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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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정미

상이 하교하였다.
"백사(百司)를 규찰해 단속하는 것은 헌부의 책임인데, 한 달 동안에 세 번밖에 개좌(開坐)하지 않았으니, 전혀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의 헌부의 관원들을 모두 중하게 추고하여 장래의 경계로 삼게 하라."

 

알성(謁聖)할 때 보인 제술 시험에서 우등한 감역(監役) 심백(沈柏)과 생원 윤빈(尹彬)·윤계(尹堦)·김석주(金錫胄) 등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를 명하고, 차등(次等)한 한덕후(韓德厚)·조사석(趙師錫)·이면(李沔)·이정(李炡)·김귀만(金龜萬) 등에게 직부회시(直赴會試)를 명하였다. 상이 비록 대신의 의논을 따라 사람을 뽑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상당히 섭섭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를 시험할 때에 상이 대신에게 하문하기를,
"무사 중에 직부(直赴)를 명받은 자가 또한 많다. 내가 그대로 방방(放榜)090)  하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당초에 사람을 뽑지 않기로 정했기 때문에 먼 외방의 거자(擧子)들이 대부분 응시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이런 일이 있게 된다면, 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친림(親臨)해서 선비를 시험하는 것은 보통 때의 과제(課製)와는 다르다고 하여 특별히 4 인에게 직부전시를 내렸던 것인데, 물론이 떠들썩하게 일어나며 약속과 위배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뒤에 심지원(沈之源)이 계달한 데에 따라 결국 3인의 직부(直赴)가 취소되면서 수석을 차지한 심백(沈栢)만이 급제하게 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심백은 전 승지 심광수(沈光洙)의 아들이다. 문사(文詞)의 능력이 모자랐다. 그런데 영남(嶺南)의 사인(士人) 정려(鄭欐)라는 자가 문장을 잘하면서도 환경이 불우하게 되어 오랫동안 심백의 집에 기숙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심백이 장원을 하게 되자 사람들이 꽤나 의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11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역사-편사(編史)


[註 090] 방방(放榜) : 합격자 발표.
사신은 논한다. 심백은 전 승지 심광수(沈光洙)의 아들이다. 문사(文詞)의 능력이 모자랐다. 그런데 영남(嶺南)의 사인(士人) 정려(鄭欐)라는 자가 문장을 잘하면서도 환경이 불우하게 되어 오랫동안 심백의 집에 기숙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심백이 장원을 하게 되자 사람들이 꽤나 의심하였다.

 

10월 4일 경술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정언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이유상(李有相)·원만리(元萬里)를 지평으로 삼았다.

 

탁지(度支)091)  가 경비가 고갈되었다는 이유로 백관의 녹봉을 감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오래도록 어려워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콩으로 지급하던 것을 전미(田米)092)  로 대치하도록 하고 이듬해 봄부터는 5품 이상을 대상으로 1 석(石)씩 녹봉에서 감하도록 명하였다.

 

호서(湖西) 경차관(敬差官) 김우석(金禹錫)이 상소하여 본도 연해에 흉년이 든 상황을 진달하면서 한전(旱田)에 급재(給災)해 줄 것과 이전(移轉)된 미곡을 이듬해로 물려 징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이 방계(防啓)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7일 계축

함경도의 미곡 1만 석과 강원도의 미곡 1천 석 그리고 조곡(租轂) 3천 석을 옮겨 보내 영남의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하였다.

 

10월 11일 정사

이준구(李俊耉)를 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응교로,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정재해(鄭載海)를 검열로 삼았다.

 

10월 14일 경신

조복양(趙復陽)과 유계(兪棨) 등이 관작(官爵)을 팔아 곡식을 모집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국가의 비축량이 떨어져 갔기 때문이었다.

 

10월 15일 신유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서 경범 죄수들을 풀어주도록 하였다.

 

10월 16일 임술

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삼고, 의관(醫官) 양제신(梁濟臣)을 특별히 제수하여 사복시 주부로 삼았다.

 

10월 20일 병인

조형(趙珩)을 예조 판서로,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이행진(李行進)을 예조 참판으로, 최치옹(崔致翁)을 검열로 삼았다.

 

선왕의 후궁(後宮) 이씨(李氏)의 작위를 특별히 올려 숙의(淑儀)로 하였다. 이씨는 곧 숙녕 옹주(淑寧翁主)의 어미이다.

 

정언 유명윤(兪命胤) 등이 장령 윤개는 용렬하여 직책에 합당치 않다고 논핵하며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밤에 달이 헌원성좌(軒轅星座)의 좌측 각성(角星)을 범하였다.

 

10월 24일 경오

순천 부사(順天府使) 정세보(鄭世輔)가 고을을 다스리면서 한껏 탐욕을 부리다가 급기야 체직되어 돌아갈 때에 배에 물품을 낭자하게 적재하였다. 순천 영장(營將) 정창한(鄭昌翰)이 평소부터 세보와 틈이 벌어졌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낱낱이 감사 이태연(李泰淵)에게 보고하니, 태연이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명기(李命耆)로 하여금 이 일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명기가 명백하게 조사하려 하지 않았고 태연 역시 이에 따라 흐리멍덩하게 치계한 결과, 세보가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서도 고신(告身)만 빼앗기는 것으로 끝났으므로 듣는 이들이 놀라워하였다.

 

10월 25일 신미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등이 아뢰기를,
"새로 태어난 공주의 집에서 바야흐로 용인(龍仁) 지역에 전장(田庄)을 설치하며 사람들과 송사를 벌였는데, 현령 박만영(朴萬榮)이 궁차(宮差)의 공갈에 겁을 먹은 나머지 심지어는 ‘도서(圖署)093)  가 이렇게 찍혔으니 본현에서 금지하기가 어려울 듯하다.’는 것으로 제사(題辭)094)  를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영이 법대로 집행하지 못한 것도 정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만, 공주가 강보에 쌓여 있는 지금 벌써부터 도서를 보내 백성들과 전토(田土)를 다투다니 더욱 듣기에 놀랍습니다. 박만영은 파직하고 공주가(公主家)의 도장(道掌)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중하게 죄를 매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경기 감사 정지화(鄭知和)가,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의 행차를 만영이 나와서 대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에게 파직시키기를 막 아뢰었는데, 간원이 또 이 일을 이유로 이미 체직된 후에 논핵하여 재차 만영을 파직시킨 것이다.

 

밤 1경(更)에 객성(客星)이 이동해 여수(女宿)와 5도(度) 되는 위치에 있었는데 북극성에서 떨어진 도수는 1백 2도(度)였다.

 

10월 29일 을해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원정(李元禎)이 치계하기를,
"왜차(倭差)가 나왔으니, 접위관(接慰官)을 내려보내소서."
하니, 조정이 병조 좌랑 윤석(尹晳)을 차임해 보내었다.

 

밤 1경에 객성이 이동하여 허수(虛宿)와 1도(度) 되는 위치에 있었는데 북극성에서 떨어진 도수는 97도였으며 색깔이 어제에 비해 조금 희미하였다.

 

10월 30일 병자

상이 삼남(三南) 지방의 재해 상황이 너무도 참혹하다는 이유로 조세(租稅)를 감해주려 하면서도 괜찮은 지역까지 혜택을 받게 될까 염려한 나머지 특별히 경차관(敬差官)을 세 도에 보내 재상(災傷)의 경중을 구별해서 차등있게 면세해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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