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경인
간원이, 윤선도를 잡아들여 국문한 뒤 죄를 줄 것과 김여량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들어 여러날 논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비로소 선도는 파직한 뒤 추고하고 여량은 가자를 환수하고 대신 숙마(熟馬) 1필을 주라고 명하였다.
장령 민여로(閔汝老)가 상소하여, 몸이 편찮을 때는 권도를 따라야 한다고 청하면서 《예기(禮記)》의 ‘상 중에 있을 때의 예는 야위어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하지 않아야 하고 시각과 청각이 약해질 정도로 하지 않아야 하며, 병이 있으면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는다. 상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면 그도 불효인 것이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경계하고 또 아뢰기를,
"요즘 전하를 보건대 언관(言官)이 일을 논할 때 자존심을 내세워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빛을 보이시는데, 신은 이로부터 정직한 선비는 날로 물러가고 아첨하는 풍속이 생기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또 안악·신천의 궁가 전장 건만 하더라도, 조사관이나 감사 모두가 궁가의 뜻을 받들어 자기들의 앞길을 닦기에 급급했는데, 비국이 또 뒤따라 분명치 못한 사건을 가지고 충건 등에게 형을 내리도록 청하였습니다. 아, 그들의 전지를 빼앗고 또 죄까지 씌웠으니, 그야말로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대관이 파직과 추고를 청한 것도 사실은 감하고 감하여 한 일인데, 전하께서 내리신 벌은 그보다도 더 가벼우니,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안악 군수 강전, 신천 군수 조여수는 관작을 삭탈하여 궁가에 아첨한 죄를 징계하시고, 황해 감사 강유는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고, 비국의 담당 당상도 중한 쪽으로 추고하여, 뒤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였다.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사간으로, 이동명(李東溟)·정석(鄭晳)을 정언으로, 김익렴(金益廉)을 헌납으로, 조한영(曹漢英)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8월 3일 신묘
안악 군수 강전, 신천 군수 조여수를 파직한 다음 추고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헌부가 아뢴 내용을 지금 와서 생각하니, 강전 등이 했던 짓은 매우 부당하였다. 둘 다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도록 하라."
인산 때 무덤 속에 보판(補板)을 쓰지 말고 회격(灰隔)을 5치 정도 줄여 모두 기축년의 전례를 따르라고 명했는데, 이는 무덤 속이 너무 넓을까 염려해서였다.
8월 5일 계사
이때 상이 이미 위장에 병이 있었다. 약방이 아뢰기를,
"성상의 병은 오랫동안 위를 손상하여 허약해진 소치이니 잠시동안 권도를 따르소서."
하니, 상이 준엄한 말로 허락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면 차라리 죽어서 듣지 않겠다."
하였다. 간원이 서둘러 약방의 청을 따르라고 청하고, 비록 윤선도를 파직한 뒤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사간 목겸선이 동료들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거듭 제기된 논계를 멋대로 정지시켰다 하여 겸선의 체직을 청하고, 다시 선도를 잡아들여 국문하고 죄를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치 않고 겸선만 체직시켰다.
8월 6일 갑오
이성항(李性恒)을 사간으로,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수찬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당초에 훈련원 부정 이후광(李后光)이 경상 우병영 우후 민련(閔堜)과 사석에서 얘기하다가 자기가 관직을 얻게 된 경로를 말하면서, 심지어 뇌물을 수레로 싣고 가서 바치고 좋은 벼슬자리를 얻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후 혐의로 인해 민련과 싸웠는데, 민련이 드디어 그에게서 들은 말을 벼슬아치들 사이에다 퍼뜨렸다. 간원이, 후광과 민련을 잡아들여 그 사실을 캐내어 뇌물을 받았던 조정의 신하를 다스릴 것을 계청하여, 후광 등이 드디어 하옥되었다. 민련은 뇌물을 써 관직을 얻었다는 말을 후광에게서 들었다고 말하고, 후광은 애당초 민련에게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다투기만 할 뿐 종결이 나지 않았으므로, 네 차례에 걸쳐 형을 가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후광의 아우 후관(后觀)이 격쟁(擊錚)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니, 상이 후광에게 더이상 형을 가하지 말고 다시 민련을 신문하라고 명하였는데, 민련 역시 끝까지 자복하지 않았다. 상이 이들의 공사(供辭)가 갈팡질팡하여 사실을 밝혀낼 수가 없고 그렇다고 엄한 형벌만 가하다가는 혹 죽을 염려가 있다 하여, 모두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약방이 의관(醫官)과 함께 들어가 진찰할 것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계청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2품 이상의 관원들과 함께 서둘러 권도를 따를 것을 세 차례나 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좌참찬 송시열, 부제학 유계도 차자를 올려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8월 7일 을미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비하여 증세가 꽤 덜한 것 같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2품 이상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권도를 따르도록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영돈녕부사 이경석, 완남 부원군 이후원도 모두 차자를 올려 권도를 따르도록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요 순의 도는 효제(孝悌)뿐이므로 요순과 같은 치화를 이루려면 당연히 효제의 도리를 다하여 수신 치화(修身致化)의 근본을 삼아야 할 것이다. 선왕께서 평소에 세상 일을 개탄하신 나머지 예를 갖추어 어진이를 초치하여 심복의 자리에다 발탁해 두시고는, 서로 도의를 강마하며 이 시대를 삼대(三代)로 만회하고 천하에 대의를 펴려고 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탁월하게 수립하신 굉장한 규모요 원대한 모범이었다. 그런데 이경석이 지어 올린 행장(行狀) 속에는 이러한 뜻이 매우 소략하니, 이 사실을 다시 명백하게 지어내어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정원은 이를 좌참찬 송시열에게 전유하라."
하였다. 시열이 그때 상의 명으로 대행 대왕의 지문(誌文)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 8일 병신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고 약을 논의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세 번째 아뢰자 약만 논의하도록 허락하였다. 간원이,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겠다는 청을 빨리 따르도록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사(兩司)가 합계하여 권도를 따를 것을 청하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아가 청하였으나, 상이 자전(慈殿)도 아직 마른 밥을 드시지 않는다는 핑계로 모두 따르지 않았다. 신하들이 다시 대왕 대비와 대비전에 아뢰어 마른 밥을 드실 것을 청하고, 또 상에게 권도를 따르도록 권하여 주라고 하였다.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이 여러 종실들을 거느리고 권도를 따르도록 계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 연양 부원군 이시백, 좌의정 심지원, 이조 판서 송준길 등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여차(廬次)에서 인견하였다. 태화 등이 입을 모아 권도를 따를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궁이 빈소에 계시는데 어떻게 차마 그리하겠는가. 경들은 제발 물러가라."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들은 청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결코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가서 백관들과 다시 호소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윤집, 사간 이성항, 정언 정석을 체직시켰다. 이전에 사간 목겸선이 독단으로 윤선도에 대한 논을 정지시켰다 하여 체차를 당했는데, 선도를 잡아들여 국문하자는 논계가 다시 제기되었다. 이때 와서 윤집이 사간원의 장이 되었는데, 헌납 김익렴, 전언 이동명이 일로 인하여 인피하고 나오지 않자, 윤집이 말하기를, ‘대각의 체통은 의견이 서로 틀리면 구차하게 동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선도의 사건은 달을 넘겨가면서 서로 버티고 있는데, 너무 지리하다. 또 더구나 저번의 계사는 그 뜻이 너무 혹독했다. 예를 들면, 「무례하고 불경하다.」느니 「저의 잘못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다시 죄를 범했다.」느니 하는 말들은 신하된 자에게는 모두 큰 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쓰여진 말이 지나치다는 바깥 공론도 있다.’고 하면서, 성항·정석과 상의하여 정지시켰다. 이에 익렴과 동명이 경시당하고 멸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윤집 등도 모두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익렴·동명은 출사하도록 하고 윤집 등은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때 와서 선도에 대한 논이 세 번째 제기된 것이다.
정계주(鄭繼胄)를 장령으로, 이합(李柙)을 정언으로, 홍처윤(洪處尹)을 사간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계주는 사람됨이 용렬했는데 당시 무리들에게 아첨하여 좋은 벼슬을 얻었으므로, 여론이 비웃었다.
8월 11일 기해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겠다고 청하였다. 도제조 정태화와 부제조 이응시 등이 의관 정후계(鄭後啓) 등과 함께 나아가 진맥하였다. 태화가 이어 권도를 따르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12일 경자
우박이 내렸다.
8월 13일 신축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여, 본직과 겸직 및 지문 제술의 일을 사양하고 이어 돌아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치 않고 의금부의 겸직만 체임하였다. 이때 시열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권도를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으므로 소를 올리고 돌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이에 교리 이익(李翊)이, ‘상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초기에 조정을 지키던 큰 인물로 하여금 조정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계시니, 이는 나라 사람들이 알까 두려운 일입니다.’ 하는 뜻으로 상소하여 말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8월 14일 임인
이유태(李惟泰)를 집의로, 이경휘(李慶徽)를 사인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성으로, 윤휴를 지평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응교로, 이완(李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6일 갑진
상이 예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편찮으신 지 4개월이나 되었는데, 약방 및 원임 대신·삼공·삼사·종반·기타 백관들이 뜰에 가득히 나와 매일 세 번씩 호소하였고, 예문관 봉교 이숙(李䎘) 등과 감찰 정보한(鄭輔漢) 등 13인도 모두 상소하여 권도를 따를 것을 청했으며, 대신들이 다시 두 자전에게 아뢰어 더욱 도타이 권할 것을 청하였다. 이렇게 무릇 10여 일을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신하들이 두 자전께 아뢰어, 두 자전께서 친히 가시어 상에게 권도를 따르도록 권할 것을 청하니, 두 자전이 이르기를,
"지금 막 와서 권하고 있다. 오늘이야 설마 불응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이조 판서 송준길이 뵙기를 청하자, 상이 여차에서 인견하였다. 태화가 앞으로 나아가 성상의 건강을 묻자, 상이 이르기를,
"내 병은 조금 덜한 것 같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어느 증세가 덜해진 것 같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침과 오싹오싹한 증세가 모두 덜한 것 같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만, 신들이 보기에는 현저한 효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신하들의 청을 따르지 않으시니, 모두가 민망스럽고 절박한 심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하교를 받들어 이미 경들의 청을 따르고 있다."
하고는, 이어 통곡해 마지않았다. 여러 신료들도 모두 흐느꼈다.
8월 18일 병오
이때 내구마(內廐馬)에게 먹이는 풀을 외사복(外司僕)에서 바쳤는데, 윤창형(尹昌亨)·이후광(李后光)이 내승(內乘)이 되어 그 풀의 3분의 1을 덜어내어 쌀과 바꾸어 사사로이 썼으므로, 이 말이 파다하게 전파되었다. 이에 헌부가, 내사복시와 외사복시의 담당 관리와 마초(馬草)를 바친 사람을 조사하여 캐묻고 또 문서를 고찰하여 그들의 정상을 밝혀내고는, 이들을 잡아들여 국문한 다음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창형 등이 그 일은 이미 30년 전부터 흘러내려온 그릇된 전례라고 대답하면서, 자기들이 그 그릇된 전례를 답습하고 즉시 고치지 않았던 죄를 승복하였다. 상이 전해 온 그릇된 전례를 그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지우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방면할 것을 명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남은 마초를 쌀로 바꾸어 3개월 간 과외로 쓴 것이 56석이나 됩니다. 이렇게 지나친 짓을 하였으니, 장 육십 도 일년(杖六十徒一年)에 고신(告身)을 모조리 빼앗는 것으로 조율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속전만 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여러 날 간하였으나 파직만 시켰다.
8월 19일 정미
강원도 간성(杆城)에 연일 큰 비가 내렸는데, 인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자도 여러 명이었다.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
8월 22일 경술
약방이 의관을 거느리고 들어와 진찰하였다. 도제도 정태화가, 전 주부 박유연(朴由淵), 전 참봉 정유악(鄭維岳)이 모두 의술을 안다 하여, 그들에게 군직(軍職)을 주어 약을 논의하는 데 동참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 유연은 외지에 있었고 유악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상이 유악에게만 직을 주도록 허락하였다.
8월 23일 신해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이시방(李時昉)을 판윤으로 삼았다.
8월 24일 임자
헌부가, 상이 편찮은 지 한 달이 넘도록 시름시름 낫지 않고 있으니 의술이 뛰어난 사람을 제때에 소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 약방이 아뢴 대로 박유연을 불러오게 하고 신응제(愼應悌)와 같은 사람들도 모두 불러들여 약을 논의하는 데 참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술이 출중하지 않으면 불러온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였다. 네 차례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유연은 고 승지 박지계(朴知誡)의 아들이고 응제는 영남 청도(淸道) 사람인데, 다 의술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8월 25일 계축
지평 윤휴가 장단(長湍)에서 병이 있다고 소장을 올리고 오지 않으니, 상이 조리한 후 올라오라고 하였다.
8월 27일 을묘
양사가 유후성(柳後聖)과 조징규(趙徵奎)를 사형에 처하자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강원도 양양부(襄陽府) 지방에 큰 비로 산이 무너져 7인이 깔려 죽었는데,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
8월 28일 병진
약방 도제도 정태화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몸이 편찮으신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여러 의원들이 약을 논의하였으나 아직도 현저한 효과가 없으니, 약방에서 봉직하고 있는 신들로서는 걱정스럽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듣건대, 유후성 등의 사건에 관한 합계가 어제 이미 정지되었다고 하니, 지금 그들을 정배지로 보내는 일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 두 의원이 성상의 증후를 익히 알아 다른 의원들에 비할 바가 아니니, 성상의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그냥 궐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게 하면 약을 논의하는 즈음에 편리한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여러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소서."
하였다. 두 번째 아뢰니 허락하였다. 원임 대신 이경석·이시백, 좌상 심지원 등은 모두 아뢰기를,
"유후성·조징규는 범한 죄가 극히 중하니 대계(臺啓)가 이미 멎었으면 즉시 정배지로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후성 등은 성상께서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을 익히 알고 있으니, 만약 이 두 사람에게 문의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다면 그지없이 다행한 일입니다. 오늘의 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이 두 의원을 정배지로 늦게 보내느냐 빨리 보내느냐는 따질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송시열·송준길에게 다시 의논해 보라고 하였다. 준길의 논의도 같자, 상이 따랐다.
8월 29일 정사
의금부가 아뢰기를,
"유후성 등이 대기하고 있을 곳에 대해서 대신들은 대궐 부근이어야 한다고 헌의하고, 송준길은 성 밖으로 해야 한다고 헌의하였는데, 어느 곳으로 분부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대신의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8월 30일 무오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후성의 죄에 관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선왕께서 승하하신 일은 실로 천고에 없던 이변인데, 후성이 수의(首醫)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후성이 죽음을 면하고 옥에서 나온다면 성중이나 외지나 할 것 없이 그 소식을 듣고는 틀림없이 깜짝 놀라고 분개할 것입니다. 오늘 결정할 문제는 그를 죽여야 할 것인가 죽이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논하는 것일 뿐이지, 그로 하여금 약을 논의하게 하는 문제는 따질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멀리 퍼지기 전에 빨리 다시 가두고 그의 죄를 바로잡으소서. 그러면 왕법(王法)이 밝아지고 인심이 기뻐할 것이며 만백성이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후성의 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선왕의 뜻부터 이해하고 나서 법에 의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만약 가귀(可貴)의 잘못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일이 어찌 있었겠는가. 후성 등에게 죽을 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세가 이러하므로 선왕의 뜻을 어기기 어렵다."
하였다. 시열이 처음에는 병을 이유로 헌의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소를 올렸는데, 당시 후성의 의술이 여러 의원 중에서 최고여서 신효(神效)를 보는 때가 많았다. 그 때문에 상의 병이 깊은 이때 여러 대신들이 모두 그를 머물러두어 약 논의에 참여하게 하도록 청했던 것인데, 시열 혼자만 의견이 이러하였으니 역시 인정에 가깝지 않은 사람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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