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정해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여 하사한 음식물을 사양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답하였다.
2월 3일 무자
상이 흥정당에서 침을 맞았다. 문서 출납이 오래 폐지될까를 염려하여 약방 도제조 이경석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6방 승지가 각방의 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는 일이 있었으니, 지금 다시 그 전례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2월 4일 기축
우의정 이후원(李厚源)이 죽어 승지를 보내 조의를 표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후원이 정사훈(靖社勳)에 들었기 때문에 과거 급제가 늦었어도 벼슬이 빠른 속도로 올라갔고, 지론은 비록 대단히 각박하였으나 그렇다고 남을 해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처제인 김익희(金益熙)와 함께 힘과 마음을 합하여 송시열·송준길의 뒤를 적극 밀었고, 입이 마르도록 그들을 찬양하여 드디어 임금이 신임하고 온 조정이 무턱대고 따르게 만들었다가, 끝에 가서 예를 그르치고 정통을 어지럽게 하고야 말았으니, 후원도 그 점에 있어서는 그 죄 어찌 적다고 할 것인가.
2월 7일 임진
국청의 대신이 의견을 아뢰기를,
"두영이 이미 승복하여 옥사 체제가 당초와는 달라졌는데, 죄인이 대궐 안을 드나든다는 것이 타당치 않은 일 같습니다. 바라건대 추국 장소를 본부로 옮기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게 좋겠다고 하였다.
2월 8일 계사
햇무리가 지고 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고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는데, 안은 적색이고 밖은 청색이었으며 무지개 같은 하얀 기운이 좌이(左珥)에서 나와 한참 뒤에야 없어졌다.
이응시(李應蓍)를 이조 참판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참의로, 목겸선(睦兼善)을 검상으로, 유심(柳淰)을 강화 유수로 삼았는데, 그때 상의 안질이 매우 심하여 붓을 들어 낙점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망단자(望單子)에 부표하여 낙점 대신 계(啓)자를 찍어 내렸는데, 상의 병세가 호전된 후에도 오랜 기간 그 규정을 썼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침(李郴) 등의 상소에 의하여 삼척(三陟)의 국릉(國陵)을 찾아내야 한다는 명령이 비록 이미 계셨으나, 흉년이 이러하여 감사가 행동을 하려면 틀림없이 많은 폐단이 뒤따를 것이니, 바라건대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약방 도제조 이경석이, 상의 안질이 대단했던 관계로 앞 자리에 나와 아뢰기를,
"일찍이 영상 정태화에게 들은 말인데, 눈병 치료에 매우 신통한 약이 서촉(西蜀)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문(咨文)을 보내 그들에게 요구하면 혹시 구해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곧바로 자문을 보내는 것은 타당치 못한 일 같으니, 사신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구해 오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사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문서만큼 무게가 있지는 못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가서 다시 대신들과 의논해 보라."
하였다.
2월 11일 병신
좌참찬 송시열, 동부승지 이유태가 다 음식물을 사양하고 받지 않아, 충청 감사 오정원(吳挺垣)이 치계하여 사실을 알리니, 상이 말을 엮어 다시 보내라고 명하였다.
상이 날마다 침을 맞았는데, 이날은 승지를 명하여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하였다. 도제조 이경석이 아뢰기를,
"승지를 입시하라시는 하교가 있었다고 하니, 더없이 기쁘고 다행스런 일이오나 혹시 그 때문에 번뇌가 더하지나 않을까 그것이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공문서를 가지고 와 합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하교가 있기를 기다려 입시하라."
하여, 승지 오정위(吳挺緯)·조윤석(趙胤錫)·정익(鄭榏) 등이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니, 읽어보라고 한 다음 결재를 하였다.
2월 12일 정유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약방 제조들에게 이르기를,
"연일 침을 맞았더니 안질이 조금 나은 것 같다."
하여, 이경석이 아뢰기를,
"종묘 사직과 신민들의 다행입니다."
하였고, 부제조 조형(趙珩)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성상의 증후가 갑자기 더하였을 때 뭇 신하치고 그 누가 허둥지둥 서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송시열은 현재 멀리 있으면서 우려만은 남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입니다. 만약 상께서, 병 중에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니 꼭 올라와 서로 보았으면 좋겠다고 유지를 내리시면 그 어찌 감동을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 생각이 있다. 나가서 유지를 기초하여 아뢰라."
하여, 이에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유지 초안을 만들어 올렸다. 이유태에게도 시열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당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송시열을 칭송하는 것을 자기 출세의 발판으로 삼아, 비록 조형같이 어두운 위인으로서도 이렇게 실정에 맞지 않는 가소로운 말을 하여 행여 준론(峻論) 속에서 배겨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그것이 비록 세상이 너무 변해 그런 것이겠지만 역시 슬픈 일이었다.
2월 16일 신축
오시(午時)에서 유시(酉時)까지 햇무리가 졌다.
사시에 상이 흥정당에서 침을 맞고 이어 대신 및 비국 당상들을 인견하여, 기근으로 용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식비(食費)를 재감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가 금군(禁軍)에 궐원이 있는 것을 아직은 보충하지 말고 훈국(訓局) 군병도 그리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2월 18일 계묘
사헌부가 아뢰기를,
"과거 마당에서 난을 일으킨 거자(擧子)들이 대문 자물쇠를 때려부수고 꼭 그 판을 깨버리고야 말겠다고 행패한 꼴들이 난적(亂賊)과 다를 것이 없었는데, 앞장을 섰던 자는 이미 죄를 당하긴 하였으나 조례에 따라 형추하는 정도로는 그들 죄악을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바라건대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각별히 준엄한 형으로 다스리고, 같은 무리들도 캐물은 다음 모두 변방의 먼 곳으로 정배하여 사면령에 포함시키지 말도록 하소서. 그리고 호서(湖西) 좌도(左道)의 시험장에서 난동을 부렸던 자들도 역시 해조로 하여금 패거리를 적발하여 똑같이 해당 법률을 적용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도에 명하여 합군(合郡)으로 정거(停擧)·삭적(削籍)하는 폐단을 금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또 이르기를,
"난동을 부린 거자들을 변방 먼 곳으로 정배하는 건은 그 결말을 보아가며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9일 갑진
예조 판서 윤강이, 사간원이 그 아문의 당상관을 추고할 것을 청했다 하여 상소하고 사직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왕에 받아들인 것이고 또 중신이 올린 상소문이었기 때문에 비답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미 행공(行公)의 전지를 받았으면서 어찌하여 사직소를 받아들였는가? 만약 사직을 한다면 행공의 의의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였다.
승지에게 원내에 체류되어 있는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여, 도승지 조형, 우승지 이은상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 한 사람이 나가서 송 판서를 불러 들어오게 하라."
하여, 준길이 뒤이어 들어왔다. 조형 등이 차례대로 공문서를 읽자 상이 지체없이 결재를 하였다. 조금 후 김장생(金長生)을 제향하는 서원의 편액 청원 건에 관해 예조가 중첩되게 시행함을 어렵게 여기고서 방계(防啓)한 건에 대하여, 상이 좌우에게 묻기를,
"서원 사액에 있어 일찍이 겹으로 내린 일은 없었던가?"
하니, 은상이 대답하기를,
"어찌 그렇기야 했겠습니까. 송준길에게 물으면 알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어떻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김장생이 바로 신의 스승이기에 신으로서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만 전례가 있는지 또는 사리에 맞는 일인지 맞지 않는 일인지만 말할 뿐인데, 무슨 혐의될 게 있겠는가."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강릉(江陵)과 해주(海州)에 있는 선정신 이이(李珥)의 서원이 이미 다 사액이 되었으니, 겹으로 내린 전례가 있기는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구두로 판부(判付)를 부르며 조형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는데, 그 판부에 이르기를,
"다사(多士)들이 이렇게까지 청하여 지금 특별히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영남 유생 이주영(李周英) 등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정온(鄭蘊)을 위해 올린 서원의 사액 청원을 예조가 방계한 건에 대하여 묻기를,
"이 일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김굉필·정여창 두 사람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는 바로 동방의 유현으로서 특별히 두드러진 사람들이고, 정온은 혼조(昏朝) 시절에 절의를 세운 사람으로서 신이 언젠가 영남 인사들 말을 들으니 모두가, 사당을 세워 향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주장들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조형에게 이르기를,
"먼저의 판부와 똑같이 쓰라."
하였다. 조형 등이 공문서를 다 읽고 나자 준길이 앞으로 다가가서, 한식을 기하여 고향에 돌아가 선산 무덤에 제를 올리고 이어 분황(焚黃)할 것을 간청하였는데, 상이 타이르기만 하고 허락치 않았다. 준길이, 이어 김일손(金馹孫)에게는 증직을, 송인수(宋麟壽)·오윤겸(吳允謙)에게는 증시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관시(館試)의 정원이 50명에 불과한데 근래 원점(圓點)의 선비는 그 수가 1백 명 가까이 되어 앞으로 시험을 거쳐 뽑을 때 낙방자가 거의 절반이나 되겠으니, 고생해 가면서 공부했다가 결과가 쓸쓸히 끝나버리고 말면 참으로 안스러울 일입니다. 성종조에서는 도기(到記)를 가져다 보고서 특별히 급제를 내린 일도 있었으니, 지금도 혹 그 전례대로 한다면 다사들의 기운을 솟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년이 바로 성상께서 즉위하신 원년이고 또 해도 새해이므로 성상의 진덕 수업(進德修業)을 위하여는 구구한 견마의 정성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마는, 문자에 솜씨가 없어서 뜻은 있으나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옛 분들의 소차(疏箚) 중에서 오늘에 맞는 것들을 고르고, 거기에 신의 뜻까지 곁들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서 감히 이렇게 올리는 것입니다."
하고, 옷소매 속에서 꺼내 올렸다. 조형이 아뢰기를,
"나오고 들어가는 모든 공문서를 정원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 규례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잠시 정원에 내리시어 신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공문서와는 다르고 또 이미 탑전에 올려진 것이니, 내가 보고 나서 정원에 내리더라도 안 될 것 없는 일이다."
하였다.
2월 21일 병오
사헌부가 아뢰기를,
"고과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자상하고도 빈틈없이 살피는 일인데, 감시(監試) 두 곳의 하루 과차(課次)가 무려 6백, 7백 장(丈)에 이르고 있어 자못 과시를 신중히 다루는 뜻이 없으니, 바라건대 두 곳 시관을 다 추고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공조 참의 심광수(沈光洙)가 상소하여 시사를 말했는데, 그 상소문 내에 ‘선왕조의 주서가 기사를 빼먹고 소홀히 다루어, 지금 책자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좋은 교훈이나 훌륭한 말들이 얼마나 남아 있겠습니까?’ 하는 등의 말이 있었다. 주서 맹주서(孟胄瑞)와 봉교 송창(宋昌)·정중휘(鄭重徽)가 서로 이어 소를 올리고 스스로 책임을 지면서 당직에 궐석을 하였으므로, 정원이 추고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지평 김만기(金萬基), 장령 성후설(成後卨)도, 일찍이 주서를 지낸바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홍중보(洪重普) 등이 처치하여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2일 정미
이조가 아뢰기를,
"연안 부사(延安府使) 성하명(成夏明)을 대론(臺論)에 의하여 그의 가자를 환수하였으나, 계사 내에도 ‘근신하고 너그럽고 인후했다.’ 하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수령으로서 어진 정사를 한 공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그에 상당한 상전을 내릴 것을 엎드려 성상의 재처만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2월 24일 기유
허목(許穆)을 장령으로, 심유행(沈儒行)을 교리로, 이단상(李端相)을 부응교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봄가뭄이 너무 심하여 시내가 다 말라붙었으므로, 가을보리도 죽어 손실이 크겠지만 봄보리는 전혀 생기가 없어 백성들 일이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뭇 논의들은 계절은 비록 이르지만 기우(祈雨)를 해야 옳다고 하고, 혹자는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고도 하니, 바라건대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 모두가 계절의 조만은 따질 것 없이 지금 당장 기우를 해야 옳다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
2월 27일 임자
도승지 조형이 앞자리에 나와 의견을 아뢰기를,
"사관은 책임이 중하여 잠시도 자리가 비어서는 안 되는데, 봉교 정중휘·송창이 현재 나추(拿推) 중에 있어 겸춘추가 대신 당직을 맡고 있으므로 일이 매우 구차합니다. 전 검열 유명윤(兪命胤)은 부자 사이의 상피로 하여 직을 붙여줄 수 없는데 그 말고는 또 현존 인원이 없으니, 바라건대 예문관으로 하여금 여쭈어 변통을 취하게 하소서."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의논드리기를,
"사관은 상번(上番) 하번(下番) 모두가 의금부에서 심리를 받고 있는 중이어서 달리 변통할 방법이 없습니다. 부제학 유계(兪棨)를 갈아내고, 그의 아들 명윤에게 사직(史職)을 다시 주어 서둘러 새로 천거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9일 갑인
대사간 김수항(金壽恒) 등이 해주 영장(海州營將) 이필(李泌)을 탄핵하기를,
"지난 국상 때 공제(公除) 이전에 파주 목사 유탄연(柳坦然)과 공해(公廨)에서 마주앉아 평상시와 다름없이 술과 고기를 즐겼으므로 듣는 모든 이들이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탄연은 이미 그 때문에 죄를 입었습니다. 이필이라 하여 혼자 면할 수는 없는 일이니 바라건대 그에게 파직 불서(罷職不叙)를 명하소서. 그리고 홍주 영장(洪州營將) 이익달(李益達)은 일찍이 호남 수사로 있으면서, 주사(舟師)를 조련하던 날 뭇사람들 뜻을 거스르고 어리석고 망령되이 제멋대로 하다가 결국 1천 명 가까운 군졸을 일시에 빠져죽게 만들었으므로, 호남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원망하며 꾸짖고 있습니다. 당초 군율을 면할 수 있었던 것부터가 실형(失刑)이었는데, 그를 다시 사판(仕版)에 끼워넣어 세상 인심들이 놀라고 분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장령(將領) 임무를 다시 그 사람에게 또 줄 수 있습니까? 바라건대 그를 갈아내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듣건대 춘추관이, 도승지가 아뢴 사관 건에 대하여 전례를 인용하면서 당상관을 갈아내고 아래 있는 자를 기용하도록 청했다는데, 그것이 부득이해서 한 청이겠으나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그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정이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거나 당연히 차례가 있어야 할 것이며 더구나 신정(新政) 초기라면 가장 큰 문제가 만민의 근본 법칙을 세우는 일인데, 삼강(三綱)은 그것이 꼭 닦아지고 밝아지도록 노력하여도 오히려 잘되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자 사이의 윤리가 어떠한 것이며 존비 사이의 서열이 어떠한 것인데, 아래 있는 자식을 기용하기 위하여 그 아비의 당상직을 갈아낼 것입니까. 유계는 명윤의 아비이며 그의 직은 바로 동관(東觀)004) 의 존자입니다. 자식 때문에 아비의 직을 간다면 인륜 질서가 문란한 일이요, 한원(翰苑)005) 이 비록 중하다지만 동관이 도리어 가벼워진다면 사체가 어그러진 일입니다. 왕정과 국법은 만민이 보고 듣는 것으로 만약에 혹시라도 부자 사이의 윤리를 소홀히 한다면 그 나머지는 기록할 만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소견이 하나 있는데, 지난번 한림원의 두 소신이 한 일은 사실 매우 고약한 일로서, 성상께서 그들을 심하게 징계하기 위해서는 가두고 파직 추고하는 것이 물론 당연한 일이겠으나, 나이 젊은 후배가 망령스레 국법을 저촉한 것이 아마 그들 마음으로 저지른 허물이 아니라 바로 무슨 일을 하다가 저지른 과실이라고 본다면, 작은 과실은 용서한다고 성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벼슬에 있다가 막힌 감옥 속으로 들어갔으니 그만하면 왕법도 이미 행해진 셈입니다. 좋은 비가 내리는 이 시기에 아름답고 화기에 찬 기운을 더욱 펴신다는 뜻으로, 산과 숲이 뭇 짐승들을 포용하듯이 당연히 받아야 할 죄와 벌을 조금 늦추시고 그들로 하여금 때를 닦고 하자를 제거하고 옛날 그대로 스스로를 새롭게 하게 하시면, 그게 바로 하늘을 본받아 사랑을 베푸시고 만물과 봄을 함께하시는 일로서, 한 시대의 귀가 쫑긋할 것이고 후세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가 법을 세우고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있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바라건대 대신들 의견을 다시 물어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사실 사리에 맞는 일이다. 그대로 시행하리라."
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여, 전 봉교 정중휘·송창에게 그 직을 도로 제수하게 하였다.
2월 30일 을묘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엎드려 영부사 이경석의 차자를 보니 부제학 유계의 체직이 잘못된 것임을 극력 주장하면서 말 내용이 매우 준엄했는데, 그가 이른바 춘추관이 아뢴 말이라고 한 것은 바로 신이 말했던 것으로서 신은 너무나 황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신은 사실 잘난 데가 없고 사리에도 어둡지만 그 일에 있어서는 신이 감히 제 억견을 멋대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일찍이 신식(申湜)이 동지춘추였을 때 그의 아들이 하번(下番)의 한림으로 있었는데, 그 때문에 재상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이 동지춘추를 갈도록 청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은 그 당시 상번(上番) 사관이었던 고 상신 이경여(李敬輿)가 매우 자상하게 항상 말하여서 진신(搢紳)들 사이에 그 말을 들은 자가 틀림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부자가 동시에 승지가 되고 사관이 되면 그 아비의 춘추관 직을 갈았던 예가 한두 사람 뿐만이 아니어서, 신은 어리석게도 그것들을 근거가 될 만한 전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중휘·송창 등을 즉시 복직시켜야 한다는 논은 며칠 전에 이미 원임 대신에게서 나와서 신도 과연 듣기는 하였으나, 요즘 들어 조정의 기강이 무너져 있고 습속도 놀랄 정도여서 나이 젊은 명관(名官)들이 자기 높은 것만 알고 일 체통은 불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금부에 명하여 추고하게 한 것은, 사실 선조조에서 한림 이선복(李善復) 등을 잡아들여 추고했던 일과 부합되는 일로서, 금세 또 기용하자는 청은 감히 할 바가 못 되겠기에 아뢴 내용에다 그 문제까지는 거론을 않았던 것입니다.
일이 삼강(三綱)과 구법(九法)에 관계가 되고, 새로운 교화에 누가 되고, 인륜 질서를 어지럽히는 바가 되는 것으로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신의 죄 이에 이르러 피할래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신의 직을 파하시고 신의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의견이 어찌 틀릴 리가 있겠는가. 이야말로 거기는 거기고 여기는 여기인 것이니 안심하고 직을 사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도, 춘추관 계사에 동참했다 하여 상차하고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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