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무인
예조가 아뢰기를,
"선왕을 태묘(太廟)에 합사(合祀)하고 양 자전(兩慈殿)040) 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고 중궁전(中宮殿)에게 책례(冊禮)를 올리는 등 도합 네 가지 경사가 겹쳤으니, 신묘년의 예에 따라 육백관시(六百館試)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준평(李浚平)의 처 임씨(任氏)가 지아비가 죽자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니 절행(節行)이 가상합니다. 정려(旌閭)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6월 2일 기묘
유경창(柳慶昌)을 병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사간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이광직(李光稷)을 봉교로,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을 청국 진하 정사(淸國進賀正使)로, 유경창을 부사로, 오두인(吳斗寅)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판부사 송시열이 과천(果川)에 이르러 상소하였다. 수의(收議)한 가운데 그가 인용한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의 단궁이 문(免)했다는 설과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는 설을 누누이 변명하면서 아뢰기를,
"그것은 그저 죽었거나 살았거나 장자(長子)는 장자라는 뜻을 밝히려고 한 뜻일 뿐인데, 지금 윤선도는 그만 손자를 세운다[立孫]는 설을 끌어당겨 신의 죄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경이 상소하면서 윤선도의 상소문을 효묘(孝廟)를 위해 편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신은 한 고조(漢高祖)의 신자(臣子)이면서 여산(呂産)과 여록(呂祿) 편을 든 셈이 되니, 그 죄가 어찌 한 몸만 복주(伏誅)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시골에 있을 때 슬쩍 듣건대, 도하(都下)에 하나의 이야기가 퍼지기를 ‘효종 대왕은 태묘(太廟)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설을 송시열이 창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올라와서 자세히 듣건대, 이것이 거리에서만 전파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대신도 놀라워 하면서 신과 친한 이에게 물어보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꼭 윤선도나 조경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만, 신을 미워하는 자가 이런 이야기를 조작해서 그 사이에 견강부회시킨 것만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신은 한번 물러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책이 다시 없기에 간절한 성상의 분부를 받고서도 끝내 감히 머물러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고, 끝에 그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 의원과 약을 보내준 은혜에 대해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신의 아들이 불초하여 감히 선금(船禁)을 범했는데, 삼가 듣건대 연신(筵臣)이 이 사람은 누구의 아들이라고 진달하면서 또 상(喪) 이전에 범한 것이라고 하여 전례(前例)를 원용(援用)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아들이 아무리 사친(私親)의 상을 당했다 하더라도 예법(禮法)으로 따지면 남의 후계자가 되어 있는 이상, 친부모를 백(伯)·숙(叔)으로 부르며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어야 하니, 어떻게 상을 당했다 하여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어찌 경이 처한 정세를 모르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이야말로 치란(治亂)의 갈림길에 섰다 할 것인데, 내가 어떻게 나라의 일은 염려하지 않고 경이 돌아가도록 쾌히 허락하겠는가. 그리고 끝에 말한 일은 어찌 그렇겠는가.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송시열과 함께 남의 무함을 받은 것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열이 이미 이 때문에 물러났고 보면, 의리상 신만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들리는 말로는 시열이 등대(登對)했을 때 스스로 죄가 너무나도 중하다고 하면서 신은 가볍다고 말씀드렸다 합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신이 전후로 이야기한 것을 시열과 비교하면 신이 훨씬 많습니다. 어찌 그에게 중한 죄를 떠넘기고 자신은 가볍다고 자처한 채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은 의리상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법인데, 한 쪽은 떠나고 한 쪽은 그대로 있다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직명을 깎으시어 물러나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소서."
하고, 옥책(玉冊)을 서사(書寫)하는 명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제 막 전소(前疏)에 대한 비답에서 내 뜻을 다 말했다만, 병이 조금 뜸해져 그대가 들어오게 되면 면유(面諭)하겠다."
하였다.
6월 3일 경진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영녕전(永寧殿)의 개수(改修)에 관한 일을 이미 벌써 품달했는데, 해조로 하여금 미리 조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묘의 제도는 어떻게 의논해 정했는가?"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제례(祭禮)는 선조를 따라야 한다고 하는데, 3백년이나 된 제도를 갑자기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고, 지원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상께서 송시열을 머물러 있도록 노력하신 것이야말로 지극하다 하겠습니다마는, 신들이 머물게 하도록 청한 차자를 아직도 내리지 않고 계시니, 성상께서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또 말[馬]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는 안에 두고 보았는데 판중추가 이미 떠났기 때문에 내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말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그를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섭섭하고 실망스럽기는 하나 말을 지급하라는 뜻을 양도 감사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별시(別試) 무과 초시(武科初試)의 경우는 당초 정해진 규정이 없어 적을 때는 5백 명을 뽑고 많을 때는 1천 4백∼1천 5백 명을 뽑습니다. 그런데 신묘년에는 일정한 숫자를 정해놓지 않고 모두 시취(試取)하여 입격(入格)시켰기 때문에 그 수가 무려 1천 1백 70여 인에 이르렀는데 너무도 외람되고 잡스러웠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그때 외람되고 잡스럽다는 비난이 있긴 하였으나 규정이 헐했기 때문에 양반 자제들이 많이 합격했었는데, 지금 곤수로 있는 자들은 대부분이 신묘년에 합격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무변(武弁) 중에 양반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내삼청(內三廳)041) 도 앞으로 채울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강서(講書)를 자원(自願)에 따라 하도록 하면 요행심만 불러 일으킬 뿐 인재는 참으로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숫자는 2천명으로 정하고, 강서를 착실히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관서(關西) 내사 노비(內司奴婢)의 신공(身貢)에 대해서는 이미 두 사람이 합동으로 1필(匹)씩 마련해 내도록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에 혜택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다만 두목(頭目)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지 않고 도장(道掌)이 내려가 거둬들이게 하는 관계로 그 사이에 외람되고 잡스러운 폐단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들이 현재 신의 관아에 와서 호소하고 있으니, 꼭 변통해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사 노비의 신공은 각 고을에서 두목을 정해 올려 보내는 것이 관례이다. 도장을 내려 보내다니,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내사는 그렇다 치고라도, 수진궁(壽進宮)042) ·어의궁(於義宮)043) ·명례궁(明禮宮)044) ·용동궁(龍洞宮)045) 등의 궁에서도 모두 도장을 보내 거둬들이는 일을 하고 있는데, 바깥 사람들은 내사라고 통칭하고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도 내사의 예에 따라 진성(陳省)046) 을 작성하고 두목을 정해서 직접 각궁에 납부토록 하라. 또 제궁가(諸宮家)의 사패 노비(賜牌奴婢)의 신공도 진성을 작성하고 두목을 정하게 하되, 진성은 내사에 올리고 신공은 직접 제궁에 납부토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이은상(李殷相)과 장령 이지무(李枝茂)가 조경을 멀리 유배보낼 일로 연계(連啓)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죄를 논한다면 멀리 유배보낸다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지만, 그 벌을 대략 시행한 데에는 또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6월 4일 신사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이 소장을 진달하고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은상은 고(故) 참판 이소한(李昭漢)의 아들이다. 문재(文才)는 넉넉했으나 성품이 경박하고 자신을 단속하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경시되었다. 그러다가 등제(登第)하고 나서는 그 집안을 발판삼아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늘 종실인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 등과 어울려 창기(娼妓)를 끼고 가무를 즐기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식은 본래 패려하기로 이름난 자였다. 그뒤 자급(資級)이 올라간 뒤로 오래도록 청직(淸職)에 통망되지 않자, 은상이 울적한 심사를 달랠 길 없어 자주 전관(銓官)의 집에 찾아가 자기의 소원을 토로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이 직책을 임명받았는데, 관례에 따라 면직을 청한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0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은상은 고(故) 참판 이소한(李昭漢)의 아들이다. 문재(文才)는 넉넉했으나 성품이 경박하고 자신을 단속하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경시되었다. 그러다가 등제(登第)하고 나서는 그 집안을 발판삼아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늘 종실인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 등과 어울려 창기(娼妓)를 끼고 가무를 즐기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식은 본래 패려하기로 이름난 자였다. 그뒤 자급(資級)이 올라간 뒤로 오래도록 청직(淸職)에 통망되지 않자, 은상이 울적한 심사를 달랠 길 없어 자주 전관(銓官)의 집에 찾아가 자기의 소원을 토로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이 직책을 임명받았는데, 관례에 따라 면직을 청한 것이었다.
흥덕 현감(興德縣監) 오정언(吳廷彦), 무장 현감(茂長縣監) 정시대(鄭始大), 금성 현감(錦城縣監) 원두추(元斗樞), 청암 찰방(靑巖察訪) 송국보(宋國輔) 등이 으뜸가는 치적으로 포상받았다. 장성 부사(長城府使) 최일(崔逸), 영암 군수(靈巖郡守) 김익렴(金益廉), 영광 군수(靈光郡守) 안진(安縝), 무안 현감(務安縣監) 조정우(曹挺宇) 등을 금부에 내렸는데, 어사(御史) 김수흥(金壽興)의 서계(書啓)를 따른 것이다.
6월 5일 임오
김남중(金南重)을 형조 판서로, 이태연(李泰淵)을 전남 감사로, 민희(閔熙)를 경상 감사로, 이단상(李端相)을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삼았다. 단상은 이일상(李一相)의 아우이다. 사람됨이 눈치가 빠르고 교만하였으며 약관에 등제한 뒤로 술 마시기를 즐기고 당론(黨論)을 좋아하였다. 그러다가 송준길이 조정에 나오자 단상이 그를 보고 마음 속으로 좋아하여 마침내 경적(經籍)에 탐닉하면서 제법 외모를 단속할 줄을 알게 되었다. 무술년 이후로는 병을 핑계대고 집에 있으면서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번번이 사양하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외직을 구하여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祔廟)한 뒤에 백관이 전문(箋文)을 바치는 것이 예로부터 해 온 관례입니다."
하니, 상이 임시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불치 수령(不治守令)인 임천 군수(林川郡守) 이증(李憕), 예산 현감(禮山縣監) 백홍일(白弘一), 석성 현감(石城縣監) 채이항(蔡以恒), 직산 현감(稷山縣監) 정시걸(丁時傑), 연산 현감(連山縣監) 이현(李睍)을 금부에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회덕 현감(懷德縣監) 유성오(柳誠吾), 서천 군수(舒川郡守) 홍석무(洪錫武), 부여 현감(扶餘縣監) 박유상(朴由常), 천안 군수(天安郡守) 권순창(權順昌), 은진 현감(恩津縣監) 임일유(林一儒), 한산 군수(韓山郡守) 서홍리(徐弘履) 등을 치적이 으뜸이거나 진휼을 잘 했다는 이유로 모두 포상하였는데, 이는 어사 여성제(呂聖齊)의 서계에 따른 것이었다.
6월 6일 계미
어사 이민적(李敏迪)의 서계에 따라 서산 군수(瑞山郡守) 윤격(尹檄), 당진 현감(唐津縣監) 윤세교(尹世喬), 태안 군수(泰安郡守) 민진량(閔晋亮),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정악(李挺岳), 평택 현감(平澤縣監) 심익선(沈益善), 이산 현감(尼山縣監) 이관하(李觀夏) 등을 모두 포상하고, 신창 현감(新昌縣監) 박융부(朴隆阜), 덕산 현감(德山縣監) 황봉조(黃奉祖) 등을 금부에 내렸다.
6월 7일 갑신
진위 겸 진향 정사(陳慰兼進香正使)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부사 이정영(李正英)과 정사(正使)047) 심지명(沈之溟), 부사 이진(李𥘼), 서장관 이동로(李東老)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다.
6월 8일 을유
간원이 아뢰기를,
"울산(蔚山)의 해변가 1개 면(面)을 모두 궁가(宮家)에서 불법으로 점유한 결과 그곳에 거주하는 수백 명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전에 없던 기근을 만나 백성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때를 당하여 못살도록 마구 침해하는 폐단을 통렬히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해 계문케 함으로써 엄금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부묘(祔廟)하고 나서 환궁할 때, 나례(儺禮)048) 를 거행하는 일과 기로(耆老)·유생·교방(敎坊)이 각각 춤추고 노래하는 일과 거리에 결채(結綵)049) 하는 일과 궐문밖 좌우에 채붕(綵棚)050) 하는 일 등을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거행하도록 계품(啓稟)하니, 모두 거행하지 말도록 답하였다.
관동(關東) 지방의 춘천(春川)·정선(旌善)·금성(金城) 등지에 우박으로 인한 재해가 발생했다.
6월 9일 병술
간원이 총융사(摠戎使) 남두병(南斗柄)을 체직시키도록 논하니, 따랐다.
6월 10일 정해
대사헌 조형(趙珩)이 반송사(伴送使)로 서관(西關)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본직을 사직하고, 이어 아뢰기를,
"조경은 음험하고 사특하여 바른 도리를 해쳤으니, 대계(臺啓)를 윤허하시어 공공의 논의에 부응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경이 흉언(凶言)을 선동한 죄는 멀리 유배를 보내더라도 가벼울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있어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6월의 세초(歲抄)051) 를 거행할 것을 이때에 비로소 명하였다. 선조(先朝) 때의 어의(御醫) 유후성(柳後聖)·조징규(趙徵奎)도 모두 서용(敍用)할 대상에 포함되었는데,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지난번 자전(慈殿)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관계로 소환하기는 하였으나 어찌 보통 범죄를 지은 자처럼 관례에 따라 거두어 서용할 수 있겠습니까.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누차 아뢰니, 이에 따랐다.
전 부사 정태제(鄭泰齊)를 영해부(寧海府)에 충군(充軍)토록 명하였다. 태제가 동래(東萊)에서 수령으로 있으면서 몰래 가속을 데려다 밀양(密陽)에 살게 하고는 빈번히 가서 보았는데, 일이 발각되자 금부에 넘겨졌다. 금부가 수령이 월경(越境)한 율(律)을 적용하니, 상이 변방 수령이 범법한 죄는 매우 중한 것이라 하여 다시 멀리 유배보내는 것으로 개정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송준길을 인견하고 매우 간절하게 위유(慰諭)하면서 이르기를, "판부사가 조금이라도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 경은 모쪼록 나를 위해 가능한 한 머물러 있고 너무 급급하게 떠나지 말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송시열과 입장이 똑같습니다. 시열이 먼저 돌아간 이상 신만 어찌 감히 뒤쳐지겠습니까. 더구나 지난해에는 윤선도의 일을 당했고 올해에는 조경의 일을 당해 정적(情跡)이 편치 못하게 되었으니, 감히 성상의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분(掃墳)052) 의 휴가를 줄테니 조용히 내려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 옥책(玉冊) 서사(書寫)의 임무를 사양한 것을 허락하였다.
무장현(茂長縣)의 여인이 아들 세 쌍둥이를 낳았다고 본도(本道)에서 계문하였다.
6월 13일 경인
성태구(成台耉)를 집의로, 정계주(鄭繼胄)를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사옹원 도제조로, 【상신(相臣)이 겸대하도록 이조가 계품 한데 따른 것이다.】 조형(趙珩)을 형조 판서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김좌명(金佐明)·이은상(李殷相)을 승문원 제조로 삼았다.
어사(御史)의 포계(褒啓)에 따라 원두추(元斗樞)·윤격(尹檄)·홍석무(洪錫武)·민진량(閔晋亮) 모두에게 가자(加資)를 명했다가 대계(臺啓)로 인하여 곧바로 개정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남두병(南斗柄)이 경기 수사(京畿水使)에서 총융사(摠戎使)로 이배(移拜)되었다가 대론(臺論)에 따라 본임(本任)을 체직당했는데, 수사도 함께 체차시킵니까?"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대간의 탄핵이 그가 수사에 부적합하다고 해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영송(迎送)하는 폐단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수사는 그대로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심헌(沈櫶)이 안산 군수(安山郡守)에서 인천(仁川)으로 이배되었는데, 영송에 따른 폐단이 있으니 그대로 안산에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유계(兪棨)가 아뢰기를,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는 것은 도리상 순서를 따라야 하는 것인데, 지난번 어사의 포계(褒啓)에 따라 현감과 현령으로서 준직(準職)053) 에 제수되도록 승전(承傳)된 자가 많습니다. 아무리 격려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지나치게 외람된 일인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지은 자에게 이미 나추(拿推)하는 벌까지 내렸으니, 잘 다스린 자에게 준직하는 상을 내리는 것이 뭐가 아깝겠는가."
하였다. 이어 신하들에게 하문하기를,
"지난번에 승지 조윤석(趙胤錫)이 ‘윤선도가 예설(禮說)을 지었다.’고 했는데, 경들도 들었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송시열에게서 들었습니다."
하고, 유계가 아뢰기를,
"신은 그 전문(全文)을 얻어 보았는데, 말한 의도가 흉칙하고 험악하여 차마 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말했던가?"
하니, 유계가 아뢰기를,
"그는 말하기를 ‘《의례(儀禮)》에서 말한 이른바 「서자승중 불위삼년(庶子承重不爲三年)」의 불자(不字)는 곧 역자(亦字)의 오자(誤字)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의 단궁이 문(免)했다는 설과 자유(子游)가 최마(衰麻)를 입었다는 설을 내가 분명히 말하면, 송시열의 죄가 어찌 이 정도로 그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음험하고 교묘하게 옥당의 차자를 헐뜯었는데, 차마 사람들이 정시(正視)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가(朝家)에서 이미 유배보내는 율(律)로 벌까지 주었는데, 그가 어찌 감히 그런단 말인가. 육진(六鎭) 중에서도 가장 먼곳으로 이배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육진이 삼수(三水)에 비해서 멀긴 합니다만, 풍토는 삼수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저쪽 국경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청(淸)나라 차인(差人) 들이 또 왕래하곤 하니, 이런 흉악한 인간을 그곳에 옮겨 둘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리(圍籬)는 어떤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가시나무로 집을 두르고 구멍으로 밥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윤선도가 죄를 받은 뒤에도 오히려 징계하고 두려워할 줄 모른 채 예를 의논한다고 핑계대면서 감히 요사스러운 말을 지어내고 있으니, 위리 안치(圍籬安置)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시킨 것만도 그에게는 그지없는 다행일텐데 아직도 뉘우쳐 깨닫지 못한 채 또 사악한 설을 지어내고 있으니, 현재의 배소에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은상이 또 조경을 멀리 유배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7일 갑오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정시성(鄭始成)을 장령으로, 남구만(南九萬)·이민적(李敏迪)을 교리로, 목내선(睦來善)을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삼았다.
6월 18일 을미
양사(兩司)가 조경을 멀리 유배보낼 일에 대해 정계(停啓)하였다.
6월 21일 무술
박장원(朴長遠)을 대사성으로,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김남중(金南重)을 예조 판서로, 이일상(李一相)을 공조 판서로, 이홍연(李弘淵)을 강원 감사로, 임한백(任翰伯)을 교리로 삼았다.
6월 25일 임인
전 이조 판서 정세규(鄭世規)가 죽었다. 세규는 좌의정 정언신(鄭彦信)의 손자이다. 관아(寬雅)하고 국량(局量)이 있었으며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동료들로부터 크게 경복(敬服)을 받았으나 과제(科第)를 통해 벼슬에 진출하지 않았으므로 오래도록 주군(州郡)에서 지체되었다. 그뒤 인조(仁祖) 병자년에 공경(公卿)이 그의 덕행을 천거하자, 산질(散秩)에서 특별히 임명하여 충청 감사를 삼았다. 이 해 겨울에 청(淸)나라 군대가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자, 세규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용인(龍仁)에 이르러 군대가 패하여 거의 죽을 뻔하였는데, 스스로 안성(安城)의 옥(獄)에 나아가 명을 기다렸으므로, 군자들이 그가 피하지 않은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난이 평정된 뒤 인조가 그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여러차례 대사헌에 임명하였는데, 마침내 동전(東銓)054) 의 장(長)이 되자 사류(士類)가 서로들 경하하였다. 뒤에 나이가 차 직무를 사양하고 봉록을 받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6월 28일 을사
우박이 쏟아졌는데 모양이 대두(大豆)와 같았다.
전 한성부 우윤 신천익(愼天翊)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천익은 등제(登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암(靈巖)에 물러가 살았다. 반정(反正)한 뒤에 삼사(三司)의 직함으로 잇따라 불러들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세상이 이 때문에 그를 고상하게 여겼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해학을 좋아하고 세상에 대해 버티면서 오만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당시 송시열의 명성이 굉장했으나, 천익이 늘 조롱하며 비웃었으므로 이 때문에 꽤나 시배(時輩)와 사이가 벌어졌다. 효종(孝宗) 때 언젠가 대사간으로 부름에 응하여 입경(入京)하였다. 조사(朝士)가 찾아가 시사(時事)를 묻기라도 할라치면 번번이 허튼 소리로 장난하고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가 일에 처신하는 것을 보면 또한 스스로 유배(流輩)와 다르지도 않았다. 이 뒤로 전조(銓曹)의 주의(注擬)도 자못 뜸해졌으며 상 역시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간혹 관례에 따라 유지를 내려 유시하는 때는 있었어도 반드시 초치하겠다는 뜻은 없었다. 그런데 집안에서의 그의 행동을 보아도 정양(靜養)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오로지 계속 술만 마시고 해학을 즐겼는데 어떤 이는 혹 그가 무료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윤에 초배(超拜)되었는데, 집의 김시진(金始振)이 반박하기를 ‘몸가짐이 해궤(諧詭)하여 물러가서도 향리에 모범이 될 수 없고, 처세하는 것이 뜬 구름과 같아 나와서도 조정에 이익이 되지 않으니, 이런 사람에게서는 발탁할 만한 실상을 전혀 볼 수가 없다.’ 하기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03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천익은 등제(登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암(靈巖)에 물러가 살았다. 반정(反正)한 뒤에 삼사(三司)의 직함으로 잇따라 불러들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세상이 이 때문에 그를 고상하게 여겼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해학을 좋아하고 세상에 대해 버티면서 오만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당시 송시열의 명성이 굉장했으나, 천익이 늘 조롱하며 비웃었으므로 이 때문에 꽤나 시배(時輩)와 사이가 벌어졌다. 효종(孝宗) 때 언젠가 대사간으로 부름에 응하여 입경(入京)하였다. 조사(朝士)가 찾아가 시사(時事)를 묻기라도 할라치면 번번이 허튼 소리로 장난하고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가 일에 처신하는 것을 보면 또한 스스로 유배(流輩)와 다르지도 않았다. 이 뒤로 전조(銓曹)의 주의(注擬)도 자못 뜸해졌으며 상 역시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간혹 관례에 따라 유지를 내려 유시하는 때는 있었어도 반드시 초치하겠다는 뜻은 없었다. 그런데 집안에서의 그의 행동을 보아도 정양(靜養)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오로지 계속 술만 마시고 해학을 즐겼는데 어떤 이는 혹 그가 무료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윤에 초배(超拜)되었는데, 집의 김시진(金始振)이 반박하기를 ‘몸가짐이 해궤(諧詭)하여 물러가서도 향리에 모범이 될 수 없고, 처세하는 것이 뜬 구름과 같아 나와서도 조정에 이익이 되지 않으니, 이런 사람에게서는 발탁할 만한 실상을 전혀 볼 수가 없다.’ 하기도 하였다.
황해 감사 이만웅(李萬雄)이 어미의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만웅은 제법 지기(志氣)는 있었으나 재략(才略)은 부족했다. 일찍이 동래 부사로 있을 때 오활하게 행동하여 비웃음을 받았는데 또 방백의 직책에 임명되자 물의(物議)가 그르게 여겼다. 그러다가 체직되어 돌아올 적에 치적(治績)은 없고 청렴하지 못했다는 비난만 무성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0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사신은 논한다. 만웅은 제법 지기(志氣)는 있었으나 재략(才略)은 부족했다. 일찍이 동래 부사로 있을 때 오활하게 행동하여 비웃음을 받았는데 또 방백의 직책에 임명되자 물의(物議)가 그르게 여겼다. 그러다가 체직되어 돌아올 적에 치적(治績)은 없고 청렴하지 못했다는 비난만 무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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