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경진
예조가 가뭄 때문에 기우제(祈雨祭)를 거행하도록 청하였다.
헌납 박증휘(朴增輝), 정언 정박(鄭樸) 등이 아뢰기를,
"충주(忠州)에 거주하는 이탁(李琢) 등 80여 인이 궁가(宮家)의 도장(導掌)016) 김원(金元)이 폐단을 일으킨 일을 가지고 헌부에 정장(呈狀)하였습니다. 이에 헌부가 진달해 아뢰어 해도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하는 동시에 해부로 하여금 김원을 수금(囚禁)해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본도가 조사해 아뢴 것과 해조가 추문(推問)해 들춰낸 것이 정장(呈狀)한 내용과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김원이 여전히 자복(自服)하지 않은 채 억울하다고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이탁 등 13인을 경옥(京獄)에 잡아들여 김원과 대질하여 신문하였는데, 김원의 간악한 정상이 변명할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우연히 저지른 잘못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용서해 주어야 할 대상에 포함시키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해조에게는 데면데면하게 김원을 용서받아야 할 대상에 놔두어 끝내는 헛수고로 돌아갈 사핵(査覈)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실시하게 하였으니, 너무도 일을 부당하게 처리하였습니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고, 김원은 다시 수금하여 무겁게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가뭄의 재해를 이유로 견책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원이 또 북경(北京)에서 보낸 자문(咨文) 가운데 ‘여러 죄인들을 의율(擬律)하라.’고 한 일을 가지고 품달하기를,
"무거운 쪽으로 의율하면 필시 죽어야 할 자가 많을 것이고 가벼운 쪽으로 의율하면 저 사람들이 노여워할까 염려되니, 월강(越江)한 자들은 모두 일죄(一罪)017) 로 논하고 나머지는 차율(次律)로 의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에는 수(首)와 종(從)이 있게 마련이다. 수범(首犯)을 이미 사형으로 논했는데 종범(從犯)을 또 일죄로 논하라고 청하는 것은 과중한 것인 듯싶다. 우리가 자문(咨文)을 보내면서 말을 잘하면 응당 사형을 받아야 할 자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래도 죽음을 면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성이성(成以性)과 한휴(韓休) 모두에게 혁직(革職) 정배(定配)의 율(律)을 적용하였는데, 이성의 죄는 한휴에 비해 조금 가벼운 만큼 정배시키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정(原情)018) 을 살펴보건대 한휴가 성이성과 의논한 것이 분명하다. 보내온 자문 가운데엔 모두 나수(拿囚)하라고 했으니, 똑같이 벌을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원이 다시 한휴는 혁직 정배하고 이성은 혁직 도배(徒配)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첨사 최수간(崔守簡)·임시헌(林時憲), 권관(權管) 김재형(金再亨) 등에 대해서도 도배하거나 혁직하도록 명하였다. 지원이 또 청하기를,
"문관 당상 중에 한 사람을 차출하여 회주사(回奏使)라 칭하고 등극사(登極使)와 함께 일행이 되어 연경으로 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동의하였다. 그런데 뒤에 호조 판서 허적(許積)과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불가하다고 진달함에 따라 별사(別使)를 차출하는 일을 취소하고 진주할 자문을 등극사 일행 편에 부쳐 보내도록 명하였다.
좌상 심지원이 아뢰기를,
"근래 대각에 침묵을 지키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습니다. 부사(副使) 이정영(李正英)은 국상(國喪)과 재해를 당한 때에 왕명을 받들고 나라 밖으로 나가서 술에 취해 사람을 때렸는가 하면, 동래 부사 정태제는 변경의 수령이 된 신분으로 집안 식구를 이웃 고을에 이끌어들이고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일에 대해 듣는 자마다 모두들 놀라워 하였는데, 대간 중에 한 사람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송시철(宋時喆)은 일찍이 밀양 부사로 있으면서 그 일을 눈으로 보고서도 거론하여 탄핵하지 않았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도 정말 놀랍거니와 시철의 경우는 더욱 해괴하다."
하였다. 이에 정언 정박(鄭樸)·이동명(李東溟), 헌납 박증휘(朴增輝), 장령 민여로(閔汝老)·김우석(金禹錫), 지평 이관징(李觀徵) 등이 대신에게 배척당했다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3일 임오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삼았다.
4월 4일 계미
이광재(李光載)·이휘진(李彙晋)을 장령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지평으로, 윤겸(尹㻩)을 헌납으로, 윤변(尹抃)·남천택(南天澤)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5일 갑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해서 참혹한 한재(旱災)로 양맥(兩麥)019) 이 말라죽어 사람들이 장차 살아갈 수 없게 된 정상을 극력 진달하고, 제도(諸道) 감사들로 하여금 민원(民怨)의 대상을 캐내어 변통할 여지를 만들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고, 형조로 하여금 죄수를 소결(疏決)케 하였다.
4월 6일 을유
행 대사간 정지화(鄭知和)가 병 때문에 부름에 달려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영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청대(請對)해 입시하여 아뢰기를,
"재해를 소멸시키려면 민원(民怨)을 풀어주는 일을 우선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현재 민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내노비(內奴婢)가 보전되기 어려운 참상을 보건대 이미 올 데까지 온 느낌입니다. 공포(貢布)를 바칠 즈음이면 늘 장리(掌吏) 등이 못할 짓 없이 무자비하게 침학(侵虐)하는 바람에 인정(人情)020) 으로 드는 비용이 원래의 공물 값보다 두배나 드는 형편이라서 가산을 탕진하고 떠돌아 다니게 된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먼저 각도(各道)를 사문(査問)한 뒤에 내사(內司)를 엄히 단속하여 전일의 폐습을 답습하지 못하게 하고, 제 궁가(宮家)의 도장(道掌)도 【바로 차인(差人)의 명칭이다.】 선조(先祖) 때 의정(議定)했던 대로 혁파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분부하되 내사가 신공(身貢) 외에 내노비로부터 함부로 받아들이는 인정의 수를 제도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아뢰게 함으로써 처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토록 하라."
하였다. 유성이 또 아뢰기를,
"성상의 건강이 아직 쾌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오래도록 신료를 인접(引接)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은대(銀臺)021) 와 옥당의 관원을 때때로 소견(召見)하여 재해를 없앨 대책을 자문하신다면 어찌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송준길이 올라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한번도 사대(賜對)하지 않으셨는데, 현인을 예우하는 도리로 볼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인견할까 한다."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그러면 패초(牌招)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고싶어 한다는 뜻으로 승지가 통지해라."
하였다. 유성이 또 아뢰기를,
"송시열(宋時烈)도 이런 때에 황야에 은둔해 있게 해서는 안 되니, 예를 후하게 하여 초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대로 하겠다."
하였다.
4월 7일 병술
우참찬 송준길, 호조 판서 허적, 부제학 유계가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경이 올라 온 지 오래되었는데도 병 때문에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니 이런 탄식할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니, 준길이 이어 선조(先朝) 때 친제(親祭)를 드릴 때면 반드시 비가 내렸던 일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수성(修省)하는 방법은 요컨대 성(誠)이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 전하께서 신하들을 대하는 것이 형식적인 것입니까, 성심(誠心)에서 우러나온 것입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자신을 채찍질하여 해이해지지 않도록 절실히 경계하소서."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전하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사의(私意)를 없애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구언하여 재해를 없애려 하시더라도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이탁(李琢) 등을 잡아 와 사문(査問)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으로 진달드렸었습니다. 그래서 필시 처분이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조용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이숙(李䎘)에 대한 일도 일찍이 진달드렸었는데 끝내 지휘한 일이 없으셨습니다. 이런 일들 모두가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이토록 가난하고 피폐되었는데 면세전이 너무 많으니 역(役)에 응하는 사람들만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드시 면세하는 규정을 혁파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내사(內司)의 전지(田地)를 궁가(宮家)에 절급(折給)해 준 뒤로는 자손 대에 와서까지도 그대로 면세전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 너무도 근거없는 일이니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경들이 누누이 말해 준 것들이 모두 오늘날의 약석(藥石)이다."
하고, 준길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논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자주 들어와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이런 때에 송시열이 있다면 반드시 보탬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별도로 유지(諭旨)를 내려 올라오게 하소서. 그리고 이유태(李惟泰)와 윤선거(尹宣擧)도 불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이어 옥책(玉冊)을 서사(書寫)하는 임무를 사양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또 흥정당에 나아가 어사인 지평 홍주삼(洪柱三), 이조 정랑 이익(李翊), 좌랑 김만기(金萬基), 부사과 여성제(呂聖齊)를 인견하고, 수령을 염찰(廉察)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는 도리에 대해 면유(面諭)해 보냈다. 교리 이민적(李敏迪)과 부교리 김수흥(金壽興)은 자녀에게 꺼려야 할 병이 있다는 이유로 입시하지 못했다.
4월 8일 정해
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해가 뜰 때 색깔이 매우 붉었다.
상이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면서 정원으로 하여금 구언하는 교서를 초(草)하게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정원에 내린 하교 그대로 팔로(八路)에 반포할 것을 청하니, 상이 겸양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4월 9일 무자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마치 먼지가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사방이 희부옇게 어두웠다.
김우명(金佑明)을 영돈녕부사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으로 삼았다. 우명은 국구(國舅)인데 상중에 있다가 이제 복을 벗었으므로 전례에 따라 봉작(封爵)한 것이다.
4월 10일 기축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원옥(冤獄)을 심리하였는데, 우참찬 송준길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판의금 허적(許積)이 나아가 사람들의 추안(推案)을 읽었다. 윤선도(尹善道)의 추안에 이르자, 준길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죄를 받은 것이 실로 소신들 때문이었으므로 소신이 늘 마음속으로 불안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올라 온 뒤에 한번 진달드리려 했습니다만, 황공해서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죄안(罪案)을 들으니 더욱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의 죄가 매우 중한데도 말감(末減)해서 벌을 주었으니, 경이 미안하게 생각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선도의 죄는 관련된 것이 지극히 중하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만 준길의 말도 매우 좋습니다. 그야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곡진하게 요청을 들어주어 마음을 편안케 해주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다."
하고,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선도를 논계할 때 참여했으니, 지금 감히 다른 의논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대사간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선도의 소(疏)는 준길 등을 공격하여 배척했을 뿐 아니라 국가에까지 관계되어 그 죄악이 매우 중하니, 다른 의논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지극히 인자하시어 흉인(凶人)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궁벽한 곳에서 그가 끝내 죽도록 놔두고 싶지 않으시다면 다른 때에 혹 의논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심리하는 때에 감등(減等)해 줄 경우 사특하게 의논하는 자들이 필시 기세를 올릴 것이니, 결코 관대하게 감해 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제학의 말이 옳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옛날 선묘(宣廟)께서 삼찬(三竄)의 죄를 무겁게 시행하셨을 때,022)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곧바로 그들을 놓아주어 돌려보낼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고인(古人)에게 자신을 견줄 수 있겠습니까마는, 고사(故事)를 말해 본다면 이와 같은데, 신의 역량이 부족해서 일찍이 진달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소장을 보건대 지은 죄가 너무도 무겁다. 그래서 이미 안치시킨 이상, 지금 다시 고칠 수는 없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일단 그의 목숨만은 살려 주셨는데, 삼수(三水)는 죽게 마련인 지역입니다. 게다가 그의 나이마저 80에 가까운데 어찌 꼭 그곳에서 죽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정유성이 아뢰기를,
"준길이 진달드린 말도 매우 아름답고, 삼사가 쟁집한 말도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참찬이 이렇게까지 진달하니, 윤선도를 다른 고을로 옮겨 안치하라."
하였다.
조형(趙珩)을 공조 판서로, 김좌명(金佐明)을 참판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참의로, 이홍연(李弘淵)을 예조 참의로, 홍처윤(洪處尹)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4월 11일 경인
오시(午時)에서 유시(酉時)까지 마치 먼지가 떨어져 내리듯 사방이 희부옇게 어두웠다.
내의원이 전례에 따라 술을 봉진하여 약으로 드실 것을 청하니, 하교하였다.
"이미 금주(禁酒)토록 하였으니, 아무리 약으로 드는 것이라 하더라도 전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3일마다 한 병(甁)씩 감하도록 하라."
4월 12일 신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또 심리를 행하였다. 좌상 심지원이 아뢰기를,
"이렇게 심리하여 크게 은택을 베푸는 때에 유독 지하에 있는 사람에게만 은혜가 미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흠이 될 것입니다. 심집(沈諿)의 일은 당초부터 억울하다고 일컫기도 하였는데, 더구나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추후로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원한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뒤에 가서 다시 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 호판 허적이 모두 그를 추죄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아뢰었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김상헌(金尙憲)은 지론(持論)이 준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만, 그도 심집을 매국했다고 논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작을 회복시켜 준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을미년에 추쇄(推刷)023) 할 당시, 공천(公賤)의 신분으로 등과했다가 도로 천민이 되어야 할 자의 경우에는 노비를 바치고 대속(代贖)하는 것을 허락해 주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유한 자들만 속신(贖身)을 받고, 가난한 자들은 미처 주선하지 못하는 사이에 연한이 홀연히 흘러가버려 한결같이 원망들을 하고 있으니, 이 자들도 대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까지 연한을 늘려 대속하는 것을 허락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추쇄할 때 노비에 관한 일 때문에 죄에 저촉된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중에는 억울하다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 신이 늘 이를 진달드릴까 하다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쟁송하다가 죄에 저촉된 자들 모두가 꼭 엉뚱한 일로 소송한 사람만은 아닙니다. 외방에서 억울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으니, 기한이 넘었다고 핑계대고 청리(聽理)해주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시골 사람들의 여론을 들어보면 바로 명하의 말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날을 당하여 경계하며 두렵게 여기는 마음으로 관대히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저께 심리할 때, 추쇄할 당시의 범죄자 중 전가 사변(全家徙邊)으로 말감(末減)한 자들과 같은 종류는 다시 조사해 아뢰도록 하였다."
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도년(徒年) 이하는 모두 경죄(輕罪)이니, 이렇게 대대적으로 용서해주는 때에 일체 죄를 씻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년 이하는 모두 사면하라."
하였다. 형조가 시수(時囚)024) 에 대해 부표(付標)한 것 가운데 형장을 가한 뒤에 방송(放送)하도록 한 자들은 모두 형장을 면제해 주고, 도년(徒年)으로 의율(擬律)한 자들은 모두 죄를 없애주도록 허락하고, 유 삼천리(流三千里)에 무기(無期)로 전가 정배된 자들은 모두 형장을 면제하고 배소로 떠나보내도록 하였다. 이 날 도년 이하로 석방된 자들은 모두 2백 20여 인이었다.
대신과 근신을 종묘·사직단과 각 산천에 나누어 보내 비를 빌게 하였다. 상이 처음에 직접 기도드리려 하다가 복색(服色) 문제가 난처해서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
"안질(眼疾)이 아직 낫지 않으셨으니, 우선은 대신을 보내고 재차 행할 때 기도하시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 상이 최복(衰服)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길복(吉服)을 착용하는 것을 의심쩍게 여긴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294면
【분류】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천기(天氣)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마치 먼지가 떨어져 내리는듯 희부옇게 흐렸다. 저녁 때 해의 색깔이 보라빛이었다. 밤에 달의 색깔이 붉고 빛이 없었다.
4월 13일 임진
종일토록 사방이 희부옇게 흐렸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또 심리를 행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각도(各道)의 추안(推案)을 읽었는데, 길주(吉州) 죄인 원세흠(元世欽)의 일에 이르자,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일찍이 세흠에게 엄형을 가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장(杖)을 맞은 흔적이 전혀 없다 하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느 곳에서 들었는가?"
하니,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조계원(趙啓遠)이 전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 일이 이 모양이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그가 장을 맞았는지의 여부를 알 길이 없는데,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하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부지런하고 재간있는 선전관(宣傳官) 한 사람으로 하여금 봉수(烽燧)를 적간(摘奸)한다는 명분 아래 급히 가서 살펴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유계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사람을 보내 적간하는 일은 자잘한 듯싶습니다. 일개 세흠 때문에 이런 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실을 알려면 사람을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어떻게 듣고서 그만둘 수 있겠는가. 별도로 선전관 1인을 파견하여 급히 갔다가 돌아오게 하라."
하였다. 또 길주의 죄인 홍이룡(洪二龍)의 추안(推案)을 읽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이룡이 남의 손을 빌어 제작하여 소장을 올린 【이룡은 북로인(北路人)으로 상소하여 준길을 공격해 배척한 자이다.】 그 정상은 가증스럽지만, 이 때문에 죄를 얻는다면 부당할 듯 하니, 관대하게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와 지원이 아뢰기를,
"그의 정상이야말로 지극히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만, 소장을 진달한 일로 정배시키는 것은 여론에 악영향을 미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놓아 보내되 원적(元籍)의 고을로 하여금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외방의 장소(章疏) 중에 어찌 한두 가지라도 쓸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상께서 안질이 아직 낫지 않아 열람하기가 불편하시다면, 때때로 승지로 하여금 나아와 읽게 하고 들으십시요. 그리고 주자(朱子)의 글 중에 긴요한 내용들도 옥당의 신하들로 하여금 미리 대신과 의논한 뒤 입시할 때 진달하게 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깨우쳐주는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날 도년(徒年) 이하의 죄수 2백여 인을 놓아주고 19인에 대해 죄의 등급을 낮춰 주기도 하였다.
4월 14일 계사
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4월 15일 갑오
사관을 보내 판중추 송시열을 불렀다.
금부의 죄인 가운데 도년(徒年)으로 의율(擬律)했는데도 아직 계하(啓下)받지 못한 13인에 대해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대체로 소석(疏釋)해주려는 의도에서였다.
4월 16일 을미
곽지흠(郭之欽)을 집의로, 심세정(沈世鼎)을 부응교로 삼았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번 가뭄의 재해는 수십 년 이래 없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성명께서는 가엾게 여겨 슬퍼하면서 대대적으로 은택을 베푸셨는데도 아직 상림육책(桑林六責)025) 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이번에 공경이 모두 모이는 때를 이용하여 송 인종(宋仁宗)이 천장각(天章閣)026) 에서 했던 것처럼 신하들에게 종이와 붓을 각각 나누어주고, 혁폐(革幣)와 입정(立政)에 관련된 큰 요목을 써서 올리도록 했으면 합니다. 이와 함께 이이(李珥)의 경제사(經濟司)에 관한 설을 본따 예컨대 지금의 선혜청이나 상평청과 같은 명목(名目)을 설치하되, 전적으로 혁폐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칭찬하는 내용으로 답하였다.
영남 금산군(金山郡)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몸 하나에 다리가 다섯이었다.
4월 17일 병신
상이 흥정당의 조참(朝參)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하였다. 검토관 김만균(金萬均)이 아뢰기를,
"이번에 심리하는 목적이 은혜를 크게 베풀기 위한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윤선도의 경우는 유신(儒臣)을 무함했을 뿐만 아니라 선왕(先王)을 범하는 말까지 하였으니 그 죄가 종묘 사직에 관련되는 것인만큼, 송준길이라고 해도 스스로 담당해 나서며 양이(量移)해 달라고 진달해 청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홍원(洪原)은 북도(北道)의 근읍(近邑)이니 죄인을 안치할 곳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일 준길이 먼저 말을 꺼내기에 신도 진달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홍원이 유배지로는 맞지 않는다면 갑산(甲山)에 정배하더라도 양이하는 뜻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그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선묘조(宣廟朝) 때 이이도 삼찬(三竄)을 놓아주도록 청했기에 그 일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을 뿐, 선도를 위해 은혜를 베풀어주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신이 이렇게 진달드리니 또한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만균이 아뢰기를,
"신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탓으로 유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신의 말은 단지 선도의 범죄 사실은 용서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이었지 준길이 그를 위해 은혜를 베푼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만약 홍원을 가깝다고 한다면, 북청(北靑) 등의 지역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북청으로 이배하라."
하였다. 태화가 형제 모두가 고위직에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준길이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면서 옥책(玉冊)을 서사(書寫)하는 임무도 극력 사양하였으나,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고(故) 필선 윤전(尹烇)과 유생 권순장(權順長)·김익겸(金益兼)을 강도(江都) 충렬사(忠烈祠)에 【충렬사는 곧 순절(殉節)한 신하 김상용(金尙容)·심현(沈誢)·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英) 등 제인(諸人)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종향(從享)하였다. 윤전은 고 참의 윤황(尹煌)의 아우로서 다른 재능은 없었으나 사람이 순박하고 근실하였다. 정축년에 궁관(宮官)으로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청(淸)나라 군대가 철수해 돌아갈 때 성 밖으로 끌려나가 그대로 살해되었다. 순장은 고 감사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고, 익겸은 고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로서 태학(太學)에서 학업을 닦으며 모두 이름이 있었다. 김상용이 남루(南樓)에 있을 때 두 사람도 같이 누 위에 있다가 불길이 치솟아도 피하지 않고 죽었는데, 뒤에 헌직(憲職)에 추증되었다. 그런데 강도(江都)의 사자(士子)들이 윤전의 죽음은 분명치 못한 점이 있고 순장 등은 어미가 있는데도 먼저 죽은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충렬사에 들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 유계의 진언에 따라 이렇게 명한 것이다.
고 상(故相)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과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집에 3년을 기한으로 녹봉을 지급토록 명하였다. 이는 승지 민희(閔熙)와 호조 판서 허적(許積)의 진언을 따른 것인데, 양상(兩相)이 모두 경자년에 죽어 상(喪)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집안이 빈한해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4월 18일 정유
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희부옇게 흐렸다.
헌납 오두인(吳斗寅)이 인피하기를,
"윤선도의 죄가 위로 종묘사직에 관련된 것인데도 선왕께서 사형을 감해 북쪽 변경에 유배시킨 것은 유례없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좋은 곳으로 이배(移配)하도록 하자 물정(物情)이 놀라워하며 분개하였으니, 환수하시라는 청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석상(席上)에서 이 말을 꺼내자 동료들이 모두 동의하였는데, 마침 장관에게 본원의 진차(進箚)에 동참할 수 없는 혐의가 있었던 관계로 결국 이 논이 지연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두가 신이 나약해서 빚어진 소치이니 파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안건을 재결하고 파하였다.
영릉(寧陵)의 개수를 명하였다. 처음에 능을 봉(封)할 때 도감의 관원 등이 속히 완결지으려고만 하고 보토(補土)와 석물(石物) 등의 일을 모두 견고하고 정밀하게 하지 않았던 관계로 기울어지고 틈이 생겨 매년 개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통분스럽게 여겼다.
4월 19일 무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희부옇게 흐렸다.
대사간 조복양(趙復陽), 정언 윤변(尹抃) 등이 윤선도를 양이(量移)할 때 논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과 장령 이휘진(李彙晋)·이광재(李光載)도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집의 곽지흠(郭之欽)이 처치하여 오두인은 출사시키고 양사의 관원은 모두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릉(獻陵)에 산불이 일어나 죄다 타버린 일이 있었는데도 능관(陵官)이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감사가 위에 알리니 참봉 및 수복(守僕) 등을 나국하여 엄히 다스리게 하고 즉시 위안제(慰安祭)를 행하였다.
4월 20일 기해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간으로, 윤비경(尹飛卿)·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권격(權格)을 정언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헌납 오두인(吳斗寅)이 윤선도를 이배(移配)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기를 계청하니, 답하였다.
"윤선도의 죄는 죽어도 모자라지만 이번에 유현(儒賢)의 아름다운 뜻을 따라 양이(量移)한 것인만큼 사리에 해가 될 것이 없을 듯하다. 어찌 심리(審理)를 통해 이런 조치가 있게 된 것이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집의 곽지흠(郭之欽)도 환수할 것을 진달드리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1일 경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희부옇게 흐렸다.
행 부사직 조경이 상소하였다.
"신이 이 달 8일에 늙고 병들어 소명(召命)을 받들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외람되게 소장을 진달드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18일에 이르러 도신(道臣)이 전유(傳諭)한 성비(聖批)를 삼가 받들고 신은 황공하고 몸이 떨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아무리 형편없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입니다. 명을 받들고 제술(製述)할 정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찌 감히 상을 기만하는 죄에 스스로를 밀어넣으면서 전하께서 정전(正殿)을 피하고 비를 안타깝게 기다리시는 이때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그칠 줄을 모르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일월과 같은 지혜를 드리우시어 신이 죽기는 쉬워도 근력이 당해내기 어려운 정상을 살펴주소서. 그리하여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신에게 맡긴 제술의 임무를 개정하시고 능력있는 자에게 책임을 부여하신다면 공사(公私) 간에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이 물러가 전야에 엎드려 있으면서 가뭄으로 인한 재해를 목도하고, 이어 자신에게 죄를 돌리는 전하의 분부를 받고 읽어 보니, 애달프게 여기는 글 내용이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자신을 꾸짖었던 것보다 더욱 훌륭하였습니다. 원근을 막론하고 신료된 자라면 그 누가 감읍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찌하여, 무엇이든 보고 듣는 하늘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듯 노여움을 거둘 기색은 없이 날이 가면 갈수록 음울한 안개 기운만 사방에 가득차게 한단 말입니까. 지나친 염려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이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이 현상은 여름철 구름이 맺혀서 이렇듯 혹독하게 가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 기운의 속성을 보건대 요기(妖氣)와 몹시 비슷한데, 신은 장래 나라의 화가 생령(生靈)을 아사(餓死)케 하는 정도로만 끝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두려워하는 자세를 지니셔서 재해를 경계하는 방법이라면 그 어느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없으셨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원옥(冤獄)을 심리하신 것이야말로 첫째로 손꼽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중대소를 막론하고 죄에 걸려 갇힌 사람들은 모두 심리하는 대상에 들어 있었는데, 유독 윤선도만은 심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도가 필시 죽을 사람으로서 살아나 내쳐졌으니, 이것만도 원래 크나큰 성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겠습니다마는 선도의 죄가 과연 무슨 죄입니까. 선도는 단지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에 대하여 효묘(孝廟)를 위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한 죄밖에 없습니다. 선도가 일찍이 예(禮)를 안다는 이름도 드러나지 않은 터에 자기 역량도 헤아리지 못한 채 함부로 대례(大禮)를 논한 점에 대해서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위로 선왕께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 전하의 추효(追孝)하는 도리를 힘쓰게 한 점으로 보면, 그 마음 속의 정성이 분명하게 드러나 거의 숨길 수가 없습니다.
선도가 소장을 올렸던 그 당시에 전하에게 소장을 태워버리라고 계책을 올린 자가 누구입니까. 신이 젊었을 적에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공민왕(恭愍王)이 이존오(李存吾)의 소장을 불태웠고, 광해(光海) 때에도 정온(鄭蘊)의 소장을 불태웠습니다. 공민과 광해 모두 나라를 난망(亂亡)케 한 임금이 아니었습니까. 오늘날 정신(廷臣)들이 구차하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자임들 하면서도, 요순의 도로 전하를 유도하지는 않고 거꾸로 난망의 전철을 밟도록 전하를 이끌어들여 직접 그 일을 행하도록 한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뒷날 국사(國史)에 쓰고 야사(野史)에 기록하기를 ‘모시(某時)에 예를 논한 윤선도의 소장을 불태웠다.’고 한다면, 성덕에 누(累)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뒷날에 오늘날을 평가하는 것이 오늘날에 과거를 평가하는 것과 같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은 삼가 가슴이 아픕니다. 선도의 생사존망(生死存亡)에 대해서 신이 꼭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신은 단지 밝은 이 시대의 거조가 선도의 이 일 하나 때문에 이토록까지 잘못되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 옛날 임금들이 그 사람은 배척하면서도 그가 한 말은 채용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이 종사와 국가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도는 물리치시더라도 선도가 바친 종통과 적통의 설은 단연코 치지도외해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만약 크게 깨달으시어 종통과 적통의 귀결점을 분명하게 구분하시고 선왕의 실록에 밝게 기재하심으로써 예를 논하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신령을 섬기는 방법이 인정(人情)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오르내리는 우리 조종(祖宗)의 영령들께서 이치상 당연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즐거워하실 것이고 이에 따라 견책을 거둬 상서로움이 되게 하고 가문 날씨를 변화시켜 비가 쏟아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하로 하여금 우리 자손들과 백성들을 길이 보전하게 해 줄 것이니, 그 보람이 뭇 요구에 쫓겨다니며 보응을 바라는 것보다야 크지 않겠습니까.
신은 세 조정에 걸쳐 은택을 흠뻑 받은 몸으로 나이 늙도록 죽지않고 이런 참혹한 재앙을 만났는데, 구언(求言)하시는 날을 당해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죽는다면, 머언 길 떠나는 혼백이 무궁한 한을 품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은 이번에 드린 말씀이 세상에서 크게 금기시(禁忌視)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신이 어찌 감히 한몸의 이해만 돌아보고 전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아뢰기를,
"금방 부사직 조경의 상소가 본원에 도착했는데, 그 내용을 보건대 전적으로 선도를 변호할 목적으로 기치를 세우고 선동하는 말들이었습니다. 당초에 예제 논의를 가탁(假托)한 여론(餘論)이 그만 이렇게까지 패려한 말을 늘어놓게 되고 말았습니다. 선도의 죄악이야말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는 것으로서 성명께서도 통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경이 감히 제멋대로 부추켜 세우면서 터무니없는 말로 현혹시키는가 하면 조금도 거리낌없이 음험하게 참혹한 말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왕명을 받들고 출납(出納)하는 본원의 도리로 볼 때는 흐리멍덩하게 입계(入啓)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만,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성상의 감식을 반드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에 봉입(捧入)한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와 같은 소를 보아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도로 내주어라."
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전 판중추 조경은 세 조정을 차례로 섬겼으니 어찌 지식이 없겠는가마는, 애석하게도 소장의 내용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도록 잘못되었단 말인가. 이번 대왕 대비전의 옥책문(玉冊文)을 이 사람에게 제술해 올리도록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으로 다시 부표(付標)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2일 신축
아침부터 종일토록 사방이 희부옇게 흐렸다.
존숭 도감(尊崇都監)이 윤순지(尹順之)를 옥책문 제술 악장문 제술관(玉冊文製述樂章文製述官)으로 승진해 차임하고, 중전 책례 옥책 제술관(中殿冊禮玉冊製述官)은 남용익(南龍翼)·김수항(金壽恒)으로 다시 부표(付標)하여 아뢰었다.
가주서 조성보(趙聖輔)가 명을 받들고 송시열에게 가서 유시하였는데, 병이 중한 관계로 명을 받들 수 없어 사양하였다고 하였다.
4월 23일 임인
아침부터 종일토록 사방이 희부옇게 흐렸다.
대신, 원임, 정부 동서벽(東西壁), 관각(館閣)의 당상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서 회합을 갖고 의논하여 자의 대왕 대비(慈懿大王大妃)의 존호(尊號)를 공신(恭愼)으로 올리고 왕대비의 존호를 효숙(孝肅)으로 올렸다.
집의 곽지흠 등이 전 판중추 조경을 탄핵하여 삭탈 관작(削奪官爵)과 문외 출송(門外黜送)할 것을 청하니, 상이 파직만 허락하였다.
부제학 유계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전에 본직에 있으면서 윤선도의 흉악한 소장을 목도하고 맨 먼저 정배시켜야 한다는 논을 꺼내고 소장을 불태우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국가에서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는 뜻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조경이 이것을 가지고 조정에 죄를 돌리면서 심지어는 ‘직접 말을 몰아 난망(亂亡)의 전철을 따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존오(李存吾)가 요승(妖僧)027) 을 공격해 배척하고 정온(鄭蘊)이 의리를 내세우며 윤기(倫紀)를 붙들어 세운 것이야말로 천지 사이의 정기로서 일월과 빛을 다툴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조경은 그만, 선도가 음해하며 화를 얽어낸 소를 그들의 것과 견주어 동일시하였습니다. 조경이 선조(先朝)의 원로로서 그래도 좀 시망(時望)이 있는데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시비(是非)가 전도될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세도(世道)와 인심이 참으로 해괴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신이 형편없는 탓으로 조가(朝家)로 하여금 모욕을 당하게 하였으니, 신을 체직시켜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경이 세 조정을 섬긴 노신으로서 이렇게 추악한 소를 올리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소를 불태운 그 일은 그대와 관계없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진정(陳情)하며 먼저 삭직(削職)해주기를 청하고 상사(祥祀)가 지난 뒤에는 시골에 물러가 죽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4일 계묘
아침부터 종일토록 희부옇게 흐렸다.
대신이 재신(宰臣)들을 이끌고 빈청(賓廳)에서 모여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할 신하로 고(故)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과 판부사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권점(圈點)하여 초계(抄啓)하였다.
김포(金浦)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이익현(李益賢) 등이 기아(飢餓)에 관한 일로 상소하여 죽음을 구제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이 사람들의 소가 본래 죽음을 구해보려는 나머지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나라에 체통이 없어지면 다스릴 수가 없게 되는 법이다. 수령이 백성의 실태를 파악하여 도신(道臣)에게 보고하고 이에 도신이 계문하는 것이 원래의 체례(體例)이다. 그런데, 지금 그만 이처럼 뛰어넘어 호소하다니, 매우 일이 부당하다. 그리고 정원이 봉입(捧入)한 것도 매우 타당치 못하다. 상소는 도로 내주고, 이 뒤로는 정원도 이런 식으로 하지 말도록 하라."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교외에서 칙사를 영접한 일로 민여로(閔汝老)에게 배척을 당하고 윤선도를 이배한 일로 간원의 논계 중에서 공격을 당했다는 이유로 상차하여 파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위로하는 말로 유시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이 청대(請對)하여 조경을 변호하기를,
"조경의 소를 보건대 내용이 너무나도 어긋났는데 이는 정말 뜻밖입니다. 보통 때 조경을 보면 원래 괴팍스럽거나 경망스러운 인물이 아니고 제법 사망(士望)도 있어 사람들에게 중히 여김을 받고 있는데, 이런 행동을 하다니 매우 괴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도 그 소를 보았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도 보았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렇듯 재해를 입어 구언하는 날을 당해 조경이 유지에 응하여 소장을 진달한 이상 말이 괴팍스럽다 하더라도 벌까지 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경은 이미 산야에 물러나 있는 몸인만큼 삭출(削黜)하더라도 그 몸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만, 조정의 사체로 볼 때에는 구애되는 점이 있을 듯합니다. 연전에 홍이룡(洪二龍)의 소에 대해서도 죄를 가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이 소의 경우이겠습니까."
하고, 지원이 아뢰기를,
"조경의 이번 일이 놀랍기는 합니다만 유지에 응했다는 명분이 있는만큼 죄를 주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윤선도의 일을 내가 제대로 선처하지 못하여 이와 같은 결과를 빚은 것이다. 우참찬 송준길도 이 때문에 불안하게 느껴 꼭 시골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입시했을 때 준길이 진달드린 말의 뜻이 매우 좋기에 신도 진달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신(臺臣)이 이른바 ‘조정에 의리가 밝지 못하다.’고 한 것은 신들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렇기야 하겠는가. 이것은 내가 선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오늘 배향(配享)하는 신하를 뽑는 데 몇 명이나 권점(圈點) 대상으로 써냈던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권점 대상으로 모두 7인을 【이시백(李時白)·구인후(具仁垕)·김육(金堉)·이후원(李厚源)·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김집(金集).】 써냈는데, 그 중에 김집은 조정에 들어간 지가 일천(日淺)하지만 유자(儒者)로서의 중한 명망이 있기 때문에 역시 권점 가운데 들어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을 배향하는 것이 옳은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중흥하고 창업한 임금의 경우에는 배향하는 신하가 많습니다만 기타 계승한 임금의 경우에는 배향하는 신하가 적습니다. 중종(中宗)의 묘정(廟庭)에는 4인을 배향했고,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의 묘정에는 모두 2인을 배향했고, 예종(睿宗)의 묘정에는 한 사람만 배향했습니다. 본래 규정에 정수가 없는데, 이번에 2인을 선택한 것도 여론에 따른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그의 아우 정치화(鄭致和)의 체직을 청하며 아뢰기를,
"신의 직명(職名)을 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판(吏判)이 여러 차례 사직한 것은 실제로 병이 있기 때문이니 체직을 허락해 주시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고금 이래로 언제 영상과 이판을 한 집안에서 독차지한 때가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침에 이익현(李益賢) 등의 소장 내용을 보건대,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이 이미 갈 데까지 갔으므로 내 마음이 타는 듯하여 밥을 먹어도 편안치가 못하다. 해조로 하여금 참작해서 위급함을 구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전일 인대(引對)할 때에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그들이 외람스럽게 소장을 올리긴 하였습니다만, 이미 받아들인 후이니, 그 외람된 행동을 미워하여 허락하지 않는다면, 성상께서 자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인(仁)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흠이 될 듯합니다. 짐작해서 선처함으로써 백성의 기대를 위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상이 이렇게 분부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남한 산성의 미곡 5천 석을 덜어내어 경기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는데, 익현 등 소에 동참한 80여 인이 또 호조에 호소하며 돌아갈 때 소요되는 양식을 얻기를 원하자 해조가 1인당 미곡 1두(斗)씩 지급하였다.
4월 25일 갑진
집의 곽지흠(郭之欽), 장령 박증휘(朴增輝) 등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대신이 ‘조경이 유지에 응하여 진언한 이상 죄를 논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진달드렸다 하니, 신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정도를 지나쳤으나 다른 의도는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조경의 의도한 바가 음험하고 참혹하며 논리가 거만하고 어긋나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유지에 응했다고만 핑계대고 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공민(恭愍)과 광해(光海)의 때를 인용하여 말하였는데, 공민 때의 일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혼조(昏朝) 때에 정온(鄭蘊)이 항소(抗疏)한 일이야말로 윤기(倫紀)를 밝힌 대절(大節)로서 참으로 백세(百世)토록 없어지지 않을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만 조경은 감히 윤선도(尹善道)를 정온에 비유하면서 은연중에 전하를 비유해서는 안 될 자리에 비유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차마 못할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또 조경이 말하기를 ‘선도는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의 설을 가지고 효묘(孝廟)의 편을 들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효묘를 등돌린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가 터무니없이 현혹시킨 정상이야말로 거의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만약 대신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이보다 더 죄가 중한 자가 나오더라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옳단 말입니까. 대신이 진달드린 것은 정말 뜻밖인데, 신들이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권격(權格)도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처치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각이 법을 내세우는 논이야말로 공의(公議)이니, 대신의 일시적인 발언을 꼭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삼가 살피건대, 소장을 불태운 것을 안될 일이라고 한 조경의 말이 과연 군상(君上)을 혼조 때에 견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가. 아무리 곽지흠이 용렬하고 어리석다 하더라도 속마음으로는 필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여 군상을 격노하게 할 여지를 만들어놓고는 은근히 조경에게 화가 돌아가게 하면서 송시열(宋時烈)에게 아첨하여 좋은 자리 하나를 얻어보려 하였다. 비열하도다, 자기 한 몸 돌보는 계책이여. 더러울 뿐만이 아니라 애처롭기까지 하도다.
비국이 추쇄 노비(推刷奴婢) 중 사대부 자손의 대속(代贖)에 관한 사목(事目)을 작성해 올렸는데, 좌의정 심지원이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궐문을 닫으려 할 즈음에 상이 작은 부스럼 때문에 급히 의관(醫官)을 불러 뜸을 떴다. 정원이 아뢰기를,
"약방 제조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데 의관만 입시하게 하는 것은 사체상 미안합니다. 승지 1인을 입시케 하소서."
하였는데, 세 차례 아뢰어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6일 을사
이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치화는 영상 태화의 아우이다. 사람됨이 영민하고 일처리하는 솜씨가 있어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모두 잘 다스렸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여색에 골몰하고 성품 또한 거칠고 속되었다. 궁관(宮官)으로 심양(瀋陽)에 오래 있으면서 소현(昭顯)에게 장단맞춰 집을 짓고 솔깃한 장난 거리를 미리 제공했다는 비난이 꽤나 있었으며, 또 김자점(金自點)에게 빌붙어 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청의(淸議)에 천시되었다. 문벌이 좋은 탓으로 거듭해서 양사(兩司)의 장관을 역임하면서도 처음부터 상당히 저지를 받았다. 급기야 전장(銓長)에 제수되면서부터 물정이 그를 더욱 싫어해 대간의 글에서 조금 그 뜻을 엿보이자, 치화가 병을 이유로 인입(引入)하던 중 몇 차례 사직한 끝에 체직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29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치화는 영상 태화의 아우이다. 사람됨이 영민하고 일처리하는 솜씨가 있어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모두 잘 다스렸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여색에 골몰하고 성품 또한 거칠고 속되었다. 궁관(宮官)으로 심양(瀋陽)에 오래 있으면서 소현(昭顯)에게 장단맞춰 집을 짓고 솔깃한 장난 거리를 미리 제공했다는 비난이 꽤나 있었으며, 또 김자점(金自點)에게 빌붙어 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청의(淸議)에 천시되었다. 문벌이 좋은 탓으로 거듭해서 양사(兩司)의 장관을 역임하면서도 처음부터 상당히 저지를 받았다. 급기야 전장(銓長)에 제수되면서부터 물정이 그를 더욱 싫어해 대간의 글에서 조금 그 뜻을 엿보이자, 치화가 병을 이유로 인입(引入)하던 중 몇 차례 사직한 끝에 체직된 것이다.
4월 27일 병오
윤강(尹絳)을 이조 판서로, 정치화(鄭致和)를 예조 판서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간으로, 김우석(金禹錫)을 헌납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해 마침 정원에 몸담고 있었는데, 윤선도가 상소했던 때를 당하여 탑전에 입시했었습니다. 그때 부제학 유계가 맨 먼저 소장을 불태우자는 논을 꺼냈습니다만, 신도 똑같은 말로 진달드리면서 품지(稟旨)하여 불사르기까지 하였으니, 신이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이번에 조경이 그 일을 트집잡아 터무니없는 소리로 추잡스럽게 헐뜯었는데, 심지어는 공민과 혼조(昏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군부(君父)로 하여금 난망의 전철을 밟도록 유도하고 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속셈을 헤아려 보건대, 오로지 흉인(兇人)을 구해주기에 급한 나머지 방자하게도 거리낌없이 국가를 모욕하였습니다. 미천한 신이 배척당한 것이야 본래 말할 거리도 못되지만 청명한 조정까지 모욕을 당하게 한 것은 신의 죄가 큽니다. 속히 신을 파직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판중추 송시열이 시골에서 입경하였다. 상이 해조로 하여금 계속해서 미찬(米饌)을 대주도록 하였다.
4월 28일 정미
대사간 정지화가 피혐하기를,
"양사가 조경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한 것은 공공의 논에서 나온 것인데, 대신이 등대(登對)했을 때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한다고 했으니만큼 놔두고 죄주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진달한 바가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영상 정태화는 바로 신의 당형(堂兄)이라서 신이 그 사이에서 감히 시비하지 못하겠고 따라서 형세상 본원의 논계에도 동참하기가 어려우니, 신의 직을 체척(遞斥)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정지화가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권격(權格)이 처치하기를,
"현재 전개되고 있는 논을 일단 공공의 논의라고 인정한 이상, 감히 시비하지 못하는 것 정도는 원래 피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 출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북사(北使)028) 가 나오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치계(馳啓)하여 보고하니, 공조 판서 조형(趙珩)을 원접사(遠接使)로 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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