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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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정해

영의정 정태화,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청대하니, 상이 여차에서 인견하였다. 두 상신이, 거처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극력 말하고 아뢰기를,
"유신(儒臣)들이 번번이 진정하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요사스런 기운이 덕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 당연한 정론이기는 하지만 지금 전하께서는 위로 두 자전을 모시고 계시니, 결코 신중만 기하여서는 아니됩니다. 속히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태학생 윤항(尹抗) 등이, 고 재신(宰臣)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5차나 올렸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일 무자

밤 1경에 하늘에 불빛같은 기운이 있었다.

 

12월 3일 기축

공상지(供上紙) 50권을 호조에 내려 경덕궁 수리에 보태 쓰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장령 이후(李垕), 지평 민광소(閔光熽)가 아뢰기를,
"대각 석상에서 이미 논핵을 주장해 놓고 물러나와서는 남에게 떠넘겨 논핵을 당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반복무상한 장사치 태도인 것입니다. 지난번 김익렴(金益廉)이 장령으로 있으면서 산릉 택일이 5개월 이내에 하도록 정해진 법제를 어겼다 하여 예조 당상을 추고하도록 청하고는, 뒤돌아서서 판서 윤강의 아들 지미(趾美)에게 서신을 보내, 동료 황준구가 발론을 하기에 자기는 그에 동조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 사실은 비록 익렴을 구제하기 위하여 변명하고 있는 지미의 입장으로서도 전혀 없었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이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개하자, 익렴이 여러 명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준구에게 면박을 주어 자기가 앞에 했던 말이 사실인 것처럼 꾸미려고 했는데, 사람으로서 어쩌면 그렇게까지 파렴치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어느 한 유명 재신이 간사한 그를 탄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말하자, 익렴이 하루에 세 차례나 준구에게 서한을 보내 자기를 위하여 발명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니, 그의 처음부터 끝까지 간사한 짓을 한 꼴은 사람으로 하여금 차마 똑바로 볼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김익렴을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황준구도 추고를 청한 논에 동참해 놓고 곧바로 윤강을 찾아보았으니, 역시 참외밭에서 신을 신은 혐의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를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에 장령 정박(鄭樸)이 맨 처음 그 논의를 꺼냈는데 장령 정계주(鄭繼胄)가, 준구는 익렴처럼 잘못하지 않았는데 똑같은 벌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인피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후 등이 두 쪽 다 체직을 청하면서 이처럼 등수를 나누어 논핵한 것이다.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여 귀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스한 말로 개유하고 허락치 않았다. 옥당이 상차하여, 시열을 만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역시 관대하게 답하였다.

 

12월 4일 경인

밤에 달무리가 지고 동쪽에는 불빛같은 기운이 있었다.

 

12월 5일 신묘

밤에 유성이 북하성(北河星) 위에서 나타나 오거성(五車星) 아래로 사라졌는데, 붉은 빛이 땅에까지 비치었다.

 

상이 여차에 나아가 이조 판서 송준길, 장악정(掌樂正) 이유태를 인견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상소를 가지고 들어오라는 하교를 지난번에 받았습니다만 음관(蔭官)이 어떻게 감히 경연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상소라는 것 역시 옛사람들이 한 말을 답습한 것에 불과한 내용으로서 선왕조 때 올리려다가 미처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가져오지 않았으니 물러가서 올리겠습니다."
하니,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장악정이 매양 어버이 곁을 떠나는 것을 걱정하고 있는데, 여름철에 그의 아우를 경기 근읍에다 바꾸어 제수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만약 그렇게 하면 편리하겠는가?"
하자, 준길이 답하기를,
"바깥 논의들은, 그의 형이 현재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으로 있으니 그를 만약 6품으로 올려 경기 근읍에다 제수하면 좋을 것 같다고들 하고 있으나, 신은 감히 아뢰지 못했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그렇게까지 하교하시니 더욱 황공하옵고 또 국가 체통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또 나라 다스리는 방법은 백성의 수를 반드시 알아야 할 수 있습니다만, 여씨(呂氏)가 만든 향약(鄕約)을 주자(朱子)가 손질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는 선정신 이이(李珥)가 역시 그것을 논하였는데, 진실로 그것만 잘 밝힌다면 호패(號牌)를 꼭 시행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국 강병을 꾀하는 것은 비록 패도(霸道)이고 우리 나라가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왕도(王道)이지만, 역시 그 향약을 근간으로 하여 우리에게 알맞게 손질을 해야 합니다. 신의 전번의 상소도 바로 그러한 일들을 다룬 것입니다. 돌아가 병든 어미를 뵈온 후 곧 써서 올리겠습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유태를 붙잡아두고 싶어 그렇게 특별한 거조를 취하시는데, 유태가 어떻게 물러가겠습니까. 나랏일이 어려운 이때 당연히 함께 협력하여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송시열이 지금 내려가려고 하고 있어 그 말을 듣고 사방에서는 혹시 성상께서 그에 대한 예우가 그전 같지 않은가 의심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이 지나친 것인지는 모르나 지금을 두고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하고, 이어 전형(銓衡)의 직을 갈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윤문거가 병으로 공무를 수행할 수는 없지만 선왕조의 사랑과 예우를 받던 사람이라 하여 헌장(憲長)의 후보로 추천한 것이고, 박장원은 초계(抄啓)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예조 참판의 후보로 추천하였던 것인데, 가선(嘉善)이 모자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 다 자급은 이미 승진되었으나, 다만 관동 지방의 기근이 금년에는 더욱 더 심하므로 감사를 바꾼다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니 체직하지 말고 그냥 가자(加資)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신 들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후 대신들과 유계가 공동으로 찬성하여 결국 준길의 논의대로 하였다.
신은 삼가 살피건대, 윤문거가 비록 조용히 물러나 있는 사람으로 자처하고는 있으나, 다리 병으로 걷지 못하고 있으니 그에게 무슨 계책이 있다면 문의하면 될 것인데, 그를 헌장으로 추천하였으니 의의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박장원을 발탁하여 참판으로 제수했다가 금방 지방의 감사에 그대로 했으니, 관동의 구임(舊任)으로서 남궁(南宮)023)  의 새 자급을 띠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준길이 한 마디 하자 대신들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 시기의 일들이 대체로 이 모양이었다.

 

부제학 유계 등이 상차하여, 태학관 유생 윤항(尹抗) 등의 상소를 내려 대신 및 유신에게 두루 문의한 다음 이어 성혼의 문묘 종사를 빨리 실현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두 현인의 사실에 관하여 태학관 유생들이 빠짐없이 말하였는데, 그대들이 또 차자를 올린 것은 내가 그 사실을 모를까봐서 그런 것인가? 선왕조에서도 어렵게 생각하던 일을 종이 한 장에 몇 구절 적혀 있는 그대들의 말로 내 마음이 감동될 것 같은가?"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젊어서부터 예서(禮書)를 읽었지만 어리석어 변통할 줄을 모릅니다. 일찍이 정자(程子)가 말한 것을 보았는데 그가 이르기를,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있기 때문에 예문에서, 죽은 3일 후에 염(斂)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조간자(趙簡子)024)  는 10일 후에 깨나기도 하였으므로 3일이 못되어 염을 한다면 모두 죽인 것이나 같은 이치가 있다.’ 하였습니다. 그 이치를 신하나 자식이 꼭 알고 있어야 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임금인 경우에는 3일에 소렴을 하고 5일만에 대렴을 하여 사대부들과는 예가 또 다릅니다. 대체로 기한이 촉박한 것을 늦춰잡아서도 안 되지만 기한이 여유가 있는데 너무 촉박하게 서둘러, 살아나기를 바라는 신자들의 심정을 상하게 해서도 결코 안 됩니다. 신은 평소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5월 5일 중사(中使)가 내지(內旨)를 전하면서 날씨가 무더워 뜻 밖의 걱정되는 일이 있을 염려도 있으므로 내일 소렴을 했으면 한다고 했을 때, 신이 대답하기를, ‘예가 이미 그렇지 않고 재궁(梓宮)도 여유가 있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6일에 와서 일이 끝나갈 무렵에도 신이 또 예문 소렴 조에 ‘끈을 완전히 매버리지 아니하며 얼굴을 덮지 않는 것은 효자가 아직도 행여 다시 살아날까를 바라고 또 수시로 그 얼굴을 보고싶어서이다.’고 한 말을 신하로서 차마 어길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신은 또 여러 신하들 뜻을 어겨가면서까지 꼭 예서대로 해야 한다고 고집했던 것입니다.
겨우 곡반(哭班)에 나왔을 때, 대신 이하 모두가 결국 우려를 나타내는 내지가 있었다 하여 금방 변통하였는데, 그때 신 역시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문대로 하고 싶었던 것은, 언젠가 《예경(禮經)》을 보았더니, 임금 초상에 쓰이는 의복이 무려 1백 28벌이나 든다고 하였기에 임금의 관곽(棺槨)은 필시 여유가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고, 우리 나라는 재궁이 일정한 척도가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일이 처음에 뜻했던 것과는 달라 일을 살피던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랐고, 여러 대신들이 모두 들어가 봉심한 결과 사람의 잘못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십분 명백했습니다. 결국 옛 재궁은 쓸 수가 없게 되고 새 재궁은 또 판을 붙여 써야 해야 했으니, 이는 전고에 없었던 변고로서 조야(朝野)가 떠들고 일어나 모두 신이 고집을 부리다가 일을 그르쳤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종족이 모두 멸망하는 죄를 받을 지라도 어떻게 인심을 위로하고 사람들 말에 사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하늘과 태양 아래 얼굴을 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릉을 정할 때도 뭇 논의들은 수원(水原)을 일러 천재 일우의 곳이라고 하였는데, 감히 이론을 제기하여 결국 시일을 끌게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지리(地理)가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나 인정으로 보거나 신도(神道)로 보거나 이번에 정한 곳이 진선 진미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 말이 그치지 않고 가면 갈수록 더 심하여 신더러, 터무니없는 말로 이미 정해진 일을 어지럽혔다고 하고 있으니, 신의 죄 더욱 큰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성상의 체후가 편찮으셨을 때 감히 혼자서 뭇 논의를 어겨가면서, 태의(太醫)의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하므로, 결코 그로 하여금 약을 논의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후 결국 그가 논의한 약을 쓰시고 좋은 효험을 보셨으므로 말하는 자들이 신을 일러, 군부(君父)의 병을 우선적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신의 마음을 천천히 살펴보지 않은 소치이기는 하나 신이 했던 일들을 추적해 보면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의 큰 죄를 지고서 담당관으로부터 목베임을 면하고 있는 것만도 이미 다행한 일인데, 하물며 도성 안에서 편안히 쉬고 있으면서 공의(公議)와 왕법(王法)을 무시해버릴 수 있는 일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직명을 갈아주시고 돌아가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생성해주신 은덕에 흠결이 없도록 하소서."

 

대사헌 윤문거가 상소하여, 병으로 폐기 상태에 있음을 극구 말하고 새로 제수한 직임을 체차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끝에 가서, 송시열을 만류해야 한다는 뜻을 말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였다.

 

대신 및 비국 제신들을 여차에서 인견하였다. 대사간 정지화, 부제학 유계, 집의 이후 등이 모두 옥당 차자에 대한 비답이 너무 준엄하여 사기를 꺾어버린 것이 불가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또 송시열을 돌아가지 말도록 만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렇겠다고 답하였다.

 

12월 7일 계사

밤에 안개가 끼고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타나 삼태성(三台星) 아래로 사라졌다.

 

사헌부가, 강화 유수 서원리(徐元履)의 일 처리가 갈피가 없고, 내관인 윤완(尹完)은 건방지고 방자하여 밉살스럽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윤완에 대해서는 두 번 아뢰자 따랐으나, 원리에 대해서는 누차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8일 갑오

밤에 안개 기운이 있었다.

 

12월 9일 을미

상이 친히 경모전(敬慕殿)에서 납향제(臘享祭)를 거행하였다.

 

12월 10일 병신

좌참찬 송시열이 성 밖에 나가 상소하여 자기 과오를 열거하였는데, 상이 관대한 비답으로 물러가는 것을 허락치 않고 이어 사관을 시켜 들어오도록 유지를 전하였다. 그러나 시열은, 물러가지 않을 수 없는 정세를 누누이 아뢸 뿐이었다.

 

경기·관동·호서·호남에서 징수할 쌀에 대해 차등을 두어 감해줄 것을 명하였다. 네 도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혼전(魂殿)·국장(國葬)·산릉(山陵)의 세 도감(都監) 제조(提調)와 도청(都廳) 이하의 관원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12월 11일 정유

상이 승지를 보내 어찰(御札)을 가지고 가서 송시열을 다시 들어오도록 유시하였다. 승지 오정위가 교외로 나가 유지를 전했는데, 시열이 끝내 감히 다시 들어올 수가 없다고 답하자 상이 다시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정위가 광주부(廣州府)까지 뒤쫓아가서 타일렀으나 시열의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정위가 돌아와 청대하고 면전에서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유지를 전했더니 시열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먹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서계(書啓) 내용도 매우 놀랄 정도였습니다."
하니, 상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신이 또 돌아가 지존(至尊)께 고해야 하므로 그 자초지종을 알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는 뜻으로 두세 번 간곡히 묻자, 시열이 말하기를, ‘남들이 나를 두고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법으로 치면 무장(無將)이요, 한(漢)의 법으로 치면 부도(不道)라고 한다니, 어떻게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도 분명하게는 말하지 않았고, 신 역시 복명할 일이 급하여 자세히 물어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승지들도 그게 무슨 말인지 들은 사람이 없는가?"
하니,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서계를 보면 참으로 너무 놀랄 일이어서 다시 가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듣자니 이유태(李惟泰) 역시 이미 귀향을 했다는데, 뒤쫓아가서 유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또 시열에게 어찰을 내려, 결심하고 돌아간 이유를 간곡히 묻고 이어 사관을 시켜 유지를 전하니, 시열이 답하기를,
"들리는 바로는 사람들이, 신이 전하를 섬김에 있어 전일한 마음이 없다고 한다니, 이는 신하된 자로서 더할 수 없는 죄입니다. 어떻게 감히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두 번씩이나 승지를 보내시어 수찰로써 만류하셨는데, 신이 기어이 떠나온 데 대하여 더욱 괴이하게 여기실 것이기 때문에, 신이 부득이 승지가 유지를 전하러 왔을 때 대강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사관을 보내 물으시니 신으로서는 감히 끝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비국 제신들을 인견할 때 상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이르기를,
"요즘 일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어제 사관의 회계를 보지 못하여 그 까닭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였고, 대사간 정지화는 아뢰기를,
"그 실지 내막이 어떻게 된 것인지 조사를 해야겠습니다."
하고, 이어 집의 이후와 함께, 시열을 위로하고 타이를 것을 청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유태에게 유지를 전하러 갔던 예관은 들어왔는가? 뭐라고 대답을 하더라던가?"
하니, 오정위가 아뢰기를,
"새로 제수하신 가자(加資)와 자기 형을 읍재(邑宰)로 발탁 제수한 일은 모두가 남다른 대우이므로, 만약 그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지 않으시면 결코 들어오기가 어렵다고 하더랍니다."
하였다.

 

12월 13일 기해

밤에 동남쪽과 서남쪽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왕자와 대신, 전직 육경(六卿)·판윤(判尹) 그리고 칙사 맞이할 때의 육방 승지에게 각각 담비가죽 두 장씩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북사(北使)가 가져온 것이었다.

 

12월 15일 신축

밤에 유성이 필성(畢星) 쪽에서 나타나 천원성(天園星) 위쪽으로 사라졌고, 새벽에는 토성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집의 이후가 상소하여, 송시열을 만류할 것을 누누이 청하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12월 16일 임인

밤에 안개 비슷한 무슨 기운이 성 안에 가득 찼다가 한참 뒤에 흩어졌다.

 

12월 17일 계묘

묘시에서 오시까지 햇무리가 졌다.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불행히도 떠도는 말이 잘못 유신(儒臣)에게 가해져서 결국 그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기가 막힙니다. 상께서 연이어 정성이 담긴 하교를 내리시어 꼭 오게 하고야 말겠다는 성의를 보이시면 시열의 거취가 아예 나오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데, 어찌 차마 목마를 때 물을 찾듯이 하시는 성상의 정성을 저버리기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12월 18일 갑진

오시에서 미시까지 햇무리가 졌다.

 

12월 19일 을사

연기군(燕岐郡) 유학 성진형(成震炯) 등이 상소하여, 고 유신(儒臣) 한충(韓忠)의 서원에 사액(賜額)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가 회계하기를,
"서원에 사액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니 가벼이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0일 병오

동남쪽에 불빛과 같은 기운이 있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상소를 올렸던 홍이룡(洪以龍)은 어떠한 사람인지 몰랐는데 이미 그의 상소를 받아들였기에 뒤이어 찾아보았더니, 그는 원래 북도(北道) 사람으로 서울에 와 살고 있으면서 전마(戰馬)를 바치고 당상(堂上)에 오른 자였습니다. 그를 본원으로 초치하여 다른 상소를 읽혀 보았더니 겨우 글자나 알고 구절은 떼지도 못하였는데, 이로 볼 때 그가 상소를 지을 만한 자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동사자가 누구냐고 캐물었더니, 영남 사람 여효맹(呂孝孟)이라고 핑계를 댔는데, 효맹은 죽은 지 이미 오래인 자로서 속임수를 쓴 그의 정상이 여기에서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당상관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엄밀히 조사하여 죄를 주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이룡이 상소하여, 송준길이 전조에서 일처리를 불공정하게 했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상이 그의 상소를 보류해 두고 내리지 않았다가 어느 날 인대 때 그 소본을 내보이며 이르기를,
"승지도 이 상소를 보았는가? 전조가 인재 등용을 불공정하게 했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하니, 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별로 대단히 헐뜯은 말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정원이 이렇게 아뢴 것이다.

 

12월 22일 무신

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처음에 예조가 거처를 옮길 때의 취할 절차를 정할 때, 위아래의 복색(服色) 그리고 대왕 대비·왕대비의 여연(輿輦)·복색 등에 관하여 여러 대신 및 송시열·송준길 등에게 문의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아뢰기를,
"경모전(敬慕殿) 행례 때면 반드시 최복(衰服)을 입었으니, 이번 옮겨 모실 때의 수레나 복색도 특별히 다를 게 없을 것 같고, 대왕 대비는 현재 기복(朞服) 중에 계시므로 3년상과는 구별이 있으니, 여연과 의물(儀物)에 검정색을 써야 옳을 것입니다."
하였고, 송준길은 아뢰기를,
"대왕 대비와 선왕과는 사실 모자(母子)에다 군신(君臣)의 의리를 겸하고 있습니다. 당초에 이미 기복으로 정했고 보면 평상시 복색과 의물을 과연 모두 순 흰색으로 써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례의》에, 기복 중의 복색에 관하여 마련해 놓은 것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고,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전례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니, 예관이 상고해 보고 그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으며, 송시열은 아뢰기를,
"대왕 대비께서 안에는 최마(衰麻)를 입고 겉에는 검정색을 착용한다는 것은 매우 의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오복(五服)에 해당한 사람이 상차(喪次)에서는 소복을 입고, 다른 곳에서 검정색을 입는 것은 후세에 와서 잘못되어진 제도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압굴(壓屈)당하는 곳이 항상 많기 때문에, 정자(程子)도 ‘슬픔을 무릅쓰고 정상적인 일을 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하였거니와, 임금이라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춘추의 법에도 임금에게는 출행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데, 그 이유는 비록 작은 읍이라 할지라도 본래 궁 안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그 나라 안이면 어디를 가던지 자신의 정성을 펼 수 있다는 것으로서, 왕자(王者)는 밖이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대왕 대비께서 선왕의 복을 입고 있으면서 자리에 따라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꾼다면, 그는 아마 춘추의 의리에 위배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시열의 논의를 따르라고 명한 것이다.

 

12월 23일 기유

날씨가 춥다 하여 옷이 얇은 군사에게 각기 동옷 한 벌씩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12월 25일 신해

전 이조 판서 조경(趙絅)이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좌상 심지원이 면직되었다. 지원이 병으로 벼슬을 사양하는 단자를 올린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허락한 것이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당상 선전관 이익달(李益達)이 일찍이 전라도좌수사로 수상 조련을 할 때, 시기를 골라 잘 진행하지 못했던 관계로 1천 명 가까운 수군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으니, 군률을 면한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은서(恩叙)를 내리시자마자 또 본직을 제수하셨으므로, 세상 평론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그를 파직시키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즉위하신 초기에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두 자전 외의 모든 진상 물건을 일체 올리지 말도록 하셨는데, 그를 보고 듣는 자들이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명년 탄일의 진상물에 있어서는 향상(享上)의 도리로 보아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흉년이 들어 민생이 곤궁한데 탄일에 구애받을 것이 있겠는가. 진상하지 말도록 하여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26일 임자

금산군(金山郡)에 지진이 일어, 서쪽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1만 대의 수레가 달리는 것 같았고 집들이 흔들리고 산 위에서는 꿩떼들이 울어댔다. 경상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치계하여 알려왔다.

 

조윤석(趙胤錫)을 동부승지로, 임한백(任翰伯)을 교리로 삼았다.

 

12월 27일 계축

목겸선(睦兼善)을 수찬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교리로, 이단상(李端相)을 부응교로,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권격(權格)을 정언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사의를 표하고, 빈접사로서 양서(兩西)를 갔다 오는 동안 눈으로 본 기근 상황을 아뢰면서, 관향 모곡(管餉耗穀)을 덜어내어 기민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끝에 가서, 송시열이 떠도는 말로 인해 서울을 떠났다는 것을 말하면서,
"성상께서 지성으로 만류하셨는데도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았으니 중외의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의혹을 했겠습니까? 시열이 물러갈 때 신이 미처 조정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만 요즘 와서 전해지는 말들을 들어보면, 그는 불측한 말이 궁중에 흘러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겁한 나머지 물러갈 것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떠도는 말이 과연 들어왔는지의 여부는 오직 성상만이 아실 것입니다만, 만에 하나 그러한 일이 없는데 중간에서 지어내어 저들끼리 서로 소문을 퍼뜨렸다면, 그것은 흉한 무리들이 유현(儒賢)을 몰아내고 관료들을 상대로 화를 꾸미려는 계획이고 성상까지도 그들에게 속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지를 분명하게 내리시어 허와 실을 확실히 구별하신 다음 정성과 예우를 더욱 도타이 하시어 꼭 불러들이소서."
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답하였다.

 

12월 28일 갑인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날 좌참찬 송시열이 떠날 적에 온 조정의 사람들이 모두 섭섭히 여겼고, 시열이 써서 아뢴 말을 【시열의 서계 내용에, ‘남들이 말하기를, 신이 전하를 섬김에 있어 전일한 마음이 없다고 한답니다.’ 한 말이 있었다.】  듣고 나서는 또 모두가 놀라면서, 아마 좋지 못한 사람이 중간에서 그러한 말을 지어내어 조정을 어지럽게 만들려고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근래 사대부 사이에 서로 오가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시열이 이른바 차마 듣지 못할 말이라고 한 것은 바로 신이 전하께 그를 참소한 말로서 그 말이 궐안에 자자하게 퍼졌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이 그를 시열에게 전하고, 시열이 그 때문에 상소를 올리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신이 너무나도 놀라고 당황하여 즉시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고 싶었습니다. 설사 신이 털끝만큼이라도 은근히 헐뜯는 말을 하였더라도 그는 전하 혼자서나 아시고 다른 사람은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인데, 또 어떻게 궐안에 자자했겠습니까? 신은 지금 현자를 참소했다는 이름을 세상에서 얻었으니, 신을 파직시키시어 사람들의 말에 사의를 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였다.

 

상이 영상 정태화, 우상 정유성, 예조 판서 홍명하를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예판(禮判)의 상소를 보고 나도 모르게 놀랐는데, 뒤이어 홍득기 상소문을 보고 더욱 그지없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은 그 말이 무슨 일을 두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송시열이, 떠도는 말이 궁중에 들어왔다 하여 창황히 떠나갔다니, 지금 마땅히 성지를 분명하게 내리시어 옳고 그름을 정확히 가려야 할 것입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시열이, 떠도는 말 때문에 감히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한다니 성지를 특별히 내리시고, 승지로 하여금 대신 기초하게 하여 기어이 소환하였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떠도는 말을 어찌하여 부마(駙馬) 무리에게 책임 지운단 말인가? 더욱 괴이한 일이다."
하자, 태화·명하 등이 중언 부언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을 나에게 말한 자가 있었다면 언근(言根)의 출처를 알 수 있을 것인데, 물을 만한 곳이 없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다시 도타운 유시를 내려 기어이 올라오게 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막 유시를 내렸는데 올라오기만 한다면 다행스럽기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조 판서 민응형(閔應亨)도 그날 청대하고 입시하여, 기근으로 민생이 곤궁을 겪고 있는 상황을 극구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군대들이 앉아서 먹여주기를 기다리는 수가 점점 불어나 국가 저축이 바닥이 날 지경이니 어찌 큰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선왕조에서 뜻을 두었던 일을 지금 와서 쉽게 삭감해버릴 수는 없으니, 노약자만 도태하되 대신은 보충하지 말고 작년에 새로 뽑았던 자들도 감하게 하며, 각도 각 고을에서 매월 바쳐야 하는 군기(軍器)에 있어서도 잠시 정파하도록 하시면 그 역시 백성을 구제하는 하나의 혜택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두 대신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그 말이 어떠한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도성의 군대가 점점 불어나고 있어 삼수량(三手粮)으로서는 결코 지탱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바깥 논의들도 군대 수를 줄이는 것이 옳다고 하고 있습니다. 인원이 비어도 보충하지 않으면 그 역시 수를 줄이는 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군대 차림으로 서울 안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병기를 가진 군사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 식자들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로(耆老)의 신하가 병을 무릅쓰고 와서 아뢰었으니, 새로 즉위하신 초기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응형이 또 이회(李檜)를 추천하면서 그의 재주가 크게 쓸 만하다 하고, 또 호남에도 대동법을 서둘러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회는 지금 주어진 임무도 중한 임무이고, 호남에의 대동법은 내년 봄에 시행하도록 이미 논의가 되어 있으니 지금 다시 논의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응형이 또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해야 한다는 뜻과 공구 수성(恐懼修省)의 방법 등을 아뢰면서 누누이 말하였는데, 상이, 깊이 생각하겠다고 답하였다.

 

12월 29일 을묘

부제학 유계, 응교 이시술, 교리 김만기, 수찬 심유행 등이 청대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있는 것을 써서 아뢰라 하였다. 유계 등이 아뢰기를,
"이시매(李時楳)의 파직 추고 건에 대하여 준엄한 성지를 거듭 내리시고 말씨가 너무도 화평하지 못하여, 신들로서는 너무나 놀랐으며 크게 실망했습니다. 조정의 예법이 매우 엄하므로 사대부가 중관(中官)을 대함에 있어 직접 전명(傳命)을 받는 일 외에는 서로 만나더라도 교접하는 예가 없습니다. 시매가 미처 예를 갖추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런 뜻에서였을 것이고, 대각이 시매까지 탄핵하지 않았던 것 역시 그 때문인 것입니다. 설사 시매와 대각 모두에게 미진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선 시매에게 추함(推緘)을 발송하여 정확한 사실을 안 후에 적절한 처단을 내렸으면 좋았을 것인데, 지금 단번에 임금 명령을 멸시했다는 죄명을 씌우시니 뭇 신하들 감정도 석연치 않을 것은 물론이려니와, 내시들이 이후로 더욱 방자하게 굴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대각이라면 체면이 매우 중한데 누가 얼마나 기세가 있어서 감히 멋대로 지시할 마음을 먹을 것이며, 또 어느 대신(臺臣)이 그러한 남의 지시를 받을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실정에 맞지않은 죄목인 것입니다. 정원도, 직분이 가까이서 모시는 입장이므로 일에 따라 소견을 아뢰는 것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으로 하는 일이지 어찌 시매를 위해서 그러했겠습니까? 전후 내리신 비답이 점점 갈수록 미안한 내용이었는데, 전하께서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피시면 틀림없이 모든 것이 풀릴 것입니다. 신들이 유악(帷幄)에서 봉직하고 있으면서 때늦지 않게 광구(匡救)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감히 청대를 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 말이 화평하고, 속 마음을 열어보여준 것이 사실 성의에서 나온 일이다. 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옥당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이시매를 파직하지 말라."
하였다.
처음에, 중사 윤완(尹完)이 공조 참판 이시매와 수리소(修理所)에서 서로 만났는데, 시매가 예를 하지 않자 윤완이 그 일로 화가 나서, 물품을 때늦게 진상했다는 핑계로 공조의 관리를 불러다가 매질을 하였다. 그리하여 지평 민광소 등이 윤완을 탄핵하여 파직이 되게 했던 것인데, 그후 상이, 시매가 중관을 멸시한 것도 잘못은 잘못인데 대간이 그까지 탄핵을 않은 것은 불공정한 일이라 하여 시매에게도 파직을 명하였던 것이다. 이에 승지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대관이 내관을 파직으로 논한 것은 그들의 방자한 습성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지 어찌 그 누구의 사주를 받고 시매를 위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성상의 하교가 억압과 강제에 가까워 자못 대각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으나, 상이 불허하였고, 정원이 두세 번 아뢰었지만 비답이 갈수록 준엄하여 민광소가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면서 패초에도 응하지 않았는데, 옥당 차자가 올라가자 비답이 그러하였고 또 시매도 파직시키지 말도록 명한 것이다.

 

우승지 김수항이 아뢰기를,
"아버지와 자식 사이는 사람에 있어 대륜(大倫)인 것으로 이미 계후자로 정했으면 자기가 낳은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옮기고 바꾸고 하면 대륜이 정해질 때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후자로 정했다가 다시 파양(破養)한다는 규정이 원래 법문(法文)에 없는 것이고, 또 입후조(立後條)에 이른바 ‘양가의 두 아버지가 함께 명하여 세운다.’고 한 것이 바로 천륜을 중히 여기고 또 뒤폐단을 염려해서인 것입니다. 지금 유정이 계후자 파양을 청한 것은 법과 조례를 어긴 일로서 해조가 방계(防啓)한 것이 참으로 바꿀 수 없는 논리였는데도, 사실 뜻 밖에 격례를 깨고 특별 시행하라시는 하교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해조의 복계(覆啓)를 따르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 정상이 불쌍해서 허락했던 것인데, 그대의 말이 법에 맞는 말이기에 아뢴 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태복 첨정(太僕僉正) 유정의 양자가 폐질이 걸려 아무 일도 하지 못했으므로 유정이 자기 후사가 끊기는 것을 민망히 여겨 그 양자는 파양을 하여 시양자(侍養子)로 삼고, 다시 자기 당형(堂兄)의 아들을 양자로 세우고는 시양자는 둘째 아들이나 마찬가지로 대하겠다는 것을 청하자, 상이 불쌍히 여긴 나머지 허락했기 때문에 수항이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그후 대간이 유정을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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