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정사
예조가 아뢰기를,
"공조 판서 민응형(閔應亨)의 아룀에 의하여 공상지(供上紙)를 감량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백성을 돌보기 위하여 폐막을 제거한 것은 보고 듣기에 감격스럽고 솔깃해지는 일입니다. 다만 수량이 혹시 부족하게 되면 그 역시 구차하고 좀스러울 것이니, 바라건대 매월 봉진하는 30권 중에서 5권만 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무 적으니 7권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민광소·여성제가 병이 나서 부름에 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혐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장령 성후설(成後卨)이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3일 기미
햇무리가 지고 우이(右珥)가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경기와 해서의 죄인으로서 사면에 의하여 풀려난 자들이 몇 사람에 불과하여 문구(文具)에 그치는 인상이니, 질(秩)을 가진 자 및 계속 유배 중인 자 중에서 그 죄명이 용서받을 만한 자이면 다시 논의하여 아뢰라."
나이 80세 이상인 노인에게 세찬(歲饌)과 옷감을 하사하였는데, 승지 강백년(姜栢年)의 청을 따른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바라건대 감시(監試) 때 응시자들에 대한 조흘(照訖)001) 의 법을 거듭 밝히고, 또 자문지(咨文紙)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승지 조형(趙珩) 등으로 하여금 송시열에게 보낼 유지를 상의하여 작성하게 하고, 임시 주서 김석지(金錫之)를 보내 유지를 시열에게 전하였는데, 그 대략에,
"경이 조정을 떠난 이후로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한 정도만이 아니다. 지난번 경이 말했던 차마 듣지 못할 말이라고 한 것이 과연 어느 흉측한 인물이 그러한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경을 쫓아버리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심지어 부마 무리들이 참소를 했다는 말까지 하면서 경이 돌아갈 것을 결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몰랐겠는가. 나의 깊은 마음을 익평위 홍득기 상소문에 대한 비답에 남김없이 털어놓았거니와, 내가 경에 있어서는 심간(心肝)이 서로 비치는 사이인데, 설사 참소하는 자가 일백 명이라 하더라도 어찌 나의 털끝 하나인들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봄날이 점점 따뜻해지면 묵은 병도 나을 것이니, 되도록 속히 조정으로 돌아와서 간악한 말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
하니, 시열이 회계하였는데 대략에,
"신이 작년에 병을 앓고 있으면서 그 번거로운 말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갑자기 듣고는 가슴과 쓸개가 타는 것 같아 허겁지겁 내려왔는데, 사실 그때 억울한 마음이 가슴을 치받고 심화가 발동했기 때문에 길에서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급기야 집에 돌아와서 긴 세월을 침석에 누워 때로 지난 일들을 회상하노라면, 죄가 산같이 쌓여 있어 오직 눈을 영원히 감고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생각지 않게 성상의 사랑이 더욱 융숭하시어 이 멀리 윤음(綸音)을 내리시니, 신으로서는 참으로 감격하여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유언비어 문제까지 말씀하신 데 대하여는 더더욱 황공 감격하오나 그 모두가 신이 신하 노릇을 형편없이 했던 소치로서, 그 일이라면 신 자신이 자신을 꾸짖기에 겨를이 없어 감히 남을 탓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 참소한 자의 말이 혹 성상 앞에까지 전달됐으리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꼭 돌아와야 했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마을 이름이 ‘승모(勝母)’이면 증자(曾子)가 들어가지 않았고, 읍의 명칭이 ‘조가(朝歌)’이면 묵자(墨子)가 수레를 돌렸다고 하는데, 남의 신하로서 그러한 이름을 얻고서야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임금을 섬길 것입니까? 익평위 홍득기의 상소문은 신이 보지 못하여 감히 망령스레 무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며, 또 그와 서로 따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또 많은 사람을 연루시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신 혼자서 그 죄를 스스로 책임지고 싶을 뿐인 것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신을 올라오라고 유지를 내리셨는데, 신 역시 죽음을 참고서라도 올라가서 궐하에 가 한 번 하직을 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천한 구마(狗馬)의 병이 이상에서 아뢴 바와 같아 다만 스스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김석지가 돌아와 주달하니, 상이 그 회계를 남겨두고 내리지 않았다.
1월 6일 임술
정익(鄭榏)을 우승지로, 이유태(李惟泰)를 동부승지로, 이시함(李時馠)·김만기(金萬基)를 지평으로 삼았다.
1월 7일 계해
밤에 유성이 항성(亢星) 위에서 나타나 천시성(天市星) 아래로 사라졌는데, 색이 붉었다.
1월 9일 을축
예조가 아뢰기를,
"왜의 조위 차사(吊慰差使)가 가져온 부의로 향 3근, 초 2백 자루, 향로·촛대 각 하나와 고궁세포(高宮細布) 20필이 부산에서 올라왔는데, 전례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소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빌었는데,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0일 병인
자전이 약방에 답하기를,
"대왕 대비전이 몸을 굽히고 내림하시어 극력 권하시기 때문에 부득이 따를 수 밖에 없다."
하였다. 이때 자전이 계속 소선(素膳)만 들어 너무나 야위었으므로 약방을 비롯하여 대신·삼사가 권도를 따르도록 간청하였으나,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다가 이 하교가 비로소 내려오자, 듣는 이들이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1월 11일 정묘
예조가 아뢰기를,
"서자·얼자는 반드시 허통(許通)을 한 후에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한 법이 날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져서 일이 매우 한심스럽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과거 때를 당하여 마땅히 그 법을 거듭 밝혀 금지해야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2일 무진
영의정 정태화가 소를 올려 면직을 빌었는데,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3일 기사
밤에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위에서 나타나 삼태성(三台星) 아래로 사라졌다.
함릉군(咸陵君) 이해가 벼슬을 그만둘 나이가 되었다 하여, 소를 올리고 치사할 것을 비니, 답하기를,
"그 일을 시행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왜 꼭 오늘에 갑자기 시행할 것인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정유성이 아뢰기를,
"금년의 흉년은 북로(北路)가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모두 서로(西路)를 향하여 떠돌이 길에 나섰는데, 수령들이, 다음에 그들을 다시 본 고장으로 되돌려보내지 못하면 해유(解由)에 지장을 줄 소지가 있음을 염려하여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있습니다. 별도로 어사를 보내 묻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은 도사로 하여금 낱낱이 파악하여 착실히 돌보아주게 함으로써 후일 어사를 보냈을 때 사실을 밝혀내는 데 자료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유성이 또 아뢰기를,
"관동 지방도 기근이 북로와 같아 본도로부터 급함을 알리는 보고가 계속 오고 있으니, 그들을 위한 진구책을 당연히 불을 끄듯 써야 할 것이나, 관동은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들도 가난하여 원래 축적된 곡식이라곤 없는데다, 영남의 곡식은 거리가 멀어 거기까지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충주에 전 목사 원두추(元斗樞)가 관청에다 쌀 2천 1백 섬을 쌓아둔 것이 있고, 모조(耗租)도 7천 섬이 있다는 것입니다. 쌀 1천 섬과 모조 3천 섬을 관동으로 옮겨 진구에 이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유성이 또 아뢰기를,
"원두추가 많은 곡물을 쌓아두었던 것은 자기 자신의 씀씀이를 절약하고 기민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남겨둔 데에서 나왔으니, 의당 격려와 권장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해당 아문에 말하여 별도로 시상을 하라고 답하였다.
두추가 저축을 많이 한 것이 비록 자기의 씀씀이를 절약하여 그리 되었다고 하더라도 곡식 옮겨올 것을 청하면서 시상까지 겸하여 청한다는 것은 너무 조급히 서두르는 느낌인데, 하물며 그것이 꼭 자기의 씀씀이를 절약하여 그런 것이라고만 할 수도 없음에 있어서랴. 대신들이 그렇게 사사로운 곳에 마음을 쓰는데 소관들이야 무엇을 책하겠는가.
1월 15일 신미
이조 판서 송준길이 상소하여 직을 사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두 번씩이나 사의를 표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땅히 등대 때 대면하여 유시하리라."
하였다. 상소문이 들어왔을 때 7일을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가, 정원이 날마다 은근히 여쭈었기에 오늘에야 비답이 내려진 것이다.
영동(永同) 사람 박승후(朴承後)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좌참찬 송준길의 덕업(德業)과 문장(文章)은 옛 현인들에 비하여 손색이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과연 선왕이 그 현자에게 하시듯이 하신다면, 그 현자가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인륜을 어지럽히고 끝까지 세상을 등한시할 선비가 아닌데, 왜 선왕께 다 보답하지 못했던 충성을 오늘 전하를 위하여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였다. 승후는 송시열의 당이었다.
1월 16일 임신
김수항(金壽恒)을 대사간으로, 성이성(成以性)을 응교로, 경최(慶㝡)를 지평으로, 김만기(金萬基)를 교리로, 임한백(任翰伯)을 부수찬으로, 권시(權諰)를 동지의금으로, 박경지(朴敬祉)를 통제사로 각각 삼았다.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이 죽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연성군이 옛 시절 공신으로서 지금 갑자기 서거한 데 대하여 내 마음이 슬프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예장을 준비하게 하라."
하였다. 시방이 식견도 부족하고 재능도 슬기도 모자랐지만, 그러나 나라 위해 성의를 다하여 여러 해 지부(地部)002) 에 있으면서도 원두표가 호조 판서로 있을 때와 같이 범람하고 교활한 수단은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칭찬하였다.
1월 18일 갑술
영상 정태화가 8차에 걸쳐 사의를 표하니, 승지를 명하여 도타운 유지를 전하게 하였는데, 그로부터 수일 후 김두영(金斗榮)의 상변(上變)으로 인하여 부름을 받고 출사하였다.
강원 감사 박장원(朴長遠)이 치계하기를,
"양양(襄陽) 등 5개 읍이 기근이 더욱 심하오니,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여 돌보고 살리게 하소서."
하여, 비국이, 영남 해변의 영해(寧海) 등 읍에 있는 원곡 2천여 섬을 고을들이 차례차례 배로 운반하여 진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1월 19일 을해
홍명하(洪命夏)를 대사헌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정언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본직을 고사하여 4차에 결쳐 상소하니, 상이 비로소 체직을 허락하였다.
1월 21일 정축
경조(京兆)003) 가, 충효·절의·청백리·전망인(戰亡人)의 자손들을 초록하여 아뢰니, 먹을 것을 제급하도록 명하고, 무후한 자에게는 그의 처 또는 아우나 조카에게 똑같이 시행하게 하였다.
1월 22일 무인
홍명하(洪命夏)를 이조 판서로,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조귀석(趙龜錫)을 집의로 삼았다.
대사간 김수항 등이 인동(仁同) 사람들이 부사 유정(兪椗)을 미워하고 원망하여 그를 몰아낼 심산으로 대계(臺啓)인 것처럼 조작하여 그 대개를 써서 이웃 읍에까지 전파하였다고 논하고, 본도 감사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여 사실을 적발하고 중한 법으로 다스리게 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 후에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인동 사람 장학(張學), 유양원(柳陽元)·후원(厚元)·배원(培元) 등을 모함하여 장황하게 치계해서, 그들을 왕옥(王獄)으로 잡아들이게 하여 여러 달을 두고 심문하였는데, 그 네 사람이 서로서로 발명하는 바람에 누가 한 말인지 확실치 않을 뿐만 아니라, ‘청참(請斬)’이라는 한 구절은 다만 유정의 사장(辭狀) 속에 있을 뿐 전후 다른 사람들 공초에는 모두 나와 있는 데가 없어, 그것은 유정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모함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임이 분명한데도, 당초에 처후가 추관 윤이명(尹以明)과 함께 각기 당심(黨心)을 품고 끝까지 밝혀내지 않고 유정을 감싸고 돌았다. 그리고 갇힌 사람 중에 장학은 일찍이 참봉을 지냈던 사람인데 이명이 제멋대로 그에게 형을 가하였으나, 처후가 이명을 두둔하기 위하여 치계 속에다, ‘이명은 장학이 일찍이 조관(朝官)이었음을 까맣게 잊었고 또 신이 써보낸 본뜻도 제대로 모른 채 망령되이 형신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고, 또 유양원은 유후원의 8촌인 것을 후원의 동생이라고 속여 치계하여 되도록 옥이 성립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행이 의금부가 사실에 의거하여 회계했던 덕으로 장학·유후원 등에게는 결장률(決杖律)을 적용했다가 극열(極熱)로 인하여 속(贖)을 받았고, 처후·이명은 둘 다 추고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처후가, 제멋대로 조관을 형신하여 유정을 위한 분풀이를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추고만으로 매듭짓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법을 우습게 보지 말기를 바란들 그게 될 일인가.
1월 23일 기묘
전 지평 윤휴(尹鑴)가 상소하여 하사한 책자를 사양하니, 답하기를,
"너무 작은 물건을 그렇게까지 사양할 게 뭔가. 편안한 마음으로 받으라."
하였다. 윤휴는 선왕조 때부터 누차 관직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었는데, 이때 와서 뭇 신하들에게 책자를 나누어주면서 그에게도 하사하도록 상이 특별 명령을 하였던 것이다.
1월 24일 경진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영장(營將)으로 추천할 만한 인물이 너무 적다고 아뢰고, 또 김흥운(金興運)은 현재 파산 중에 있어 거두어 쓸 수가 없다고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흥운이 무슨 일로 파직을 당했는가?"
하여, 정유성이 아뢰기를,
"일찍이 영암군(靈巖郡)을 맡고 있을 때 사소한 죄로 인해 파직을 당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러한 무리라면 골라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대사간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요즈음 무변(武弁)으로서 파직자 또는 산관인 자를, 도감이 그들에게 직을 붙여줄 것을 번번이 아뢰어 청하고 있어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김흥운만 하더라도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신은 모르지만, 이미 어사에게 무능하게 보여 파직당했다면 금세 다시 그를 승급시켜 임명한다는 것이 어쩌면 사체에 손상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석방한 자와 석방하지 않을 자를 물어온 평안도의 계본에 대하여 금부가 회계하니, 판하하기를,
"이후광(李后光)·민련(閔堜)은 일벌 백계의 뜻으로 둘 다 논하지 말고, 유후성(柳後聖)·조징규(趙徵奎)는 자전의 병증이 때없이 발작하고 있어 그들을 먼 도에다 오랜 기간 정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 석방할 수도 없으니, 서울 가까운 직로(直路)에다 연한을 정하여 이배하라."
하고, 또 경상도 계본에 의하여 심총(沈摠)의 감등 정배(減等定配) 건에 관한 회계에 대해서 판하하기를,
"지금 사면이 전번의 사면과 다를 바 없으니 심총은 종전대로 두라."
하였다.
1월 25일 신사
재령(載寧)에 사는 백성 김두영(金斗榮)이 상변하였는데, 끌어들인 사람이 70여 명이나 되어 내병조에다 국청을 차리고 대신 및 금부 당상을 패초하여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두영에게 이미 진술을 받았으니 국문의 체계로 말하면 피고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것을 청하는 것이 옳겠으나, 두영의 사람 됨됨이를 볼 때 마치 병풍자(病風者) 같은데 그 많은 사람들을 일시에 잡아들여 국문한다면 외방이 놀라 소요가 날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불궤(不軌)를 모의한 자들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그는 자기 일가인 이후남(李厚男)에게 들었다고 한 것이 역시 허무 맹랑한 말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이들도 각기 소견을 말해 보라."
하였다. 판의금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얼굴을 보거나 말을 들어 보거나 정상인 같지는 않은데, 만약 부실한 일로 하여 소요를 일으킨다면 손상되는 점이 매우 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끌어들인 그 많은 사람들을 만약 모조리 잡아들여 국문한다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우선 두영이 통하여 들었다고 하는 그 자를 잡아들여 국문하라."
하여, 뭇 신하들이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국청의 대신과 판의금 및 양사를 모두 입시하도록 명하고, 이어 묻기를,
"경들이 죄인의 진술 내용을 보건대 옥사의 정상이 어떠하던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처음부터 허황된 일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지금 보니 과연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오계창(吳季昌) 등이 면질한 말을 보았더니, 두영이 진술한 것이 전혀 사실성이 없었다. 그를 다시 국문하면 자세한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계창의 말을 들어 보면 두영은 풍병을 앓은 지 이미 오래인 사람으로 떠돌이 생활로 나서 간 곳조차도 모르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지금 이렇게 상변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동안 짜만든 상황을 자세히 보면 틀림없이 두영 혼자서 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또 처음에는 후남에게서 들었다고 했다가 다시 어린애에게서 들었다고 말을 바꾸었는데, 그 말을 다시 캐물어야 할 것이다. 죄인들 모두가, 종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틀림없이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두영이 그렇게 무고를 했다면 이른바 안광립(安光立)의 말이라는 것이 너무 흉측하고 참담한 것이다."
하니, 이경석이 아뢰기를,
"너무나 중대한 옥사라서 아래에서 감히 청할 수는 없고, 상께서 쾌히 단안을 내리시어 사방에다 훤히 보여주어야 원근에서 듣고 있는 모두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선왕조 시절 당진(唐津) 사람이 상변했을 때 선왕께서 그의 간악한 정상을 통촉하시고는 여러 죄수들을 즉시 석방하시고, 죄인 중에서도 의지할 곳이 없는 자에게는 모두에게 옷과 식량을 주어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상변자를 국문하여 그가 무슨 혐의 때문에 무고를 하였다는 자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여,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물러가 있으라. 두서너 건의 문제를 들어 두영을 추고하면 허와 실이 즉석에서 판단될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국청이 두영의 무고한 실상을 들어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갇혀있는 사람들은 선왕조에서 했던 전례대로 각자에게 돌아가면서 먹을 식량을 주어 보내고, 의금부 하인들이 잡아올 때 약탈한 물건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니 그 모두를 찾아 되돌려주어, 국가가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돌보고 있다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장령 성후설(成後卨)이 아뢰기를,
"바라건대 가옥·전지 등에 대하여 관이 확인하는 법을 거듭 밝히시어, 간악한 백성들이 백문서(白文書)를 위조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7일 계미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밤에는 한 줄기 검은 구름이 서남간에서 일어 동북방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 길이가 하늘 끝까지 닿아 있었다.
홍중보(洪重普)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상이 전 자의 이상(李翔)을 인견하고, 경연에 출입하도록 하였다.
1월 28일 갑신
햇무리가 지고 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는데, 속은 붉고 겉은 푸른색이었다.
전 판관 홍여하(洪汝河)를 황간(黃澗) 신풍역(新豊驛)에다 정배하였는데, 이유는 북병사 권우(權瑀)가 여하의 술주정한 죄를 낱낱이 열거하여 조정에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여하가 상소문에서, 자의를 고르지도 않고 추천하는 폐단에 대하여 언급했다가 송시열로부터 크게 노여움을 사고 있었는데, 시열에게 빌붙은 자들이면 모두 이를 갈고 있었으므로 결국 죄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1월 29일 을유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이상(李翔)을 종부시 주부로, 정만화(鄭萬和)를 황해 감사로 각각 삼았다.
약방 도제조인 이경석이 입진하였을 때 아뢰기를,
"삭제(朔祭) 전에 문안하는 예처럼 들어가시겠다는 건에 대하여 일찍이 물으신바 있었기에 신이 감히 예가 아니라는 뜻으로 아뢰었는데, 선현 신 이황(李滉)이 한 말을 상고하였더니,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듯이 한다는 것은 성의가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죽은 후에 문안까지 한다면 그것은 바로 신도를 더럽히는 일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어느 사람의 물음에 답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미루어 말한다면 가정이나 국가나 다를 게 뭐있겠습니까? 그게 비록 성상의 감정이 너무 슬프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시려는 뜻이겠지만, 필부나 사인도 하지 않는 일이고 또 선왕의 예도 아닌 것을 상께서 그대로 행하신다면, 슬픈 감정이라도 절도에 맞게 나타내야 한다는 교훈에 위배되는 일이오니, 바라건대 제사 전에 들어가 임하시는 일만은 하지 마시어 뭇 신하들 소망을 들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제사 전에 먼저 곡하는 것을 수의(收議) 때 문안이라고 잘못 명칭을 붙였지만, 사실은 그게 바로 조곡(朝哭)인 것이다. 상(祥) 전에 조석으로 곡하는 것은 예문에도 있는 일인데 뭐가 불가하다는 것인가?"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감군(監軍)·순장(巡將)에게 다 그 번을 계속 서게 하라."
하였는데, 그때 상의 눈병이 점점 더하여 낙점(落點)을 하자면 눈에 해로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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