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9.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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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정축

박세모(朴世模)를 도승지로, 조윤석(趙胤錫)을 좌부승지로, 남로성(南老星)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지신(知申)095)  의 직임이야말로 지위나 명망으로 볼 때 매우 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반드시 성망(聲望)이 있는 자를 가려 제수했었다. 그런데 박세모가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으로서 이 직임에 뛰어올라 제수되었으므로 물정이 모두 놀라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1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095] 지신(知申) : 도승지의 별칭.
사신은 논한다. 지신(知申)095)  의 직임이야말로 지위나 명망으로 볼 때 매우 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반드시 성망(聲望)이 있는 자를 가려 제수했었다. 그런데 박세모가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으로서 이 직임에 뛰어올라 제수되었으므로 물정이 모두 놀라워 하였다.

 

11월 3일 기묘

예조 판서 조형(趙珩)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일찍이 추조(秋曹)096)  에 몸담고 있을 때에, 이조의 서리(書吏) 이갑남(李甲男)의 죄를 신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이 70이라고 공초(供招)했고, 신이 보기에도 그가 백발에 노쇠한 정상이 역력하였으므로 연만(年滿)하다는 것으로 의율(擬律)해 아뢰는 한편 이문(移文)097)  해서 뒤에 참고할 여지를 만들어놓으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된 뒤 곧바로 헌부에 몸을 담게 되었는데, 마침 개좌(開坐)하던 날 지평 이숙(李䎘)이 풍문에 따라 몇 건의 죄목을 가지고 갑남을 잡아들이면서 말하기를 ‘이 자는 지난번 형조에서 나이를 속이고 죄를 면한 자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깜짝 놀라 여러 해의 장적(帳籍)098)  을 이문하여 베껴 오도록 해 확인한 결과 68세로 되어 있기도 하고 70세로 되기도 하고 73세로 되기도 하였으므로 비로소 그가 함부로 기록한 사실을 깨닫고는 이 죄목을 첨가하여 각별히 엄형(嚴刑)에 처했었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지난번 이 일을 탑전(榻前)에서 불쑥 꺼내 진달하였는데, 몇 개월 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신이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전후로 이문(移文)했었다.’고 잘못 앙달(仰達)하고 말았습니다. 그뒤 물러나와 형조 참의 권대운(權大運)에게 물어보니 그 당시에 이문하여 베껴 오도록 한 일은 끝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죄가 이렇게 해서 더욱 드러나 결과적으로 기만한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그 즉시로 장소를 올려 잘못한 죄를 진달드렸어야 마땅한데, 실록을 봉안하는 행차가 단지 하룻밤 만을 남겨둔 상태였으므로 미처 소장을 진달하여 대죄(待罪)하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제야 부월을 무릅쓰고 전후의 죄상을 드러내게 되었으니, 파면을 시켜주심과 동시에 유사에게 명하여 율(律)을 상고해 논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형조에 내렸다. 형조가 의금부에 이송하여 처치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형조 참의 권대운(權大運)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지난 가을 본조에서 개좌(開坐)했을 때 이갑남이 나이 72세로 납초(納招)했기에, 신이 말하기를 ‘관례대로 이문(移文)해서 호적 대장을 상고한 뒤 처치하도록 하자.’고 하였더니, 장관이 말하기를 ‘갑남이 연로하다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여러 증거를 토대로 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신 역시 그의 노쇠한 상태를 보았기 때문에 끝내 뜻을 고집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그리고 소위 도봉(都封)099)  한 관교(官敎)100)  를 세건(世建)으로 하여금 분납(分納)케 했다고 한 것은 곧 갑남이 원정(原情)101)  하면서 스스로 변명한 말이고 원래 석상(席上)에서 나온 말이 아니니, 그의 죄가 못될 듯합니다. 또 ‘나이가 70이나 되니 형벌을 가할 수 없다.’고 한 것도 신의 말이 아니며, ‘율을 적용해 아뢰는 한편 이문하여 장적(帳籍)을 조사했다.’고 하는 것도 더욱 사실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 증거를 토대로 죄를 정해서 입계(入啓)했다고 한다면, 추후로 장적을 조사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 제대로 기억을 못한 나머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도 동참했던 만큼 이치상 홀로 면할 수는 없으니, 신을 삭직(削職)하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그대의 실수 때문이 아닌데 혐의할 것이 뭐가 있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11월 5일 신사

지중추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이일상(李一相)을 배척한 대계(臺啓)의 내용을 들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감영의 곡식을 요리했다고 하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신 역시 그와 비슷한 일을 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이 미처 스스로 사실을 자백드리기도 전에 연신(筵臣)이 신의 이름을 들어 아뢰었다는 말이 이어 들려 왔습니다. 신의 죄가 이에 커지게 되었으니, 직명을 깎으시고 이어 유사에게 명하여 일상과 똑같이 조사하여 처단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감영의 곡식에 관한 이야기를 탑전에서 진달한 신하의 의도는 추악하게 헐뜯으려는 것이 아니라 실로 부득이 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 가난한 사부(士夫)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의리를 해치지 않는 곡식이 있는데도 그 곡식을 내다 먹지도 못하고 그냥 죽어야 한단 말인가. 혐의로 삼을 일이 아님이 분명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6일 임오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일찍이 듣건대, 송시열이 지푸라기 하나도 사람에게서 취하지 않지만 집이 가난해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감영의 곡식을 대여받은 적도 간혹 있었는데 적곡(糴穀)을 상환할 적에 이쪽에서 받았던 것을 저쪽으로 납부하기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의 생각에 ‘이일상(李一相)이 환곡(換穀)할 때, 미곡으로 1곡 받았던 것을 정조(正租)102)  로 2곡을 상환하였다 하는데, 미곡을 정조로 바꿔 바친 것은 차이가 있지만, 이쪽에서 받았다가 저쪽으로 납부한 것은 시열의 경우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고 여겨졌으므로 이를 증거로 삼았던 것이었습니다. 어찌 여기에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시열이 이렇게 소장을 진달했으니 신은 지극히 두려워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일이 실로 시열을 손상시키는 점은 하나도 없겠기에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진달드렸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유현(儒賢)이 인혐하도록까지 하였으므로, 정말 황공한 마음으로 당초 신이 진달드리게 되었던 본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신의 망언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어찌 경이 의도를 갖고 말한 것이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서 속히 나와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11월 7일 계미

부응교 이민적(李敏迪)이 상차하여 경연을 여는 날이 너무 드물다고 극구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공사(公私) 간의 어염(魚塩)을 모두 혁파하고 대농(大農)에 귀속시켜 군국(軍國)의 비용을 보충토록 하는 것이야말로 선왕의 뜻이었습니다. 지금 조사 장부가 막 올라와서 유사가 바야흐로 폐치(廢置)를 의논하고 있는데, 만약 내수사에 소속된 것들은 안에서 쓴다는 이유로 그냥 놔두고 제궁가(諸宮家)에 속하는 것은 친애(親愛)하는 나머지 그냥 놔두고 각 아문에 소속된 것들은 군용(軍用)이라는 이유로 그냥 놔두고 공신가(功臣家)에 속하는 것은 구은(舊恩)을 이유로 그냥 놔둔다면, 혁파할 것들이 얼마 없게 될 것은 물론 사(私)를 막고 공(公)으로 강력히 전환시키려 했던 선왕의 아름다운 뜻마저 끝내는 오늘날에 와서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조사한 문서에 따라 모두 대농에 귀속시켜 백년 동안의 고질적인 폐단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구차하고 인색한 논의에 동요되지 마소서. 이 역시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하나의 일이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감탄하였다. 경연을 열려고 하지만 늘 안질 때문에 번번이 오래 정지하게 돼 마음 속이 항상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끝 부분에 말한 일은 회계(回啓)를 보아가며 참작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에 앞서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언젠가 입시한 기회에 궁가(宮家)·훈가(勳家)·각 아문의 어염을 혁파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발언했기 때문에, 민적 등이 구차하고 인색한 논의에 동요되지 말라고 말하게 된 것이었다.

 

11월 9일 을유

이후산(李後山)을 승지로, 김남중(金南重)을 예조 판서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헌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대사간으로, 여증제(呂曾齊)를 장령으로, 정양(鄭瀁)을 지평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우윤으로, 윤심(尹深)을 봉교로 삼았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권상구(權尙矩)와 수원 부사(水原府使) 강유(姜瑜)가 대상(大倘)을 붙잡았다고 하여 모두 가자(加資)되었다.

 

11월 10일 병술

금부가 장리(贓吏) 심총(沈棇)을 석방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처음에 심총이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으면서 불법으로 재물을 탐한 사실이 여기 저기서 드러나자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조사하여 치계하였다. 이에 심총이 몇 년 동안 갇혀 있다가 변읍(邊邑)에 유배되었는데 그뒤에는 중도(中道)로 양이(量移)되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원자(元子)가 탄생한 경사를 맞이하여 비로소 석방되어 돌아오니, 물정이 불쾌하게 여겼다.

 

11월 14일 경인

충공 감사(忠公監司) 김휘(金徽)가,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의 행차를 친히 맞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주 목사(公州牧使) 홍우원(洪宇遠)의 파직을 계청하면서, 우원의 사장(辭狀) 가운데 이른바 ‘접대하는 체모를 잃어 원만리(元萬里)로부터 크게 능멸을 당했다.’는 내용까지 동시에 거론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정으로 하여금 우원이 사직한 것이 만리가 화를 낸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평 원만리가 이 때문에 인피하면서 말을 매우 장황하게 하였는데, 심지어는 아뢰기를,
"우원은 자존심이 대단한 명사(名士)로서 이렇듯 웃어른이 벌컥 성내는 상황을 당했으니, 그 마음이 평안치 못하고 그 말이 정확하지 못하게 된 것이야말로 형세상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김휘가 이미 그런 실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참작치 않고 있으니 신은 삼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우원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고 싶어하는 뜻을 갖고 있으면서도 염피(厭避)한다는 혐의를 받게 될까 걱정했다 합니다. 김휘는 그와 일가 친척으로서 그를 위해 해 주지 않는 일이 없다가 지금 그만 기회를 틈타 계책을 이루어주고 말았으니, 그의 입장에서야 잘 되었겠지만 신의 처지로 볼 때는 또한 고달프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이미 모욕을 받은 이상 대석(臺席)에 있기가 어려우니, 체직해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1월 15일 신묘

심세정(沈世鼎)을 승지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정영(李正英), 사간 이준구(李俊耉), 헌납 김우석(金禹錫), 정언 유명윤(兪命胤)이 아뢰기를,
"전 판서 조형(趙珩)이 죄인을 조사해 다스리면서 장적(帳籍)을 참고하지도 않고 죄를 정한 것이야말로 법을 집행하는 체례(體例)를 크게 잃은 것인데, 게다가 탑전에서 아뢸 때마저 대답을 엉망으로 하였으니, 그 죄는 정말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죄를 청한 그의 소에 대해 이미 윤허하여 파직시키고는 잇따라 잡아 가두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게 하셨는데, 일반 신료와는 다른 육경(六卿)의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로 볼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 이 일에 대해 물의가 모두 ‘당폐(堂陛)103)  의 의리로 볼 때 성명께 미진한 점이 있다.’고들 하면서, 보고 듣는 이마다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 실로 이로부터 비롯될 것이니, 속히 석방하도록 명하고 이어 고율(考律)하는 일을 정지하도록 하소서.
형관(刑官)이 논죄할 때 장적(帳籍)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죄를 정하다니, 일 처리를 이보다 더 불분명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때의 판서였던 조형이 이미 벌을 받았고 보면, 같이 참석했던 좌이(佐貳) 역시 혼자만 면하기는 어려우니, 형조 참의 권대운(權大運)을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 대각(臺閣)의 신하는 기군망상(欺君罔上)하는 적신(賊臣)을 미워해야 마땅한데, 거꾸로 비호하며 애석해하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인심과 세도(世道)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파직하고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금부가, 조형(趙珩)이 공사(供辭)에서 자복한 것을 가지고 조율(照律)할 것을 청하니, 상이 특별히 형추(刑推)하여 본정(本情)을 알아내도록 하였다. 승지 이후산(李後山)·심세정(沈世鼎)이 아뢰기를,
"조형이 혼미하여 일 처리를 잘못하고 성상께 어긋나게 대답한 것이야말로 해괴한 일인 만큼 고율(考律)하여 정죄(定罪)한다고 해서 본래 안될 것은 없습니다만, 성인이 법을 쓸 때에는 본래의 동기를 중요시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신하라도 일개 서리(胥吏)를 위해 스스로 불측한 짓을 저질러 주벌(誅罰)을 당하려 하겠습니까. 본래의 동기를 살펴 보건대 필시 그럴 리가 없는데, 심지어는 위를 기망한 적신이라고까지 하시고 또 형추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중신(重臣)을 형추한 것은 조종조(祖宗朝)에 없었던 일로서 거조가 과중하여 사람들이 필시 놀랄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잠시 천둥과 같은 위엄을 거두시어 형법이 중도에 맞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를 보건대 정말 가소롭다. 중신을 형추한 것이 조종조에 없었던 일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중신이 임금을 속인 것도 조종조에 있었던가. 일이 해괴하다. 그대들이 억지로 사사로이 비호해주려 하는데, 멋대로들 해보아라."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6일 임진

장령 여증제(呂曾齊),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삼남(三南) 지방에 이전에 찾아볼 수 없는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에 조가(朝家)에서 백성의 일을 곡진히 염려하여 부분적으로 급재(給災)를 허락해주는 한편 전결의 부세(賦稅)도 차례로 감해줄 예정인데 공물가(貢物價)만은 아직 처분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도 똑같은 민역(民役)으로서 일체 변통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처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판서 조형(趙珩)이 전후에 한 행동을 보건대 어긋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이미 파직시킨 뒤에 며칠 동안이나 수금(囚禁)시켰으니, 그 죄를 충분히 징계시켰다 할 것인데, 또 뜻밖에 형추(刑推)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미 자복한 상태이니, 더 캐낼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조형은 세 조정을 차례로 섬겨 오면서 경(卿)의 반열에까지 지위가 이르렀으니 무턱대고 형신을 가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형추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공물을 품처(稟處)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부응교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조형(趙珩)이 사구(司寇)104)  의 직위에 몸을 담고 죄수를 조사하는 명을 받드는 신분으로서, 이미 제대로 법을 적용해 장적(帳籍)을 조사하지도 않은 채 나이를 속인 간리(奸吏)에게 기만을 당하였는가 하면, 또 사실대로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는 성상의 바로 앞에서까지 어긋나게 답변을 올렸으며, 급기야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의 죄를 밝힐 때에도 남에게 떠넘기며 착란(錯亂)된 말들을 많이 하였으니, 이렇게 일 처리를 하고서야 어떻게 감히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제 간원의 관원이 이미 석방을 청해놓고는 또 고율(考律)하라는 명을 취소하도록 청하였으니, 시비를 따지면서도 근거한 바가 없고 경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할 것입니다. 일을 논하는 체모로 볼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되니, 계사에 동참한 간원의 관원 모두를 체차시키소서.
그리고 조형에게 본디 죄가 있긴 합니다만, 이미 경(卿)의 반열에 있는 몸이고 보면, 조정에서 그를 대우할 때 낮고 천한 무리와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인데, 형신(刑訊)을 가하게까지 하다니 염절(廉節)로써 신하를 기르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어긋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심지어 기군 망상(欺君罔上)의 적(賊)이라는 등의 말까지 하셨는데, 이는 너무도 사기(辭氣)가 지나치신 것으로서 본래의 상황을 또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으신 듯합니다. 속히 형추하라는 명을 중지하소서."
하고, 좌의정 심지원(沈之源)과 우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상차하여 역시 형추는 과중하다는 내용으로 누누이 아뢰었으나,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간원을 체차시키는 일만 허락하였다.

 

교리 민유중(閔維重)이 상소하여, 자주 경석(經席)을 열어 아랫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것을 청하고, 관작을 너무 많이 팔아 국체(國體)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면서 수천 마디에 걸쳐 누누이 아뢰었는데, 상이 포답(褒答)하였다. 그러나 뒤에 진휼청 당상 조복양(趙復陽)의 의논에 따라 옛날처럼 관작을 팔기 시작하였다.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상소하여 조형(趙珩)을 형추(刑推)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국가가 의지하는 것은 대각(臺閣)이다. 그런데 사사로이 비호하는 풍조가 형성되어 논의하는 것이 질서가 없어졌으니, 임금에 대해 간쟁하고 백관을 규찰하는 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제 간원의 계사를 보건대, 첫번째는 속히 석방하게 하라고 하고, 두 번째는 고율(考律)하는 일을 그대로 정지하게 하라고 하였다. 대각의 논의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조형이 사정(私情)에 따라 임금을 기망하며 간교하게 말을 바꾸는 등의 정상이 이미 숨김없이 드러났는데, 그를 비호해주려고 급급한 나머지 임금을 기망하는 죄에 같이 빠지고 말았으니, 아! 또한 놀라운 일이다. 체직시키는 가벼운 벌만으로는 그 중한 죄를 징계시킬 수 없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변지(邊地)에 내치도록 하라."
하니, 승지 홍처대(洪處大)·심세정(沈世鼎)이 아뢰기를,
"간원의 계사를 보건대 그 내용에 조리가 없으니, 신들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래 마음을 따져 보건대, 의견이 있으면 반드시 아뢴다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이 비호할 계책을 세워 스스로 불측한 죄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지금 만약 갑자기 관작을 삭탈하고 변방에 내치는 율을 적용한다면, 성인의 포용하는 도리가 못될 듯싶습니다. 재삼 생각하시어 천둥같은 위엄을 조금 거두어 주소서."
하자, 답하기를,
"그 표현을 보건대, 실로 사사로이 비호하며 패거리의 악행에 같이 어울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언관의 신분으로서 마음가짐이 이러한데, 만약 관작을 삭탈하고 변방에 내치는 율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신하들에게 책임을 지워 면려시키고 방자하게 사정(私情)을 쓰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처대 등이 재차 아뢰어 다시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판중추 정태화(鄭太和)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조형의 전후 행동을 보건대 모두가 너무도 놀랄 만한 일들이니, 전하의 노여움이 폭발한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군 망상(欺君罔上)했다는 것으로 단정하여 죄안을 삼는다면, 어찌 그것이 그네들의 본마음이었겠습니까. 더구나 조형이 이미 자복했는데 그뒤에 또 그를 고문하고 신문하게 하다니 이는 실로 상례(常例)에 없는 일입니다. 성조(聖朝)의 인후한 정사에 손상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의 드러난 죄를 토대로 시행해야 할 율을 적용한다면야 누가 감히 그를 애석하게 여기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다시 재삼 숙고하시어 형추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신이 방금 또 듣건대, 전 대사간 이정영(李正英)의 관작을 삭탈하고 멀리 내치라는 명을 비망기(備忘記)로 내리셨다 하니, 더욱 송연(竦然)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그저께 올린 간원의 계사는 우매한 신이 보아도 형편없다는 것을 알겠는데, 이에 대해 옥당이 차자로 탄핵한 것이야말로 지극히 정당한 논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엄한 분부를 내리시며 모두 먼 지방에 유배 보내도록까지 하셨으므로 듣고 보는 이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보기에도 광경이 좋지 않습니다. 아마도 전하께서 한때의 노여움을 제어하지 못한 탓으로 이렇게 지나친 거조가 있게 되신 듯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성지(聖旨)를 취소하시어 결과적으로 중도를 잃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끝내 성덕(聖德)에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등도 상차하여 이정영 등을 삭탈 관작하고 변방에 유배보내도록 한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에게 답하지 않다가 며칠 지난 뒤에 태화의 차자에만 답하였다.

 

11월 18일 갑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와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약방이 입시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조형의 형추는 지나치다.’고 공동으로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금부가 곧장 조율(照律)하기를 청한 것도 상규(常規)와는 다르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조형이 자복한 것이 범연하게 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자복을 하고 나면 조율하는 것이 본래 상례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이 이러하니, 조형은 형추(刑推)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또 아뢰기를,
"어제 간원의 계사를 보건대 너무 두서가 없긴 하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변방에 쫓아 유배 보내기까지 하는 것은 실로 중도를 얻는 도리가 못됩니다."
하고, 명하도 같은 말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대각은 임금의 귀와 눈 구실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속히 석방하라고 하고는 다른 한편으로 고율(考律)을 정지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인가. 필시 안팎으로 상응해서 그럴 것이다."
하였다. 명하가 또 그렇지 않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대각이 있겠는가."
하였다. 두표와 명하가 자리를 파하고 나왔다. 도승지 박세모(朴世模)가 미처 물러나오기 전에, 응교 이민적(李敏迪), 교리 민유중(閔維重)·임한백(任翰伯),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수찬 오시수(吳始壽)·홍주삼(洪柱三)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근일 상께서 일을 처리하는 것 가운데 중도를 잃으신 것이 많기에 어제 이미 차자로 진달드렸습니다만, 직접 뵙고 아뢰는 것만은 못하겠기에 감히 와서 청대한 것입니다. 방금 듣건대 조형을 형추하지 말라는 명이 계셨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오래 지나지 않아 정상을 회복한다는 것으로서 신들이 기쁘고 다행으로 여기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간관의 처사가 정말 부당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본관이 이미 체직시키기를 청했습니다만, 이 네 사람은 시비를 분명히 가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사사로이 비호하려는 계책을 꾸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변방에 유배시키라는 명을 속히 정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형이 죄가 없는데 내가 가두었다면 논집(論執)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조형의 세 가지 행동이 모두 형편없기 짝이 없는데도 간관이 석방하라고 청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내가 그 계사를 보건대, 정녕코 안팎으로 상응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모두가 아뢰기를,
"아랫사람들치고 그 누가 간관이 어긋나게 일 처리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변방에 유배보내는 율을 가한다면 원래의 죄에 해당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형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는데도 속히 석방하라고 청하고, 권대운(權大運)은 그저 장적(帳籍)105)  을 조사해보지 않은 실수밖에 없는데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고 청하였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시비를 가리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제신(諸臣)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참작해서 처리하겠다."
하자, 민적 등이 감사하며 절을 올리고, 또 자주 경연을 열도록 청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 뒤로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정원에 놓아 두고 계품토록 하라."
하였다.

 

남로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사간으로, 송시철(宋時喆)을 헌납으로, 이유상(李有相)·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원만석(元萬石)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이정영(李正英) 등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만 명하였다.

 

장령 여증제(呂曾齊) 등이 아뢰기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을 간관에게 시행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벌을 시행하는 것만도 말감(末減)106)  해준 것이다."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판중추 정태화의 차자에 답하였다.
"경의 간절한 정성에 대해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감탄하는 바이다. 두 가지 일을 이미 참작해서 처리했으니, 경은 안심하라."

 

오시(午時)에 햇무리가 지고,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11월 23일 기해

상이 이민구(李敏求) 등 1백 7인을 서용(叙用)하라고 이조와 병조에 하교하였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장령 여증제(呂曾齊),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 제좌(齊坐)했을 때, 이민구(李敏求)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는 일로 상의하여 계초(啓草)를 작성한 뒤에, 집에 있는 장관에게 간통(簡通)하여 문의하였더니, 처음에 답하기를 ‘문재(文才)가 아까울 뿐더러 세월도 이미 오래 지난 일인데 매번 논집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고, 다시 답하기를 ‘일찍이 이상(李相)이 수서(收叙)하자는 의논을 내었을 적에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았으니, 지금 와서 처음의 견해를 바꾸기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민구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만도 은혜롭게 용서를 받은 것으로서,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그를 거두어 서용하자는 의논이 있긴 하였어도 대계(臺啓)가 중하게 발동되어 결국 성명(成命)이 중지되었고 보면 이미 시행된 왕법(王法)을 동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장관 역시 민구가 무죄라고는 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그의 출중한 문재(文才)를 아깝게 여기고 죄받은 세월이 너무 오래 되었다고 하여 이렇듯 굳이 고집하고 있는 것이니, 이점은 실로 신들의 생각이 뒤쫓아 갈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공론(公論)인데 끝내 의견이 합치를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김좌명(金佐明)이 인피하기를,
"근일 전조(銓曹)의 선발이 공정치 못하다고 사람들이 매우 많이들 이야기하였으므로 드러나는 대로 규찰해 바로잡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번 이조(李稠)의 일을 논계했었습니다. 이조는 바로 참의 조복양(趙復陽)의 처 사촌인데, 혹 이를 두고 직접 배척하지 않았다고 신을 비난하니, 이것이 신의 첫 번째 잘못입니다. 법부(法府)가 개좌(開坐)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므로 신이 일찍이 탑전에서 그 잘못됨을 아뢰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동료들이 제좌(齊坐)했을 때 신이 개인적인 근심 때문에 혼자만 관아에 나가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잘못입니다. 동료가 또 이민구를 거두어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할 일로 간통(簡通)을 띄워 왔기에, 신이 ‘일찍이 선조 때에도 상신(相臣)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특별히 그의 서용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난 지금에 와서까지 번번이 논집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인 듯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료가 또 ‘이미 발론이 된 상태라서 중지하기가 어렵다.’고 말해 왔기에, 신이 답하기를 ‘상신이 거두어 서용할 것을 청한 의논에 대해서 내가 일찍이 잘못되었다고 한 적이 없는데, 지금 만약 처음의 견해를 바꾼다면 시비를 정한 것이 앞뒤로 차이가 나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니, 이 점이 두렵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의 의견 때문에 끝내 공의(公議)를 저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피혐한 계사를 얻어 보건대, 신이 말한 순서를 바꾸고 삭제하여 아뢰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경인년 연간에 대신과 연신(筵臣)이 잇따라 탑전에서 진달드리면서 도리상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할 점이 있다고 아뢰었고, 맨 마지막에 고(故) 상신 이경여(李敬輿)가 거두어 서용할 것을 특별히 청했는데, 신은 그뒤에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출입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경인년이 지난 지 또1기(紀)107)  가 되었고 현재 민구가 받은 벌이 파직에 불과할 뿐이니, 이처럼 전에 없이 대사면령을 내리는 때를 당하여 한번 서용하라는 명이 내렸다고 해서 꼭 쟁집(爭執)하는 단서를 삼아야 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견해가 이와 같기에 동료의 의논에 따라 참여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잘못입니다. 구차하게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박증휘(朴增輝)가 ‘이조(李稠)를 논한 계(啓)에 동참한 이상 감히 동료를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이동명(李東溟)이 처치하여 좌명을 체차하고 계주 이하를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지평 원만리(元萬里)와 집의 정계주(鄭繼胄)가 ‘이조가 출계(出繼)108)  한 만큼 조복양(趙復陽)과는 상피(相避)할 혐의가 없다.’고 발명(發明)하고, 박증휘(朴增輝)도 ‘감히 처치하지 못할 혐의가 있는 것이 어제와 다름이 없다.’는 이유로 인혐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충공 감사(忠公監司) 김휘(金徽)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저보(邸報)를 통해 원만리(元萬里)가 피혐한 사연을 얻어 보건대, 성낸 기색이 울그락불그락하고 온갖 방법으로 모욕을 가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홍우원(洪宇遠)의 정상을 만리의 말로 따져본다 해도 별로 억측할 만한 곳이 없는데, 만리가 신으로 하여금 무슨 말을 삭제시키려 하였기에 거꾸로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고 하였는지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만리가 세력을 믿고는 이렇게까지 사람을 능멸하며 기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신이 아무리 용렬해도 방백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이미 추악한 비난을 받았으니 결코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직명을 깎아 공사(公私)간에 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뒤에 만리와 함께 옥당의 차자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1월 27일 계묘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전 지평 이지익(李之翼)을 잡아들여 수금(囚禁)하였는데, 공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을 탄핵하여 논한 일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지익이 간관이 되었을 때 이일상을 논핵했었다. 그런데 이 해 가을에 지익이 또 지평에 임명되자 피혐하면서 더욱 심각한 내용으로 공격하며 발론(發論)하였는데, 새로운 말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이에 상이 당시 수사(水使)였던 이동현(李東顯) 및 서간을 위조한 양영남(梁穎南)을 잡아들여 사실대로 자백받도록 명하였는데, 동현이 절대 없었던 일이라고 공초(供招)하고 영남은 자기가 위조한 사실을 자복(自服)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지익을 수금케 하고 동현 등과 대질신문을 벌이도록 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자들이 ‘대간이 말한 일 때문에 수금되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옥당에서도 차자로 진달하여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민응협(閔應協)을 대사헌으로, 오정원(吳挺垣)을 판결사(判決事)로 삼았다.

 

헌납 송시철(宋時喆) 등이 아뢰기를,
"이민구(李敏求)가 임금을 잊고 나라를 등진 죄야말로 종묘 사직에 관계된 것인 만큼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 것만도 은혜로운 용서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심상한 범죄를 지은 자처럼 다시 사판(仕版)에 끼울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도 서용하라는 명이 있긴 하였습니다만, 대신(臺臣)이 쟁집하여 요구를 관철시킨 뒤에야 그만두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서용하라는 명이 또 뜻밖에 나왔으므로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있으니,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여러 지역의 사찰에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봉안해 왔던 것을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이미 의정(議定)해 매안(埋安)토록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묻지 않은 곳이 있는가 하면 방 하나에 따로 모시고는 삭망(朔望) 때 상식(上食)하는 일까지 하고 있으니, 너무도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승사(僧舍)가 어찌 위판을 봉안할 장소이겠으며, 치도(緇徒)109)  가 어떻게 개인적으로 열성을 제사지낼 수 있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한결같이 당초 의정한 대로 지금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충공 감사 김휘(金徽)의 상소 가운데 자신을 모욕한 말이 많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정계주(鄭繼胄)가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고, 이어 김휘를 논하여 추고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11월 27일 계묘

전남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치계(馳啓)하기를,
"적상 산성(赤裳山城)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한 누각이 옆으로 기울어지고 주초(柱礎) 사이도 크게 틈이 벌어지고 있으니, 보수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그 일을 종부시에 내렸다. 종부시가 내년 봄 따뜻할 때에 구 건물 그대로 보수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송시철(宋時喆) 등이 탄핵하기를,
"전 첨사(僉使) 이저(李竚)가 장지(葬地)문제로 다투다가 최복(衰服)을 입은 몸으로 지팡이를 들고 직접 사람을 때렸는가 하면 남의 무덤을 파헤치기까지 하였으니,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잡아들여 신문해서 죄를 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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