었는데 지금 감히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계사(啓辭)로도 이미 아뢰었거니와 국전에 의하면 아들 복은 장자·중자 구별 없이 똑같이 기년이면서, 며느리에 있어서는 장자·중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대통을 이어받았더라도 윤서(倫序)만은 구별이 없을 수 없지 않을 까 싶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윤서가 구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맏이가 죽고 둘째가 서면 역시 장자로 명명한다고 했으면 그가 장자인 것이 분명한데 그를 꼭 미비한 국전에 의하여 정하려고 한 것은 그게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석주가 아뢰기를,
"그것은 신중을 기하자는 뜻에 불과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면 어찌하여 서(庶)로 여기는 것인가? 이는 틀림없이 어딘가 무슨 묘맥(苗脈)이 있어 나온 말일 것이다. 최복(衰服) 문제에 있어서는 기해년에 다투고, 금년 초상 때 또 다투고, 졸곡(卒哭) 때 또 다투고 하면서 심지어 시왕 예제에 혹시라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당연히 고례로 고쳐야 한다고까지 하고서는 유독 오늘에 와서 국전에 없는 것이라고 핑계만 하고 고례를 들어 참작 논의하지 않으니 왜 그렇게 앞뒤가 다른가?"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신들이 헷갈려서 고례를 들어 비교 논의할 줄을 몰랐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온종일 회의를 이틀을 하였는데, 어제 아뢴 내용은 명백하지가 못하더니 오늘 한 말은 너무 한심스러운 내용이었다. 기해년에도 거론한 일이 없었던 문제를 오늘 와서 감히 발언한다는 말인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유세철(柳世哲) 등이 상소했을 때 신이 승지로서 입시하여 그 상소문을 읽고 그리고 신의 소견으로 대답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성명께서 세철에 대하여 그가 잘못이라고 물리치신 말씀이 계셨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국가가 시왕(時王) 제도를 쓰고 있는데 유생 무리들이 고례를 들어 말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이었지 그가 말한 장중(長衆)의 의논 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대공(大功)은 어딘가 미안하다는 뜻을 작금 누차에 걸쳐 말했는데도 제신들은 마치 그것은 들은 일이 없는 것처럼 하고, 내가 전일에 하교했던 것을 들어 내 말을 막으려고 하고 있어 도리어 좋지 않은 일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신들이 《실록(實錄)》을 상고해보자고 청한 것은 사실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었는데, 성상의 하교가 그러하시니 너무도 황공합니다."
하였다. 상이 빈청(賓廳)이 아뢴 내용에 대한 비답을 구두로 부르면서 석주(錫胄)에게 명하여 받아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기해년에는 복제 의정 때 장자·중자에 관한 설이 있었다고 듣지 못했다. 다만, 당연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상소에 대한 복계(覆啓)로 하여 의견을 수합할 때 그 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는 국가가 채택 시행한 일이 아니었는데, 지금 복제 의정 때에 와서 감히 중서(衆庶)니, 대공이니 하는 설을 꺼내고 있고, 《대전(大典)》의 오복(五服) 조항에는 승통(承統)에 관한 항목이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비록 시왕(時王)이 만든 예제라고 하더라도 그게 바로 미비된 점이다. 하교가 있었다는 핑계로 예경(禮經)을 참고하지 않았으니, 오늘 회의는 그 의의가 어디 있는가. 그러한 내용으로 다시 자세히 살펴 의계하라."
하였다. 글을 다 쓰고 나자, 수흥 등이 물러갔다.

 

영의정 김수흥, 행 호조 판서 민유중, 병조 판서 김만기, 이조 판서 홍처량, 행 대사헌 강백년, 형조 판서 이은상, 예조 판서 이준구, 예조 참의 이규령, 응교 최후상, 헌납 홍만종이 빈청에 모여 의계하였다.
"신들이 원래 예율(禮律)에 어두워 전후 성상의 유시가 그렇게 상세할 수가 없었는데도 끝내 고례도 인용하고 지금의 것도 고증하여 의심되는 점을 분명하게 해석함으로써 물으신 그 뜻을 앙답하지 못하고 이렇게 또 다시 논의하라는 하교까지 있게 만들었으니 너무나도 부끄럽고 황송하고 두렵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의 복제로 말하면 기해년에 이미 확정을 본 논의에 따라 국전(國典)을 그대로 준용하기로 한 것이나, 본 조항 하단에 장자·중자에 관한 기록이 어차피 있기 때문에 의계하는 즈음에 부득이 윤서(倫序) 문제를 일단은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고, 승통(承統) 설에 있어 그것을 예경에 참고해보지 않았던 것은 신들의 망녕된 생각으로는 ‘모든 것을 국제대로 따르라.’는 하교를 이미 받은 바 있기 때문에 감히 곁으로 고례까지를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의례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상고하면 대개가 경자년 이후로 제신들이 일찍이 논변했던 내용들인데, 그러나 그것말고는 달리 전거를 삼을 만한 전례(典禮)가 없기 때문에 감히 여기에다 그 학설을 간추려 다시 설명드릴까 합니다.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父爲長子]’의 주소(註疏)에 의하면, ‘제일 맏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 아들을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 하였는데, 그 말을 띄워놓고 볼것 같으면 마치 적처가 낳은 아들로서 승중(承重)을 하게 되면 통틀어 그를 장자라고 한다는 것 같으나 그러나 그 아래 와서 또 말하기를 ‘비록 장자라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네 종류가 있다.’ 하였습니다. 넷 중의 세 번째가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는 것으로 바로 서자(庶子)를 후사로 세우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서자 해석에 있어서는, ‘서(庶)라고 한 것은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로 서자란 첩이 낳은 아들의 호칭이고 적처가 낳은 둘째는 그것이 중자(衆子)이지만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명명한 것은 장자와 분명한 구별을 두기 위하여 첩의 아들과 같은 호칭을 쓴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는 또 적처가 낳았더라도 둘째로서 승중한 자이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적처가 낳은 둘째라고 말은 똑같은 말인데 하나는 장자라고 하여 삼년복을 입고, 하나는 서자라고 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면 이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네 종류의 설에 있어서도 그 첫번째가 정체(正體)이면서 전중(傳重)을 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이는 적자(適子)로서 몹쓸 병이 있어 종묘(宗廟)를 맡을 수 없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을 가지고 면밀히 상고해 보면 아까 위에서 말한 ‘둘째라도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 한 것은 아마 적자가 몹쓸 병이 있어 그 다음으로 후사가 된 자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병자인 적자에 대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둘째아들이지만 역시 장자라고 명명하고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 적부(適婦) 조항의 주소에도, ‘무릇 부모가 자식에게나,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있어 적자·적부에게 전중을 할 수 없는 경우와 장차 전중할 곳이 적자 적부가 아닌 경우는 복을 모두 서자·서부에의 그것과 같이 입는다.’ 하였는데, 이상 여러 조항에서 논한 것들을 반복하여 이리 저리 참고해보면 오늘의 복제에 있어, 국전에 정한 대공복으로 하는 것이 예경의 뜻에도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으나 고례의 정미한 이면적인 문제는 신들 얕은 소견으로 단정할 바 아닌 것이어서 어제 실록을 상고하자고 청한 것도 조종조에서 이미 행했던 예제를 알아내어 그대로 준행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신중을 기하자는 뜻일 뿐 달리 논의할 길이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7월 15일 정축

상이 답하였다.
"이 아뢰어 온 내용을 보니 더욱 가슴 아프고 놀랍고 무상함을 느끼겠다. 경들 모두가 선왕의 각별한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 지금 와서 감히, 혈통이기는 하나 정통은 아니라는[體而不正] 것을 내세워 오늘의 예율(禮律)이 되어야 한다고 단정한다는 말인가. 서자란, 분명한 구별을 위한 것이라는 말도 네 개 조항에 있어서의 ‘삼년을 입을 수 없다.’한 것과는 문맥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위장자(父爲長子)’라는 네 글자 아래다 해석을 붙이기를, ‘둘째아들을 세우고도 장자라고 명명한다.’ 하였고, 그 아래 전(傳)에서는 이르기를 ‘위로 하여 정체(正體)가 되고 있다.’ 하였는데, 그래도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아뢴 내용 중 네 종류의 설에 대하여, ‘정체이면서 전중을 할 수 없는 경우는 적자가 몹쓸 병이 있어 종묘를 맡을 수 없게 된 경우를 말한다.’ 운운했는데, 나는 그 설이 크게 서로 뒤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이르기를, ‘제일 맏아들이 죽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아들을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한다.’ 하였는데, 경들은 지금 ‘종묘를 맡을 수 없게 된 사람’, 이것을 인용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묘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고, ‘그를 세우고도 역시 그렇게 명명한다고.’ 한 것은 죽은 이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그런데 경들은 그렇게 사리에 당치도 않은 패설(悖說)을 예율(禮律)로 내세워 선왕을 가리켜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임금에 대하여 박절하다고 하겠다. 도대체 어디에다 후하게 하기 위하여 그런 것인가? 막중한 예를 그렇게 어느 특정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논법으로 단안을 내려 바꿀 수 없는 제도라고 할 수는 결코 없으니 당초에 마련했던 대로 국제(國制)의 기년(朞年) 예제를 따르도록 하라."

 

상이 하교하기를,
"초상 때 해조가 복제를 기년으로 정했던 것이 참으로 사리에 맞은 일이었는데, 갑자기 근거없는 말이 나돌아 기해년의 전례도 상고해보지 않고, 또 논의를 거쳐 결정할 것을 청한 일도 없이 곧바로 부표(付標)를 하였으며, 아뢴 내용에 있어서도 그 꾸며진 말들이 분명하지가 못하였으니, 그들이 직책 수행을 제대로 않고, 중서(衆庶)는 대공(大功)이어야 한다는 저들 속사정만 가지고서 흐리멍덩 마련을 한 그 죄를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당시의 예관 및 낭관(郞官)들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하고 죄를 과하라."
하여, 이에 조형(趙珩)·김익경(金益炅)·홍주국(洪柱國)·임이도(任以道) 등이 다시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았고, 금상(今上)이 즉위한 후에 비로소 정배(定配)를 논하였던 것이다.

 

판중추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형조 판서 이은상(李殷相),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耉), 예조 참의 이규령(李奎齡), 부응교 최후상(崔後尙), 헌납 홍만종(洪萬鐘)이 상소하기를,
"신들 모두가 식견이 몽매한 자들로서 예를 논의하라는 명령을 갑자기 받고는 다만 《예경(禮經)》의 주석 내용에 의거하여 망녕되이 진달한 바 있었으니 참람한 죄를 면하기 어려움은 당연하지만 지금 와서 이렇게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이 모두가 신들이 불충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저질러진 것들로서 이러한 죄명을 지고서야 단 하루도 하늘 땅 사이에서 숨을 쉬고 지낼 수 없는 일이기에 감히 대궐 아래 엎드려 짚자리를 깔고 명령을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들을 지체없이 사패(司敗)에 내리셔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대죄할 것 없다고 답하였다.

 

7월 16일 무인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春川)에 부처(付處)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대신은 그 직책이 장부에 기재된 내용이나 그대로 받들어 행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큰 일을 당했을 때 초지를 바꾸지 않아야지만 비로소 임금에게 도움을 주고 국사를 꾸려갈 수 있는 것이다. 영상 김수흥은 복제(服制)에 관한 회의 때 처음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로 지면을 채워 끝내 무슨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고, 두 번째 아뢰면서는 인용하지 않아야 할 고례(古例)를 인용하여 확고한 주관 없이 회계(回啓)하였으며, 세 번째는 국전(國典)의 몇 마디 말로 겨우 책임 면제 정도의 대답을 하더니, 네 번째 아뢰면서는 감히 윤리에도 맞지 않고 사리에도 당찮은 체이부정이라는 말을 끄집어내어 말하고 있으니 그의 선왕의 은덕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 주장에 부동한 죄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그를 중도 부처하라."

 

정원과 옥당이 청대하니 상이 일렀다.
"기분이 매우 불쾌하다. 무슨 일 때문에 청대를 하는 것인가? 혹시 대신을 위하여 그러는 것 아닌가.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의리가 매우 엄전한 것인데, 그대들이 그 문제는 도무지 생각을 않는다는 것인가. 비록 입시를 하더라도 그 일 말고야 무슨 기이한 말이 있겠는가."

 

좌승지 이단석(李端錫), 좌부승지 김석주(金錫胄), 우부승지 정유악(鄭維岳) 등이 아뢰기를,
"영의정 김수흥이 수석(首席)에 있는 몸으로 갑자기 큰 문제에 부닥쳐 전후 진계했던 것이 다만 주소(註疏)에 의거하여 중론을 채집했을 뿐인데, 그에게 별 정상 참작도 없이 편배(編配)의 법을 적용하고, 심지어 선왕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 논의에 동조하고 있다고까지 하신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이해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의 명령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두 번째 아뢰기를,
"예(禮)를 논하는 사람을 두고 예로부터, ‘모여 저마다 한 마디씩 말하는 싸움[聚訟]’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맞고 안 맞는 것을 구별하고 해석을 하고 하자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화기있고 따스하고 곡진해야 하는 것이고 또 임금으로서는 벌을 신중히하는 의미에서 더욱 내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데, 어젯밤 빈청에 내린 비답에는 ‘어디에다 후하게 하기 위해서냐’ 하는 하교가 있더니, 오늘 대신을 논책하면서는 또 ‘선왕을 망각하고 있다.’는 죄목을 씌우셨습니다. 아, 오늘의 뭇 신하들 모두가 성상께서 평일에 가까이하고 신임하지 않은 자 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하들이 가까이할 사람은 우리 임금이지 우리 임금을 두고 다시 후하게 할 데가 어디 있겠으며, 또 어찌 하늘 같고 땅 같은 우리 선왕의 은덕을 망각하고 달리 무슨 이익을 찾을 것입니까. 공평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이해해야하는 대성인(大聖人)의 도리에 어긋난 점이 있지 않을까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 많은 말 하지 않으리라. 다시 번거롭게 굴지 말라."
하였다.

 

교리 조근(趙根), 부수찬 권유(權愈)가 상차하기를,
"빈청이 논의하여 아뢴 예는 그게 다만 자기들 소견을 개진한 것일 뿐 털끝만큼도 선왕을 폄박한 뜻이 없는데, 전하께서는 ‘어디에다 후하게 하기 위해서인가.’하면서 의심까지 할 정도이고, 또 ‘선왕의 은덕을 망각했다.’고 죄를 내리셨으니, 아, 오늘의 대신이 어찌 그렇게야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장자·중자의 설도, 그게 오늘 와서 대신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경자년 이후로 그 말을 한 자가 많았었습니다. 그것을 국가에서 채택하여 그대로 쓴 일은 비록 없었지만 갑론을박하는 것을 전하께서도 일찍이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빈청이 비록 그렇게 다시 아뢰었을지라도 성명께서 만약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시라면 역시 지난 날과 같이 채택하지 않으면 그뿐이지 어찌 꼭 인정에 벗어난 하교를 하시고 끝내 편배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신들이 비록 매우 우매하지만 군신 간의 의리가 지엄하다는 것은 역시 알고 있습니다. 임금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를 보면 그야 송골매가 참새 쫓듯 당연히 겨를이 없을 일이지 대신이라 하여 감히 구제하려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김수흥 부처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 끝부분 말은 내 매우 놀라운 것이다. 기해년에 갑론을박할 때는 국가에서는 이미 국전(國典)을 쓰고 있었고, 또 장자·중자의 구별도 없었기 때문에 물시했으면 그 뿐이지만 지금은 기해년에 갑론을박하던 것을 주워모아 그것을 근거로 오늘의 복제를 내리깎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기해년에 그냥 물시했던 그것과 사정이 같다는 말인가. 그대들도 그것을 인용하여 오늘의 법식을 삼으려는 속셈인가. 그러고서도 감히, ‘송골매가 참새 쫓듯 한다.’고 하고 있으니 자못 터무니없는 짓이다."
하였다.

 

장령 이광적(李光迪), 지평 유지발(柳之發)이 아뢰기를,
"국가 복제에 있어 비록 이미 정해진 전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이 워낙 중대한 일이므로 다시 여쭙고 논의를 거쳐 처리했어야 했는데, 해조가 곧바로 부표를 청한 것은 사실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본 마음이야 무슨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창졸간에 자세히 살피지 않고 했던 것에 불과한데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기로 하면 어찌 나국(拿鞫)까지야 가겠습니까. 예관을 나국하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예가(禮家)들 논설은 마치 싸움거리를 모아놓은 인상입니다. 빈청의 의계(儀啓)가 설사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아뢴 대답이 역시 오늘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도 아니고, 그들 본 마음이야 단연 딴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또 선왕을 폄박한 뜻은 털끝만큼도 사실 없습니다. 따라서 조용히 강정(講定)하여 지당한 결과를 가져왔어야 옳았는데, 지금 조금도 가차없이 너무나 다그치시고 심지어 선왕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 논의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으셨으니 그러한 죄명은 비록 일반 관료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함부로 과하지는 못할 일인데, 하물며 대신이겠습니까. 우레와 같은 위엄을 조금 누그러뜨리시고 김수흥 중도 부처의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관 나국의 명령을 도로 거두라는 이 아룀을 보니 참으로 너무 놀랍다. 조형 등이 예관의 몸으로서 막중한 예제에 대하여 비록 개정할 일이 있어 분명하게 주달할 일이라도 감히 곧바로 청하지 못하고, ‘대신과 논의하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는 것은 그 일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에서 으레 다 그렇게 하는 것이다. 대왕 대비 복제를 올리고 내리는 일이 그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담당관이라는 자가 보통일로 보아넘기고는 곧바로 부표를 했고, 또 대관(臺官)으로서는 그러한 일이라면 당연히 준엄한 내용으로 죄를 청해야 옳을 일인데 도리어 그들을 구제하려고 하니, 그대들이야말로 대각 중에서 가장 몰상식하고 직책 수행을 제대로 못하는 자들이다. 무슨 면목으로 길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것인가. 끝부분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옥당에 한 비답에 언급이 되었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장령 이광적, 지평 유지발을 갈아치우라."
하였다. 그리고 또 하교하기를,
"국가가 대관을 둔 목적이 어디 그들 몸에 영화를 주기 위한 것뿐이겠는가. 직무 수행을 제대로 못하는 자를 규찰 탄핵하는 것이 바로 그들 직책인데, 이번에 이광적·유지발 등은 제 직책은 생각지 않고 오히려 구제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사를 위하여 공을 무시한 죄를 징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둘 다 관직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추방하라."
하였는데, 비답이 내렸을 때 성문이 이미 닫혀 있어 정원(政院)이 표신(標信)을 주어 내보낼 것을 계청하자, 전계(傳啓) 대관에게 전교하기를,
"대간이라도 죄를 받은 후면 대간으로 대우해서 안 될 일인데 정원이 어찌 감히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는가."
하여, 광적이 수문장(守門將)의 청에서 밤을 지새고 다음날 새벽에야 나갔다.

 

장선징을 예조 판서로, 권대운(權大運)을 우참찬 겸 판의금으로, 이익상(李翊相)을 대사간으로,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송창(宋昌)을 집의(執義)로 각각 삼고,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시현(李時顯),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희년(李喜年)은 남다른 치적을 남겼다 하여 둘 다 통정(通政)으로 가자할 것을 명하였다.

 

7월 17일 기묘

상이 하교하였다
"대왕 대비 복제를 기년으로 고쳐 성복(成服)하되 삭제(朔祭)때 사유를 고하고 거행하도록 하라."

 

좌승지 이단석(李端錫), 좌부승지 김석주(金錫胄), 동부승지 정유악(鄭維岳)이, 이광적·유지발에 대한 삭출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박원도(朴元度)를 지평으로, 이훤(李藼)을 보덕으로, 김만중(金萬重)을 교리로 각각 삼았다.

 

집의 송창(宋昌)이 예관의 나국과 김수흥의 부처 그리고 이광적 등의 삭출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광적 등이 제 직분에 맞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그대가 이 말들을 주워모아 그렇게 연거푸 계청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그들 실태도 엄호될 수 있고 죄도 구제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인가. 어쩌면 그렇게도 생각들이 부족한가. 내 참으로 놀랄 일이다."
하여, 송창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예관을 나국한다는 것은 성조(聖朝)에 있어 지나친 처사이온데, 신이 어찌 감히 뜻에 저촉될까를 두려워하여 그를 쟁집하지 않을 것입니까. 먼저 간관의 직에 있으면서 이미 초고를 짜가지고 대각에 왔다가 그 시기에 마침 본직으로 옮기게 되어 미처 전계(傳啓)를 못했을 뿐인데, 그것이 어찌 남이 한 말을 주워모은 것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뢴 내용이 사실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충정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게 어찌 실태를 엄호하고 그들을 죄로부터 구제하자는 뜻이겠습니까. 신이 그 두 신과 함께 엄중한 꾸짖음을 받지 못 했던 것이 이미 너무도 황공하고 부끄러운 일인데, 게다가 또 마음에도 없는 하교를 이렇게까지 하시니 어떻게 감히 자리를 지키고 그대로 앉았겠습니까. 신의 직을 전삭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장령 정창도가 처치로 나오게 할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교리 조근(趙根), 부수찬 권유(權愈)도 상차하여, 이광적 등의 삭출과 김수흥을 부처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으나, 상은 번거롭게 말라는 답을 하였다.

 

역관(譯官) 장효건(張孝建)의 모친 나이가 106세였는데, 쌀과 명주베 어찬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이어 매월 쌀 8말씩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7월 18일 경진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선정전(宣政殿)이 기울어진 곳이 있는데 그를 수리하지 않았다가는 틀림없이 점점 더 못쓰게 될 것이니 8월 초에 수리하도록 호조와 병조에 분부하라."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추함(推緘)을 마감하지 못한 일 때문에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장령 정창도가 예관 나국 문제, 김수흥 부처 문제 그리고 이광적 등 삭출 문제에 대하여 그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연거푸 아뢰었으나 다 따르지 않았다.

 

7월 19일 신사

이혜(李嵆)를 대사간으로, 이항(李沆)을 정언으로, 나이준(羅以俊)을 부수찬으로, 이당규(李堂揆)를 승지로 삼았다.

 

빈청이 의계했을 때, 여러 재신을 다 부르라고 했는데, 우참찬 이상진(李尙眞)은 그때 병으로 하여 오지 못했다가 지금 와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이어 아뢰기를,
"엎드려 근일의 저보(邸報)를 보고 성상께서 지나친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마음에 걱정이 되어 감히 인죄(引罪)의 글월에다 약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사실 식견이 고루하여 예라는 것은 원래 잘 모르지만 지금 성상의 하교를 볼 때 결국 국전(國典)에 의하도록 단안을 내리셨는데, 만약 애당초 국전에 의하여 기년으로 고쳐 정하자는 뜻으로 물으시고 그에 대한 강론을 익히 했더라면 조용히 마무리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이미 마음에 정해두고도 그것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신 채 누차에 걸쳐 군색한 물음을 내리시다가 뒤이어 준엄한 질책을 하시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성신(誠信)의 도에 어긋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이 헌의하면서 증거로 제시한 것도 역시 종전부터 변론해왔던 문제들에 불과한데, 예를 말하는 사람들이란 원래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말 다툼이라고 할 정도인 것으로, 다만 그를 절충하여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 그뿐이지 무슨 꼭 화를 내야 할 일이 있겠습니까. 옛날 관대하게 포용했던 자들을 오늘 와서 모두 준엄하게 물리치고, 전후 내리신 성지가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가 끝에 가서는 대신을 척출(斥黜)까지 하여 다른 대신들 그리고 여러 경재(卿宰)들이 모두 자기들도 죄가 같다 하고 성 밖에서 대명(待命)하고 있어, 직무 수행을 않고 적체되어 있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 여러 신하들이 자기들 죄명 때문에 활동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신이 풀려나기 전에는 감히 얼굴을 들고 직무 수행을 못할 것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정이 비어버릴 것이니, 전하께서는 누구와 함께 나라 일을 다스릴 것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마음을 가라앉혀 천천히 살펴보시고 내린 명령을 빨리 거두어 뭇 신하들로 하여금 성상이 화내신 것이 화낸 게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뜻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고, 각자 노력하여 국사를 함께 해나가게 하시면 그야말로 국가로 보아 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 일에 대하여 그를 어떻게 예우(禮遇)니 총임(寵任)이니 하며 논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해못할 것 중 그것이 하나이다. 국가적 처분이 이미 정해진 뒤에도 뭇 신하들은 대신이 풀려나기 전에 직무 수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그 세력을 빙자하여 이쪽을 겸제하려는 뜻이다. 그게 무슨 임금 섬기는 도리인가. 그것이 내 두 번째로 이해못할 일이다. 오늘 일이야말로 한심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가 상차하기를,
"영의정 김수흥이 의계할 때 육경(六卿)·삼사(三司)도 같은 의견으로 같은 주장이었으니 그렇다면 그것이 어느 한 사람의 편견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고, 또 더구나 《예경(禮經)》 주소에서 한 말들은 그게 바로 경자년 쟁변 때 하던 말들로서 역시 오늘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 아님을 알 만한데, 뜻하지 않게 성명께서 바로 처음 만들어낸 말이라는 것으로 죄안을 꾸며 느닷없이 편배(編配)의 율을 적용하셨습니다. 신으로서 가슴이 미어질듯 답답하고 밤낮 걱정을 하는 것은 성명의 조정에서 그러한 지나친 일이 있었다고 해서 뿐만이 아니라 이후로도 무슨 일이 있어 신하들 의견을 묻게 되면 그들 모두가 오늘의 일을 경계삼아 혹시 한 마디라도 저촉이 있을까 두려워 서로 돌아보며 어물거리지 그 누가 입을 열어 자기 소견을 다 말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는 조정의 복이 아닌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깊이 생각하셔 김수흥에 대한 준엄한 견책을 거두시고, 명을 기다리는 제신들도 서둘러 부르셔서 모두 직무 수행에 임하고 빈 자리가 없도록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예관이 애당초 난상숙의를 하지 않고 추후에 고친 것은 조종조 시절에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조정 안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 예를 아는 신하들이 상당수였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 그렇게 본다면 오늘의 실정으로 보아 이해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또 헌부의 관리들은 언지(言地)에 있는 몸들로서 일이 있을 때마다 논쟁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직책인데, 어찌 예관을 구출할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노갑이을(怒甲移乙)격으로 그들까지 모두 삭출의 벌을 내리셨으니 그 역시 너무 미안한 일 아닙니까. 신은 죽을 때가 임박한 데다 독한 학질까지 걸려 전혀 기동할 가망이라곤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서둘러 신의 본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 내에 이른바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라는 경의 말이 내 뜻과는 크게 다르다. 지난번 대신들 수의(收議) 때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는 말이 전혀 없었고, 경자년에 쟁변했던 말들은 국가가 채택하지 않은, 일장의 알맹이 없는 말이었는데, 오늘 빈청이 아뢰면서 감히 그 말을 끄집어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만약, 대신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 아니니 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죄는 누가 받아야 할 것인가.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서둘러 제신들을 부르라고 한 말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다. 혹 무슨 일로 하여 명을 받은 자도 있고 혹은 일을 맡고 있는 중에 새로 내린 명령을 받은 자도 있는데, 대명(待命)한다 하여 깜깜 무소식이니 국가가 죄를 내려야 하겠으면 내리는 것이지 무엇이 두려워 못 내릴 것인가. 이미 결정하여 처분이 내려진 후에도 대명을 한다 하여 깜깜 무소식이다가 꼭 소명(召命)이 있어야지만 나오려고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임금을 진실되게 섬기는 뜻이 아닌 것이다. 경은 마음 편히 직을 사직하지 말고 조용히 조리에 힘쓰라."
하였다.

 

7월 20일 임오

진위 겸 진향 정사(陳慰兼進香正使) 민점(閔點), 부사 목내선(睦來善), 서장관 강석구(姜碩耉), 진위사(陳慰使) 영신군(靈愼君) 이형(李瀅)이 청나라에 갔다. 민점(閔點) 등은 황후의 상 진위사로 간 것이고, 영은 군대 문제 및 화재에 대한 진위사로 간 것이다.

 

7월 21일 계미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행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형조 판서 이은상(李殷相)이 모두 성문 밖에 나가 대죄하고 있으면서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빈청 회의 때 대신이 성상 하교에 의하여 각기 소견을 개진하도록 하였던바 뭇 의견이 조금도 들쭉날쭉이 없이 일치를 본 연후에 비로소 연명으로 네 번째 아뢰었던 것인데, 지금 상신(相臣)이 이미 편배의 벌을 당했으니 동참했던 사람들로서 도리상 요행히 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신들에게도 죄를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가 처분으로 이미 결정된 일인데 왜 형식에만 집착들 하는가. 경들은 사직하지 말고 직을 살피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기를,
"신도 빈청이 회의하여 회계하던 날 처음부터 끝까지 의견이 일치하였고 회계 내용의 글자 같은 것도 모두 함께 상의하여 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죄가 있거나 없거나 혼자만 달리 취급될 수 없는 일이며 신은 더구나 대신의 직책을 더럽히고 있고 지위도 우열(右列)에 있어 일반 경재(卿宰)에 비하여 더욱 다른 바가 있는데, 벌이 내려지는 데 있어 어떻게 요행히 면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물러가 성 밖에 엎드려 엄명이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아무리 들어봐도 처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위관(委官)을 맡으라는 명령에 있어서는 결코 죄지은 신하로서 승당할 바 아닙니다. 막중한 성국(省鞫)이 신 때문에 시일을 끈다면 이는 죄 내리기를 기다리다가 죄 하나를 더 보태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을 다른 신들과 똑같이 논죄하여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가 처치로 이미 결정된 사항이니 경으로서는 굳이 인죄(引罪)할 것 없다. 그리고 성국이 시일을 끌게 되면 그 역시 사체에 손상을 주는 일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이혜(李嵆)가 추함(推緘)을 마감하지 못한 일로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7월 22일 갑신

안후태(安後泰)를 장령으로, 남이성(南二星)을 대사간으로, 이훤(李藼)을 응교로, 신후재(申厚載)를 교리로, 임규(任奎)·강석창(姜碩昌)을 수찬으로, 어진익(魚震翼)을 동래 부사로 각각 삼았다.

 

우부승지 정유악(鄭維岳)을 보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들을 적간하여 죄질이 가벼운 자는 석방하고, 나머지 들도 해사로 하여금 제때제때 소결(疏決)하게 하도록 하였다.

 

호조 판서 민유중, 병조 판서 김만기도 성문 밖에서 대죄하면서 서로 이어 소를 올리고 주장하기를,
"빈청 회의 때 기초하는 과정에서 신이 혹 집필을 하기도 하였고, 혹은 참고하는 과정에서 비교 결정하기도 하였으니, 규례에 따라 그냥 참석만 했던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대신 혼자서 그 죄를 당하게 하고 요행수로 죄를 면한 채 그대로 자리를 더럽히고 있다면 그게 어디 성조에서 죄를 결정하고 벌을 적용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죄를 똑같이 과하여 나라의 법을 존엄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은 이들 모두에게 국가 처분으로 이미 결정된 사항이니 사직하지 말고 직을 살피라고 답하였다.

 

좌의정 정지화가 또 상차하기를,
"지난번 빈청에서 예를 논의할 때 성상께서 그 복제가 맞느냐 안 맞느냐에 대해서만 의견을 물으신 것이 아니고 기해년 복제에 대해서도 그 당시 기록을 상고해 보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제신들은 성상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오늘로서는 이미 채택하지 않고 알맹이 없는 말이 되어버린 전일에 말했던 주소(註疏) 내의 이야기를 다시 거론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사실 성상의 뜻을 이해 못한 소치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 뜻을 살펴본다면 혹 용서하는 길도 있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 만약 당초에 복제의 맞고 안 맞고를 띄워 놓고 묻지 않으시고 곧바로 대공(大功)은 미안하다는 뜻으로 물으셨더라면 제신들 대답도 그 사이에 이의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이미 뜻을 분명히 밝히시지도 않았고 또 기록을 상고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여 그렇게 된 것인데, 느닷없이 마음에도 없는 하교를 하시고 정도에 지나친 벌을 내리신 것은 저으기 성상을 위해 애석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신들이 물러가 엎드려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종전부터 죄를 얻은 조신(朝臣)들이 혹시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를 경우 감히 얼굴을 들고 억지로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상께서도 되도록 그들 뜻대로 들어주었는데, 그는 염우로 보아 당연히 그래야 할 뿐 아니라 신하를 예로 부리는 방법으로서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신이 전번 차자에서 청했던, 서둘러 제신들을 부르시라고 한 것은 그것이 김수흥에 대한 준엄한 책벌을 거두어 들이고 나서 그 이후에 해야 할 일이었는데, 병들어 있으면서 혼망 중에 뜻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말을 하여 너무도 황송했습니다. 신이 번거롭고 외람된 일인 것도 불고하고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제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상의 덕을 위함이요, 국사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고, 이어 병세를 진달하고 면직을 빌었다. 상이 답하기를,
"차자 내에 이른바, 기록을 상고하라는 말에 얽매여 그렇게 되었다고 한 말은 매우 괴이하다. 나는 기록을 상고하라기 이전의 등대(登對) 때 이미 내 의사를 말했던 것이다. 경이 비록 견루[牽] 그 한 자를 내세워 그것이 부정(不正)이었다고 지목하려고 하지만 내 어찌 털 하나나 까닥하겠는가. 나는 오늘 제신들이 너무나 국가에서 채택하지도 않은 알맹이 없는 말에 얽매여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공이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첫날 인접(引接) 때 이미 말한 것인데 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리고 염우라는 것도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지 일률적으로 논할 것이 아닌 것이다. 경은 지금 그것을 내세워 김수흥을 구제하려는 속셈인가. 지금 당장 재상 자리가 공백이 있어, 경이 나오기를 기다려서 논의하여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경은 마음을 편히 갖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 송창(宋昌), 장령 정창도(丁昌燾), 지평 김빈(金賓)이 병조 참의 박세견(朴世堅)을 추고하여 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법 적용이 잘못되었다 하여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7월 23일 을유

판부사 김수항이 또 상소하기를,
"신의 실정으로 보아 면목없이 다시 나갈 수는 절대로 없으니 바라건대 위관 임무를 빨리 고쳐 맡기시고 이어 직명(職名)을 전삭하여 신 개인 본분에 편안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마지막 아뢸 때 경은 불참했었는데, 그렇게 굳이 사양함으로써 성국(省鞫)이 시일을 끌게 만들면 나는 그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은 편안한 마음으로 공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수항이 경사전(敬思殿) 헌관(獻官)에 차출되어, 빈청이 네 번째 아뢸 때는 불참했었기 때문에 상이 이렇게 하교한 것이다.

 

부교리 조근(趙根)·이유(李濡), 부수찬 권유(權愈)가 상차하기를,
"오늘의 나라 형세가 그야말로 위태위태하다고 하겠습니다. 민원(民怨)은 이미 극에 달했고, 외우(外虞)도 현재 점점 깊어가고 있으며, 이변이 겹으로 나타나고 수재·한재가 연속되고 있는데, 이렇고서야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금방 무너질 것만 같은 형세가 달걀을 쌓아 올리고 바둑알을 쌓아올린 것보다도 더 위태로움을 눈으로 보시면서도,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오직 진작(振作)에 힘써 이를 만회할 대책은 생각지 않으시고 정령(正令)이나 말하시고 하는 일들이 태연하고 느슨하기 평일과 다를 바 없으며, 바른말 듣기 싫어하시는 것도 전일과 똑같습니다. 기껏 살피고 서두시는 것들이라는 게 자질구레한 일들일 뿐, 일 하나 정사 하나도 조금이나마 백성의 마음에 위안을 주고 하늘의 뜻에 답하는 것이라곤 없으니, 혹시 전하께서 깊이 구중궁궐에 계시면서 안일이 몸에 배어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까?
선정전(宣政殿)의 무너진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는 비록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경황없이 서둘러야 할 급선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한 채의 전각 수리를 그렇게 다급하게 서두실 것이 뭡니까. 아, 삼백 년 종묘사직이 전복의 지경에 처하여 붙잡을 수가 없게 된다면 집 몇칸 무너지는 것이야 돌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삼남(三南)에 어사(御史)를 보내는 일도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일인 것을 대각의 논계로 인하여 물렸는데, 그 물린 자체가 이미 잘못이었습니다.
가을은 이미 깊어가는데 보낼 날짜는 기약이 없으니 그게 무슨 일입니까. 호남·영남은 군현(郡縣)도 많고 진포(鎭浦)도 많아서 비록 제때에 보내더라도 빨리 마치기가 쉽잖은 실정입니다. 따라서 어사로 선임된 자들은 꼭 며칠 안으로 내려보내야 할 것이지만 몇 사람 더 차출하여 고을을 나눠 맡아 순찰하도록 하면 잘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고(逃故) 문제에 있어서도 그 변통의 방법을 서둘러 강구해야 할 것인데, 비국(備局) 빈청(賓廳)의 모임이 열흘이 다되도록 깜깜 무소식이고 앞으로도 언제 열릴 것인지 기약이 없어 더욱 뭇사람들이 함께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의 뜻이 담긴 길다란 말들에 대하여 내 마땅히 마음 깊이 간직하리라. 무너진 집을 보수하는 것은 하나의 일상적인 일에 불과한데 말이 화평(和平)하지 못하다. 그도 오직 경계의 뜻으로만 한 말인가. 어사를 더 보내는 문제는 일로 보아서는 비록 능률적이겠으나 폐단이 있어 그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전각 보수 건은 이미 그만두도록 명하였다."
하였다.

 

7월 24일 병술

상이 복통(腹痛)으로 하여 뜸치료를 받았다.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경재(卿宰) 등 제신들이 같은 사건에 벌이 다르다고 말하는데, 일찍이 선왕조 시절에 재상 이경여(李敬輿)가 세 차례나 가죄(加罪)를 당하여 안치(安置)까지 되었지만 그때 동참했던 제신들도 모두 그와 똑같이 벌을 받았던가?"
하니, 약방 제조 장선징이 아뢰기를,
"이미 오래 된 일이라서 기억은 잘 나지 않으나 듣기에 경여가 지레 나갔기 때문에 그 혼자서 죄를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도승지 윤심(尹深)에게 이르기를,
"그때 제신들도 똑같이 죄벌을 당했는지 그 여부를 일기(日記)에서 찾아내어 아뢰라."
하여, 윤심이 물러나와 아뢰기를,
"본원의 일기를 살펴보았더니 고 상신(故相臣) 이경여가 삭탈당하고 파출된 후 동참했던 제신들 모두가 대죄소(待罪疏)를 올린 사실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耉), 참의 이규령(李奎齡), 응교 최후상(崔後尙), 헌납 홍만종(洪萬鍾)이 연명으로 소를 올려, 대신과 똑같이 죄를 내려줄 것을 청했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을 살피라고 답하였다.

 

이때 가을 장마가 그치지 않아 사문(四門)에다 영제(禜祭)를 올렸다.

 

7월 25일 정해

청국 사신 패문(牌文)이 왔는데 제사를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가 판윤 김우형(金宇亨)을 원접사(遠接使)로 차출하자, 상이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을 차출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민유중이 그 날로 떠나갔고, 이조가 또 박상형(朴相馨)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차출하자, 상이 옥당을 차출하여 보내도록 명하여 교리 이유(李濡)를 문례관으로 삼았다.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을 멀리 진도(珍島)로 귀양보냈다. 이성이 상소하기를,
"기해년 대상(大喪) 이후로 복제에 관한 논의가 너무도 시끄러웠지만, 예를 논한답시고 심통 만을 부리던 저들 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각자 자기 소견을 지키고 자기 주장을 펴냈던 것뿐이므로 시끄러운 여러 말들을 놓고 성상이 단안을 내리면 되는 것입니다. 위에 계신 분이 참으로 공정한 입장에서 듣고 모두를 종합하여 살펴볼 양이면 그 속에는 득도 있을 것이고 실도 있을 것이며 또 혹 경중의 차이도 있기야 하겠으나 모두가 똑같은 나라 일이요 똑같이 예를 말한 것입니다. 을자(乙者)의 논이라 하여 그만 나라에 충성한 것도 아닐 것이며, 갑자(甲者)의 논이라고 감히 임금을 박대한 것이 아닐진대 기뻐하고 화를 내고 할 것이 애당초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빈청의 제신들만 하더라도 갑자기 명령을 받고서는 잠시 한때 상고했던 말들을 들어 망녕되이 옛것을 인용하여 지금 그대로 시행하려고 했으니, 그들이 올린 논의가 의당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을 줄이야 알지마는 그들 본 마음은 단연 딴것이 없고 오직 국가 전례(典禮)가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뿐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조용히 풀어보고 이리저리 맞추어서 꼭 맞게만 만들면 그뿐이지, 왜 그렇게 말씀이 절박하고 거조가 여유가 없이 무서운 위압으로 대하시고 편배(編配)의 벌까지 내려 마치 꼭 참으로 성을 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실 것은 뭡니까. 만약 성상께서 마음을 비워 사리를 밝히시고 성냄없이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신다면 지금의 대신에게 무슨 그리 큰 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후박(厚薄) 이 두 글자에 있어서는 더욱이 남의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인 것입니다. 만약 박하게 하는 곳이 있다면 반대로 후하게 하는 곳도 당연히 있을 것이니, 그 마음을 들어 죄를 과하기로 하면 목을 베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그 하교가 불평한 나머지 우연히 나온 것으로 알고 틀림없이 금방 뉘우치고 매듭없이 풀리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비망기 속의 ‘큰 일을 당하여 뜻을 바꾸지 않는다.’ 하신 그 하교에 있어서는 전하께서 무슨 마음으로 그러한 하교를 하신 것입니까. 외정(外廷)의 신하로서는 그 당시의 곡절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지만 보통 인정으로 논하자면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치붙고 내리붙고 하여 자기 소신을 바꾸는 것은 자기를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하는 짓인데, 지금 기(朞)·대공(大功)을 두고는 성상의 마음이 어디 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는 일로서 단지 말 한 마디에 이해(利害)가 갈라지는 판입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준엄한 하교 밑에서도 멍청하게 변통할 줄을 모르니, 이로움이 올 리 없고 해로움이 닥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제신들이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꽉 막힌 것이 죄라면 죄일지언정 소신을 바꾸었다고 한다면 신으로서는 감히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나라에 무슨 대단한 논의 또는 대단한 처치가 있은 후에는 그때 함께 일했던 신들은 으레 모두 차례차례 구퇴(求退)를 했는데, 송(宋)나라의 복의(濮議)032)                   때 여러 사람들이 취했던 행위가 바로 그 예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대부가 자기들 진퇴를 결정하는 데 있어 그 의의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대죄 중인 제신들도 이미 수상(首相)과 함께 일을 했었으니 머리를 나란히하고 견책을 기다리는 것은 인정 사세로 보아 실로 별 수 없는 일입니다. 전후 비답 내용이 한결같이 미안하기만 할 뿐이어서 진퇴를 결정하기가 참 딱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람 때문에 말까지 버리지 마시고 다시 맑은 마음으로 전후를 살피시어 상대를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시고 공명한 판단을 내리소서.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고 앞으로 되도록 관용을 베푸시어 국가가 화평하도록 복을 기르신다면 그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이성의 상소가 들어오자 즉시 그를 체차하도록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전 대사간        남이성이 감히 별도의 기치를 세우는 발론을 하고 앞장서서 울분을 터뜨리며 대신에게 아부하는 말로 감히, ‘반드시 빈청이 의계한 대로 해야지만 국가 전례가 털끝만큼도 미진한 점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각자 자기 견해를 지키고 자기 주장을 펴낸 것이며, 시끄러운 말들을 놓아두고 성상이 단안을 내리소서’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시끄러운 말들을 놓아두고 단안을 내리기 이전에는 자기 임금을 위하여 후한 쪽의 논의를 따라야 옳겠는가, 아니면 꼭 네 조항 중의 어느 한 조항을 택하여 박한 쪽의 논의를 따라야지만 그것이 남의 신하로서 바꿀 수 없는 의리가 될 것인가? 그러고도 또 감히 박한 쪽을 따르게 하는 패리의 말을 들어, 그리해야 털끝만큼도 미진한 점이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은 무슨 심사란 말인가. 그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자의 말인 것이다. 그의 앞에 붙고 뒤에 붙고 한 논의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멀리 절도(絶島)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우승지 이합(李柙), 동부승지 이당규(李堂揆)가 아뢰기를,
"남이성의 상소 내용이 설사 성상의 마음에 맞잖은 점이 있을지라도 그의 본 마음은 언지(言地)에 있는 몸으로서 군부(君父)가 하신 일이 지나친 것을 눈으로 보고서는 그 스스로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자기 신념으로 한 일입니다. 지금 바로 아부한다느니 임금을 무시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단안을 내려 그에게 죄를 과하고 절도로 귀양까지 보낸다면 성명의 세상에 그러한 지나친 일이 있으리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바라건대, 이성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번거롭게 말라고 답하고, 두 번째 아뢰었으나 역시 번거롭게 말라는 답이었다. 이어 하교하기를,
"남이성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전지(傳旨)를 지금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무슨 기다리는 일이 있어 그러는 것인가?"
하여, 정원이 아뢰기를,
"나라 일로 상소한 신하가 엄중한 견책을 당하고 있는데, 신들이 가까이 모시는 자리를 더럽히고 있으면서 소회를 남김없이 아뢰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전지를 미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정원이 세 번째 아뢸 내용을 쓰면서 절반도 채 못 썼을 때 하교하기를,
"초저녁에 명령이 내려진 일을 경고(更鼓)가 절반이 다 되어가는데, 두 번째 아뢴 내용에 대한 비답이 내려진 후에도 깜깜무소식이니 무엇을 기다리느라 그러는 것인가? 매우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입직 승지들을 모두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남이성의 정배 단자(定配單子)와 압거 단자(押去單子)를 삼경(三更) 전에 받아들이도록 정원은 즉시 금부(禁府)의 낭청을 불러 분부하라."
하였는데, 오경(五更) 일점(一點)에 정배와 압거의 두 단자가 들어왔다. 상은 즉시 그 단자를 내렸는데 그때가 오경 삼점(三點)이었다.

 

경기 감사가 치계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이 달 23일 음성(陰城)에서 죽산(竹山) 경내에 들어와 종의 이름으로 소장을 올리고는 대죄(待罪)를 위해 떠났는데, 가다가 도중에 병이 중하여 그대로 죽산에 있다고 합니다."

 

7월 26일 무자

부교리 조근(趙根)을 강서 현령(江西縣令)에 특별 제수하였다. 조근이 수찬 강석창(姜碩昌)과 상차하기를,
"듣건대 대사간 남이성을 멀리 절도로 귀양보내라고 하시고 심지어 ‘후박(厚薄), 아부(阿附), 망군(忘君), 부국(負國)’ 등의 하교가 있었다는데, 성상께서 무슨 일로 그리 격한 화를 내시고 점점 더 지나친 처분을 하다가 그렇게 극한 상황까지 가시는 것입니까. 지금 그 대공(大功) 복제를 국제(國制)에 의하여 처음 정했다가 뒤에 이미 고쳐 마련했는데, 그렇다면 이성의 상소에 어찌 감히 기치를 세우고 겨루어 이겨보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전후 예를 논의했던 사람들이 단연 딴 뜻은 없었다는 그 사실을 밝힌 것에 불과합니다. 성상께서는 번번이 네 조항 중의 하나를 들어 제신들이 거기에 후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시는데, 물론 절문(節文)과 의칙(儀則)에 있어 왕조(王朝)와 서민과는 그 쓰임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삼년상(三年喪) 제도에 있어서는 경전(經傳)의 주소가 모두 신분의 상하에 관계없이 통틀어 적용이 되는 말인 것입니다.
네 종류의 설도 그것을 말하기에는 비록 미안한 점이 있는 것 같지마는 그러나 신하가 되어 군부(君父)의 복제 논의를 하면서 그것을 혐의롭게 여겨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고인들이 무엇 때문에 애당초 그러한 문자들을 예경(禮經)에다 써놓았겠습니까. 오늘 제신들의 말은 다만 고례(古禮)를 증거로 원용하여 성상께서 공정하게 들으시기를 바랐던 것뿐이지 후박에 관하여는 감히 마음도 먹어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것은 이해하려 않으시고 곧 의심과 노기 만을 앞세워 한편으로는 ‘선왕을 잊고 있다.’ 하시면서, 또한 ‘다른 논의에 부동하고 있다.’ 하십니다. 하나같이 무장부도(無將不道)의 죄로 다스리려고만 하시니 그렇게 죄안을 꾸미기로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수족을 놀리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화평하게 가지시고 천천히 살피시어 이성을 절도로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오자 상이 하교하기를,
"이 차자를 지은 자가 누구인가? 정원은 물어서 아뢰라."
하여, 정원이 회계하기를,
"옥당(玉堂)에 물었더니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이 서로 의논해서 지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틀림없이 한 사람이 먼저 짓고 나서 상의했을 것 아닌가. 왜 대답을 그리하는가?"
하여, 정원이 아뢰기를,
"다시 물었더니 상번인 조근이 짓고 하번 강석창이 썼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옥당 관리가 대단히 존중한 것도 아닌데 왜 상번 하번을 함께 불러 묻지 아니하고 하번에게만 물어 이렇게 여러 번 왕복하게 만드는가. 매우 잘못된 일이로다."
하여, 회계하기를,
"원래 옥당 규칙으로는, 하번이 비답을 듣기로 되어 있으므로 이번에 물어 아뢸 때 하번이 와서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 명령이 있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수령들 중 만기가 된 경우, 또는 전최(殿最)로 하여 체임당한 곳 등이 17개 읍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번 칙사 행차가 이미 임박하고 있고 대정(大政)은 아직까지 기일도 정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직로(直路)에는 출참(出站) 등 많은 수응이 있어야 할 것이며, 각읍의 부마(夫馬)도 오래 유체되고 있어 폐단이 많습니다. 이조 판서 홍처량을 패초하여 인사사무를 관리하고 필요 인원을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처량은 패초를 받고 궐문 밖에 와 소를 올리고는 물러가버렸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전일의 복상 단자(卜相單子)를 들여오라."

 

허적(許積)을 영의정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좌의정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우의정으로, 이하진(李夏鎭)을 집의로, 이옥(李沃)을 지평으로, 김빈(金賓)을 장령으로, 이혜(李嵆)를 대사간으로, 송창(宋昌)을 사간으로, 이세익(李世翊)을 형조 참의로, 이익상(李翊相)을 공조 참의로, 이훤(李藼)을 보덕으로 각각 삼았다.

 

처음에 허적이 충주(忠州)로 내려 가면서 상소하여 자기 심정을 아뢰었는데, 지금 와서 상이 비답하였다.
"소를 보고서 경의 충정을 십분 이해하였고 내 뜻도 전후 면유(面諭) 때 이미 다 밝힌 바 있는데 다시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경은 어찌하여 매우 서둘러 나라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던가? 나로서는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되어 지금 사관(史官)을 보내 부르는 유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객사(客使)가 강을 건널 날이 임박하였으니 경은 편안한 마음으로 되도록 빨리 올라와 낭패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장령 안후태(安後泰), 지평 박원도(朴元度)가 예관의 나국(拿鞫), 김수흥의 부처(付處), 이광적(李光迪) 등의 삭출(削黜) 등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연거푸 아뢰었다. 아뢰기를,
"전 대사간 남이성이 언책(言責)의 위치에 있는 몸으로 임금이 정도에 지나친 일을 하시는 걸 직접 보고서 바로잡자는 뜻에서 자기 생각을 그대로 아뢴 것이니 그의 본마음을 살펴본다면 무슨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가 사용한 문자 중에서 어느 특정 부문을 따내어 죄안으로 삼고 느닷없이 찬축(竄逐) 명령을 내리셨으니 그게 어디 대성인으로서 대각을 우대하고 포용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부교리 조근도 경악(經幄)에 몸 담고 있으면서 충성을 바치자는 간절한 뜻으로 일장 차자를 올리자마자 금방 특별히 제수하여 보고 듣는 이를 모두 놀라게 했습니다. 헌관(憲官)·간신(諫臣)을 전후 계속하여 찬축하고 뒤 이어 또 논사(論思)의 신하까지 외직으로 내보내시니 그게 어디 성세(聖世)의 좋은 일이겠습니까. 바라건대, 남이성을 절도로 귀양보내고 조근을 외직에 보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다 따르지 않았다.

 

7월 27일 기축

이훤(李藼)을 응교로, 권해(權瑎)를 정언으로, 윤지선(尹趾善)을 부교리로 삼았다.

 

정언 송최(宋最)가 사간 송창(宋昌)과 형제로서 응당 상피해야 할 혐의가 있다 하여 인피했다가 체직되었다.

 

상이 뜸치료를 받았다.

 

7월 28일 경인

상이 또 뜸치료를 받았다. 이때 순회(順懷)033)  의 묘에 정자각(丁字閣)을 중수하면서 상량(上樑)을 해야 했는데, 예조 판서 장선징이 아뢰기를,
"예조의 당상(堂上) 1명이 나가서 역사 감독을 해야 되는데, 신은 현재 약방에 봉직 중이어서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고, 참판·참의는 모두 대죄 중이니 정원을 패초하여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는 염우(廉隅)들을 중히 여기고 있는데 비록 패초한들 나오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한참 후에 도승지 윤심(尹深)이 아뢰기를,
"예관 문제에 대하여 무슨 처분이 있어야 정원이 그대로 거행을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소에 대하여 비답이 이미 내려갔으니 나가고 안 가고는 저들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패초할 것 없다."
하였다.

 

대사간 이혜, 사간 송창 등이 김수흥의 부처, 이광적 등의 삭출, 남이성의 찬출, 조근의 외직 제수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29일 신묘

집의 이하진(李夏鎭)이 직함을 띤 채 사사로이 하향하였다 하여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고부사(告訃使) 유창(兪瑒), 서장관 권해(權瑎)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유창이 아뢰기를,
"신이 돌아오는 길에 사하역(沙河驛)에 당도하였을 때 상통사(上通事) 전천표(全天杓)가 쪽지 하나를 들고 와 신에게 보이면서, 청국 실록(實錄)에서 베낀 것이라고 자칭하기에 신이 살펴보았더니 바로 기해년 반정(反正) 후에 등래(登萊)의 무신(撫臣) 표가립(表可立)이 잘못 전했던 주본(奏本)으로서, 시골에 돌아다니는 야사(野史)에서 뽑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천표가 그것을 비장된 실록이라고 하고 있어 그렇게 속임 수법을 쓰는 그의 몰골이 너무 얄미웠는데, 뒤에 서장관 말을 들었더니, 천표가 그러한 주본을 10여 장이나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신에게는 끝까지 그 사실을 알리지 않기에 신이 약간 형신(刑訊)을 가하여 죄를 다스린 바 있는데, 천표가 병을 이유로 뒤떨어지더니 복명을 해야 할 오늘까지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면서 고칠 생각이라고는 전혀 않는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담당관으로 하여금 죄를 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응교 이헌, 부교리 윤지선이 상차하여, 김수흥의 부처, 예관의 나문, 남이성의 찬출, 이광적 등의 삭출, 조근의 외직 제수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거듭 계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