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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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신유

이조 판서 송준길, 집의 윤선거가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모두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        윤강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본직에 있으면서 산릉 간심(看審)의 일행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신이 사상(私喪)으로 구산(求山)을 해보았기에 그 방면에 약간의 문견이 있는데, 지금 군부의 의관(衣冠)을 간직할 자리에 대해 어찌 감히 잡술(雜術)이라는 혐의 때문에 뒤돌아보고 머뭇거릴 수 있겠습니까. 홍제동 산을 사람들은 다 길지라고 하지만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미진한 바가 있기 때문에 감히 당초의 소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의 말대로 꼭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수원에서는 여러 곳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길지가 없었고, 오직 그곳만을 여러 신하들과 지관 무리들이 모두 다 그럴 만하다고 하기에 신은 거기에서 별로 이렇다 저렇다 할 만한 딴 소견은 없었고, 다만 산론(山論)에 의거하여 치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두 대신과 중신들은 신이 홍제동을 헐뜯어 수원으로 귀결되게 했다 하여 그것을 죄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신을 파직하여 공의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건원릉 왼편 산등성이를 다시 물어 아뢰라고 하신 하교를 보고 성상께서 대사를 신중히 하시려는 데 대하여 다행스럽게 여겼는데, 뒤이어 듣자니 총호사가 물어 아뢴 내용에는 쓸 수 없는 곳으로 단정하였다 합니다. 신은 산에 관하여 비록 아는 바는 없으나, 고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이 경자년017)                   의인 왕후(懿仁王后) 국장 때에 전후 의계(議啓)한 것들이 모두 그의 문집 속에 있는데, 건원릉의 여러 산등성이에 대하여 그 형세들을 매우 자세히 논하여 놓았습니다. 신이 삼가 그것을 별단으로 적어 올려 성상께서 보시는 데 참고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어 생각건대, 건원릉은 바로 우리 태조 대왕께서 신승(神僧)인 무학(無學)과 골라 잡은 자리이며, 선묘조 때의 술사 이의신(李懿信)·박상의(朴尙毅) 등은 사실 요즈음 풍수설을 안다는 자들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전에 무학이 잡은 자리이고 그 후 의신·상의가 찬미했으니, 거기야말로 쓸 만한 순수한 길지임을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오늘의 지사들 말을 듣고 의심을 할 곳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도 첫째 등성이 둘째 등성이를 놓고 반복하여 논했었지만, 용호(龍虎)를 다친다고 말한 적도 없고 또 가까워서 방해가 된다고 한 적도 없었으니, 오늘 지관들 말은 물론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왼편 첫째 등성이 외에 다른 등성이들도 많은데, 왼편 첫째 등성이만 보고 다른 등성이들은 보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또 이상진 등 3인이 풍수설에 관하여 아는 것이 있다고 했으니 그들도 수원이라든지 기타 다른 곳도 보게 해야 할 것인데, 지금 그들에게는 보이지도 의논도 하지 않고 다만 수원 쪽을 주장하는 지관들에게만 물었으니, 그 역시 널리 물어 중지를 모으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수원 산은 그 혈도(穴道)에 대한 논설이 매우 차이가 나고 있는데, 노숙한 지사에게 들어보았더니 수원은 상파지(傷破地)가 정혈(正穴)이라고 하였습니다. 산을 정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혈도인데 혈도가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틀림이 있다면 형국이 아무리 좋아도 쓸모가 없는 것이므로, 이를 자세하고 신중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깊이 재량하시어 이상진 이하 여러 지관들로 하여금 왼편 첫째 등성이부터 다른 여러 등성이까지 다시 보아 충분한 논의를 하도록 하시고, 수원의 혈도에 대해서도 다시 상량해 논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인산(因山)을 정하는 일이 어느 시대라고 없었겠는가. 60년 전 일이라 하여 어찌 다 좋기만 했을 것이며, 오늘의 일이라고 어찌 다 좋지 않기만 할 것인가. 수원 혈도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였다. 부호군        이상진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산릉에 관하여 망령되이 논하다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는데, 성상께서 너그러운 도량으로 감싸주시고 신으로 하여금 서울 근교의 쓸 만한 산을 말하라고 하시니, 신은 걱정스러움과 민망함을 더욱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홍여명(洪汝溟)이라는 자가 어느 재상 집에 와서 수원 산보다 나은 다른 산이 있다고 극력 소개한 일이 있다는 것을 듣고, 신이 끝까지 그를 찾아 불러 보았더니 그의 말 역시 많이 사리에 맞았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가 소년 시절부터 중 희정(熙淨)에게서 그 술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가 들은 바로는 서울 근지에 국장을 할 만한 곳이 세 군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즉시 여명을 데리고 달려가면서 한편으로 조량(趙湸)을 청하여 대질하였더니, 그 한 군데는 건원릉 안의 서동(西洞)으로서 백호(白虎)가 두 겹을 막혀 있는데다 형세가 소명하고 바르며 기상도 혼후하여 순수하고 아름답기가 동국(東局)의 여러 능들과 막상막하였고, 또 한 군데는 불암산(佛岩山) 밑 화접동(花蝶洞)으로 성봉(星峰)이 우뚝 솟아 있고 쌍유(雙乳)가 혈을 이루고 있어 기세가 청수하고 웅장하여 존귀하기 이를데 없었는데, 그렇게 절승한 곳은 서울 밖에서도 일찍이 보지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군데는 과천(果川) 땅이었는데 총총했던 관계로 미처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상 세 곳을 예관이 지사를 데리고 가서 살펴보게 해야겠습니다."
하고, 또 조량의 지술이 능숙하다는 점을 말하고 이간(李衎)은 병으로 늦어지고 있으며 이광재(李光載)는 시골로 내려갔는데, 모두 불러 같이 보게 했으면 매우 다행스럽겠다고 하였다. 이 상소문을 산릉 도감에 내렸는데, 막상 총호사가 나갈 때는 이간·조량은 대동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장령 황준구·김익렴, 지평 이합·강유후 등이, 국장 날짜를 5개월을 넘겨 잡은 것이 예제에 위배된다 하여 예관을 추고하고 날짜를 다시 잡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춘천 부사 김응해(金應海)가 늙어 정사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상을 논하면서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준엄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고 김응해 문제도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 관리들 모두가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건원릉 서동과 불암산 화접동을 이상진·조량이 좋다고 찬미하였으니, 예조 판서 윤강으로 하여금 이상진·이원진 및 다른 여러 지관들과 함께 가서 살펴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윤선도가 강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숙배하지 말고 자기 집에서 곧바로 나가 산을 보러 간 일행들과 함께 가게 하라."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상차하기를,
"저번에 천거하라시는 하교를 받고 감히 들은 바에 의하여 생원 심종적(沈宗迪), 진사 신경윤(愼景尹)과 김태후(金兌厚)를 천거합니다."
하니, 상이 종적 등을 명하여 산을 보러 간 일행에 동참하게 하였다.

 

7월 3일 임술

좌참찬 송시열이 상차하여 수원 산 문제를 논했는데, 대체로 이시백의 말 뜻을 부연한 것이었고, 끝에 가서 아뢰기를,
"대행 대왕께서 수원이 7천 병사가 있는 곳이라 하여 다른 읍과는 달리 보살피시면서, ‘국가에 무슨 일이 있을 때 힘을 얻을 곳이다.’고 하셨는데, 지금 그곳 읍과 마을을 철거하고 전답과 민가를 폐기시켜, 그곳 백성들로 하여금 한탄하게 한다는 것은 결코 대행 대왕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 신하들이 길지를 택하여 선왕의 장례를 모신다는 것이 바로 수심과 원한이 쌓인 지역에다 모시는 격이며, 선왕의 체백이 편안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바로 선왕의 뜻을 크게 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신하들 뜻이, 선왕께서는 지금 상제의 곁에 계시면서 이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을 것이므로 비록 그리하더라도 해가 될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죄 중에서도 큰 죄인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로서도 그렇게는 못할 일인데 하물며 전하의 성효로서 어찌 차마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극한 정성으로 한 말이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그리고 상소 내용 중 선입견을 주장하지 말라고 한 말은 정원에 분부하여 예조 판서에게 전유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전 찬선 권시가 상소하여 소명을 사양하니, 상이 병을 조리하고 올라와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고 유시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여 수원 산을 논하면서, 5환(五患)이 있는 자리를 범하고 뭇 원성이 집결되고 있는 것도 무시한 채 쓰지 않아도 될 곳을 기어이 쓰는 것은 국가 장래를 위한 원려가 아니라고 말하고, 또 아뢰기를,
"하고많은 집들을 철거하고 대중의 뿌리를 뽑아놓는 일은 틀림없이 선대왕이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대체로 송시열의 논의를 주워섬긴 것이었다. 상이 깊이 생각하겠다고 유시하였다.

 

총호사 심지원이 택일에 동참하였으므로 그 죄가 같다는 이유로 상차하고 대죄하자, 상이 답하였다.
"길일이 없는데도 5개월 예제만 준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신하로서 감히 가벼이 논의할 바가 아니기에 10월로 택일한 것이니, 이는 신중을 기한 뜻이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장령 김익렴, 지평 이합은 총호사의 차자에 대한 비답이 엄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고, 장령 황준구, 지평 강유후는 소패에도 나오지 않았다. 대사간 이정기 등은 아뢰기를,
"신들은 이미 헌부가 한 것이 옳다고 여겨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했으니, 준엄한 비답이 내렸는데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다시 처치를 해야겠습니다."
하고, 서로 잇따라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대사헌 채유후가 처치하기를,
"바라건대 황준구·강유후는 체임하고 그 나머지 양사의 관원들은 모두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융통성 없이 예제만을 지키겠다고 핑계댄 채 군부의 장례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으니 매우 무리한 일이다. 김익렴·이합도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비답이 미안하다는 이유로 정원이 비답을 환봉하고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국장의 날짜를 불길한 날로 택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편안하다는 말인가? 그러한 무리들을 일러 무어라고 할 것인가? 엉뚱하다고 하여도 괜찮치 않은가?"
하니, 대사헌 채유후도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정기 등이 아뢰기를,
"채유후가 이미 처치를 온당치 못하게 했다 하여 엄지를 받고 인피하였는데, 신들이라고 어떻게 감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앉아 있겠습니까."
하고, 역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때 옥당이 상차하기를,
"성상의 이번 일은 충간의 길을 넓히고 성덕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길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대사헌 채유후, 대사간 이정기, 사간 이후, 정언 여성제·권상구를 모두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4일 계해

예조 판서 윤강, 관상감 제조 이응시 등이 다시 나가 산을 보고는, 홍여명이 좋다고 한 능 안의 산은 흠이 없지 않고 기중윤(奇重胤)·이필(李苾)이 보았다는 목릉(穆陵) 왼편 산등성이가 큰 자리로 쓸 수 있다고 뭇 논의가 일치되고 있다는 것을 치계하여 알려왔다.

 

경기 감사 오정일(吳挺一)이 치계하였다.
"삼가 받은 전지와 역마를 윤선도에게 보냈더니, 그가 자기 종의 이름으로 소장을 올려 병이 있음을 알리고, 또 말하기를, ‘건원릉 왼편 등성이는 그 국세가 수원만 못하다는 것을 일찍이 아뢴바 있고, 불암산은 그게 바로 화산(火山)인데 화산 밑에는 혈이 맺지 않는다고 고방(古方)에도 기록되어 있다. 내가 설사 산을 보러 간 일행과 함께 간다고 하여도 소견이 어두워서 쓸모가 있는지 알기란 만무한 일이니, 아뢰어 주기 바란다.’고 하더랍니다. 그리하여 다시 빨리 달려가게 하였습니다."

 

좌의정 심지원이 상소하고 시작했는데, 송시열의 상소에 ‘선왕을 수심과 원한이 쌓인 지역에다 장례를 모시려고 한다.’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이 답하기를,
"그게 어디 경을 헐뜯는 뜻인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이어 논의하여 아뢰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가 또 소를 올려 파직을 원하자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 윤강 등이 산을 보고 와 복명하니, 상이 내일 아침에 총호사 이하가 모두 모여 논의한 후 아뢰라고 명하였다. 지원이 다른 신하들과 다시 가서 산을 보겠다고 청하였다.

 

7월 6일 을축

이조 판서 송준길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언젠가 노인들에게 들었습니다. 명묘(明廟) 국장 때 구애된 점이 있어 4개월 안으로 장일을 정했다가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하교에 의하여 5개월 예제를 그대로 준수하였는데, 그 사실이 조야(朝野)에 전해져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능 자리도 확정이 안 되었는데, 장례 날짜를 어떻게 확정할 것입니까. 헌부가 아뢴 내용이 다소 때이른 감은 있으나, 주자의 말에도 음양의 구애된 점 때문에 기한을 물려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관이 쟁집하는 것은 열성조에서 행해 오던 전례를 그대로 준수하자는 것뿐인데, 전하께서는 출사를 청한 관원을 체차하도록 특명을 내리시고 정원이 복역(覆逆)을 했는데도 여전히 십분 회개의 기색이 없으시니, 신은 걱정스럽고 민망스럽습니다. 진심으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시바삐 전의 마음을 돌리시어 두 헌신(憲臣)을 특별 체차하라는 명령을 회수하시고, 뉘우침의 뜻을 확실히 보이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어의를 보내 병을 보게 하였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여 전 장령 김익렴, 지평 이합에게 본직을 다시 제수하도록 한 후 패초(牌招)해서 출사하도록 하였다.

 

7월 7일 병인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기중윤(奇重胤)이 발견한 산등성이가 반호의(潘好義)가 발견한 곳보다 낫다고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에 지관 무리들과 상의하여 거기에다 재혈을 했으면 좋겠는데, 다만 그 좌향(坐向)으로 보아 9월·10월은 구애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인과 현궁(玄宮)을 내릴 날짜도 당연히 가장 좋은 날을 택해야 할 것인데, 장례의 기한 또한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들과 좌참찬 송시열, 이조 판서 송준길 등으로 하여금 모여 논의한 후 여쭈어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즉시 지원 등을 여차에서 인견하고 새로 보았다는 산등성이의 형국에 대하여 물었다. 지원이 아뢰기를,
"그곳 형국이 수원보다 낫다고 한데 있어서는 신이 감히 알 수 없으나, 백성을 옮기고 읍을 옮기는 폐단이 없으니 이것이 편리하다고 봅니다."
하였다. 윤강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새로 본 산등성이가 좋은데 사람들은 수원만 못하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후 본 산 중에서 수원만한 곳이 없는데 5환이 있을 것이라 하여 신에게 죄를 돌리고 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송시열의 차자 내용에 ‘선왕은 이 세상에 미련이 없을 것이니 비록 이렇게 하더라도 별로 해가 없을 것이다.’고 한 말은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그러한 죄명을 졌는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조정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서둘러 신의 직명을 삭탈하고 백의(白衣) 신분으로 산릉 역사를 보게 하소서."
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당초에 수원의 산을 의정한 사람은 신입니다. 만약 죄를 논하기로 들면 신이 당연히 죄를 받아야 합니다. 총호사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신도 이미 뭇사람의 지척을 당했으니, 종백(宗伯)의 직임을 체차하여 윤선도·이원진처럼 군직(軍職)을 띠고 산을 보는 데 동참하게 하시면 아주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모두에게 위로의 뜻으로 달래고 허락하지 않았다. 지원이 이어 여러 대신과 송시열·송준길 등을 불러 서로 논의하여 정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지관 무리들이 해가 있다고 한다면 대신과 유신의 말이 얼마나 힘을 보겠는가?"
하였다. 공조 판서 정치화(鄭致和)도 산릉 제조로 입시하여 새로 본 산등성이가 매우 훌륭하다고 누차 찬미하고, 또 아뢰기를,
"만약 해가 있다고 한다면 당초에 왜 재혈을 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란 익히 논의할수록 좋은 것이니, 지관에게 다시 물어보도록 하라."
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새로 본 등성이를 쓰기로 이미 정하였으면 수원 산은 그만두어야겠습니다."
하였다. 승지 권대운(權大運)이, 더위가 바야흐로 심한데 거처가 옹색하다는 이유로 가을이 올 때까지 양지당으로 거처를 옮겨 질병을 예방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편리한 곳을 골라 거처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 후에도 대신과 약방에서 누차 간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이정기, 사간 이후, 헌납 강호(姜鎬), 정언 여성제·권상구 등이 아뢰기를,
"인산을 아직 정하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이 아프시고 조정의 경재(卿宰)들도 분주하게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첨지 윤선도는 태연하게 병을 핑계대면서 산을 보는 데 동참하지도 않고, 종의 이름으로 소장을 올려 감히 아무 산이 어떻다 하고 있으니 교만하고 무례합니다. 그 죄 불경에 해당되니 그를 잡아 들여 국문하고 죄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8일 정묘

총호사 심지원 등이 다시 빈청에 모여 이상진 및 여러 지관과 논의한 후 별단(別單)으로 써서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큰 일을 하려면 자질구레한 폐단에 구애받을 수 없는 것이니, 그냥 수원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자, 지원이 또 사실을 들어 아뢰기를,
"수원으로 정한 후 흠이 있다는 논의가 분분하였고, 대신·중신들까지도 잇따라 항의하는 상소를 올려 모두 쓸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다시 여러 산을 보았는데, 다행히도 건좌(乾坐)로 된 산등성이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격에 맞는 중 다소의 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풍수설을 아는 사람들이 해는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산을 쓴다면 불평 불만에 쌓인 인심을 위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수원을 쓴다면 뭇사람들의 마음이 틀림없이 더 격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여러 대신과 유신들에게 널리 묻고 논의를 거쳐 정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라 제신들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 영중추부사 이경석, 연양 부원군 이시백, 이조 판서 송준길은 빈청에 모이었고, 완남 부원군 이후원은 병을 이유로 불참했으며 좌참찬 송시열은 자기가 올린 소에 대하여 아직 회계가 없었다 하여 불참하였는데, 그가 올린 소는 바로 겸임하고 있던 금오(金吾)의 직을 체차해 줄 것을 청한 것이었다. 이시백·이경석이 연명으로 상차하여 수원 산을 쓰지 말 것을 청하자, 상이 이미 유시했다고 답하였다.

 

빈청에 모여 논의한 후 아뢴 내용에, 이경석·이시백은 아뢰기를,
"구구한 생각은 차자로 대략 밝혔으므로 삼가 재량하여 취사를 정하시기를 바랄 뿐 달리 아뢸 말은 없습니다."
하였고, 영상 정태화는 아뢰기를,
"새로 발견한 건좌의 산은 모두가 좋다고 말하고 인사(人事)로 따져보아도 매우 편리하고 온당합니다. 그러한 산을 구했는데 수원에 대해 다시 의논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송준길 역시 이러한 뜻으로 아뢰기를,
"수원 산이 비록 인사로 보아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만약 달리 적당한 곳이 없다면 물론 그곳을 써야겠지만, 지금은 건원릉 안의 건좌로 된 등성이가 수원보다 훨씬 낫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데, 어찌하여 꼭 더없이 좋은 곳을 두고 기어코 수원을 택한단 말입니까? 이상진·유계·윤강 같은 사람들은 그 방술에 밝다고 평소부터 칭해 온 자들이고 또 그들이 질박 충직하여 믿을 만하다는 것은 성상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세 신하의 말을 믿으시고 대사를 결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건좌로 된 산은 흠이 없지 않기 때문에 경들의 말이 비록 간곡하지만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 채유후, 대사간 이정기, 사간 이후, 헌납 강호, 정언 여성제·권상구가 합동으로 아뢰어, 수원 산을 그대로 쓴다고 한 명령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호군 이상진, 예조 판서 윤강, 완남 부원군 이후원이 서로 이어 소를 올려, 건좌의 산을 높이 찬미하고 수원을 그대로 쓴다는 명령을 거두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9일 무진

홍문관이 상차하여, 수원 산을 그대로 쓴다는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은 그 차사 내에 이른바 성인으로 자처하면서 이기기를 좋아한다고 한 말은 이러한 일에 쓸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심지어 ‘차마 듣지 못할 말을 이미 들었는데 그대들과 감히 무슨 말을 그 사이에서 왈가왈부하겠는가?’라고 비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성인의 말씀이 이렇게 너무 박절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이미 내리신 전지를 다시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수원에 가 다시 재혈하도록 한 일에 대해 시일을 끌어서는 안 된다는 하교를 어제 받았습니다만, 대각의 논계가 멎지 않고 있어 받들어 거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뒤이어 또 어찌 권도(權道)가 없겠느냐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몇백 년 전래한 체통과 규례를 무너뜨려 후일 끝없는 폐단을 야기시킬 길을 열 수는 결코 없습니다. 논계가 멎기를 기다렸다가 가서 재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잠시동안 형세를 관찰하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채유후, 대사간 이정기 등이 아뢰기를,
"총호사가 아뢴 내용에 답하신 비답을 보니, ‘대각의 논계에 구애받지 말라.’고 하신 하교가 있었습니다. 신들이 비록 매우 형편없으나 이미 이목(耳目)의 서열에다 두시고서 전하께서 신들을 대각으로 보지 않으시니, 이는 위로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며 아래로는 대각의 위표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무슨 면목으로 그냥 언지(言地)에 눌러 있겠습니까."
하며,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김익렴, 지평 이합은, 특별히 체차하였다가 다시 제수한 것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인혐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응교 이경휘(李慶徽), 교리 성이성(成以性), 수찬 홍처윤(洪處尹)·김우형(金宇亨)이, 모두 출사하도록 하고 익렴·이합만 체차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7월 11일 경오

정계주(鄭繼胄)를 장령으로, 이무(李堥)를 지평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윤휴(尹鑴)를 공조 정랑으로, 성이성을 교리로 삼았다.

 

평안도 안주(安州) 등 25개 읍이 굶주림에 빠져 진휼을 명했는데, 3월부터 시작하여 보리가을이 되어서야 정지하였다.

 

호군 이상진이 또 상소하여 산을 논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잠시 사이의 중도를 벗어난 말이 도리어 바꿀 수 없는 확론이 되고 말았으니, 아마 크게 기수(氣數)에 관계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풍수설에 관한 감식이 윤강 같은 사람은 신용을 받지 못하고 거짓말 잘하고 이상야릇한 윤선도 같은 사람이 도리어 쓰임을 당하였으니, 마치 조물주가 그 사이에서 심통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청대하고 입시하여, 맨 먼저 옥당의 일에 대해 아뢰기를,
"준엄한 전지 아래 옥당 신하들의 기상이 시름에 쌓이고 풀이 죽어 있습니다. 바라건대 화평한 하교를 내리시어 다시 들어와 입직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마땅히 경의 말을 따르리라."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건좌의 산은 모든 면이 편리하고 수원 산은 하나하나가 불편하므로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할지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꼭 수원을 쓰지 말자고 하는 데는 깊은 뜻이 따로 있으나, 그것을 감히 소장이나 차자에다 번거롭게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준길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비기(秘記)에 ‘국가에 일이 있으면 수원에서 변이 일어나 서울과 나라 안이 불안해질 것이다.’고 한 말이 있는데, 그 때문에 모두 우려를 품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듣지 못했던 말인데 사실이 그렇다면 경들이 뜻이 있어 한 일이구나."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송시열이 불안해 하는 것은 오로지 홍여하 상소 때문만은 아닙니다. 지난날 선대왕께서 온 나라를 시열에게 맡기고 그의 말이면 듣지 않은 말이 없었으며, 그가 하려는 것이면 안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산릉 문제로 전후 누차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므로, 깔끔한 그의 마음에 개탄스러운 생각이 없지 않아 떠나고 싶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자기의 직을 갈고 다시 시열을 제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수원은 서울 인접의 중진(重鎭)으로서 하루아침에 읍을 옮긴다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당시 조정 신료들이 난색을 표하는 자가 많았고 그리하여 산릉을 정하는 논의가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준길이 유자(儒者)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서 이렇게 허무맹랑한 말을 하여, 마치 화복(禍福)으로 상대에게 충격을 주어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는 듯이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비웃었다.

 

상이 양지당에 나아갔는데 영돈녕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연양 부원군 이시백, 좌의정 심지원, 완남 부원군 이후원, 예조 판서 윤강, 부호군 이상진·이원진, 대사성 유계, 좌승지 강백년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산릉 문제를 논의해 정하려 하니 경들은 각기 소견을 말해보라."
하니, 신하들 모두가, 새로 잡은 건좌의 산이 쓸 만하다고 하였는데, 경석은 더욱 많은 말을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윤선도가 일찍이 원두표를 김(金)·심(沈) 두 적(賊)에다 비유하였습니다. 사람을 몰라보는 그가 어떻게 하늘을 알 것이며 하늘을 모르는데 자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무슨 딴 뜻이야 있었겠는가."
하고, 이어 여러 대신에게 이르기를,
"산릉 문제에 대해 의논이 분분하므로 내 감히 독단을 내리지 못하고 회의를 거쳐 정하려고 한다. 그런데 대신 이하 제신들 말이 모두 건좌의 산이 수원보다 낫다고 하니 그리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신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 아뢰기를,
"이야말로 종묘 사직과 신민들에 있어서 더없는 다행입니다."
하였다.

 

7월 13일 임신

비가 여러 날 개지 않아 벼곡식이 손상을 입었으므로, 예조가 네 문에다 기청제를 지낼 것을 청하였다.

 

7월 14일 계유

이만영(李晩榮)을 집의로, 윤비경(尹飛卿)을 지평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장악정(掌樂正)으로 삼았다.

 

7월 15일 갑술

사은사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 부사 남노성(南老星), 서장관 목겸선(睦兼善)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7월 16일 을해

이성항(李性恒)을 사간으로, 민주면(閔周冕)을 정언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평안도 강서(江西) 등 4개 읍에 홍수가 져 무너진 산기슭이 매우 많았다.

 

판중추부사 민형남(閔馨男)이 죽었다. 형남이 화려한 벼슬을 두루 거치고 광해(光海) 시절에는 품계가 보국(輔國)에까지 이르렀다가 반정 초기에 훈봉을 삭탈당하고 자급이 가선(嘉善)으로 강등되었는데, 그후 다시 승급하여 정1품에 이르고 인조 말년에는 동전(東銓)까지 잡았었으나, 그 직에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공손하고 겨레붙이에게는 정의가 돈독하였으므로 칭찬하는 사람도 많았다.

 

7월 18일 정축

상이 정원에 묻기를,
"오늘 영상·좌상·이판·병판·판윤·우윤이 다 궐내에 왔는가?"
하였는데, 재궁(梓宮)에 덧칠을 하는 날이면 경재(卿宰)가 모여 곡을 했기 때문이다. 정원이, ‘모두 왔는데 이조 판서 송준길만이 병이 있어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상이 준길과 사복 정(司僕正) 이유태, 장악정 윤선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선거가 병을 이유로 오지 않으니, 내의를 보내 병을 보게 하고 신하들을 양지당에서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판윤 이완, 병조 판서 정치화, 이조 판서 송준길, 사복 정 이유태가 입시하니, 상이 수원의 돌을 산릉으로 운반하는 문제와 대마도(對馬島)의 환미(換米) 건을 허락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물었다. 대신들이, 수원 돌이 품질은 조금 낫지만 백성들을 괴롭혀 멀리 운반할 것까지는 없다는 것과 왜인들이 요구하는 쌀은 그들의 청대로 다소 바꿔주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니, 따랐다. 상이 유태에게 이르기를,
"귀성(歸省)을 하고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억지로 만류할 수는 없는 일이나, 보지도 못하고 떠나버리면 마음이 매우 서운할 것 같아서 이렇게 특별히 부른 것이다."
하니, 유태가 대답하기를,
"신에게 선하다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선왕께서 잘못 아시고 부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신으로서는 참으로 황공하고도 감격스러웠습니다. 지금 분곡(奔哭)으로 인하여 왔다가 거듭 제수의 명을 받았으나, 집에 노모가 있어서 차마 멀리 떠나 있을 수 없기에 지금 내려가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체직시켜주소서."
하니, 상이 귀성하고 빨리 돌아오라고 유시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오늘 윤선거를 보지 못하니 내 마음이 섭섭하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 사람은 죄 지은 몸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선왕조에서도 인견하시려고 하였지만 대궐에서 곧바로 나가 끝내 등대하지 않았었는데, 그에게 필시 무슨 생각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이어서 선거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죄상을 아뢰니, 【정축년 강화도 난리에서 선거가 자기 아내를 먼저 죽이고 자기는 죽지 않아, 항상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뜻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병조 판서 정치화가, 무신(武臣)으로 등용할 만한 인재가 절대 부족하다고 아뢰니, 파직 또는 산관으로 있는 무반 중에서 쓸 만한 인재를 골라 기록하여 아뢴 후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7월 19일 무인

지평 윤비경(尹飛卿)·이무(李堥), 장령 정계주(鄭繼胄)가 ‘이유태가 돌아가도록 허락해서는 안 되겠기에 어제 그를 머물게 할 것을 청하자는 간통을 냈는데, 장관이 난색을 보이며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두 경시를 당한 소치이니, 어떻게 감히 그 자리에 눌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채유후는, ‘성상께서 그가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은 그를 후히 대하는 뜻에서 한 일이며, 산릉 시기가 임박하였으므로 그때는 자발적으로 올라올 것이니, 번거롭게 청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 과연 난색을 보였다.’고 하면서, 역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강호(姜鎬)가 두 쪽을 다 출사시키도록 청하려고 하였는데, 정언 여성제(呂聖齊)가, ‘유태가 금방 왔다가 가버린 데 대해 온 조정이 모두 애석히 여기는 바이니, 그를 만류할 것을 청한 논의는 공공의 논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난색을 보인 말은 억지로 합리화하려는 처사이다.’라고 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모두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7월 21일 경진

이유태·윤선거 등에게 쌀·콩·소금·간장 등의 물건을 내려주었는데,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호조가 다시 보낼 것을 청했을 때는, 유태는 이미 하향을 했고 선거도 교하(交河)로 가버린 뒤였다. 상이, 유태는 올라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고 선거는 멀지 않은 곳에 가 있으니 다시 실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경휘(李慶徽)를 집의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성으로, 송국택(宋國澤)을 병조 참의로, 이태연(李泰淵)을 광주 부윤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민여로(閔汝老)를 장령으로, 윤지미(尹趾美)를 정언으로, 심유(沈攸)를 지평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성절사로, 정지호(鄭之虎)를 부사로, 권상구(權尙矩)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만경 현감(萬頃縣監) 김여량(金汝亮), 옥구 현감(沃溝縣監) 이정(李晶)에게는 통정(通政)의 품계를 가자하도록 명하였는데, 어사의 포계(褒啓)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비(吏批)가, 여량은 준직(準職)을 거친 사실이 없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선왕조에서도 특별 하교가 있었다. 지금도 그를 특별 가자하는 것이다."
하였다. 간원이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4일 계미

예조가 ‘재궁 발인 때 상께서 배종(陪從)하는 일은 중차대한 예입니다. 기축년에도 대신들과 논의하여 결정한 선례가 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대신과 논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장릉(長陵)018)  은 백리 길로 10일이나 유주(留駐)해야 하므로 선왕께서 비록 배종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형세였지만, 지금이야 한숨에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때와는 사정이 다른데 대신과 논의를 할 것이 뭐가 있는가. 해조에서는 그 예만 상고하여 아뢰면 되는 것이다. 예조 당상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승지 이정영(李正英) 등이 아뢰기를,
"발인 때 배종하는 절차가 《오례의》에 기록되어 있으나, 조종조에서 모두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지극한 정회 때문에 조종조에서 행하지 않았던 예를 행하시고자 하는데, 당연히 대신·유신(儒臣)에게 널리 묻고 강구하여 행하셔야 합니다. 예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당 아문이 아뢰어 여쭌 것은 그들의 직분이었을 뿐이니, 갑자기 미안한 하교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대신들과 논의하여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문에 기록되어 있는 일을 꼭 대신과 논의해야 할 것이 뭐가 있는가."
하고, 이어 예조를 추고하지 말도록 하였다.

 

7월 25일 갑신

부호군 권시가 올라왔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권시가 올라오니 내 매우 기쁘다. 해조로 하여금 먹을 것을 대주게 하라."
하였다.

 

7월 27일 병술

이에 앞서 안악(安岳)·신천(信川) 두 고을 사이에 위치한 마명산(馬鳴山) 아래에 위아래 들이 있는데, 그 사이를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윗들은 해마다 비가 오면 시냇물이 넘쳐 농사에 피해를 주었다. 궁가에서 그곳 농부들과 약속하여, 둑을 쌓고 통을 설치하여 수해를 막아주고 대신 백성들 전지를 절반으로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아랫들은 둑을 쌓은 후부터 혜택은 없고 오히려 끌어댈 물이 부족하여 걱정이었다. 궁가에서는 위아래 들 모두가 똑같이 둑의 혜택을 입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윗들을 이미 반분하였으니 아랫들도 달리할 수 없다고 하며, 지적(地籍)을 살펴 나누려고 했다. 이에 아랫들의 백성 10여 명이 소장과 지도를 들고 서울로 와서 좌참찬 송시열에게 그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시열이 그 백성들로 하여금 비국에다 소장을 올리라고 하였다. 비국이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안악 군수 강전(姜琠), 신천 군수 조여수(趙汝秀)가 궁가에 아첨하기 위하여 사실대로 조사하지 않고 그 전지를 나누어 궁가에 주어야 한다고 청했다.
이때 또 밤을 틈타 궁가의 차인(差人)에게 봉변을 준 자가 있었는데, 비국이 그것을 틀림없이 아랫들의 사람 김충건(金忠健) 등이 한 짓이라 하여 엄한 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청해, 윤허를 받았다. 이에 시열이 소를 올려 그 사실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며 아뢰기를,
"신이 그들을 인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도록 하였는데 결국은 도리어 억울함을 당하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면목이 없어 제 자신이 그들을 밀어 도랑에 처넣은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잘 알지 못해 일처리를 그렇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과실이다. 비국에 물어 다시 정확한 조사를 하여 조처를 취함으로써 뒤폐단을 막도록 하겠다. 경은 불안해 할 까닭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윤지미가, ‘전 참판 신천익(愼天翊), 전 참의 장응일(張應一)·정언황(丁彦璜), 전 수찬 이수인(李壽仁), 전 헌납 이기발(李起浡) 등은 신민이 부모를 잃은 듯한 슬픈 때를 당했는데도 아직까지 분곡(奔哭)하지 않았으므로, 간통을 띄워 모두 파직으로 논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경시를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정언 민주면(閔周冕)도 인피하였는데,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7월 28일 정해

사간 이성항(李性恒), 헌납 황준구(黃儁耉), 대사간 조수익(趙壽益)이 ‘서로 면대하여 논의한 후 확정을 지으려고 한 것이지 본래 미루려는 뜻이 아니었는데, 동료들이 지레 인피하여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태연히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국상에 분곡하는 것은 신자의 정의로서 당연한 일이고 보면 늦도록 오지 않은 것은 혹시 질병으로 인한 소치일 수도 있고, 대각의 논의 역시 서로 바른 길을 가자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보내온 뜻을 알겠다.’고 썼다면 본래 미루려는 뜻은 아니고, 서로 면대하여 논의하려고 한 것은 참으로 빈틈없는 만전을 기하는 도리입니다. 바라건대, 정언 윤지미·민주면, 사간 이성항, 헌납 황준구, 대사간 조수익을 모두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9일 무자

간원의 관원들을 모두 체직하고, 안악 군수 강전, 신천 군수 조여수, 황해 감사 강유(姜瑜)를 추고하였다. 이전에 이기발이 국상 초두에 궐하에 와 곡(哭)하고 갔는데, 어느 한 재신(宰臣)이 보아 알고 있었다. 윤지미는 사실을 잘못 알고 논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이성항·황준구·민주면·조수익도 모두 인피했는데, 헌부가 모두 체차할 것을 청했다. 또 아뢰기를,
"궁가가 전장을 둔 폐단에 대해 거론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근자에 안악 등지에서 새로 궁가 전장을 만들면서 백성들의 전지를 강제로 점거한 바람에 여러 고을에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고 있습니다. 지난번 사실을 조사할 때 본도의 감사나 조사관으로서는 사실을 규명한 다음 올바르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없도록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한 계본(啓本)을 보건대, 그들이 오히려 사실을 전도하여 멋대로 백성을 억압했습니다. 피해를 당하고 있는데 도리어 혜택을 입고 있다고 뒤집어씌우고, 위아래 들을 구분하지 않은 채 약속하지도 않은 전지까지 분배해야 한다고 청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이 일은 백성의 뜻을 따르고 백성들을 도와주는 것이다.’고까지 하였으니, 궁가에 아첨하고 조정을 기만한 정상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감사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 조사관의 보고에만 의거하여 덮어놓고 치계하였으니, 역시 매우 형편없습니다. 안악 군수 강전과 신천 군수 조여수는 파직하고, 황해 감사 강유는 중하게 추고하소서."
그리고 공천(公賤)·사천(私賤)이 자녀가 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전답과 가택, 노비는 본시(本寺) 또는 본주(本主)에 귀소시키는 것은, 바로 국가의 확고한 법입니다. 지난해 추쇄(推刷)에 관한 사목에는, 공천이 다른 여종에게 장가들었다가 죽었을 경우 비록 자녀가 있어도 없는 것으로 쳐서 그 전답과 가택, 노비를 모두 본시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몇 해만에 조세가 없는 전지가 점점 많아지고 생활 터전을 잃은 백성도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천·사천으로서 자녀 없이 죽었을 경우 공가에 귀속시키는 법을 《대전(大典)》에 있는 그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강전과 여수는 우선 중하게 추고하고, 끝 부분의 사항은 그 사유를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고, 이어 정원으로 하여금 물어서 아뢰라고 하였다. 장례원(掌隸院)이 아뢰기를,
"을미년에 정한 추쇄 사목 중에는, 노비로서 자식이 없이 부부가 모두 죽었을 경우 그 전답과 가택, 노비를 법전에 의거하여 자기 관청이나 자기 주인에게 준다는 조항은 있으나, 공천으로서 다른 여종에게 장가들었다가 죽었을 경우 비록 자녀가 있어도 없는 것으로 쳐서 그 전답과 가택, 노비를 본시에 귀속시킨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하였다.

 

지평 심유(沈攸)가 상소하여 새로 제수한 명을 사양하고, 또 자기 조부 심집(沈諿)을 위하여 신원(伸冤)을 청하였다.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렸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심집 문제는 조만간 논의하여 조처를 취하기는 취해야겠습니다만, 지금 가벼이 논할 시기가 아닌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와서 갑자기 신원을 들먹인다는 것은 극히 외람된 일이다.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심유의 조부 심집이, 남한 산성에서 강화할 때 임시 대신(大臣)의 직함을 지니고 오랑캐 진중으로 갔었는데, 그들과 대화할 때 형편없는 것들이 많았다. 이에 효종이 나라를 팔고 구차히 살기를 꾀했다 하여 관작을 추탈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 와서 심유가 시열의 기세를 빌려 신원을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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