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윤7월

싸라리리 2025. 12. 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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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7월 1일 무인

부제학 유계 등이 청대하였으나 상이 병을 이유로 거절하고 생각한 바를 서계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한재가 더욱 심해져 백성의 일이 날로 급해졌으므로 유계 등이 면대하고 일을 아뢰려 하였으나, 만나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정영(李正英)을 우윤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사간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집의로, 김체건(金體乾)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홍득기(洪得箕)·심익현(沈益顯)·정제현(鄭齊賢)·정재륜(鄭載崙)·원몽린(元夢鱗) 등에게 광덕 대부(光德大夫)059)  를 가자(加資)하였다. 이때 백관이 사면령을 내리는 기회에 가자되었는데, 상이 이 부마(駙馬) 5인은 자급을 친수(親受)토록 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윤삼(尹蔘)을 영릉 참봉(英陵參奉)으로 삼았다. 윤삼은 호서(湖西) 사람이다. 병자 호란 때 온 가족이 포로가 되었는데, 뒤에 돈을 마련해 속(贖)바치고 돌아올 무렵에 윤삼이 그 노복에게 말하기를 ‘내 자식놈이야 지금 속바치지 못하더라도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뒤에 가서 내가 속바치고 귀환시킬 수 있다. 그러나 내 조카의 경우는 이미 부모가 없으니 지금 속바치지 않으면 돌아올 기약이 없게 될 것이다. 모두 속바치게 될 수만 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돈이 부족하거든 조카를 우선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노복이 그의 말대로 하여 조카에 대한 몫을 속바치고 귀환시켰는데, 다음 해에 다시 가보니 그 아들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리하여 윤삼에게 결국 아들이 없게 되자 조카를 양자로 삼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를 등백도(鄧伯道)의 고사060)  에 견주었다. 이민적(李敏迪)이 호서에 어사로 나가 염찰(廉察)한 뒤 그를 수용(收用)할 것을 계청하여 관직에 보임(補任)한 것이다.

 

평안도에서 한재(旱災)가 들었다고 보고하니, 향축을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윤7월 2일 기묘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이, 부마(駙馬) 5인에게 가자(加資)하며 친수(親受)토록 한 명(命)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들어주지 않았다. 대체로 사면령을 내리는 기회에 가자할 때에는 친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홍득기(洪得箕) 등에 대해서는 자급을 친수하게 하자, 은상이 이는 전례(前例)가 아닐 뿐더러 작질(爵秩)을 경솔하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환수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에 상이 노여워하며 정원에 명하여 병자년 이후로 몇 사람이나 친수하게 했는가와, 대간이 환수할 것을 청했는지의 여부를 조사케 하였는데, 오직 복령군(福寧君) 이욱(李栯) 한 사람만이 사면령 때문에 자급을 친수했고 환수한 일은 없자, 상이 단지 윤허하지 않는다고만 답하였다. 이튿날 은상이 탑전에서 그 일을 연계(連啓)하였는데, 상이 더욱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친수토록 하는 것이 법례(法例)가 될까 염려하는 것인가. 한 때의 특명인데 안 될 것이 뭐가 있는가. 그리고 ‘성상의 의도가 참으로 우연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자성(慈聖)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는 의미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려는 뜻에서 이런 일을 했다고 한다면, 무슨 해로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설령 법을 벗어나 가자해 주었다 하더라도 이는 아랫사람들이 꼭 쟁집(爭執)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자성께서 숙환(宿患) 중에 계시면서 다행히 부지하시어 상복(喪服)까지 다 마치셨는데, 내가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릴 길이 없기에 특별히 부마 다섯명에게 가자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기필코 환수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대사간은 어미도 없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고, 오열(嗚咽)하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은상이 황공하여 인혐(引嫌)하고 물러나와 합문(閤門) 밖을 나서니, 그의 종형 이일상(李一相)이 책망하며 말하기를,
"네가 국가의 일에 대해 끼지 않는 일이 없고자 하였으니,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효종대왕실록(孝宗大王實錄)》을 편찬한 총재관(摠裁官) 이하에게 고례(古例)에 따라 술을 내리고 사연(賜宴)할 것을 명하였다. 헌부와 정원이 아뢰기를,
"이렇듯 참혹하게 가뭄이 든 때에 음악을 연주하며 연회를 베풀 수는 없습니다."
하고, 총재관 이경석(李景奭)도 상차하여 사양하니, 연회를 베풀지 말도록 명하고 단지 중사(中使)를 보내 의정부 및 차일암(遮日巖)에 술을 내리게 하였다. 주흥이 어지간히 무르익을 때 이조 참판 김수항(金壽恒)과 교리 이민적(李敏迪)이 다투면서 예모가 서로 엉망이 되었는데, 수항이 민적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당상(堂上)에 오르기 위해 한 자급이 채워지지 않은 것을 벗어나려고 정조(政曹)에 꾀를 쓰다가 나에게 발각되었으니, 사부(士夫)의 마음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 내가 입에서 꺼내기만 하면 자네는 세상에서 행세하지 못할걸세."
하였다. 당시 민적이 가례청(嘉禮廳) 도청(都廳)으로서 한 자급을 다 채우지 못한 관계로 당상에 오르지 못했다. 수항은 민적이 이 때문에 한 자급을 채우려 꾀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한 가지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민적의 가정 내의 일을 그가 포착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민적은 시배(時輩)의 중망을 받고 있는 몸이었는데, 수항이 술기운에 편승하여 면박을 주었으므로, 어미에게 문안을 드린다는 핑계를 대고 그의 형 이민장(李敏章)의 임소(任所)인 영유현(永柔縣)에 가서는 몇 개월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윤7월 3일 경진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궐안에서 술담그는 쌀을 줄이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이라도 백성을 구제하는 길이 된다면 무엇을 애석해하겠는가."
하였다. 홍명하(洪命夏)가, 애통해하는 교서를 내리면서 부디 유산(流散)하지 말라는 뜻으로 유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李浣)이 훈국(訓局)의 군병 중에서 노쇠하고 잔약한 자들을 감하여 조금이라도 폐단을 덜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는데, 6백 명을 감하였다.

 

윤7월 5일 임오

삼남(三南) 지방의 수군(水軍)과 육군을 조련하는 일과 세초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조복양(趙復陽)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윤7월 6일 계미

진휼청을 설치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이 별도로 진휼청을 설치하는 것은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조복양을 당상으로 차출한 뒤, 비국 제조 홍명하(洪命夏) 및 호조 판서와 함께 관할하게 하고 대신이 지휘하도록 하여 비국에 편입시켰었다. 그런데 계사(啓辭)를 올리고 행이(行移)할 적마다 비변사라고 칭하자, 대신이 사체(事體)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다 하여 다시 진휼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윤7월 8일 을유

세 도감(都監)의 집사(執事)들에게 상전(賞典)을 행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예방 승지 이익한(李翊漢)이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자급(資級)에 올랐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간으로, 최유지(崔攸之)·이동로(李東老)를 장령으로, 이제형(李齊衡)을 헌납으로, 이숙(李䎘)을 지평으로, 유명윤(兪命胤)·원만리(元萬里)를 정언으로, 이중신(李重信)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윤7월 9일 병술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조복양이 태복시의 마필(馬匹)을 또 감할 것을 청하고, 홍명하(洪命夏)가 각읍에 매달 군량 및 군기(軍器)를 부과하는 것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윤7월 10일 정해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승지로 삼았다. 오준(吳竣)에게 보국 대부(輔國大夫)를, 허적(許積)에게 숭록 대부(崇祿大夫)를, 이일상(李一相)에게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여이재(呂爾載)·조계원(趙啓遠)·윤순지(尹順之)에게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윤비경(尹飛卿)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윤비경은 용렬한 인물로서 원래 그가 주장하는 것이 가벼웠다. 그런데 시론(時論)이 조경을 배척하는 것을 보고는 분연히 자기가 떠맡고 나서서 온갖 힘을 기울여 논핵하는 한편, 대신이 조경을 변호해 구제해 주려 했다는 이유로 예봉을 돌려 대신을 공격하였다. 이에 시의(時議)가 그를 일러 입언(立言)이 직절(直截)하고 풍채가 고상하다고 하면서 일제히 칭찬하였다. 그런데 부묘할 때의 대축(大祝)061)  이야말로 당대에 엄밀히 선발해야 할 자리로서 중망(衆望)이 이민적(李敏迪)에게 돌아갔는데, 민적이 사양하여 피하면서 비경에게 양보하였으므로, 비경이 이를 말미암아 마침내 당상이 된 것이다.

 

홍주목(洪州牧)을 강등하여 홍양현(洪陽縣)으로 삼았는데, 이는 전패(殿牌)062)  에 변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7월 11일 무자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삼남(三南) 지방 백성들의 목숨이 바야흐로 아침 저녁에 달려 있는 상황이니, 새로 제수하는 수령들에 대해서 내년 가을까지는 가족을 데려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7월 13일 경인

평안·황해·강원·충공(忠公) 등의 도에 들어가 그곳 백성이 된 자들의 산전(山田)에 세금을 거두어들였는데, 원두표(元斗杓)의 말을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1결(結)당 5두(斗)로 기준을 삼았는데,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너무 많다고 하자 3두로 줄여 정했다. 두표가 또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줄 때 미곡을 거두고, 교생(校生)에게 강(講)을 면제해 주는 대신 미곡을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대신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그 의논이 잠잠해졌다.

 

유철(兪㯙)을 예조 참판으로, 서원리(徐元履)를 호조 참판으로, 유혁연(柳赫然)을 좌윤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서원리는 보잘것없는 과유(科儒)063)  의 몸으로 외람스럽게도 대각(臺閣)의 자리를 차지했었는데, 이는 대개 원두표(元斗杓)가 입김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두표가 비국 제조의 자리에까지 끌어들인 것인데, 원리는 입시할 때마다 오직 두표의 입만 쳐다볼 뿐이었다.

 

전남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치계(馳啓)하여 영장(營將)을 소환함으로써 공억(供億)에 따른 폐단을 줄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원두표가 안 된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이때 상이 오래도록 경연을 열지 않아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개강(開講)하자 여러 신하들이 무척 기뻐하였다. 그러나 몇 일 못가서 다시 안질 때문에 정지하였다.

 

전 관상감 직장 송형구(宋亨久)가 상소하여 시헌력(時憲曆)을 폐지하고, 도로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본감 도제조가 아뢰기를,
"역수(曆數)가 차이나는지의 여부는 일식과 월식에서 증명될 수 있는데, 구법(舊法)으로 증명해 보면 많이 차이가 나는 데 반해, 신력(新曆)으로 증명해 보면 상당히 접근되고 있습니다. 당초에 시헌력을 쓰기로 정했던 것도 이 이유에서였습니다. 더구나 신력을 쓰도록 이미 선조(先朝) 때 성명(成命)을 받들었던 만큼 지금 와서 경솔하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옳다고 비답하였다.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지의금 윤순지(尹順之)와 조계원(趙啓遠) 등을 탄핵하며 파직을 청하고, 이선기(李善基)를 도로 하옥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당초 이민적(李敏迪)이 암행 어사로 호서(湖西)를 염찰(廉察)하고 ‘면천 군수(沔川郡守) 이선기가 서울에 사는 사부(士夫)를 위해 제언(堤堰)을 축조하면서 제멋대로 연군(烟軍) 5백 명을 동원해 썼다.’는 내용으로 서계(書啓)하여 보고하니, 상이 금부에 내려 다스리도록 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그때 판의금을 겸하고 있었는데, 상소하기를,
"신의 서제(庶弟)가 내포(內浦)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정유년 봄에 약간의 역가(役價)064)  를 마련하고, 그 지역의 주민들과 더불어 힘을 합쳐 면천에서 제방을 쌓다가 완성을 보기도 전에 그 제방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뒤에 사람을 통해 듣건대, 감영(監營)에 정장(呈狀)하여 역군(役軍)을 얻기를 청해 다시 일을 시작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 하기에, 신이 즉시 사람을 보내 정장을 빼앗아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일을 맡은 자가 힘있는 자를 의지하여 폐단을 끼칠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선기의 일에 대해 조정에서 곡절을 모르는 자들은 신을 지목하여 말하고 있으니 신은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서제가 그 사건 속에 들어가 있고 신도 이미 그 일에 참여한 이상, 이 옥사에 대해 신은 감히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금오(金吾)065)  의 직을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관(貳官)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였다. 이에 윤순지 등이 이선기의 원정(原情)066)  을 토대로 아뢰기를,
"일단 많은 사람들이 정장(呈狀)한 것에 따라 도주(道主)가 제송(題送)067)  하면서 단지 품삯을 받은 사람들만 부역(赴役)케 했고 보면 이는 연군(烟軍)을 멋대로 쓴 것이 아니고, 정장과 제사(題詞)068)  가 모두 있고 보면 또한 기망(欺罔)한 것도 아닌데, 더구나 그 일이 사면령이 내리기 전에 있었으니, 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하니, 상이 다른 일들처럼 용서하도록 명하였다. 민적이 상소하여 극언하기를,
"이선기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는데, 금오의 관원이 듣기좋은 말로 속여 요행히 은사(恩赦)를 받아냈으니, 신은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이어 원만리를 사주하여 논을 격발케 하면서 허적을 기필코 중상하려 하였다. 결국 일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민적이 계책을 이루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장소(章疏)를 올릴 때마다 허적을 침해하곤 하였다.

 

정언 유명윤(兪命胤) 등이 아뢰기를,
"사부(士夫)의 말과 행동은 차이가 나면 안 됩니다. 전 수찬 안후열(安後說)은 지난번에 이미 본관(本館)의 차자에 참여하고서 곧바로 또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그의 외조모와 누이가 궐내에 불법으로 들어온 것을 몰랐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필시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고, 알면서도 차자에 동참했다면 올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겨야 하는 의리가 매우 부족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형편없는 행동을 하였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7월 15일 임진

김남중(金南重)을 겸 지의금으로, 정치화(鄭致和)를 예조 판서로, 김수항(金壽恒)을 겸 동지의금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홉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윤7월 17일 갑오

상의안포(眼胞)069)  에 투침창(偸鍼瘡)070)  이 생겨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였다. 상이 도제조 원두표(元斗杓)에게 하문하기를,
"속방(俗方)에 습창(濕瘡)은 온천 물에 목욕하면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의서(醫書)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만, 목욕해서 효험을 보는 경우를 신도 보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초정(椒井)에서 씻어보면 어떻겠는가? 선왕께서도 일찍이 효험을 거두신 적이 있었다."
하였다. 초정은 옛 인경궁(仁慶宮) 안에 있었는데 자연의 경관이 수려했으며, 부마(駙馬) 3인의 저택이 그 속에 줄지어 서 있었는데 이를 데 없이 사치스러웠다. 효종 대왕이 언젠가 초정에서 목욕하면서 그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상이 가보고 싶어서 은근히 핑계대고 물어본 것이었다. 홍명하(洪命夏)가 상의 뜻이 초정에서 목욕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쟁집(爭執)하였으나 되지 않자, 이에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과 서로 대립하는 양상이 되면 역시 사체(事體)에 손상이 되니 심사숙고해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바깥의 의논은 필시 신들이 받들어 따랐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마침내 일관(日官)에게 택일하도록 명하고 가기로 결정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이선기(李善基)의 일에 대해서 사실 연루된 혐의가 있는 만큼 선기의 범죄 행동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뭐라고 말씀드릴 입장이 못됩니다. 그러나 이렇듯 거듭 대 사면령을 내려 잡범(雜犯)과 사죄(死罪)에 해당되는 자들까지도 모두 용서해 주는 시기에, 가장 늦게 석방된 사람을 대상으로 곧바로 다시 구속할 것을 청한 것은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나온 행동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중간에 스스로 물러나왔다는 핑계를 대고 죄가 없는 자처럼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초 파손된 제방을 쌓았다가 다시 무너진 일은 무술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3월에 신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와 듣건대, 제방을 쌓던 민인(民人)들이 군병을 확보하려고 정장(呈狀)하면서 장차 다시 축조할 일을 꾀한다 하기에, 신이 즉시 서제(庶弟)로 하여금 진정서를 찾아와 관아에 들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선기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선기가 그곳에 부임한 것은 그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선기가 기망(欺罔)했다고 하니, 어쩌면 그렇게도 신의 소장과 내용이 동떨어진단 말입니까. 현재 조정에 가득한 훌륭한 신하들이 명절(名節)을 갈고 닦으면서 모두들 가난하게 지내는 것을 꿀처럼 달게 여기고, 부유하게 지내는 것을 몸이 더럽혀지는 것처럼 여기고들 있습니다. 그런데 신만은 그렇지 못해 나라를 위해 도모하다가 백성을 해치는 자라는 이름을 얻고 처신을 잘 하려다가 비루한 사내라는 결과로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또한 형편없는 신에게 취할 점이 뭐가 있다고 꼭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에 오래도록 있게 함으로써 끝내 뭇 화살의 표적이 되게 하신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본직과 겸대직을 모두 체직시키고 이어 시골에 내려가 살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온유하게 유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윤7월 18일 을미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제방을 쌓는 일이 어찌 대단한 일이야 되겠습니까. 물의가 비난하는 것은 단지 연군(烟軍)을 동원해 썼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논한 것도 이선기(李善基)가 기만한 것을 매우 미워해서 나온 것인데, 허적(許積)이 임금을 기망한 사람을 위해 극구 변호해주면서, 일단 석방된 그를 도로 구속시키려 한 것은 분명히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자신의 몸이 뭇 화살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스스로 의심하다가 이제는 또 남을 그토록 의심하게 되었단 말입니까. 신이 수령 한 사람을 논하다가 거꾸로 중신(重臣)의 배척을 받았으니, 어떻게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유명윤(兪命胤)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이선기가 5백 명의 역군(役軍)에 대해 품삯을 받고 일한 인부들이라고 하면서 끝내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물론이 모두 놀라며 통분스럽게 생각했던 점입니다. 그런데 신이 실제로 년월(年月)의 선후(先後)라든가 선기가 임소(任所)에 도착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보지 못한 채 논계할 때에 문장을 작성하면서 뒤섞어 삽입시키긴 하였습니다만, 허적이 이토록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소장을 올린 것에 대해서는 신이 참으로 의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곡절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제대로 자세히 살피지 못한 점이야말로 사실과 잘못되었다는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으니, 어떻게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이제형(李齊衡)이 처치하기를,
"대계(臺啓) 가운데에서 언급한 소위 ‘연군(烟軍)을 제급(題給)하였다.’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전후로 증거한 말들이 들쭉날쭉하는 결과를 면치 못했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7월 22일 기해

상이 인경궁(仁慶宮)에 거둥하여 초정(椒井)에서 목욕하였는데, 5일 동안에 네 차례나 거둥하였다. 헌부가 어가(御駕) 앞에서 음악 연주하는 것을 정지하여 재해를 당한 날에 경외(敬畏)하는 뜻을 보이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런 때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실로 안 될 듯하기에 환궁할 때 이미 정지하도록 하였다마는, 아뢴 말이 내 뜻과 정말 부합되니 전후(前後) 악대를 모두 진열해 놓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말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재해를 당한 고을의 노비 신공(身貢) 및 군인(軍人)의 번포(番布)을 감해주고 그 대신 호조·상평청·선혜청·사복시 등 각사(各司)에 비축된 것을 내주어 그 숫자를 채우도록 청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의 소상(小祥) 때 중전께서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겠기에 전례(前例)를 상고해 보건대,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소상 때 중전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별전(別殿)에서 망곡례(望哭禮)를 올린 뒤 소복을 벗고 길복(吉服) 차림으로 나아가 임곡(臨哭)을 마쳤으며 도로 안에 들어가 길복을 벗고 소복 차림으로 그 날을 마쳤었으니, 이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가 무려 20 차례나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니, 상이 그의 마음을 편케 해주려고 허락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정태화는 총명하고 영민할 뿐더러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미 공보(公輔)의 기대가 있었다. 인조(仁祖) 말년에 처음 정승이 되어 세 조정을 차례로 섬겼는데 어느 신하보다도 융숭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따지며 혐의될 일은 잘 피하면서 나라 일을 떠맡을 뜻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상의 앞에서 일을 논할 때마다 번번이 뭇 의논들에 대해 우물쭈물하기만 하면서 쟁집(爭執)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식자들이 비난하였다. 집에서는 누구를 만나든 공근(恭謹)하게 대하고 작위가 높다고 하여 거만을 피우지 않았으며, 빈료(賓僚)를 인접(引接)할 때에도 문에서 손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시론(時論)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몇 번이나 위기상황을 맞았어도 계속 바뀌지 않고 영화롭게 현달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벼슬살이 잘 하는 자를 칭할 때에는 반드시 태화를 으뜸으로 꼽았다. 그의 아우 정치화(鄭致和)와 정만화(鄭萬和)도 정밀하고 영민하여 벼슬살이를 잘 했으나, 성질이 급하고 너무 세심하였으며 총명함이 태화보다는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0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정태화는 총명하고 영민할 뿐더러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미 공보(公輔)의 기대가 있었다. 인조(仁祖) 말년에 처음 정승이 되어 세 조정을 차례로 섬겼는데 어느 신하보다도 융숭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따지며 혐의될 일은 잘 피하면서 나라 일을 떠맡을 뜻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상의 앞에서 일을 논할 때마다 번번이 뭇 의논들에 대해 우물쭈물하기만 하면서 쟁집(爭執)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식자들이 비난하였다. 집에서는 누구를 만나든 공근(恭謹)하게 대하고 작위가 높다고 하여 거만을 피우지 않았으며, 빈료(賓僚)를 인접(引接)할 때에도 문에서 손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시론(時論)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몇 번이나 위기상황을 맞았어도 계속 바뀌지 않고 영화롭게 현달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벼슬살이 잘 하는 자를 칭할 때에는 반드시 태화를 으뜸으로 꼽았다. 그의 아우 정치화(鄭致和)와 정만화(鄭萬和)도 정밀하고 영민하여 벼슬살이를 잘 했으나, 성질이 급하고 너무 세심하였으며 총명함이 태화보다는 못하였다.

 

윤7월 28일 을사

정태화(鄭太和)를 판중추로, 서필원(徐必遠)을 승지로 삼았다.

 

해서(海西) 지역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으므로 관서(關西) 지방의 모맥(牟麥) 8백 석(石)을 배로 운반하여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윤7월 29일 병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세 차례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비답을 내려 매우 간절하게 위로하고 타이르면서 이르기를,
"나라 일은 돌아보지 않고 물러나 돌아갈 생각만 한단 말인가. 가능한 한 속히 나오라."
하였다. 이때 허적이 충주(忠州)로 돌아가려고 강 밖으로 나와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상이 이렇게 비답한 것인데, 허적이 이에 다시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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