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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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무오

오준(吳竣)을 내의 제조(內醫提調)로, 정태제(鄭泰齊)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태제의 처는 서인(庶人) 강(姜)022)  의 동생이었다. 태제가 처음에는 그 때문에 훨훨 날았고 뒤에는 또 그 때문에 폐척이 되었는데, 이때 와서 송시열 등이 강력히 추켜세워 폐척되어 있던 중 다시 기용되어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 뒤에 관직에 있으면서 욕심이 많고 방종하며, 처를 데려가 곁 읍에 두고 법을 범해 가면서 왕래하였다는 죄로 유배되었다가 폐기당한 채 죽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발인 때 외지에 있는 조관(朝官)들도 틀림없이 올라온 자들이 있었을 것이니, 승지는 듣고 본 대로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전직 조관들은 거의 모두가 올라왔고 선비들도 온 자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대행 대왕의 지극한 사랑과 후한 은택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전 부제학 윤문거(尹文擧) 역시 올라왔었습니다. 그 사람은 선왕조 시절부터 우대받던 사람으로 누차 소명을 내렸지만 병이 있어 오지 못했었는데, 지금 병든 몸을 이끌고 상경하여 여사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신화(新化)의 날을 당하여 어진 선비들을 예우하는 일이 가장 급무이니,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 머물러 있도록 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권시를 대우하는 예로 대우하라 명하고, 또 사관을 보내 졸곡(卒哭) 후에 서로 보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개유하였다. 그리고 이조로 하여금 올라온 사람들을 들은 대로 적어 아뢰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청대하니, 상이 여차에서 인견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외지에서 올라온 조관들 중에 눈에 띄게 그럴만한 자가 있으면 꼭 머물러 있도록 권유하여 신정(新政)을 돕게 하자고 아뢰고 싶었는데, 성상께서 먼저 그에 관한 하교를 정원에 내리시어 신으로서는 너무나 감탄하였습니다. 윤문거는 바로 윤황(尹煌)의 아들입니다. 황이 인조조 때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문거 형제들이 벼슬하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 아비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것입니다. 문거가 평소 공보(公輔)감이라는 인망이 있어 선왕조에서도 누차 소명을 내린바 있지만 지금 사관까지 보내 유지를 내리고 머물러 있기를 권하였으니, 그로서는 참으로 남다른 예우를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에게 묵은 병이 있어 직임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만, 만약 그를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면 논의를 서로 통할 수 있어 나랏일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윤선거(尹宣擧)도 일찍이 올라왔었으나 감히 벼슬을 받지 못하고 경기 관내로 나가 머물고 있는데, 만약 금새 시골로 가버리면 그 어찌 신정의 흠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밖에 또 누가 있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윤원거(尹元擧)는 바로 문거의 종형인데, 그 사람도 조행(操行)이 취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상(李翔)도 좋은 선비이고, 영남 사람 신석번(申碩蕃)도 쓸 만한 인물입니다. 이유태(李惟泰)는 현재 성 밖에 있는데 유지를 내려 들어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송시열은 그 형세가 선왕조 시절부터 신과는 조금 다른 바가 있습니다. 신으로 말하면 일생을 병에 찌들리고 뜻마저 낮으므로 가거나 오거나 출처에 원래 크게 관계될 것이 없으나, 시열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기대가 매우 큰 사람입니다. 선왕께서 어찰(御札)로 그를 불렀는데 시열이 거기에 감격하여 즉시 소명에 응하기는 하였으나 자기의 꿋꿋한 절개를 굳게 지켰고, 심지어 어느 공사(公事)간 문자에도 쓰지 않으려는 것이 있었는데 선왕께서도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열의 뜻을 살펴보면 오래 있지 않으려는 눈치가 꽤 보입니다. 왕위를 이어받으신 초기에 그가 물러가도록 허락하신다면 사방이 듣고 어찌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뜻있는 선비들도 틀림없이 해체될 것입니다.
선왕께서 언젠가 이르시기를, ‘만약 30만 정병(精兵)만 있다면 대의(大義)를 천하에 펼 수가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임금이 어렵고 험난한 일을 고루 겪은 뒤에 중흥의 업을 이룩하였는데, 내가 옛날 연경·심양 사이에서 그 곤욕을 당했던 것은 혹시 하늘이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겠는가?’ 하셨습니다. 대체 우리 나라 형세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임금이 진실로 자신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현자를 임용하고, 능력자를 부리어 자강지책을 충분히 다하여서 힘을 축적하고 때를 기다린다면 하늘이 혹 회화(懷禍)의 뜻을 가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신이 지금 산릉에 가 보았더니, 인혼(引魂)·이안(移安)·환안(還安) 등의 제사를 모시고 있었는데, 너무 터무니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 제사는 한 산등성이에다 두 능을 쓸 때 먼저 있던 능에다 고하기 위하여 모시는 제사로, 원래 《오례의》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혼’ 등의 말도 어쩌면 불가(佛家)·도가(道家)의 말 같기도 하니, 그 잘못된 전례는 혁파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리고 전일에 수의(收議)한 일에 대해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목릉(穆陵)을 이장할 때 인조 대왕이 승지를 보내 문안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기축년 국장 때도 선왕께서 역시 그렇게 하였으며, 지금 또 이 일이 있는 것입니다. 혼전(魂殿)에 문안하는 것 역시 그 선례를 따르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인정이나 사리로 보아 해로울 것은 없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유성이 새벽녘에 북쪽에서 나와 동북간으로 들어갔다.

 

11월 3일 경신

오정위를 승지로, 권시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11월 4일 신유

이조가, 발인 때 올라온 전직 조관들을 써서 아뢰니, 상이, 좌참찬 송시열, 이조 판서 송준길에게 물어 학문이나 행검이 독특한 자를 발췌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부호군 윤문거가 상소하여, 돌아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여, 전직 조관들을 물어 아뢰라고 한 명령에 대하여 사의를 표했는데 그 대략에,
"신이 여러 달 병을 앓아 정신이 흐리기 때문에 비록 그들의 얼굴을 보더라도 누가 누구인지 구별을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들의 현부를 가려 추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일로 인해 공론에 죄를 얻어 선대왕의 해와 달처럼 밝으신 감식을 손상시키고 죽어도 속죄하기 어려운 죄를 지었는데, 지금 어떻게 감히 앞일을 징계하지도 않고 뒷일도 삼가지 않은 채 다시금 고의로 자꾸 법을 범할 것입니까. 규정 밖의 은명(恩命)을 감히 감당할 수 없고, 전후 지은 죄도 죽어 남음이 있습니다. 빨리 신의 직을 갈아내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려 조정 사체를 무게 있게 만드소서."
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치 않으면서, 병이 조금 나으면 들어오라고 유시하였다.
살펴보건대, 비상(非常)한 직책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에게 맡기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이 전조를 맡았을 때 현우(賢愚)를 묻지도 않고 오직 자기의 당류만 존중하고 키웠는데, 욕심 많고 야비하고 의리 없는 송기후(宋基厚)·이상(李翔) 같은 무리들을 함부로 자의(諮議)에 추천하고 금방 대각에다 올려놓았으니, 못난 망아지에게 비단옷을 입힌 것으로도 그가 저지른 참람한 짓을 비유할 수 없다. 홍여하가 상소 내용에다 언급했던 것이 지나친 일이 아니었는데, 그는 뉘우치거나 깨닫는 빛이 없이, 물어 아뢰라고 한 이날을 당하여 도리어 공론에 죄를 얻어 선왕의 밝으신 식감을 상하였다는 말로 마치 자기가 자기 탓을 하는 양하였으나, 사실은 분하고 화가 나서 한 말인 것이다.

 

11월 7일 갑자

조수익을 대사헌으로, 이만영(李晩榮)을 집의로, 이수인(李壽仁)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8일 을축

청국이 사신을 보내 위문하고 제사를 드렸다. 상이 최복(衰服) 차림으로 소연(素輦)을 타고 모화관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칙사가 도착하자 현관(玄冠)·흑포(黑袍) 차림으로 칙서를 맞이하고, 궐 안으로 돌아와 예를 마친 다음 소복으로 갈아입고 여차로 돌아갔다.

 

11월 10일 정묘

부제학 유계, 수찬 조윤석 등이 청대하니, 상이 여차에서 인견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졸곡이 내일인데 청대를 하여 미안합니다만 시기를 놓칠까 염려스러워 아뢰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고 싶은 일은 무슨 일인가?"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송준길이 자기 부모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하여 소를 올리고 돌아갈 것을 바라고 있는데, 혹시 허락을 받으면 내일 떠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한 번 가고 나면 다시 오게 하기는 사실 어려울 것이고 또 돌아온다고 하여도 많은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여염의 사람들도 그를 결코 보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는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아직도 그를 붙잡자고 하는 말이 없습니다. 나이 70세가 임박한 사람이 상차(喪次)에서 곡을 하면 틀림없이 손상을 받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왜 그를 지성으로 일깨워 붙잡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듣자니, 그 사람이 만약 물러가면 송시열도 분황(焚黃)을 이유로 휴가를 얻어 내려가려고 합니다. 처음으로 경연을 열면서 그 두 사람이 없으면 보도에 적합한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신은 걱정됩니다."
하였다. 조윤석은 아뢰기를,
"이 신정 초기에 그 사람을 돌아가도록 허락해서는 결코 아니됩니다."
하고, 승지 오정위는 아뢰기를,
"성상께서 그 사람을 붙잡아두면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대신들도 그를 잡아두자고 청하려 하는데, 길을 뜬 뒤에 시끄러운 일이 있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윤문거는 스스로가 과거를 통하여 출신한 사람으로서 현자를 대우하는 융숭한 예우는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미 그에게 군직(軍職)을 주었으니, 만약 보통의 녹봉을 주면 틀림없이 편안히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대로 하겠다."
하였다.

 

11월 13일 경오

윤강을 대사헌으로, 정만화를 집의로, 정계주·정박을 장령으로, 홍주삼(洪柱三)·민주면(閔周冕)을 지평으로, 홍명하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호위청 군관을 혁파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줄일 것을 청하자, 여러 대신들과 널리 논의하도록 명하였는데, 모두가 혁파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15일 임신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를 사은 정사로, 정지화를 부사로, 이시술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11월 16일 계유

전라도 옥구(沃溝)에서 어부 8명이 익사하였다. 감사 김시진(金始辰)이 이를 치계하여 알리니,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7일 갑술

이수인을 집의로, 조수익을 예조 참판으로, 이경억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11월 21일 무인

부제학 유계가 상소하여, 《논어(論語)》를 중지하고 《중용(中庸)》부터 강할 것을 청하니, 대신과 송시열·송준길에게 논의해 보라고 명하였다. 시열은 어정쩡한 태도였고 준길의 뜻은 유계와 같았는데 상이 그쪽을 따랐다. 내수사 무명베 20동(同)을 병조에 내려 아약(兒弱)에게서 징수할 베를 보충하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군오(軍伍)의 빈 인원을 채워넣기가 너무 어려워서 아약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는데, 조정에서 그를 금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상이 불쌍히 여겨 그러한 명령을 한 것이다.

 

11월 22일 기묘

정원이 아뢰기를,
"내일 주강(晝講)을 열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선왕조에서는 경연을 여는 날이면 유현(儒賢)이 한 명씩 돌아가며 입시하여 고문에 대비하였으니, 매우 좋은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대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3일 경진

상이 야대청(夜對廳)에 나아가 주강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옛날 인조조 때 신이 사관에 있으면서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인조께서 부제학 정경세(鄭經世)에게 묻기를,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해야 할 것인가?’ 하니, 경세가 대답하기를, ‘임금이 존경해야 할 분은 모두 휘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인조께서 경연의 자리에선 선현(先賢)의 이름은 언제나 휘하셨습니다."
하고, 송준길은 아뢰기를,
"선왕조에서 경연을 열었을 때 신이 입시하여 이에 대한 의의를 아뢰었더니 선왕께서도 선현의 이름을 휘하셨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유현(儒賢)이라는 두 글자는 소신이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본직을 띠고 있노라니 마음이 항상 불안합니다. 이는 성상께서 늙은 신을 머물러 있게 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이 대단히 고된 일은 아니니 잠시 동안 노력하면서 좌우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삼가 바깥 말들을 들어보니, 대궐 안에 많은 재변이 있어 계속 거처하여서는 안 된다고들 하는데, 오늘 입시한 신하들에게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궐내의 일을 외인이 알 바는 아니지만 만약 대단히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거처를 옮기더라도 해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왕 대비전에 재변이 있는데, 그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대신으로서는 가볍게 동요되는 말을 해서는 안 되겠으나, 후원에 벼락이 떨어지고 궁인이 머리털을 자른 일은 모두 염려가 안 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대신들에게 문의해 보소서."
하니, 상이, 대신 및 송시열에게 문의할 것을 명하였다. 대신들은 모두 태화의 의견과 같았고, 시열은 병으로 정신이 혼미하여 아뢸 수가 없다고 사양하였다.

 

산릉 의궤 도감(山陵儀軌都監)이, 품팔이 역군들의 품삵을 각도에서 징수하여, 병조·호조가 꾸어다 쓴 쌀과 베를 상환할 것을 청하였는데, 병조의 군포(軍布)는 3백 73동 45필이고 호조의 쌀은 5천 20섬이라고 하였다.

 

11월 26일 계미

고부사(告訃使) 정유성에게 노비 7명과 밭 30결을 하사하고 그의 아들 한 명을 관직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부사 유심(柳淰)과 서장관 정익에게도 자급을 올려주고 노비와 전결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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