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무오
권대운(權大運)을 우승지로, 정중휘(鄭重徽)·송창(宋昌)을 봉교로, 이만(李曼)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고 승지로 하여금 본원에 적체된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형조의 죄인 사일(士一)이 이미 승복하였으니 부대시 처단(不待時處斷)하여야 할 것이나, 지금은 만물이 자라는 계절이어서 죄인을 죽일 때가 아니고 선왕조에서도 가을을 기다려 형집행을 하라는 명령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가뭄까지 심하니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가을이 되어서 처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사리에 맞으니 가을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해마다 군대를, 큰 고을에서는 1백 명, 중간 고을에서는 50명, 작은 고을이면 20명을 뽑는 것이 정해진 규정이온데, 언제나 아약(兒弱)을 넣어 수만 채우기 때문에 지난날 이조 판서 홍명하가, 별도의 치부(置簿)를 하여 변통 자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약에게는 군포 징수를 견감하는 것이 인정(仁政)에 있어 사실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마다 견감한다는 것도 계속적으로는 되지 않을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수령들이 힘을 쓰지 않은 소치이다. 지금부터 사목을 다시 만들어 반드시 나이가 15세에 찬 자로 보충을 하고, 만약 어긴 자가 있으면 중한 법을 꼭 적용할 것이라는 뜻으로 엄하고도 분명하게 단단히 타이르라."
하였다.
3월 4일 기미
홍문관이 아뢰기를,
"진강할 책자에 대하여 행 호군 송준길에게 문의했더니 그의 말이, 《중용(中庸)》은 의리가 정밀하고 은미하여 기후가 편찮으신 동안에는 강독하기가 사실 어렵고, 《통감(通鑑)》은 아직 졸업을 못하였으니 강독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대학연의(大學衍義)》는 그것이 경(經)과 사(史)의 체를 겸하고 있으면서 규잠(規簪)의 뜻까지 곁들여 있으므로, 지금은 그냥 《중용》 대신 《대학연의》를 강독하고, 석강을 열게 되면 《통감》도 강독하여 성상께서 여유있는 마음으로 항상 거기에 젖어들게 하여, 그때그때 번갈아가며 강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는데, 침이 끝나자 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북녘 지대에 기근이 심하여 감시 및 동당(東堂)006) 초시에 합격한 자들이 싸들고 올 식량이 없어 장차 과거를 실시할 수 없게 되겠으니, 바라건대 그들이 지나는 군읍으로 하여금 그들 식량을 대어주게 하소서."
하여, 상이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분부하게 하고, 또 무과 거자(擧子)들에게도 똑같이 식량을 대주게 하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 영동 삼척(三陟)에 산불이 나서 인가 1백 70여 채가 연소되어 참담하기 말이 아니었는데, 지금 들으면 강릉(江陵)·통천(通川) 등지에 또 화재가 났고 피해자 수도 많아서 비록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하여도, 감영에 저장된 것이 원래 적어 은혜를 고루 베풀기 어렵다고 합니다. 의당 호조에서 3, 4동(同)의 무명베를 떼내어 본도로 내려보내고 그것을 재앙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국가가 각별히 돌보고 있는 뜻을 보여주게 하소서."
하여, 상이 해조에 명하여 무명베 4, 5동을 보내라고 하였는데, 비국에서는, 너댓 동의 무명베로는 1백 70여 호에다 고루 나누어줄 수 없으니 본 아문의 여정포(餘丁布)를 더 보태어 내려보낼 것을 청하였다.
3월 5일 경신
판의금 윤강(尹絳)이 인견 때 아뢰기를,
"의금부 죄인들이 거의 다 관대하게 처결이 되었는데, 유독 정계영(丁繼榮) 한 사람만이 해가 지나도록 옥에 갇혀 있고 형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렇게 가뭄을 걱정할 때 흠휼(欽恤)의 은전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문의하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등 모두가 주장하기를,
"장물 수를 계산하여 적용 법률을 맞추어 볼 때 사형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참작하여 정배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하여, 계영을 강계(江界)로 정배하였다. 계영은 군기시 봉사(奉事)로서 흑각(黑角) 열 통을 훔쳤다가 장물죄로 형을 받은 자이다.
이조가 아뢰기를,
"내수사의 모든 공문서를 반드시 본 아문을 거치게 한 것은 뜻이 있어서 한 일인데, 근일에 와서는 남잡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서는 그러한 공문서들을 본 아문이 작성하여 주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당시 여러 궁가들이 일으킨 폐단이 너무 심하여, 인평위(寅平尉) 집에서는 처음에 강릉(江陵)의 시장(柴場)을 받았다가 조금 후 버려버리고 그 대신 양구(楊口) 한 쪽을 받았고, 금성현(錦城縣)에는 쌍계사(雙溪寺)가 있어 그 고을 백면지(白綿紙)를 모두 그 절이 맡아 내고 있었는데, 그것을 숭선군(崇善君) 집에서 떼어받아 그 고을로서는 손을 댈 수 없게 만들었으며, 또 그의 면세전(免稅田)이 안악(安岳)에 있었는데 그 근처 전지들을 황무지라고 속여 그 모두를 측량한 후 강제로 점유하였다. 청평위(靑平尉) 집에서는 신계현(新溪縣)에 면세전이 있었는데, 그 근처에 사는 백성들 가경전(加耕田) 소출을 자기에게로 바치라고 하고 심지어 그 고을 감색(監色)을 추치(推治)하기까지 하여, 백성들이 모두 크게 원망하였다.
3월 6일 신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송시열(宋時烈)을 우찬성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우참찬으로, 유계는 계속 부제학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우승지로 각각 삼고, 권대운(權大運)은 특명으로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삼았는데, 이유는 그가 노모를 위하여 소를 올리고 걸군(乞郡)했기 때문이었다.
장령 허목(許穆), 지평 오시수(吳始壽)가 아뢰기를,
"이번 감시에 두 곳 시관이 문제를 내면서 옛 규정을 지키지 않아 많은 선비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고, 심지어 1등 시권(試券)의 비편(備篇) 속에는 등급 순위를 매기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막중한 국가 시험을 그렇게 소홀히 다루었으니, 바라건대 세 시관 모두에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요즘 와서 작상(爵賞)을 너무 함부로 내려 명기(名器)가 무게가 없습니다. 전 충주 목사 원두추(元斗樞)는 관곡(官穀)을 쌓아 놓은 것이 많다 하여 자품 승진의 은총까지 입었는데, 그 고을 1년 치 받아들이는 것이 수가 매우 많아 6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그 정도의 축적을 남긴 것은 그렇게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선치(善治)로 하여 승진시켰던 수령들 직질도 이미 환수를 하였으니, 그에 비하면 두추가 상을 받은 것은 더욱 참람한 일입니다. 바라건대 그의 자품을 개정하시고 해조에서 적절히 참작하여 다른 상전을 베풀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 중화 부사(仲和府使) 민승(閔昇)도 군기를 별도 비축했다 하여 규격을 넘어서서 자품 승진을 하였는데, 상전이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지면 뒤폐단과 관계가 됩니다. 바라건대 새로 승진한 자품을 개정하소서.
또 함경도 내노비공(內奴婢貢)이 다른 도에 비하여 편중한데, 그 중에서도 북청(北靑)·이원(利原)·단천(端川)·명천(明川)·길주(吉州) 5개 읍은 가는 베를 바치게 되어 있어 한 사람 공포의 값이 보통 무명베 60필 값에 거의 이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떠돌이로 나서는 자가 줄을 잇고 원성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며, 단천 내노(內奴)의 경우 길가에서 목매달아 죽은 자까지 있었습니다. 이 신화(新化) 초기에 비록 내수사를 혁파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고질적 폐단에 대하여는 시간을 주지 말고 단호히 개혁하여야 할 것이니, 바라건대 해조로 하여금 서둘러 변통하여 영구히 준행할 수 있는 지반을 만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내노의 가는 베 바치는 일에 관해서는 그를 견감하도록 변통 조처한 일이 종전부터 있어 왔었다."
하였다. 누차에 걸쳐 아뢰자, 상이 답하기를,
"내노의 가는 베 바치는 건에 대하여 금년에는 이미 전감(全減)하였으니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그리고 두추와 민승에게 새로 준 가자는 다 환수하도록 허락하고, 각기에게 숙마(熟馬) 한 필씩을 하사하였다.
3월 7일 임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우참찬 송준길을 인견하였는데, 좌승지 오정위, 좌부승지 이은상이 사관과 함께 입시하였다. 정위가, 경상도 청도(淸道) 선비 이광정(李光鼎) 등이 김일손(金馹孫) 등을 위하여 서원 청액(請額)을 한 상소문을 읽으니, 상이 우참찬을 오라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이조에 있을 때 일손의 자손들이 상언하여 증직을 청하여 왔었는데, 그 일이 자손으로서는 일 체계상 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방계(防啓)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 탑전에서는 감히 그의 증직을 청한 바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극일(金克一)은 어떠한 인물인가?"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그 사람 학문은 비록 김굉필·정여창에 미치지 못하지만 효행이 특이하고, 김대유(金大有)도 기묘 연간의 사람으로 조광조(趙光祖)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하니, 상이 그 소문을 예조에 내렸다. 정위가 또 함릉군(咸陵君) 이해의 치사 걸가소(致仕乞暇疏)를 읽으니, 상이 정위를 시켜 비답을 쓰기를,
"치사를 어떻게 가벼이 허락할 것인가. 사직하지 말고 갔다가 오라."
하고, 말미와 말[馬]을 주라고 명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목전에 다급한 걱정이 기근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함경·강원 두 도가 이미 그러한데 화재가 더욱 참혹하였습니다. 금년은 흉황이 작년보다는 더한데 진구(賑救)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어 백성들이 많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별도로 어사를 보내 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 태종(唐太宗)도 초년에 수재·한재가 있었는데, 태종이 무마를 부지런히 했기 때문에 결국 한 말의 쌀값이 3전(錢)에 불과하는 풍년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 성상께서도 초년에는 비록 흉황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만약 무마 정책을 끝까지 쓰신다면 그것이 국가 운명을 영원히 하는 근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상께서 안질이 완쾌되셨으니 실로 종묘 사직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올리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연한 병을 가지고 무슨 하례를 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금 승지들이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는 일은 매우 훌륭한 일이어서 바깥 사람들이 듣고는 기뻐 귀를 쫑긋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를 계속하고 중지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6방 승지로 하여금 제각기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들을 다 들어오라고 하였다.
3월 12일 정묘
고 사서 조전소(趙全素)가 지난 경진년에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여름에 단오절 문안을 위해 나왔는데, 그때 효종 대왕이 대군으로서 역시 심양에 있으면서 칠언(七言) 절구를 지어 직접 써주었다. 전소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는데, 이때 와서 그의 아들 조시대(趙始大)가 상소하고 그 시를 올리니, 상은 그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6품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그 후 장령 허목이 6품을 초수(超授)하는 것은 과중한 일이라 하여, 상이 다시 그에 걸맞는 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승지로 하여금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도승지 김수항, 좌부승지 이은상, 우부승지 조윤석이 입시하여, 수항이 개성부(開城府) 및 전남도(全南道)에서 나이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먹을 것을 제급한 장계를 읽었는데, 그 중에는 단 한 말의 쌀을 제급한 자도 있어, 상이 이르기를,
"제급한 것이 그리 적은가? 수령으로서 국가의 덕의(德義)를 받들지 않는 것이 이 모양이구나."
하였다. 개성부에는 1백 세 난 노인이 있어, 상이 먹을 것을 더 제급하고 옷감으로 솜·명주·목화 등을 호조에서 보내주라고 명하였다.
3월 13일 무진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영상 정태화, 좌참찬 송준길, 좌승지 오정위, 장령 허목, 교리 이익(李翊), 수찬 임한백(任翰伯) 등이 입시하였다. 이익이 《통감》을 진강했는데, 진(陳)의 후주(後主)007) 일에 이르러, 허목이 아뢰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집을 웅장하게 짓거나, 담을 장식하거나, 술을 좋아하거나, 음률을 즐기거나, 그 중 한 가지만 하여도 망하지 않고는 못배긴다.’ 하였는데, 그 점이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광해 말년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였으며, 준길은 아뢰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은(殷)의 귀감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하후(夏后) 시대에 있다.’ 하였듯이, 광해 시대가 멀리 있지 않아 성상께서 마땅히 그것을 보고 징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현직 삼공(三公)이 밀부(密符)를 차는 일이 옛날에는 없던 일이나, 기축년부터 처음으로 명소(命召) 때 패(牌)가 있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신의 조부 창연(昌衍)의 말을 들었더니, 대체로 어두운 밤에 명소할 때는 밀부로 확인하는 제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김두영(金斗榮)이 변고를 아뢰었을 때 명소하시면서 밀부가 없어 자못 예스럽지 못하였는데, 지금부터서는 밤이 어두운 뒤에 만약 명소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선전관(宣傳官)을 시켜 밀부를 가지고 확인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그대로 거행하게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임금이 세상을 격려하는 도구로 관작과 상사가 있을 뿐이니, 근래 들어 원두추(元斗樞)·민승(閔昇)의 가자(加資)를 개정하자는 대각의 논은 사실 의견이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황해 감사의 군관(軍官)이 주철(鑄鐵)의 노고로 인해 가자되었는데, 이와 같은 백도(白徒)들이 요행수로 가자가 되면 이어 혹 실직을 도모하여 얻기까지 하여 그 때문에 명기(名器)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생각지 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간원이 내노비(內奴婢)의 공포(貢布) 건을 아뢰었을 때, 내가 금년에는 전감하였다는 답을 하였고 그리하여 즉시 정계(停啓)가 되었던 것인데, 뒤에 내수사 하인의 말을 들으니, 간원이 하인을 불러 전감을 했는지의 여부를 묻더라는 것이다. 내 말이 아랫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바탕 시끄러움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이제야 비로소 말하는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어찌 감히 믿지 못하여 그랬겠습니까. 대신(臺臣)들이 처음에 그 전감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하인을 불러 물어본 것으로 다만 전후 곡절을 자세히 알고 싶어서였을 뿐입니다."
하고, 준길은 아뢰기를,
"어떻게 하인의 말로 인해 대간을 그렇게 의심할 수가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경연에서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간원이 내노비 공포 건을 논하려면서 내수사 하인을 불러 그 전반적 상황을 물었는데, 그때 그 대답이 ‘공포 원 숫자는 얼마인데 금년에는 거기에서 절반을 감해주기로 결정하였다.’ 하였고, 그 후 상이 ‘그렇잖아도 종래 변통이 있어 왔다.’는 비답이 있었던 것이다. 간원이 생각기에는 그 전감의 비답이 논계 뒤에 내려진 것이었기 때문에 상세히 알기 위하여 다시 내수사 하인을 불러 묻고 나서야 비로소 금년 1월에 비국의 공사(公事)에 의하여 각 관아 노비의 공포와 더불어 일체 전액을 삭감하였고, 전일에 절반 감했다는 대답은 틀린 대답이었음을 알았는데, 이때 와서 상이 경연 중에서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3월 14일 기사
헌납 오두인(吳斗寅), 정언 정석(鄭晳)·박세모(朴世模)가 모두 인피하고 아뢰기를,
"전감하신 일이 논계 이전에 이미 있었는데 신 등이 처음부터 자세히 알지 못하고 멍청하게 논계하여 결과적으로 실실(失實)을 면치 못하였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고, 사간 이후(李垕)도 당연히 처치를 했어야 했는데 즉시 처치하지 않았다 하여 인혐(引嫌)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모두 갈아 임명할 것을 청하자, 상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6일 신미
밤에 월식이 있었다.
예조 참의 윤집(尹鏶)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국가적으로 가장 시급한 일이 군민(軍民)의 병입니다. 예로부터 나라 다스리는 이들이 모두가 호적을 가장 중히 여겼기 때문에, 백성 수효를 상세히 파악하여 부역을 균등히 하므로써 국정이 제대로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호적의 법이 한 번 무너지자 백성들이 일정한 거소가 없는데, 무엇보다도 우선 1개 국(局)을 특설하여 널리 의견을 묻고 민의를 수렴하여 일정한 규칙 외에 조금 손질을 하되, 되도록이면 소략하면서도 요령있고 간편하여 행하기 쉽게 하여, 안팎 팔방으로 하여금 근거있는 실질적 호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서가 번다하고 권질(卷帙) 또한 호대하여 짧은 시간에 찾아보고 참고할 수가 없으므로, 간단하게 추려서 한 권으로 만들고 관리된 자가 항상 그것을 책상 위에 비치하여, 전안(田案) 문서에 의하여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노역을 부과하는 것과 똑같이 한다면 비록 탈루가 있더라도 저절로 나타날 것이고, 아침저녁으로 옮아다니는 무리들까지도 저들 멋대로 빠져나가고 기피하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일시에 크게 바로잡아 가지는 못할지라도 이 법이 한 번 정해지고 그리고 계속 준수해 나가면 3, 4식년(式年)이 다 안 가서 백성 수효도 알게 되고 백성들도 안정이 되어, 순서에 의한 배역이 균등을 기하지 않아도 자연 균등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 소가 내려지자 비국이 아뢰기를,
"본 소문 내용을 보면 사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찍이 선왕조에서도 그 일에 관하여 생각한바 있어 지금의 식년 호구(式年戶口) 법에다 오가 작통(五家作統)의 법을 첨가하여 모조리 찾아내기 위하여 조목조목 사목을 정하려다가, 일부 논의하는 자들이 ‘이런 흉년을 당하여 굶주린 백성들이 먹을 것을 찾아 동서를 떠돌며 일정한 거소가 없다. 이러한 때 호적을 정비한다는 것은 형편상 어려운 일이니, 조금 풍년이 되기를 기다려서 별도의 조항을 정하여 착실한 호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허목이 상소하였다.
"신이 국상 성복(成服)의 예에 있어, ‘예관(禮官)이 맡은 일이고, 당연히 예로부터 내려온 국가 전례가 있겠지.’라고 여겨, 다만 동료들과 함께 방상(方喪)의 잘못만을 논했었는데, 시골로 돌아온 후 본현을 통하여 대신들이 의논하여 정한, 거처를 옮기실 때의 절목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대왕 대비께서 기년(朞年) 복제를 입으시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초상 때라서 너무 황급한 나머지 예를 의논한 제신들이 혹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그러한 실수가 있었던 것인지요?
《의례(儀禮)》 주소의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 부위장자(父爲長子)의 전(傳)에 보면 이르기를, ‘왜 3년을 입는 것일까? 위로 하여 정체(正體)이기 때문이고 또 앞으로 전중(傳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정현(鄭玄)은 이르기를, ‘적자(嫡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위아래로 통칭할 수 있어서이다. 또한 장자로 적통을 세운 것을 말한다.’ 하였고, 해석에, ‘장자라고 말하면 그는 위아래로 통하는 호칭이다. 적자라는 호칭은 오직 대부(大夫)·사(士)에게만 해당되지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에게는 통하지 않고 또 태자(太子)라고 말하여도 위아래로 통하지 않는다. 장자로 적통을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敵妻)가 낳은 자식은 모두가 적자로서 만약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을 세우고 역시 장자로 명명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만약 적자라고 말하면 이는 오직 첫째 아들에게만 해당되지만, 장자라고 말하면 적통을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통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자최장(齊衰章)의 모위장자(母爲長子) 주소에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머니를 위하여 자최를 입는데, 어머니 입장에서도 아들이 자기를 위하여 입은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자최를 입는 것이다.’ 하였고, 전(傳)에서는 이르기를, ‘왜 3년을 입는 것일까? 아버지가 복을 내려 입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도 감히 내려 입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정현은 이르기를, ‘감히 자기가 높다 하여 할아버지·아버지의 정체(正體)가 되고 있는 자에게 내려 입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졌을 때 그를 일러 ‘정체’라 하여 3년을 입을 수 있고, 중자(衆子)로서 계통을 이은 자도 같습니다.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때는 그를 일러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 하고 따라서 3년을 입을 수 없는데, 그는 첩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장(朞服章) 주소에 이르기를, ‘천자·제후는 정통인 친후(親后)와 부인(夫人) 그리고 장자와 장자의 처 등을 위하여는 강등을 않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장자란 위아래를 통칭하는 호칭으로서 서자로 후사가 된 자를 말합니다. ‘장자’이기는 일반인데 장자로 적통을 세웠을 때는 3년,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때는 1년을 입는 것은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지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뜻인 것입니다.
소현(昭顯)이 이미 세상을 일찍 뜨고 효종이 인조의 둘째 장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 대왕 대비께서 효종을 위하여 자최 3년을 입어야 할 것은 예제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인데, 지금 강등을 하여 기년 복제로 한 것입니다. 대체로 3년의 복은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데 아버지는 지극히 높기 때문이고, 임금을 위하여 입는데 임금도 지극히 높기 때문이며, 장자를 위하여 입는데 그가 할아버지 아버지의 정통을 이을 사람이고 또 앞으로 자기를 대신하여 종묘를 맡을 사람이므로, 그것을 중히 여겨 그런 것입니다. 지금 효종으로 말하면 대왕 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인 것이고 또 조계(祖階)를 밟아 왕위에 올라 존엄한 ‘정체’인데, 그의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으로 3년을 입을 수 없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으니,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일인지 신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가령 첫째 아들이 죽어 이미 3년상을 입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은 장자가 되어 승중(承重)을 하였더라도 당연히 기년의 복을 입어야 한다면, 그는 경문(經文)에 나와 있는 곳이 없습니다. 위장자(爲長子)의 전 ‘어찌하여 3년을 입는 것일까?’의 주소에서 말하기를, ‘비록 승중을 하였더라도 3년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4종이 있는데, 적자가 폐질(廢疾) 또는 다른 연고가 있거나 죽고 자식이 없어 전중(傳重)이 되지 못한 경우가 하나인데, 그를 일러 ‘정체로서 전중을 얻지 못했다.’ 하고, 서손(庶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하나인데, 그를 일러 ‘전중이 되었으되 정체가 아니다.’ 하며,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하나인데, 그를 일러 ‘체이부정’이라 하고, 적손(適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하나인데, 그를 일러 ‘정이불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문에서 말한 ‘적통을 장자로 세운다’ 한 것도 체이부정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장자를 위하여는 3년으로 한다.’ 했겠습니까? 국가의 큰 상사는 사체가 중하고 예제도 엄하니, 비록 말절에 불과한 의식일지라도 그를 문란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3년을 규정하는 예제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예관과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예에 어긋난 복제에 대하여 그를 뒤쫓아 바로잡게 하소서. 지금 대상사의 연제(練祭)가 다가오고 있는데, 연제를 마치고 나면 기년복은 끝나는 것으로 그때 가서는 비록 후회한들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당시 판서는 윤강(尹絳)이었음.】 "당초 대왕 대비전 복제를 의정할 때 바로 대신·유신에게 의논하도록 청하여 기년제로 정하였던 것인데, 지금 허목이 소문 중에서 지적한 내용을 보면 자최 3년으로 하는 것이 예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강등하여 기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고, 또 대상사의 연제가 다가오고 있는데 연제를 마치고 나면 기년복은 끝나는 것으로 비록 후회하려 해도 때는 이미 늦다고 말하였습니다. 저으기 생각건대 당초에 기년으로 정하여 성복(成服)했던 것을 뒤이어 3년 복제로 바꾼다면 그야말로 변례인 것이니, 바라건대 대신 및 유신들로 하여금 다시 자세한 의논을 거쳐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도록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3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당초 대왕 대비전 복제를 의정할 때 바로 대신·유신에게 의논하도록 청하여 기년제로 정하였던 것인데, 지금 허목이 소문 중에서 지적한 내용을 보면 자최 3년으로 하는 것이 예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강등하여 기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고, 또 대상사의 연제가 다가오고 있는데 연제를 마치고 나면 기년복은 끝나는 것으로 비록 후회하려 해도 때는 이미 늦다고 말하였습니다. 저으기 생각건대 당초에 기년으로 정하여 성복(成服)했던 것을 뒤이어 3년 복제로 바꾼다면 그야말로 변례인 것이니, 바라건대 대신 및 유신들로 하여금 다시 자세한 의논을 거쳐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도록 윤허하였다.
3월 17일 임신
처음에, 우상 정유성(鄭維城)이 호남을 순찰하면서 전주 관기인 설매(雪梅)를 사랑하여 방을 독차지시킨 일이 있었다. 유성의 아들 정창징(鄭昌徵)에게 정제현(鄭齊賢)이라는 아들이 있어 숙휘 공주(淑徽公主)를 맞아 인평위(寅平尉)가 되었는데, 이때 와서 제현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은 후로 창징과 그 아우 정상징(鄭尙徵) 그리고 제현이 뒤를 이어 계속 죽었다. 장대비(張大妃)는 이 일이 유성의 첩의 저주로 하여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서, 인평위 집의 차지 내관(次知內官)을 시켜 그집 여종 예금(禮今)을 잡아다가 엄한 형벌로 캐묻게 하였다. 예금이, 흉한 짓을 하고 더러운 물건을 묻었던 일들을 자복하면서 설매가 시켜서 한 일이라 하고, 또 제 어미 애종(愛終), 생질 기립(起立), 동생 분이(粉伊)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끌어들였다. 유성은 제가(齊家)를 잘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을 꾸짖는 상소를 하고 또 자기 종을 시켜 형조에다 소장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헌부에서도, 주모자를 엄히 신문하여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형조가 예금·분이 등을 신문하였는데, 그때 예금은 나이 15세이고 분이는 14세였는데 바로 유성이 설매에게 준 여종이었다. 예금은 승복하였으나 분이·애종·기립은 모두 불복이었고, 예금과 분이는 또 그들 본가로부터 많은 형장(刑杖)을 받은 입장이었다. 형조에서는 설매를 잡아들여 동시에 신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그때 설매는 사건이 터진 초두에 이미 자기 스스로 목을 찌르고 전주로 가서 음독 자살한 뒤였다. 형조에서는 다시, 설매는 이미 죽고 없으니 더 기다릴 일이 없다고 청하고, 예금·분이·애종·기립에게 누차 형신을 가했는데, 예금이 중간에 말을 바꾸어 기립은 애당초 그 사정을 몰랐던 사람으로서 억울하다고 하였다. 형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입시하였을 때 아뢰기를,
"예금은 제 어미까지 끌어들여 이미 3차나 준엄한 형신을 받았고, 설매의 종분이도 제 본가로부터 형장을 맞고 보내온 사람으로 그 죄 강상(綱常)을 범했기에 그들을 법에 의해 형신하는 것이지만, 나이 미달인 애들을 연거푸 형신한다 하여 그 때문에 바깥 물의도 꽤 있는 모양이니, 바라건대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여, 분이·애종·기립 등의 형신을 드디어 정지하였고, 예금은 13차 형신 끝에 죽었다. 상은, 예금이 이미 죽었으니 다시 물을 길이 없다 하여 그 나머지 갇혀 있던 자들을 모두 놓아보냈는데, 그 옥사가 사실은 창징의 집에서 꾸며 만든 것으로서 이를 억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3월 18일 계유
곽지흠(郭之欽)을 사간으로, 권격(權格)·이무(李堥)를 정언으로, 오준(吳竣)을 판윤으로, 목내선(睦來善)을 헌납으로, 박세성(朴世城)을 동부승지로 각각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갔다. 도승지 김수항, 좌승지 오정위, 우승지 이은상이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여, 수항이 윤휴(尹鑴) 상소문 건으로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윤휴가 관직이 있으면서 언제나 포의(布衣)라고 자칭하는데, 왜 그런가? 책자를 나누어준 것도 세세한 일인데, 왜 그렇게 누차 사양하는 것인가?"
하니, 정위가 아뢰기를,
"윤휴가 지평(持平)을 배수하지 않고서 시종(侍從)의 은총을 받는 것이 마음에 불안스러운 일이라 하여 두 번씩이나 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명하여 비답을 쓰게 하기를,
"하사하는 것이 직명(職名)이 있고 없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라."
하였다. 또 함경도 노인의 식물(食物)에 관한 계본(啓本)을 아뢰면서, 홍원(洪原) 고을에는 쌀 너 되와 어물 두 마리만을 준 곳이 있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와 같은 수령은 추고하라."
하였고, 길주(吉州)에 1백 세와 99세의 노인이 있고, 인천(仁川) 영평(永平)에도 1백 세 난 노인이 있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노인들은 옷감을 해조에서 제급하게 하라."
하였다. 청도(淸道) 선비들이 서원 청액소(請額疏)를 올린 데 대하여는, 상이 이르기를,
"선왕조에서도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는 가볍게 허락하지 않았느니라."
하니, 은상이 아뢰기를,
"그는 전일 송준길이 증직을 청했던 그 자이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일손(金馹孫)은 어떠한 인물인가?"
하여, 정위가 아뢰기를,
"일손은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여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났고 연산군 때 화를 당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는 허락하되 뒤에 그를 전례로 삼지는 말라."
하였다. 정위가 또 영릉 참봉(寧陵參奉)이 보고한, 토련(土蓮)을 봉진하지 말자는 건에 관한 예조의 점목(粘目)에 대하여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새로 생산된 물건을 뒤에 계속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애당초 봉진을 않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으나, 그것은 진실로 미안한 일이다. 대체로 천신(薦新)은 공상(供上)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우선 천신부터 하고 공상은 그 물품이 많이 생산된 뒤에 한다면 괜찮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자,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또 자기 맏누이를 죽인 정주(定州) 죄인에 관한 평안 감사의 사계(査啓)에 대하여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윤기(倫紀)의 변이 그에 이르다니."
하니, 정위가 아뢰기를,
"자기 맏누이를 시해했으니 더욱 흉측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기간을 죽였는데 맏이와 둘째를 따질 게 뭔가."
하고, 모두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3월 19일 갑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여, 좌참찬 송준길, 우윤 권시, 승지 박세성, 대사간 이경억, 시독관 이익, 검토관 홍주삼 그리고 사관이 입시하였다. 이익이 《대학연의(大學衍義)》 서문을 진강하였는데, 그 서문은 바로 명(明)나라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직접 지은 것이었다. 준길이 아뢰기를,
"세종의 나이 20시절에 이 서문을 지었으니, 기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번왕(藩王)으로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받고 예가 아닌 예로 자기 사친(私親)을 추숭했으며, 장총(張璁)·계악(桂萼) 등을 다 권장하여 입각시키고 충직(忠直)들은 물리쳐 심지어 곤장 아래서 죽게까지 만들었으므로, 후세의 기롱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이익이 아뢰기를,
"그렇게 영특하고 슬기로운 임금으로서 잘못한 일도 매우 많았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경연을 여는 규정이 해가 길 때는 조강·주강·석강 이렇게 3차를 열었습니다. 지난 임진년 난리 시절에도 강연을 정폐한 일이 없었는데, 그 학문에 있어서의 부지런함이야말로 어찌 후사로서 당연히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주삼은 아뢰기를,
"진서산(眞西山)008) 이 저술한 글을 명의 세종이 그 요점을 추려 서를 썼는데, 조어의 뜻이 깊고 함축미가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식견이 범상을 초월한 데가 있었던가 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문에서 말한 ‘어찌 하늘과 조종(祖宗)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한 것이 후세에 대한 경계의 뜻으로는 대단한데, 자기 자신은 실천을 못하였으니 그는 왜인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독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로 본받아 실천하는 일입니다. 《시경》에도 이르기를, ‘시작이야 누가 못하랴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이는 적다.’ 하였듯이, 옛 현철한 왕이라도 시작에서 끝까지 여일했던 이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하고, 권시가 아뢰기를,
"세종도 총명은 남달랐지만 실천에 있어 미진한 데가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시작만큼은 못하였는데, 그게 바로 임금으로서 귀감 삼아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병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겠으니 옥당이 다시 진강하라."
하여, 주삼이 또 한 차례 읽고 나자, 상이 이르기를,
"격치(格致)의 방법이 모두 이 책 속에 있구나."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중요한 것은 성의(誠意) 이하와 대조하여 보아가야 합니다. 마음 자체가 티끌하나 없이 깨끗해야지만 격물 치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격물 치지라고는 하지만 성의를 못한다면야 공부를 어느 방향으로 할 것인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말하는 자들은 이 책이 사기(史記)를 많이 인용하고 있어 다른 경서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러나 여기 인용된 사기는 매우 좋은 내용들이어서 비록 경서와 동열로 두더라도 부끄러울 게 없습니다."
하였다. 권시가 아뢰기를,
"신이 경조(京兆)에 있으면서 호적 건에 관하여 들은바 있는데, 이번에는 규정이 너무 엄하여 만약 입적하지 않은 누락자가 있으면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법을 적용하게 되어 있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모두, 호적법이 종전과 달라 끝에 가서는 틀림없이 침해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예전보다도 더 등록을 않고 기피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편리할 대로 살던 백성들을 갑자기 단속해서는 안 되니, 점차적으로 일이 풀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누락되었다가 적발된 무리들은 별도로 책을 만들어 두고 정상을 참작하여 벌을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좌윤 유혁연(柳赫然)은 그들을 아약(兒弱)으로 인한 군포 감축분을 보충하는 데 이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선왕조에서도 누락자를 군대 정원으로 보충하려다가 조정 논의가 귀일되지 않아 결국 시행을 못했다고 하는데, 어찌 까닭없이 그랬겠습니까? 지금 밖에는 기근이 너무 심하여 떠돌며 구걸하는 자들이 길거리에 줄을 이었는데, 호적 편성 그 한 가지 일로 하여 한결같이 엄한 단속만 한다는 것은 사실 구황에 전력하는 뜻이 아닙니다. 신이 아뢴 것이 비록 담당자로서 법을 집행하기 위한 책임있는 주장은 아니지만,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쪽을 강구하여 선처가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바깥 기근이 참혹하기 그 지경인데 만약 급히 구제를 않는다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을 메우는 일이 가면 갈수록 더할 것이니, 각도의 감사들에게 경계를 내려 어느 곡식이건 따지지 말고 갈라내어 진구에 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바닥이 나 있어 처리할 방법이 없긴 없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핑계로 그냥 서서 죽어 가는 꼴을 보고만 있는 것도 윗사람으로서의 도리는 아닙니다. 또 갖가지 관조를 지금 이미 다 나누어주어 남은 것이라곤 거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세가 참으로 그렇기는 하나 각읍의 관봉(官俸)은 틀림없이 다소의 여유가 있을 것이니, 승지가 나를 대신하여 유시의 사연을 만들어 보내라."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호적 문제는 지금 이미 거듭 타일러 놓고서 다시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 다스리는 방법이 어떻게 백성 숫자도 파악 못하고 저들 편리할 대로 놔두고만 있을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윤의 뜻도 그 일을 늦추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만 구황 정책이 더 시급함을 아뢴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북로에는 유랑민이 매우 많은데, 그들이 오면 그곳에서는 그들을 좀 따뜻하게 대해주어야 할 것인데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들을 머물게 하면 뒤폐단이 있을 것이라 하여 잠을 재워주지 않기 때문에, 길에서 얼어 죽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자, 경억이 아뢰기를,
"영동 8개 읍은 기근에다가 산불까지 만나 사망자가 났는데, 도신(道臣)과 수령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특별 조치를 취해야지만 그들 정신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니, ‘암행(暗行)’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고 그냥 어사를 보내 진구에 진력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염탐하게 함으로써 조정의 덕의(德意)를 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에도 똑같이 보내야만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의논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지난번 경연에서 하신 성상 하교에 대하여 그 전말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만약 대신(臺臣)들이 성상의 비답을 믿지 못하여 내수사 하인을 불러 물어보았다고 하신다면 그는 실정을 벗어난 말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불러 물어본 일이 아무 뜻 없이 한 일이라고 한다면 가하지만, 하인을 불러 물은 것을 꼭 옳았다고 하면 나로서는 끝내 석연치가 않은 것이다. 당초에 재감하지도 않았다가 대간이 아뢴 후에 ‘이미 전체를 재감하였노라.’ 했다면, 그것은 내가 대간을 속인 것이 된다. 그리고 대간이 아뢰었기 때문에 재감했다면 어째서 ‘의계(依啓)하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여, 준길이 아뢰기를,
"대간이 비록 사실을 잘못 파악한 사소한 실수가 있었더라도 그러한 환란이 있게 된 것은 내수사 하인이 대답을 잘못했기 때문인데, 사헌부가 체직을 청하는 것으로 처치한 것은 바깥에서도 모두 부당한 처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권시가 아뢰기를,
"함경도 내노비(內奴婢) 공포(貢布)는 바로 백성들 부역 중에서 가장 괴로운 부역으로서 비록 흉년이 아니더라도 변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대계(臺啓)가 오두인(吳斗寅)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여, 권시가 아뢰기를,
"두인이 북로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 현상을 직접 보고 그렇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대체로 대각이 일을 논함에 있어 바로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고, 사실을 잘못 알기가 매우 쉽습니다. 임금으로서는 윤허하시고 따라주시는 것이 물론 훌륭한 일이겠으나, 대계도 꼭 따라서는 안 될 것들도 많습니다. 지난번 김익렴(金益廉)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한 일만 하여도 너무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 말인가?"
하여, 세성이 아뢰기를,
"익렴이 장령으로 있을 때 예조 당상관 추고 건으로 인해 동료인 황준구(黃儁耉)와 서로 책임 전가를 했기 때문에, 대신이 탄핵하여 사판에서 삭제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옳커니 그렇지"
하였다.
익렴은 간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준길이 그와 친밀하였고 또 익렴의 입장을 세워주기 위하여 심지어 대계를 따를 것이 못 된다고까지 임금에게 고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기롱하였다.
3월 20일 을해
밤에 유성이 자미성(紫微星) 서원(西垣) 쪽으로 사라졌는데, 색이 붉었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여, 영상 정태화, 이조 판서 홍명하, 좌참찬 송준길, 좌윤 유혁연, 우윤 권시, 승지 이은상, 장령 허목, 시독관 이익, 검토관 홍주삼, 공조 좌랑 이상 그리고 사관 등이 입시하였다. 이익이, 먼젓번 배웠던 것을 한 차례 읽고 나서 또 새로 배울 진서산(眞西山)의 서문을 읽었다. 준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전대를 말하자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고를 분명히 가를 수는 비록 없지마는 나라 형세는 요즘처럼 시들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멀리 갈 것 없이 혼조(昏朝) 때만 하여도 오늘처럼 쇠약하고 나태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고, 명하는 아뢰기를,
"지금 그 시들한 습성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 자꾸만 심해가고 있으니, 가다듬는 대책을 서둘러 강구하여야만 하겠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금 이와 같은 나라 형세에 대하여 어느 정책이 최선일지 그것은 비록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 근본은 오직 임금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상께서 갑자기 안질이 중하시어 뭇 신하들이 어쩔줄 모르게 걱정이었으나 지금 다행히도 차도를 보고 계시는데, 만약 경연에 자주 납시고 또 남모르는 은미한 즈음에 스스로 반성하시고 살피시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태화는 아뢰기를,
"상께서 별로 실덕하신 일이 없는데도 천재와 시변이 이러하니, 참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백성들의 괴로움과 전야(田野)의 원성에 대하여 모르고 계시는 것은 아니온지요?"
하였으며, 명하는 아뢰기를,
"옛날 선왕께서 언젠가 소신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오랜 기간 시골 마을에 있어 보아서 백성들 질고(疾苦)를 잘 알지만, 세자(世子)는 깊은 궁궐에서 낳고 자라 이 옷 이 자리가 당연히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백성들 질고는 모르고 있다. 내 능을 참배하는 날 세자로 하여금 길가 민가를 들어가 보라고 하고 싶다.’ 하였는데, 그 하교가 지금까지도 귀에 쟁쟁합니다. 지금 이 전상(殿上)에 연석을 펴놓고 있는 것도 성상이 보시기에는 비록 등한하게 보이시겠으나, 그 뿌리를 캐보면 이 모두가 백성들 노력과 괴로움 속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춘궁(春宮) 관원들은 세자가 즉위한 후에는 출육(出六) 품계로 승급시키는 것이 일찍이 전례가 있는 일입니다. 기축년에는 비록 거행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거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여, 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은 추은(推恩)의 뜻인 것입니다. 익위사(翊衛司) 같은 곳의 관원은 모두 아무 까닭없이 산관(散官)이 되고 말기 때문에, 명하가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가 있으면 그리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하였다. 허목이 아뢰기를,
"지평 여성제(呂聖齊)가 처사를 잘못했다는 연신(筵臣)의 말 때문에 인피하고 있는데, 하인을 불러 물었던 것이 다만 그 일이 어느 때에 있었던가를 알기 위하여 물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사실 파악을 잘못했으면 체직을 청한 처치가 서로 잘못을 바로잡는 뜻에 해가 될 것도 없으니, 바라건대 성제를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으나, 성제는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고 두 번이나 인피하여 체직당했는데, 상이 특명으로 체직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계속 세 번까지 인피하여 체직이 되고 말았다.
3월 21일 병자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기를,
"신이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평소 강습을 못하였고 왕조(王朝)의 예는 더욱 깜깜합니다. 선왕의 초상을 당하여 무엇인가 도움이 되도록 마음을 다해 토론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미리 강습을 못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사리에 어긋난 일만 하여,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황공하고 두려울 뿐입니다. 그 복제(服制)에 대한 문제는 신도 참여하여 들은바 있는데, 창황한 즈음이라서 미처 주소(注疏)의 여러 설까지 세밀히 상고하지는 못했으나 그 사이에는 사실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었고, 또 다소 의심스러운 곳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대신들 뜻이 모두, 국조 전례로는 자식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 제도는 사실 없고 고례(古禮)로 하더라도 명명 백백하게 밝혀놓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후일 후회스러운 일이 있을지 모를 바에야 차라리 국조 전례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낫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도 다른 소견 없이 드디어 기년제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 후 바깥 논의가 분분하여, 혹자는 대왕 대비께서 선대왕에 대하여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도 하고, 심지어는 참최(斬衰)를 입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며, 혹자는 또 정희 왕후(貞熹王后)009) 가 예종 대왕에 대하여 3년을 입었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분명한 증거가 있는 말인지 신으로서는 알 수 없으나 조종조에서 과연 그렇게 하였다면, 오늘의 예는 참으로 의심할 만하여 신은 여기에서 더욱 대단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상신(相臣)에게 고하여 《실록(實錄)》을 상고하고 나서 다시 논의하자고 청하기도 하였으나, 국가가 다사하여 미처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장령 허목이 그 상소문에 경전을 인용하고 의리에 입각하여 매우 장황한 논설을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논설에 대하여 비록 감히 할 말을 다해가면서 서로 힐난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의심되는 곳이 없지 않습니다. 《의례(儀禮)》에서,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은 위아래를 통틀어 한 말입니다.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적처(適妻) 소생이 10여 명인데, 첫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데, 아마 예의 뜻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소에 이미, 둘번째 적자(嫡子) 이하는 통틀어 서자(庶子)라고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혀놓았고, 그 아래다는 ‘체(體)는 체이나 정(正)이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서자로서 뒤를 이은 자를 말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허목은 그 ‘서자’를 꼭 첩의 자식으로 규정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이는 주소를 낸 이의 말이 앞뒤가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게 되니, 아마 그러한 이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년조에서 말한 ‘장자·장자부(長子婦)’ 등도 허목은 모두 첩의 자식으로 단정하였는데, 예의 뜻이 과연 그런 것인지,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으기 생각건대 주소에서 말한 ‘첫째 아들이 죽으면’ 한 것은, 바로 그 아래서 말한 ‘적자로서 폐질(廢疾)이 있거나 만약 죽고 자식이 없어 전중(傳重)이 되지 못하여 3년복 대상이 되지 못한 자’ 그것일 것입니다. 전중을 받지 않은 첫째 아들이 죽었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를 후사로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할 것이며, 불행히 또 죽어도 기왕에 첫째 아들을 위하여 3년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후사가 된 둘째를 위하여 3년을 입는 것이지만, 만약 첫째가 폐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미 그를 위하여 3년을 입었으면, 비록 그 뒤에 둘째가 올라와 후계자가 되었더라도 3년을 입지 않고 기년만 입는데, 그게 바로 그 아래서 말한 ‘체는 체이지만 정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첩의 자식이 후사가 되었으면 비록 첫째 아들이 폐질이 있거나 자식이 없어 3년을 입지 않았더라도, 또한 첩의 자식을 위하여 3년을 입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다 ‘적처 소생이다’라고 특별히 밝혀 둔 것입니다. 신이 꼭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 예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목의 논설 외에 또 혹자의 논설도 있는데, 그는 ‘제왕(帝王)의 집은 대통 이은 것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태상황(太上皇)이 사군(嗣君)의 상에 있어 비록 지차 아들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었더라도 모두 3년을 입어야 마땅하다.’ 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다면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었더라도 정체(正體)이거나 정체가 아니거나 따질 것 없이 모두 3년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는 예문에 없는 예로서 감히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천하의 의리는 무궁 무진하고 문장 해석의 견해도 각기 다른 것인데, 또 어떻게 한데로 몰아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단정할 것입니까? 신이 젊은 시절 예문을 강습하지 못하였고 지금 와서는 또 늙고 병들고 눈도 어두워 전주(箋註)에 주력할 힘이 없으므로, 이 대례(大禮)를 당하여 감히 남과 오르내리면서 변론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성상께서 예를 아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또 빨리 사관을 보내 《실록》도 상고하게 하시어 다시 더 참고하고 상량하여 지극히 정당한 결과를 찾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대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리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 복제에 관하여 대신들과 이미 의논을 하였고 아직 서계를 못하였는데, 영의정이 의논 드린 맺음말에 ‘그동안 너무 황급하고 촉박하여 《실록》을 미처 상고하지 못했는데 정희 왕후가 예종 대왕에 대하여, 문정 왕후가 인종 대왕에 대하여 이미 행하였던 제도를 모두 상세히 상고하여 참작 결정해야 합니다.’ 하였기에, 신들로서는 제신들이 올린 논의가 모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입계 때에 《실록》에서 찾아낼 것을 함께 여쭈려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준길의 상소문 내에도 《실록》을 상고하자는 말이 있고, 성상께서도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대신·유신의 말들이 모두 이러하니, 춘추관으로 하여금 조례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윤허하였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강화부에 소장된 《실록》을 사관을 보내 상고해 오도록 해야 할 것이나, 다만 본관에 비치된 강화 소장본 실록치부(實錄置簿)를 상고하였더니, 예종조 말년 치와 명종조 초년 치의 《실록》이 다 성질(成帙)이 안 되었습니다. 적상 산성(赤裳山城) 소장본이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태백산(太白山)·오대산(五臺山)에 비하면 거리도 꽤 가까우니, 바라건대 수일 내로 사관을 보내 상고하여 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3월 23일 무인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사간원 관리들이 서로 따라 인피하는 것은 사실 경연에서의 하교 때문인데 사헌부 처치가, 그들이 자책한 말을 그대로 따라 뒤이어 체직을 청하였으니, 그는 뒤폐단도 생각지 않고 대각을 중히 여기지도 않은 처사로서 세상 공론이 다 잘못된 일이라 하였기 때문에, 신이 탑전에서 감히 소견을 여쭈었던 것입니다. 여성제가 감히 직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데, 지금 그를 체직시키지 말라는 하교가 왕명으로 나오고 보니 신은 참으로 두렵습니다. 성제에게 이미 체직시켜야 할 만한 일이 없다면 신이 망언을 한 잘못을 면할 수 없으니 바라건대,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권격(權格) 역시 성제의 체직을 청하였었는데 체직시키지 말라는 특명이 있었으니, 자기가 틀린 처치를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훈련원 부정(副正) 박취문(朴就文)이 새벽에 금군(禁軍)들 무술 연습장엘 가는데 남별전(南別殿) 거리에 도착했을 때, 어느 누가 어둠 속에서 활을 쏘아 취문의 왼쪽 목에 살촉이 반치쯤 박혔다. 날이 밝자 그 화살을 보니 거기에는 금군인 차시현(車時賢)·유극견(柳克堅)의 성명이 쓰여 있었다. 병조가 취문을 불러 물으니 그의 말이, 극견과는 과연 원한이 있는 사이이나 그 밖에는 의심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현과 극견을 잡아다가 그 화살을 내보이며 물으니, 시현의 대답이 몇 해 전에 그 화살을 잃었다고 하면서 극견은 바로 자기와 사반(射伴)이라고 하였다. 극견은 대답하기를,
"취문과 서로 좋지 않은 일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 일로 혐의를 품고 죽이려고까지야 했겠습니까? 그리고 화살에다 이름을 적고서 그것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더욱이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화살에다 이름을 적고 어둠 속에서 사람을 쏜다는 것은 그럴 이치가 없을 것 같으나, 기왕 취문과는 원한이 있는 사이이고 또 그가 시현과 사반이라면 일단 의심이 없지도 않으니, 바라건대 담당관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고 엄중히 신문도 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형조에서는, 화살에 적힌 먹물 자욱이 거의 다 지워지고 자세히 보아야 보일만큼 글자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이 자취를 없애기 위하여 한 것이라 하여 극견을 20차에 걸쳐 형신(刑訊)을 하였는데, 그는 끝내 승복을 않고 죽었다.
3월 24일 기묘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지평 여성제가 혐의를 피하고 있을 때 신이 동료와 상의하여 그의 출사를 청하였으니, 뒤폐단을 생각지 않고 대각을 중히 여기지 않은 책임을 신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정언 이무가, 이경억·권격은 출사시키고 남중은 체직시킬 것을 청하여, 상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5일 경진
밤에 서리가 내렸다.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강호(姜鎬)를 장령으로, 정석(鄭晳)·경최(慶㝡)를 지평으로, 오준(吳竣)을 공조 판서로, 조형(趙珩)을 경기 감사로 각각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국조 이래로 사족(士族) 아낙네들은 죄가 강상이나 역적을 범한 경우가 아니면 비록 죄를 다스릴 일이 있더라도 법사의 관원이 반드시 아뢰고 나서 처리했는데, 그는 각별한 뜻이 있어 그리한 것입니다. 하물며 수령인 자가 어떻게 감히 사사로운 일로 차사를 놓아 잡아다가 아무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구박 위협을 할 것입니까.
남원 부사(南原府使) 김익훈(金益勳)이 자기 관내의 고 정언 황위(黃暐)의 집에 표(表)·전(箋) 등의 사고(私稿)가 있다는 것을 듣고 그것을 빌려다가 등초하고 나서 사고를 다시 돌려주었는데, 그 사고 군데군데를 도려낸 곳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황위의 아들 숙귀(叔龜)가 그 등초본을 다시 빌려온 후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으니 익훈이 화가 나서 다른 사건으로 그를 중상하려 하였으므로 숙귀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피해버렸더니, 익훈이 이졸(吏卒)을 풀어 밤을 이용하여 숙귀의 집을 포위하고 황위의 아내와 며느리를 잡아다가 관정(官庭)에서 구박을 하는 등 갖은 모욕을 다 보였다니, 이야말로 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요, 또 사람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익훈은 역적의 시녀를 첩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그가 하는 말이면 모두 따라주고, 또 괴이하고 어긋난 짓을 잘하기로 원근에 말들이 많습니다. 그의 무식하고도 망령된 습성을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바라건대 익훈을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7일 임오
일본 대마도 태수 평의진(平義眞)이 정관(正官) 평성통(平成通)을 동래(東萊)로 보내 표문과 함께 지방 특산물을 올리고 우리 신왕 전하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3월 28일 계미
이조가 경상 감사 사계(査啓)에 의하여 도내 각읍 사찰로서 여러 궁가 또는 각 아문에 소속되어 있는 것들을 모조리 정파해야 한다는 초기(草記)를 올렸다. 이에 대하여,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초기 내용으로 보건대 여러 궁가의 원당(願堂)을 팔도 어느 곳에서나 모두 금하고 있는 것인가? 본원은 승전(承傳)을 받들었던 문서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선왕조 시절에도 이조가 공문서에 대하여 빈번하게 방계(防啓)한 일이 있었는지 살펴 아뢰라."
하여, 좌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각도 각 관아에서 혹 복계(覆啓)로 인하여 처리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원래 기록으로 남기지 않기 때문에, 지금 여러 궁가의 원당을 팔도 어느 곳에서나 모두 금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는 별로 상고할 곳이 없습니다. 비국이 복계한 문자들을 취하여 보면, ‘궁가 또는 다른 각처에 소속된 사찰을 조사하여 등급을 나누어 낱낱히 기록하였다…….’라는 곳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그 일의 자초지종이 본 문서 속에 틀림없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니, 이조에 상세히 상고하여 아뢰도록 명령하시고, 이조가 방계한 전례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는 그 많은 《일기(日記)》를 한때 다 상고하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내수사의 모든 공사에 있어서는 반드시 공문으로써 이조를 거치도록 되어 있는데,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면 그 아문이 방계한 것이 법규 이외의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본원에 명하여, 이조의 문서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이조의 기해 년조 각도의 어사 서계를 보았더니, 선왕이 봉서(封書)한 절목 속에 ‘여러 궁가와 각 아문 그리고 사대부들의 둔장(屯庄)·염분(鹽盆)·어전(漁箭)·선척(船隻)·원당(願堂) 등등 모든 폐단이 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모두 묻고 살펴 사실대로 아뢰라.’ 한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 경상도 어사 서계에 의하여 모든 사찰에 있어 소속이 어느 곳인지 각기 그 사찰 이름 밑에다 소속을 적어 아뢰라는 뜻으로 비국이 복계하고 본도에 지시하였던 바, 감사가 조사하여 아뢴 내용에는, 궁가에 소속된 것이 세 곳, 서울 아문에 소속된 것이 세 곳, 감영에 소속된 것이 스무 곳, 좌병영(左兵營)에 소속된 것이 열여덟 곳이었으므로 비국이 다시 회계하여, 그 모두를 정파하고 오로지 그 읍에다 소속시켜 지역(紙役)을 제공하도록 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정파의 명령이 있었는데, 금세 또 원수(願受)하는 것은 애당초 조사하여 묻고 혁파한 뜻과는 자못 배치가 됩니다. 그리고 방계 그 문제는 이조로 하여금 참고 자료가 될 만한 문서를 가져오라고 하였더니, 이르기를, ‘본 아문에는 일찍이 등록은 없다. 종전부터 내수사 공사에 있어 불가한 점이 있으면 아뢰지 않고 공문 경유를 불허했을 뿐인데, 지난 어느 해에 무슨 공사 하나를 즉시 시행하지 않았음으로 인해 담당 관리를 죄로 다스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로는 본 아문이 감히 임의 퇴각을 못하고 비로소 계품하는 일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일에 본 아문이, 내수사가 떼어받은 공사에 대하여 방계의 초기(草記)를 하였다가 즉시 윤허를 받은 일이 있어, 모두 그를 일러 신정(新政)의 아름다운 일이라고들 하고 있습니다. 일이 옳으냐 그렇지 않으냐를 논할 뿐이지 방계는 계속적으로 하더라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비국의 회계에 모두를 정파하고 오로지 그 읍에다 소속시키자고 한 것이 각도를 이른 것이 아니라면, 담양(潭陽)의 원수(願受)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일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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