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인
공제(公除)를 하였다. 상이 두 원상(院相)을 명하여 그대로 원(院)에 남아 일을 보게 하였다가, 경자일에 와서야 비로소 원의 문을 닫았다.
6월 2일 신묘
상이 처음으로 개정(開政)하였다. 김우명(金佑明)을 청풍 부원군으로 삼았는데 왕비의 아버지이고, 송씨(宋氏)를 덕은 부부인으로 삼았는데 왕비의 어머니이며, 청풍군(淸風郡)을 부(府)로 승격하였는데 왕비의 성향(姓鄕)이었다. 이응시를 도승지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이정기를 대사간으로, 성이성(成以性)을 사간으로, 목내선(目來善)을 헌납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정만화(鄭萬和)를 부응교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상이 원상에게 하교하기를,
"신가귀의 작년 공로는 잊을 수가 없다. 참(斬)이나 교(絞)나 죽는 것은 일반이지만 교로 처결했으면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상께서 만약 전공을 생각하신다면 교로 처결하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드디어 신가귀를 교로 처결할 것을 명하였다. 양사가 또 다투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평안 감사 김여옥(金汝鈺)이 치계하여, 4월 19일 신시에 삭주부(朔州府)에 호지(胡地)로부터 광풍이 불어닥치고 꿩알만큼이나 큰 우박이 쏟아졌으며, 그것이 쌓여 얼음이 1척 이상으로 얼어붙어 모든 곡식이 다 손실되고 전답이 텅 비었다고 하였다.
역관 홍희남(洪喜南)이 대마도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제가 새 도주(島主) 의진(義眞)과 만나 맨 먼저 유황(硫黃)에 관해 사례를 하고 다음에 위문을 하고 또 다음에 조문을 하였더니, 의진이 길사 흉사가 서로 섞여져 있는 것을 꽤 언짢게 여기면서도 자기 아비를 추모하는 빛은 조금도 없었고, 각 물품이 적혀 있는 별폭(別幅)을 죽 늘어놓고는 마치 애들이 좋아하듯이 하였습니다. 제가 조정 명령에 의거하여, 관왜(館倭)가 부산의 저자에서 변란을 일으켰고 개운포 만호 김남두(金南斗)의 머리채를 잡아끌기도 하였는데, 그자들을 분명하게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정색을 하고 말하였더니, 관왜의 홍우위문(洪右衛門)인 자는 여러 왜인을 사주하여 부산으로 들이닥치게 했던 자이고 팔랑병위(八郞兵衛) 전우위문(傳右衛門)인 자는 바로 김남두 머리채를 잡아끌었던 자들인데, 그들을 4월 17일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참형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도주는 나이가 젊고, 일을 처리하는 두왜(頭倭) 3명이 있었는데 모두 노망이 났으며, 나머지 것들은 또 모두 나이 어린 것들로서 도주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섬 안의 일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질서가 무너져간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경성 판관(鏡城判官) 홍여하(洪汝河)가 임지에서 교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다시 북새(北塞)에 와서 산과 물을 우러러 보니, 여기가 바로 성조께서 발상(發祥)하신 곳이었습니다. 조종께서 어렵게 창업하셨던 일들을 생각해 보고 오늘의 나라 형세가 이렇게 흔들리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예와 오늘을 굽어볼 때 슬픈 생각에 눈물이 흐릅니다. 신이 북을 향하여 오던 그날보다도 시대를 개탄하는 감회가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북방에 대체로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신이 남쪽에 있을 때는 북방의 사마(士馬)가 정예하고 세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서 눈으로 보니, 단소하고 용렬하고 지치고 게을러서 기예를 익히지 않기는 남쪽 군대와 비슷하고, 춥고 굶주리고 야위어 있기는 오히려 더 심한 편입니다. 성이나 못이나 망루 같은 것은 허술하기가 더더욱 심하여 함흥(咸興) 이북에서 육진(六鎭)까지 모두가 다 그 모양이어서 믿을 곳이라곤 한 곳도 없었습니다. 더욱이나 땅은 넓고 사람은 희소하여 물력(物力)이 태부족이고, 천 리를 가도 쓸쓸하기만 하여 눈에 보이는게 쑥대뿐입니다. 몇십 년 동안 변방이 잠잠했던 관계로 군정(軍政)은 힘쓰지 않고 갉아먹기만을 일삼아, 그나마 남아 있는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원한에 차 배반할 뜻만 품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두만강 건너편은 땅이 비옥하여 종락(種落)010) 이 날로 번지고 있는데, 그들 모두가 북경(北京)의 약속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 가령 북경의 호령이 하루아침에라도 그 땅에서 행해지지 않는 날이면 북진(北鎭) 일대는 우리 소유가 못될 것이 뻔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낭묘(廊廟)의 자문을 구하시고 변방 문제를 신중히 다루셔서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할 대책을 강구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의 뜻을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중주(中主)라도 노력하면 되는 일이지만, 풍속을 바꾸어놓는 일은 상지(上智)라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 풍속은 질(質)이 유약하면서 게으르고 기(氣)는 경조하고도 부박하여, 좋아하는 것이 문사(文詞)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예(武藝)여서, 2백 년을 두고 배양했다는 것이 무예를 기른 것이 아니고 나라 전체가 오직 문사만을 전공하기 때문에, 변방에 틈이 생기려고 하면 너도나도 일어나 주모를 하고 대적병이 가까이 처들어와서야 비로소 허둥지둥 무예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군이라는 자가 기·정(奇正)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군사는 격·자(擊刺)가 무엇인지 깜깜합니다. 그리고 전공을 세워도 군대에게 상이라는 것이 없고 싸움에 패하여도 장군의 목이 여전한데, 이는 바로 이 나라 습속으로서 고려 시대부터 이미 그래 왔습니다.
지금 만약 그게 걱정이 되어 갑자기 그 정책을 바꿔보려고 솜씨가 서투른 장군에게 그 일을 맡겨 짧은 시간에 효과를 거두려고 한다면, 어벌쩡하기만 하지 중요한 건 잘 안되고 힘만 들지 공로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해마다 기근이 겹쳐 재력도 넉넉하지 못하므로 군대와 백성이 함께 술렁이어 원망이 나라에 가득 찰 것이니, 그 방법은 현 실정에 알맞지 않은 방법입니다. 아, 전쟁을 잊었다가는 반드시 위기를 맞게 되고 사전 대비가 있으면 후환이 없는 것이므로, 대비와 방어 대책도 소홀히 생각할 일은 물론 아니지만, 변방 백성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정책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민간 풍속을 굽어살피시고 시기와 형세도 널리 참작하시어, 정책 수립과 난국 타개에 있어서는 오직 인재를 얻기에 주력하실 것이며, 군대 훈련이나 병기 제작 같은 것은 풍년이 들었을 때 실시하여, 늦추고 서둘고를 모두가 상황에 알맞고 시기에 적절하게 처리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형과 상은 임금이 쓰는 큰 권리로서 꼭 맞게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 어진 임금들은 형은 되도록 적게 쓰면서도 장물을 취득한 탐관오리에게는 매우 준엄하였고, 상은 넉넉히 써 청렴 결백한 자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한(漢)의 선제(宣帝), 당(唐)의 태종(太宗), 송(宋)의 태조(太祖)가 나라를 잘 다스렸던 것이 모두 그 방법을 썼는데, 참으로 그 요령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수령을 고르기에 힘쓰지 않아, 잘 다스리는 효과가 나오면 혹시 그가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가 하면, 장물을 받은 사실이 분명한 사람에게도 오히려 은혜와 용서를 베풀고 계십니다. 게다가 공평한 여론마저 들을 수가 없고 위아래가 꽉 막혀 있어, 최고의 치적을 남기고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을 전하로서는 들을 길이 없고 악이 쌓인 사람이라도 힘만 있으면 유사가 규명할 수 없으며, 대신 중신과 결탁하여 왕래가 끊기지 않고 중대한 외직을 맡으면 제멋대로 주구(誅求)를 일삼아, 맑고 아름다운 기상은 모조리 없어지고 흐리고 더러운 물결만 넘쳐흐르고 있으니, 백성이 어떻게 보존하며 나라가 어떻게 견뎌나겠습니까. 청렴 근간하고 치적을 남긴 관리에 있어서는, 옛 제왕들은 그에게 글월을 내려 장려하기도 하고 혹은 질(秩)을 높여주면서 그 직에 그대로 있게도 했는데, 지금은 다만 승서(陞敍)로 한계를 삼고 준직을 중히 여기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서와 준직에 관한 권한도 임금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전조에 있어, 청탁에 따라 실시하고 청탁이 없으면 폐기되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남의 귀와 눈을 솟구치게 만들어 한 시대를 격려하고 권장하겠습니까.
그러나 형과 상이 그렇게 틀리게 적용되는 원인은, 사실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심이 성실하지 못하고 격려와 권장의 요령을 잘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시비란 공평한 여론을 만들어내는 근원지로서 시비가 제대로 가려지면 속임수는 자취를 감추고 바른 선비가 쓰여지는 것이고, 시비가 제대로 가려지지 않으면 흑백이 뒤섞여 부정한 무리들이 나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비가 혼동되고 있는 것이 어찌 나라를 가진 자의 깊은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항상 경연에 하교하시기를, ‘우리 나라 사대부들은 한 가지 병통이 있다. 서쪽을 가리켜 일단 동쪽이라고 했으면, 그것이 비록 동쪽이 아님을 알면서도 계속 고집을 하는 것이다.’ 하셨는데, 그게 바로 자신이 옳기 위하여 그름을 꾸민 병으로서 시비가 혼동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근래 들어서는 그 폐습이 더욱 성행하고 한 시대를 풍미하는 바람에 위아래가 똑같아, 비록 하늘과 같은 성상의 도량이지만 꼭 그렇지 않으시리라고 신이 감히 보장을 못하겠고, 사대부 중에서는 강팍하고 자기가 제일이며 그름을 알고서도 반드시 꾸미는 자로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이 가장 심합니다. 논의는 편벽되고 험한 것이 주장이고 일처리는 가파른 것을 숭상하며, 자기 소견을 고집했다 하면 반드시 꾸며대고 한 번도 마음을 비워 어디가 지당한가를 찾은 적이 없으니, 그러고서야 거의 나라를 망치는 정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머지 재신들도 거의가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병통들이 있고, 나라 전체가 모두 이기기 좋아하는 쪽으로만 몰려가고 있으니, 시비가 어떻게 제대로 가려지겠습니까.
사람이 상대방을 보는 데는 밝고 자신을 보는 데는 어두운 것이니, 전하께서도 뭇 신하들이 동을 가리켜 서라고 하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무슨 일을 당하여는 전하 자신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하들 역시 전하의 이기기 좋아하는 병에 대하여는 간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하는 일은 도리어 더 심한 데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당연히 먼저 자신을 반성하여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을 제거하시고, 신하들도 제 버릇만 제일로 아는 편벽된 생각을 바로잡도록 깊은 경계를 가하시어, 각자가 모두 편견을 버리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에 힘쓰고 위아래가 서로 노력하여 다함께 대중 지정의 길을 걷는다면, 시비가 혼동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가리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정직한 선비를 우대하시고 좋은 교훈이면 그것을 채택하시어, 좌우에 관계없이 귀담아듣기를 게을리 않으시고 심지어 초야에까지 도움을 청하시니, 말길이 막힐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신은 ‘간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자는 흥하고, 간하는 사람을 죽이는 자는 망한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독단을 좋아하시고 자신감에 넘쳐 있어, 간언을 굳이 막으려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 스스로가 간하는 것을 포기하니, 간하는 자를 죽인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사실은 선비를 죽인 셈입니다. 그 때문에 바른말 하는 선비들이 맥이 풀리고 있는 것입니다. 홍우원(洪宇遠)의 상소만 하더라도 그가 비록 끌어댄 비유는 맞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뜻만은 임금을 사랑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는 그를 포상도 할 만한 일이요 용서해도 되는 일입니다. 그후 재변을 당했을 때 전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세 아이의 친속을 모두 서울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신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감격에 젖어 눈물이 나옵니다. 그 일이 비록 우원의 말을 채택하여 그리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그 말과 맞지 않았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는 전하께서 우원에 대하여 따뜻한 유시를 특별히 내리시고 예전처럼 대우를 하면, 그게 바로 성인의 도량이며 미래를 격려하고 권장하는 훌륭한 뜻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물리침을 당했던 다른 신하들은 모두 다시 기용하여 청반(淸班)에다 두시면서 유독 우원에게만은 아직도 석연찮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러고서야 말길이 막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대각이 혹 글월을 올려도, 번번이 사를 끼고 한 말들이 많아 연일 시끄럽기만 하지 모두가 형식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고, 정작 위로 국가 흥망에 관계된 일이나 아래로 자기 일신의 화복에 영향을 끼칠 말을 감히 입 밖에 내지도 않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직한 선비를 예우하시고 좋은 말 듣기를 즐기시어, 풀어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뒤이어 상을 내림으로써 격려와 권장의 뜻을 나타내시고, 간하는 자들도 저들끼리 서로 권면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향곡에서 생장하고 벼슬한 지도 오래지 않아 서울 물정은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 쓰는 법에 대하여 살펴보면, 청류의 진퇴는 일정한 격식이 있어 이력이 있어야만 현양 발탁이 되고 자기가 잘못하면 앞길이 당연히 막히며, 후보 추천을 할 때 이조에서도 자기들 뜻대로는 잘 안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일반 음직을 뽑는 데 있어서는 사를 쓰는 일이 절반도 넘고 공정한 길이라곤 거의 없어, 후원자가 없으면 되지 않고 촉탁이 아니면 길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벼슬길이 너무 문란하고 명기(名器)가 혼돈 상태에 있는 것이 극에 달했습니다. 지금 다행히 전형을 발탁 제수하여 해묵은 폐단을 점점 바로잡아 가리라는 기대는 있지마는, 춘방(春坊)을 더 둔 목적은 세자를 보도하기 위한 좋은 뜻에서 한 것으로서 진선(進善) 이상을 제수할 때는 모름지기 오랜 명망을 갖춘 자로 해야 할 것입니다. 참하에서 뽑는 별도로 둔 자의(諮議)만 하더라도, 문관(文官) 인망을 갖춘 자로서도 도리어 그 자격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면 온 세상을 통틀어 두세 명만 있다고 하여도 오히려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다도 시험해본 사실이 없는 나이 적은 음관을 곧 자의에 추천하여, 평상시 노성한 사람도 회피하고 감당 못하는 예를 하루아침에 신진 인사에게다 쓰고 있으니, 다만 보기에나 좋을 뿐 보탬이 되는 실효는 없을 것이며, 또 현자를 우대하고 선비를 사랑하며 염치를 배양하는 방도도 아닐 것입니다.
아, 인재가 등용되면 기강도 진작되어 형과 상이 옳게 시행이 되고, 공도(公道)가 행해지면 말길도 열리어 시비가 자연 분명해지는 것인데, 이상 네 가지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어진 인재를 발탁하고 공도를 넓히는 두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재가 나오기 어려운 원인과 공도가 행해지기 어려운 이유를 따져보면 거기에는 까닭이 있는데, 그것은 붕당이 남긴 화가 오늘의 나라를 병들게 하는 뿌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학술이 분열된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가정(嘉靖)011) 융경(隆慶)012) 이후로 사론(士論)이 팽팽히 맞서 1백 년을 두고 서로 버티어 왔으나, 그들은 화가 위로 조정에까지 미치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그렇지가 못하여 기치를 세운 것은 비록 의견을 달리한 때문이었지만 마음 쓰는 것은 사실 명예나 이해에 좌우되어, 별로 다르거나 같을 것도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터놓고 배제도 하고 응원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박한 무리들은 용기를 뽐내며 먼저 기어오르고 편협한 무리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막무가내이며, 질탕한 풍류 속에 너도나도 서로 자랑하다가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고질로 변하여 당혹감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분풀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면 오직 자기 속만 시원하면 그만이고, 임금의 안위와 종묘 사직의 존망은 치지도외한 채 생각에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야말로 본심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이 상소문이 4월 그믐경에 현과 도를 거쳐 올라왔는데, 때마침 선대왕이 병환 중이어서 받아들이지 못했다가 곧 국상을 당하여, 아직까지 승정원에 유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승지 유계가 상께 아뢰기를,
"여하의 상소가 명칭은 응지이온데, 내용이 처음에는 본도의 사정을 말하였고 이어 오늘의 폐단을 언급했으며, 위로 성상의 학문과 공부 과정 그리고 하신 일의 잘잘못을 논하였고, 또 완남 부원군 이후원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의 논의가 편파적이고 간험하여 그러다가는 나라를 망치는 데 이르지 않겠느냐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전조가 음관을 자의로 추천한 것이 잘못임을 논하기도 했는데, 이 상소가 진언 형식으로 올라온 것이어서 받아들이기는 들여야 할 것 같으나, 그 내용들이 간혹 대행왕과 직접 관계가 되는 것들도 있어 오늘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냥 받아들일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써 올리도록 합니까?"
하니, 상이 원상 정태화와 논의하라고 하였는데, 태화가 다시 써서 올리도록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후 논의들이 여하의 뜻은 송시열을 헐뜯기 위한 것이라 하여 그를 맹공하였기 때문에, 상도 그렇게 음험 간특하고 질투가 심한 여하의 상소문을 구언의 범주에 넣어 다시 써서 올리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그해 봄에 기근이 들어 상평청이 3월부터 죽을 쑤어 기민을 먹이다가 6월에 와서야 정지하였다.
장령 황준구·허목, 지평 이합·강유후(姜裕後), 정언 이익(李翊)이 합계하여 청하기를,
"예관으로 하여금 절목을 다시 심사 결정하게 하여 계빈(啓殯)하는 날까지 최복을 뒤쫓아 다시 만들고, 전일 만들었던 최복은 그 끝을 꿰매 공복(公服)으로 전용하면, 먼젓번 것과 지금 것을 다 버리지 않고 쓸 수 있고 또 예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다 맞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예조에 명하여 다시 논의하게 하였다. 정언 이익은 이상(李翔)의 아우이다. 이상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복제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이익이 또 이 논의를 하였다.
사헌부가, 서원 현감(西原縣監) 성초객(成楚客)이 곡반(哭班)에서 술주정을 했다 하여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탄핵하였다. 초객은 당시 물의에 저촉을 받던 사람으로서 이 문제로 다시 탄핵을 당했으나, 사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형조 참의 이척연(李惕然)도 소를 도살한 사람을 지레 석방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과천 현감 심추(沈樞)는 성복 때 마대(麻帶)가 보통 것과 다르다 하여 역시 파직을 당하였다.
사간원이, 빈전 도감(殯殿都監)이 기축년 전례를 잘못 인용하여 내관들이 신을 백화(白靴)를 무려 1백 86켤레나 만들었음을 논하고 해당 낭청 정채화(鄭采和)를 파직할 것을 논하였는데, 그때 채화는 이미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자리를 옮긴 뒤여서 추고만 하고 파직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집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돌아가 노모 봉양할 것을 빌자 상이 그 상소문을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조정의 선비 대접하는 도리로 보아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하니, 상이 더 머물러 있도록 유시를 내렸다.
6월 3일 임진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달 초삼일 밤 입진(入診) 때, 의관 이기선이 많이 부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감히 꽁무니를 뺄 생각으로 진맥할 줄을 모른다고 아뢰어 왔었는데,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작년 편찮으셨을 때 입진을 하고 맥을 논하고 한 것은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그의 정상이 매우 흉측 교묘하여 엄히 징벌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를 잡아들여 국문 처리하라."
하였다. 기선이 공장(供狀)에서, 원래 맥 짚는 법을 모른다고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맥 짚는 법을 모른다면 어떻게 의원이 되었느냐?"
하고, 엄형을 가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의금부가, 어의 박군(朴頵) 등의 죄안을 장류(杖流)로 감정하자, 상이 이르기를,
"기축년에 입시했던 어의 정남수(鄭南壽) 등도 모두 그 법의 적용을 받았던가?"
하니, 금부가 아뢰기를,
"기축년 국상 때 정남수는 논죄 대상에 들지 않았고, 이형익(李馨益)과 박군은 모두 장류로 처리되었습니다. 지금 박군 등에게 적용한 죄도 바로 그 법을 쓴 것입니다."
하자, 답하기를,
"그때 이형익·박군이 바로 오늘의 유후성·조징규인 셈이다. 그들에게 그렇게 중한 법을 적용해서 되겠는가?"
하였으나, 금부가 되풀이하여 아뢴 끝에 결국 장 일백(杖一百) 탈고신(奪告身)을 적용하였다.
완남 부원군 이후원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병 중에 있으면서 북로 수령이 올린 상소 내용을 들어보았는데, 그가 신더러 강팍하고 자신을 제일로 여기며 그름을 알면서도 반드시 꾸며댄다고 하고 끝에 가서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꼬집었다니, 나라를 망친다는 것은 남의 신하로서 더할 수 없는 죄입니다. 바라건대 신의 직을 삭탈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이 젊은 자의 말로 인하여 그렇게까지 책임을 느낄 것이야 뭐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임영 대군 및 안여경의 묘산과 헌릉의 이수동, 영릉의 홍제동, 건원릉의 첫째 산등성이 등처를 모두 자세히 살펴보고, 상께서 보시도록 하기 위하여 삼가 도형을 올립니다."
하니, 상이 종전에 기록하여 둔 여러 산들 중에서 가장 나은 곳을 올라오게 하여 보았는데, 본 곳이 대체로 열다섯 군데나 되었다고 하였다.
6월 4일 계사
정원이 아뢰기를,
"장마가 지리하여 보리가 물에 잠기고 벼가 손실되고 있습니다. 비록 입추가 못되었지만 제사를 모셔 기청(祈晴)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렇게 하도록 명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바라건대, 동부승지 유계의 다른 직을 체차하여 유사 당상의 일만 전담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양사가 연이어 유후성 등의 건에 관하여 아뢰고, 또 신가귀를 교형(絞刑)에 처하라는 명을 거두고 서둘러 방형(邦刑)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상이 말을 만들어 비답하였다.
"교형이나 참형이나 죽이는 것은 같으나 참형을 않으려는 이유는 선왕의 뜻을 받들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비록 가귀가 침을 잡았을 때 후성 등이 그가 오랜 병을 앓고 수전증이 있음을 알고서도 그만두게 못했다 하여 그것이 큰 죄라는 것이지만, 지난해 파종(破腫) 때도 가귀가 병이 없으면서 역시 손은 떨었다. 그것은 선왕께서 통촉하신 바로서 그가 침을 잘 놓는다고 늘 말씀하셨으며, 그후 그가 병이 중하여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쌍하고 애석히 여기시는 말씀을 누차 하셨다. 그날도 그로 하여금 침을 잡게 한 것은 원래 그래서였던 것이다. 의관들이 다 물러간 후 내가 곁에서 머리 부위를 바라보고 심신이 착잡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더니, 선왕께서 돌아보시고 이르기를, ‘파종을 한 것은 살기 위함인데 왜 우느냐?’ 하셨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통곡이 있을 뿐이다. 그때 비록 1백 명의 후성이 있었을지라도 그 사이에서 감히 무슨 말을 했겠는가. 그대들은 그 당시 사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덮어놓고 과격한 말만 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그 뜻을 모르겠다. 기축년에도 이형익 등에 대하여 양사가 합동으로 조사하여 죄를 내릴 것을 아뢰어 청하였으나, 선왕께서 선대왕 뜻에 위배될까 염려된다는 하교가 있었다. 나 역시 선왕의 그 가르침을 삼가 받들자는 것이며 따라서 선왕의 그 지극하신 뜻을 따르려는 것이니, 비록 국법이라지만 어찌 그 사이에 경중이 없겠는가. 여러 말 하지 말라."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작년 가을 선왕께서 병이 위중한 상태에 계시면서도 신에 대하여 물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신이 그 끝없는 성은에 감격하여 허둥지둥 부궐은 하였으나,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금방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다만 성상의 체후가 오래도록 정상 회복이 못 되셨기 때문에, 금방 물러간다고 못하고 조금 지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은총을 받지 못할 사람에게 은총이 생각 밖에 내려져 신에게 전직(銓職)을 제수하셨으므로 신이 연거푸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결국 받고야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지금까지 8, 9개월 동안에 크고 작은 관직 제수를 얼마나 받았는지 모를 정도인데, 그때마다 훼담과 이의가 어지럽게 일어나 자신이 항상 부끄럽고 두려움을 느껴왔던 것입니다. 지금 정원이 아뢴 판관 홍여하의 상소 내용을 들으면 그 중 한 대목은 바로 신을 배척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신이 비록 그 상소문 원본은 보지 못했으나 그러나 그 대의는 짐작이 가고, 그것은 또 신이 밤낮으로 겸허하게 기다려왔던 터이어서 마치 침이 병든 곳을 찔러주듯이 시원하고 달가우며, 신의 속 사정이 드러나고 그가 한 일이 잘한 일이어서 다시 유감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신의 본직을 갈아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이 젊은 자의 날랜 말로 인하여 그렇게까지 책임을 느낄 게 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참판 이일상(李一相), 참의 조복양(趙復陽)도 상소하고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듣기에, 홍여하가 상소한 내용 중에 정관(政官)이 인재 등용에 있어 잘못이 있었다고 논척하여 판서 송시열이 그 때문에 이미 글월을 올려 면직을 빌었다고 하는데, 신들 역시 어떻게 감히 인물을 전형하여 진퇴를 결정하는 자리에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들을 갈아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을 살피라고 답하였다.
한달 내내 큰 비가 내려 수재의 참혹함이 팔도가 일반이었다. 집들이 떠내려가고 익사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서울에서는 다리를 건너다가 익사한 자도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휼전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6월 5일 갑오
정유성(鄭維城)을 새로이 우의정으로 삼고, 권대운(權大運)을 좌부승지로, 유계(兪棨)를 대사성으로, 이시술(李時術)·안후열(安後說)을 교리로 삼았다.
대사헌 송준길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춘궁(春宮)에 계시면서 덕을 기르시고 오랫동안 수양을 쌓으시다가 왕위에 오르시니 만물이 다 보고 있습니다. 효성이 중외를 감동시키고 뭇 백성들 뜻에 꼭 맞는 명령을 내리시니, 오랫동안 경연 석상에서 모시면서 남다른 사랑을 받아오던 신으로서야 희비가 엇갈리는 감정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만 배나 더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크게 걱정되고 두려운 바도 있습니다. 처음에 혹시라도 삼가지 않았다가는 뒷 수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제왕의 효도는 필부들의 그것과는 달라 곡읍(哭泣)의 절차라든지 궤전(饋奠)의 예절 같은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예문에서도 이르기를, ‘죽은 이로하여 살아 있는 이가 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였듯이, 약이(藥餌)로써 조섭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가뭄과 장마가 골고루 찾아와 하늘의 이변이 멎지 않고 있으니, 성상께서 비록 상복을 벗지 않고 계시지만 때로 대신과 재신들을 접견하시어 국가 기무를 상량하시고 겸하여 상장(喪葬)에 관한 일도 강론하시며 선조조(宣祖朝)에서 하던 예대로 《예기(禮記)》의 상례(喪禮) 등 편도 강론하소서."
하고, 또 널리 현준을 초빙하여 새 치화(治化)에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을 청했으며, 또 소공(召公)이 말한 "임금 하기에 따라 하늘이 철(哲)을 명할 수도 있고 길을 명할 수도 흉을 명할 수도 있다."는 것과, 또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라고 했던 말들을 인용하는 등 누누이 수천 마디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기고 받아들였다.
호서(湖西) 면천군(沔川郡)에 5월 4일 비와 우박이 함께 쏟아져 감사 이진(李𥘼)이 치계하여 알려왔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북녘 지대가 날이 갈수록 시들고 퇴폐해가고 있으니 바라건대 쇄환(刷還)의 법을 엄히 하시고 매마(賣馬)의 금령을 신명하실 것이며, 또 각읍으로 하여금 잉태한 여인을 별도 기록하였다가 아들을 낳으면 관에서 쌀을 대주어, 아들을 낳으면 기르지 않는 관습을 막게 하소서."
하였는데, 북병사 권우(權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장릉(長陵)의 굽은 담이 큰 비로 인하여 무너졌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당연히 위안제를 모셔야 할 것이나 국상 졸곡 전에는 크고 작은 모든 제사를 다 모시지 않으므로, 다만 고문(告文)을 지어 위안의 의식만 거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양사의 논의를 흔쾌히 따라 후성·징규의 죄를 빨리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이유태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선왕조에서 망극한 은총을 받고서도 일찍이 직에 나아가 신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던 것은, 집에 늙은 어미가 있어 차마 멀리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오늘에 와서 어미를 버리고 벼슬길에 나아감으로써 성상의 처음 하시는 청명한 정치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직명을 갈아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홍여하의 상소로 인하여 소를 올려 제자신의 죄상을 열거하고 방형(邦刑)을 받을 것을 빌었는데, 성상께서 ‘나이 젊은 자의 날랜 말로 인하여 그렇게까지 책임을 느낄 것이 뭐 있겠느냐.’는 비답을 내리시어, 신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직명으로 말하면 한만한 직이 아니어서 비록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남의 입줄에 올랐으면 그대로 눌러 있기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신이야 자신의 흠을 남이 말하지 않아도 신이 사실 알고 있고, 여하의 상소는 오히려 늦은 편이며 또 너무 관대한 편이어서 신으로서는 그가 날래다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빨리 체직을 허락하시고 신의 죄도 다스려 나라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사실 잘못 ‘날래다’라는 글자를 써 마음으로 매우 부끄러움을 느끼는 터이지만, 경이 그렇게까지 고사할 것이야 뭐 있겠는가. 되도록 서둘러 직을 살피라."
하였다.
호서에 기민 먹일 때 대출한 상평청의 미조(米租) 2천 7백 80석을 견감하도록 하였다.
6월 7일 병신
상의 병세가 오래도록 차도가 없자 약방 도제조인 영의정 정태화가 두서너 의관과 함께 입진할 것을 청하였고 좌의정 심지원도 함께 들어갔는데, 상이 보고는 통곡하였다. 영상이 병증을 논의한 후 이어 아뢰기를,
"홍여하의 상소가 비록 백성들의 병막과 시정의 폐단에 관하여 논하였으나, 이후원을 꼬집어 나무란 말은 너무 근거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후원이 일찍이 무엇을 담당하여 한 일이 없는데 무슨 나라를 그르칠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이어 전주(銓注)가 공정하지 못하고 자의(諮議) 의망이 너무 함부로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송시열이 그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누차 사직소를 올렸지만, 어찌 여하의 말 한 마디로 인하여 동요가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보기에는 그 상소가 과연 어떻던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상소 내용에 이미 폐단에 관하여 말하였고 또 언로와 관계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다시 써서 올리라고는 하였으나, 가령 규례에 따라 재가를 받는다고 하여도 채택할 만한 것이라곤 없습니다. 이판(吏判)의 생각에는, 이미 다시 쓰라고 했으니 그러면 그 일이 결말이 된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행공(行公)을 않으려는 것이지만, 그러나, 조정이 예우하는 도리로서는 여하의 망령된 말로 인하여 쉽게 총재(冢宰)를 갈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후로도 혹시 동요를 일으키고 싶어하는 자가 있어 또 다시 운운한다면 그 폐단 역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판은 내가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데 어찌 그 때문에 갈아낼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제왕은 효도의 법이 필부와는 다릅니다. 모름지기 감정을 억제하고 예제를 따라 몸을 보호하는 데 깊은 배려를 하시어 후회스러운 일이 있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옛날 소신이 초토(草土)에 있을 때 병이 매우 중했는데, 선왕께서 중사 이엽(李曄)을 특별히 보내시어 권도를 따르도록 권하시고 나라를 위해 몸을 보호하라는 뜻으로 타이르셨습니다. 신은 그때 성상의 하교에 감격하여 울면서 그 명령을 따랐었는데, 그 심정으로 상상해 보자면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령이 지금 전하를 얼마나 못잊어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거기까지 생각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였고, 심지원도 뒤이어 성궁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이 시기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면서, 이어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상이 승지 김수항에게 이르기를,
"대사헌의 차자 내용 중에, 현준을 널리 초치하라고 한 문제는 정원이 되도록 빨리 거행하되, 내가 말한 것으로 내용을 꾸며서 유시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전 찬선 권시(權諰), 전 진선 윤선거(尹宣擧)를 당연히 먼저 징소해야겠지만, 그 밖의 재야 인사들도 신이 물러가 일일이 찾아보고 똑같이 불러 일으키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상이 영상에게 이르기를,
"대간이 유후성·조징규 사건을 놓고 논집한 지 이미 오래이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후성이 종전에는 약을 쓸 때 그 마음씀이 측량키 어렵다는 것을 볼 수가 없었는데, 어찌하여 지금 와서 그러한 점이 있다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자전의 병증이 때없이 발작하곤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후성을 따를만한 의관이 없고 또 설사 있다고 하여도 전후 증세를 자세히 알기로는 이 두 의관 만한 자가 없다. 죽음을 면제하여 유배로 처리했다가 급하면 불러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그렇게 처리하시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군(朴頵) 무리들의 고신(告身)을 추탈하는 일에 있어서는 군중들 생각이 모두 너무 가볍다고 하오니, 도배(徒配)가 맞을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고 그날로 대계에 의하여 제조 등의 직을 파하고 박군 등을 도배하였다.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치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왕위를 이어받으신 초기일수록 훌륭한 재상을 두어야 옳을 것인데, 덕있는 이에게 내려져야 할 그릇이 도리어 신의 몸에 내려졌습니다. 제 분수를 지키기 위하여 계속 사피만 하자면 연행(燕行)의 길이 임박하여 일을 당한 뒤 어렵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는 의리에 저촉되고, 그렇다고 젠 체하고 받자니 명기가 더럽혀집니다. 재상이라는 자리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신명(新命)을 거두시고 임시로 의정 직함을 붙여 행장을 차리고 국경을 나갈 수 있도록만 하시고, 재상은 다른 사람을 다시 정하셔 기무를 총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허락치 않았다.
호서 예산(禮山) 고을에서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몸은 하나에 머리가 둘이고 손과 발이 넷씩이어서 감사 이진(李𥘼)이 치계하여 알려왔다.
6월 8일 정유
송시열을 판의금으로, 【시열의 질(秩)이 정2품이어서 의망 축에 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2품까지 의망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어 그를 제수하였다.】 정치화를 병조 판서로, 김남중을 공조 판서로, 강백년을 좌승지로, 이숙을 봉교로 각각 삼았다.
원상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각도의 암행 어사 서계를 모두 이조에 내렸습니다. 그 중에서 당연히 갈려야 할 수령은 감히 임무 수행을 못하고 혹은 이미 올라온 자도 있는데, 국장 때 도감이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대로 자리를 비워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조 판서 송시열이 한결같이 혐의를 이유로 나오지 않고 있으니, 즉시 명초하여 그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시열이 병을 핑계하여 부궐하지 않았고 두 번째 불러도 오지 않으며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완남 부원군 이후원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허락치 않았다.
6월 9일 무술
대사헌 송준길이 정원에 말을 보내, 청대(請對)를 하고 싶은데 감히 못한다는 뜻을 전하니, 【상의 건강이 편찮았기 때문이다.】 답하기를,
"나도 보기를 원하나 좀 피곤하여 못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써서 들여오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오늘 이보다 더 중대할 수 없는 일은 오직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신의 사사로운 걱정과 지나친 염려가 밤낮없이 초조하고 민망할 뿐인데, 엎드려 듣기에 이제 이미 너무 야위신데다 학질까지 겹치셨다니, 이는 비위(脾胃)가 상하여 원기를 차리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만약 그대로 가다가 혹시 더하기라도 하면 오직 병들까 걱정하시는 자전이야 그만두고라도, 종묘 사직과 신인(神人)이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모를 것인데 그리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리하여 입대하여 《예경(禮經)》의 뜻을 상세히 아뢰고 싶은 심정이나 그리도 할 수 없어 더욱 견딜 수 없는 걱정과 번민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빌었으나, 허락치 않았다.
승지 김수항이 아뢰었다.
"그제 입시했을 때, 유현 초빙 문제에 대하여 이미 하교를 받자옵고 물러와 송준길에게 통지하고 물었더니, 그의 말이 전 자의 이상(李翔)도 일찍이 머물러 있으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 이미 하향하고 없으니 그도 똑같이 불러야 할 것이라고 하여, 그 3인에게 내려보낼 유시 초안을 모두 써 들입니다."
6월 10일 기해
죄인인 의관 신가귀를 교형에 처하였다. 【명령이 내린 지는 이미 오래 되었으나, 거리낀 바가 있어 이때까지 끌어오다가 비로소 집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213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국왕(國王) / 의약-의학(醫學)
우의정 정유성이 세 번째 상소하여 면직을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이유태가 현재 성 밖에 있으면서 소를 올리고 영원히 돌아가려 한다고 하온대, 그에 대하여 입성을 하도록 권유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곧 사관 유명윤(兪命胤)을 보내 들어오도록 유시를 내렸는데, 유태가 답하기를,
"성상의 유시가 그와 같은데 어찌 감히 그냥 돌아가겠습니까. 삼가 다시 성중에 들어가 또 한번 절박한 사정을 아뢴 다음 물러가겠습니다."
하였다.
집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돌아가 노모를 모실 것을 다시 청하니, 상이, 영원히 갈 생각은 말라고 유시하고, 이어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제급하게 하였다.
행 부호군 조경(趙絅)이 상소하여 시책(諡冊) 찬술의 명에 대하여 사의를 표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서 묻기를,
"조경이 녹봉을 받고 있는가?"
하니, 정원이 대답하기를,
"그가 사는 읍에서 월봉(月俸)을 주고 있을 뿐이고 녹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음식물을 제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뜻과 행실이 청고하고 결백했으며 늘그막엔 더욱 더하여, 용만(龍湾)에서 돌아와서도 곧바로 포천(抱川) 시골집으로 돌아가고 발길이 서울에 들린 적이 없었다. 또 정상적인 녹도 받지 않아 효종이 그가 살고 있는 읍에 명하여 특별히 월봉을 주도록 하였는데, 조경이 사양하다 못해 처음으로 받았던 것이다. 행동거지가 구차스런 이경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지 차이였다.
6월 11일 경자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전관(銓官)으로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남의 말이 있게까지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꼭 신으로 하여금 염치도 잊어버리고 억지로 얼굴을 들고 나와 일을 하라시니, 전하께서 이 하잘것없는 신을 너무 박대하시는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듣기에 여하의 상소문을 되돌려보내 다시 써서 올리라 하였다니, 그렇다면 그것은 신의 죄명이 아직 예람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비록 경중은 있을지언정 앞으로 무슨 죄이든가 받기는 받아야 할 것이니, 바라건대 본직과 질을 승진한 신명을 모두 갈아 치욕을 멀리하고자 하는 필부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경을 강박하게 대할 수가 있겠는가마는 지금 만약 체직을 허락한다면 후일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이니, 경은 사양 말고 공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상이 처음에 본직만은 사의를 받아들이겠노라고 답했다가, 승지 김수항 등이 갈아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고쳐서 이 비답을 내린 것이다. 그때 상이 시열을 갈 것인지의 여부를 영상 정태화에게 비밀리에 물었는데, 태화가 그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답하여, 당시 여론이 떠들석하게 일어 태화를 나무랐다. 그러자 태화가 두려워하여 상 앞에서 매우 강력하게 여하를 공박하였었다.
예조가, 대간이 쟁집하고 있는 최복(衰服)을 뒤쫓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건에 대하여 대신과 논의할 것을 청하니,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은 주장하기를,
"신들의 뜻은 지난번에 이미 다 밝혔으므로, 지금 다시 논의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고, 영부사 이경석은 경전과 국전(國典) 등 이것 저것을 인용해가며 꽤 상세한 변론을 전개했으며, 연양 부원군 이시백은, 오랫동안 써 오던 복제를 이렇게 급박한 시기에 경솔히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니 다시 송시열·송준길에게 물어보도록 하라는 주장이었고, 시열은, 현재 글월을 올려 자신을 탄핵하고 있는 중이므로 감히 의논드릴 수 없다고 했으며, 준길은 주장하기를,
"신의 뜻은 저번에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의 논의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원상인 정태화·심지원을 오늘부터 그만둘 것을 명하였다.
상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갔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우의정 정유성, 이조 판서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동부승지 이은상이 입시하였다. 삼공(三公)과 시열·준길이 번갈아 앞으로 나아가 예경을 인용해가며 권도를 취할 것을 강력히 아뢰자, 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답하기를,
"내 비록 병이 있기는 하나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데, 경들이 지나치게 염려를 하고 있다."
하자, 준길이 다시 성종 대왕이 재정 신료에게 답했던 ‘행소(行素)는 과연 어려운 일이고 그 밖의 다른 일이나 있는 힘을 다하여 해야겠다.’는 하교를 인용하면서 반복하여 아뢰었고, 시열도 아뢰기를,
"전하께서 몸 보중을 생각지 않으셨다가 후회를 끼치는 날이면 재정 신료들이 모두 죄인이 되는 것은 물론, 전하께서 효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정태화는 아뢰기를,
"지난번 어사를 내보낼 때 선왕께서 특히 신과 송시열로 하여금 봉서(封書) 안의 절목을 논의하여 정하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흉년이어서 조사 대상을 되도록 줄여야 했기 때문에 소 도살 항목은 애당초 거론을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각읍마다 항상 있는 일로서 그것을 들추어내기로 들면, 비록 좋은 치적을 남기고 있는 자라도 으레 파직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애당초 봉서에 넣지 않았으면 꼭 거론할 게 뭐있는가?"
하였다. 시열이 본직을 간곡히 사직하자 상이 이르기를,
"잘못이 저쪽에 있는데 경에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경의 청을 들어주려고도 하였으나 어사의 봉서에 관하여 경이 이미 선왕조에서 명을 받았었는데, 지금 만약 자리를 갈고 그 일을 매듭짓지 않는다면 그 역시 선왕께 복명하는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난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여하는 이후원을 공격한 그 한 가지 일로만 보더라도 허튼 소리를 꾸며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전조(銓曹)까지 언급하면서 내용에 억양이 있었고, 음관(蔭官)을 자의(諮議) 후보로 추천했다 하여 그것을 죄안으로 삼았는데, 허탄하고 망령스러움이 이러하였지만 상께서 임정하신 초기의 언로에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시 써서 올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중신을 면직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밖에서는 여하를 모두 괴상 망측하다고 합니다."
하였으며, 유성은 아뢰기를,
"여하가 응지(應旨)를 핑계삼아 간사한 말을 올리면서 대신을 무함했는데, 그의 내심은 은근히 양송(兩宋)을 침범하고 핍박하여 조정에서 불안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그의 상소가 만약 선왕이 자리에 계셨을 때 들어왔더라면 틀림없이 진노를 하셨을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여하 상소는 잘라 말한다면 간사한 사람의 사특한 말입니다. 모름지기 분명하게 가려내어 시비를 정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은상은 아뢰기를,
"지금 만약 이판을 갈아낸다면 이는 바로 여하의 간사한 술책에 말려든 것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뒤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어젯밤에 내강(內降)013) 을 봉하여 되올린 것은 아마도 성상께서 깊이 생각지 않으시고 하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생각기에 그의 체직을 넌지시 허락하여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도 무방하리라 여겼었는데, 지금 은상의 말을 듣고 보니 신의 생각이 잘못이었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또 굳이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뭇사람 논의가 다 같아 아마도 경의 뜻을 받아들이기는 어렵겠다."
하였다. 준길이, 의관의 죄를 다스림에 있어 오래도록 윤종(允從)에 난색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하여 물의가 더욱 격해가고 있음을 아뢰니, 상은, 의관에게는 큰 죄가 없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이어 대관이 잘못 들은 사실을 세어가며 답하였다. 정유성·송시열이 각기 이기선은 사실 맥 짚는 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그가 받은 형벌이 과중하다는 뜻을 말하니, 상이 답하기를,
"본디 그를 꼭 사지에 두려는 것이 아니었으니,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하였고, 준길이 또 약방 제조의 죄를 논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처(付處)는 너무 중하다."
하였다. 상이 장령 허목의 상소문을 꺼내 대신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가칠(加漆)을 하는 것이 물론 미안한 일이나 불행히도 이러한 변례(變禮)를 당했는데, 어떻게 모두를 다 고례(古禮)와 같게야 하겠는가?"
하니, 영상·우상이 대답하기를,
"초빈을 여는 일은 평상시에도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자주 여닫고 있어 참으로 극히 미안한 일입니다."
하였고, 시열은 아뢰기를,
"허목의 말이 매우 옳습니다. 겉 재궁(梓宮)에다 가칠하더라도 그 역시 오랜 세월을 내다본 배려가 아니겠습니까?"
하자, 태화도 아뢰기를,
"신 역시 허목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최복 문제에 있어 나는 예를 모르지만 뭇 논의가 들쑥날쑥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들의 의견은 저번에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하였고, 유성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써 오던 법규를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예란 정문(情文)이 서로 맞아야 되는 것인데 이미 최마(衰麻)가 있고 질대(絰帶)가 있으면 음식 기거에 있어서도 당연히 상인으로 자처해야 할 것이니, 그리되면 혹 구애가 되고 불편한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전부터 바꾸지 못했던 이유가 혹시 그래서였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으며, 시열은 아뢰기를,
"노(魯)나라 임금 초상 때 계씨(季氏)가 맹경자(孟敬子)에게 묻기를, ‘임금 초상을 당하여 무엇을 먹는가?’ 하니, 경자는 죽을 먹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계씨가 이르기를, ‘그리하면 아마 남들이 의심하기를, ‘실정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 야위어 보이려 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나는 밥을 먹겠다.’ 하여, 선유들이 그를 일러 소인으로서 못하는 짓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이라고 어찌 자기 스스로의 실정으로 보아 진실되지 못한 점이 있다는 이유로 그 예를 그냥 폐할 것입니까. 이경석이 아뢴 내용에 ‘주자(朱子)가 말한 초빈을 열 때 복(服)을 올린다고 한 설은 바로 사군(嗣君)이 초상 때의 복을 추복(追服)함을 가리킨 것이지, 지금의 경우와 같이 신하들이 이미 성복한 후에 상복을 추복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는데, 그것은 크게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아버지와 임금을 위한 복은 참최(斬衰) 3년이고 이는 천자에서 서인까지 더하고 덜함이 없다.’ 하였는데, 지금 주자의 말대로 최복을 만들어서 배제(陪祭) 때 쓰고 전일에 만든 복은 그 가를 꿰매 시사(視事)의 옷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미비된 점을 보충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명묘(明廟) 초상 때 이황(李滉)이 그 논을 꺼내자 박순(朴淳)이 난색을 보였고, 그후 김집(金集)이 또 그 논을 기축년에 꺼내자 김상헌(金尙憲)이 난색을 보였는데, 그 두 신이 어찌 소견없이 고치자는 데 난색을 보였겠습니까."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우상이 말한, 조종조에서 행해오던 법규를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고 한 것은 그럴싸한 말인데, 이경석의 논의는 그 논의까지 싸잡아서 공박하고 있는 것 같아 일이 매우 난감합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엎드려 듣자니, 빈전(殯殿) 제사 때 전부 소찬(素饌)을 쓴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밖에서 준비한 제물은 모두 소찬을 쓰고 있고, 안에서 준비하는 낮 다례(茶禮)에는 육선(肉膳)을 쓴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소찬을 쓰기 시작한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나 혹시 전조(前朝)에서 불교를 숭상하면서 그 잘못된 전례를 남긴 것은 아닐런지요?"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는 고 상신 황희(黃喜)가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廷請)을 하여 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태화도 그 말이 옳은 말이라고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사정과 형세가 민망스럽고 절박합니다. 더구나 이미 갈아 임명한다는 명령까지 계셨는데, 어떻게 감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공무를 수행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판이 이렇게까지 사의를 표하는데, 한결같이 몰아세우기만 하는 것도 미안한 일 같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를 예우하는 도리로도 강박만 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지금 넌지시 체직을 허락하여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은상은 아뢰기를,
"이판이 병으로 체직이 된다면 가하지만, 만약 홍여하의 상소 때문에 체직이 된다면 이는 청문(聽聞)에 있어 크게 놀랄 일이고, 또 뒤폐단도 대단할 것입니다."
하였으며, 유성은 아뢰기를,
"어찌 아무 것도 아닌 일개 여하의 상소로 인하여 함부로 전형을 갈 것입니까."
하였다. 시열이 또 굳이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비록 그렇게 사직하여도 어사의 서계에 관하여 경과 영상이 함께 선왕조의 명을 받았으니, 지금 와서 그를 서로 논의하여 회계를 않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갈리더라도 본 아문에 참판·참의가 있으니, 함께 논의하는 것이야 그들이 하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장령 허목의 소에 답하기를,
"아뢴 일은 내 마땅히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그의 상소 내용에,
"엎드려 생각건대 빈렴(殯斂)은 큰 예절이어서 군자라면 한껏 정성을 다하고 삼가서 조금도 후회가 없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지못해 재궁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변례가 있었고, 그리하여 옻칠도 초빈 후에 하게 된 것입니다.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임금의 초빈에는 상여틀을 쓰고 나무를 위에까지 쌓아 진흙으로 바르고 지붕을 만든다.’ 하였고,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장막을 치는 것은 유암(幽暗)을 위한 것으로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기(寶器)도 진열하지 않고 우보(羽葆)014) 도 설치하지 않고 성삼 계삼(聲三啓三)015) 의 절차도 없이 하루 걸러 한 번씩 칠을 하기 때문에 초빈을 이루지 못한 지 이미 30여 일이 되어, 선왕을 지극한 정성과 삼가는 마음으로 받든다는 것이 도리어 예대로 다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으로서는 염려가 됩니다.
옛날에는 관에 칠을 올리는 데 일정한 수는 없었으나,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임금이 즉위를 하면 벽(椑)을 만들고 1년에 1차씩 칠을 하여 싸 둔다.’ 하였는데, ‘벽’이란 널입니다. 그렇다면 탕(湯)은 13년을 제위에 있었으니 널에 칠을 13번 했을 것이고, 무왕(武王)의 재위 기간은 7년이었으니 널에 7번 칠을 했을 것이 아닙니까. 지금 재궁에 칠을 올린 것이 오래 살던 시절의 옛 제도와는 같지 않을지라도 탕과 무왕의 널에 비하면 이미 더 많이 칠한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칠을 15차나 했으니, 옛 제도로 본다면 예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으나, 그러나 자신을 바치고 싶은 성상의 지극한 효성으로서는 예제에 어긋난다 하여 금방 그만두고 싶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겉 재궁에다 칠하는 것은 오늘의 재궁에 관한 규제와 같은 일정한 격식이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산(因山)까지는 아직 많은 날짜가 남아 있어 얼마든지 튼튼하고 두껍게 칠할 수 있을 것이니, 겉이라 하여 안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시면 예로 하여도 미진한 감이 없을 것이고 초빈에 휘장을 둘러 유암하게 하는 도리에도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상소가 들어오자 오래도록 유치해 두고 내리지 않고 있다가, 연신(筵臣)이 미안하다는 뜻을 아뢰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이렇게 비답을 내렸던 것이다.
상이 원상 정태화·심지원에게 하교하기를,
"이판이 굳이 사직하여 마지않으니 한결같이 강박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넌지시 체직을 허락하여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겠다."
하였다.
6월 12일 신축
이조 참판 이일상, 참의 조복양이 상소하여 체직을 비니, 답하였다.
"이판의 체직을 허락한 것이 어찌 여하의 배척으로 인해서이겠는가. 사실은 이판의 뜻을 존중해서인 것이다. 경들은 그와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여하의 간사함과 요망한 말에 대하여는 내 이미 알고 있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전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여 판의금의 직을 사양하고 새로 올려진 숭정 품계를 전삭할 것을 청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강유후가 인피하고 물러가 대기 중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후원이 과연 잘못을 알고도 반드시 꾸며대는 일이 있고 전조가 또 사람을 잘못 쓴 일이 있었다면, 왜 그 일들을 낱낱이 들고 그 사람이 누구임을 분명히 말하여 곧바로 배척하지 않고, 그렇게 머리를 감추고 얼굴을 숨긴 채 귀신 물여우 같은 말만 하여 성상의 귀를 의혹되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 송시열이 일개 간인의 말 때문에 자리를 떠난다면, 후일 시열 대신 들어온 자라 하여 여하 같은 자의 배척을 또 당하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시열이 잠시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야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닐 것 같지만, 그 관계는 사실 군자·소인의 소장(消長)이 판가름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는 사실 내가 선처를 못했던 까닭에 그리된 것으로 나도 매우 부끄러이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집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본도에서 식량과 찬수를 제급하라는 명령에 대하여 사양의 뜻을 표하고, 이어 귀양(歸養)할 것을 비니, 답하기를,
"어머니 병 때문에 돌아가겠다는데야 내 어찌 억지로 만류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대는 올라온 지가 오래되지 않았으니 굳이 사양 말고 빨리 나와 공무를 수행하라. 그리고 하사 물품은 별것이 아닌데 사양할 게 무언가."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홍여하 상소문은 응지를 핑계로 대신과 총재를 제멋대로 공박한 것으로, 선류(善類)들을 해치고 이간질한 그의 정태야말로 고약한 일입니다. 조정으로서는 의당 시비를 분명히 가려내어 사특한 말이면 호되게 응징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신이 어제 경연 석상에서 총재를 가벼이 갈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누누이 아뢰었던 것인데, 파하고 나온 후 곧바로 이판 송시열을 체직하는 명령을 내리셨다니, 성상의 뜻이야 비록 그를 강박하고 싶지 않아서 하신 일이겠으나 선대왕이 의지하고 신임하던 신하를 일개 요사스런 말로 금세 면직을 허락한다면, 중외가 놀라고 의혹할 뿐만 아니라 차후 그를 본받아 일어나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내려진 명령을 다시 거두기는 물론 어렵겠지만 며칠 기다렸다가 신명(新命)을 특별히 내리시면, 중외의 의혹도 틀림없이 풀릴 것이고 선대왕의 은총과 예우도 그대로 지속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오직 성상의 재처를 바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 내용이야말로 지당한 말이다.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리라."
하였다.
부호군 조경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나이 70이 넘어 시골에 물러와 엎드려 있는데, 대행 대왕께서 특명으로 월봉(月俸)을 제급하셔서 신은 감격하고 송구한 나머지 신이 무엇 때문에 일정한 관직도 없이 상이 내리시는 것을 이렇게 먹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뜻하지 않게 지부(地部)가 또 상의 하교에 의하여 쌀과 콩을 가져다가 신에게 주니, 신으로서는 놀라고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성상께서 신이 지금 월봉을 먹고 있는지를 미처 살피지 않으시고 하신 일이 아니온지요. 엎드려 바라건대 즉시 유사에게 음식물의 지급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빨리 내리소서."
하였는데, 허락치 않았다.
비변사가 송시열을 본사의 제조로 임명할 것을 청하였다. 시열이 얼마 후 귀향하여 여러 해를 두고 오지 않았는데도, 제조의 직은 그대로 띠고 있는 채 한 번도 사의를 표한 일이 없었고 비국에서도 감히 그의 체직을 아뢰지 못했는데, 그의 기염이 대단하기가 이 정도였다.
6월 13일 임인
교리 이시술(李時術)·안후열(安後說), 수찬 임한백(任翰伯)·오시수(吳始壽) 등이 서로 이어 소를 올리고 체직을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홍처후, 전라 감사 김시진이 모두 수해로 인한 참혹한 상황을 치계하여 알려왔다.
약방이 보약을 드실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증후가 점점 차도가 있는데 왜 꼭 약을 먹어야 하는가.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정언 여성제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대강 듣건대, 홍여하 상소가 오로지 이후원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공박하고 또 송시열이 전형을 쥐고 인재 등용을 잘못했음을 논하였는데, 전하께서 분명한 교지를 내려 그 괴이하고도 망령된 말을 깨버리지 않으신 것을 신은 저어기 애석하게 여깁니다. 여하의 뜻은 후원이 시열과 서로 가까운 사이임을 기화로 이쪽을 공격하면 저쪽까지 미쳐갈 것이라는 계산에서 한 짓이지만 사실은 오로지 시열을 겨낭한 것이었으므로, 시열의 직을 가벼이 갈지 말았어야 됨이 분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렇게 공과 사 모두가 바닥이 난 때이면 비록 제향에 쓸 것이라도 덜만큼 덜어 백성을 돌보시던 선왕의 높은 덕을 따르셔야 할 것인데, 신이 듣기에 소채 중에서 들깨가 한 달이면 8석씩이나 된다니, 일은 비록 대단찮은 일이지만 쓰기를 너무 많이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에 사화(絲花)016) 를 쓰는 것이 원래 정례(正禮)가 아닐 뿐만 아니라 불사(佛事)에 가까운 일로 잘못 전래된 규례이니, 구습을 그대로 따를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또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해서 지방에 수해가 심하여 전곡 손실이 많았다.
6월 15일 갑진
고부 정사(告訃正使) 우의정 정유성, 부사 유심(柳淰), 서장관 정익(鄭榏)이 연경을 향하여 떠났다.
대사간 이정기(李廷夔), 정언 이익(李翊)·여성제(呂聖齊), 헌납 목내선(睦來善), 사간 성이성(成以性), 장령 황준구(黃儁耉), 지평 이합(李柙)·강유후(姜裕後), 장령 허목, 행 대사헌 송준길이 서로 이어 인피하고 물러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홍문관이 처치하여 이정기 등 8명은 출사하도록 하고 목내선·허목은 갈아 임명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시열이 전형에서 갈려나가자 당시 공론이 대단히 근심되는 일이라 하여 부응교 정만화, 교리 이시술, 부교리 김만기, 수찬 김만균 등이 옥당에서 발론하여 장차 차자를 올려 시열을 그대로 전직에 둘 것을 청하기로 하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었는데, 만화가 자기 형인 영상이 사실상 시열의 체직을 찬동했다 하여 이번 차자에 동참할 수 없다고 하고, 만기·만균도 완남 부원군이 바로 자기들 고모부라면서 지금 와서 혐의가 있음을 처음 알았다 하고는 모두 인입하며 불참을 선언했으며, 교리 안후열, 수찬 오시수도 ‘이미 완의(完議)를 하고서 배반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지만, 이렇게 경시를 당하고서 그대로 참여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고는 서로 이어 일어나 나가버렸으므로, 차자 건이 드디어 정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대사간 이정기 등이 그 모두를 논박하려 하자 헌납 목내선이 주장하기를, ‘만기 등이 갑자기 혐의를 내세워 기껏 자기들이 한 발론을 동료에게 책임지우려고 하였으니, 후열 등이 경시를 당했다는 혐의가 어찌 없겠는가. 지금 논핵을 하려면 경중을 구분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으나, 다른 동료들이 그 주장을 따르려 하지 않고 시끄럽게 혐의들을 내세웠다. 사헌부가 처치를 하면서 장령 황준구, 지평 이합·강유후가, 정기 등은 출사하도록 하고 내선은 갈아냈으면 좋을 양으로 하자, 장령 허목이 불가함을 고집하고 인피하였는데, 그의 인피 내용에,
"동료들이 사간원 처치 건에 관하여 간통(簡通)으로 의견 교환을 하였던바, 출사와 체직에 관한 의견이 신의 의사와는 크게 다른 것들이 있었습니다. 정원이 아뢴 내용으로 보자면, 홍여하 상소에 이름을 지적하여 공박한 이는 오로지 완남 부원군인데, 그렇다면 옥당 차자가 비록 송시열을 위하여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하의 상소 내용을 낱낱이 논할 때 당연히 이후원을 변설하는 것을 첫째 목적으로 삼았어야 할 것이고, 또 후원을 위하여 응당 혐의를 피해야 할 자도 1명 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연명으로 간통을 낼 때는 응당 인피해야 할 사람들 모두가 전혀 혐의에 대하여는 거론하지 않더니, 급기야 완의로써 의견의 일치를 보고 차자를 기초하려는 즈음에 와서야 비로소 혐의 사실을 내세우고 일어나 나가버렸으니, 실지 내용이야 비록 잊고 깨닫지 못해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의심할 소지는 충분히 있는 것이며, 게다가 경시당한 책임을 동료들 스스로가 지게까지 하였으니, 그 잘못을 논하기로 하면 책임을 질 곳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간원의 많은 관원들 인피 내용에는 비록 서로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은연 중에 오로지 차자 정지를 책한 것으로서 막상 잘못을 저지르고 전도된 일을 한 자들의 잘못은 도리어 가벼운 꼴이 되었으니, 신은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지금 공론은 이 일을 틀림없이 불쾌하게 여기고 있으면서도 그 중에는 어물어물 할 말을 다 못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신 역시 구차하다는 기롱을 면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슬프고 편찮은 중에 계시는데, 이렇게 번거롭게 하는 것이 죄가 되는 줄 신도 물론 아오나, 득실을 논하고 시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할 말을 다하여 의리의 정당함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이 고루하고 막힌 소견으로 경솔하게 물의를 범하였고, 병 중에 간통에 답하면서 말 한 마디 빗나간 것이 드디어 신을 공박하는 구실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신의 사세가 만 번 편안하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글월이 짤막하여 속뜻을 다 나타내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천천히 뜯어 보면 옳고 그름을 알기가 어렵지 않다.
예조 판서 윤강, 관상감 제조 이응시가 아뢰기를,
"신들이 이번에 살펴본 곳이 장단(長湍)의 김영렬(金英烈), 교하(交河)의 윤반(尹磻), 광주(廣州)의 정난종(鄭蘭宗), 남양(南陽)의 홍언필(洪彦弼)·홍기영(洪耆英), 광주(廣州)의 이증(李增) 등의 묘산(墓山)과 양재역(良才驛) 뒷산, 한강 북변의 산, 왕십리 해동촌(海東村) 그리고 이충작(李忠綽)의 묘산과 정토(淨土) 근처 등지로서 그 모두를 지관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상론하게 하였으며, 이원진·윤선도도 각기 품평을 가하여 별단으로 써서 올리고, 그 중에서 조금 좋다고 생각되는 네 곳은 그림으로 그려서 올립니다."
하니, 상이 윤강에게 하교하기를,
"그림으로 올라온 산 네 곳 중에서 제일 쓸 만한 곳부터 차례를 매겨 들여오라."
하자, 윤강이 답하기를,
"수원의 호장(戶長) 집 뒷산이 용혈(龍穴) 사수(砂水)가 진선 진미하여 그야말로 천재 일우의 곳으로 다른 산과는 단연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윤반의 묘소 등 네 곳은 결코 크게 쓸 곳이 못되는데, 상의 하교에 따라 여러 지관으로 하여금 차례를 매기라고 하였더니, 교하 윤씨의 산이 가장 낫고 남양이 그 다음이며 광주 정씨의 산이 또 그 다음이고 한강 북변이 네 번째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16일 을사
이경휘를 응교로, 김우형을 수찬으로, 이명익을 봉교로, 권두추를 주서로, 송시열을 판중추로 각각 삼았다.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상차하여 홍여하를 음흉하고 간사하다고 공척하고, 또 아뢰기를,
"자의(諮議)는 재주와 학행이 있는 선비를 골라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길래 여하가 음관을 임명하였다고 지척하는 것입니까. 혹자는 구언(求言) 하의 상소라 하여 말을 한 자에게 죄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신은 그렇게 하는데도 죄척(罪斥)을 가하지 않으면 시비 사정이 어떻게 밝아지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등대(登對) 때 이미 논의한 것이라고 답했는데, 그날 인견을 마치고 비답을 내렸기 때문이다.
상이 양지당에 나아갔는데, 영돈녕부사 이경석, 연양 부원군 이시백,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판중추부사 송시열, 예조 판서 윤강, 대사헌 송준길, 우부승지 권대운이 입시하였다. 상이 경석 등을 보자 통곡하였고, 경석 등도 엎드려 흐느끼며 우선 약물을 써서라도 몸을 보호할 것을 아뢰었고, 다른 재상들도 서로 이어 누누이 말들을 하니, 상이 병환이 이미 거의 다 나았다고 답하고, 이어 좌상·예판과 경기 관내의 산세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쓸 만한 곳은 멀리는 홍제동이고 가까이는 수원의 산으로, 그 두 곳 밖에는 골라 쓸 곳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돈녕이 선묘(宣廟) 때의 일을 알고 있을 것인데, 그때는 무슨 까닭으로 홍제동을 쓰지 않았던가?"
하자, 경석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하늘이 정하는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기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을해년 국장 때도 그 곳을 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쓰지 않았는데, 이는 바로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제동은 거리가 멀어 불편하니 수원 산을 썼으면 좋겠다."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수원은 국가 관방(關防) 지대로서 선대왕께서 일찍이 마음을 두셨던 곳인데, 하루아침에 헐어버려 군과 민이 살 곳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선대왕의 평상시 뜻이 아니지 않을까 염려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대왕께서도 홍제동이 길지(吉地)라는 것은 듣고서도 거리가 먼 것이 싫어서 자손들도 거기는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주자(朱子) 산릉론(山陵論)에 의하면, 부양(富陽)의 손씨(孫氏)가 일어난 땅이 나라의 능 자리로 적합하다고 하였는데, 송(宋)의 도읍지 임안(臨安)에서 부양까지의 거리가 꽤 멉니다. 이것을 보면 옛 사람들도 길지를 고르는 데 있어서는 거리의 원근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 모두는 홍제동이 가장 길지로 쓸 만하다고 하였으나, 윤강만은 혈형(穴形)이 너무 길어 흠이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수원 산을 쓰기로 하면 이민(移民)의 대책을 미리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태복시(太僕寺)의 둔정이 수원 경내에 많이 있어 훈련 도감(訓鍊都監)·총융청(摠戎廳)의 둔전과 바닷가의 제언(堤堰) 쌓을 만한 곳을 모두 백성의 전답과 환급(換給)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만년 장존하는 나라는 없는 것입니다. 수원은 그 뛰어난 지세로 보아 지금 비록 잠시 폐지가 되더라도 끝내는 관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정자(程子)도 오환(五患)을 논하면서 성곽(城郭)이 가장 나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수원에는 원래 성곽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겉 재궁에다 칠을 여러 번 하는 것이 좋다고 뭇사람들은 말하고 있으나, 내 생각은 속 재궁에다 칠을 꼭 20번을 했으면 좋겠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러시면 자주 칠을 하여 시일을 끌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이르기를,
"경이 영상과 함께 선왕의 명을 받았으니 어사의 서계에 대하여 이조가 전례에 따라 회계하게만 하여서는 불가할 것 같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그 일은 비록 규정 이외의 일이지만 성상께서 그렇게까지 하교하시니 너무 감격하여 눈물이 나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당연히 송시열과 비국에 모여 서로 논의하여 회계는 하겠지만 저번에 아뢰었던 대로 봉서(封書) 속에 없는 일은 시행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상이 또 아뢰기를,
"연양 부원군과 우상이 다 상차하여 판중추 문제를 말하면서, 연양은 우상의 생각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우상은 시열에게 전장(銓長)의 직을 도로 제수할 것을 청하였다.】 오늘 그 문제를 논의하여 결정을 보아야겠다."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서로 나와 번갈아가며 아뢰었는데, 중언부언 그칠 줄을 몰랐으나 모두가 시열을 위안하는 말들이었고, 경석은 처음에는 여하를 추고할 것을 청했다가 금방 또 아뢰기를,
"다른 말이 더 나올까 염려되어 추고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고, 시백은 아뢰기를,
"그에게 파직의 벌을 내리면 그것으로 시비는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였으며, 준길은 추고는 부당하다고 하고, 지원은 파직을 청하였으며, 태화는 깊이 자책감에 빠져 있다가 【처음에 여하 상소문을 다시 써서 올리게 하도록 청하였고, 뒤에 또 시열의 체직을 넌지시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이어 아뢰기를,
"오늘 일은 시열만 움직이지 않으면 조정은 저절로 편안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오고간 말들이 시끌시끌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준길이 석상에서, 합계(合啓)의 건을 너무 오래 끌어 뭇 신하들의 감정이 답답하다는 점, 시약(侍藥)한 어의는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점, 여러 제조들도 비록 수이(首貳)의 차이는 있겠으나 죄가 없을 수는 없다는 점을 아뢰고, 여러 어의 등은 법률에 의해 처리할 것이며, 도제조 원두표는 중도 부처하고 제조 홍명하와 부제조 조형은 관작을 삭탈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제조 는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유후성·조징규 등은 모두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열이, 자급이 1품이면서 좨주를 겸임하고 있다 하여 규례에 의해 감하(減下)할 것을 청하니,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제신들이 파하고 나갈 때 상이 특별히 시열·준길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믿는 것은 두 찬선 뿐이니, 각기 마음을 다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달라."
하니, 시열 등이 감히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하고 이어 물러가 있음으로써 조정을 편안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경의 직을 간 것은 사실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자, 시열이 답하기를,
"신은 자신의 편안함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보잘것없는 염우를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하였고, 준길도 아뢰기를,
"신의 민망스럽고 위축된 심정도 시열과 다를 바가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이번 능호(陵號)를 ‘영(寧)’자로 의정하였던 바, 혹자의 말이 그는 바로 송(宋)의 흠종(欽宗) 능호라고 하여 다시 예전 역사를 상고했더니, 송나라 조정에서는 능호를 모두 두 글자씩 쓰고 있어 영창(永昌)·영정(永定)·영소(永昭) 식이었습니다. 흠종 능호도 영녕(永寧)이면 지금 ‘영’자 한 자만 쓰는 것이야 당연히 혐의로울 것이 없으며, 《조야잡기(朝野雜記)》에 의하면, ‘멀리서 흠종의 능호를 올리기를 영헌으로 하였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더욱 혐의로울 게 없는 일입니다. 막중한 능호를 익히 논의하여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여러 대신과 송시열·송준길 등에게도 다시 물으소서."
하니, 이경석은 아뢰기를,
"송나라에서는 능호에 있어 두 글자를 썼던 것이 분명한 증거가 있으므로 ‘영’자 한 자만을 쓰는 것이야 혐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송시열·송준길은,
"엎드려 영상·좌상이 아뢴 내용을 보았습니다. 흠종 능호가 가령 영녕이라도 혐의로움이 없을 것이며 만약 영헌이면 더욱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비록 무슨 말들이 있을지라도 이미 정한 능호를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집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돌아가 노모를 뵙겠다고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출사하기만을 나는 날로 바랐었는데, 지금 이 상소를 보니 마음이 너무 섭섭하다. 두 번 다시 사양 말고 조리한 후 나와서 직을 살피라."
하고, 이어 쌀과 콩·소금·간장·미역 등등을 하사하였는데, 유태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지부(地部)가 그 사실을 알리자 다시 실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6월 18일 정미
양사가 원두표의 중도 부처에 관한 논을 정지하고 이어 유후성·조징규를 빨리 방형(邦刑)에 의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정기가 부응교 정만화, 교리 이시술, 부교리 김만기·안후열, 수찬 김만균·임한백·오시수를 모두 체임하도록 탄핵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서로 인구하다가 이판의 유임을 청하려던 차자가 중간에 실현을 못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변사가 점계(粘啓)하기를,
"상주(尙州)의 군보(軍保) 강사인(姜士仁)이 태어나기도 전에 역이 정해졌던 정상이, 감사 홍위(洪葳)의 계본 내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사인에 대해서는 아약(兒弱)의 예에 의하여 군포를 견감해 주시고, 그 당시의 목사는 조사해내어 죄를 내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에 수해가 매우 심하여 떠내려간 인가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고, 말·소·닭·개들이 수도 없이 물에 빠져 죽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빠져 죽고 눌려 죽은 자가 많았다. 감사 김여옥(金汝鈺)이 치계하여 알려오자,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6월 19일 무신
총호사인 좌의정 심지원, 예조 판서 윤강, 관상감 제조 오준, 산릉 도감 제조 정치화, 호군 이원진 등이 수원 산을 다시 살펴보고 돌아와 서계를 올리고, 아울러 연서(延曙)와 한강 북쪽 그리고 왕십리 등 세 곳의 산도(山圖)를 올리니, 상이 영의정 정태화, 판중추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첨지 윤선도, 호군 이원진을 부르게 하여 양지당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지원에게 묻기를,
"수원 산을 다시 살펴보니 경의 뜻에는 어떻던가?"
하니, 답하기를,
"지형 산세가 매우 훌륭하고 둘러싸인 형세가 흠결이 없어 신의 범안으로도 좋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 곳 산들은 모두 흠결이 있어 나라 장지로는 맞지 않았습니다. 다만 수원 산에 있어 정혈(正穴)을 지점한 곳이 윤선도와 이원진의 소견이 달라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윤승지·이원진도 각기 소견대로 말해 보라."
하였다. 【선도(善道)는 일찍이 선대왕의 사부였기 때문에 상이 그의 이름을 바로 부르지 않은 것이다.】 선도는 원진이 지점한 곳이 협락(峽落)이라고 하고, 원진은 선도가 좋다는 곳은 호사(護砂)라고 하면서 계속 논쟁을 하다가, 선도가 또 아뢰기를,
"사세의 어렵고 쉬운 것과 거리의 멀고 가까움은 그만두고 오직 산의 우열만을 들어 논하기로 하면 홍제동이 당연히 제일이고 수원은 그 다음이지만, 수원도 대지는 대지여서 그 산만 쓰더라도 그보다 다행일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홍제동은 지관 무리들만 이구 동성으로 좋다고 하는 곳이 아니라 예로부터 대지라고 하는 곳인데, 윤강 혼자서 흠결이 있다고 주장하니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신이야 무슨 소견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원진 역시 현무(玄武) 부리[觜]에 해당하는 괴혈(怪穴)이라고 하였습니다. 괴혈치고 나라 장지에 맞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선도는 비록 홍제동을 극찬하고 있지만, 신의 생각에는 영릉(英陵)이 지기(地氣)를 다 받은 곳이라면 그곳은 바로 지엽(枝葉) 사이에 맺어진 혈입니다. 선도가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뜻을 신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홍제동과 수원 이외에는 적당한 곳이 전혀 없어 그 둘 중에서 고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원이 가깝기도 하고 또 흉해도 없다니 그곳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러면 산릉에 관한 것은 이미 확정이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수원도 멀다는 느낌이지만 다른 데 적당한 곳이 없기 때문에 그곳을 정한 것이다."
하고, 이어 뜯어 옮겨야 할 민가와 경작을 못하게 될 전답이 도합 얼마나 되는가를 물었다. 영상이 별지(別紙)로 작성된 것을 올리며 아뢰기를,
"가구 수는 5백여 채이고 전답은 7백여 결(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잘 상의하여 민원이 없도록 좋게 처리하라. 그리고 그 고을의 소재지는 어느 곳으로 옮기려는가?"
하자, 지원이 대답하기를,
"그 고을의 북쪽 고등(高等) 마을로 옮겨야지요."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판중추와 대사헌도 각기 소견을 말해 보라."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저번에 이미 아뢰었지만, 오늘 일이 아무래도 미안한 데가 있어 부득이 다시 아뢰어야겠습니다. 홍제동은 지금의 지관들만 좋다고 하는 곳이 아니라 옛부터 두고두고 일컬어 오던 곳인데, 어찌하여 윤강의 말만 듣고 버리려는 것입니까? 윤강의 지술(地術)이 전후 어느 지사보다도 나은지 그것은 신이 알 수 없으나, 성상의 뜻이 이미 수원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뭇 신하들이 모두 그 뜻에 순응하기 위하여 다른 말들이 없는 것입니다. 성상이 만약 홍제동에다 뜻을 두신다면 여러 신하들도 틀림없이 생각을 같이 하여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준길은 아뢰기를,
"만약 홍제동이 가장 길지임을 안다면 거기를 쓰는 것이 좋을 것인데, 윤강은 나쁘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 하여, 신으로서는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기 때문에 강력하게 따지지를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수원이 만약 꼭 길지만 된다면야 관방이 되는 중요한 지역이라도 따질 겨를이 없을 수 있지만, 만약에 하나에서 열까지 빈틈없는 곳이 아니라면 왜 가장 길지인 홍제동을 두고 꼭 둘째 가는 수원을 쓰려 하십니까? 그뿐 아니라 그 지세로 보아 만세 후에라도 오환(五患)을 면치 못할 염려도 있는 곳이니,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만약 만세 이후를 염려하기로 들면 어느 곳인들 그 환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홍제동 역시 일개 조각산이어서 뒷 염려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태화는 아뢰기를,
"시열이 지적한 ‘뜻에 순응하려고만 한다.’는 말이 듣기에 매우 언짢습니다. 신도 처음에는 홍제동이 괜찮다고 생각했다가 선대왕께서 영릉(英陵)이 멀다고 하셨다는 하교를 받고서는, 그 밖에 쓸 만한 곳으로는 수원 밖에 없기 때문에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소견을 아뢰지 않았던 것인데, 뭇 논의들이 그러하니 그 참 민망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대왕이 계셨을 때 미리 산릉을 정해두려 하시면서도 홍제동은 너무 멀다고 하셨는데, 자손된 도리로서 그곳은 아마 쓰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시열이 또, 건원릉(健元陵)이 있는 여러 산등성이 중에도 틀림없이 쓸 만한 곳이 있을 것이라고 누누이 아뢰니, 상이 좌상에게 이르기를,
"그곳 산등성이들을 경이 두루 살펴보지 않았던가?"
하니, 그가 답하기를,
"신이 두루 살펴보았으나 쓸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파하고 나간 뒤에 예조가 내일 본조의 당상관과 산릉 도감·관상감의 제조 등을 수원으로 보내 재혈(裁穴)을 하고 오게 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상이 인견 때 송시열에게 이르기를,
"경이 지난날 제사에 소선(素膳)을 쓴 데 대하여 말했는데, 내 생각은 절반은 육선(肉膳)을 썼으면 좋겠다. 어떤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경모전(敬慕殿) 제물을, 밖에서는 소선을 준비하고 안에서는 육선을 준비한다고 하셨는데, 안과 밖에서 준비하는 제물이 다르다는 것이 신으로서는 미안하게 여겨집니다."
하였고, 좌의정 심지원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그렇게 정한 것이 틀림없이 깊은 뜻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사에 소선을 쓰는 것이 어느 조(朝) 때부터 비롯된 것이며 건백(建白)은 어느 사람이 한 것인가?"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세종조의 명재상 황희(黃喜)가 정청(廷請)을 하여 정한 제도로서, 국조(國祚)가 3백 년은 더 연장될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각릉의 사시(四時) 제향 때도 모두 소선을 쓰는데 아마 무궁한 국가 장래를 위하여 혹시 국력이 지탱되지 못할까를 염려해서였던 것같습니다. 지금 만약 그 정해진 제도를 고친다고 하면 어떻게 3년 제사에만 육선을 쓸 것입니까? 반드시 각릉의 제사에도 다 써야 할 것이니 그 매우 난처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묘에는 육선을 쓰는가?"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국가 제례에 있어 종묘에서만 육선을 쓰는데, 그것은 혈식(血食)의 뜻을 취한 것입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시열은 지금 안과 밖에서 제물을 달리 준비하는 것이 미안하다 하여 변통을 했으면 하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반우(返虞) 후에도 그대로 소선을 쓴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니, 3년 내에는 육선을 곁들여 쓰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인조 대왕도 3년 내에 육선을 쓰지 않았는데, 그 어찌 선왕의 효성이 미진한 바가 있어 그런 것이겠습니까."
하였고, 시열은 아뢰기를,
"이미 제향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물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핑계로 육선을 쓰지 않을 것입니까."
하였으며, 태화는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3년 내에 혼전(魂殿)에다 꿩과 노루 고기를 올리는 일을 그대로 두고 혁파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본다면 순전히 소선만 쓰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후 예조가 아뢰기를,
"기축년 등록에 의하면 우제·졸곡·삭망·연제·상제·담제 그리고 사시 대제, 납향(臘享) 이외에는 모두 소선을 쓴다고 되어 있어, 지난번에도 거기에 의하여 마련하여 재가를 받았었고, 《오례의(五禮儀)》의 도식에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생 노루고기·생 꿩고기를 혼전에 올리는 일에 있어서는, 본 아문이 이미 주원(廚院)에다 공문을 발송하였으므로 그쪽 보고가 오기를 기다려서 사목을 만들어 재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알겠다고 하였다.
집의 이유태가 소를 올려 체직할 것을 간곡히 빌었고, 송준길도 그렇게 청하니, 답하였다.
"지금 짐짓 체직하고 한관으로 있게 하는 것이니, 그대도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평안도 안주(安州)·숙천(肅川)·영유(永柔) 등지에 큰 물이 져서 사람과 가축이 모래에 덮이고, 벼락이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6월 20일 기유
판중추 송시열이 상차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제 사대(賜對)했을 때 기휘해야 할 것임을 모르고 망령되이 산릉에 관하여 논하다가 대신의 뜻에 저촉되어 대신이 불안을 느끼게 하였으니, 황공하여 혀를 깨물고 싶고 후회 막급하옵니다. 빨리 금부의 직임을 갈아내시어 조정 사체를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 직은 경이 아니면 안 되는데 경은 왜 이렇게까지 사직하는가? 그리고 그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너무 지나치게 스스로를 책할 것은 또 뭔가? 사직하지 말고 조리해가며 공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부호군 이상진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수원 산은 행룡(行龍)이나 바닥의 혈이 느릿느릿하고 흐리터분하여 조금도 청수하거나 존귀한 기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세(局勢)마저 평평하고 낮아 아늑하고 야무진 곳이라고는 없는데, 거기가 어떻게 대장(大葬) 자리가 될 것입니까. 서울에서 백 리 안쪽에도 틀림없이 고를 만한 곳이 있을 것이니 바라건대 날짜를 조금 늦추고 널리 묻고 찾아, 대사에 있어 미진한 염려가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 내용을 보니 지성에서 나온 말이다. 내 마땅히 유념하리라."
하였다.
총호사 심지원이 이상진의 상소에 대하여 유념하겠다는 비답을 내렸다는 이유로 아뢰기를,
"신들이 이 상태에서는 감히 재혈을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정한 국통 자리인데 한 개인의 망령된 논의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즉시 가서 재혈하라."
하자, 지원이 이에 윤강·이응시·이원진·윤선도와 산릉 도감의 도청·낭청 등과 함께 다시 수원으로 갔다.
함경도 길주(吉州)에 크기가 계란만한 우박이 쏟아지고 벼락까지 쳤는데 어린애들은 우박에 맞아 죽은 자까지 있었고, 함흥(咸興)·안변(安邊) 등지에도 큰물이 져서 인가가 떠내려가고 사람도 익사자가 생겨, 감사가 치계하여 사실을 알려 왔다.
6월 21일 경술
함릉군(咸陵君) 이해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수원은 바로 3도(三道) 도회지로서 분명히 오환(五患)의 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덕망 있고 준걸한 인물이 그 고장에서 나왔다고 들은 바도 없습니다. 지난 일들을 증험해 보면 장래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고, 이어 윤강이 지리를 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음을 꾸짖고는 홍제동을 극구 찬미한 다음 그 상소문을 내려 대신·유신들과 반복하여 논난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내용을 알았다고만 답하였다. 상진과 이해는 시열의 논에 동조하는 자들로서 기한을 늦추어 널리 찾아보자는 상진의 말은 그런대로 핑계라도 된다지만, 이해는 곧바로 논난을 주장하고 있으니, 그 한두 유신들이 과연 얼마만큼 훤히 아는 법안(法眼) 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여러 지관들로서는 찬미하는 곳이 홍제동 아니면 수원 두 곳 뿐이었다. 홍제동은 선왕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쓸 곳이 못된다는 하교가 있었다면, 수원이 비록 만세 이후에 오환이 있을지라도 의관(衣冠)을 간직해둘 곳이 수원 말고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데 시열이 쓸 수 없는 자리임을 한 번 선창하자 조정 전체가 그리로 쏠려 수원을 쓰지 말자는 말이 무슨 청의(淸議)라도 되는 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의 상소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어리석은 짓이라 하겠다.
송시열이 이조 판서 후보의 물망에 들지 못했었는데 【새로 체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명으로 의망에 넣게 하여 이어 제수하고,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윤선거를 집의로,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강호(姜鎬)를 헌납으로, 이익(李翊)을 부교리로, 권상구(權相矩)를 정언으로, 홍처윤(洪處尹)을 부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이미 정해진 국릉에 대하여 풍수설을 모르는 자로서는 감히 가벼이 논의할 바가 아닌 것인데 지금 하자를 말하는 상소문이 분분이 답지하고 있으니, 국가 체통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후로는 그와 같은 소장은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
6월 22일 신해
부호군 이상진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외람되이 한 장의 상소를 올린 것은 실로 선대왕에게 보답하고 전하께 충성을 바치려는 뜻이었는데, 아는 것이 투철하지 못하고 사세를 판단하는 눈이 어두워 위로는 엄한 꾸중을 들었고 아래로도 조롱과 헐뜯음을 샀습니다."
하고, 스스로 자신이 범한 세 가지 죄를 들면서 직명을 삭제해 주라고 청하니, 상이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연거푸 세 차례나 차자를 올려 수원은 쓸 자리가 못된다고 극구 진변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다시 번거롭게 말라고 답하였다.
홍문관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산릉에 관하여 논의한 소장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에 대하여 신들로서는 애석히 여기는 바입니다. 인산(因山)을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입니까. 당연히 뭇사람의 말을 모두 수렴하여 취사를 결정해야지 어떻게 논의가 분분하다 하여 거기에 싫증을 느끼고 먼저 진언(進言)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습니까. 말길이 열리고 막히고에 국가의 치란(治亂)이 달려 있는 것이니, 성상께서 이 점을 유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어찌 말길을 막으려는 것이겠는가. 당초 의견을 물었을 때는 각기 소견을 개진하는 것이 옳았지만, 지금 이미 정해진 후에 한결같이 흠만 잡아내면 그게 무슨 좋은 일이겠는가. 그 밖의 다른 말길에 관한 일이라면 나도 당연히 그대들 뜻에 따라 유념할 것이다."
하였다. 좌승지 강백년(姜栢年) 등이 서로 이어 사직소를 내고는 아뢰기를,
"소장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비답을 신들이 애당초 봉환(封還)하지 않았다 하여 대신과 옥당으로부터 거듭거듭 물리침을 당하고 있어, 이대로 앉아 있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것은 내 잘못이지 그대들에겐 잘못이 없다."
하고, 이어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원도 옥당과 같은 뜻으로 상차하고 또 이상진의 지술(地術)과 이해의 원려(遠慮)에 대하여 칭술한 다음, 국상 때의 등록(謄錄)이 너무나 많이 기록되어 있어 쓸데없는 비용이 많으니 다시 참작하여 정해야 한다고 청하니, 답하기를,
"말을 올린 성의에 대하여는 나로서 가상히 여기는 바다. 산릉은 이미 정해진 일인데 다시 논의할 게 뭐 있겠는가. 등록 건은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개처하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어 지부에 명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여, 자리에 눌러앉아 있기 어려운 사정을 말하고, 또 아뢰기를,
"홍여하의 소본을 이미 다시 써서 올리게 하였으니, 이는 신의 정범(情犯)에 있어서도 경중 간에 장차 맞게 결정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특명으로 다시 써 올리지 말라고 하였으니, 결국 신 때문에 도리어 말길을 막은 격이므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새로 내린 명령을 거두시고 아울러 겸하고 있는 다른 직함들도 모두 갈으소서."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3일 임자
이조가 아뢰기를,
"판중추 송시열이 지난번 모신 좌석에서 그가 겸임하고 있는 좨주를 굳이 사양하였는데, 자급으로 따지자면 과연 구애되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저번에 좨주 제도를 둔 사체가 매우 중하니, 대신들과 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영돈녕 이경석, 연양 부원군 이시백은 주장하기를,
"의정이 대제학을 겸임하기도 하고 정2품이 대사성을 겸하기도 하는데, 더구나 좨주로 말하면 그것을 둔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니, 일반적인 예로 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은 주장하기를,
"좨주가 원래 우리 나라에 있어 왔던 직이 아니고 그만한 사람이 있어서 처음으로 둔 것이면, 애당초 품계나 직질에 구애받을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로 하여금 품계에 따라 그대로 겸임하게 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4일 계축
총호사 심지원 등이 재혈을 마치고 들어와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택일하도록 할 것을 아뢰어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상이 총호사 이하를 양지당에서 인견하고 수원 산 건을 두고 반복하여 논란하면서 소장이 분분한 것을 매우 민망히 여겼다. 승지 강백년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요즈음 산에 관계된 상소문은 먼저 품신을 하고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는데, 그후 대사간 이정기 등이 논하기를,
"상소문이나 차자를 품신부터 하고 들여오라고 하신 하교가 매우 미안한 것이었는데도 입시 승지로서 끝까지 그에 관한 말 한 마디 없었으니, 이는 유윤(惟允)의 도리에 있어 자못 흠결이 있는 일입니다. 그를 추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인산 문제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뭇사람 뜻이 일치하지 않아 대신·중신들까지 상소·차자가 줄을 잇고 있으니, 이미 정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널리 의견을 수렴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바라건대, 2품 이상의 재신들과 삼사의 관속을 빈청에 모이게 하여 의논을 거친 다음 만약 모두가 불가하다고 하면 다시 진선 진미한 곳을 골라서 쓰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도 왜 그런 말을 하는가? 허튼 수작에 동요되지 말고 곧바로 택일을 하여 아뢰라."
하자, 지원이 아뢰기를,
"현궁(玄宮)을 내릴 날이 9월 중에는 길일이 없어 부득이 10월 1일 발인하여 4일에 현궁을 내리기로 날을 잡았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윤강이 상소하고 사직하였는데 이유는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로부터 물리침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소에서 또 이상진·유계·이광재 등으로 하여금 수원 산을 다시 보도록 할 것을 청하고, 혹시 수원보다 더 나은 산을 다른 곳에서 얻는다면 더욱 큰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의 상소가 들어오자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상소를 총호사와 논의하여 아뢰라."
하고는, 이내 윤강에게 유시를 내려 안심하고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하였다.
전 영중추부사 원두표가 상소하여, 수원 산은 쓸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극구 말하고 또 윤강이 지술이 부족하다고 배척하였는데, 그 내용이 이해의 상소와 똑같으면서 다만 글자를 조금 바꿔 썼을 뿐이었다. 이에 대하여 답하기를,
"경의 지극한 성의는 가상하나 일은 다시 논의하기 어렵겠다."
하였다.
총호사 심지원이, 이상진·유계·이광재로 하여금 수원 산과 홍제동을 다시 보게 하도록 아뢰어 청하고 또 서울 근교의 다른 산들을 소개하니, 홍제동은 다시 볼 필요도 없다고 답하고 세 사람을 불러 내보내게 하였다. 유계가 소를 올려 사양하기를,
"원래 지술에 깜깜한데 일을 맡은 신하가 잘못 듣고 끌어들인 것이오니,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양 말고 빨리 가라고 답하였고, 이상진도, 사실 보고 들은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 아뢰기를,
"언젠가 지사(地師)에게 들은 말인데 광주(廣州) 원적산(圓寂山)이 용세가 좋다고 하고 헌릉(獻陵) 내의 이수동(梨樹洞)이 예로부터 일컫던 자리라고 하오니, 그 두 곳을 보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송준길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제신들이 수원을 쓰지 말자고 한 것은 모두가 지극한 정성과 몹시 슬픈 뜻에서 나온 것으로 그냥 물리쳐버릴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이상진이 지술에도 꽤 밝을 뿐 아니라 충직하고 질박하여 믿을 만한 인물이니 경기 내의 여러 산을 다시 살펴보게 하여 혹시 흠이 없는 길지를 구하면 그보다 다행이 없고, 만약 구하지 못할 경우 종전 계획대로 해도 안 될 것이 없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답하였다.
"산릉 문제는 이미 다시 보기로 하였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실정과 사세를 전후 소장에서 이미 다 밝혔는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신으로 하여금 면목을 내놓고 나와 일을 하라시니, 이는 염치를 대강 아는 축으로 신을 대하시는 일이 아니어서 신으로서는 엎치락뒤치락 불안을 느끼는 것이 이제 와서는 극에 달했습니다. 다만 이 죄를 전하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하께서는 별로 살피지 않으신 것이지만, 조정 신하들 모두는, 신과 가까운 자는 신을 가엾이 여기고 서먹한 자는 비웃으며 미워하는 자는 그를 이용하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당하는 쪽이 만약 기개가 있는 선비라면 잠시인들 어떻게 머물러 있겠습니까. 다만 선침(仙寢)이 아직 식기도 전임을 생각할 때 슬픔과 그리움이 갈수록 새로워지는데, 이 시기에 나라를 떠난다면 그게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그리하여 비웃음도 무릅쓰고 허물도 짊어진 채 오늘까지 버텨왔던 것인데, 지금은 위로 공론도 무섭고 아래의 뭇 기롱도 너무 절박하여 감히 연하(輦下)에 더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기에 곧바로 성 밖으로 나와 엄명을 기다리는 것이오니, 혹시라도 불쌍히 여기시어 용서를 하신다면 삼가 교외에 엎드려 있으면서 산릉이 끝나기를 기다릴까 합니다."
하였다. 이 차자가 들어오자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경이 내 뜻을 이해 못하고 나를 두고 교외로 나갔는데, 행여 이 지극한 소망을 이해하고 버려버리지나 않는다면 다행스럽기 그지없겠다라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 전유하라."
하고, 또 간곡한 뜻이 담긴 비답을 내렸으나, 시열은 굳이 사양하고 입성하지 않았다.
6월 26일 을묘
완남 부원군 이후원이 상소하여, 수원 산은 쓸 곳이 못된다는 내용의 수천 마디 말을 올렸는데, 그 내용이 이해·원두표의 상소와 똑같은 것이어서 상이 원두표에게 답했던 내용대로 답하였다.
상이 양지당에 나아갔는데 약방 도제조 정태화, 제조 채유후, 좌부승지 김수항이 여러 어의를 거느리고 들어와 발 부위의 아픈 곳을 진찰하였다. 상이 중관(中官)을 명하여 조경(趙絅)이 지어 올린 시책문(諡冊文)을 내오게 하여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문장이 모를 곳이 많아 경들과 상의해 보려는 것이다."
하니, 유후가 아뢰기를,
"고문(古文)만을 다루는 자들이 쓴 글월은 으레 그 뜻이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습니다."
하였고, 태화는 아뢰기를,
"내용에 잘못된 곳이 있으면 예문관에 유시를 전하여 다시 고치도록 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시열이 교외에 나가 있는 바람에 빈 수령 자리가 많은데 차출을 못하고 있고, 앞으로 다가오는 도목 대정(都目大政)도 제 기간에 치르기가 어려울 것 같아 자못 염려가 된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산릉 대 역사를 앞두고 밖에서 계책을 세워 서로 도와야 할 일이 많으므로, 도목 대정을 지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번에 신이 잠시 그의 체직을 들어주시라고 청했던 것은 사실 그를 예우하여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자는 뜻이었는데, 바깥 논의들이 지금까지 이를 그르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다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끝까지 출사하지 않는다면 그 아문의 일을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이어 수원 산 문제를 놓고 논의한 후 자리를 파하였다.
이조 판서 송시열이 다시 상차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그렇게까지 굳이 사양하니 본직에 한하여 경의 청을 들어주리라. 경도 나의 이 지극한 뜻을 이해하고 마음을 바꾸어 들어오라.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듯이 바라고 있다."
하였다. 좌부승지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송시열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니, 물론 유현(儒賢)을 우대하여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자는 지극한 뜻에서 하신 일인 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총재라는 직이 매우 중대한 직이기에 이미 갈았다가 금방 다시 제수했던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었을 것인데, 지금 또 그가 사양한다 하여 다시 체직을 허락하였으니, 아마 전도된 일인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세가 그러하니 지금 그의 뜻대로 따랐다가 뒤에 선처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계속되는 여러 대신들 차자로 인해 이상진 역시 다시 다른 산을 보기 위하여 나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같은 시각에 한쪽에서는 산을 찾고 다른 한쪽에서는 산역(山役)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수원의 산역을 잠시 동안 정지하였다가 도감 제조 이하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본 후 산역을 하도록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꼭 정지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대로 산역을 시작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7일 병진
집의 윤선거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불초한 몸으로 걸맞지 않은 허명을 많이 지니고 전후 10년 동안을 한결같이 사직만 하여 왔는데, 대행 대왕께서도 그 사정을 굽어보시고 억지로 위명(威命)을 가하신 일이 없이 전야에서 한가히 지내도록 내버려두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지금 와서 다시 성상의 은총을 탐해 그동안 글을 읽고 도를 찾겠다고 자처하던 몸으로서 버젓이 예절의 자문에 응하는 위치에 나와 서게 된다면, 미미한 신의 본심을 잃어버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끝까지 신을 아껴주시던 선대왕의 덕의(德意)도 이를 바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신이 죽음을 참고 길을 떠나 서울에 왔는데 그날 사헌부 집의에 새로 임명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더 놀라고 두려워 곧바로 궐문 밖으로 달려와서 경건한 마음으로 배곡(拜哭)하고 이어 정상을 아뢰어 분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잘못 내리신 은총을 거두시고 해당한 죄를 내리시어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가 들어왔다는 것을 들었을 때 다행스럽기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판의금 송시열이 상차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금부의 일들이 신 때문에 적체가 되고 있어서 새로 내리신 인은(仁恩)이 즉시 당사자들에게 젖어들지 못하고 있으니, 3백 리에 은사(恩赦)를 행하는 뜻에 자못 배치되고 있습니다. 서둘러 체차하시는 것이 공으로나 사로나 매우 온편한 일이 되겠습니다. 만약 신의 병을 보아가면서 처리하고 싶으시다면 지사 이하로 하여금 즉시 의언(議讞)을 실시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금부의 일은 차관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겠다. 경은 조리를 하다가 병이 좀 나으면 그때 들어와서 공무를 집행하라."
하고, 이어 어의에게 병간호를 명하였다.
6월 28일 정사
대사헌 송준길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근래 산릉 문제로 진언하는 신하들은 모두가 선왕조의 늙은 신하들로서 큰 일에 만전을 기하자는 깊은 우려와 먼 장래를 생각하여 하는 말들이니, 그 마음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혹은 알았다고만 비답을 내리시고 혹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까지 하시니, 미안하기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뒤이어 이상진 등으로 하여금 다른 산들을 다시 보도록 명하셨으니, 이 점으로 보아서는 마음을 비워 스스럼없이 받아들이신 것 같기도 한데, 어찌하여 한쪽으로는 산을 다시 보라고 하시고 다른 한쪽에서는 산역을 시작하시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총호의 대신이 잠시 산역을 정지하자고 청하였으나 여전히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바에야 애당초 왜 산을 다시 보도록 하셨습니까. 신이 바라기는 산역은 잠시 정지해 두고 상진 등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들 말을 듣고 나서 여러 대신들과 다시 회의하여 난숙한 강평을 거침으로써, 중외의 신민들로 하여금 답답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없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 내용이 모두 교훈이 담긴 말이므로 내 마땅히 가슴에 새기겠다. 산릉 문제도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잠시 동안 산역을 정지하도록 해야겠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산릉 역사를 이상진이 돌아올 동안까지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졸곡 후 조석 상식(上食)에 육선(肉膳)을 쓸 것인지의 여부를 대신들과 논의 했더니, 영부사 이경석, 연양 부원군 이시백 등은 ‘《오례의》에 조석 상식은 소선(素膳)으로 하여 우제·졸곡·삭망·연제·상제·담제 또는 대향·납향 등의 제사 때와는 다르다고 되어 있고, 또 상(喪)·제(祭)는 선조가 하던 대로 따라야 한다고 선현인 이황도 일찍이 말한 바가 있습니다. 성조께서 이미 정해놓은 제도이고 선왕들이 이미 행하던 일인데, 지금 와서 고친다면 매우 미안한 일 같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졸곡 후 조석 상식에 소선을 쓰는 것이 이미 국조의 전래된 정식이므로, 지금 와서 다시 고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으며, 좌의정 심지원도 ‘신의 어리석은 소견을 지난번 탑전에서 이미 다 아뢰었거니와 조종조에서 행해 오던 예를 지금 와서 경솔하게 논의하는 것은 미안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논의대로 따르도록 명하였다.
6월 29일 무오
송시열을 좌참찬으로, 송준길을 이조 판서로, 채유후를 대사헌으로, 민유중을 교리로 삼았다.
예조 판서 윤강, 관상감 제조 이응시 등이 산을 보고 돌아와, 원적산이나 광나루[廣津] 위 산, 배나무골[梨樹洞] 산 모두가 크게 쓸 자리가 못된다고 아뢰자, 그대로 수원을 쓰라고 답하였다.
6월 30일 기미
상이 양지당에 나아갔다. 송시열이 입시하여, 자기의 작은 성의를 굽어 살피시어 체직을 허락하신 데 대하여 너무나 황공 감격하다는 뜻을 누누이 아뢰었다. 상이 중관을 명하여 조경이 지은 시책문을 송시열에게 내보이게 하고는 이르기를,
"이 문장이 모를 곳이 많은데 경의 의향에는 어떠한가?"
하니,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국가적 대 저술로서 아무나 가벼이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정밀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지은 사람에게 다시 물어 진선 진미를 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되도록 정밀하게 해야 한다."
하고는, 시열에게 이르기를,
"이번 산릉 문제에 대해 좌참찬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막중한 일을 신이 맨 먼저 이의를 제기했었는데, 그후 대신·재신들이 계속 소차를 올려 지금까지도 결정이 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황공합니다. 그러나 만세 후에 5환(五患)이 있으리라는 것은 인사(人事)로 따져 보아 틀림없이 그리될 것입니다. 그 부(府)에는 언제나 6, 7천의 병마가 주둔해 있고, 지리적 여건도 3남(三南)의 요충 지대에 해당되므로 만약 변란이 있게 되면 틀림없이 싸움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수백 호의 민가를 일시에 철거하고 분묘들을 옮기고 생업을 깨트린다면, 그에 따른 원한과 한탄이 국가의 화기를 해칠 것입니다. 신의 생각 같아서는 주자(朱子)가 말했던 대로 시기를 다소 늦추어 다른 산을 널리 찾아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은 자못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었으나 시열이 더욱 극력 간쟁하면서 이어 건원릉(健元陵) 왼편 등성이를 여러 지관에게 다시 물어 보라고 청하자, 상이 주서 권두추(權斗樞)를 명하여 빈청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말하여, 그 왼편 산등성이를 두 능의 용호(龍虎)로 써도 두 능에 방해가 없는지의 여부에 대해 이원진·윤선도와 여러 지관들에게 물어 아뢰게 하라고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건원릉 왼편 산등성이가 어떤가에 대하여 예조 판서 윤강, 부호군 이원진 그리고 다른 여러 지관들을 불러 물은 것을 별단(別單)으로 써 올립니다. 그런데 윤선도는 강 밖에 나가 있어서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달리 좋은 곳이 없어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수원 말고 달리 논의할 곳이 없을 것 같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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