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기미
우박이 내렸다.
정언 이동명(李東溟)이, ‘윤선도가 함사(緘辭)에서 장황하게 자기 잘못을 둘러 대면서 심지어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등의 말까지 써가면서 언관(言官)을 무함하였다. 공의란 지엄한 것인데 그가 어떻게 감히 그리도 방자할 수 있느냐.’ 하고 나서, 또 아뢰기를,
"산을 살피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 애당초 가지도 않았고,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는 논의가 터졌을 때도 보통으로 보아넘겨 태연히 꿈쩍도 않으면서, 치사(致仕)한 대부(大夫)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참람하게도 성인(聖人)의 지위에 비기고 옛날의 사부(師傅)였음을 제기하였으니, 이는 더욱더 망령되고 외람된 일입니다."
하고, 이어 그에게 많은 무함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혐하였다. 장령 정계주(鄭繼胄), 지평 김우석(金禹錫),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은 모두 송시열이 소장에서 중대한 문제를 경솔하게 정론한 잘못을 인용 지적했다 하여 체직을 청했으며, 사간 홍처윤, 정언 이합, 헌납 김익렴, 대사간 이경억 등도 정론한 잘못과 윤선도에게 배척당한 것이 동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다. 상이 그들에게 모두 사직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선도의 추고 함사(推考緘辭)를 살펴보건대 그 내용에,
"신이 병으로 서울 근교에 있었는데 서울과는 단숨에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5월 4일 국상 소식을 듣고 성중으로 달려 들어가 성복(成服)한 후 묵은 병이 재발하여 즉시 시골로 돌아왔습니다. 18일 산을 살펴 보라는 명을 듣고는 아픔을 참고 다시 들어와 25일 산을 살피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성왕의 의관(衣冠)을 간직해 두는 것은 바로 국가의 마지막 보내는 막대한 예절인 것이며, 또한 종묘의 영원한 혈식(血食)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만약 진선 진미한 곳을 찾지 못한다면 그 어찌 신하로서 전하께 충성을 바치고 선왕의 은덕을 보답하는 정성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도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여러 곳을 찾아보았지만 마음에 든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수원의 산은 눈에 번쩍 뜨여 상격(上格)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용대 풍수(龍大風水)가 영릉(英陵)에 비해 조금 못하지만 진정 천리를 가도 그러한 곳은 없고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비록 도선(道詵)이나 무학(無學)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다른 말이 없을 곳이었습니다. 이는 신의 소견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윤강·이원진 및 다른 여러 지관들도 전혀 하자를 잡지 않고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연발하며 모두가 나라를 위해 축하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이 나라를 위해 쓰여지기를 바란 마음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것인데, 이의(異義)가 뜻 밖에 생겨 모든 죄를 신에게만 돌려 죽이고자 하는 말들이 날마다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마침 신의 병이 다시 위독해진 바람에 정신이 어두워 소장을 올리지 못하고, 병조에다 정장(呈狀)하여 신의 직명을 갈아주시도록 아뢰어 줄 것을 청하고는 병든 몸을 이끌고 교외로 나왔습니다. 이때는 바로 인산을 수원으로 이미 정하고 여러 도감(都監)의 일도 모두 시작되어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니, 그 누가 이의가 다시 생겨 이렇게 시끄러움을 일으킬 줄을 미처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7월 3일 한밤중에 건원릉(健元陵)의 서동(西洞)과 불암산(佛巖山) 밑 화접동(花蝶洞)을 가 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신이 그때는 병 중이어서 몸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 장계를 갖추어 산 문제를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물론 상규(常規)가 아닌 것은 알았지만, 당시 신의 생각에는, ‘일이 이루어져 버리고 나면 간할 수도 없는 것이고 매사는 처음 시작을 잘해야 하며, 무슨 동기가 보일 때는 일찌감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고 여겨, 절박한 심정에서 꼭 아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피곤하여 제때에 미치지 못할 것 같고 일마저 급박하여 상소문으로 쓸 수도 없었으므로, 부득이 그 내용을 대략 방백(方伯)에게 언급하여 전달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대체로 긴급을 요하는 일이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아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자질구레하게 꼭 속례(俗例)에 구애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의(義)가 있는 곳에 따라 예(禮)는 때로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은 이 일에 있어 지금까지도 신이 충성을 다한 것으로만 알고 있지 무례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 일은 처음에 이상진(李尙眞)이 자기 혈성에 못이겨 상규에 구애받지 않고 사사로이 국릉(國陵) 자리를 보았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 혼자만 교만 불경한 것이 된단 말입니까?
5일에 또 건원릉 내에서 새로 찾아낸 두 산등성이를 가서 살피라는 특명을 받고는 한밤중에 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다음날 두 번 세 번 올라가서 세밀하게 살펴보고 규례에 따라 산론(山論)을 초기하여 올렸는데,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왔으나 유계(兪棨)만은 오지 않았습니다. 3일에 신이 병으로 가지 못한 것과 5일에 유계가 오지 않은 것이 무엇이 다르기에 신 혼자만 교만 불경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산을 보는 데 있어서는 처음 보는 것은 가볍고 두 번째 볼 때가 중요한 것입니다. 신이 병으로 건원릉에 가지 못한 것은 사실 처음 볼 때이고, 병이 조금 나아 건원릉에 간 것은 두 번째 볼 때였습니다. 그때 이미 윤강(尹綱) 및 여러 지관들과 함께 가서 살펴 보고 재혈하는 데까지 동참했으니, 이는 끝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비방을 피하여 교외로 나간 때가 산릉을 이미 수원으로 정한 뒤였는데 산릉도 정하기 전에 이미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고, 신이 병이 나서 가지 못했을 때는 건원릉 서동과 화접동을 처음 볼 때였는데 두 번째 보는 날 태연히 물러가 앉아 있었다고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억울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믿는 데가 있어 끝까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법을 적용하려 하니, 이는 너무나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우는 일입니다."
하였다. 사헌부가, 장 팔십도(杖八十度)로 수속(收贖)하고 탈 고신 삼등(奪告身三等)해야 한다고 아뢰니, 상이 이미 파직했다는 이유로 용서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선도가 수원 산을 천 년에 한 번이나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고, 윤강(尹絳)·이원진(李元鎭)·이최만(李最晩) 및 다른 여러 지관들이 한 사람도 하자를 잡지 않고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연발하면서 모두 크게 길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은 수원이 경기의 중진(重鎭)이어서 옮기기가 어렵다는 것만 알고 만세를 두고 성왕의 의관을 간직할 일은 생각지 않았으니, 그들의 불충한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9월 2일 경신
약방 도제조 정태화 등이 어의 양제신(梁濟臣) 등을 거느리고 들어가 증후를 살피고는, 물러나와 여러 의원들과 약을 논의하였다.
산릉에 부역 나온 승군(僧軍)들이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가버리고 영승(領僧)만이 남아 있었는데, 도감 당상 김남중(金南重) 등이 장계로 아뢰었다. 이를 경도감(京都監)에 계하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각도에 분부하여 그들의 부모와 겨레붙이들을 엄히 가두어두고 그들을 체포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소서."
하고, 총호사(摠護使)는 아뢰기를,
"어제 많은 승군들이 와서 추위와 괴로움을 호소하였습니다. 다시 부역하도록 이미 타일렀으니 우선 며칠 두고 보았다가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 자는 가려내어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장서서 선동한 자를 엄중히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도감에서 적발하여 아뢰라."
하였다.
9월 3일 신유
장령 윤비경도 중대한 논계를 경솔하게 정지한 잘못을 들어 체차해 주라고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제학 유계, 응교 정만화, 부응교 심세정, 교리 성이성, 수찬 목내선, 부수찬 김우형 등이 상소하기를,
"양사(兩司)의 많은 관원들이 인피하였는데 이를 본관이 처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후성 등의 정론(停論) 건에 대해 신들도 ‘삼가 알았다.’고 썼으니, 어떻게 감히 편안한 마음으로 처치를 하겠습니까. 신들의 직을 갈아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교리 남구만이, 후성 등을 그대로 두고 그들로 하여금 약을 논의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으로 상소하여 그것이 잘못임을 극구 아뢰기를,
"후성이 전일에 지은 죄가 그 얼마나 큰 죄이며 오늘 논의하는 일은 그 또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겨우 극형을 면한 자를 금새 약을 논의하는 반열에 넣어, 백성이 국법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기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워할 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임금과 어버이는 똑같은 것입니다. 충신이 임금 섬기는 일이나 효자가 어버이 섬기는 일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효자가 자기 어버이를 위하여 의원을 맞이해 왔을 때, 만약 그 의원이 처방을 잘못 내려 결국 큰 일을 당했다고 한다면, 그의 의술이 비록 화타(華陀)나 편작(扁鵲)과 같다고 할지라도 차마 자기 집에 다시 데리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고 즉시 후성 등을 정배지로 보내도록 명하였다. 정원이, 정배지로 보내라는 명을 거두고 그대로 약을 논의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좌참찬 송시열이 상차하여, 자기가 제술한 선왕의 묘지문을 올리고 이어 아뢰기를,
"신이 기억하기로는 금년 봄에 대행 대왕께서, ‘호남 지방의 산군(山郡)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일의 여부에 있어서는 가을에 가서 논의하여 결정해야겠다.’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일이 만약 행하여도 될 일이라면 비록 산릉 전이라도 서둘러 사리에 맞도록 처리하여 분명한 지휘가 있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고 또 제술한 지문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통곡이 나왔다. 호남 대동 건은 만약 경의 말이 아니었던들 내 어찌 알았겠는가.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9월 4일 임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남구만의 상소문을 보고 너무나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성상께서 시름시름 아프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온 나라 신민들이 그 누가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후성 등에게 안율(按律)하자는 논계가 이미 정지되었으므로, 약을 논의하는 데 혹 작은 도움이라도 있다면 정배지로 조금 빨리 보내고 더디 보내고는 그리 크게 구애받을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기에 잠시 그냥 두자고 신이 처음 청하였고, 여러 대신들의 헌의(獻議)까지 거쳤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의 마음이 서로 크게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물의가 이렇게까지 일어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효자가 차마 다시 데리고 올 수 없는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논의하는 자리에 끼이게 한 것은 그 모두가 신의 죄입니다. 또 생각건대, 요즈음 드시는 약은 다른 의원들과는 소견을 조금 달리한 처방입니다. 이후로 증세에 따라 재료를 가감하는 일을 결코 다른 의원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이 지경에 다다른 이상 다른 문제는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신의 본직과 내의 제조(內醫提調)의 직 모두를 갈아내시어 공론에 답하시고 후성 등을 그냥 두자는 청을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병 때문에 후성 등을 그냥 둔다는 것은 사실 마음에 불안하다. 그리고 경이 어찌하여 사면해 달라는 말을 하는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태화가 좌상 심지원과 세 번이나 아뢰어, 후성을 그냥 둘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5일 계해
상이 여차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판윤 이시방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의 차자 내용을 보면 전남도 산군(山郡)의 대동법 시행 문제에 관하여 선왕조에서, 가을에 논의하여 결정하자는 하교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 일의 수말(首末)을 나는 모르겠다."
하니, 태화가 답하기를,
"호남 연해의 27개 읍의 백성들 부역이 가장 고되었기 때문에 대동법을 우선적으로 시행하였는데, 산군에 있어서는 원하지 않는 자도 많았고 조정의 논의도 일치되지 않아서 일시에 시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후 산군 26개 읍 중에서 운봉(雲峰)·임실(任實)·정읍(井邑)·금구(金溝)·태인(泰仁) 5개 읍은 대동에 들기를 원하였으므로 지금 허락하는 것이 옳겠으나, 마침 때가 때라서 다른 일에 겨를이 없기 때문에 미처 결정을 못했던 것입니다.
바깥 논의들은, 자원한 5개 읍은 우선 시행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산군들은 백성들이 원치 않으므로 시행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혹자는, 국가의 근본 목적이 부역을 균일하게 하자는 데 있는데, 종전에 부역이 수월하던 곳이 지금 와서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백성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도리로 보아 통틀어 똑같이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하는데, 일 체계로 말하면 산군 26개 읍도 똑같이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그 편리 여부를 본도에 물어본 다음에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6일 갑자
이때 양사의 많은 관원들이 모두 인피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므로 옥당이 마땅히 처치해야 되는데, 부제학 유계(兪棨) 이하 모두가 인혐하며 소를 올리고는 패초하여도 나오지 않았다. 이날 부응교 심세정(沈世鼎), 부수찬 김우형(金于亨)이 차자를 올려, 양사를 모두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정계주·김우석·이합·김익렴·조수익·윤비경 모두가 패초해도 나오지 않았고, 정언 이동명, 대사간 이경억, 사간 홍처윤도 다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9월 7일 을축
장령 정계주·윤비경, 대사헌 조수익, 지평 김우석, 헌납 김익렴, 정언 이합도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9월 8일 병인
수찬 조윤석(趙胤錫)이 상차하여 양사를 모두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송준길을 명하여 좌참찬 송시열이 지어 올린 묘지문을 써 올리게 하였다.
9월 10일 무진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간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강호(姜鎬)를 헌납으로, 임한백(任翰伯)·허목(許穆)을 장령으로, 이무(李堥)를 지평으로, 윤지미(尹趾美)·오시수(吳始壽)를 정언으로, 정재해(鄭載海)를 주서로 삼았다.
상이 여차에 나아가 영의정 정태화, 이조 판서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태화가, 상의 병 증세의 차도에 대하여 물으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낫더니 그 후로는 별로 이렇다할 효험이 없다."
하였다. 준길이, 지문을 써 올리라는 명령에 대하여 사양의 뜻을 표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이 짓고 이판이 쓰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듣자니 이판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하였다. 준길이 이어 아뢰기를,
"사업(司業)은 계해년에 별도로 두었던 관직으로 선우협(鮮于浹)이 일찍이 단망(單望)으로 제수를 받았었습니다. 지금 다시 차출하려고 하는데 삼망(三望)을 채울 대상이 없습니다. 혹은 단망이나 두 사람을 추천하였으면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숭의전(崇義殿)은 왕씨(王氏) 봉사를 위하여 설치한 곳으로 수(守)·령(令)·감(監) 등의 직을 두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 해 동안 그 직을 맡았다면 당연히 승급 제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마땅히 연수를 정하여 일정한 규정을 두되, 15년을 한정하여 승급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준길이 병을 이유로 직을 사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3일 신미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만웅(李萬雄)을 추고하였다. 처음에 호조가 동래부에 공문을 보내 도감에서 쓸 주홍(朱紅)을 왜관에서 무역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왜관에 비축된 것이 없었으므로 통역관을 시켜 관수(館守)에게 그 사실을 말하여 대마도에 알리게 했더니, 그 섬에서 재빠르게 심처(深處)에 연락하여 주홍 19근을 가져왔다. 관수 등이 말하기를, ‘도주의 뜻은 이웃나라 사이에 사고팔고 한다는 것은 자못 성의가 없는 일이니 그냥 진상했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만웅이 통역관을 시켜 타이르고 다투고 하다가 결국 세은(稅銀) 2백 9냥으로 값을 매겨 주기로 결정을 보고 비국에 보고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당초에 호조가 비록 무역을 하라고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것을 구하려고 한다는 뜻을 관수에게 말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심처를 통하여 구하게 하였고 또 결국 진상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게 하였으니, 일 처리에 있어 전도의 실수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만웅과 해당 역관을 모두 추고하여 후일의 징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9월 14일 임신
비변사가 아뢰기를,
"함경도 전역이 다른 도에 비하여 기근이 갑절이나 더하고 북도는 더욱 심하여 경원(慶源)·회령(會寧) 두 곳에 시장을 열더라도 앞으로 접응(接應)할 길이 없어, 신들이 항상 걱정하면서도 어떻게 선처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함경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치계한 것을 보니, 변방 주민들이 모두 북경(北京)에다 그 사실을 알려 잠시 시장을 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데, 그들의 정상이 애처롭습니다. 북도의 사세가 과연 절박하고 다급하기는 하나, 고부사(告訃使)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칙사도 나오지 않았는데, 우선 우리 나라 폐단만을 없애기 위하여 그렇게 자문(咨文)을 보낸다는 것이 일로 보아 난처할 뿐 아니라, 만에 하나 들어주지 않는다면 손상된 바가 더욱 클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자문을 보내지 말고 해조로 하여금 시장을 열어 접응할 수 있는 방법을 별도로 강구한 다음, 본도에 분부하여 뜻하지 않게 서로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8일 병자
모금(毛衾)을 재궁(梓宮)에 올리고 전(奠)을 드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재궁의 추위를 막을 제반 도구를 싸맬 때 별도의 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의거할 만한 예문이 없어 총호사에게 문의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그에 관한 것이 예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가칠(加漆)할 때 하던 예대로 전은 드리지 말고 사유만 고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칠 때와는 다른 일인데 마치고 난 후 전이 없으면 예의 뜻으로 보아 흠이 될 것 같다."
하였다. 이에 전을 드렸으나 상은 병 때문에 약방·정원·사헌부·사간원의 누차 아룀으로 인하여 곡위(哭位)에 나가지 않았다.
당초 효종이 막 즉위했을 때부터, 시기를 기다려 치욕을 씻으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송시열이 알아차리고 비밀리에 봉사(封事)를 올려 그 뜻을 찬양하였으므로, 효종이 드디어 시열에게 큰 일을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의지하여 심려(心膂)로 삼았었다. 그러나 시열은 사실 비루하고 용렬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위인이었다. 시열이 이때 상의 명에 의하여 효종의 묘지문을 찬술하였는데, 상이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등에게 명하여 묘지문에 표지를 붙일 곳을 골라 정하여 들여오게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말하기를, ‘비풍(匪風)·하천(下泉)019) 두 시의 주된 뜻은 오늘의 상황 하에서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고 하면서 삭제하자고 하니, 상이 사관을 시켜 시열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는데, 시열이 삭제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그러나 시열은 말썽이 있을까 봐서 위축되고 구애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부드러운 표현에 힘쓰고 사실을 곧이곧대로 쓰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상차하기를,
"신이 지난번 우연한 기회에 좌참찬 송시열이 찬술한 지문의 초고본을 보았는데, 그 주된 뜻은 비록 체계에 손상됨이 없었으나 내용을 꾸미는 과정에 있어 혹 통쾌한 맛이 부족한 점이 한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도감에 내려진 원본을 다시 보니 초고본에 비하여 삭제하고 고친 곳이 많았는데, 삭제하거나 고친 부분이 바로 그 말 뜻이 다소 능각(稜角)을 드러냈던 부분이었으므로, 신은 더욱 그지없이 개탄스러웠습니다. 아, 우리 선왕의 깊으신 사랑과 훌륭한 덕은 물론 문자로는 비슷하게나마 그려낼 수 없겠습니다만, 오랑캐에게 포위당하고 욕을 당했던 그 일에 있어서는 왕위에 11년 동안 계시면서 사실 단 하루도 성상의 마음에 잊으신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큰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중도에 돌아가셨으니, 이 어찌 이 땅에 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늘에 사무치고 땅에 사무친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여전히 땅에 떨어지지 않고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우리 모든 신민이 오늘날 마땅히 마음을 다 써야 할 곳이 바로 그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위축된 바 있어 대서 특필은 못하더라도 어떻게 지나친 의구심을 품어 깎고 또 깎아 결국 그 실적으로 하여금 영원히 묻혀버리고 말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아, 뜻을 펴지 못한 채 부질없는 글월만 후세에 남겨두는 것도 충신 지사가 눈물을 금치 못할 일인데, 지금 그 글월까지 아울러 묻혀버린다면 후세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믿어 덕을 고증할 것입니까? 크고도 먼 법도와 계책이 갈수록 점점 희미하여 후세에 전해진 것이 없다면, 그 또 어찌 천만세에 끝없이 남을 한이 아니겠습니까. 화환을 염려하는 도리로서는 당연히 삼가야 할 것이지만, 써두기만 하고 등초는 하지 말며 각자만 끝내고 인출은 하지 말아 여러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한다면 별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 통쾌한 말들을 다시 다 쓰더라도 안 될 것이 없을 터인데, 하물며 그 주된 뜻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삭제하여 될 일입니까."
하였다. 차자가 들어가자, 대신들이 고칠 것이 없다고 하여, 그 논의는 시행되지 않고 말았다.
9월 19일 정축
박증휘(朴增輝)를 정언으로,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임한백(任翰伯)을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이민발(李敏發)을 전남우수사로 삼았다.
9월 21일 기묘
지평 윤휴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고신(告身)을 봉하여 정원에 되돌려보냈다.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고 그가 바친 고신을 돌려주었다.
9월 23일 신사
약방이 여차에 들어가 증후를 살폈다. 상이 도제조 정태화에게 이르기를,
"북도로 정배된 죄인의 수가 매우 많은데, 금년 농사가 흉작이 되었으니 틀림없이 살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들을 다른 도로 옮겨 정배하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주객(主客) 모두가 곤경을 헤맬 것은 틀림없습니다. 상께서 그토록 배려해 주시니 정배된 죄인을 모두 다른 배소로 옮기는 것이 매우 편이하고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전가 죄인(全家罪人)을 변방 지대로 들여보낸 것은 원래 조종조에서 변방을 채우자는 뜻이었으니, 그 부류들은 거론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자, 상이, 도년(徒年) 이하와 멀리 귀양보낼 사람만 배소를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배소를 옮긴 자가 1백 13명이었고, 역적과 연좌된 자는 그 축에 끼이지 않았다.
9월 24일 임오
대사간 정지화, 사간 심세정, 헌납 강호, 정언 윤지미·박증휘가 아뢰기를,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모질고 사나와졌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황주 판관(黃州判官) 조세환(趙世煥)이 부임 초기에 관첩(官帖)을 위조한 간악한 아전을 다스리다가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의 자녀와 겨레붙이들이, 세환이 복심(覆審)하기 위하여 참(站)을 나갈 때를 틈타 느닷없이 앞에 나타나 끌어내렸는데, 아랫사람들이 달려가서 구원했기에 겨우 면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지난해 평양에서 있었던 변과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서 명확히 조사해 죄를 다스려서 일벌 백계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바라건대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법에 의하여 중하게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세환이 형을 쓰다가 죽인 그 아전이 참으로 위조를 범한 간악한 아전이었는지의 여부도 똑같이 조사하여 아뢰라."
하였다.
부제학 유계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성인이 문왕(文王)·무왕(武王)의 훌륭한 덕을 칭송하면서 기껏해야 ‘계지(繼志)’ ‘술사(述事)’만 말하였고, 증자(曾子)가 맹장자(孟莊子)의 효도를 칭찬하면서도 역시 ‘아버지가 부리던 신하를 바꾸지 않고, 아버지가 하던 정책을 바꾸지 않은 것은 제마다 하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훌륭한 자손이 대를 이어가는 도리가 그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 선왕이 어진 사람을 널리 구하여 전하를 돕게 하셨고 전하께서는 최선을 다하여 그들을 존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꼭 억지로 직무를 맡길 것이 아니라 충분히 대우하고 융숭한 예로 대하여 나라의 본보기가 되게 하고, 경악(經幄)을 드나들면서 오로지 계옥(啓沃)만을 맡게 하여 정사가 있으면 자문을 구하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동안 나온 산야(山野)의 선비들에 있어서는, 직무에 매여 있기를 바라지 않는 이는 역시 그 방법으로 대우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울에 있게 하면, 아마 훌륭한 인재들이 여유있는 마음으로 한 데 모여 물러가려고 시끄럼을 피우지 않아 새 정치를 맑고 밝게 펼치는 데 크게 힘입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그런데 차자 내의 누누한 내용들이 모두 송시열·송준길을 과대 찬양하여 상의 뜻을 그들 쪽으로 굳히려는 것들이었고, 이른바 산야의 선비라는 자들도 이유태(李惟泰)·이상(李翔)·송기후(宋基厚) 무리들을 가리킨 것이었다.
9월 25일 계미
지의금 허적(許積), 동지의금 신익전(申翊全)을 체임하고 추고하였다. 그때 민련(閔堜)·이후광(李后光)을 여러 차례 형추(刑推)하였으나 모두 승복을 않으므로 상이, 형추를 그만두고 조율(照律)하라고 명하였는데, 지사 허적과 동지사 신익전이, 승복도 받기 전에 지레 법률부터 정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사유를 갖추어 아뢰고 그 사건을 종결지으려고 하였고, 판의금 이시방(李時昉)은 비율(比律)020) 을 적용하려고 하면서 형벌을 너무 심하게 했다고 하여, 서로의 논의가 맞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소를 올려 서로를 배척하고 모두 인피하고 들어가 사직하고는 누차 패초해도 나오지 않았으며, 북도에 정배된 죄인을 배소를 옮기는 건에 있어서도 제 시기에 논의하여 아뢰지 않았다. 이에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이 아뢰기를,
"북도에 정배된 죄인들을 다른 도로 옮겨 정배하라신 명령은 그들이 기아에 허덕이다가 사망의 위기까지 닥칠까 봐서 특별히 배려하신 것이니, 당연히 즉시 받들어 시행하여 성상의 살리기 좋아하시는 은덕을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금부의 당상들이 동료와의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소를 올리고 누차 패초까지 하였으나,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사체로 보아 매우 부당합니다. 바라건대 허적·신익전을 둘 다 체차한 다음 추고하고 당일로 그 대신자를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빨리 임무를 수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후 대사간 정지화 등이 또 시방 등을 논의 하면서 ‘서로 다투어 변론하다가 인피하고 들어갔으니, 사체에 손상될 뿐만 아니라 직무를 폐기하는 것도 생각지 않아 금오(金吾)와 경조(京兆)에 【시방이 당시 판윤(判尹)이었다.】 많은 임무가 적체되게 하였고, 호조(戶曹)와 【허적이 당시 판서(判書)였다.】 연접 도감(延接都監)은 칙사 패문(牌文)이 들어온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모여앉아 요리하는 일이 없으니, 자못 공사를 먼저하고 사사 문제는 뒤로 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면서 모두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미 추고했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다가 연거푸 여러 날 아뢰자, 따랐다.
이시매(李時楳)를 동지의금으로, 임의백(任義伯)을 형조 참의로, 이은상(李殷相)을 우부승지로, 홍위(洪葳)를 동부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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