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축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이조 정랑으로, 이민적(李敏迪)을 헌납으로, 이하(李夏)를 주서로 삼았다.
9월 2일 무인
낮에 무기(霧氣)가 있었다. 밤에 번개가 쳤다.
원자(元子)가 탄생할 때의 약방의 제관(諸官)에게 논상하였다. 도제조 원두표(元斗杓)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하사하고 자제 중 1인을 승서(陞叙)시키도록 하였다. 제조 홍명하(洪命夏), 부제조 박세모(朴世模), 권초관(捲草官) 홍중보(洪重普)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나머지 사람에게도 말[馬]이나 포(布)를 하사하였다.
9월 3일 기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관향미(管餉米) 3만 석(石) 및 해서(海西)의 미곡 5천 석을 운송하여 경비에 보충할 것과, 군기시와 교서관의 공물(貢物)을 줄일 것과, 선공감의 긴요치 않은 공역(工役)을 혁파할 것을 명하였다. 이는 심지원과 유계 등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 경상 감사 민희(閔熙)가 사조(辭朝)할 때에 영남의 기민(飢民)들이 미곡을 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면포(綿布)로 대신 징수해 줄 것을 청했었는데,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수납(輸納)하기를 꺼리는 것은 조령(鳥嶺)을 넘어오는 그 비용이 몇 배나 더 들기 때문이니, 만약 멀리 수송하는 폐단만 없애 준다면 미곡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본색미(本色米)로 각 고을에서 받아들여 보관시킨 뒤 진구하는 데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9월 4일 경진
증광 별시(增廣別試)의 초시(初試) 액수(額數)를 늘렸다. 원래 증광시에서 인재를 뽑는 숫자는 식년시(式年試)와 동일시하여 초시에서는 2백 40인을 뽑고 복시(覆試)에서는 33인을 뽑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증광시(大增廣試)를 보이면 7인을 더 뽑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시에서 뽑는 숫자도 이에 맞추어 54인을 늘려 정한 것이었는데, 의논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을해년에 대증광시를 거행했을 때 관시(館試)에서 늘려 뽑은 숫자가 30인이나 되었고 타소(他所) 역시 이에 맞추어 더 뽑았었는데, 지금 해조에서 정한 것은 너무 적다."
하였다. 이에 관시의 30인의 숫자에 비례하여 1백 40인을 더 늘려 정한 것이다.
간원이 논핵(論劾)하기를,
"전 부사(府使) 정세보(鄭世輔)는 순천(順天)에서 파직되어 돌아올 때 월봉(月俸)을 남겨둔 미곡이라고 핑계대며 공공연히 선박으로 운송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되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욕심을 내며 불법 행동을 한 죄를 중하게 추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정언 이관징(李觀徵)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내승(內乘)을 설치한 목적이 본래 말[馬]을 조련시키게 하기 위한 것인 만큼 어마(御馬)를 길들이지 못한 죄야 어떻게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꼭 의관(衣冠)의 인사로 하여금 바삐 뛰어가 위사(衛士)들이 탄 말의 발굽 사이에 엎드려 있게 하신 것은, 뭇 사람들에게 보여줄 성격의 것이 정말 못되었으므로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그날의 지나친 행동을 반성하시어 후일 그런 일이 없도록 경계하소서. 또 활솜씨를 시험했을 때 직부전시(直赴殿試)를 명받은 자가 너무 많다고들 하니, 알성시(謁聖試)를 보여 인재를 뽑도록 하소서. 그리고 경차관(敬差官)으로 하여금 경시관(京試官)080) 의 일을 아울러 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그 소를 묘당에 내렸는데, 모두 의논드리며 막았다.
9월 5일 신사
상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백관의 조참(朝參)을 받았다. 도승지 김좌명(金佐明)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한 것이야말로 막대한 경사이니 대대적으로 사면령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면한다는 것은 완전히 용서해준다는 뜻인데, 어떻게 등급을 줄이는 규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도년(徒年) 이하를 모두 용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좌명이 또 아뢰기를,
"원자궁(元子宮)에 바치는 물건을 많이 줄이기는 하였습니다만, 지금 원자가 아직 어리니, 그만둘 수 없는 것 외에 공진(供進)에 관계되는 것들은 모두 필수적으로 감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실록을 조사해 내도록 하였으니, 이 뒤에 마땅히 참작해서 판하(判下)하겠다."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인조(仁祖) 을해년에 대증광시(大增廣試)를 거행했는데, 그때의 문서가 난리를 거치는 동안에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지금은 단지 복시(覆試) 때의 문서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복시 때 무과는 35인을 뽑았는데, 이는 대체로 만력(萬曆)081) 경인년082) 의 증광시에서 뽑은 숫자를 모방하여 원수(元數) 28인에 7인을 더 늘려 뽑은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대로 해야 합니까?
부묘(祔廟)·존숭(尊崇)·책례(冊禮) 등 네 차례의 경사를 합하여 별시(別試)를 보이도록 판하(判下)하셨을 때 무과는 널리 뽑도록 이미 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원자가 탄생한 것이야말로 1백여 년 동안이나 국가에 없었던 큰 경사이므로, 뭇 사람들이 모두 바라기를 ‘따로 증광시를 거행하여 사방에 똑같이 경축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물력(物力)이 결딴난 만큼 어쩔 수 없이 대증광시로 합설(合設)한다고는 하더라도, 만약 전례(前例)대로 무과에서 인재를 뽑는다면, 중외(中外)의 무사들이 필시 낙망하며 한탄할 것이니, 상께서 재결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특별히 56인을 뽑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과 회시(武科會試)에서 특별히 56인을 뽑도록 한 것이야말로 참작하고 변통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초시의 원수(元數)가 1백 90인 밖에 되지 않으니, 회시에서 뽑는 56인이라는 숫자에 비례해서 다시 1배수(倍數)를 늘려 3백 80인으로 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도 합니다. 하지만 문과에서 시취(試取)하는 숫자를 보면, 회시에서 뽑는 숫자가 44인인데 초시에서 뽑는 숫자가 3백 84인에 이르고 있으니, 이것과 비교할 때 무과 초시에서 뽑는 숫자도 더 늘려 정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문과 초시의 숫자는 곧 9분의 1에 해당되니, 무과도 이를 참작해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원수 외에 3백 14인을 더 배정하였다.
평림군(平林君) 이원경(李元敬)이 이웃집 사람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중상을 입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집의 이준구(李俊耉) 등이 상서하면서 사실을 숨기고 허위로 한 죄[上書詐不以實]의 조목을 적용하여 도삼년(徒三年)으로 의율(擬律)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원경이 대답하면서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는 점에 기준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이 평소 법률에 관해 잘 익히고 있었으므로 승지 김좌명(金佐明)에게 이르기를,
"법부(法府)에서 의율한 것을 보건대 멋대로 높이고 낮추었으니 정말 놀랍다."
하였는데, 좌명이 아뢰기를,
"본래 주먹다짐한 것으로 원경의 율(律)을 정해야 하는데, 헌부가 다른 율을 잘못 적용했습니다."
하니, 상이 논계(論啓)를 도로 내리도록 명하였다. 준구 등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9월 7일 계미
홍명하(洪命夏)가 상에게 아뢰기를,
"충공 감사(忠公監司) 이만(李曼)은 부모를 개장(改葬)한다고 하면서 큰 마을의 인가를 훼손시켰으니, 조사해 처리케 하소서."
하였는데, 도승지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이만이 철거시킨 것은 단지 집 두 채뿐으로서 그것도 매각한 지역이니 심각하게 따질 일이 못됩니다. 게다가 진휼하는 정사를 바야흐로 펼치고 있는 중이니, 가벼이 체직시킬 수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이만의 행동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하여, 결국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도록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만은 재주와 국량이 있었으며 잘 다스리기로 이름이 났다. 진휼하는 정사를 한창 시행하고 있는 중에 미미한 죄로 체직당하니, 홍명하의 뜻을 곡진히 따르기만 한 묘당의 태도에 대해 식자들이 모두 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09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풍속-예속(禮俗)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만은 재주와 국량이 있었으며 잘 다스리기로 이름이 났다. 진휼하는 정사를 한창 시행하고 있는 중에 미미한 죄로 체직당하니, 홍명하의 뜻을 곡진히 따르기만 한 묘당의 태도에 대해 식자들이 모두 개탄하였다.
9월 9일 을유
김휘(金徽)를 충공 감사로, 유경창(柳慶昌)을 대사간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승지로, 김우석(金禹錫)을 헌납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이조 정랑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지평으로 삼았다. 홍명하(洪命夏)를 숭록 대부에, 홍중보(洪重普)를 정헌 대부에, 박세모(朴世模)를 가선 대부에 가자(加資)하였다. 박세모는 어리석기 짝이 없어 이용만 당한다는 조롱을 받았는데, 집안의 세력 덕택에 여러 차례 현요직(顯要職)을 역임하다가 사적(仕籍)에 통한 지 8년만에 아경(亞卿)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9월 13일 기축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해마다 잇따라 크게 흉년이 드니 백성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를 않는다. 양전(兩殿)께 올리는 물선(物膳)을 줄이기는 했으나 삭선(朔膳)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영남의 물선을 내년 가을까지 우선 정지하도록 하고, 호남과 호서의 삭선도 참작해서 적당히 줄이도록 모두 해조에 명령하여 거행토록 하라."
지평 이지익(李之翼)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근래 조정에 사의(私意)가 횡행하는데 패거리들이 길목을 막고 성상의 이목을 가린 결과 기강이 모조리 없어지고 욕심을 채우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으니, 어찌 신처럼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대각(臺閣)의 자리를 함부로 차지하고 있으면서 기강을 엄숙하게 하는 임무를 완수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동현(李東顯)이 미곡을 배에 실어 뇌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봄과 여름철 사이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하여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자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나름대로 개탄하면서 늘 혼자 혀를 끌끌 차고 있었는데, 마침 외람되게도 간직(諫職)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므로 그 일을 조사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뒤에 입시한 신하들이 구원해 풀어주려고 급급하면서, 심지어는 신의 계사(啓辭) 가운데 ‘오래도록 강가에 두었었다.’고 한 말을 ‘현재 강가에 두고 있다.’는 말로 바꿔 말하고는, 여러 달이나 지난 뒤에 적간을 하고서 그걸로 증거하는 자료로 삼았는데, 어떻게 하늘까지야 속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여겨집니다.
대개 이 일이 일단 발론(發論)되었고 보면 동현을 잡아다가 신문하는 일이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내리신 명을 취소하도록 청하였고, 심지어 헌부가 처치(處置)한 것을 보면 ‘잘못을 합리화시키려고 없는 일을 꾸며댔다.[遂非構虛]’는 등의 말을 하며 기필코 그 일을 덮어두려고 있는 힘을 다해 신을 배척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대각에 몸을 담아 맑은 조정에 욕을 끼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이관징(李觀徵)이 아뢰기를,
"당초 논계한 것이 대체로 풍문에 따른 것이었는데, ‘없는 일을 꾸며대었다.’는 배척이 정외(情外)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다시 그를 대각에 두는 것에 대해 공의(公議)가 이미 허락하였습니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해 혐의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강원 도사(江原都事)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서울에 거주하는 사자(士子)들이 삼향(三鄕)083) 이라고 핑계대면서 연줄을 타고 함부로 응시하는데, 개제(改題)하여 난동이 일어나게 되는 폐단이 대부분 이로 말미암고 있으니, 현재 그 지방에 거주하는 자 외에는 불법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복계(覆啓)하여 다른 도에도 똑같이 행하도록 하였다.
9월 15일 신묘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이지익(李之翼)이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한편으로는 ‘패거리들이 길목을 가로막고 성상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고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입시한 신하들이 그를 구제해 주려고 급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 역시 그때 입시했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초의 곡절에 대해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이 일은 처음에 양영남(梁穎南)이 이일상(李一相)의 글을 위조하여 퇴역한 옛날 선박을 사게 해달라고 이동현(李東顯)에게 요구했던 데에서 비롯됩니다. 동현이 이에 ‘전임관이 이미 팔아넘겼으므로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쓴 뒤, 피봉(皮封)에 이조 참판 앞으로 보낸다고 써서 일상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일상이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이응시(李應蓍)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는 당시 응시가 이 직책을 대신 맡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그 편지를 응시에게 보냈는데, 응시 역시 구매를 요청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튿날 비국에서 개좌(開坐)하여 서로 대화해 보고는 놀라며 당황을 하였습니다. 이에 편지를 전한 사람을 가두고 동현에게 통지하여 문의했더니, 그가 위조된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문사(文詞)나 필적이 제대로 모양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끝 부분에 일상이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었으므로, 비국의 신하들이 모두 눈으로 보고는 통분해하며 놀라워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곡 실은 배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해서 조작되어 여염 사이에 전파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야말로 인심이 척박해진 나머지 일종의 뜬 소문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신들이 이미 이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곡절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지익이 논계한 뒤에 마침 입시하는 기회를 얻어서 대신의 뒤를 따라 감히 위서(僞書)의 시말(始末)을 진달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쌀을 배에 실어 뇌물로 보낸 일이 처음부터 없었고 보면 동현에게 죄를 물을 일이 실제로 없었기 때문에 대신 이하가 같은 말로 진달드렸던 것이고, 성명께서도 빠짐없이 통촉하시어 심지어는 ‘일상에게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필시 그 편지를 응시에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분부하셨습니다.
그 간의 사실이 이와 같을 뿐인데, 지익이 피혐한 말을 보건대 그만 ‘성상의 눈과 귀를 가린다.’고 하면서 장황하게 추악한 말로 배척하였으니, 이는 어찌 된 일입니까. 지익이 대각에 있는 신분으로 일단 풍문을 들은 이상 당초 논계했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허실이 벌써 판명되었고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일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까지 부질없이 상투적인 작태를 벗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일상만을 모함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인사들을 모두 ‘사사로이 패거리를 지어 임금을 기망한다.’고 하는 함정에 밀어넣는 것으로서, 또한 괴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일단 중하게 배척을 받았고 보면 형세상 공무를 집행하기 어려우니, 직명을 삭제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판명된 일을 가지고 이렇게 다시 소란스럽게 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경이 혐의할 일이 뭐가 있는가.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급기야 지익이 또 일상이 호서(湖西)에서 행한 군영 적곡(糴穀)의 일을 아뢰니084) , 명하가 상에게 아뢰기를,
"지익이 이미 쌀을 배에 실어 왔다는 이야기에 대해 뜻대로 되지 않자, 이것을 가지고 다시 일상의 죄안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곧 사부(士夫) 간에 흔히 있는 일인데, 괴이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송시열(宋時烈)도 일찍이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면 시열이 어찌 했겠습니까."
하였다.
회양(淮陽) 지역의 산전(山田)을 용동궁(龍洞宮)에 주도록 명하니, 이조가 복계(覆啓)하여 본도(本道)로 하여금 민전(民田)인지의 여부를 조사하게 한 뒤 처치하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뒤에 대간이 궁가(宮家)의 절수전(折受田)을 혁파할 것을 청하면서 한 달이 넘도록 논집(論執)하자, 상이 이에 복계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홍중보(洪重普)를 좌참찬으로, 이혜(李嵆)를 봉교로 삼았다.
9월 17일 계사
지평 이지익(李之翼)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이일상(李一相)의 미곡 실은 배 사건에 대해 사사로이 그를 모함해 해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마침 언지(言地)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듣고 있는 이야기를 성상께 진달드리면서 이동현(李東顯)을 조사하도록 청했던 것인데, 이는 단지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이 노여워하는 마음을 품고 좌우로 길목을 막고는 제멋대로 저격(狙擊)하면서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식이 되어버리고 만다면 장리(贓吏)를 무슨 방법으로 징계시킬 것이며 나라의 기강을 어떻게 엄숙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다시 언관의 책임을 맡게 되었기에 안타깝고 울적한 정세(情勢)를 대략 진달드렸던 것인데, 표현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망령된 발언을 하여 여러 신하들이 상소하도록 야기(惹起)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신이 만약 형세에 눌려 겁을 먹고 마음 속의 생각을 다 토로하지 않는다면, 신이 전하를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니 모두 진달드릴까 합니다.
당초 뱃사람 변응립(邊應立)이 패선(敗船)의 매각을 허락하는 간찰(簡札)을 신에게 얻으려고 하였습니다만, 신이 이동현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재급(裁給)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뒤에 변응립이 복자(卜者) 하효달(河孝達)을 통해 이일상의 수서(手書)를 얻어가지고 와서 아랫것들에게 과시하고는 이어 수영(水營)에 갔는데, 그때는 이미 퇴선(退船)이 팔린 뒤였습니다. 그러자 동현이 저간의 곡절을 일상에게 편지로 통지하면서 미곡 50석(石)과 군목(軍木) 3 동(同)을 배로 운반해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리(下吏) 중에 동현을 개인적으로 원망하는 자가 있어 일부러 말썽나게 계책을 꾸며 엉뚱하게 이응시(李應蓍)에게 전해주고 말았습니다. 이응시가 편지를 뜯어보고는 글의 내용을 괴이하게 여긴 나머지 각처에 보내는 물목(物目)을 탐색해 본 결과, ‘이조 참판’이라 하고 관동(館洞)으로 기재되어 있기에 그 편지를 도로 내주면서 일상에게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일상이 편지를 봉한 부분이 채 마르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색리(色吏)를 힐문하였는데, 그 대답을 듣고서 깜짝 놀라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우리 집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색리가 다시 응시의 집에 갔더니 응시가 꾸짖으며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상의 이야기는 응시의 집에서 나온 것으로서 일시에 전파된 것들입니다.
일상이 이에 빈청(賓廳)에서 개좌(開坐)할 때에 응시와 함께 글을 만들어 동현에게 문의하게 되었던 것인데, 일상은 따로 은밀히 노복을 수영(水營)에 보내어 자기가 보낸 수간(手簡)을 찾아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현은 단지 답서(答書)만 재송(裁送)했을 뿐, 돌려 받으려고 한 본래의 간찰은 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상이 소매 속에서 꺼내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보여주며 위조되었다고 말한 그 편지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음험하고 교묘하게 조작하여 뒷날 발뺌할 계책을 삼으려 했다는 것을 이에서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제신(諸臣)이 입시할 때에 이르러서는 ‘미곡을 실은 배가 강변에 현재 있다[方置]고 하니, 관원을 보내 적간(摘奸)하게 하자.’고 하였는데, 해조가 올린 계사(啓辭) 중에는 또 ‘수영(水營)의 배는 올해 한번도 와서 정박한 적이 없다고 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영에서 공사(公私)간에 선박이 왕래한 것이 원래 한두 번이 아니었고, 동현의 일가되는 사람이 수영에서 죽었을 때에도 이곳으로 오는 선박에 상구(喪柩)를 싣고 서강(西江)에 와서 풀어놓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하였는데, 그때 미포(米布)도 함께 이 배에 싣고 왔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원래 온 일이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야말로 어찌 너무나도 상을 기망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색리(色吏)를 거짓으로 추치(推治)하는 척하다가 곧바로 풀어주었는데, 색리가 그 길로 도망쳐 달아났기 때문에 여러 곳에 보내는 물건들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이 그 사람을 눈으로 보고 그의 말을 들었는데, 소위 양영남(梁穎南)이란 자는 예전부터 일상의 집에서 심부름하면서 외방을 왕래하며 이익을 도모했던 자입니다. 당초 추문했을 때 하효달로 하여금 이미 죽은 박세문(朴世文)에게 떠넘기도록 하였다가 사람들로부터 이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또 가장 믿을 수 있는 양영남을 끌어들인 뒤 그가 자복했다고 핑계를 대었는데, 이 과정에서 비밀스럽게 숨기려 했던 종적을 아무리 은폐시키려 한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만약 이동현과 간찰을 전한 색리를 잡아들여 신문하고, 또 변응립 및 이 사건에서 언급된 여러 사람들을 신문한다면, 뇌물을 보냈는지의 여부와 그 편지가 위조되었는지의 여부가 판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여러 신하들이 한갓 말로만 맹랑한 일이라고 떠들어대면서 거꾸로 신에게 모욕을 가하고 있으니, 신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상이 탐욕을 부린 비루한 정상을 보면 이 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호서(湖西)에서 방백에게 간청하여 군영의 미곡을 아산현(牙山縣)에서 받아내 배를 이용해 집으로 운반한 뒤, 그 적곡(糴穀)을 전의현(全義縣)에 이록(移錄)시켜 황조(荒租)085) 로 대납(代納)하고는 민간에 나누어주게 하여 미곡으로 바꿔서 징수하게 하였는데, 이 이야기 역시 진신 사이에 전파되어 모두들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멋대로 장소(章疏)에까지 드러내면서 일상이 원래 허물이 없는 자처럼 만들었으니, 일상의 세력이 이토록까지 엄청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망령되이 상소하여 한 마디 말을 한 탓으로 저 탐욕스러운 장리(贓吏)들로 하여금 더욱 기탄없이 굴게 한 결과 기강이 날로 시들해지게 하고 나라의 형세가 갈수록 고단하게끔 만들었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결코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윤개(尹塏)가 처치하기를,
"미곡을 실은 선박에 대한 이야기가 전에 이미 발론(發論)되었는데 그때 샅샅이 조사한 결과 끝내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뒤에 와서 또 전론(前論)을 제기하면서 허다하게 조목을 나열하고 하나의 별안(別案)을 작성하였는데 그 말들이 모두 예전엔 듣지 못했던 신기한 것들이었습니다. 허실(虛實)을 따질 것 없이 끝까지 밝혀낼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으니,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9월 18일 갑오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지난번에, 가령 신이 사국(史局)에 몸을 담고 있지만 않았었다면, 이일상의 일을 어찌 감히 진달드렸겠습니까. 실록의 임무가 중대한 때에 일상이 이를 주관하는 관원으로 배척을 받고 물러가 엎드려 있어 날짜만 자꾸 지연되고 있었는데, 진위 여부가 어떻든 간에 신이 이 사건의 결말이 속히 지어졌으면 하고 기대했던 것은 실로 사국의 일을 염려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이 혼미하고 건망증이 심해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상께서 특별히 적간(摘奸)하도록 하시자, 해조의 낭관이 즉시 강변으로 나가 강의 상류 하류와 이쪽 저쪽의 강기슭을 다니며 집집마다 두루 물어보았는데, 모두들 못보았다고 하면서 그때 배가 오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수영에 속한 배는 얼음이 풀린 뒤에나 올라온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지익이 선박 이야기를 꺼냈는데 선박이 온 사실이 없었고 보면 ‘오래도록 정박해 있었다.[久在]’느니 ‘현재 정박해 있다.[方在]’느니 하는 것은 다시 따질 성격의 것이 못됩니다.
또 편지 문제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중간에 위조된 편지라는 것에 대해서는 애당초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저 동현이 ‘뜻에 부응할 수 없다.’고 보낸 답서와 위조되었다는 편지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이 공적인 장소에서 함께 보고 전하에게 이미 진달드렸고 보면 이것이 명백한 증거가 되는 셈인데, 지익이 그만 구자(久字)와 방자(方字)의 의미가 틀리다는 이유를 들어 기필코 쟁집할 발판으로 삼고 있으니, 너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지익의 처지가 애처롭게 여겨지기만 합니다. 신이야말로 당초에 입시했던 자이니, 구원해주려고 했다는 비난을 어찌 감히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이조 참판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지난해에 정원에 있으면서 마침 입진(入診)하는 날을 당하였는데, 그때 영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사국(史局)의 당상 이일상과 이응시의 이름이 모두 대계(臺啓)에 올라 있기 때문에 감히 행공(行公)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일이 근거가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동현(李東顯)을 잡아들여 일이 판명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사국의 일이 계속 지체될 것이니,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여 처리하소서.’ 하였고, 신도 말석에 입시하여 그 일의 전말을 차례로 거론하면서 진달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성상께서 분부하셨는데 그 중에 ‘일상에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숨기느라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니 필시 그 서찰을 타인에게 돌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위조한 일이 있다면 판명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뒤 해조가 명을 받들고 적간하면서 정박한 선박의 전말을 샅샅이 캐물었는데, 봄 여름 이후로는 수영(水營)의 선박을 보지 못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배가 왔다는 것이 이미 맹랑한 이야기로 귀착되었고 보면 동현을 신문할 꼬투리가 없다.’고 하며 마침내 그를 잡아다가 신문하도록 한 명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때의 곡절은 이러한 데 불과할 뿐입니다. 대체로 보건대 편지를 위조했다는 일은 진신들 사이에 오래도록 퍼져 있었던 이야기입니다만, 쌀을 배에 싣고 왔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당초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홀연히 일단의 근거없는 이야기가 중간에서 튀어나오게 되면서부터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나 전파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익이 이미 어떤 이야기를 들은 이상 이를 논계해서 탄핵하는 것은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가 이미 해명하여 일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귀결된 상태에 이르렀고 보면, 풍문이 잘못된 것으로 돌린다 해서 손상될 일이 뭐가 있기에 기필코 없는 것을 있다고 지목하며 허구를 사실화하여 그 마음을 쾌하게 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한단 말입니까. 따라서 헌부가 ‘허물을 수식하고 잘못을 합리화시키려 한다.’고 그를 배척한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인피한 사연을 보건대, 갈수록 심각하게 사태를 끌고가면서 심지어는 ‘패거리들이 길목을 막고 성상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등의 말로 있는 힘을 다해 여러 신하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는 흡사 권간(權奸)이 권세를 휘두르자 온 조정이 바람에 풀이 쓸리듯 따라만 가는데 자기만 홀로 올곧고 강개하여 남이 하기 어려워하는 말을 감히 말하는 것인양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그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줄은 도통 모르고 있습니다. 길인(吉人) 정사(正士)라면 단연코 이런 식으로 마음을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령 일상에게 실제로 뇌물받은 흔적이 뚜렷이 드러났다면, 대신 이하가 어찌 모두 형편없이 행동하며 감히 은폐하여 그를 비호해 줄 계책을 꾸미며, 아랫사람에게 부화뇌동하여 윗사람을 기망하는 죄에 스스로 빠지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이미 추악한 비난을 받아 감히 조정에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되었으니 신을 삭직(削職)시켜 주소서."
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이지익(李之翼)이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그 의도가 일상을 중하게 모함하려는 데 있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신하들까지 임금을 기망한 죄에 억지로 몰아 넣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초 입시했던 날 신도 여러 신하의 뒤를 따라 같이 참여했으니, 구제해 주려고 은폐하며 속였다는 죄를 신만 홀로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심과 세도(世道)에 대해 개탄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게 들기에 감히 대략적이나마 의견을 진달할까 합니다.
국가가 대각에 풍문으로 논계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야말로 사체(事體)상으로 볼 때 너무도 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대각에 몸담은 자로서는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것도 본래 안 될 일이지만 흐리멍덩하게 사람을 논하는 것도 본디 아름다운 일이 못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원통한 정상이 모두 밝혀지고 조정의 논의가 이미 결정된 뒤에까지 계속 끊임없이 물어뜯고 있으니, 이는 진정 악감정을 품은 것이 아니면 필시 고집스럽게 우겨대는 것이라고나 할 것입니다. 조정에서 풍문에 의거해 논계해도 좋다고 위임한 본의가 어찌 진정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었겠습니까.
지익이 재차 피혐했을 때 대관(臺官)이 ‘허물을 수식하고 잘못을 합리화시킨다.’는 이유로 그의 체직을 청했었는데, 이번에는 간원이 처치하면서 거꾸로 전일의 대의(臺議)를 배척하면서 나와서는 안 될 사람의 출사를 청함으로써 다시 시끄럽게 만들 단서를 야기시켰으니, 조가(朝家)의 시비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성명께서는 지익의 출사를 청하는 계사(啓辭)를 이미 윤허해 놓으시고는, 다시 논박을 받은 자들에게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게 하셨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감히 모르겠는데, 이와 동시에 정성을 다해서 아랫사람을 부려야 하는 도리로 볼 때에도 미진한 점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신은 전에도 함께 참여하여 진달드렸으니 지금 와서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본직과 겸대직을 체차시켜 주소서."
하였다. 상이 모두에게 답하기를,
"경들은 혐의할 것이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용천(龍川) 백성 귀인(貴仁) 등 3인이 몰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 삼(蔘)을 캐다가 청(淸)나라 사람에게 붙잡혀 의주(義州)로 압송되었다. 예부(禮部)가 이자(移咨)하여 우리 나라로 하여금 처결(處決)하게 하니, 3인을 국경에서 효시(梟示)하고, 본부 부사 박시한(朴始漢)과 미곶 첨사(彌串僉使) 백광조(白光祖) 등을 각각 차등있게 혁직(革職)하고 도배(徒配)에 처했다.
9월 20일 병신
윤심(尹深)을 대교로 삼았다.
지평 이지익(李之翼)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망령되어 위태로운 덫을 건드리자 뭇 사람들이 혐의를 주워모으며 들고 일어났습니다. 정석(政席)에서 주의(注擬)하면 전관(銓官)이 저지하고,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면 유신(儒臣)이 비난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조정에 얼굴을 들겠습니까. 신의 사정이 안타깝고 절박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협통(脇痛)이 심해져 소명(召命)에 응하지도 못했으니, 신이 임무를 피하고 태만하게 행동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정언 정창도(丁昌燾)가 처치하기를,
"배척받은 여러 소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고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패(牌)로 불렀는데도 나오지 않았으니, 이는 관례상 체직시켜야 합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9월 21일 정유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태제(鄭泰齊)가 재임 중일 때, 서울의 상인(商人)과 서로 약속하여 공무목(公貿木)을 대납(代納)케 한 뒤 그 값을 미곡으로 환산하여 본 고을에서 과다하게 징수했던 일이 발각되자, 상이 노하여 나추(拿推)하도록 명하였다.
9월 23일 기해
지중추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지난번 얼핏 풍문에 듣건대, 영상과 좌상이 동시에 인혐하고 들어갔다 하였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그 일을 듣건대 실로 신 때문이었다고 하기에 신의 가슴이 벌벌 떨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이윽고 다시 들으니 영상이 결국 직위를 버리기까지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신의 죄로서 머리털을 다 뽑아 세더라도 충분치 못할 것이니, 신에게 형벌을 가하여 나라 사람들의 말에 사과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날에 벌어졌던 일이 지금은 이미 안정되었고, 대신이 사직한 것 역시 심각한 뜻이 아니었다. 더구나 대신이 벌써 출사(出仕)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금의 형세로 보건대 경은 혐의할 일이 없을 듯하다. 그러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그리고 겨울이 되기 전에 마음을 바꿔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사직소를 올릴 때 시열을 거론하며 대신과 대각이 이 문제로 서로 배척한다는 말을 하였는데, 시열이 이 말을 혐의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대사헌 송준길도 상소하여 인혐하며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경이 이토록까지 사직하니, 본직(本職)은 경의 뜻에 부합되도록 노력하겠다. 경은 안심하라."
9월 24일 경자
상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제사를 마친 뒤에 명륜당(明倫堂)으로 나아가 명관(命官)086) 이경석(李景奭)으로 하여금 출제(出題)하여 선비를 시험하게 하고 승지 1인을 남겨두어 제술(製述)을 감독케 하였다. 집춘문(集春門)을 거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기추(騎蒭)087) 를 시험하였다. 이때 돌곶이[石串]에서 미처 활솜씨를 시험받지 못했던 자들 및 활쏘기 시험에 응시한 마병(馬兵) 제색군(諸色軍)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활쏘기를 다 끝내기도 전에 날이 이미 저물었다. 이에 이튿날 조참(朝參)을 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상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참을 행하고 활쏘기 시험을 완료한 뒤에 환궁하려고 하였는데, 대신 등이 아뢰기를,
"금군(禁軍)을 시험하기 위해서 어가(御駕)를 오랫동안 버려둔 장소에 머물게 하는 것은 사체(事體)로 볼 때 온당치 못하니, 이때 경덕궁에 계시며 지냈고 창경궁은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참은 정지하고 내일 다시 이곳에 임어(臨御)하시어 활쏘기를 끝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9월 26일 임인
상이 다시 춘당대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였는데, 양(兩) 대장(大將) 이하 여러 무사들도 모두 입시하게 하였다. 이때 내금위 장(內禁衛將) 김한문(金漢文)이 탄 말이 피로에 지쳐 둔하였으므로, 상이 소홀히 다루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여 승지에게 결곤(決棍)088) 하게 하였다. 기추(騎蒭)에서 다섯 발을 명중시킨 이상립(李尙立), 네 발을 명중시킨 김준익(金俊釴), 두 발 명중시킨 어영 대장(御營大將) 유혁연(柳赫然)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해주고, 네 발 명중시킨 내금위 기송일(奇松一) 등 3인은 직부전시(直赴殿試)토록 하고, 세 발 명중시킨 서경일(徐敬一) 등 14인은 직부회시(直赴會試)토록 하고, 두 발 이하를 명중시킨 자에게는 각각 차등있게 면포(綿布)를 상으로 내렸다. 가자는 그날 바로 정사(政事)089) 를 행하여 비답이 내려졌는데, 유혁연은 가의(嘉義)로 이상립은 가선(嘉善)으로 김준익은 절충(折衝)으로 각각 가자되었다. 상이 처음에 유혁연을 자헌(資憲)에 초수(超授)하도록 명하였는데, 대신이 모두들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아뢰기를,
"그럴 경우 다섯 발을 명중시킨 이상립에게는 무슨 상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이에 한 등급만 올려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도 대열에 들어가 쏘았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는데, 상이 그래도 말은 잘 달린다고 하여 숙마(熟馬)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이완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자 이에 받았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이상(李翔)을 지평으로 삼았다. 이상은 이숙(李䎘)의 형이다. 문자(文字)를 알지 못했으나 송시열 등에게 아첨하여 빌붙어 시의(時議)가 중하게 여겼으므로 이 직책을 얻은 것이다.
9월 28일 갑진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유성(流星)이 하성(河星) 아래에서 나왔다.
송준길(宋浚吉)·홍중보(洪重普)를 좌·우 참찬으로, 유명윤(兪命胤)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30일 병오
우박이 내렸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신들이 이일상(李一相)의 일에 대해 역시 진달드린 바가 있으니, 이지익(李之翼)이 이른바 ‘패거리를 지어 길목을 가로 막았다.’는 혐의를 신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샅샅이 물어보아도 끝내 그런 사실이 없었고 보면 이동현(李東顯)에게 다시 물어볼 일이 없겠기에 잡아들이라는 명을 중지하도록 청했던 것인데, 지익이 지금 와서 또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인피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엄격하고 분명하게 다시 조사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일상의 범죄 사실이 만약 드러난다면 명백히 죄를 가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익도 어떻게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동현·변응립(邊應立)·양영남(梁穎南) 등을 잡아들여 신문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지익이 호서(湖西) 감영의 적곡(糴穀)에 대한 일로 일상의 죄목을 삼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사부(士夫)간에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감영의 곡식은 곧 감사가 알아서 쓰는 것으로서 유랑하다가 들어와 사는 사부를 구제해주기 위해 쓸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고을을 옮겨 바꿔서 쓴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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