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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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무자

우박이 쏟아지고 천둥이 쳤다.

 

홍명하(洪命夏)를 다시 기용하여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이때 청나라에서 조제사(吊祭使)와 책봉사(冊封使)가 나왔는데 원접사로 뽑아 보낼 만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명하가 약방 제조로서 병간호를 신중이 하지 않았다 하여 관작을 삭탈당한 상태였는데, 비변사가 명하를 다시 기용하여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유후성·조징규 등을 정배지로 보낼 것을 명하였다.

 

10월 4일 신묘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서 나타나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병과 같았고 꼬리의 깊이는 5, 6척이었으며 색깔은 붉었고 빛이 땅에까지 비치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전 찬선 권시를 부르라고 명하고, 또 하교하여, 오늘 보고 싶으니 들어오라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 이판 송준길, 좌참찬 송시열에게 전유하였다. 시열이 병을 핑계하고 명을 받지 않자, 상이 다시 사관을 보내 마음 놓고 조섭을 잘 하라고 유시하였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 등을 인견하였는데, 권시·송준길도 다 와서 입시하였다. 상이 태화와 함께 왜인들과의 환미(換米) 건과, 호남 지방의 대동법 시행 건을 논의하였다.

 

10월 5일 임진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삼았다.

 

좌참찬 송시열이 상차하기를,
"삼가 상신(相臣)의 장본(狀本)을 【청국에 시호(諡號)를 청한 장본.】  보았더니, 그들이 들어주기를 주선하는 것이 마치 대행 대왕이 참으로 수명(受命)을 한 것처럼 하고 있는데, 인조 대왕 때는 어떻게 하였는지 신이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그들이 준 두 글자를 헌문 열무(憲文烈武) 위에다 얹었다면 이는 그때 신하들의 죄이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로부터 좋은 시호를 받더라도 영광될 게 없고 나쁜 시호를 받았더라도 역시 부질없는 짓인데, 지금 무엇이 괴로워 그렇게까지 힘을 들여 주선한단 말입니까? 이미 지난 일이니 말할 게 없다 치더라도 놔둬버리고 쓰지 않으면 물론 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쓰지 않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면 그 역시 미안한 일입니다. 대체로 열성조의 휘호를 열 글자로 맞추는 것이 예인데, 지금 올린 것이 ‘선문(宣文)’을 포함한 그 이하뿐이고 보면 여덟 글자 밖에 되지 않아 그 위에 있어야 할 두 글자가 까닭없이 빠져버린 꼴이 되므로, 어떻게 보면 마치 무엇인가를 기다려 채워넣으려는 듯한 인상을 주어 추하기 이루 말할 수 없고, 그렇지 않으면 또 마치 무슨 폄손(貶損)이라도 한 것 같은 인상입니다. 대행 대왕의 훌륭하신 덕과 지극하신 선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사실을 기록하는 데 있어 그렇게 구차하고 소략해서야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두서너 대신 및 예관과 빈틈없게 상의하여 부족한 점을 보충하소서."
하였는데, 그 상소문을 보류해 두고 내리지 않았다.

 

10월 6일 계사

상이 영의정 정태화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의 차자 내용을 경들도 보았는가? 그리고 인조조에서는 저들이 정한 두 글자는 시호에 쓰지 않았던가?"
하니, 태화가, 쓰지 않았다고 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두 글자를 여기에서 더 쓰면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모두 그 두 글자를 중국에다 청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그 전례대로 그들에게 청한 것일 따름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시호를 얹는다는 것은 옳은 일인지, 신으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였고, 좌상 심지원이 아뢰기를,
"저들이 정한 두 글자는 쓰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여기에서 얹는다면 그것은 미안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내시를 시켜 시열의 차자를 내다 보이게 하였다. 태화 등이 다 보고나서 아뢰기를,
"차자 내용대로 시행해서는 안됩니다. 조종조에서는 중국이 정한 두 글자를 써서 열 글자로 맞추었던 것인데, 지금도 중국을 섬기던 전례에 따라 비록 저들에게 청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쓰지 않으면 그뿐이지 지금 쓰지 않는 글자 수까지 계산하여 여기에서 더 올린다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리고 인조조에서 행하지 않던 일인데 지금 어떻게 선대왕에게 추상(追上)할 수 있겠습니까. 선왕의 성스러운 덕이 그 두 글자를 쓰고 안 쓰고에 따라 무슨 손익이 있겠습니까."
하니, 예조 판서 윤강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두 글자를 더 쓰게 되면 일이 매우 구차하고 소략하게 됩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인조 조에서 했던 것처럼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10월 7일 갑오

정태화가 약방 도제조로서 여차에 들어가 증세의 차도를 살폈다. 의관이 나가자 상이 작은 쪽지를 꺼내 태화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시호 문제에 있어서의 미안한 점을 좌참찬에게 말하였더니 그렇게 써 보내왔는데, 그의 뜻은 매우 중대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보고 나서 아뢰기를,
"지금은 비록 하지 않더라도 후일에 소신의 말을 잊지 마소서."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여덟 글자는 아래서 올리는 시호이고 두 글자는 중국이 내려준 시호인데, 저들 나라야 논외로 치더라도 위아래의 곡절은 그러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말은 후일을 기다리자는 뜻인 것이다."
하였다. 그날 밤 상이 손수 편지를 써서 직접 봉하고 ‘계(啓)’자를 찍은 다음 사관을 보내 비밀리에 송시열에게 물었는데, 시열 역시 직접 봉하여 올렸기 때문에 승지·사관이 모두 보지 못해 그 글에 무슨 말들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10월 8일 을미

밤에 천둥과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 내렸다. 정원이,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우박이 곡식을 상했으며, 별의 운행이 질서를 잃고, 폐장(閉藏)의 달에 천둥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 쏟아졌다 하여, 더욱 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하늘의 뜻에 답하고 대신·유신을 인견하여 재이를 멎게 할 대책을 강구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였다.

 

10월 10일 정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상차하여, 자기들을 파직함으로써 하늘의 꾸지람에 답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 모두가 내가 부덕하여 하늘의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이지 왜 경들 때문이겠는가. 더욱 힘써 덕을 쌓아 나의 과실을 도와달라."

 

10월 11일 무술

우승지 이정영(李正英)을 명하여, 전옥(典獄)의 부정 유무를 적발하고 죄가 경미한 죄수는 석방하라고 하였다.

 

이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고, 이어 천둥 번개의 이변으로 인해 더욱 덕을 쌓기에 힘쓸 것을 청하고는, 또 아뢰기를,
"금년 농사는 장마와 바람이 마디마디 해를 끼쳐 큰 흉년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을·겨울철의 시장 물가가 기근이 심하던 봄·여름철과 다를 바 없어 앞으로 백성들의 일이 참으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경기의 백성들은 현재도 산릉의 큰 역사에 힘을 다 쓰고 있는데 게다가 또 사신이 올 때에 여러 책임까지 맡게 되어, 그들의 역역(力役)이 다른 도에 비하여 갑절 정도나 더 무거울 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국가 뿌리에 해당하는 이 고장에 사리로 보아서도 당연히 그들의 공부(貢賦)를 충분히 견감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며, 경비를 따질 것 없이 그들 힘에 다소 여유를 주는 일이라면 다른 도보다도 앞서 혜택을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경기 관내의 봄가을 대동미와 세태(稅太)를 적당히 견감하여 적은 혜택이나마 베푸소서."
하니, 상이, 논의하여 처리하겠다고 답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천둥 번개의 재이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마음을 일깨우고 닦고 살펴 새로운 천명을 맞이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씀씀이를 절제있게 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요역은 가볍게 과하고 부세는 작게 받는 것이 바로 공자·맹자의 교훈으로서, 진실로 그렇게만 한다면 백성들이 왜 보전을 못할 것이며 나라가 왜 다스려지지 않을 것입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죽은 해골을 상대로 베를 징수하고 젖먹이 아이를 장정으로 충원시킨다면 말만으로도 참혹한 일이며 그를 금지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관리들이 삼가 봉행을 않고 조정에서도 그를 바로잡지 못했기에, 대행 대왕께서 매우 측은히 여기시고 염려하셔서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 재처를 하도록 하셨으나 미처 완료를 못 보았었는데, 지금 어떻게 해결이 되었습니까? 그리고 비록 계속할 방법은 못 된다고 할지라도 흉년을 당하여 그 한 해의 징책(徵責)만 면제하여 주어도 그 혜택 역시 큰 것입니다. 외방 여러 영문에 포목(布木)이 비록 충만하게 쌓여 있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만약 내지의 각 아문이 저축분을 덜어 내어 그곳에다 보충해 준다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비국에 명하시어 방법을 강구하여 서둘러 행하도록 하신다면 선왕조로서도 신의를 잃는 일이 없는 것이 되고, 오늘에 있어서는 선왕의 뜻을 잘 계승하는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또 해서(海西)도 수응에 시달리기는 관서(關西)와 대략 비슷하여 종전부터 조정에서도 다른 곳과는 달리 진념(軫念)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섯 말 받는 것을 때로는 적당히 감하여주기도 하였는데, 지금 흉년에다 또 참역(站役)까지 맡게 되었으니 다소 돌보아주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기축년에 시행했던 그대로 적당히 한두 말을 감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하고 깨우쳐준 내용을 감히 가슴에 담지 않겠는가. 나머지 일들도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리라."
하고,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군정(軍丁)으로서 죽고 없는 자와 아약(兒弱)에게 베를 징수하는 폐단에 대하여 대행 대왕께서 꼭 변통을 해보려고 하셨기에, 이미 각도로 하여금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외방으로부터 문서가 도래하기 시작하고 있으니, 신들이 그 조사가 끝나는 대로 아뢰어 처리하겠습니다. 해서에 쌀 다섯 말씩 징수하는 건은 대신이 그렇게까지 차자를 올렸으니, 비록 한두 말을 감량하더라도 동이 날 정도는 아닐 것이므로, 해조로 하여금 차자 내용에 의하여 적당히 감하여 받도록 하소서."
하니, 호조가 아뢰기를,
"재해를 심하게 당한 읍은 매결마다 두 말씩 감하고 그 차등 읍은 각기 한 말씩 감하여, 조정에서 진휼하는 뜻을 보이라고 두 도의 감사에게 분부하시기 바랍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10월 13일 경자

부제학 유계 등이 역시 천둥친 일로 상차하여, 산릉 행차의 명령을 이행하지 말 것을 청하고 또 언제나 성덕(聖德)을 삼가 자신을 닦고 반성하는 내용에 미진한 점이 없도록 할 것을 아뢰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 내용이 모두가 경계하고 깨우쳐준 약석(藥石)이었다. 길이 생각지 않을까보냐. 오늘의 망극한 슬픔은 오직 수가(隨駕)에 있는 것이다. 지금 모시고 따라가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의 슬픔을 이루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뒤에 병이 더 더치더라도 그것은 지금 말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10월 14일 신축

약방이, 상의 원기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하여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왕조 때 사헌부가,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의 시장(柴場)·어전(漁箭)이 혹은 관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문서 작성이 되었다 하고, 혹은 왕으로부터 직접 떼어 받았다 하면서 법규 이외의 짓을 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모두를 일체 혁파할 것을 아뢰어 청하여 윤허까지 받았다. 그런데, 각도 각읍이 법에 따라 조사하여 아뢰지 않아 아직도 넓은 땅을 점유하고 남의 것까지 침범하는 폐단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도 인평위(寅平尉) 집에서 교하(交河) 지방에다 시장을 정하고 떼어 받은 것이라 하면서 넓혀가는 짓이 너무 심하였고, 사대부 분묘가 있는 산도 가리지 않고 나무를 모조리 베어갔다. 사헌부가 아뢰어 그 시장을 혁파할 것을 청했었는데, 현감 안정욱(安廷煜)이 덮어두고 보고하지 않아 남잡한 폐단이 있게 하였으므로, 그를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담당자로 하여금 명확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사간원·사헌부가 모두 천둥 번개의 이변으로 차자를 올려 경계의 뜻을 아뢰고, 또 산릉에 종행한다는 명령을 이행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 내용에 대해 내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수가를 그만둘 수 없다는 뜻은 옥당에 내린 비답에 이미 다 말하였다."

 

10월 15일 임인

상이 여차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원평 부원군 원두표, 판의금 이시방, 좌참찬 송시열, 이조 판서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인산 시기가 다가와 남은 날짜가 얼마 안되는데 상상의 체후가 쾌히 회복될 것인지 기필할 수가 없으니, 산릉에 종행하시는 일은 결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고, 지원·두표·시열·준길 등도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종행하다간 반드시 병이 더칠 염려가 있다고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별로 실덕하신 일이 없는데도 지난날 동뢰(冬雷)의 이변이 너무나 놀랍고 참담하였으므로 신은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금년은 이렇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묘당에서 모든 방법을 빈틈없이 강구한 것 같습니다만,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결정 못할 일에 있어서는 성상께서 참작하여 처결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시열은 아뢰기를,
"어공(御供)의 물건을 줄이는 것은 신하로서 감히 논의할 바가 아니니 성상께서 생각하셔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상(供上)과 제향(祭享)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를 구별하여 아뢰면 당연히 조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군병(軍兵)들의 고통을 생각하여 어린애와 도망자, 사망자에 대해 징수하는 베를 모두 면제하도록 하였는데, 일이 가닥이 잡히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선왕의 마음처럼 마음을 가지시고 제때에 구획 처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없게 하소서. 다만 각 아문에 저축된 것이 매우 부족하니, 만약 내수사에 저장된 것을 약간 떼내어 그것으로 감해진 수를 충당한다면, 백성들이 크게 기뻐할 것이고 성상의 덕화도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성상의 특별 하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10월 17일 갑진

사헌부가, 인평위의 시장 혁파 건을 연거푸 아뢰니, 상이 호조에 명하여 시장에 관한 문서를 조사해 보라고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금년 4월에 사헌부가, 각도로 하여금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의 어전 시장을 조사하여 아뢰고 이어 그를 혁파하도록 할 것을 청한 계사를 올린 일이 있었으나, 각도의 조사 보고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교하 시장은 갑오년 5월 내수사에 올려 재가를 받고 떼어받은 것으로, 이조의 반첩(反貼)021)   공문이 6월에 본 아문에 도착하였고 본 아문에서는 본도에다 공문을 발송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장령 윤비경, 지평 이무, 대사헌 채유후가, 모두 사실을 잘못 알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정언 윤지미도 채유후와 서로 피해야 할 혐의가 있어서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상이 이들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10월 18일 을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0월 20일 정미

밤에 유성이 천선성(天船星) 위에서 나와 규성(奎星) 아래로 들어갔다.

 

고부사(告訃使)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연경에서 돌아왔다. 유성이 청대하여 입시하고 아뢰기를,
"신이 여러 달 사행 길에서 이제야 돌아왔는데 성상을 한 번 뵙고 싶어 감히 청대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만리 먼 길을 다녀오면서 병이나 없었던가?"
하자, 대답하기를,
"소신은 겨우 쓰러지기는 면하였으나 강을 건넌 뒤에 비로소 성상의 체후가 편찮으심을 듣고 걱정이 가이 없었는데, 지금 안색을 뵈오니 옛날보다는 훨씬 야위었습니다. 앞으로 발인할 때 결코 뒤따라가셔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병은 이제 이미 나았다."
하였다. 이어 그쪽 사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일 올렸던 별단(別單) 속에 이미 다 언급하였거니와 그들 정령(政令)의 득실에 관한 것은 모두 가져온 통보(通報) 속에 있습니다. 대체로 그들이 백성을 잘 돌보고 정사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빈틈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자기 생업을 즐기고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곤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양서(兩西)는 흉년이 작년보다 더하므로 진휼의 정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가서 묘당과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강백년(姜栢年)이, 산릉 종행을 멈출 것을 청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 21일 무신

김만기(金萬基)를 지평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사업으로 삼았다.

 

대신 이경석 등이 빈청에 나아가 산릉 종행을 멈출 것을 두 번이나 아뢰었고, 양사도 합동으로 산릉 종행의 명을 이행하지 말도록 아뢰어 청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0월 22일 기유

대신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양사와 합동으로 하루에 세 번을 아뢰었고, 홍문관도 연속 4일을 상차하여 종행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다가 그후 자전의 하교에 의하여 드디어 종행을 멈추기로 하였다.

 

10월 24일 신해

김만기를 부수찬으로, 목내선을 지평으로 삼았다.

 

밤에 천둥 번개가 쳤다.

 

10월 26일 계축

짙은 안개가 끼었다가 사시(巳時)가 되어서는 천둥이 일고 우박이 쏟아졌다.

 

장령 허목이 고양(高陽)에 가서 병을 이유로 소장을 올렸는데, 돌아오라는 유지가 오래도록 오지 않자, 그는 이미 체직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말을 타고서 성 아래에 왔다가 직명이 아직 그대로 있음을 비로소 알고는 드디어 인피하기를
"신 같은 사람이야 오거나 가거나 매우 미미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당초 비답을 내리신 후 거의 반달이 되도록 전유의 성지를 끝내 보지 못하였습니다. 임금 명령에 태만하고 조정을 멸시하는 길을 신이 처음으로 터놓은 격이오니, 신을 체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사헌부가 처치하여 출시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10월 27일 갑인

진시(辰時)에 빈전(殯殿)에다 계빈전(啓殯奠)을 올리고, 사시에 찬궁(欑宮)을 열고, 신시에 조전(祖奠)을 올렸는데, 상이 아침부터 곡위에 나와 온종일 곡성이 그치질 않았다. 초저녁에 정원이 전명중관(傳命中官)을 청하여 구전으로 아뢰기를,
"상께서 큰 병을 앓고나서 원기가 회복되기도 전에 새벽부터 자리에 나와 곡하시어 하루 종일 그치지 않으셨고, 이제 이미 날이 어두웠는데도 아직까지 여차로 돌아가지 않으시니 병이 더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바라건대 억지로라도 지극한 심정을 억제하시고 잠시 여차로 돌아가소서."
하고, 네 차례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고, 약방도 네 차례나 아뢰었지만 역시 따르지 않았다.

 

10월 28일 을묘

대행 대왕의 발인을 행하였다. 인시에 대내에서 죽력(竹瀝)과 강즙(薑汁)을 가져와 약방으로 들여보냈다. 이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和門) 밖에 있다가 중사를 통하여 자전이 너무 슬퍼하다가 기절한 것을 알고 아뢰기를,
"발인 시각이 임박하였으나 자전께서 편찮으시어 병환이 이와 같다 하니, 시각을 잠시 물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조금 후 지원이 또 아뢰기를,
"자전의 체후가 그러하오니 교외까지의 거둥은 결코 해서 안 됩니다. 뭇 논의들은 모두 전하께서도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모름지기 일찍 하교를 하셔야 거행하도록 분부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증후가 잠시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 시각을 종전대로 하라."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다 모시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은 소여를 타고 인화문으로 나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위(侍衛)하는 신하들도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인정문 밖에 이르러 상은 소여에서 내려 연(輦)으로 바꿔 탔고 백관들은 모두 걸어서 뒤를 따랐다. 흥인문을 나와 동쪽 관왕묘 뒤 노제소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다 봉안하고,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로 들어갔다. 의정부·충훈부가 노제를 모시고 난 후 대여가 떠났다. 상이 봉사위(奉辭位)에 나가아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는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뛰었고, 백관들도 모두 통곡하였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10월 29일 병진

영릉(寧陵)에 장례를 모셨다. 진시에 현궁을 내렸는데, 상은 희정당 앞뜰에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고 오시에 상이 연을 타고 흥인문을 나와 관왕묘 뒤의 막차로 들어가서 반우(返虞)를 기다렸다. 조금 후 우주(虞主)가 이르자 상이 막차에서 나와 자리에 나아가서 우주를 맞으면서 곡하고 절하였는데, 시위한 백관들도 모두 곡하였다. 우주가 지나간 후 상은 연을 타고 뒤를 따라 홍화문을 거쳐 들어와 문정전(文政殿)에 우주를 봉안하고, 상이 친히 초우제를 모셨다.

 

10월 30일 정사

그날 밤 4경에 상이 친히 경모전(敬慕殿)에서 재우제(再虞祭)를 모셨는데, 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상이 술잔을 다 드리고는 문을 나와 기둥 밖의 판위(板位)에 서 있다가 기후가 약간 불평하여 재전(齋殿)으로 옮기었다. 승지가, 아헌관 이하로 하여금 그대로 예를 마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비록 예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겨우 반우하여 보통 때와는 다르므로 혼전(魂殿)에 문안을 드리고 싶은데 어떠한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기왕 예문에도 없는 일이고 또 곧 친히 우제를 모셔야 할 것이므로, 신들로서는 감히 억견으로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정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예이니 내가 대내에서 그렇게 행하련다."
하자, 정원이 또 아뢰기를,
"예문에 기록되지 않은 일은 마땅히 대신·유신에게 문의하여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바빠서 미처 문의하여 행할 겨를이 없고 이 뒤 행제 때는 조곡(朝哭)의 예와 같이 문안을 하겠으니, 대신·유신에게 문의하여 정하라."
하였다. 예조가 대신·유신과 논의하였는데, 영돈녕 이경석, 좌상 심지원, 영중추 원두표, 우상 정유성, 이조 판서 송준길은 모두 고례에도 없고 시제(時制)에도 없는 일을 정에 치우쳐 처음 행할 수는 없다고 하였고, 영상 정태화는 아뢰기를,
"종묘 친제 때 전알외 예를 먼저 행하는 것처럼, 지금 친히 재전에 나가는 날 먼저 전알하고 곡읍을 하더라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좌참찬 송시열은 아뢰기를,
"조석으로 곡하는 것은 비록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말하더라도 장례 후에는 곡을 꼭 하지 않아야 한다고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행례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소상(小祥) 이전에는 당연히 장례 이전과 같이 행하여야 합니다. 다만 명칭을 문안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듯이 하라.’ 하기는 하였지만 예서에 이미 기록된 곳이 없고, 또 죽은 이를 보내면서 꼭 살아 있는 이에게 하는 식으로 한다는 혐의도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오례의》를 상고하여 정문(情文)에 다 미진함이 없도록 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영상·좌참찬의 논의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상이 밤이면 연이어 제사를 모시느라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기동하였으므로, 약방 도제조인 정태화가 상의 병이 더칠까 염려되어 전명중관을 통하여 구전으로 대왕 대비·왕대비 두 자전께 아뢰어, 이후로는 제례를 모두 섭행(攝行)하게 하도록 더욱 더 권유해 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중관을 시켜 태화에게 유시하기를,
"자전이 원래 일을 주달하는 곳도 아니고, 또 나와 맞서서 의견을 고집할 수도 있는데 왜 번번이 번거롭게 자전께 여쭈는가? 이후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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