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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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기유

비국이 아뢰기를,
"경기·황해·평안 3도에 행문(行文)029)  하여 통정 대부 이하의 사명(使命)이 교자(轎子)를 타는 잘못된 관례를 통렬히 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행 대사간 정지화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방금 듣건대, 물의가 ‘당형(堂兄)은 친 부형과 견줄 것이 못되는데 하필 억지로 피혐했단 말인가.’ 한다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한 집안이면서 논의하는 것에 차이가 난다면 곤란하다. 그리고 조경의 소가 터무니없이 현혹시킨 것이고 보면 누가 죄가 없다고 하겠는가만 일단 유지에 응한 것이라고 했으니, 통렬히 사리를 따져 배척해 끊어야 옳지, 죄벌을 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신의 견해는 실로 대신이 진달드린 뜻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이 인혐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는데, 지금 그만 물의에 의해 비난을 받고 말았으니,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권격이 전일 처치하면서 정지화의 출사를 청했었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헌납 김우석(金禹錫)이 처치하기를,
"흉인을 변호하면서 화를 일으킬 말로 선동했다면 유지에 응했는지의 여부는 따질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이미 ‘통렬히 사리를 따져 배척해 끊어야 한다.’고 해놓고는 다시 ‘죄를 논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했으니, 말이 매우 구차스러워 자못 의의가 없습니다. 관례에 따라 출사를 청한 것이야 무슨 체직될 만한 잘못이 있겠습니까. 지화는 체직시키고 권격은 출사케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3일 신해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난번 송 판부사가 올라 왔다는 말을 듣고 내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는데 상제(祥祭)를 지내고 나서 바로 만나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내일쯤 내려갈 것이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으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범염(犯染)030)  을 이유로 내세우더라도 당사자에게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면, 이를 구애받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지난 해 도성을 떠날 때 내가 만나보지 못해 지금까지도 못잊어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모레 만나보겠으니 조금 머물며 기다리라는 뜻으로 급히 사관을 보내 전유토록 하라."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영상과 좌상이 공동으로 시열이 산반(散班)으로 제사에 참여한 뒤 곧바로 귀향하려 한다는 뜻을 진달드렸기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부호군 이유태(李惟泰)가 올라왔다고 하는데, 상제가 지난 뒤에는 내가 만나볼 터이니, 모레 일찍 와서 대기하라는 뜻을 본원이 미리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5월 4일 임자

대상제(大祥祭)를 행하였다. 상이 서쪽 막차(幕次)에서 교자를 내려 도보로 경모전(敬慕殿) 판위(版位)에 나아가 부복하고 초헌관(初獻官)으로 하여금 폐백을 올리고 헌작(獻爵)케 하였다.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소차(小次)031)  에 나아가 휴식을 취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일렀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물러 나가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여기에서 그냥 버텨 나가겠다."

 

5월 5일 계축

송시열이 미찬(米饌)을 고사(苦辭)하며 받지 않는다고 아뢰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승지 이은상이 아뢰기를,
"판부사 송시열과 부호군 이유태(李惟泰)를 오늘 만나보겠다고 명하셨습니다. 유태는 사은 숙배한 뒤에 와서 대기하고 있습니다만, 시열은 어제 저녁에 본원에 말을 전해 오기를 ‘처음에는 아들의 병이 그리 대단치는 않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나가 이미 며칠 동안 피했으므로 내일 은명(恩命)에 사은 숙배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듣건대 병세가 점점 위독해진다고 하는데 부자간의 정리상 차마 그만둘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들어가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한 집안이 상환(喪患)을 당한 뒤끝이라서 이 증세가 또한 매우 의심스럽다. 이미 범염(犯染)한 몸으로 감히 궐문을 출입할 수는 없다. 황공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의사(醫司)로 하여금 의원을 보내 구료(救療)케 하고, 불가불 처소를 옮겨야 하겠다는 뜻도 전유(傳諭)케 하라."
하였다.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이 ‘어미의 병이 매우 위중해 국상(國祥)에 달려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파직을 청하고, 또 진달드린 내용이 있었다. 그 대략에,
"전 좌윤 권시(權諰)는 곧 선조(先朝)에서 예우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마디 말의 실수 때문에 배척을 당해 물러났는데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서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판중추 조경은 곧 세 조정을 섬긴 구신(舊臣)입니다. 그런데 유지에 응해 하나의 소를 올리자 천노(天怒)가 갑자기 진동하면서 정원과 대각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각각 이치에 어긋났다고 배척하는가 하면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하라고 논하는 등 효상(爻象)이 좋지 못하니 신은 삼가 개탄하는 바입니다. 더구나 전일 구언하시면서 ‘말이 맞지 않더라도 그 때문에 죄를 주지는 않겠다.’고 이미 분부하셨으니, 가령 조경의 소가 실제로 잘못되고 망령스럽다 하더라도 용납해주어야 하고 그냥 놔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그에 따라 죄를 줌으로써 중외(中外)로 하여금 실망케 하고 원근의 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놀라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이로부터 언로가 두절되어 전하께서 단지 위의 뜻에 영합하는 말들만 듣게 되실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충성스러운 말은 다 하게 하고 먼저 들어온 설을 위주로 하지 말 것이며, 공도(公道)를 널리 펼쳐 패거리를 짓는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정령(政令)을 발하고 일을 처리하는 즈음에 인심을 열복시키게 되면, 천심이 기뻐하고 화기가 뒤따라 응해서 재앙이 상서로 바뀌고 화가 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뒤에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진언한 정성을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고 올라오라."
하였다.

 

장령 박증휘(朴增輝)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조경의 소가 음험하고 참혹하며 바르지 못한 정상을 성명께서 모두 환히 알고 계실텐데 지금 부질없이 말로만 배척하시고 악을 징계하는 법전은 보여주지 않으시어 마침내 시비가 밝혀지지 않고 사정(邪正)이 구별되지 않게끔 하셨으니, 신은 앞으로 국가의 일이 어떤 경지로 치닫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은 국상(國祥)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스스로 탄핵하는 외에는 다른 말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만 감히 따로 의견을 내세워 공공연히 조경을 변호하고 대각을 업신여기면서 그를 구하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가령 국가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신이 윤선도의 패거리 한 사람을 논했으나 아직껏 윤허를 받지 못한 채 거꾸로 다른 일을 가지고 번독케 해드리고 있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길주(吉州)에 성무(腥霧)가 끼었다. 그 안개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면 악취에 견디기 어려웠다.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부령(富寧)·삼수·갑산에 서리가 내렸다. 고원(高原)·영흥(永興)에 우박이 쏟아졌다. 이상의 사항을 감사 권우(權堣)가 치계(馳啓)해 보고했다.

 

5월 6일 갑인

김남중(金南重)을 형조 판서로, 김좌명(金佐明)을 지의금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응교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유명윤(兪命胤)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납 김우석(金禹錫)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조경의 상소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리로 현혹시키고 음험하여 바르지 못한 것인데, 조정에서 사정을 응당 분별해야 하고 보면, 그가 유지에 응해 올린 것이라고 핑계대고 분명히 밝히지 않음으로써 사론(邪論)이 다시 기승을 부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이 이미 조경의 죄를 청한 논의에 참여했던 것인데, 갑자기 헌장(憲長)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상소하여 재이(災異)를 논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진부한 말들뿐이었다. 그런데 끝 부분에 가서 조경을 배척함으로써 감히 주제넘는 꾀를 이룰 계책을 내었는데, 그가 작성한 내용을 살펴보면 실로 사림을 일망타진할 수단들이었다. 이에 시열에게 빌붙은 무리들이 그를 대대적으로 추장(推奬)해 준 결과 곧바로 아장(亞長)에 임명되면서 자급이 오르기까지 하였다.

 

5월 7일 을묘

장령 윤비경이 인피하는 기회를 이용해 온 힘을 기울여 조경에게 모욕을 가했는데, 끝에 가서는 ‘대신이 유지에 응했다는 핑계를 대고 죄를 주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고 하면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남천한(南天漢)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국상(國祥)이 임박했기에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조금씩 도성으로 향해 오다가 기력이 거의 탈진되어 여관에 쓰러져 눕고 말았는데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양사의 관원들이 잇따라 인피하였으니 신이 처치해야 하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일어나려 하다가 도로 쓰러지곤 하여 처치를 하루나 늦게 하였고, 전계(前啓)로 하여금 전하지도 못하고 정지하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나 잘못을 범했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외방에서 와서 시의(時議)에 어둡습니다마는, 유지에 응해 진언한 조경을 꼭 죄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수익(趙壽益)이 사직소를 올리면서 소회를 대략 진달드렸던 것인데, 관원들이 인피하여 일대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신이 남을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서는 결코 안 되는데, 속 생각을 털어놓지도 못한 채 그저 인피만을 일삼게 되었으니, 이렇게 나약한 몸으로는 한 시각도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본직(本職) 및 겸대(兼帶)한 좨주(祭酒) 등의 직책을 풀어주고 고향에 돌아가 죽게 해달라고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뛴다. 이 뒤에 마땅히 면유(面諭)하겠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이조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돌아가겠다고 고하니, 답하였다.
"군신 간에 어찌 이다지도 성의(誠意)가 서로 미덥지 못하단 말인가. 내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대가 떠나더라도 서로 만나보고 면유(面諭)할 일이 있으니, 내일 아침에 들어와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밤에 토성(土星)이 저성(氐星) 속으로 들어갔다.

 

5월 8일 병진

지평 최유지(崔攸之)가 양사를 처치하기를,
"음험하고 참혹한 소가 불쑥 튀어나와 화를 전가시킬 계책을 세웠고 보면, 이를 논죄한 일이야말로 공의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변호하는 소장이 관망하는 대신(臺臣)에게서 갑자기 나와 공공연히 바른 것을 배척하고 삿된 것을 붙들어 세우려 하였는데, 그가 일단 사사로움을 품은 이상 우리 쪽에서 혐의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말을 충성스럽게 하고 절개를 곧바로 세운 것은 그 풍채가 가상합니다. 대직(臺職)에 있는 신분으로 할 말을 못하고는 ‘속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고 말하다니, 대각의 풍채로 볼 때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장령 박증휘(朴增輝)·윤비경(尹飛卿), 헌납 김우석(金禹錫)은 출사케 하고, 정언 남천한(南天漢)은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진찰할 때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에게 이르기를,
"송 판중추의 집에 의원을 보내라고 일찍이 명했는데, 과연 매일 가서 대기하고 있는가? 그리고 의원의 솜씨에 대해서는 또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보낸 의원의 솜씨가 정밀하지 못해 어제는 박군(朴頵)을 보았으면 했는데, 내의(內醫)에 속한 신분이라서 감히 곧바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국(內局)에 박군이 없어도 무방하니 매일 가서 대기하도록 하고, 의사(醫司)에서 그날그날 당번으로 보내는 의원도 엄격히 선발해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다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질병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찌 한번 볼 수 없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들어와서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이때 유태가 이미 동교(東郊)에 나가 있었는데, 상이 전소(前疏)에 대한 비답을 보내어 그에게 전했는지의 여부를 하문하자, 정원이 대답하기를,
"사직소가 또 도착했는데 재계(齋戒) 중이시라서 입계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마침내 들이도록 명하고, 이어 비답을 내렸다.

 

지평 최유지(崔攸之)가 상소하여 진황에 대한 일을 진달하고 이어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그대의 소를 살펴보건대 나도 몰래 한심한 생각이 든다. 진구하는 등의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겠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희택(李喜澤) 등이 상소하여 조경이 간사하다고 배척하고, 송시열과 이유태를 머물려두어 사림을 위로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도 정성을 다해 그들을 억지로라도 붙들고 싶다.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나도 더욱 성의를 다 할테니 그대들도 정성을 모두 기울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은 국기(國忌)라서 재계 중이었는데, 정원이 미품(微稟)032)  하여 그 소를 들인 것이다.

 

5월 9일 정사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멀리까지 예관(禮官)을 보내시어 조묘(祧廟)에 대한 예를 자문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신이 어찌 감히 끝까지 한 말씀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묘제(廟制)의 세수(世數)를 살펴 보건대, 태조(太祖)에서부터 사친(四親)까지 이미 5세(世)가 되었고 보면,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의 두 묘(廟)는 모두 수(數) 밖으로 벗어나니, 오늘날 모두 조천(祧遷)하는 것에 대해서야 또 무슨 의심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宋)나라 태묘(太廟)에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합하여 1세(世)로 하고, 철종(哲宗)과 휘종(徽宗) 그리고 흠종(欽宗)과 고종(高宗) 역시 각각 1세씩으로 한033)   데 대해서 주자(朱子)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인묘(仁廟)와 명묘(明廟)도 친분상으로는 형제간이지만 의리상으로는 부자(父子)간과 마찬가지이니, 합해서 1세로 한다면 주자의 교훈에 어긋나는 점이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국가의 전례(典禮)로는 종묘(宗廟)보다 중대한 것이 없으니, 참으로 소홀히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조정의 묘제(廟制)를 보건대, 태조(太祖) 와 사친(四親)의 신주(神主)가 모두 태묘(太廟)에 있어야 하는데, 목조(穆租)·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 와 여러 사당의 조주(祧主)가 모두 영녕전(永寧殿)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목조처럼 존귀한 분이 별묘(別廟)에 계신다는 것은 예의로 따져 볼 때 그야말로 온당치가 않습니다.
지금 아조의 태묘를 송(宋)나라의 묘제(廟制)와 견주어 보면, 우리 나라의 목조는 송나라의 희조(僖祖)로서 주(周)나라의 후직(后稷)에 비견되는 분이고, 우리 나라의 태조와 태종은 역시 송나라의 태조와 태종으로서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 비견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목조가 태묘의 첫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채 태조가 태묘의 제1실(室)에 있게 된다면, 이야말로 선유(先儒)가 말한 대로 ‘희조(僖祖)는 공업(功業)이 없다고 치부하고 천하를 얻은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된 일이라고 하여 서로 다투어 강약을 비교하는 것이니, 또한 겸손하게 피할 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는 결과로 귀착되고 말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의견으로는, 우리 선왕을 천부(遷祔)하는 때를 이용하여 목조를 태묘의 제1실로 옮겨 모셔 시조(始祖)로 삼고, 태조와 태종 이하 세실(世室)의 예(禮)는 한결같이 주가(周家)의 옛 법도를 준행하는 동시에, 태묘에 동서(東西)의 협실(夾室)을 조성하여 익조 이하의 조주(祧主)를 봉안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명분으로나 이치로나 바름을 얻게 되어 의리가 밝아지고 일이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그 소를 해조에 내렸다. 그러나 뒤에 여러 대신들이 난색을 표명하여 결국 그 일이 행해지지 못했다.

 

5월 11일 기미

심세정(沈世鼎)을 집의로, 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김광찬(金光燦)을 공조 참의로 삼았다. 광찬은 김상헌(金尙憲)의 소후자(所後子)034)  이다. 음관(蔭官)으로 벼슬하여 주군(州郡)의 직책을 두루 역임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 직책에 제수되었다. 이는 그의 아들 김수항(金壽恒)과 김수흥(金壽興)이 바야흐로 요지(要地)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윤비경에게 배척받았다는 이유로 상차하여 파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한 마디 말을 잘못했다고 하여 시의(時議)가 점점 준열해지고 있습니다. 대관(臺官)이 인피(引避)한 말을 보건대, 신들을 더욱 꼼짝못하게 잡아매면서 ‘임금을 유도하여 간사하게 참소한 자를 비호해 주도록 하고 대장(臺章)을 막아버렸다.’는 것으로 단정하여 죄안을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윤비경 한 사람만의 말이겠습니까. 당당한 논(論)을 더욱 상상할 만합니다.
신들이 용렬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대신의 반열에 몸담고 있는 이상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모두 진달드려야 합니다. 이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간의 입장에서 진정 이것이 죄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면 곧바로 탄핵한다 해도 본래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가 피혐하는 내용 속에 슬쩍 끼워넣어 힘을 남기지 않고 마구 제멋대로 배척하였으니, 이 모두가 신들이 형편없어서 나온 결과입니다. 일찍 파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정승 자리를 차지한다면 조정에 편안할 날이 없을 것이고, 신들 역시 의견 하나 제시하지 못한 채 사람들의 입만 쳐다볼 수도 없는 형편이니, 속히 신들의 직책을 깎아버리고 다시 어질고 덕있는 정승을 가리도록 명하시어 진정책을 도모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 나라의 일이 정말 한심스럽다. 경들의 뜻은 전적으로 언로를 넓히고 뒷 폐단을 염려하는 것이었는데, 비경이 그만 대장(臺章)을 막아버렸다고 하면서 제멋대로 능멸하였으니, 경망스럽고 무식하기 그지없다. 내가 이미 환히 알고 있으니, 경들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영상과 좌상이 청대(請對)했을 때 신의 의견도 같았으므로 입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은 조경과 일찍이 백마(白馬)에서 【백마는 의주(義州)에 있는 산 이름인데, 경석과 조경이 일찍이 청(淸)나라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같이 이곳에 유배되었었다.】  같이 고생한 혐의가 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양신(兩臣)은 입대한 신하이고 신은 입대하지는 않았으나, 양신과 의견을 같이 하니 입대했는지의 여부로 따지면 차이가 있지만 마음 속의 생각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견식이 혼미하여 뭇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매도를 자초하고 있으니, 속히 신을 파직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죄케 하소서."
하니, 상이 위로하는 말로 유시하였다.

 

장령 윤비경(尹飛卿)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대신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성지가 지극히 준엄하여 ‘경망스럽고 무식하다.’는 등의 말씀까지 계셨으니, 신은 본래 황공하여 대죄하는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다만 신의 잘못된 견해로는 다음과 같이 여겨집니다.
악을 엄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소인을 두렵게 할 길이 없고, 사특한 것을 명확하게 분별하지 않으면 공의가 행해질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경의 소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으로서 물의가 놀라고 분개하여 공론이 바야흐로 펼쳐지고 있었는데, 대신이 그를 죄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전하의 앞에서 진달드렸는가 하면, 대계(臺啓)가 합동으로 발론(發論)된 날에는 미리 앞서서 청대(請對)하여 죄를 가하지 말라고 청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해 그를 비호해주고 대장(臺章)을 막아버린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조경이 음흉한 마음으로 흉계를 품고 시기에 편승해 넘본 정상을 살피건대, 유지에 응했다는 핑계로 용서해줄 수는 결코 없는 일입니다. 만약 유지에 응했다는 이유로 끝내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이는 구언하신 훌륭한 일이 그저 괴귀배(怪鬼輩)들이 간악한 꾀를 이루는 발판이 되기에 안성맞춤이 될 뿐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신의 차자를 보건대, 어투가 너무나도 준엄하여 심지어는 ‘힘하나 남기지 않고 마구 제멋대로 배척하였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위와 아래가 서로 부화뇌동하여 아첨하는 풍조가 이루어지게 한다면, 장차 대관(臺官)을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신이 한 마디 말을 망발한 탓으로 앞에서는 대신이 배척하고 뒤에서는 엄한 비답이 잇따라 내려오게 되었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영남(嶺南)의 경우, 기민(飢民)이 4만 7천 5백여 인, 【진구할 대상임.】  전염병 환자가 1만 8천 90여 인, 물고(物故)된 자가 9백 38인이었다.

 

5월 12일 경신

김남중(金南重)을 동지 경연으로, 조윤석(趙胤錫)을 동부승지로, 【특지(特旨)임.】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권격(權格)을 지평으로 삼았다.

 

지평 최유지(崔攸之)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윤비경이 피혐했을 때 신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비경에게 망언한 죄가 있게 되었고 보면, 비경을 편든 자 역시 망발한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하게 처치하겠습니까. 체파(遞罷)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경의 말이 또한 괴이하지 아니한가. 대신이 말한 것이야말로 음험하게 조경을 구해주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단지 의견에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일 뿐인데, 어찌 이다지도 다그치며 모욕을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대신의 차자 내용에 드러나게 노여워하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대신이 일단 억울한 말을 들었고 보면, 어찌 상차하여 진정하는 행동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비경이 피혐하면서 장황하게 떠벌여대며 대신에게 마구 분노를 퍼부어댔으니,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참의 이유태가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5월 13일 신유

호조가 청하기를,
"경창(京倉)에 있는 대두(大豆) 1만 5천 석(石)을 기읍(畿邑)에 나누어주어 경종(耕種)할 자본으로 삼게 하고, 추수한 뒤에 그 숫자대로 받아들여 경창에 수납케 함으로써 가을철 이후 계속 사용할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우참찬 송준길, 호군 이유태, 영부사 정유성(鄭維城)을 인견하였는데,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도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이 왜 이다지도 불안하기만 한가. 백헌(白軒)은 【이경석(李景奭)의 호(號)임.】  인입(引入)한 채 나오지 않고 우참찬은 욕심대로 떠나가려고만 하니, 분위기가 과연 어떠한가. 그리고 대신은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한 것인데, 지금 와서는 도리어 시끄럽게 되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조경의 소가 패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혹 심각하게 다스리면 오히려 한층 더 시끄럽게 되겠기에 신이 일찍이 홍명하와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심각하게 다스리려 하지 않았던 데에는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윤비경이 ‘대신의 말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어찌 망령되지 아니한가."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올라온 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 지금 내려간다면 밖의 사람들이 필시 ‘대신이 조경을 구원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유태도 떠나가려고 합니다만, 오늘날의 형세로 보면, 이 두 사람을 만류해 있도록 해야만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준길이 오늘날의 사태에 대해 의리상 꼭 내려가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신은 그래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더욱 강력하게 물러나기를 청하면서 심지어 아뢰기를,
"지금의 기회를 잃고 물러나지 못했다가 앞으로 혹시 대단한 사태라도 벌어지면 성명께서 아무리 어리석은 신을 유감으로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무슨 말을 이렇게까지 하는가. 경이 지금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윤선도의 무리로 하여금 계책을 이루게 해주는 일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마음속의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윤선도는 본래 한 시대에 버림받은 인물로서 그 소(疏)도 마음 깊이 쌓인 원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조경의 경우를 보건대 그 사람됨이 어찌 선도에 비길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소의 내용을 보면 또 선도로서는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선도의 소 중에는 없는 말까지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전하께서 보살펴주지 않는 한 소신이 신의 몸과 종족을 보전할 기대를 감히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감히 스스로 평인(平人)과 같이 태연스럽게 물러나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한번 조경의 소가 나온 이후로 인심이 흉흉해지면서 모두들 놀랄 만한 판가름이 조석에 박두했다고 여기는데 시사(時事)도 아직까지 안정되지 못하고 근심스러운 형편이므로 소신이 이에 감히 청대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경은 세 조정을 차례로 섬기면서 상당히 명망이 있었는데,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이유태가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조경의 간사함을 이미 알았었는데, 이제 그의 소장에 분명히 나타났으니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 만합니다."
하고, 유태가 아뢰기를,
"소신이 과연 일찍이 그런 말을 함부로 한 적이 있습니다만, 어찌 족히 시비 거리가 되겠습니까."
하고, 유성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이런 점은 제왕들이 분별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통렬하게 분별해 놓으셨으니, 어찌 송준길 개인에게만 다행이 되겠습니까, 실로 종묘 사직과 신민의 복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경이 상소하여 아무리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려 해도 작당하고 있는 행태를 스스로 숨기기 어려운 점이 있다. 선도가 예를 논한 설을 나의 안목으로 보건대 구절구절 잘못되었다. 3년상이 정통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런데도 조경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선도가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것처럼 이 설을 처음 지어내자 조경이 또 따라서 화답한 것인데, 지난번 성명께서 분별하여 배척하지 않으셨더라면 시사(時事)가 거의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이이(李珥)가 선묘(宣廟)의 지우(知遇)를 받다가 계미년에 배척을 당해 끝내는 내려가고 말았는데, 오늘날 소신의 형세는 또 계미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아무리 경석(經席)에서 인원 수나 채우는 자질로나마 길이 천안(天顔)을 모시고 싶더라도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온 뒤에 형세상 불편한 점이 있어 소장을 진달하여 돌아가기를 청했는데 선묘(宣廟)께서 결국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이 재직(在職)하던 날 역시 불편한 일이 있어 간절한 사연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는데 인조(仁祖)께서 또한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도 성주(聖主)가 신하를 예(禮)로 대했던 뜻을 알 수 있는데, 옛날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신처럼 낭패를 당한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재 조정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계미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경에게 무슨 난처한 일이 있겠는가. 내가 만약 경을 만에 하나라도 의심받을 곳에 놓아두는 것이라면 반드시 이렇게까지 극력 만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경은 어찌하여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야말로 선조(先朝) 때 이미 평가가 끝난 몸이니, 오래 머물러 있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오직 성명께서는 물러가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한 나라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지녔으니, 가고 오는 것이 나라의 경중(輕重)이 되는데, 어쩌자고 머물러 있어도 이익이 없다고 말하는가. 가령 조정에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아무리 성현이 다시 나온다 한들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처럼 절실하신데 준길이 어떻게 받들어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준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지금이 어떤 때인데 조정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지 않고 몸을 빼어 돌아가려고만 생각하는가."
하고, 또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이 두 사람을 만류하지 않으면, 조정이 끝내 진정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염치 한 조목이야말로 사대부의 큰 관건입니다. 신이야 구차하게나마 머물고 싶다 하더라도 염치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절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늘 어미의 묘소를 이장하려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이루지 못해 평생의 큰 한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리상(情理上)으로 차마 못할 짓입니다. 성상을 번거롭게 한데 따른 주벌(誅罰)은 신이 피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늘 이 일을 이유로 떠나겠다고 청한다마는, 오늘날의 형세로 보아 결코 떠날 수 없으니, 경은 유념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신이 불초한 줄 모르시고 유신(儒臣)의 예(禮)로써 대우하여 은혜로 돌보아 주신 것이 날로 융성했고 더욱 중하게 책임을 맡기셨는데,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그 성의가 쇠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이 아무리 형편없지만 어찌 선왕께 보답하고 전하에게 충성을 바쳐야 할 의리를 잊겠습니까."
하고, 이어 학문 공부에 대한 일을 거론하여 누누이 수십 백 언(言)을 진달하였다. 유성이, 스스로 겸양하며 준길을 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우참찬이 물러가는 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는가."
하고, 또 이유태에게 이르기를,
"올라온 지 오래 되지도 않아서 꼭 떠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였다. 유태가 노모의 병이 중하다는 이유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유성이, 그를 넉넉하게 돌보아줄 것과 해조로 하여금 양찬(粮饌)을 보내게 할 것을 청하였다. 유성과 명하가 또 대신에게 전유(傳諭)하여 속히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5월 14일 임술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심지원이 다시 나와 일을 보았다.
사신은 논한다. 태화는 풍채가 훌륭한 데다 담소를 잘 했으며 관리의 업무에 숙달하고 조정의 법제를 잘 알았으므로 시론(時論)이 몇 차례 바뀌어도 지위는 더욱 안정되었고 세 조정을 차례로 섬기는 동안 총애는 더욱 융숭하였다. 비록 계산이 밝다는 비난과 공손한 척 한다는 조롱을 받긴 하였으나, 그 재기(才器)를 논한다면 역시 당대의 으뜸이라 할 것이다. 지원은 순후하고 착실하다는 이름이 조금 있었으며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병자년 변란 때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빈궁(嬪宮)을 버린 채 성을 넘어 도망친 죄로 10여 년 동안 폐척(廢斥)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만년에 궁금(宮禁)과 연결되어 마침내 총애를 받고 발탁되어 정승이 되었는데, 녹록하게 수행(隨行)이나 하면서 조정에서 들러리 서는 무능한 대신이 되었을 뿐이었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9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태화는 풍채가 훌륭한 데다 담소를 잘 했으며 관리의 업무에 숙달하고 조정의 법제를 잘 알았으므로 시론(時論)이 몇 차례 바뀌어도 지위는 더욱 안정되었고 세 조정을 차례로 섬기는 동안 총애는 더욱 융숭하였다. 비록 계산이 밝다는 비난과 공손한 척 한다는 조롱을 받긴 하였으나, 그 재기(才器)를 논한다면 역시 당대의 으뜸이라 할 것이다. 지원은 순후하고 착실하다는 이름이 조금 있었으며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병자년 변란 때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빈궁(嬪宮)을 버린 채 성을 넘어 도망친 죄로 10여 년 동안 폐척(廢斥)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만년에 궁금(宮禁)과 연결되어 마침내 총애를 받고 발탁되어 정승이 되었는데, 녹록하게 수행(隨行)이나 하면서 조정에서 들러리 서는 무능한 대신이 되었을 뿐이었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윤비경이 피혐한 내용을 보건대 자못 곧바르니, 성명께서는 차라리 비경을 편들어 말하는 자들을 나오게 하시고, 신들을 물리쳐 공의에 사과토록 하소서."
하고, 지원이 아뢰기를,
"듣건대 송준길이 소장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했는데 돌아갈 뜻을 이미 굳혔다 하니, 성심껏 만류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이키게 하소서."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조경의 소 중에 ‘효묘(孝廟)를 위해 좌단(左袒)035)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준길이 불안해하는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가령 윤선도가 좌단했다면 신과 준길은 똑같이 우단(右袒)036)  한 것이 되니, 신도 황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도가 한 이야기의 뜻은 대체로 내가 대사(大事)를 미진하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나를 가리켜 배척한 것인데, 경들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역시 준길을 만류할 것을 청하고, 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상께서 앓고 계시는 종환(腫患)이 아직 쾌차되지 않았으니 결단코 칙사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시종신을 보내어 칙사에게 이를 언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태묘(太廟) 조천(祧遷)의 예를 의논하였는데, 부제학 유계는 송시열의 주장이 고례(古禮)에 매우 부합된다고 하면서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의 양위(兩位)를 같은 소목(昭穆)의 위치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호조 판서 허적(許積)도 시열의 말이 옳다고 하였으나, 태화가 아뢰기를,
"고례에 근거한 시열의 주장이 매우 정당하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조종(朝宗) 역시 성인(聖人)들이신데, 3백 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그 제도를 고친다면 일이 지극히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터 유신(儒臣)이 늘 고례대로 행하려 하다가도 끝내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고, 이것도 역시 하나의 왕법(王法)입니다. 더구나 형제를 같은 소목의 위치에 두는 것은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때의 고례로서, 조종조에서 어느 것 하나 고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고친다면 또한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5월 15일 계해

실록을 찬수한 신하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총재관(摠裁官)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내리고, 도청(都廳) 당상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고 지사 채유후(蔡𥙿後)·병조 참판 이일상(李一相)과, 도청 낭청 부응교 김수흥(金壽興)·응교 심세정(沈世鼎)·수찬 목겸선(睦兼善)과, 양주 목사(楊州牧使) 조귀석(趙龜錫)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각각 마필(馬匹)·마장(馬粧)·궁자(弓子) 등 물건을 내렸다.

 

정언 이동명(李東溟)이 윤선도를 이배시키도록 한 명을 환수할 일로 연계(連啓)하니, 상이 따랐다.

 

동부승지 조윤석(趙胤錫)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돌아갈 계책을 이미 굳혔으니 승정원 관리를 보내 전유(傳諭)한다 하더라도 도로 들어올 뜻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별도로 뒤미처 전유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결단코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들으니, 내가 너무도 놀랍고 개탄스럽다. 가토(加土)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서도 어찌 이토록까지 황급하게 하여 나로 하여금 좌우의 수족을 잃은 것처럼 느끼게 하는가. 이번 걸음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찌 한번 만나볼 수도 없겠는가. 모쪼록 나의 뜻을 체득하여 간절히 바라는 내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승지는 급히 가서 전하라."
하였다. 준길이 상소하여 대답하기를,
"신은 이미 국상(國祥)에 참여했고 다시 천안(天顔)을 뵈었으니 더 이상 남은 유감없이 소원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신의 행한 자취를 생각하면 어찌 하루라도 조정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에게는 바야흐로 어미의 묘소에 가토(加土)할 일이 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은가(恩暇)를 쾌히 허락하시어 조용히 내려갔다가 휴가가 끝나면 다시 올라오게 해 주소서. 그러면 위와 아래 사이에 예와 의가 모두 합당하게 됨은 물론 그야말로 천지 부모께서 곡진히 길러주고 보전시켜주는 덕이라 할 것입니다. 신은 바야흐로 행장을 꾸리고 명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면유(面諭)할 때에 내 뜻을 모두 말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런 장마철에 가토하는 일은 적기(適期)가 아닌 듯한데, 다시 만나보고 유시하겠다."
하였다.

 

부제학 유계,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청대하고 입시하여 극구 아뢰기를,
"윤선도와 조경은 사설(邪說)로 선동하여 선류(善類)를 해칠 계책을 꾸몄으니, 통쾌하게 양사의 논을 따라 그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준길이 계속 물러가기를 청하고 있는데, 다시 힘껏 만류하소서. 그리고 송시열이 이미 병소(病所)를 떠났으니, 사대(賜對)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설이 분분하게 일어나 이 사람을 불안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으니, 몹시 내 마음이 아프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경악의 신하를 궐직(闕直)했다는 이유로 잇따라 심리케 하고 있는데, 이는 당폐(堂陛)를 엄숙히 하는 도리가 심히 아닌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유계가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을 논하기를,
"천재(天災) 시변(時變)이 모두 권시(權諰)와 조경의 죄를 논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한 그의 의도가 자못 편벽되니, 체차하소서."
하고, 또 헌납 김우석이 꾀를 내어 처치하는 일을 회피한 잘못을 논하며 체직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이민서가, 지평 권격이 사소한 의율(擬律) 문제로 다투면서 분분하게 일을 만들어내기만 한다고 논핵하고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6일 갑자

윤선도를 삼수(三水)에 도로 유배하였는데, 이는 대계(臺啓)를 따른 것이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가 탑전에서 아뢰면서 남한 산성과 강도(江都)의 곡식을 대여하여 연해 기읍(畿邑)에 나누어줌으로써 발등에 떨어진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줄 것을 청하니, 따랐다.

 

우참찬 송준길이 강교(江郊)에 나가 있으면서 상소하여 귀향 요청을 다시 진달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제 막 내 뜻을 승지 편에 모두 전했는데 또 무슨 말을 많이 하겠는가. 오늘날의 사정을 경이 이미 이해했을텐데, 한번 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다니 경과 나 사이에 어쩌면 이렇게도 정의가 도탑지 못하단 말인가. 뜻도 다하고 말도 막혔으나 속 마음은 그래도 미진한데 그저 한번 만나볼 수 있도록 쾌히 허락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경은 잘 이해해서 지극한 소망을 조금 풀어주도록 하라."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의 사비(私婢) 견옥(見玉)이 세쌍둥이를 낳았다. 일찍이 갑오년에도 아들 세쌍둥이를 낳아 모두 생존하고 있는데, 역시 이변에 속하는 일이라 하겠다.

 

좌의정 심지원이 상차하여, 송준길이 떠나지 못하도록 만류하여 사림을 위로하도록 청하니, 상이 부드러운 말로 답하였다.

 

5월 18일 병인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조형(趙珩)을 형조 판서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민여로(閔汝老)·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오두인(吳斗寅)을 헌납으로, 박승건(朴承健)을 지평으로, 임한백(任翰伯)을 수찬으로 삼았다.

 

5월 19일 정묘

호군 이유태(李惟泰)가 어미의 병을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고 돌아가니, 상이 답하기를,
"어미의 병이 중하다면 속히 가지 않을 수 없다만, 병에 조금 차도가 있으면 곧바로 올라오도록 하라."
하고, 이어 말(馬)을 지급해 보내도록 명하였다.

 

5월 20일 무진

행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조경의 소를 보건대 터무니없는 말로 현혹시켰으니 정말 해괴합니다. 그러나 일단 통렬히 배척하는 분부를 내리셨고 또 벌로 파직까지 시키셨으니, 그런대로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고 시비를 정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언(求言)하는 날에 일단 유지에 응했다는 명분이 있고 보면, 그에게 멀리 유배보내는 율(律)을 적용한다는 것은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못될 듯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논의가 너무 격화되어 진정될 기약이 없는데, 신의 견해가 이와 같은 이상, 그대로 수석(首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형세상 어렵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도 중하여 준열하게 배척하는 소리가 차례로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번에 오면서 삼가 듣건대, 중신(重臣)이 소장을 진달하여 시끄러운 단서가 다시금 일어났다고 하는데, 근본을 따져보면 그야말로 모두가 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에 신은 더욱 황공스럽기만 할 뿐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속히 소장을 올려 스스로 죄를 드러내려 하였습니다만, 불행히도 이미 상척(喪慽)을 당한 데다가 자식놈마저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었던 관계로, 성교(聖敎)에 따라 곧바로 처소를 옮기기는 했어도 감히 무례하게 신엄(宸嚴)을 더럽혀드릴 수 없어, 침묵을 지킨 채 시간만 보내다 보니 벌써 반 개월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감히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토로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를 다스려 근거없는 논의를 종식시키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인천 부사(仁川府使) 민주면(閔周冕)이, 백성이 굶주려 죽음이 박두했다는 내용으로 상소하면서 청하기를,
"상평청에 현재 있는 미곡을 내어 고을의 규모를 따진 뒤 차등을 두어 나눠주게 하소서. 또 충훈부·사복시·훈련 도감·어영청의 둔곡(屯穀) 및 은포(銀布)를 가져다가 참(站)에서 인부와 말[馬]을 고립(雇立)하는 자본으로 대비케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回啓)하기를,
"우선 경사(京師)의 미곡을 각읍에 나눠 대여해주고 가을철에 도로 갚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21일 기사

홍중보(洪重普)를 공조 판서로, 김휘(金徽)를 형조 참판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의로, 권대운(權大運)을 형조 참의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성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동지성균으로 삼았다.

 

옥당이 상차하여 대간을 처치하면서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은 체직시키고 지평 최유지(崔攸之)와 정언 이동명(李東溟)은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윤허하였다.

 

공조 참판 김좌명(金佐明)이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호남(湖南)에 안찰사로 나가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드리기를,
"이미 비국에서 유사의 임무를 부여받은 이상 대동법의 절목도 여기에서 요리할 수 있으니, 꼭 자신이 그 지역에 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좌명이 일찍이 그 아비의 묘소에 수도(隧道)를 설치한 일로 민유중(閔維重)으로부터 크게 공격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계속 송시열 등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러다가 윤선도와 조경의 소가 나오자 극력 그 논을 지지하였으며 또 오정위(吳挺緯)와도 서로 친교관계를 맺었다. 이에 동료들이 그를 크게 의심하여 상복을 벗은 후에도 다시 청직(淸職)에 의망(擬望)하지 않았는데, 좌명이 이를 더욱 한스럽게 여겨 물러나 향장(鄕庄)에 돌아가서는 스스로 외방에 나가기를 청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0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재정-공물(貢物)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좌명이 일찍이 그 아비의 묘소에 수도(隧道)를 설치한 일로 민유중(閔維重)으로부터 크게 공격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계속 송시열 등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러다가 윤선도와 조경의 소가 나오자 극력 그 논을 지지하였으며 또 오정위(吳挺緯)와도 서로 친교관계를 맺었다. 이에 동료들이 그를 크게 의심하여 상복을 벗은 후에도 다시 청직(淸職)에 의망(擬望)하지 않았는데, 좌명이 이를 더욱 한스럽게 여겨 물러나 향장(鄕庄)에 돌아가서는 스스로 외방에 나가기를 청한 것이다.

 

상이 침을 맞을 때에 영상과 좌상을 인견하고 북사(北使)037)  를 접견하는 예를 의논하였다. 이어 호조 판서 허적을 홍제원(弘濟院)에 보내고 승지 원만석(元萬石)을 파주(坡州)에 보내 교영례(郊迎禮)를 면제해 줄 것을 청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의 창환(瘡患)이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故) 판서 채유후(蔡𥙿後)에게 자급을 뛰어넘어 증직해 주도록 명하였다. 채유후는 실록을 찬수한 공로로 마땅히 정헌 대부의 자급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작고한 사람에게는 그전부터 가자(加資)하는 규정이 없었으므로 영의정 정태화가 상에게 아뢰어 품계를 바꿔서 추증(追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명한 것인데, 자급을 숭정 대부로 올려 좌찬성에 증직하였다.

 

5월 22일 경오

헌납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김수흥(金壽興)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그는 아직 자급상 준직(準職)038)  이 되지 않았으니 관례를 어겨가며 함부로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개정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3일 신미

장령 정박(鄭樸)이 아뢰기를,
"본부가 바야흐로 전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을 논하고 있는데, 수익은 곧 신의 이성(異姓) 사촌 형으로서 이미 절친한 한 집안의 혐의가 있는 만큼 감히 그 사이에서 시비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은 전 판부사 조경의 일에 대해서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일단 구언한다는 분부를 내려놓고는 거꾸로 유지에 응한 사람을 논한다면 사람들이 장차 말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니 언로에 방해가 될 뿐만이 아닙니다. 구언하면서 죄를 주지 않겠다고 하신 분부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더구나 이미 파직하고 난 뒤에 논의가 너무나도 격렬해지면서 점점 중하게 의율(擬律)하는 등, 분위기가 화평함을 해치는 쪽으로 기울고 있으니 이야말로 성조의 아름다운 일이 못됩니다. 신의 견해가 이와 같으니 이쪽으로 보나 저쪽으로 보나 모두 그대로 있기는 어렵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박승건(朴承健)이 처치하였는데, 그 대략에,
"법외(法外)의 혐의를 억지로 끌어들인 것만도 이미 구차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유지에 응하여 한 말은 죄주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터무니없는 말로 현혹시키는 소까지 용납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만 구언하신 분부를 비호하려는 자료로 삼고 있으니, 의견이 그릇되고 잘못되었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25일 계유

청사(淸使)가 입경하여 상이 편전에서 접견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가 입시하였다.

 

5월 26일 갑술

조형을 대사헌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장령으로, 구문치(具文治)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판부사 송시열을 인견하였는데, 상이 울자 시열도 울었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윤선도가 흉소(凶疎)를 내놓더니 이번에는 조경이 또 헤아릴 수 없는 발언을 하여 경과 우참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당초 의논드릴 때, 송준길은 말을 간략하게 했기 때문에 선도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았는데, 신은 사설을 많이 늘어놓았기 때문에 이런 무함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대신의 말도 그러했다. 그래서 내가 단안을 내려 행했던 것이다. 정성으로 볼 때 경과 대신이 어찌 선도나 조경보다 못하겠는가. 대체로 그가 한 말은 한갓 경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실은 나를 지적해서 한 것이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아무리 선도나 조경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위를 범하는 말이야 하겠습니까. 신에게 지나친 말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신이 인용한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의 단궁이 문(免)했다는 설과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단지 그 대의(大義)만 취했을 따름인데, 만약 성명께서 통촉해주지 않으셨던들 이러한 말이야말로 참으로 위험할 뻔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성명께서 곡진히 보살펴주신 덕택인데, 종적을 돌아볼 때 불편하기만 하여 감히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으니, 이는 감히 고상한 체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사태도 이미 해결되고 소원도 충족되었으니, 시골 집에 돌아가 죽도록 허락해 주시면 성은이 망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이 판명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이미 판명된 마당에 어찌 반드시 또 떠나야 하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억울하게 누명을 쓴 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신과 같이 심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신은 성품이 어둡고 완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습니다만, 가령 전국 시대의 인물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필시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원래 경을 죄줄 의사가 없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애초로 소급해 올라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영상 정태화가 신을 부르더니 좌우를 모두 물리치고 소지(小紙) 하나를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곧 연양(延陽)이 보여준 것이다.’ 하였는데, 거기에 ‘대궐 밖에서 대왕 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논이 있다.’고 써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즉시 의논을 수합해야 한다는 뜻으로 대답하면서 말하기를 ‘《의례(儀禮)》에 「천자로부터 사부(士夫)에 이르기까지, 장자(長子)가 죽고 그 다음 적자(嫡子)가 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의 복(服)도 장자와 동일하게 한다.」 하였다. 그런데 그 아래에 또 4종(種)의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서자(庶子)가 승중(承重)했을 경우에는 3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고례(古禮)로 말하건대 그 다음 적자도 서자이다. 그렇다면 위와 아래의 설이 스스로 모순되는데 근거할 만한 선유(先儒)의 정론(定論)도 없으니 장차 이쪽을 취하고 저쪽을 버릴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상이 말하기를 ‘소위 4종의 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기에, 신이 차례차례 해석하며 내려가다가 ‘바르기는 하지만 체가 아닌 경우[正而不體]’와 ‘체이기는 하지만 바르지 못한 경우[體而不正]’를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 말하기를 ‘인조(仁祖)로 말하면 소현(昭顯)의 아들은 정이불체(正而不體)의 경우이고 대행 대왕은 체이부정(體而不正)의 경우에 해당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영상이 크게 놀라면서 손을 내저으며 저지하고 말하기를 ‘고례(古禮)가 비록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만약 소현의 아들이 없다면 그래도 이런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미 그런 상황이 아닌데 어떻게 감히 이 설을 가지고 오늘날 예를 의논하는 증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그것은 그렇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상이 말하기를 ‘국제(國制)를 보면 장자나 차자를 막론하고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주게 되어 있고, 대명률(大明律)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따라서 고례대로 행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이를 근거해서 정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기에, 신도 잘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의논하여 정하게 된 곡절은 이러한 데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이 의논을 수합하는 가운데에 ‘여러 대신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다른 주장은 감히 다시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인데, 시끄럽게 된 폐단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어리석고 망령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과연 이런 말이 있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은 하늘에 맹세코 원통한 것이 있습니다. 선왕께서 신을 낮고 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망극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신이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선왕께서 승하하신 뒤에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폄억(貶抑)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신을 몰아세우는 자들은 이를 지목하여 말하고 있으니, 신은 정말 원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과 나 사이에 이미 알 것은 모두 알았으니 이제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더라도 아랫사람들의 의논은 전부 그렇지 않으니 신이 이 때문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때의 바르지 못한 무리들이야 그렇게 말할는지 모르나 어찌 사람들이 다 그렇겠는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근래 상께서 건강이 좋지 못한 탓으로 오랫동안 경연을 폐하고 계시는데 신은 늘 이 점이 안타깝습니다. 바라옵건대 한가할 때에 자주 소대(召對)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기강이 확립되지 않는 것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주 경연에 나가시면 사욕이 제거되고 천리가 밝아질 테니 기강은 자연히 확립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에 이이(李珥)가 교만하여 위를 무시한다는 등의 말로 탄핵을 받았는데, 선조(宣祖)께서 언자(言者)를 죄주기는 하였습니다만, 그 제목이 중한 관계로 이이는 물러가 돌아가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자취도 그와 다름이 없으니 끝내 감히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올라오기가 쉽지 않은데, 어찌 갑자기 떠날 결심을 하는가. 이런 때에 물러가면 국체(國體)에 손상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이 점을 정말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죄를 받지 않고서는 한 시각도 머무르기가 곤란합니다. 만약 ‘사심(邪心)은 없다 하더라도 망발한 일은 없지 않다.’고 하며 이를 이유로 죄를 주신다면, 그런대로 사람들의 말에 사과할 수도 있고 미천한 분수도 편안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을 곡진하게 따르고 싶기는 하나 만약 죄를 준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어찌 내가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5월 28일 병자

봉교 이광직(李光稷)이, 그의 처형(妻兄) 김수항(金壽恒)이 동지춘추(同知春秋)를 겸대하고 있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는데, 대신이 좌·우 사관(史官)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변통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해조가 수항의 겸대를 체직시키고 광직에게 도로 봉교를 임명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대사헌 조형(趙珩)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조형은 사람됨이 선량하긴 하나 줏대가 없이 나약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김자점(金自點)에게 빌붙어 마침내 사론(士論)에 천시를 받았으므로 송시열이 집정(執政)할 때에는 청망(淸望)에 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헌장(憲長)에 제수되었는데, 조형이 불안하여 사직한 것이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송시열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반드시 내려갈려고만 하는데, 나는 경의 마음을 모르겠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이렇듯 계속 비난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조정에 몸을 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비가 이미 정해졌으니 경이 떠나야 할 의리가 없다. 더구나 국가에 일이 많아 오로지 경들 두 사람만 믿고 있는데, 어떻게 차마 나를 버리고 떠난단 말인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은 조정에 있어도 털끝만큼의 보탬이 되는 일이 없지만, 송준길과 같은 사람은 늘 대궐을 못잊어하며 그리워하는 충성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준길을 권면하며 말하기를 ‘만약 보은하려거든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하였더니, 준길이 즉시 조정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끝내 떠날 경우, 이는 하나의 사설(邪說) 때문에 중신이 물러나는 결과가 되니, 너무도 불행한 일이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다른 이야기로 비난한다면 어찌 감히 떠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차마 듣지 못할 이야기를 가지고 신을 헐뜯는데 어떻게 감히 떠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漢)나라 효소 황제(孝昭皇帝)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상관걸(上官桀)의 참소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곽광(霍光)이 충성스러웠기 때문인데, 이는 세상이 모두 아는 일이다."
하니, 승지 원만석(元萬石)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은 뼛속까지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신이 시골에 있을 때 듣건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시열은 선왕이 태묘(太廟)에 들어가는 것을 온당치 않게 생각한다.’고 했다하는데, 이 설이야말로 종통(宗統) 적통(嫡統)의 설과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쓸데없이 그냥 개인적으로들 이야기하다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영상 정태화가 이를 듣고 크게 놀란 나머지 신의 아들과 서로 아는 사람을 불러 물어보았으므로 신의 아들이 이를 통해 신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의논한 예(禮)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누가 지어낸 것인가."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이것이 윤선도에게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예를 의논할 즈음에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확산된 말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안질이 조금 나았으므로 바야흐로 경과 송 참찬을 불러들여 학문을 강론하려 하였는데, 지금 경이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하니 서운함을 금할 수 없다. 경이 무함을 당했을 때 나는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악인이 아니라는 것은 성명(聖明)만이 알고 계실 뿐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기해년에 객사(客使)039)  가 왔을 때 대통관(大通官)이 신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원접사(遠接使) 홍명하(洪命夏)가 임시 변호를 한 덕분으로 간신히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신을 조정에 있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원만석이 아뢰기를,
"그때 청나라 사람이 뭐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근래에는 통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조천(祧遷)에 대한 일로 상소하였는데, 북사(北使)가 돌아가고 나면 대신을 모이게 하여 경들과 의논해 처리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경이 내려가면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 때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대단치도 않은 일 때문에 끝내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이 두 사람이 악인은 아니지만, 조정을 진정시키려면 외방에 보임(補任)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자, 선조께서 즉시 따르셨으니, 그야말로 온당하게 처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알고 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벌써 오래도록 입시하여 많이 귀찮게 해드렸는데, 다 말씀드리지 못한 생각은 뒤에 소장으로 진달드리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끝내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한다면 백 번 소장을 올린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비록 내려가더라도 전일처럼 무심하게 있지 말고 모쪼록 다시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동래(東萊) 사람 박선동(朴善同)이 왜인(倭人)의 뇌물을 받고 여인을 【고공(雇工)이다.】  관(舘)에 유인해 들인 뒤 몰래 통간(通奸)하게 하였는데, 그 일이 드러나자 박선동과 여인을 왜관 문 밖에 효시(梟示)하고, 기타 왜인들과 회동하여 술마신 여인 및 왕래하며 교통(交通)한 상놈들도 원지(遠地)에 나누어 유배하였다.

 

상평청이 2월 21일부터 죽을 끓여 기민을 진휼하였는데 그곳에 나와 먹은 자가 3천여 인이었으며, 이밖에 사족(士族)의 부녀와 늙고 병든 사부(士夫) 및 경성(京城) 10리 안에 사는 양반 6백 인에게도 모두 건량(乾糧)을 지급하였고, 동·서 활인서에서 치료받던 전염병 환자 4백 70여 인에게도 사람 수효대로 양식을 지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진휼하는 일을 정지하고 모두에게 10일 간의 양식을 주면서 해산해 보냈는데, 그 중에서도 더욱 의탁할 곳이 없는 자 2백 60인을 뽑아내어 1개월 기한으로 10일에 한 번씩 양식을 주기로 하였다.

 

사간 이수인(李壽仁)이 집에서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수인은 고(故)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증손이다. 대대로 강진(康津)에서 살면서 젊은 나이에 등제(登第)하였으나 사람됨이 또한 본래 다른 사람보다 특출한 점은 없었다. 신면(申冕)이 그의 처당(妻黨)이었는데, 신면이 송준길로부터 공척(攻斥)을 받을 때에 수인이 마침 대간으로 있으면서 그를 변호하며 인피한 말에 어긋난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시골에 물러가 살며 끝내 소명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겨 번번이 삼사에 두기도 하고 사인과 전한에 이르게까지 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02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수인은 고(故)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증손이다. 대대로 강진(康津)에서 살면서 젊은 나이에 등제(登第)하였으나 사람됨이 또한 본래 다른 사람보다 특출한 점은 없었다. 신면(申冕)이 그의 처당(妻黨)이었는데, 신면이 송준길로부터 공척(攻斥)을 받을 때에 수인이 마침 대간으로 있으면서 그를 변호하며 인피한 말에 어긋난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시골에 물러가 살며 끝내 소명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겨 번번이 삼사에 두기도 하고 사인과 전한에 이르게까지 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은 것이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돌아가겠다고 고하니, 상이 누누이 비답을 내리며 사관을 보내 전하게 하였는데, 시열이 다시 소장을 진달하여 미진한 회포를 다 아뢰겠다고 대답하고 마침내 향장(鄕庄)으로 돌아갔다.

 

부제학 유계와 교리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이 떠나는 것을 만류하도록 청하니, 상이 경연 석상에서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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