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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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정미

예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병을 이유로 굳이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8월 2일 무신

귀성 부사(龜城府使) 황호(黃浩)와 홍산 현감(鴻山縣監) 윤상거(尹商擧)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어떻게 다스리겠는가?"
하자, 황호가 수령 칠사(守令七事)071)  로써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상거는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땀이 흘러 등까지 적시고 행동거지도 엉망이 된 채 수령 칠사를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자 상도 다시 묻지 않았다.

 

8월 3일 기유

좌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전 영의정 정태화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는 핑계를 대고 잇따라 사직 단자를 올렸는데, 심지어 군부(君父)로부터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분부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끄떡도 하지 않은 채 기어코 체직되고야 말았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태화는 정승의 신분으로 이미 세 조정을 차례로 섬겼는데 선조(先朝) 때에는 혼인관계로까지 중하게 맺어졌으니, 그야말로 이른바 의리로는 군신(君臣)간이지만 은혜로는 부자(父子)간과 같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요컨대 대각(臺閣)에서 일시적으로 발언한 과격한 말에 불과할 뿐인데, 이번에 그만 벌벌 떨면서 체직되지 못할까 두려워하기만 하였으니, 비록 그의 본심이야 일을 피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옆에서 보는 사람들로서는 그 누가 이런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의 직책을 도로 제수한 뒤 다그쳐 출사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가 끝내 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특별히 엄한 분부를 내려 자기 편할 때로 일을 회피한 그의 죄를 다스린 뒤, 먼 지방에 유배보낸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지 않는 한 분의(分義)를 엄히 할 수 없고 나랏일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옛날 한 무제(漢武帝)는 말하기를 ‘재주가 있으면서 다 발휘하려 하지 않는 자는 재주가 없는 자와 마찬가지이니 죽이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무제의 고사를 본받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무사할 때는 후한 녹봉을 받으며 향유하다가 유사시에는 한가로이 지내는 등 하고싶은 대로 하도록 어떻게 그냥 내맡겨 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를 들이자, 상이 하교하기를,
"서필원은 측근의 반열에 있는 신분으로 조가(朝家)에서 어떻게 처치하는지 지켜보아야 마땅한데, 그만 감히 장황하게 떠벌여대면서 이토록까지 대신에게 모욕을 가했으니, 사체(事體)를 따져 볼 때 형편없기 짝이 없다. 마땅히 유배보내 그 죄를 바로 잡아야 하겠지만, 이런 일로 그의 길을 막을 수는 없으니, 우선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 및 삼사(三司)가 말한 자를 죄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잇따라 소장을 올려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세 번째 아뢰어서야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태화의 체직을 허락한 것은 단지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기 위한 것으로서 훗날 다시 정승으로 삼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서필원이 조금도 가차없이 몰아부치며 소를 올렸기 때문에 이와 같이 꾸짖은 것이다. 이 해 겨울에 태화가 과연 정승으로 들어 왔는데, 서필원의 소가 중도에 맞지는 않았어도 그가 곧이곧대로 감히 말한 것에 대해서는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0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상이 태화의 체직을 허락한 것은 단지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기 위한 것으로서 훗날 다시 정승으로 삼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서필원이 조금도 가차없이 몰아부치며 소를 올렸기 때문에 이와 같이 꾸짖은 것이다. 이 해 겨울에 태화가 과연 정승으로 들어 왔는데, 서필원의 소가 중도에 맞지는 않았어도 그가 곧이곧대로 감히 말한 것에 대해서는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

 

8월 4일 경술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헌납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삼았다.

 

지평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이선기(李善基)를 의금부에서 다스리라고 다시 명하셨다가 곧바로 참작해서 조율(照律)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의심해야 할지 믿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는데, 무엇을 참작해서 마땅한 율(律)을 적용한단 말입니까. 의금부로 하여금 명확히 조사해서 죄를 논하게 하소서.
그리고 허적(許積)이 이 일에 대해 처음에는 참여해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간여한 일이 없었다면, 오직 금오(金吾)072)  의 자리에만 참석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만 항거하는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고 ‘선배 명류(名類)들도 이런 일을 했기에 신 역시 흉내낸 것이다.’라는 등의 말까지 하면서 기염을 토하며 변론하였는데, 대부분이 홧김에 나온 말들로서 그토록 사체(事體)를 손상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나라 일이 위급해진 이때를 당하여 탁지(度支)073)  의 책임을 맡은 몸으로 줄곧 사직하려고만 하였으니, 자신을 잊고 나라에 몸을 바쳐야 하는 의리로 볼 때, 진정코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선기의 일은 끝내 단서를 얻지 못한 채 고신(告身)을 뺏고 방송(放送)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삼가 살피건대, 이선기는 대사간 이명준(李命俊)의 아들로서 원래 시배들이 서로 허여했던 사이였다. 그리고 군민(郡民)이 제방을 쌓을 때 군병을 동원해 일을 도와준 일이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꼭 죄를 주어야 할 일이겠는가. 그런데 이민적(李敏迪)이 허적을 모함해 해칠 생각을 품고는 처음에 잘 알지도 못하는 논을 내놓자, 원만리(元萬里)와 이숙이 기필코 이민적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유도하려고 이미 석방한 이선기를 도로 수금토록 한 것인데, 결국은 일이 근거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무리들이 이렇듯 위험하기만 한데도 대각(臺閣)에서 활개를 치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자는 죄가 있어도 어떻게든 덮어주고 자신들이 미워하는 자는 온갖 허물을 주워모아 반드시 죄있는 자로 만드는 등, 당사자의 현우(賢愚)나 일의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라 일을 날이 갈수록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가고 말았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수현(長水縣)·임실현(任實縣) 등에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삼척부(三陟府)에 눈이 내리고, 남포현(藍浦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8월 8일 갑인

장령 이동로(李東老)가 그와 친한자를 위해 신사(神祀)074)  를 거행하도록 물금체(勿禁帖)075)  을 발급하였다가 부리(府吏)에 의해 고발되었는데, 지평 이숙이 논하여 파직시켰다.

 

8월 10일 병진

판중추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병세로 보나 정세로 보나 너무도 절박한 상황에 처했기에 번독스럽게 해 드리는 것을 피하지 않고 아뢰어 마침내 체직되는 은혜를 입었으므로, 그런대로 조금이나마 물의(物議)에 사과를 하고 위험한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신의 죄를 청하는 소가 근시(近侍)하는 신하에게서 나왔는데 인용하며 비유한 내용이 다시 여지없이 혹독하였다 합니다. 이에 신이 몸둘 곳을 모른 채 교외에 물러가 돗자리를 깔고 엎드려 명을 기다린 지 오늘로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직명이 아직 그대로 있어 죄가 더욱 중해지기만 하니, 면직시켜 주시어 신의 죄를 바로잡고 나라의 기강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상이 지극히 근실하게 위로하며 유시하였다.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온유한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원자(元子) 탄생의 경사가 있게 됨을 말미암아 다시 도성에 들어왔다.

 

8월 11일 정사

김남중(金南重)을 예조 판서로, 여이재(呂爾載)를 형조 판서로, 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정인경(鄭麟卿)을 승지로, 남구만(南九萬)을 헌납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수찬으로 삼았다.

 

8월 13일 기미

강릉부(江陵府)에 독한 안개 기운이 바다에서 들어와 사람들을 훈습(熏襲)한 결과 병들어 죽은 자가 5인이나 발생했다. 이 일이 보고되자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물을 보내 구료하게 하였다.

 

전라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만경현(萬頃縣)을 혁파하고 다른 읍에 통합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태연이 군현(郡縣)을 순행하여 재해를 입은 실상을 자세히 살피고 계문하면서 아뢰기를,
"만경현이 가장 혹독하게 재해를 입은 결과 백성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하리(下吏)도 붙어 있을 곳이 없게 되어 거의 관가의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 현을 혁파하여 이웃 고을에 소속시키소서."
하고, 백성들이 먹는 풀 줄기를 봉진(封進)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옛 사람이 오매초(烏昧草)076)  를 바쳤던 뜻에 부칠까 합니다."
하였다. 비국이 현을 혁파시키는 일은 연혁(沿革)과 관계되는 것인 만큼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하자, 따르지 않았다. 태연이 전후로 계문하면서 사실을 과장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조정이 불신한 것이다.

 

8월 15일 신유

원자(元子)가 태어났다. 예조가 날짜를 택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고 진하(陳賀)하며 반사(頒赦)하는 일을 차례로 거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간략하게 행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장차 영릉(寧陵)에 참배하면서 경기의 어영군(御營軍)을 징발해 유도(留都)의 용도에 쓰려 하자, 대간이 자주 흔들려 고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간쟁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처음에 흉년이 든 관계로 어영군은 10월로 기한을 물려 입번(立番)시키기로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광주(廣州)의 군병을 징발하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여겨 어영군을 도로 징발한 것이다.

 

판의금 허적(許積)이 감옥의 죄수들을 많이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체면(遞免)을 청하니, 따랐다.

 

8월 16일 임술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출사하였다. 지원이 극력 면직을 청했으나 상이 돈독하게 유시하며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자(元子) 탄생의 경사가 있게 되자 이를 인하여 다시 나와 일을 보게 된 것이다.

 

8월 17일 계해

예조가 아뢰기를,
"원자가 탄생했으니, 각도(各道)에서 진하(陳賀)하는 방물(方物)을 봉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자전 두 분 외에는 봉진하지 말도록 하여 굶주리는 백성에게 조금이나마 폐단을 덜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9일 을축

원자가 탄생했다는 것으로 종묘·영녕전(永寧殿) 및 사직에 고하였다.

 

홍명하(洪命夏)를 판의금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우참찬으로, 민응협(閔應協)을 대사헌으로, 남로성(南老星)을 동지의금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성으로, 유명윤(兪命胤)·정창도(丁昌燾)를 지평으로, 이민서(李敏叙)를 교리로 삼았다.

 

8월 20일 병인

백관이 전문(箋文)을 바쳐 진하(陳賀)하였다. 권정례(權停禮)로 교서를 반포하고 사면을 행하였다.

 

《효종대왕실록(孝宗大王實錄)》을 태백산(太白山)과 오대산(五臺山)에 봉안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한 것이야말로 막대한 경사이니 증광시(增廣試)를 거행해야 마땅한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4개의 경사를 【즉 부묘한 일과 두 분 자전에게 존호(尊號)를 올린 일과 중궁(中宮)의 책례(冊禮)를 거행한 일을 말한다.】  합쳐 대증광시(大增廣試)를 거행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억측으로 감히 정할 수는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드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합쳐서 대증광시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초시(初試)는 올해 거행하는 것으로 정하고 복시(覆試)는 내년으로 정하소서. 그리고 원점(圓點)077)  제도는 폐단만 있을 뿐 유익함이 없으니 우선 폐지하여 관시(館試)를 거행하지 말고, 양소(兩所)의 한성시(漢城試)에 합쳐 시취(試取)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1일 정묘

예조가 아뢰기를,
"원자가 탄생했으니 원래 공상(供上)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근거할 만한 예가 없기는 합니다만, 세자보다 약간 감하면 될 것이니, 내일부터 해조로 하여금 봉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23일 기사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신들이 바야흐로 여러 비용을 절감할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호조 판서의 병이 오래도록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으니 구애되는 일이 많습니다. 듣건대 허적(許積)이 음질(瘖疾)을 얻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까운 시일 안에 낫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적은 재국(才局)이 출중한데다 오래도록 본직을 맡아서 두서를 상세히 알기 때문에 내가 꼭 그를 기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병이 과연 위중하다면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지원이 아뢰기를,
"지금 후임자를 뽑아야 할 텐데 정치화(鄭致和)를 수의(首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하루 전에 치화가 좌상과 우상을 찾아가 허적을 체직시키도록 권했는데, 그가 체직되자 치화가 후임을 맡게 되었다.

 

이은상(李殷相)을 병조 참지로, 민유중(閔維重)을 교리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8월 26일 임신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에 눈이 내렸다.

 

8월 28일 갑술

상이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다. 세 차례 주위를 돌며 봉심(奉審)하다가 섬돌 밑에 이르러 땅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렸다. 경기 감사 정지화(鄭知和)와 양주 목사(楊州牧使) 조귀석(趙龜錫)에게 호피(虎皮)와 궁전(弓箭)을 하사하였다. 이어 건원릉(健元陵)·현릉(顯陵)·목릉(穆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돌곶[石串]에 이르러 금군(禁軍)의 활솜씨를 시험하였다. 상이 말을 달려 길 옆의 언덕으로 올라가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뒤, 금군으로 하여금 1 리(里)쯤 앞으로 말을 치달려 둔(屯)치게 하였다. 그리고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를 불러 길 옆 좌우에 보수(步數)를 참작해서 각각 두 개의 지푸라기 인형을 세우게 한 뒤 방포(放砲)를 신호로 금군으로 하여금 말을 달리며 쏘게 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일을 갑자기 행하게 되자 시종신(侍從臣)과 위사(衛士)들까지 앞뒤로 엉겨 다시 질서를 찾아볼 수 없이 혼잡스럽게 되면서 땅에 나무를 깔고 앉아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하였으므로078)   모두 경악하였다. 이에 대사간 박장원(朴長遠)과 집의 이준구(李俊耉)가 아뢰기를,
"군병을 검열하는 것이 본디 중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3년복을 이제 막 벗고 원침(園寢)에 성묘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다니, 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몇 년 동안 잇따라 흉년이 들어 그야말로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고 닦아 나가야 할 때인데, 신의 생각으로는 이 일이 멋대로 즐기며 노는 것에 가까울 듯싶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신과 옥당이 다시 진달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마침내 활을 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날아 온 화살이 원두표(元斗杓)의 옷소매를 맞추면서 결국은 팔에 상처를 입히자 여러 신하들이 실색(失色)하였는데, 상이 내의(內醫)로 하여금 상처를 돌보게 하였다. 이때 금군의 사격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유계가 중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마침내 활쏘기를 중지시키도록 명하였다. 두 개의 화살을 적중시킨 문민선(文敏善) 등 7인에게는 직부전시(直赴殿試)를 내리고 한 개의 화살을 맞춘 89 인에게는 각각 면포를 하사하였다. 상을 받는 것을 보고는 미처 활을 쏘지못한 자들이 땅에 엎드려 활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후일 마땅히 별도로 활솜씨를 시험하겠다고 유시하니, 마침내 물러들 나왔다. 장차 환궁하려 할 때에 우상은 뒤에 쳐져 뒤따라 오도록 명하였는데, 홍명하가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듯하다.’고 아뢰어 우상이 이에 어가(御駕)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어가자 상이 이에 말을 급히 몰아 환궁하였다.

 

부안(扶安)·진도(珍島)의 죄인을 본도 내지(內地) 및 영남(嶺南)의 조금 풍년든 곳에 이배(移配)하였는데, 이는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두 고을의 재해를 입은 상황이 매우 참혹하다고 치계(馳啓)했기 때문이었다.

 

8월 30일 병자

밤에 천둥 번개가 쳤다.

 

도승지 김좌명(金佐明)이 상소하여 뜻을 분발할 것을 청하고 고식적인 행동을 통렬히 경계시키면서 말을 매우 절실하게 하였는데, 이어 그 소장의 내용이 밖에 전파되지 않도록 청하였으므로, 안에 머물려두고 내리지 않았다.

 

헌납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길 옆에 어가(御駕)를 멈추고 무사의 솜씨를 시험해 본 것이야 처음부터 절대로 해서 안 될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거둥을 경솔하게 하신 일은 만 백성에게 보여주실 도리가 정말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말달리며 쏘아대는 화살이 마구 격렬해지면서 상신(相臣)에게까지 화살이 날아 왔으므로 백관이 대경실색하고 듣는 이들이 놀라워하였는데,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도 필시 이번에 두려운 마음이 드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신중하게 거조를 취하지 않으시면 끝내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치게 될 것이니, 저번 일을 유념하시어 후일의 경계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관서(關西) 지방에 우박이 떨어져 벼곡식이 많이 손상되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니,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은 곳에 급재(給災)079)  하도록 명하였다.

 

김덕령(金德齡)을 신원시키고 복관(復官)해 주도록 명하였다.
덕령은 광주(光州) 사람이다. 그는 강개지사(慷慨之士)로서 대절(大節)이 있었으며 용력이 빼어났다. 임진 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격파하였으므로 왜노(倭奴)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피하였다. 선묘(宣廟)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 곧장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라는 호를 하사하니, 이때부터 위명(威名)이 크게 진동하였다. 그런데 시기하는 자가 이몽학(李夢鶴)의 패거리라고 그를 지목하면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위에 보고한 뒤 공동으로 모함한 결과, 마침내 하옥(下獄)된 뒤 장사(杖死)하고 말았으므로, 이를 원통하게 생각하지 않는 호남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한재(旱災) 때문에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아직 원한을 품은 채 신설(伸雪)되지 않은 자들을 알아내 계문하도록 하였는데, 김시진(金始振)이 덕령을 계문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이 모두 그의 원통함을 극구 이야기하며 신설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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