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8권, 현종 15년 1674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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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임진

상이 경사전(敬思殿) 삭제(朔祭)를 직접 모시려 했는데, 복통이 낫지 않아 약방으로부터 청이 있었기 때문에 대신 모시도록 명하였다.

 

대왕 대비 복제를 기년으로 고쳐 성복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기해년 복제를 국전에 의하여 의정할 때 정태화(鄭太和)가 이미 송시열이 주장한 네 종류의 예설을 채택하지 않았으면서도 결국 장자·중자의 호칭을 확실하게 구별해놓지 못하여, 갑인년에 와서 부표(付標)를 고치고 성복(成服)을 고치는 일이 있게 만들었는데, 태화의 지혜가 거기에 못 미쳤던 것은 아니지만 아마 그의 뜻은 굳이 송시열과 의견을 달리함으로써 시끄러운 사단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틀림없이 닥칠 화환이 오늘의 그것보다 훨씬 크리라는 것은 계산에 넣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아침에 저녁을 생각지 않은 소인배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렇기는 하나 태화가 만약 지금까지 있었더라면 그도 역시 이번 일에 절반이라도 손을 써서 부표·성복을 고치는 일까지 있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상으로서도 그 본의는 대신을 꼭 죄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각이 과격하게 떠들고 있는 논의를 진정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니, 그 논의가 조금 진정되면 틀림없이 무슨 처분인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후일 이헌에게 답한 하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로부터 이후로 사태는 점점 깊어만 가 급기야 조정이 비다시피 되었고 흉역(兇逆)들의 야심을 불러 일으켜 화란이 일기 시작하여 7년 세월이 간 후에야 끝났다. 이는 바로 천수(天數)인 것이지 어디 사람이 잘못해서만 그런 것이겠는가.

 

판윤 김우형이 상소하기를,
"신의 직이 경렬(卿列)에 있기 때문에 빈청 논의의 말석에 끼어 있었는데, 그 이튿날 북교(北郊)에 가 일을 살피고 제사가 끝나 돌아왔더니 준엄한 하교가 이미 내린 뒤였습니다. 따라서 신과 제신들과는 말을 하고 않고의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입장이요 똑같은 심정인데, 신이 어떻게 감히 무사하다는 듯이 있겠습니까. 신을 사패(司敗)에 내려 죄를 바로잡으시기 엎드려 비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도 남 따라서 시끄럽게 군다면 나로서 매우 불쾌한 일이다. 다시 그러한 행동을 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직을 살피라."
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이때 충주에 있었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 올라오라는 뜻으로 타일렀으나 허적은 오지 않고 그 고을과 도를 통해 상소하여 자기 심정을 진달하고 체직을 빌었다.

 

8월 2일 계사

상이 하교하기를,
"수령을 우선 차출하라는 전교를 내렸는데도 아직까지 거행 않고 있으니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조 판서 홍처량을 패초하여 개정(開政)하라."
하였다. 처량이 성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부름을 받고 궐문 밖에 이르러 소를 올리고 명을 받들지 않고는 도로 물러가버렸다. 정원이 그 사실을 아뢰니, 상이 다시 하교하기를,
"두 번씩이나 궐문 밖에 왔다가 또다시 물러가다니, 그 거만스럽고 젠 체하는 몰골이 매우 해괴하다. 그를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이때 이조 참판 이유태(李惟泰)도 밖에 있어, 참의 이단하(李端夏)가 혼자서 인사행정을 보았으므로 번번이 급한 직임만을 차출했을 뿐 유월의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팔월까지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령 차출에 대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이무(李堥)를 집의로, 송최(宋最)를 지평으로, 원진택(元振澤)을 정언으로, 이명익(李溟翼)을 승지로 각각 삼았다.

 

8월 3일 갑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비국에서 공무 수행 중인 당상관을 패초하고 유창(兪瑒)도 와서 대기하게 하라."
하고,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갔다. 우참찬 권대운(權大運), 공조 판서 이정영(李正英), 예조 판서 장선징, 지사 유혁연(柳赫然), 우윤 신여철(申汝哲), 이조 참의 이단하(李端夏), 우승지 김석주(金錫胄), 부호군 유창, 응교 이헌(李藼)이 입시하였다. 상이 유창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연경에서 돌아왔는데 그 곳에 무슨 들을 만한 사건들이 있던가?"
하니, 유창이 아뢰기를,
"북경(北京)에 잘못 전해진 말로 조선(朝鮮)이 정금(鄭錦)과 합세하고 있다는 설이 있어 서로들 놀라 동요를 일으켰다가 신들을 보고서야 그 와전된 말이 비로소 멎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금을 혹은 정경(鄭徑)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창이 아뢰기를,
"‘금’과 ‘경’이 중국 발음으로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북경에서 팔월에 대군을 동원하여 오삼계(吳三桂)를 공격하는데 청국 군대 11만 명, 몽고 군대 1만 5천을 동원, 황제가 직접 정벌에 나선다고 했는데 꼭 그렇게 할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오삼계가 주씨(朱氏) 자손을 옹립했다는 설도 문보(文報)에는 나와 있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상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헌이 아뢰기를,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삼공(三公) 육경(六卿)이 동시에 견책을 당하고 있어 나라 일로 보아 참으로 한심합니다. 전하께서 조속히 결정을 내리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그렇게 요란을 피우지 않았던들 일이 쉽게 풀렸을 것이다."
하였다. 단하가 아뢰기를,
"지난 을해년 추숭(追崇) 때도 각기 엇갈린 주장들을 했지만 당시 예를 논의했던 자 중에 죄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늘은 제신들이 예를 논의했던 까닭으로 견책들을 당했는데, 이 어찌 성스러운 세상의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간신(諫臣)이 아뢴 것은, 벌 적용이 너무 지나쳤음을 논한 것뿐인데, 남이성을 멀리 귀양보낸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간관이라면 무엇보다도 바른말을 해야 하는데 남이성 상소 내용은 전혀 딱 떨어진 데가 없이 그 주된 뜻이 그저 대공(大功)이 옳다는 것이었다. 그가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는가."
하였다. 석주가 아뢰기를,
"요즘 서북(西北) 소식들이 우리 나라로서는 모두가 걱정 거리인데 게다가 수재·한재까지 연속이고 극심한 재변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신임을 받아야 할 제신들이 모두 황송해 하며 대죄 중에 있어 국사가 점점 해이해져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가고 있으므로 신으로서는 참으로 걱정이 되고 민망스럽습니다. 성상의 전후 비답 내에는 신하들로서 차마 듣지 못할, 임금에게 박하게 한다느니, 선왕을 잊고 있다느니 하는 등의 말이 있는데, 대명하고 있는 제신들이 이미 그러한 하교를 받고서야 어떻게 감히 출사를 하겠습니까. 그전에도 준엄한 하교를 내리시고서는 금방 도로 거둔 때가 있으셨기에 감히 이렇게 구구한 생각을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제신들 하는 짓들이 꽤나 무례할 정도다. 내가 만약 끝까지 체직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장차 한(漢)의 계포(系布)처럼 한번 한 말은 기어이 실천하고야 말 것인가? 그리고 김우형으로 말하자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제가 초계(初啓) 때만 참여했다면 출사 못할 까닭이 뭐가 있겠는가. 꼭 내가 간곡히 빌어야지만 공무 수행을 하겠다는 것인가? 염우(廉隅)도 기절(氣節)도 그야말로 너무 높은 것이다."
하였다. 혁연이 아뢰기를,
"영장(營將)을 둔 것이 그냥 둔 게 아닌데, 근래 흉년으로 하여 조련(操鍊) 순력(巡歷) 등을 폐지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수령들도 그것을 마치 쓸모없는 관직처럼 보아넘깁니다. 영장의 호령은 조금도 거행되지 않고 있으며, 심한 경우 폐단이 있다고 하면서 여러모로 저지를 가하여 손도 놀리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못 당초에 설립한 뜻이 아닙니다. 금년도 역시 수재·한재는 있었으나 순력·조련 등의 일을 비국으로 하여금 거듭 단속하여 시행하도록 하게 하고 수령도 호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영장으로 하여금 규정에서 정한 바에 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그리고 영장도 전철을 답습하며 직무 수행을 제대로 못한 자는 역시 적발하여 죄를 과하라."
하였다.

 

8월 4일 을미

윤선도(尹善道)의 손자 윤이후(尹爾厚)가 경자년에 정원이 불태워버린 선도의 상소문과 선도가 저술한 《예설(禮說)》 두 편을 올렸다. 상이 일렀다.
"오늘에 와서 어찌 개인이 소장한 기록을 참고 자료로 쓸 것인가. 매우 외람된 일이다. 즉시 물리쳐버리라."

 

좌의정 김수항이 상소하여 직을 사하며 아뢰기를,
"신의 형제가 조금이나마 국가에 도움을 준 아무런 공덕도 없이 너무 과분한 은혜를 입어 삼공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가득하면 넘친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오늘의 일만 하더라도 그것이 비록 스스로 저지른 죄이기는 하지만 역시 모두가 복이 지나쳐 생긴 재앙인데, 또 어떻게 번갈아가며 정부(政府)에 들어가기를 마치 자기 집안의 자기 물건을 차지하듯이 하여 귀신과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시기와 해를 받을 것입니까. 엎드려 성상의 비답을 보면, 한 차례 아뢸 때 신이 참석한 사실이 없다 하여 신이 인혐(引嫌)하는 것은 억지라고 언제나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전하가 지금 빈청에서 아뢴 자들에게 죄를 내리는 이유는 오로지 ‘중자·서자는 대공을 입는다.’라는 말을 만들어냈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맨 끝번의 아룀과 함께 아뢴 숫자만 늘어났을 뿐 내용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직책으로 말하면 대신이요, 논의한 장소가 조정이었는데 그게 어디 일반 백성이 자기들끼리 가부를 논한 것과 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핑계대고 구차하게 형벌을 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황공하고 부끄러운 일인데 또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서 마치 자기 고유의 것인 양 백관들 위에 버티고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전번 소의 비답에서 다 언급하였으니 무슨 많은 말을 더 하겠는가. 객사(客使)가 강을 건너기 전에 상의하여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경이 숙사(肅謝)를 않는다면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룰 것인가. 경이 만약 깊이 생각한다면 그렇게 형식만 갖추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을 편하게 갖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8월 5일 병신

정원이 아뢰기를,
"그 전에도 도목 정사를 혹 물려 행한 때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팔월이 되도록 거행하지 못했을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지금 두 전조(銓曹)의 장들이 혐의를 잡고 들어간 지 한달이 넘었는데도 개정(開政)할 기약이라곤 까마득하여 일이 매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조·병조의 판서들을 즉시 패초하여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서문상(徐文尙)을 병조 참지로, 신완(申琓)을 정언으로, 이하진(李夏鎭)을 수찬으로 삼았다.

 

8월 7일 무술

상이 복부가 땡기고 아픈 증세는 조금 덜했으나 점점 더 피곤을 느껴 인삼차를 계속 들었고, 비국 제신들을 인견하려다가 자력으로 할 수가 없어 후일 와서 대기하도록 명하였다.

 

오후가 되자 상의 맥박이 잦아지고 살갗이 뜨겁게 달아올랐으며, 요통 증후까지 있어 약방이 해표제(解表劑)를 올렸다.

 

8월 8일 기해

청국 사신 두 명이 또 나온다는 패문(牌文)이 의주(義州)에 왔으므로 원접사가 치계하여 그 사실을 알리자, 각처의 영위사(迎慰使)로 하여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뒤 사행이 오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약방 제조 장선징이 우승지 김석주, 좌부승지 정유악과 함께 들어가 진맥한 후 쓸 약을 논의해야겠다고 청하고, 또 오늘부터 의관을 거느리고 약방에서 직숙해야겠다고 청하니, 다 그대로 따랐다.

 

8월 9일 경자

상이 침을 맞았다. 열이 나는 증후가 학질 같았기 때문이었다.

 

8월 10일 신축

상의 고통스럽고 번열을 느끼는 증후가 조금도 덜함이 없이 계속인 데다가 헛배가 부어오르고 대변이 묽고 잦으며 소변은 불리하여 약방이 분리제(分利劑)를 썼다.

 

간원이 아뢰기를,
"각 감영에 장인(匠人) 등 일 없이 노는 무리들이 각읍에 꽉 찼는데도 그들에게서 징수한 베가 그곳 감영의 사용(私用)이 되고 있을 뿐 군국(軍國) 수요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각도에다 공문을 발송하여 그에 관한 모든 사항을 문서로 작성하여 올려보내게 하고, 도고(逃故)로 인한 부족분을 그것으로 충당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8월 11일 임인

자기 상전을 시해한 죄인으로 포천(抱川)의 전석(全石)과 정읍(井邑)의 법현(法玄)이 처형되었다. 그 읍들을 혁파하고 포천 현감 김정근(金庭謹)과 정읍 현감 이중신(李重藎)을 파직하였다.

 

8월 13일 갑진

약방이 창성군(昌城君) 이필(李泌)을 대궐 내에서 직숙하게 하도록 할 것을 청하고, 또 시약청(侍藥廳)을 개설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직숙 건은 아뢴 대로 하고, 시약청 개설은 하지 말라."

 

이날 입진 때 상이 좌승지 이합을 불러 탑전으로 오게 하고는 이르기를,
"영의정 허적에게 그대가 가서 전유하기를 ‘상소 내용은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내 병이 이러하여 비답을 문자로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승지를 보내 유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금 내 병이 사실 심상치가 않은데, 경이 현재 내국(內局) 일까지 겸하여 맡고 있으면서 그대 한몸의 계책만 생각하고 끝까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인가. 지금 가는 이 승지와 꼭 함께 올라오라.’라고 하라."
하였다. 이합이 하교를 받고 자리에서 나가자, 상이 또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내 뜻을 영상에게 자세히 전하도록 다시 이합에게 말하라."
하였다.

 

8월 14일 을사

상이 번열을 느끼고 설사 등 제반 증세가 더욱 심하여, 장선징이 창성군(昌城君) 이필, 김석주, 정유악 등과 함께 입진하였다.

 

정재희(鄭載禧)·이동명(李東溟)을 승지로, 이옥(李沃)을 사서로 각각 삼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고부사 유창, 서장관 권해가 다 국가 공사로 인하여 도리어 사사 혐의를 이루어 일만리 길을 동행했으면서도 둘 다 서로 풀지를 않고 있습니다. 가부를 서로 돌봐야 할 것인데 그러한 의리는 없고, 남이 듣기에 해괴한 짓들 만을 하니 둘 다 파직시키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8월 15일 병오

상의 증후가 더욱 위독하였다. 약방 제조가 내의원(內醫院)과 대내(大內)와의 거리가 좀 멀다 하여 여러 의관을 거느리고 내반원(內班院)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날부터는 하루에 6, 7차씩 입진하였다.

 

이날 밤에 입진했을 때 상이 묻기를,
"이합이 어느 날 쯤이나 돌아오려나?"
하여, 김석주가 아뢰기를,
"내일 쯤은 돌아올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 과 함께 와야 한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갔겠지?"
하여, 석주가 아뢰기를,
"혹시라도 잊을까싶어 써서 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말을 내주라고 할걸 그것을 잊었다."
하여, 석주가 아뢰기를,
"말을 내주라는 성지가 일찍이 있었으므로 만약 올라오려고만 한다면 역말을 타고 올 것입니다."
하였다.

 

8월 16일 정미

상의 증후가 계속 위급하여 때때로 드는 것이라곤 인삼차였고 종일 혼수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날 입진 때 김석주가 아뢰기를,
"신이 오늘 아침에 신후재(申厚載)034)  를 만났는데, 금방 충주(忠州)에서 왔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14일에 충주 지방에서 이합을 만났는데, 그날로 영상 집까지 가기는 갔을 것이나 연원(連源)의 역말들이 모두 참(站)으로 가버려서 말이 없을까 그게 염려입니다.’하였습니다."
하자, 윤심이 아뢰기를,
"지금 강물이 불어서 틀림없이 배로 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이 올라올 때 예선군(曳船軍)을 책정하여 보내도록 경기 감사에게 즉시 분부하라."
하였다.

 

8월 17일 무신

영의정 허적이 충주(忠州)에서 들어왔고, 승지 이합도 돌아왔다. 정원이 아뢰기를,
"영의정 허적이 금방 들어왔는데, 그 자신 재상 직함은 감히 승당할 수 없어 숙사(肅謝)는 할 수 없고 상의 체후가 현재 편찮으신 중이기 때문에 곧바로 약방으로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밀부(密符)를 즉시 전달하라."
하였다.

 

이날 약방 도제조 허적이 창성군(昌城君) 이필과 함께 입진하니, 상이 관복(冠服)을 갖추고 앉아 있었다.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의 병후가 갑자기 위중하여 걱정이 가이 없습니다. 설사 증세가 오늘은 좀 덜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덜한 것 같지도 않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약방이 입진 때 관복을 갖추지 마시고 그냥 누워서 접견하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좌상 이 지금 비변사 근처에 와 있다고 하는데 사관을 보내 부르시면 들어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입시한 승지가 나가서 유지를 전하라."
하였다.

 

영의정 허적, 우의정 정지화가 승언색(承言色)을 시켜 왕세자에게 구두로 전하기를,
"대신·중신들을 따로따로 보내 종묘와 사직 그리고 산천에다 두루 기도를 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성상 병후가 오래도록 정상 회복이 되지 않아 마음 조이기만 가이 없을 뿐 어찌할 바를 몰랐더니, 그 말이라도 듣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반드시 오늘 내로 지성 기도를 하여 꼭 낫도록 했으면 좋겠다."
하였다.

 

약방이 아뢰기를,
"상의 병세가 이렇게 심상치 않은데도 시약청을 개설하지 않는다면 사리로 보아 미안한 일이니 오늘부터 시약청을 개설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약방이 이미 가까운 곳으로 옮겨왔으니 시약청까지 개설할 것 없다."
하였다가, 재차 아뢰자 그때는 윤허하였다.

 

우승지 김석주가 상의 유지를 좌의정 김수항에게 전달하여 즉시 들어와 숙사하게 하였다.

 

대왕 대비가 언서(諺書)로 시약청에 하교하기를,
"어소(御所)에 재변이 있어, 상에게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권했으나 따르지 않고 있는데, 약방에서도 거소를 옮기자고 간청 해보라."
하여, 시약청이 그 즉시로 대왕 대비가 하교한 뜻에 따라 거소를 옮길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리하고 소제하자면 쉽잖은 일이니 하루 이틀 더 기다려 보자꾸나."
하여, 시약청이 다시 청하니, 답하기를,
"그러면 내일 옮기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8일 기유

약방 도제조 허적이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중궁전에다 구두로 아뢰기를,
"상의 병세가 저러한데 곁에서 모신 자가 환관들 뿐이어서 증세의 경중도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예조 판서 장선징,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오늘부터 좌우에서 모시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내용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상의 병세가 더욱 혼수상태여서 백회혈(百會穴)에다 뜸을 떴다.

 

신시가 되자 상의 병세가 매우 위독하여 도제조 허적, 제조 장선징, 부제조 윤심, 창성군(昌城君) 이필, 우승지 김석주, 부사직 정유악 등이 와내(臥內)로 달려들어갔다. 상은 하얀 겹모자에 하얀 옷차림으로 하얀 평상에다 부들자리를 깔고 하얀 요에 하얀 이불을 덮은 채 머리를 북으로 하여 누워있었고, 세자는 평상 아래서 무릎 꿇고 앉아있었으며,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청평위 심익현은 좌우에 있었다. 허적이 평상 앞에 꿇어앉아 큰 목소리로,
"인삼차를 드시옵소서."
하니, 상이 눈을 떠보고는 일어나 앉으려고 하여, 남이 손으로 부축하여 일으켰다. 곁에서 인삼차를 올리자, 상이 손수 차주발을 들어 다 마셨다. 허적이 아뢰기를,
"기분이 지금은 좀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로 다른 것이 없다."
하였다. 그러나 숨이 차서 목소리가 분명하지 못했다. 허적 등이 물러나와 선화문(宣化門)에 가서 좌의정 김수항, 우의정 정지화를 빨리 들어오도록 독촉하여 즉시 함께 탑전에 들어갔다. 복선군(福善君) 남은 상의 등 끼고 있었고, 세자는 두 손으로 상의 손을 잡고서 얼굴 가득히 눈물을 흘렸으며, 제신들도 쳐다보고는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허적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기분이 어떠하십니까?"
하였으나, 상은 대꾸가 없었고, 삼공(三公)들이 평상 앞으로 나아가 각기 자기들 성명을 대자, 상이 각자에게 조금 응하는 태도였다. 적이 아뢰기를,
"신들이 여기 모두 있는데 무슨 하교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하니, 상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대신이 오기는 왔어도 긴 애기는 할 수가 없구나."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소신만 심정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좌의정 김수항도 불안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편안한 마음으로 공무를 수행하라는 뜻으로 좌상에게 전교를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한참 만에 이르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공무 수행을 하라고 하라."
하였다. 심익현이 인삼차를 냉약(冷藥)에다 타서 올리자, 상이 조금 들더니 대신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물러들 가라."
하여, 삼공 이하 모두 나와서 선화문 안에 앉아 있다가 유시에 다시 상의 앞으로 갔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삼공이 다 와서 하교를 듣고 싶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어찌 대신의 뜻을 모르겠는가. 다만 정신이 이러하여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여, 제신들 모두가 울먹이며 물러나왔다.

 

그날 밤 해시에 상이 창덕궁(昌德宮) 재려(齋廬)에서 승하하였는데 당시 나이 34세였고, 재위 15년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신해일에 소렴(小斂), 또 이틀 후인 계축일에 대렴(大斂)하고 이튿날 갑인일에 성복(成服)하였다. 왕세자가 즉위하여, 시호를 ‘순문 숙무 경인 창효(純文肅武敬仁彰孝)’라 올리고, 묘호(廟號)는 ‘현종(顯宗)’, 능호(凌號)는 ‘숭릉(崇陵)’, 혼전호(魂殿號)는 ‘효경(孝敬)’이라 하였으며, 그해 12월 임인일에 장례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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