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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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4일 갑자

효종 선문장무 신성현인 대왕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정오 임종시에 사관 정중휘로 하여금 ‘대점(大漸)’ 두 글자를 써서 밖에 내다 보이게 하였는데, 기축년001)  에 했던 대로 한 것이었다. 당시 대신들과 이조 판서 송시열 등은 《의례(儀禮)》에, 자리를 만들어 곡(哭)하는 일이 염습 절차 뒤에 기록되어 있다 하여 염습 절차가 끝난 후에 백관들로 하여금 거애(擧哀)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승지 유계가 불가하다 하여 드디어 바깥 뜰에서 먼저 곡부터 하였는데 절은 하지 않았다.

 

좌의정 심지원을 총호사(摠護使)로, 구인기를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았다가 이윽고 종실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로 인기를 대신하게 하였다. 【구는 왕자 경창군(慶昌君) 이주(李珘)의 아들임.】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20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전 정랑 장선징(張善瀓), 전 정(正) 정선흥(鄭善興), 좌랑 여성제(呂聖齊), 유학 한두상(韓斗相)을 모두 내지(內旨)로 불러들여 부마 홍득기(洪得箕)와 함께 염습에 관한 제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어의(御醫) 신가귀(申可貴)·유후성(柳後聖)·조징규(趙徵奎) 등 6명을 의금부에 하옥하였다.

 

영의정 정태화를 원상(院相)으로 삼았다. 이때 예조 참판 신척익(愼拓翊)이 밖에 있었는데, 태화가 동지중추부사 윤순지(尹順之)로 하여금 참판의 일을 대행하게 하고 이어 장생전(長生殿)002)  의 일을 관리 감독하게 하였다.

 

이날 저녁에 큰 비가 내렸다.

 

5월 5일 을축

날이 개었다. 왕세자가 대조전 거느림채 아래 여차(廬次)에 있었다.

 

예조 판서 윤강(尹絳), 참판 윤순지, 참의 윤집(尹鏶) 등이 주달하였다.
"《오례의(五禮儀)》에 의하면, 빈전(殯殿)에는 아침 저녁으로만 상식(上食)이 있고 낮에는 상식도 다례(茶禮)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무신년003) 등록(謄錄)에는 상식과 다례가 모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고, 병인년004)   등록에는 낮에 다례만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축년에도 병인년의 예를 따라 낮에 다례만 올렸으니, 지금도 기축년의 예대로 낮에는 다례만 올려야겠습니다."

 

예조가 또 주달하기를,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가 대행 대왕을 위하여 입을 복제(服制)가 《오례의》에는 기록되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혹자는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하는데,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영을 내리기를,
"두 찬선(贊善)005)  에게 모든 것을 문의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 좌의정 심지원,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은 아뢰기를,
"옛 예는 비록 잘 알 수가 없으나,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한다면 1년복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이조 판서 송시열, 우참찬 송준길은 아뢰기를,
"예율(禮律)이란 시대의 고금에 따라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는 것이고, 제왕의 예제에 있어서는 더욱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대신들이 이미 시왕의 제도로 논의를 드렸으니, 신들로서는 감히 다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의논대로 따르라고 영을 내렸다.
처음에 국상이 나자 예를 논의하는 자들이 각기 자기 예설을 고집하여 왕대비가 대행 대왕 상사에 당연히 차장자(次長子)의 복으로 3년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 자도 있었고, 혹은 임금을 위한 복으로 당연히 참최(斬衰)를 입어야 한다고 말한 자도 있었는데, 참최를 주장한 자는 전 지평 윤휴의 예설이었다.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그 소식을 듣고는 영의정 정태화에게 즉시 서한을 보냈는데, 태화가 송시열에게 묻기를,
"지금 논의되고 있는 자의전 복제에 관하여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시열이 말하기를,
"예문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그의 복도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고서 그 아래에 또 4종의 설이 있는데, 서자(庶子)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예문대로 말하자면 차장자 역시 서자인데, 위아래의 말이 이처럼 서로 모순이 되고 있으며 또 의거해 정정할 만한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도 없어서, 이것은 버리고 저것은 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태화가 말하기를,
"이른바 4종의 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시열이 하나하나 들어 해석을 하였는데, ‘정이불체(正而不體)·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는 대목에 와서 말하기를,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昭顯)의 아들은 바로 ‘정이불체’이고 대행 대왕은 ‘체이부정’인 셈입니다."
하자, 태화가 깜짝 놀라 손을 흔들며 말을 못하게 하고 말하기를,
"예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소현에게 아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그 설을 인용하여 지금 논의하는 예의 증거로 삼겠습니까? 《예경(禮經)》의 깊은 뜻은 나는 깜깜합니다만, 국조 이래로는 아버지가 아들 상에 모두 1년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내 뜻은 국제(國制)를 쓰고 싶습니다."
하니, 시열이 말하기를,
"《대명률(大明律)》 복제 조항에도 그 복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그대로 따르더라도 불가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화가 국제의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는 장자·차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1년복을 입는다는 조항을 채택하여, 자의 왕대비가 대행 대왕을 위하여 1년복을 입게끔 결정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었다.
"저군(儲君)이 대통을 계승하는 일은 국가의 대례이니, 기축년 고사대로 길일을 택하여 종묘·영녕전(永寧殿)·사직에 고하소서."

 

대사헌 이응시(李應蓍), 행 대사간 이상진(李尙眞), 사간 이준구(李俊耉), 장령 황준구(黃儁耉)·허목, 지평 이합(李柙), 헌납 정인경(鄭麟卿) 등이,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서 ‘옛 상복(喪服)을 지어 입고 상에 임해야 합니다.’고 말한 교훈을 그대로 따라 후대의 잘못된 복제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는데, 예조가 그 문제를 대신·유신과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이경석은 말하기를,
"선 현신 이황(李滉)이 그 논의를 했을 때 고 상신 박순(朴淳)이 당시 예관으로서 난색을 보여 고치지 못하였고, 기축년에도 김집(金集)이 그 예를 논의하자 고 상신 김상헌(金尙憲) 역시 난색을 보인 바 있습니다. 신이 옛 예가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들쑥날쑥하여 고르지 않은 점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어서입니다."
하였고, 정태화는 말하기를,
"누대의 조정에서 행해 오던 제도를 갑자기 바꾸기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신은 기축년에 이미 어리석은 소견을 개진한 바 있는데, 지금이라고 어찌 그 전과 다르겠습니까."
하였으며, 이시백·심지원·원두표도 모두 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송시열은 말하기를,
"신자가 군부를 여의고 나면 다시는 자기 성의를 쓸 곳이 없고, 기껏해야 정문(情文)을 다하고 최물(衰物)을 맞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하는 것뿐입니다. 주자가 고금을 참작하고 예령(禮令)을 정리하여 천고를 두고도 바꾸지 못할 일정한 제도를 만들었으니, 신으로서는 행할 수 있다는 데 대하여 의심할 것이 없고 또 어려울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고, 송준길은 말하기를,
"주자의 예설은 꼭 실행할 수 있는 정론이라고 항상 생각하여 왔습니다. 오늘 그것이 다시 행해질 수만 있다면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왕세자가 다시 대신들과 상의하라고 하였다.

 

때가 무더운 계절이어서 반빙(槃冰)을 맡은 자들이 모두 걱정을 하였다. 원상 정태화가 중사(中使) 임우문(林友問)을 불러 말하기를,
"예문에 3일이 되어야 염을 하므로 소렴(小斂)을 당연히 내일 해야겠다만, 난처한 일이라도 있으면 앞당겨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자주 들어가서 봉심해야 할 것이다."
하니, 우문이 말하기를,
"낮이 되니까 새벽녘과는 달리 입은 의대(衣對)가 점점 꽉 째이게 보였습니다."
하였다. 해가 질 무렵에 우문이 다시 나와 말하기를,
"오늘 이미 6차례나 봉심하였는데 오후부터는 별로 더한 바가 없습니다."
하니, 태화가 말하기를,
"내일 일찍 염을 해야겠다."
하고, 드디어 갑시(甲時)006)  인 인시에서 묘시 사이로 정하였다.

 

5월 6일 병인

왕세자가 대조전 거느림채 아래 여차에 있었다.

 

갑시에 소렴을 거행하였다. 염하려 할 때 대신과 삼사 이하가 모두 합문(閤門)에 이르러 습(襲)할 때와 같이 들어가 볼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오례의》에 그 일이 기록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묻고는 조금 후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였다. 제신들이 두세 번 극력 청하자,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제신들이 차례로 곡을 하고 들어가 보니 홍득기(洪得箕)·정선흥(鄭善興)·여성제(呂聖齊) 및 내시 1인이 막 교금(絞衾)007)  을 잡고 있었는데, 이미 3, 4벌의 의대를 쓴 뒤였다. 염을 마치고는 끈을 드리어 놓은 채 모두 매지 않았었는데 정태화가 나오려면서 집사자에게, 가로지기 끈은 나간 뒤에 매라고 말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예문에 대렴(大斂) 때 맨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송준길이 말하기를,
"한창 더운 철이어서 전혀 매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제신들이 곡하고 나왔다.

 

왕세자가 영을 내리기를,
"소렴 후에 끈을 매지 않는다는 것은 전에도 들은 바가 없거니와, 또 이 무더위를 당하였으니 더욱 더 망극하기만 하다. 대신은 충분히 토론해 보고 주달하라."
하니, 원상 정태화가 주달하기를,
"당초에 매지 않은 것은 바로 송시열이 정했던 일인데, 다시 상의하였더니 시열이 말하기를, ‘끈을 매지 않는 이유는 효자가 차마 자기 어버이를 이미 죽은 것으로 칠 수 없어서입니다. 이제 사흘이 지났으니 부기(浮氣)는 그 이상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조정 논의가 꼭 매야 한다고 한다면 신으로서도 감히 고집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였고, 송준길은 말하기를, ‘예문은 그렇지만 너무 무더운 때여서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염집에서도 예를 안다는 이들이 그 끈을 맬 때, 한두 개 정도는 매지 않고 남겨두어 예를 아끼는 뜻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본 바로는 어차피 전혀 매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므로, 한두 끈만 그대로 두었다가 형편을 보아서 다 매면 아마 예문의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신하들의 질(絰)·장(杖)에 관한 논의를 다시 대신에게 물으니, 이경석과 정태화는 앞서의 논의를 그대로 고집하였고, 이후원은 말하기를,
"신의 생각은 옛 예로 돌아가는 것이 꼭 안 될 일이라는 것이 아니라, 조종조에서 행하지 않던 것을 짧은 시간에 갑자기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선비들 논의는 비록 그러할지라도 모든 사람들 의견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 그 사이에는 마디마디 막히어 통행하기 어려운 일도 있지 않을까 염려 됩니다."
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경석 등의 논의를 따랐으므로 대신의 논의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미시에 중사 임우문이 나와 원상 정태화에게 말하기를,
"장생전의 재궁(梓宮)이 척수가 부족하여 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예조 판서 윤강, 이조 판서 송시열, 우참찬 송준길과 함께 정선흥을 불러 염할 때 매지 않고 드리워져 있는 끈을 지금까지도 매지 않았는가를 묻고, 또 의대가 너무 두껍지 않았는가를 물으니, 선흥이 대답하기를,
"끈은 이제 겨우 단단히 묶었습니다. 염할 때의 옷은 어깨 부근 가장 넓은 곳에는 그리 두껍게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궁은 너비가 거의 2치 가량 부족하고 길이도 부족합니다. 제공들께서 서둘러 봉심하실 것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드디어 총호사 심지원과 함께 들어가 봉심할 것을 청하였다. 윤강·송시열·송준길·김수항도 뒤따라 들어가 염상(斂床) 아래까지 가서 재궁과의 척수를 재보았더니 과연 길이와 너비가 모두 부족하였다. 재신들이 서로 돌아보고 실색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거느림채 아래로 물러나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바로 전명중관(傳命中官)을 요청하여 왕세자 여차에 주달하게 하고, 이어 넓은 판자를 성 안 또는 강상(江上) 등지에서 찾아내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맞는 판자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태화가 시열·준길에게 말하기를,
"넓은 판자를 구할 수가 없으니 일이 다급하게 되었소. 부판(附板)을 쓰지 않고는 달리 대책이 없지 않겠소?"
하니, 모두가 그렇다고 하였다. 태화가 드디어 다시 왕세자에게 여쭈기를,
"넓은 판자를 끝내 구할 수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신들의 죄입니다. 신이 듣기에 요즘 사대부 집에서도 밖의 흰 부분을 깎아버리고 부판으로 붙여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좋은 황장목(黃腸木)을 가져다가 붙여 만들어 쓰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부판은 비록 여염집의 필부들 상에도 쓰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태화 등이 다시 전혀 구할 수 없는 형편임을 자세히 진달하자, 이에 영을 내리기를,
"빨리 목수를 골라 오늘밤 안으로 널 속면과 칠성판(七星板)을 만들되, 여러 번 옻칠을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재궁 제도는 국초부터 정해진 것으로 3백 년 동안 준용해 왔으나 폐단이 없었는데, 지금 척수가 부족하여 판자를 이어서 쓰고 있으니, 이게 어찌 무더운 여름철에 베끈을 매지 않은 소치가 아니겠는가. 심지어 길이까지 부족하였으니, 이는 더욱 이치 밖의 일로서 소렴을 잘못했다는 것을 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시열이 예를 안다고 자처하면서 군부의 상에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부판으로 된 재궁을 써가면서까지 자기 실정이 탄로날까봐 염을 다시 할 것을 청하지 않아, 마지막 보내는 대례에 막대한 이변이 있게 하였으니, 시열의 죄야말로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태화는 원상으로 있으면서 끈을 매지 않은 것을 보고서도 강력히 다투지 않았고, 척수가 부족함을 보고도 염을 다시 할 것을 청하지 않은 채 앞장 서서 부판을 쓰자는 논의를 꺼내 시열의 뜻만을 순종하였으니, 그의 마음에는 선왕은 저버릴 수 있어도 시열은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니었겠는가. 비열한 인간이 행여 지위를 잃을세라 걱정하는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그의 죄를 논하기로 들면 시열보다 덜할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황각(黃閣)에다 30년씩이나 두고 그의 말대로만 따랐으니, 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20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신이 삼가 살피건대, 재궁 제도는 국초부터 정해진 것으로 3백 년 동안 준용해 왔으나 폐단이 없었는데, 지금 척수가 부족하여 판자를 이어서 쓰고 있으니, 이게 어찌 무더운 여름철에 베끈을 매지 않은 소치가 아니겠는가. 심지어 길이까지 부족하였으니, 이는 더욱 이치 밖의 일로서 소렴을 잘못했다는 것을 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시열이 예를 안다고 자처하면서 군부의 상에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부판으로 된 재궁을 써가면서까지 자기 실정이 탄로날까봐 염을 다시 할 것을 청하지 않아, 마지막 보내는 대례에 막대한 이변이 있게 하였으니, 시열의 죄야말로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태화는 원상으로 있으면서 끈을 매지 않은 것을 보고서도 강력히 다투지 않았고, 척수가 부족함을 보고도 염을 다시 할 것을 청하지 않은 채 앞장 서서 부판을 쓰자는 논의를 꺼내 시열의 뜻만을 순종하였으니, 그의 마음에는 선왕은 저버릴 수 있어도 시열은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니었겠는가. 비열한 인간이 행여 지위를 잃을세라 걱정하는 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그의 죄를 논하기로 들면 시열보다 덜할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황각(黃閣)에다 30년씩이나 두고 그의 말대로만 따랐으니, 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모든 신하들이 질·장을 하도록 서둘러 하령할 것을 양사가 다시 청하였는데, 이미 정해진 예를 갑자기 고칠 수 없다고 답하였다. 그 후로도 교리 김만기, 부사직 민정중, 수찬 김만균이 서로 이어 글을 올려 옛 예제대로 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원상 정태화가 주달하기를,
"초상 때부터 왕자·왕손·부마를 모두 여차에 함께 있게 하였으므로 외간의 사람들이 대부분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모두 밖에 나가 있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근일에 맡아 살피는 일들이 있어 드나들도록 했던 것이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예조가 즉위 일시(日時)를 택한 단자(單子)를 들여와 주달하니, 하령하기를,
"어제 해당 아문의 초기(草記) 속에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이 있었는데, 지금 또 일시를 정하여 들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사유를 물어 주달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주달하기를,
"국상 성복(成服) 날 왕세자가 뒤를 이어 즉위하는 것은, 옛 제왕들이 모두 행했던 예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열성조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이 일은 해당 아문이 옛 제도를 따라 거행한 일로서 별로 물어볼 사항이 없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이며 그 일이 어떠한 일인데 분명히 품신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일시를 택하여 마치 상대의 의중을 탐색하는 것처럼 하는가. 이 점이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하였다.

 

원상 정태화가 도승지 조형 등과 함께 아뢰기를,
"예로부터 뒤를 이을 임금이 반드시 성복 날 즉위했던 것은, 그야말로 대보(大寶)의 자리를 하루도 비워둘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성조에서 행해 오신 일이며 《오례의》에도 갖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니, 이는 실로 고금을 통하여 바꿀 수 없는 전례인 것입니다. 그 아문이 여쭈어 청하지 않고 그냥 시일을 택한 것은, 그 역시 담당관으로서의 당연한 일이지 탐색하는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성복 날 뒤이어 즉위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인정이나 예제로 보아 감히 차마 못할 일인 것이다. 경들은 왜 이다지도 내 뜻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는단 말인가? 빨리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게 하라."
하였다.

 

5월 7일 정묘

왕세자가 대조전 거느림채 아래 여차에 있었다.

 

정태화·조형 등이 다시 아뢰기를,
"내리신 영을 받고 신들은 모여 앉아 통곡하며 차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들도, 효심이 끝이 없고 애통한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다만 임금으로써 대통을 계승하는 예제가 지극히 엄하고도 중합니다. 옛 현철한 왕들이 모두 지극한 슬픔을 억지로 누르고 곧바로 대보의 위에 올랐던 것은, 하늘이 마련한 자리를 잠시도 비워둘 수 없고 사사로운 감정을 다 풀 기회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들은 결코 이번에 내리신 영을 해당 아문에 분부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감정을 억제하시고 슬픔도 절제하셔서 선왕들이 이미 행했던 예제를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가 비록 중대하지만 감정도 억지로 누를 수 없는 것인데, 나의 이 망극한 심회를 경들은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결코 억지로 감정을 눌러가면서 그 일을 할 수는 없으니, 저번의 영대로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양사가 합동으로 주달하고 옥당이 차자를 올려, 종묘 사직을 부탁받은 중함을 깊이 생각하고 조종조가 이미 행했던 예제를 우러러 본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기를,
"나의 심정을 이미 원상에게 알렸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원상 정태화, 총호사 심지원, 예조 판서 윤강 등이 아뢰기를,
"새로 짠 재궁의 접합 부위가 꽉 맞물려 흠집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기에, 이 막중하고 막대한 일을 조금이라도 잘못 처리했다가는 후회 막급일 것이기에 지금이라도 다시 선처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겠으니, 이미 봉심했던 제신들 말고도 소렴 때 입시했던 원임 대신 이하 모두를 다시 들어와 봉심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허락하였다. 이경석·이시백·원두표·이응시·조형·이상진·원만석·오정원·이은상·유계·김만균·이백린·정중휘가 들어가 봉심을 마치고는 승지를 불러 주달하기를,
"신들이 방금 들어가 봉심한 바로는 일이 미진한 점이 없었으므로 감히 다시 다른 말을 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장생전의 새로 짠 재궁 내부에 3차에 걸쳐 옻칠을 하였다.

 

5월 8일 무진

왕세자가 대조전 거느림채 아래 여차에 있었다.

 

사시에 대행 대왕 염상(斂床)을 선정전(宣政殿)으로 옮겼다.

 

오시에 대렴을 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연양 부원군 이시백, 좌의정 심지원, 원평 부원군 원두표, 완남 부원군 이후원, 예조 판서 윤강, 이조 판서 송시열, 우참찬 송준길, 대사헌 이응시, 행 대사간 이상진, 우승지 김수항, 교리 김만기, 주서 이백린, 기사관 정중휘 등이 모두 소렴 때와 같이 입시하였다. 대행 대왕 시상(尸床)을 전(殿)의 동북쪽 모퉁이에 안치하고, 찬궁은 전의 중앙으로부터 약간 북쪽에다 설치하였는데, 어탑(御榻)을 설치한 곳이었다. 재궁은 시상과 찬궁 사이에다 두었으며, 염상에는 옷가지와 이불을 진열하여 찬궁 남쪽에다 두고, 명정(銘旌)·선개(扇盖)와 만정(滿頂)은 찬궁 밖의 서남쪽에다 두었으며, 휘장은 백색 명주로 만들어 전의 절반을 가로막았다. 홍득기·정선흥·여성제와 내시 2인이 염을 맡았으며, 윤강은 홀기(笏記)를 맡았다. 의식대로 대렴이 끝난 후 통천관(通天冠)과 적석(赤舃)을 재궁 속에 넣었다. 윤강이 규(圭)와 패옥(佩玉)도 넣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물으니, 시열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태화가 선흥을 돌아보며, 기축년에는 어떻게 하였느냐고 묻자, 그때도 쓰지 않았다고 하니, 태화가 말하기를,
"그러면 현궁(玄宮)에다 넣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초빈을 마치고 대신 이하 모두가 통곡을 하고 나왔다.

 

영의정 정태화가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빨리 예관의 청을 허락하여 조종조의 옛 법을 그대로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오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 예제를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정을 어떻게 전폐할 수가 있겠는가. 단연코 그대로 따를 수 없으니 경들도 나의 말할 수 없는 심회를 양해하고 번거롭게 말라."
하고, 연거푸 4차나 주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양사가 세 번 주달하고 옥당이 세 번 상차하였지만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신이 또 중전(中殿)에게 청하기를,
"내일이 바로 성복일인데도 자리를 이을 막중한 예를 아직까지 결정을 못하여, 모든 신하들이 허겁지겁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내에서 권면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내에서도 권유하고 있다."
하였다.

 

관학 유생 남이성(南二星) 등이 상소하기를,
"신민이 복이 없어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해 끝없이 울부짖고 있는 중에서도 그 애통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제를 옛 예에 맞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정(情)과 문(文) 두 쪽이 다 미진함이 없도록 하는 그것뿐입니다. 지금 합사(合司)가 논하고 있는 상복 제도는 사실 선유(先儒)들의 정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후세 왕자가 당연히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는 빨리 단안을 내리시고 다시 예관에게 물어 즉시 변통하게 함으로써 정과 문을 갖추 다하소서. 혹시라도 때늦은 염려가 있을 때는 선유들의 추복(追服) 논의도 상고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 망극한 중에 예문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다사들 말이 그러하니 다시 예관으로 하여금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당시 위포(韋布)의 무리들이 시끄럽게 투소하여 심지어 모든 신하들이 이미 질과 장을 갖추어 놓고 대기 중이라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예관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들이 의논드리면서 모두 어렵다고 여겼고, 해당 아문 역시 감히 경솔하게 절충을 못했던 일입니다. 유생들 상소 중의 추복 문제에 있어서는 비록 선유의 설이 있기는 하지마는 매우 중대한 일인 데다, 백관들 성복이 하루밖에 남지 않아 지금의 사정과 형편으로는 더욱 난처합니다. 시행하지 말고 추후에 다시 논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백관들이 5차에 걸쳐 주달하면서 애통한 심정을 억제하고 빨리 뭇 신하들의 청을 따를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위로 자전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뭇 신하들의 뜻에 따라 하늘에 사무친 망극한 심회를 억제하고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게 되어 무어라 말할 바를 모르겠다."

 

김수항이 주달하기를,
"대렴 때 베끈이 앞뒤가 바뀌었습니다. 내시로서 일을 주관한 자와 일을 집행했던 사람을 추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9일 기사

비가 오다가 낮이 되어 개었다. 왕세자가 선정전 서쪽 계단 아래 여차에 있었다.

 

먼동이 틀 무렵 액정서(掖庭署)가 먼저 욕위(褥位)를 빈전 동쪽 뜰 중앙에 설치하고, 막차(幕次)는 돈례문(敦禮門) 동쪽 협문(夾門) 안에다 설치하였다. 한낮에 예조 판서 윤강이 조복을 갖추고 들어와 꿇어앉아 왕세자에게 면복(冕服)을 갖추고 여차에서 나올 것을 청하였고, 좌통례 이후석(李後奭), 우통례 정익(鄭榏)이 뒤따라 들어와 좌우로 나뉘어 서쪽 계단 아래에 부복하였다. 도승지 조형, 좌승지 원만석, 우승지 김수항, 좌부승지 오정원, 우부승지 이우상, 동부승지 유계, 주서 이백린·맹주서, 가주서 박순, 사관 정중휘·송창이 모두 들어와 여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영의정 정태화는 들어와 동쪽 뜰로 나아갔으며 사향(司香)인 예조 정랑 한명원·조성달도 뒤따라 동쪽 뜰로 들어갔다. 도승지 조형, 주서 이백린, 사관 정중휘는 또다시 동쪽 뜰에 나아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좌승지 원만석이 중사를 불러 시각이 조금 늦었음을 알리었다.
사왕(嗣王)이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검정 곤룡포를 입고 규(圭)를 받들고 여차에서 나오자, 통례가 사왕을 인도하여 걸어서 서쪽 계단으로부터 이어 동쪽 뜰을 향하여 갔고, 승지·사관이 사왕 뒤를 따라 욕위까지 왔다. 영의정 정태화, 도승지 조형, 주서 이백린, 사관 정중휘가 먼저 전내로 들어가 동쪽 한 편에 부복하고 있었고 사향이 뒤따라 들어가 향안(香案) 좌우에 서 있었으며, 통례가 사왕에게 꿇어앉을 것을 청하였다. 사향 한 사람이 향합을, 한 사람이 향로를 받들어 분향하고 물러났다. 통례가 사왕에게 4배(拜)를 올리도록 청하고 절이 끝나자 통례가 사왕을 인도하여 동쪽 뜰로부터 올라갔으며, 승지·사관은 모두 뜰 위 동쪽 한 편에 서 있었다. 사왕이 들어와서 영좌 앞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자 도승지 조형이 앞으로 나아가서 규를 받았고, 영의정 정태화는 영좌 동쪽에 이르러 상 위의 대보(大寶)를 받들어 사왕에게 올리니 사왕이 그것을 받아 내시에게 주었다. 예방 승지 김수항이 대보를 받아들고 뒤쪽에 꿇어앉자, 조형이 규를 올렸고 수항은 대보를 조형에게 주었으며 사왕은 물러나와 전의 문을 통하여 나왔다. 조형이 대보를 받들고 앞장서서 내려와 욕위 뒤편의 막차 동쪽 가 상 위에다 안치하였고, 태화와 여러 승지 이하 모두가 사왕을 모시고 욕위로 돌아왔다. 사왕이 또 4배를 하고 예를 마친 후 막차로 들어갔다가 돈례문 서쪽 협문에서 선정문 동쪽 협문을 거쳐 나갔는데, 상서원(尙瑞院) 관원이 대보를 받들고 먼저 갔고 위사(衛士)들이 작은 교자를 대령했으나, 사왕은 그것을 물리치고 걸어서 연영(延英)·숙장(肅章) 두 문을 통과하였으며, 시종과 시위의 제장들은 모두 길복(吉服)으로 모시고 따라갔고, 백관들은 동서로 나누어 차례대로 의식에 맞게 줄지어 섰다.
사왕이 인정문(仁政門)의 어좌(御座)에 이르러 동쪽을 향하여 한참 서 있었는데, 도승지가 꿇어앉아 어좌로 오를 것을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김수항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청하였으나 사왕이 역시 따르지 않았다. 이은상이 총총히 나와 급히 예조 판서 윤강을 불러들여 그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청하게 하였으나, 그때까지도 사왕이 따르지 않다가 영의정 정태화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두세 번 어좌로 오를 것을 청하자, 사왕이 그제서야 비로소 어좌에 올라 남쪽을 향하여 섰다. 태화가 다시 어상(御床)으로 올라가 앉을 것을 청하니, 사왕이 이르기를,
"이미 자리에 올랐으면 앉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하고, 이어 흐느끼기 시작했고 좌우도 모두 울며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태화가 의식대로 할 것을 굳이 청하자, 사왕이 비로소 앉아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예를 마치었다.
상이 인정문 동쪽 협문으로 걸어서 들어가 인정전 동쪽 뜰로 올라 전 밖의 동편 거느림채를 돌아 인화문(仁和門)을 거쳐 들어갔는데,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왕세자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백관의 하례를 받은 다음 대사면령을 내리고 이어 팔방에 교시를 반포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이 큰 상사를 내려 바야흐로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데, 내 뭇 신하들 청에 못이겨 이 거대한 기업을 이어받기로 한 것이다. 애통한 마음 이토록 더해 가지만 울부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대순(大舜) 같은 성스러움과 효도로써 문왕(文王)과 같은 큰 모훈을 이어받으셨다. 서로 전수한 것이 정일(精一)이어서 위대한 덕이 상제를 짝하기에 충분하였고, 억조 창생의 추대 속에 더할 수 없는 은택이 하민들에게 골고루 미쳐 갔으며,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수성(修省)의 방법을 다했기에 때맞게 비가 오고 날이 개었고, 현자를 예우하는 뜻에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기에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가 없었다. 자리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10년 동안에 훌륭한 삼대(三代) 시절이 다시 돌아오는가 싶었던 것이다. 하늘이 말없이 도우셔 해묵은 병환이 나아 기뻤으며, 나라 다스릴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무엇인가 크게 이룰 뜻을 더욱 굳히기도 하였는데, 대수롭잖은 병이 다시 더쳐서 끝내 위독한 상태까지 되실 것을 어찌 알았으랴. 이 소자가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대신 죽기를 원하는 마음만 간절했을 뿐이었고, 뭇 생령들은 복이 없어 갑자기 황고를 잃은 슬픔에 휘감기고 말았도다. 허둥지둥 어디선가 찾아보려고 옥궤(玉几)를 받들어도 소용이 없고, 아련히 보이는 듯하여 유궁(遺弓)을 안아보았으나 이 몸 의지할 곳이 없도다.
이 침괴(枕塊)의 때를 당하여 어떻게 편안히 천조(踐祚)의 예를 거행하랴. 억제하기 어려운 이 벅찬 슬픔에 유모(孺慕)의 정이 더욱 깊어만 가고 있으나, 자리를 오래 비워서는 안 된다고 신민들이 놔두지 않으니 이를 어쩌랴. 이에 자전의 뜻에 따르고 또 옛 법도를 따라 이해 5월 9일을 기하여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그리고 자의 왕대비 조씨(趙氏)를 높이 받들어 대왕 대비로 올려 모시고 왕비 장씨(張氏)를 왕대비로 모셨으며,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로 올려 봉하였다. 펼쳐진 욕의(縟儀)를 놀란 마음으로 바라볼 때 오늘 아침의 하례를 어찌 차마 받으랴. 문안을 드릴래야 길이 없으니 피눈물로 울부짖는다. 내 무슨 마음으로 병풍을 등지고 앉아 있는지, 몸을 만지며 두려움만 느끼는 것이다. 아, 조종조 유업을 떨어뜨릴까 염려되니 어찌 감히 황음과 안일을 취하랴. 이 뇌우(雷雨)의 은총을 펴노니 새 출발에 모두 동참하라."

 

병조가, 궁성 밖의 호위를 맡았던 두 국(局) 군대를 철수케 할 것을 청하였다.

 

선전관을 보내 대행 대왕의 흉문을 봉황성(鳳凰城)에다 먼저 알렸다.

 

원상 정태화가, 옛날 기축년에 했던 대로 좌의정 심지원과 함께 원상의 일을 행할 것을 청하였다.

 

대사헌 이응시, 행 대사간 이상진 등이 아뢰었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가 대행 대왕이 편찮으셨을 때 보호의 책임을 맡고 있는 몸으로서 유명한 의원을 널리 모집하여 침과 약을 함께 의논하지도 않았고, 또 시약청(侍藥廳)도 설치하지 않은 채 입진(入診)하던 날 유후성이 하는 대로만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병든 의원이 침을 들고 잘못 혈락(血絡)을 건드리게 하였으므로, 신민 모두가 분개를 느껴 죄를 원두표에게로 돌리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빨리 중도 부처를 명하소서. 그리고 제조 홍명하와 부제조 조형은 그들 관직이 비록 부이(副貳)이고 임명받은 지도 얼마 안 되기는 하였지만 죄를 내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오니 모두 삭탈 관작하소서. 어의 유후성은 대행 대왕께서 처음 종환(腫患)이 있을 때부터 작은 부스럼이라고만 하였고, 병세가 점점 중해가는데도 별달리 생각하는 바가 없이 다만 저와 친숙하고 잘 따르는 부류 한두 명을 천거하여 입시를 시켰으며, 또 병들어 손 떠는 의원을 시켜 억지로 침을 잡게 하였습니다. 어의 조징규는 후성에게 아부하면서 그와 한패가 되어 병증을 논하고 약을 처방할 때 오직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한채, 군부의 병환은 생각지 않고 오직 후성과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을까 염려하였으니, 후성이나 징규나 그 죄가 같습니다. 그리고 신가귀는 자기 수전증이 중함은 생각지도 않고 결국 조심성 없이 침을 놓다가 혈락을 잘못 건드렸습니다. 이 3인의 죄는 천지에 사무치고 사람들이 그들의 살을 먹고 싶어합니다. 왕법(王法)으로 보아 결코 한 시각도 용서할 수 없으니 서둘러 방형(邦刑)을 바로잡으시고, 그 나머지 입시했던 모든 의원들도 모두 멀리 귀양보내소서."

 

5월 11일 신미

영돈녕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등이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 재신들과 빈청에 모두 모여 논의한 끝에, 대행 대왕 시호(諡號)를 열문의무 신성지인(烈文毅武神聖至仁)으로, 묘호(廟號)를 효종(孝宗), 능호(陵號)를 익릉(翼陵)으로 정하였다. 경석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열성조 시호 끝에는 모두 효(孝)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묘호에 이미 효(孝)자가 있어 겹으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명조(明朝)의 시호도 상고해 보았더니 역시 효종(孝宗) 시호에만 효자를 쓰지 않았기에, 신들이 서로 확실한 상의를 거쳐 인(仁)자로 효자를 대신하였습니다."
하였다. 그후 열문·의무·지인이 모두 열성조의 휘호를 범했다 하여 다시 선문장무 신성현인(宣文章武神聖顯仁)으로 고치고 능호도 영(寧)으로 고쳤다. 상이 ‘영’자가 무슨 뜻을 가졌느냐고 묻자, 여러 신하들 모두가, 영이란 바로 안녕이라는 뜻으로 예를 들면 《서경(書經)》에 영고(寧考)·영왕(寧王)이라고 한 것과 본조의 영녕전(永寧殿)·숙녕전(肅寧殿) 등의 칭호들이 다 그 뜻이라고 대답하였다. 송시열이 또 아뢰기를,
"사람이 천지의 이치를 다하다가 죽으면, 살았을 때 하늘의 섭리에 순응한 것이고 죽을 때에도 아무 미련없이 편안한 것입니다. 때문에 횡거(橫渠)가 서명(西銘)에서 순·우·증자가 했던 일들을 극구 말하고 나서 ‘존오순사 몰오령야(存吾順事沒吾寧也)’로 끝맺음을 했던 것이며, 주자도 자신의 장래 무덤을 순녕(順寧)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정하였고, 명도(明道)가 소자(邵子)008)  의 무덤에 명(銘)을 쓰면서도 역시 편안히 잠든 한 유궁이 있다는 뜻으로 ‘유령일궁(有寧一宮)’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자, 상이 드디어 그 자를 쓸 것을 명하였다.

 

재궁에 옻칠을 25회까지 하였는데, 한 번 칠할 때마다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들어가 빈전의 뜰 위에 부복하고 승지·사관 모두가 입시하였으며, 백관은 인정전 뜰에 모여 곡을 하였다.

 

5월 12일 임신

대사헌 이응시, 장령 허목 등이 아뢰기를,
"무릇 봉명 사신이 국상을 당했을 경우 반드시 빈전에 복명하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각도에 암행 중인 신하들이 아직 일을 다 마치지 못했는데 예조가 살피지 않고 별안간 빨리 돌아오라는 관문을 보냈으니, 이는 선왕의 명령을 헛되이 버린 것입니다. 바라건대, 예조 당상을 추고하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각도의 어사에게 빨리 명을 내려 일을 다 마친 후 복명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허목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옛날 봉명 사신이 임금이 승하하더라도 반드시 일을 마치고 돌아왔던 것은 임금 명령을 중히 여겨서였습니다. 더구나 신화(新化) 초기에 해이해질 조짐이 있을까 염려된 나머지, 신이 어리석고 망령된 것도 생각지 않고 맨 먼저 그 논의를 꺼냈다가 대신으로부터 그르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바라건대 신을 대간에서 체차하소서."
하였고, 정언 안후설은 아뢰기를,
"신이 명령을 받들고 나갔다가 일도 마치기 전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여 관문만 보고 맨 먼저 들어온 잘못을 저질렀으니, 신의 지레 돌아온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간원이 아뢰기를,
"어사의 오고 가는 것은 그 아문이 지휘할 바가 아니므로 논계한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벅찬 슬픔이 터질 때는 정(情)이 의(義)를 앞지를 수도 있는 것이니, 형세로 보아 백관이 성복하는 날까지 올 수 있는 입장이라면 허겁지겁 돌아온다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바라건대 허목·안후설을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3일 계유

간원이 또 훈국 별장(訓局別將) 김경(金鏡)을 탄핵하면서 그가 궁성을 호위하던 날 군막 속에다 여인을 두고 있었다며 사판(仕版)에서 그를 삭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후 들으니 그 여인은 밥을 나르는 김경의 여종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관원들 모두가 사실을 잘못 알았던 책임을 지고 인피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후 다시 사판 삭제의 명령을 환수하고 먼저 파직부터 하고 뒤에 추고할 것을 청하니,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5월 14일 갑술

완남 부원군 이후원을 고부 정사(告訃正使)로, 유심을 부사로, 이후(李垕)를 서장관으로 임명하였다가, 상이 곧 후원의 병이 위독함을 듣고 원상인 정태화·심지원에게 대체할 만한 자가 누구인가를 묻자, 태화·지원 등이 모두 자신이 갈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상은 가서는 안 되고 총호사 역시 중간에 바꾸는 것이 좋지 않으며, 개정(開政)을 하여 새로 임명한다는 것도 매우 미안한 일이니, 경들이 다시 생각해 보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임신년 국상 때의 전례를 상고해 보니, 공제(公除) 전에도 개정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전례를 따라 개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사정이 임신년과는 달라 개정할 수 없다. 먼저 사신부터 임명하고 복상(卜相)은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드디어 전일 참복(叅卜)했던 사람들을 써서 올리게 하여 판중추부사 정유성을 고부 정사에 임명하였다.

 

5월 16일 병자

이판 송시열이 상소하여, 대행 대왕의 지문(誌文) 찬술의 명령을 바꿀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사체가 가장 중한 것입니다. 앞뒤로 문형(文衡)을 역임한 사람이 줄닿아 있는데, 하잘것없는 일개 음관(蔭官)에게 위촉한다면 너무나 가볍고도 설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만약 지문을 찬술한다면 그 역시 선왕께 보답하는 한 방편일 것이다."
하자, 시열이 다시 상소하기를,
"주자가 일찍이 효종 상사 때 만장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 만장이 다 되기 전에 파직이 되어 물러와 있다가, 그후 늙고 병들어서야 뒤쫓아 지었다고 하는 기사를 신이 언젠가 본 일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평생을 두고 묵묵히 생각할 때 성상의 은우를 너무 외롭게 한 것 같아, 감격하다 못해 그 본말을 대략 적어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는데, 신이 그 기사를 읽을 때마다 세 번을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신이 조금이라도 재주나 능력이 있어서 아름답고 빛난 공렬을 만분의 일이라도 포양하여 이름을 금석(金石)에다 새길 수 있다면, 이 못난 신이 평일 은혜를 등지고 알아주신 것을 저버린 죄를 조금이나마 속바칠 수도 있겠으나, 다만 신이 어려서 배우지 못하여 문자로 하는 일에 있어서는 전혀 노맥(路脉) 조차 깜깜하므로, 이 보잘것없는 지식과 졸렬한 재주로 국가의 막중한 전례에 흠이 가게 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사헌부가, 각도 암행 어사를 빨리 돌아오도록 재촉했다는 이유로 예관을 추고할 것을 청하자,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듣고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었을 때 분상(奔喪)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장령 허목이 또 인피하기를,
"어버이 상은 은(恩)이 주이지만, 임금의 상은 의(義)가 주인 것입니다. 부모 상에는 상에 관한 일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나, 임금의 상에는 맡은 바 일을 폐하지 않는 것이 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봉명 사신은 천자가 붕어하거나 나라 임금이 죽으면 자리를 만들어 한 번 단(袒)하되, 천자이면 아홉 번 곡하고 제후이면 다섯 번 곡하여 감히 손님에게 절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사행의 일이 얼마나 중한가는 묻지도 않고 한결같이 분곡(奔哭)만 하기로 들면 선왕의 명령을 헛되이 버린 격이 되는데, 그걸 어찌할 것입니까. 신은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예조가 관문을 발송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일찍이 논했었는데, 지금 대신에게 몹시 비난을 당하였으니 태연히 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체척을 명하소서."
하였고, 다른 동료들도 모두 인피하였다. 간원 역시 전일에 헌부 관원들을 출사하게 할 것을 청했다가 대신으로부터 잘못이라는 지적을 받은 일이 있고, 또 저번에 김경을 논했던 일이 이미 잘못된데다, 또 환수하라는 청과 파직 추고를 주장하는 논의가 한 계사 중에 중첩으로 들어 있었던 관계로 옥당이 논하려고 했던 사실이 있어 그대로 눌러 있을 수 없다 하여 인피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장령 허목 등은 출사하게 하고, 대사간 이상진 등은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5월 17일 정축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상차하기를,
"신이 언젠가 《의례(儀禮)》를 상고한 일이 있사온데, 그 문장을 감히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은 대체로, 명을 받들고 이웃 나라에 간 자가 일단 그 나라 국경에 들어갔으면 그를 일러 수(遂)라고 하는데, 그 ‘수’란 사신 간 일이 이루어졌음을 뜻한 것이었습니다. 상을 알리는 자가 오면 띠를 두르고 나와 빈(殯)에다 복명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웃 나라에 사신 간 경우의 예로서 나라 안에 봉사한 것과는 원래 다릅니다. 이웃 나라에 사신 갔던 자도 부음을 듣고는 곧 돌아오는데, 나라 안에 있으면서 군부의 부음을 듣고 분상하지 않는다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오례의(五禮儀)》에 기록된, 봉명(奉命)한 자의 성복이라고 한 것은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가 다 봉명자이며, 지금의 북경 사행(北京使行)이나 동래 접위(東萊接慰)도 다 봉명자인 것입니다."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도 아뢰기를,
"신들은 예를 잘 모르지만 사리로 미루어 볼 때, 봉명 사신이 국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틀림없이 그대로 암행(暗行)을 계속할 수 없어 관문(官門)에 나아가 곡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인데, 일단 나아가서 여러 고을이 모두 그 정체를 알아버리고 나면 비록 그 임무를 다시 수행하려 해도 아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조가 빨리 돌아오도록 재촉하리라고 신들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대각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있으니 너무나 부끄럽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니, 상이 모두에게 답하기를,
"경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하였다.

 

정태화 등이 구전(口傳)으로 상께 아뢰기를,
"제왕의 가문은 보통 사람과는 다르므로 비록 친족 사이라도 예법이 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듣기로는 두 왕자 외에 심지어 대군(大君)의 아들들까지도 항상 궁궐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일정한 때를 정하여 접견해야 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듣기에 친속의 아낙네들이 오랜 기간 내간에서 머물러 있으며 비복 무리들도 멋대로 드나든다고 하는데, 즉위 초두에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으니 각별히 살피소서. 그리고 두 내전과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도 신들이 한 말로 말씀드려 법도가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은근하고 지성스러우니, 내 매우 감격스럽다. 일찍이 선왕조에서도 ‘나라 법으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나 친친(親親)의 도리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때때로 드나들게 해왔다만, 이제는 마땅히 유념하여 들어오는 일이 드물게 하겠다."
하였다.

 

이때 양사가 합동으로, 어의 신가귀·유후성·조징규 등을 목벨 것과 원두표를 중도 부처하고 홍명하·조형 등의 관작을 삭탈할 것을 연거푸 아뢰어 청하였고, 옥당 역시 계속 차자를 올려 그렇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표는 공로가 큰 대신이니 그를 곧바로 정배하도록 청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고, 가귀더러 침을 놓으라고 한 것도 사실은 특명으로 한 일이며, 또 후성 등은 약을 쓴 사실이 없으니 그들을 싸잡아 삼적(三賊)이라고 일컬으며 꾸짖는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가귀는 작년에 파종(破腫)을 한 공로가 있었다고 선왕께서 항상 말씀하시어 지금도 그 말이 귀에 쟁쟁한데 차마 그에게 형륙을 가할 수는 없다."
하였다. 열흘 동안이나 허락을 않다가 누차 아뢰자 비로소 윤허하면서 이르기를,
"가귀의 공로는 잊을 수 없으나 죄가 일죄(一罪)이기에 아뢴 대로 윤허하지만, 후성과 징규는 원래 죽여야 할 만한 죄가 없으니 죽음을 용서하여 정배토록 하고, 나머지 의원들은 해당 부(府)에서 조율하게 하라."
하고, 제조 건도 허락하지 않았다.

 

총호사 심지원이 능 자리를 찾아보기 위해 가려면서 전 참의 윤선도와 행 부호군 이원진을 대동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도는 그때 파직되어 산관으로 있는 중이어서 그에게 군직(軍職)을 붙여 관대(冠帶)를 입게 할 것을 아울러 청하였다.

 

산릉 도감(山陵都監)이, 기축년 상사 때의 구례대로 승군(僧軍) 1천 명과 연군(烟軍) 3천 명을 각지에서 조발하여 쓰되, 연군에게는 우선 강도(江都)와 병조·호조 그리고 태복(太僕)·상평(常平) 등 각 아문의 쌀과 베를 품삯으로 주고, 추수 후에 베는 산군(山郡)에서, 쌀은 해읍(海邑)에서 받아들여 상환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가, 다시 병조·호조에 저축된 것만을 쓸 것을 청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5월 18일 무인

이때 간원은 모두 체직 상태이고 공제(公除)는 아직 멀었는데도, 상이 개정(開政)을 말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대각은 임금의 귀와 눈으로서 하루도 비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 인목 왕후 국상 때도 공제 전에 차출한 전례가 있으니, 바라건대 서둘러 개정하여 차출하소서."
하니, 상이 지금은 임신년 내상(內喪) 때와는 사정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가 또 왕자·왕손이 무상 출입을 하여 궁금이 자못 존엄하지 못하다고 말하자, 상이, 초상 때 이후로는 유숙한 사실이 없다고 답하였다.

 

17일은 중궁전 탄일이어서 정부가 표리(表裏)를 봉진하고 상방(尙方)에서도 조례에 따라 올린 물품이 있었는데, 상이, 비록 하찮은 물품일지라도 이때 봉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올리지 말 것을 명하였다.

 

상이, 산을 보러 간 여러 지관(地官)들이 모두 사정을 품고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 하여, 도감에게 엄히 단속할 것을 명하였다.

 

5월 21일 신사

종부시 주부 홍석(洪錫)이 상소하여, 복제에 있어 고례를 쓰지 않은 잘못을 말하고, 또 왕위에 오를 때 군신(君臣)이 길복을 착용한 것이 예가 아니었음을 지적하고, 또 명나라 또는 고려 시대의 제도대로 능 자리를 선왕의 능이 있는 산 안에다 정할 것을 청하는 등 수백 마디에 달하는 말을 하였는데, 그 내용이 고 유신(儒臣) 서경덕(徐敬德)이 효릉(孝陵)009)  에게 올리려고 쓴 상소문에 있는 말들을 그대로 쓴 것이었다.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5월 23일 계미

예조 판서        윤강, 관상감 제조 이응시 등이, 서운관(書雲觀)이 기록한 여러 산들을 보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윤강이 이어 아뢰기를,
"신이 여러 지관들이 말한 것을 보건대, 홍제동(弘濟洞)이 산맥이 멀리서 왔고 힘이 차고 국이 크다고 매우 훌륭한 양 말하고 있으나, 신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자리를 고르는 데는 마땅히 혈(穴)을 위주로 해야하므로, 혈만 화가(花假)가 되어 있으면 용호(龍虎)가 둘러싸고 있거나 조안(朝案)이 수려한 것들은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신이 혈이 있다는 산등성이를 살펴보았더니 흘러 내려온 것이 1백여 보(步)에 불과하고 나약하고 힘이 없기가 마치 두렁이의 모양 같았는데, 그곳은 대체로 영릉(英陵)을 만들고 난 나머지 기운으로서 크게 쓸 자리가 아닙니다. 신이 만약 잡술(雜術)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잘못 잡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가 대행 대왕의 성체를 좋지 못한 사토(沙土) 속에다 봉안하게 된다면,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번에 신이 가서 얻은 진혈(眞穴)로는 오직 임령 대군(臨瀛大君) 산소와 헌릉(獻陵) 내의 한 곳이 고를 만한 곳이었습니다. 바라건대 풍수(風水)를 잘 아는 사람들을 널리 초집하여 홍제동과 그 두 곳 혈을 다시 살펴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산릉 도감이 아뢰기를,
"헌릉의 이수동(梨樹洞), 건원릉(健元陵)의 첫번째 등성이, 영릉의 홍제동, 임령 대군의 묘가 있는 산, 안여경(安汝慶)의 묘가 있는 산, 그리고 월롱산(月籠山) 여섯 곳을 지금 다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총호사 지원이 예조 당상관과 관상감 제조, 산릉 도감 제조, 부호군 이원진·윤선도, 그리고 기타 여러 지관들과 함께 먼저 동남방을 살펴볼 것인데, 목릉 참봉(穆陵叅奉) 이최만(李最晩)과 선비 박세욱(朴世郁)이 풍수에 밝으니,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직을 붙여 주게 하여 함께 따라가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전 자의(諮議) 이상(李翔)이 대행왕 상사 소식을 듣고 분곡 차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려면서 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고례를 상고하여 질(絰)·장(杖)의 제도를 사용하되, 육일(六日) 이내에 그 제도를 써 옛 선왕 때와 똑같게는 이미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계빈(啓殯)하는 날에라도 그를 행하여 주자(朱子)의 논의대로 따르라는 청이었다. 상이 관대하게 답해주고 또 승지를 명하여 말을 만들어서 돌아가지 말도록 유시를 하게 하였으나, 이상이 다시 상소문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5월 27일 정해

집의 이유태(李惟泰)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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