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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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신

진하사(進賀使) 원두표(元斗杓)가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상이 그를 인견하고 저쪽의 내부 사정을 하문하니, 두표가 아뢰었다.
"포로로 잡혀 간 김여량(金汝亮)에게서 듣건대, 황제는 나이가 겨우 8세인데 4명의 보정(輔政)이 국사를 담당하여 모든 업무를 처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후(太后)에게 먼저 여쭈어도 별로 가부를 논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기 때문에, 기강이 잡히고 호령이 시행되는 것이 전에 비해 반도 못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회(朝會) 때에도 으레 천관(千官)이 모두 일제히 모이곤 하였는데, 지금은 태반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7월 2일 기유

중전(中殿)의 책례(冊禮) 길일(吉日) 날짜를 물려서 정했다. 당초 윤7월 11일로 계하했었는데, 중전이 사간(私艱)을 당한 상황에서 소상(小祥)이 8월에 있게 되었으므로, 상이 ‘사상(私喪)이긴 하지만 소상도 마치지 않은 때에 경축하는 예를 거행하는 것은 미안하다.’고 하여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이경석(李景奭)·정태화(鄭太和)·정유성(鄭維城) 등이 의논드리기를,
"막중한 책례를 사상 때문에 물려 정하는 것이 미안하기는 합니다만, 기상(期祥)이 멀지 않고 보면 소상을 지낸 뒤에 행하는 것도 정리(情理)상 온당하리라 생각합니다."
하고, 좌상 심지원(沈之源)은 의논드리기를,
"날짜를 물려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따라 물려서 행하도록 명하였다.

 

7월 3일 경술

경모전(敬慕殿)에서 담제(祭)를 행하였다.

 

홍처대(洪處大)를 황해 감사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두 분 자전(慈殿)께 존호(尊號)를 올리고 책보(冊寶)를 바칠 때, 상께서 직접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에게 전하는 한 조목을 상고할 만한 곳이 《오례의(五禮儀)》에 없기 때문에 미처 품정(稟定)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년에 인목 왕후(仁穆王后)를 존숭(尊崇)할 때의 《일기(日記)》를 살펴 보건대 정사에게 직접 전한 일이 분명히 있었고, 대신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친림(親臨)하시는 한 절(節)을 절목(節目) 가운데 첨가해 넣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친림해서 전해주는 것이 정례(情禮) 상으로 합당하겠다."
하였다. 뒤에 약방이 상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쟁집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7월 4일 신해

헌부가 아뢰기를,
"조가(朝家)에서 포목을 내어 보리를 사들이는 목적은 대체로 진휼하기 위해서인데, 호서(湖西) 열읍(列邑)에서 감사의 분부라 하여 역시 보리를 사들이고 있기 때문에 시중의 가격이 폭등하는 결과를 빚고 있으니, 정지하도록 명하고 감사도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5일 임자

인종(仁宗)과 명종(明宗) 2실(室)을 영녕전(永寧殿)에 조천(祧遷)하였는데, 이는 장차 효묘(孝廟)를 부묘(祔廟)하기 위해서였다. 지평 최유지(崔攸之)가 상소하기를,
"인묘(仁廟)의 성덕(聖德)이야말로 세실(世室)에 합당하니, 대신에게 자문하여 심사숙고한 뒤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등이 의논드리기를,
"세실로 받들려면 반드시 평일에 먼저 강정(講定)해야 하는 법인데 조천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의논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따랐다.

 

7월 7일 갑인

상이 경모전(敬慕殿)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055)  를 행한 뒤, 신연(神輦)을 모시고 종묘(宗廟)에 나아가 영녕전(永寧殿)에서 망묘례(望廟禮)를 행하였는데, 이는 송준길의 말을 따른 것이다.

 

효종 대왕을 종묘에 부묘하고, 좌의정 김상헌(金尙憲)과 판중추 김집(金集)을 배향하였다. 묘시(卯時)에 환궁했다. 권정례(權停禮)로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7월 11일 무오

예조가 아뢰기를,
"3년의 복제(服制)가 끝나고 부묘하는 예를 이룬 뒤에는 문묘(文廟)에 전알(展謁)하고 나서 이어 인재를 시험해 뽑는 것이 관례이니, 날짜를 가려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병을 이유로 사양하면서 징소(徵召)에 응하지 않은 채 면직을 청하고, 우참찬 송준길이 어미의 묘소를 개축해야 한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휴가를 청하였는데,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부제학 유계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선왕께서 큰 뜻을 분발하셨는데 공업(功業)을 미처 이루지 못하셨으니, 전하께서 도리상 오늘날 행하셔야 할 것은 오로지 선왕께서 가지셨던 뜻을 마땅히 품으시는 일입니다. 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개강(開講)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가로이 계시는 때에 자주 유신(儒臣)을 접견하시어 경사(經史)를 강독하고 정치에 대해 자문을 구하신다면, 그 공이 꼭 법연(法筵)을 열 때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즘 보건대, 혜택을 베푸시는 것이 균등치 못하여 수십 리나 백 리 사이의 지역만 보아도 혜택을 누리고 누리지 못하는 차이가 현격히 나고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성명(聖明)께서 대공(大公)의 도를 확립하지 못하시고 다방면으로 사사로이 매이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치에 따른 폐단은 전에도 누누이 진달드렸습니다마는, 요즈음 거리에 나도는 이야기를 듣건대, 대궐에서 상(喪)을 벗은 기회를 이용하여 시장에서 비단류의 물품을 하나도 남김없이 사들였다고 하는데, 정말 전파된 이야기대로라면 높이 상투를 틀어 올리고 긴 소맷자락으로 휘젓고 다니는 등 본받아서는 안될 것까지 본받고야 말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임금이나 신하나 모두 한결같이 제 환공(齊桓公)이 거(莒) 땅에 처했을 때와 위 문공(衛文公)이 초구(楚丘)에서 난을 만났을 때056)  와, 우리 나라가 과거 남한 산성에 들어갔을 때처럼 해야만 그런 대로 간신히 살아남아 있는 백성들의 목숨을 부지시킬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며 받아들였다.

 

7월 12일 기미

간원이 청하기를,
"내수사에 별도로 저축된 것과 수진궁(壽進宮)에 비축된 물량을 1년 기한으로 호조에 맡겨 줌으로써 민력을 펼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지 않았다.

 

7월 13일 경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어사(御史)가 포계(褒啓)한 수령들의 상전(賞典)을 다시 의논해 가자(加資)·사마(賜馬)·준직(准職)·승서(陞叙) 등을 각각 차차(差次)로 강등하여 논상하였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청하기를,
"호조로 하여금 공안(貢案)을 뽑아 내게 한 뒤, 납부하지 않은 것이 많을 경우에는 아무리 치적이 있었다는 명성이 있어도 논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신 및 호조 판서 허적(許積) 등과 함께 의논하여 서천 군수(舒川郡守) 홍석무(洪錫武), 서산 군수(瑞山郡守) 윤격(尹檄), 금성 현감(錦城縣監) 원두추(元斗樞) 등에게는 특별히 가자(加資)를 명하고, 민진량(閔晋亮) 등 3인에게는 각각 숙마(熟馬)를 하사하고, 유정(兪椗) 등 5인에게는 각각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고,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지온(李之醞)에게는 아마(兒馬)를 하사하고, 흥덕 현감(興德縣監) 오정언(吳廷彦) 등 5인은 승서(陞叙)하도록 정하였다.
상이 앞서 가뭄으로 인해 피전(避殿)하고 감찬(減饌)하였는데, 예조가 입추(立秋)가 되었다고 하여 복찬(復饌)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양남(兩南) 지방의 흉작이 이와 같으니, 더욱 더 줄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례에 따라 윤허하긴 했다마는, 경의 말이 지극하다. 감했던 것을 복구시키지 말고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은 이미 온통 벌겋게 논밭이 타들어가고 있고, 호남(湖南) 역시 산군(山郡)을 제외하고는 다른 고을 모두가 혹심한 가뭄을 겪고 있다 합니다. 지금 이미 늦긴 했습니다만, 향축(香祝)을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에는 이미 보냈다만, 호남에도 똑같이 내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이 장차 혼례를 치르려 하는데, 물자를 대주지 않으면 제대로 치를 수가 없을 것이니, 은포(銀布)를 내주어 물품을 마련하는 것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5일 임술

대왕 대비와 왕대비의 존호를 정하였으므로 백관이 하전(賀箋)을 올렸다.

 

7월 17일 갑자

간성 군수(杆城郡守) 권령(權坽)에게 진휼을 잘 했다는 이유로 말[馬]을 하사하고, 통천 군수(通川郡守) 이극태(李克泰)는 승서(陞叙)하고, 횡성 현감(橫城縣監) 구일(具鎰)에게 4품직을 제수하도록 명했는데, 비국의 계사(啓辭)를 따른 것이다.

 

송준길이 사직하고 돌아갔다. 이에 앞서 항상 상에게 아뢰기를,
"신은 노쇠한데다 재주도 졸렬하여 직책을 감당할 수 없는데, 만약 경연에 출입하며 터득한 생각을 개진하게 한다면 잘못된 점을 도와드릴 수 있어서, 그런 대로 조금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니, 이 때문에 상이 다시 그에게 이사(吏事)를 맡기지 않았으나, 오래도록 안질(眼疾)을 앓게 된 관계로 경연도 열지 못했다. 그래서 몇개월 동안 준길이 저택에 머물면서 봉조청(奉朝請)057)  만 하는 형편이었는데, 급기야 대간이 조경을 유배보내도록 청한 뒤로는 마음이 스스로 불안하여 교외에 물러가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이 때에 이르러 들어와 상을 만나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상 역시 억지로 만류할 뜻이 없어 마침내 말[馬]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교리 남구만(南九萬) 등이 청대(請對)하여 만류할 것을 극력 청하니, 이에 승지 박세모(朴世模)를 보내 돈유(敦諭)하였으나, 준길이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7월 18일 을축

김좌명(金佐明)을 대사헌으로, 정지화(鄭知和)를 경기 감사로, 김수항(金壽恒)을 동지경연으로, 조계원(趙啓遠)을 동지의금으로, 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삼았다. 그리고 대사성 박장원(朴長遠)이 다른 직책에 임명되긴 하였으나 체직하지 말고 그대로 겸대(兼帶)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이는 사유(師儒)의 자리는 오래도록 있게 하여 효과를 거두게 해야 한다는 송준길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준길의 의도는 유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장원이 굳이 사양한 끝에 체직되었다.

 

7월 19일 병인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송준길을 간절히 만류하고 송시열을 소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 가서 유시하게 하였으나, 시열 역시 오지 않았다.

 

7월 21일 무진

선천부(宣川府)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7월 22일 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수령이 향시(鄕試)에 응시하게 되면 일이 많이 잡스럽게 되기 때문에, 지난번에 판서 윤강(尹絳)이 모두 경시(京試)에 응시토록 하자고 계청(啓請)했습니다마는, 엄청난 흉년을 당한 이때에 인부와 말[馬]의 양식을 조달하느라 제도(諸道)에 폐단을 끼치게 될 뿐만 아니라 설과(設科)할 때에 차비관(差備官)058)  들도 보충해 차견할 길이 없으니, 이 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은 각기 향시에 응시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진보 현감(眞寶縣監) 채익준(蔡翊俊), 용궁 현감(龍宮縣監) 이형식(李馨植) 등에게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였는데, 진휼을 잘 했다고 도신(道臣)이 포계(褒啓)했기 때문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비의 책례(冊禮)가 있은 뒤에는 백관을 모이게 하여 수사(壽詞)를 올리는 고례(古例)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임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황해도에 심한 한발이 들었으므로 향축(香祝)을 보내 기우제를 행하도록 하였다.

 

7월 25일 임신

예조가 아뢰기를,
"날로 한발이 심해져 온갖 곡식이 타죽고 있습니다. 입추(立秋)가 지나긴 했지만 최근의 예에 따라 기우제를 지내되 날짜를 가리지 말고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평해군(平海郡)에 비가 많이 와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사람이 깔려 죽었다.

 

7월 26일 계유

김좌명(金佐明)을 도승지로,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구인기(具仁墍)를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책례 도감(冊禮都監)이 아뢰기를,
"인목 왕후(仁穆王后) 때에 처음으로 악장(樂章)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선조 대왕(宣祖大王)에게 이미 존호(尊號)에 걸맞는 악장이 있었던 만큼 거기에 맞추어 왕비에게도 악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빚어진 소치입니다. 그런데 광해(光海) 때 폐비(廢妃)의 책례를 거행할 적에 이 예를 잘못 거행하면서부터 마침내 관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신묘년에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의논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대략에 ‘선조조에 중광악(重光樂)이 있었고 인목 왕후에게도 악장이 있었습니다만 다른 등록에는 도대체 악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혼조 때 거행한 일은 예로 삼기에 불충분합니다.’ 하였습니다. 당시 이런 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던 이유는 인습에 따라 행하려는 주장이 경(經)에 근거한 논의보다 우세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잘못된 예를 답습한다면 백년 동안 행해온 오류를 바로잡을 때가 없을 것이니, 이번 책례할 때에는 악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경상 좌도에 큰물이 져 1백 20여 가구가 물에 잠기고 70여 인이 죽었다. 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변해 바뀌는가 하면 하천의 흐름이 길을 달리하였고, 민간의 전답이 무너지고 벼곡식이 잠기어 떠내려 간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경주(慶州)가 특히 심했다. 이 일이 보고되니,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7월 27일 갑술

자의 대왕 대비(慈懿大王大妃)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려 ‘자의 공신(慈懿恭愼)’이라고 하였다. 상이 사배(四拜)하고 책보(冊寶)를 받들어 정사(正使)에게 주니, 영의정 정태화가 대왕 대비전에 올리고 복명(復命)하였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으로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여 사면을 행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너무도 극심하게 흉년이 들었으니, 어영군(御營軍)으로 상번(上番)케 하는 규정을 정지시키소서."
하였는데, 대장(大將)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먼 지방의 군병은 모두 상번하지 말게 하는 대신, 경기의 조련되지 않은 군사를 10월부터 입번(立番)케 하여 2개월 동안 조련시킨 뒤에 해산해 보내면, 군정(軍政)이 전폐(全廢)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7월 28일 을해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려 효숙 왕대비(孝肅王大妃)라 하고, 일체의 의식을 대왕 대비에게 존호를 올렸던 때와 같이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큰 예식이 거듭 거행되는 시기인만큼 궁금(宮禁)을 더욱 엄숙히 해야 마땅한데, 응당 참여해야 하는 명부(命婦) 외에 궁척(宮戚)의 여러 권속들까지 줄을 대고 함부로 들어온 자가 많으니, 매우 일이 잡스럽게 되었습니다. 법부(法府)로 하여금 그들의 가장(家長)을 조사해내어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엄히 단속하여 잡스럽게 되지 않도록 하겠다."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

 

사관(史官)이 유지(有旨)를 받들고 송시열에게 가서 전유(傳諭)한 뒤 돌아왔는데, 송시열의 계사(啓辭)에 "신이 하루 동안 있게 되면 그 하루만큼 죄가 더해질텐데 어떻게 감히 무턱대고 나아가겠습니까." 하였다.

 

7월 29일 병자

왕비 김씨(金氏)를 책봉(冊封)하였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였다. 승지가 책보(冊寶)·교명문(敎命文)·명복(命服)을 받들어 정사(正使)인 영의정 정태화에게 주었다. 태화가 중궁전(中宮殿)에 받들어 올리고 복명(復命)하였다. 권정례(權停禮)로 교서를 반포하고 사면을 행하였다. 백관이 전(箋)을 올려 하례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윤비경(尹飛卿)이 조경을 죄주기를 청하였을 때, 태화가 상에게 조경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는데, 이에 비경이 인피하면서 ‘임금을 유도하여 간언(諫言)을 막게 한다.’고 기세를 올려 배척하였다. 이에 태화가 즉시 체직을 청하려 하였으나 대례(大禮)가 있는 관계로 주저하며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하례하는 순서가 막 끝나자마자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린 것이다.

 

좌의정 심지원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원 역시 조경을 구제해주려 했다는 일로 윤비경에게 배척을 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면직을 청한 것이다.

 

부제학 유계 등이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삼남(三南) 지방 수천리 논밭이 이미 벌겋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여타 제도(諸道)에서도 차례로 위급함을 고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근고(近古)에 없던 참혹한 한재(旱災)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조가(朝家)의 거조를 보면 황급해하는 뜻이 없으니, 신들은 삼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삼가 듣건대, 경축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종실(宗室)의 부녀들이 들어오면 안에서 연회를 베풀 목적으로 음식을 장만하고 꽃을 만드는 등 의품(儀品)을 준비하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풍성하다고 합니다. 아비가 마루에서 노여워하고 있는데 아들은 방 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과 이 어찌 다르다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통렬히 더 유념하시어 내연(內宴)을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차자를 들인 이튿날에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면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안에서 경축하는 의식이 있을 때 반드시 친척들을 초청하는 것은 예로부터의 관례이다. 그러나 연회를 베푸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인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일을 하겠는가. 이토록까지 근거없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니, 내가 제대로 신임을 받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실로 낯이 뜨거워지면서 자책할 뿐이다."
하였다. 외간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는데도 상의 하교가 이와 같았으므로 유계 등이 더 이상 감히 거론하지 못하였다.

 

평안 병사 허동립(許東岦)이 죄가 있어 하옥되었다가 이윽고 석방되었다.
처음에 동립이 안주(安州)의 장관(將官) 석지암(石之嵓)으로 하여금 신미도(身彌島)에 가서 맹호(猛虎)를 잡게 하였는데, 지암이 두려워 겁을 내며 즉시 가지 않자 동립이 성을 내어 장살(杖殺)하였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지암이 동립의 음사(陰事)를 정지화(鄭知和)에게 알릴까 의심한 나머지, 동립이 기회를 틈타 장살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동립의 원통함을 탑전에서 극구 아뢰고, 심지어는 대계(臺啓)가 근거없는 것이라고까지 하면서 아뢰기를,
"신의 첩의 아들이 동립의 사위이기 때문에 곡절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신이 머리가 하얗게 센 대신으로서 어찌 감히 혐의를 피하느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동립이 옥에 나아가기도 전에 석방된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살인은 중죄이다. 아무리 부하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의 목숨을 초개처럼 볼 수 있단 말인가. 동립에게 목숨으로 보상받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남형(濫刑)한 죄를 스스로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원두표가 교활하게도 공공연히 상의 앞에서 속임수를 씀으로써 죄가 있는 자를 요행히 면하게 하고 죽은 자로 하여금 원한을 품게 만들었으니, 조정의 기강이 어떻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헌부가 아뢰기를,
"올해 서울에서 합동으로 치르게 되는 과거를 특별히 서울과 지방으로 나눈 것은 대체로 주객(主客) 모두가 고달파질 것이라는 염려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재(旱災)가 더욱 혹심해지고 상황 또한 변했으니, 문과·무과에 응시하는 허다한 사람들이 경시(京市)에서 미곡을 마련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경사에 따른 과거는 해를 넘기지 않는 것이 옛 규정이긴 합니다만, 이런 지경에 이른 만큼 별도로 변통하는 조치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우선 내년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추후로 과거를 실시한다면 매우 온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문묘(文廟)에 전알(展謁)하는 예(禮)야 그만둘 수 없습니다만, 이곳에서도 시취(試取)하지 말아 응시자와 도민(都民) 모두 고달프게 되는 폐해를 없애주고, 내년에 별도로 정시(庭試)를 거행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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