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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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경술

간방(艮方)에 불꽃과 같은 무기(霧氣)가 있었다.

 

3월 8일 정사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병을 이유로 사직 단자를 올리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정유성(鄭維城)을 내의원 도제조로, 이만웅(李萬雄)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3월 12일 신유

사방이 3일 동안 먼지가 떨어지는 것처럼 희부옇게 어두웠다.

 

3월 15일 갑자

집의 곽지흠(郭之欽),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정중휘(鄭重徽)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대신(大臣)이 ‘진향 부사(進香副使) 이정영(李正英)이 술에 취해 함부로 장(杖)을 치고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태제(鄭泰齊)는 이웃 고을에 권속을 거주케 하였는데도 대관(臺官)이 즉시 논계하지 않았다.’고 하며 비난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일과 관련하여, 지체시킨 탓으로 그렇게 되었거나 아니면 전혀 알지 못 한 탓으로 그렇게 되었거나 간에 말씀을 올리지 않은 죄가 신들에게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오두인(吳斗寅), 정언 여성제(呂聖齊)·정륜(鄭錀)도 서로 잇따라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교리 오시수(吳始壽) 등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러나 지흠 등은 정고(呈告)하고 나오지 않았다.

 

장령 송시철(宋時喆)이 성묘하고 돌아와 추후로 인피하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처치하였다. 그 대략에,
"정태제(鄭泰齊)가 권속을 밀양(密陽)에 거주시켰던 것이 시철이 밀양에 수령으로 있었던 때이고 보면 시철이 응당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각에 있는 신분으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20일 기사

목겸선(睦兼善)을 집의로, 김우석(金禹錫)·민여로(閔汝老)를 장령으로, 박증휘(朴增煇)를 헌납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지평으로, 정박(鄭樸)·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사간으로 삼고, 좌승지 남용익(南龍翼)을 승진시켜 도승지로 삼았다.

 

정언 정박(鄭樸) 등이 아뢰기를,
"동래 부사 정태제(鄭泰齊)가 가족을 이끌고 와 밀양에 살게 한 뒤 뻔질나게 왕래하며 각종 폐단을 끼친 것이야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만, 변방의 수령이 된 신분으로 제멋대로 임소를 이탈하는 등 법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군 정상이야말로 더욱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나문(拿問)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5일 갑술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이원정(李元禎)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3월 27일 병자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 우의정 원두표(元斗杓), 부사(副使) 홍전(洪瑑), 서장관(書狀官) 김우형(金宇亨) 등이 연경(燕京)을 향해 출발했다.

 

민응협(閔應協)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우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어제 어사(御史) 5명에게 행장을 꾸리도록 명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이미 늦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떠나보내실 적에 진휼하는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 편리한 대로 알아서 처리하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수령에게 죄과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조정에 돌아 온 뒤에 서계(書啓)하도록 하고, 혹시라도 경솔하게 수령을 파출시킴으로써 도리어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또 의관(醫官)이 약을 싸들고 가서 구제할 경우 형세상 두루 구제해주기 어려운데, 오직 방백과 수령들이 어떻게 협력해서 살려내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가(朝家)의 명령을 외방에서는 기꺼이 받들어 따르려 하지 않으니, 어사로 하여금 극력 더 규찰하도록 하여 실효를 거두게 하소서."
하고, 자주 신료를 접하여 사무가 지체되지 않도록 하기를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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