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병오
예조가 아뢰기를,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이 사찰에 있는 것은 부당하기 그지없으니,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해 일일이 정결한 곳에 매안(埋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합동으로 이민구(李敏求)를 거두어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어려워하며 허락하지 않다가 뒤에 가서 따랐다.
지평 정양(鄭瀁)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이번의 신명(新命)은 듣기에 놀라운 점이 있는데 이토록까지 명기(名器)가 외람스럽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던 잘못이 있는 데다가 또 전에 경조(京兆)에 있을 때의 일로 현재 추감(推勘)을 받고 있는데 신이 여러 차례 번독스럽게 해드린 탓으로 정원에 엄한 분부를 내리게까지 하였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정언 이동명(李東溟)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지익(李之翼)이 대각에서 체직되자마자 바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손상이 된다는 점을 신들이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만, 성상께서 기필코 끝까지 조사해 내려는 데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 그 일이 완결되기를 기다리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물의를 듣건대 논해야 할 것을 논하지 않았다고 허물하고 있으니, 어떻게 감히 자리에 그대로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한(漢)나라제갈 충무후(諸葛忠武侯)110) 의 사당에 노비 3구(口)를 내려 수호(守護)에 완벽을 기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교리 이민적(李敏迪)이 영유현에 어미를 문안하러 갔다가 고을 동쪽에 무후의 사당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선조 대왕이 임진년에 그곳에 주필(駐蹕)했을 때 건립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 흘러 건물이 퇴락한데다가 향사(享祀)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민적이 소장을 진달하여 건물의 보수를 청하는 한편, 사액(賜額) 및 제위 공전(祭位公田)·노비를 내려주어 현인을 기리는 뜻을 보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상이 그가 아뢴 것을 옳게 여겨 본도로 하여금 광주(廣州)온조왕(溫祚王)111) 의 묘식(廟式)대로 사노비(寺奴婢) 3인을 정급(定給)해주어 수직(守直)에 완벽을 기하도록 한 것이다.
12월 4일 기유
장령 여증제(呂曾齊)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전관(銓官)과 일단 인척(姻戚)의 혐의가 있고 보면, 출사를 청하는 처치를 다행으로 여겨 그대로 눌러 앉는 것이야말로 염우(廉隅)에 관계있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신이 지난번 호남(湖南)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되었을 때 급재(給災) 등의 일을 한결같이 사목(事目)대로 하였는데, 도신이 거꾸로 그것을 허물로 삼고 있으니,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드러났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양사(兩司)를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송시철(宋時喆)과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이지익(李之翼)에 관한 일을 논하지 않아 물의에 비난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만리는 다시 김휘(金徽)의 말을 거론하며 ‘참혹하게 모욕을 당했으니 결코 얼굴을 들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정언 이유상(李有相)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양사의 관원들이 이지익의 일로 인피하였는데, 지익이 논한 대상 인물인 이일상(李一相)은 바로 신의 동성(同姓) 사촌 형입니다. 신이 감히 그 사이에서 가부를 논할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2월 5일 경술
교리 민유중(閔維重)·오시수(吳始壽), 수찬 홍주삼(洪柱三) 등이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근래 예의를 지켜 사양하는 풍도가 크게 허물어지고 대각의 체통이 점점 무너지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겨 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번엔 헌부의 관원들이 이조를 추고하자고 청했다가 인피할 때 와서는 그만 거꾸로 구제해 풀어주려고 하는 등 마치 다른 사람들이 행동한 것처럼 앞뒤로 서로 어긋났는데, 이는 청명한 조정에 있어야 할 아름다운 일이 못되었습니다.
그리고 지평 원만리(元萬里)는 지난번에 충공 감사(忠公監司) 김휘(金徽)의 장계 때문에 인피까지 하면서 화를 내는 말을 많이 하며 현저하게 깎아내렸습니다. 그러자 김휘가 소장을 올려 변론하며 배척하였는데 그 역시 홧김에 상대방을 모욕하는 등 내용과 표현이 비루하고 패려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체(事體)를 헤아려 보건대 꼭 서로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었는데, 만리가 다시 그만 기세등등하게 많은 말을 늘어놓으며 부끄러움을 모른 채 주고받았습니다. 그 결과 패려하게 내놓은 말이 다시 패려하게 들어오는 등, 서로 안아서 같은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잘못을 따지자면 경중이 없지야 않겠지만, 서로 공경해야 하는 사부(士夫)의 도리를 손상시킨 점에 있어서는 양쪽 모두가 실로 똑같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公議)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이 탄핵했어야 옳았는데, 헌부가 논계하면서 김휘만을 치우치게 책망하였으니, 조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일이 이렇듯 몽롱하게 되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인혐하는 것은 더더욱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논해야 할 일이면 논하면 될 것이니 시기의 늦고 빠름이 무슨 구애가 되는 것이겠으며, 논해서 안 될 일이라면 그냥 놔두어야 될 것이니 물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시비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지 못한 채 남이 하는 이야기에 따라 자신의 진퇴를 삼다니 구차하기 짝이 없는 일로서 그 종적이 규피(規避)한 것에 관련된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양(鄭瀁)이 대각에 발탁되어 임명된 것이야말로 인망(人望)을 흡족하게 한 것이었습니다만, 일단 추함(推緘)을 받은 이상 직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장령 박증휘(朴增輝)·여증제(呂曾齊),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이동명(李東溟)·이유상(李有相), 지평 정양은 모두 체차시키고, 지평 원만리, 충공 감사 김휘는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본관(本館)이 이제 막 이지익(李之翼)을 나추(拿推)해서는 안 된다는 일을 차자로 진달드린 상황인데, 삼가 듣건대 금부가 이미 안문(按問)을 행했다 하므로 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본관에서 차자로 진달드린 것이 비록 대신(臺臣)이 논집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비지(批旨)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유사가 거행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관례처럼 공초(供招)를 받아냄으로써 온 힘을 기울여 상을 구제해주려는 본의(本意)로 하여금 그저 겉치레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뒷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금부의 당해 당상을 체차하소서.
그리고 신들이 나름대로 개탄하는 일이 있습니다. 상차한 지 오늘로 8일이 되는데 조용하기만 할 뿐 비답이 내려오지 않고 있으므로 신들은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옥체(玉體)가 불편하신 중에 또 자전의 건강이 좋지 못하신 관계로 근심하여 약 시중을 드시느라 혹 이런 일에는 여가를 낼 겨를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닌가도 여겨집니다만, 만기(萬機)를 재결하시는 일도 전폐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으셨는데, 어찌하여 유독 근신(近臣)이 일을 논한 차자에 대해서만은 지휘해 주시는 한 마디 말씀을 아껴 내려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어쩌면 말씀드린 내용이 대부분 궁액(宮掖)에 관련된 일이라서 성상께서 싫증내고 괴롭게 여겨 듣기 싫어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따르건 거부하건 간에 불편한 점이 있을까 염려하신 나머지 섣불리 가부에 대한 결정을 제시하지 않으려 하시기 때문입니까. 과연 그러하시다면 성명께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옥당의 차자는 대계(臺啓)와는 차이가 있다. 해부의 입장에서야 어찌 정론(停論)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판의금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금부 낭청이 와서 이지익(李之翼)의 원정 공사(元情公事)112) 를 보여주었는데, 허다한 공초(供招) 내용이 온 힘을 기울여 신을 전적으로 공격한 것이었으므로, 신이 지극히 놀라운 심정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양영남(梁穎南)의 초사(招辭) 가운데 ‘위조(僞造)했다.’고 한 한 조목은 연전에 형조와 포도청에서 공초받은 내용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는데, 끝에 가서 이내 ‘실없이 농지거리를 한 것[戲謔]’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위조에 관한 한 가지 일을 일단 자복(自服)한 이상 더 물어볼 일이 없을 듯하기도 하였습니다만, 희학으로 말을 꾸며댄 정상이 가증스러웠기 때문에 신이 감히 규정 외의 형(刑)을 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형추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각별히 중하게 신문하였는데 급기야 ‘형신(刑訊)을 엄히 하여 사실을 알아내라.’는 명이 내려지자 그가 죽을까 겁내어 곧바로 자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죄인이 자복을 하게 되면 곧장 조율(照律)하기를 청하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당초에 이미 엄히 형신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신이 상께서 재결하시라고 입계(入啓)했던 것인데, 이 또한 사체(事體)를 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주선해주며 엄폐한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지익이 신에 대해 ‘영남을 구문(究問)할 때 「네가 실제로 위조했지?」라고 하였다.’ 하며 운운한 이야기는 더욱 이치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요석(僚席)의 하리(下吏) 중에 설령 지익 편을 드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지익에게 아첨을 떨겠습니까. 그리고 설사 신에게 범연히 여기는 기색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익이 어떻게 직접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어 신의 기색을 탐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영남이 위조한 정상이야말로 사람들 모두가 분개하는 것인 만큼 죽여도 아까울 것은 없습니다만, 사찰(私札)을 위조한 데 해당되는 율(律)이 원래 있는 이상 유사(有司)된 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법 적용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영남이 형신을 받은 뒤에 양쪽 다리의 살점이 떨어져나가 뼈가 하얗게 드러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요석(僚席)이나 하배(下輩)들이 모두 눈으로 확인했던 것입니다. 형장(刑杖)을 헐하게 하였다고 한 지익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신이 당초 금오(金吾)에 임명되었을 때, 예전부터 맡아 왔던 내국(內局)의 임무를 또한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했던 것인데,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인조조(仁祖朝) 때부터 당저(當宁)113) 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 가지 직무를 겸임한 사례가 비일비재하였으므로, 감히 매번 번거롭게 해 드릴 수가 없어 억지로 참으며 공무를 집행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을 가지고 신의 죄안을 삼을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사격(沙格)114) 들은 모두가 원래 무고한 자들로서 형신을 당할 때면 번번이 하늘에 맹세하며 원통함을 호소하곤 하였는데, 먼 외방의 백성들이 춥고 배고픈 가운데 형신을 당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불쌍하고 참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외의(外議)가 모두 ‘계청(啓請)해서 정형(停刑)하는 일은 부득이하다.’고 하였습니다만, 신의 입장에서는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이라서 감히 정형을 청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거꾸로 그들을 엄호해 주었다는 배척을 가하며 닥치는대로 허튼 소리를 떠벌여대며 모함하고 있으니, 아! 또한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시체를 실은 선박이 곧장 화전(花田)에 정박했고 경강(京江)에는 오지 않았다는 설이 당초 이동현(李東顯)의 공초(供招)에서 나왔고 또 사격(沙格)의 공초에서도 나왔기 때문에, 신은 단지 각 사람의 공초에 의거하여 회계(回啓)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이내 ‘용의주도하기 그지없었다.’고 하였는데, 이것 또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신이 의논드린 것이야말로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신이 또한 어찌 감히 없는 일을 꾸며대는 짓을 하여 지익이 의도하는 바를 만족시켜 줄 리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볼 때 지익이 전일 피혐한 사연 중에서 말한 이야기와, 지난해 논계했을 때의 내용 사이에는 많은 차잇점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공초한 내용을 보면 또 피혐한 사연과 서로 어긋나는데 앞뒤가 서로 연결되지 않아 마치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말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미 말하기를 ‘여러 곳에 보낼 목적으로 선박에 실었던 물품 가운데 미처 추심(推審)하지 못한 것들이 많은데, 신이 또한 그 당사자를 눈으로 보았고 그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고, 이번 공사(供辭)에서는 그 사람의 성명도 거론하지 않고 그가 들은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으니, 도대체 그의 의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익이 말이 막히고 계책이 궁해지자 기필코 이겨보려는 욕심에서 이번에는 신에 대해 ‘일찍이 이일상(李一相)을 변호해 주었으며 교분이 두텁다.’고 하는 등 공격의 화살을 신에게 돌리면서 이토록까지 극단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의중을 살피건대 정녕 재판 과정에서 사리상 불리하게 된 자가 승부의 기미를 예견하고는 다른 재판관의 손으로 옮길 계책을 하는 것과 같으니, 그의 그런 마음이 도리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신이 금오(金吾)의 장관으로 있으면서 추악한 비난을 혹독하게 받아 청명한 조정에 많은 모욕을 끼쳤으니, 신의 본직 및 겸대한 금오의 직책을 속히 체직하여 인심을 통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거도 없는 괴이한 말에 대해 경은 뭘 그렇게 따지는가. 내국의 직숙(直宿)을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12월 7일 임자
김좌명(金佐明)을 예조 참판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최유지(崔攸之)·민주면(閔周冕)을 장령으로, 남구만(南九萬)을 헌납으로, 이무(李堥)·이상(李翔)을 지평으로, 이지무(李枝茂)·정창도(丁昌燾)를 정언으로, 김만기(金萬基)를 교리로 삼았다.
12월 8일 계축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영릉(寧陵)의 석물(石物)에 틈이 벌어졌으므로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하였는데, 이튿날 돌아와 아뢰기를,
"인지(寅地)의 죽석(竹石)115) 이 서로 연결된 곳에 틈이 벌어졌는데 이는 지대(地臺)의 벽돌이 밑으로 꺼져 그런 것 같습니다. 또 묘지(卯地)의 지대석(地臺石)도 틈이 벌어졌습니다."
하고, 이어 틈이 벌어진 곳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니, 해조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 보수하게 하였다.
상이 ‘관상감 제조 윤순지(尹順之)가 병을 핑계대고 영릉을 봉심하러 가지 않다가 재촉한 뒤에야 갔다가 돌아왔다.’는 이유로 정원을 초치(招致)하여 힐문하니, 정원이 순지가 대답한 내용을 보고드렸다. 상이 그와 함께 동임(同任) 제조 민응협(閔應協)을 체차시키도록 명하고 금부에 내려 추문(推問)하게 하였는데, 뒤에 모두 파직시켰다.
대사간 남로성(南老星)이 아뢰기를,
"이지익(李之翼)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추악하게 금오(金吾) 당상을 비난한 것이 끝이 없었는데, 신도 당상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괴상한 망언이라서 같이 따질 가치도 없습니다만, 일단 배척을 받은 이상 결코 구차하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이지무(李枝茂)가 처치하기를,
"뒤섞여 배척을 받은 상황인 만큼 별로 피혐할 것이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10일 을묘
대사간 남로성(南老星)이 병으로 소패(召牌)에 응하지 못했는데, 이어 스스로 이를 논열(論列)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영돈녕 김우명(金佑明)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신이 총부(摠府)의 직소(直所)에 있으면서 적간(摘奸)하는 중사(中使)를 불러들여 양영남(梁穎南)이 얼마나 형신(刑訊)을 받았는지 물어보았다고 홍명하(洪命夏)가 말했다 하기에, 놀랍고 두려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지익(李之翼)이 풍병(風病)에 걸려 미친 사람이 아닌 한 반드시 중사를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고, 가령 신이 분의(分義)를 알지 못한 채 이런 망녕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지익은 바로 신의 종질(從姪)이니 필시 사람들을 대놓고 떠벌여 댈 리가 없을 것입니다. 명하의 소위 ‘도사(都事)에게서 들었다.’는 말에 대해서 신은 정말 통분스러울 뿐더러 놀라울 따름입니다. 신에게 과연 이런 일이 있었고 지익이 과연 도사에게 전했다면, 신과 지익은 당연히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사실이 없는데 아첨할 자료를 만들어 중신(重臣)에게 잘 보이려 했다면, 이런 무리들이야말로 깊이 미워하며 통렬하게 잘라버려야 할 것이니, 어찌 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보아넘긴 나머지 그저 멍청하게 모함을 당하도록 하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시고 이어 교외에 물러가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세도(世道)가 이렇듯 경박하다니 나도 모르게 한심한 생각이 든다. 중사도 명을 받든 신하인데 어떻게 마음대로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를 지어낸 자야말로 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조정을 멸시하는 자이니, 종당에는 끝까지 밝혀내고야 말 것이다. 그런데 어찌 꼭 서울을 나가 그 의도를 만족시켜 주려 하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홍명하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부원군 김우명의 상소 가운데 나오는 말을 듣고, 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신이 궐 밖에서 대죄(待罪)하고 있던 날, 금부 낭청(郞廳) 이행일(李行逸)이 신을 찾아와서 지익이 추악하게 모함한 정상을 언급하면서 ‘요즘 유언 비어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하기에, 신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이치에 조금도 닿지 않는 그따위 설들은 입에 담을 필요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김좌명이 신을 찾아 왔기에 신이 이야기하던 도중에 행일이 전해준 이야기를 대략 언급했는데, 이는 인심(人心)이 맑지 못한 탓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지어냈다고 개탄하는 뜻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뒤에 신이 다시 행일에게 묻기를 ‘전에 전해준 이야기는 지익에게서 들은 것인가?’ 하였더니, 행일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곧 요즈음 떠돌아다니는 말이고 실제로 지익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대개 낭청이 얻어 들은 이야기를 당상에게 전한 것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신과 좌명과는 또 일가 친척인 관계이고 보면 들은 것을 언급하는 것도 으레 있는 일이라 할 것인데,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모두가 추기(樞機)를 엄밀하게 하지 못한 탓으로 빚어진 결과이니, 신의 본직 및 겸대한 금오(金吾)의 직책을 파직하여 공사(公私) 간에 편하게 하소서."
지중추 송시열(宋時烈)이 병으로 사직하니, 어의(御醫)를 보내 간병(看病)케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고, 경연을 여는 날이 적은 잘못을 진달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12월 11일 병진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하여 청하기를,
"삼남(三南)·기전(畿甸)·해서(海西) 지방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 대해 재해 정도를 따지지 말고 아직 거두어들이지 않은 적곡(糴穀) 일체를 면제해 줌으로써 잔약한 백성들의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소서. 그리고 춘등(春等)116) 으로 거둘 미곡의 수를 감축하도록 의논하게 함으로써 인심을 안정시키고 천명(天命)에 회답하는 일의 급선무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각도에서 적곡을 징수하는 것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12월 13일 무오
정태화(鄭太和)를 다시 영의정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충공 감사(忠公監司)로, 이진(李𥘼)을 병조 참의로, 김시진(金始振)을 참지로, 김만기(金萬基)를 헌납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남구만(南九萬)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정언 이지무(李枝茂)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정언 정창도(丁昌燾)가 ‘이민구(李敏求)를 서용(叙用)하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일을 정계(停啓)하자.’는 뜻으로 석상(席上)에서 발언하기에, 신과 헌납 남구만(南九萬)이 모두 말하기를 ‘양사(兩司) 합동으로 발동한 중론(重論)을 한 사람의 소견 때문에 바꾸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더니, 창도가 즉시 일어나서 나가버렸습니다. 아무리 ‘직첩(職牒)을 준 뒤 거두어 서용하는 것은 그다지 중한 일이 아니다. 대사면령이 내려져 중한 형벌을 받은 자들까지도 모두 용서를 받았다.’는 말로 구제해 주려는 발판을 삼는다 하더라도, 죄의 경중은 따지지 않은 채 ‘일단 직첩을 준 이상 차례대로 거두어 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논리는 근거없는 말로서 신으로서는 실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민주면(閔周冕)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국가에서 대관(臺官)을 대우하는 것은 사체상 매우 중한 일로서, 말한 것이 비록 사실과 다르다 할지라도 섣불리 죄벌을 가한 적이 없었던 것은 언로를 열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은 이지익(李之翼)을 나문(拿問)한 것과 관련하여, 기필코 통렬히 시비를 가려 처치하려는 성상의 뜻은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지익이 말한 것은 곧 대간으로 재직할 때의 일인데, 시비와 허실은 우선 따지지 않고 놔두더라도, 일을 말한 대간을 나문하여 그 숨긴 정상을 찾아내려고 하는 이것이야말로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입니다. 당초 나문한 것만도 미안하기 그지없었던 일인데, 더구나 지금은 공초(供招)를 받은 뒤이니 더더욱 가두어두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이 오늘 석방시킬 것을 청하려고 했는데, 동료가 말하기를 ‘원정(原情)을 이미 안에 들인 상태인 만큼 상께서 당연히 처치하실 것이니 논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처럼 형편없는 자가 대각에 몸을 담고 있으므로 말을 해도 신임을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차하게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2월 14일 기미
지평 이무(李堥)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장령 민주면이 이지익의 석방을 청하자고 석상(席上)에서 발언하기에, 신이 ‘지익의 일은 범연한 풍문(風聞)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일단 공초를 받아 입계했는데 아직 판하(判下)되지 않은 상태이니, 앞질러 석방을 청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듯하다.’고 말했더니, 주면이 즉시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인피한 사연을 보건대, 그 중에 ‘상께서 당연히 처치하실 것이다.’라고 한 한 조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원래 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면서 현저하게 배척을 가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신은 논한다. 시의(時議)가 이지익의 일을 언관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잘못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주면이 이 일을 발론(發論)했는데도 이무가 각하(却下)하고 따르지 않았으니, 시비가 가려졌다 하겠다. 다만 한 조목에 관한 이야기만은 피차간에 서로 싸워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55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1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참(兵站)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시의(時議)가 이지익의 일을 언관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잘못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주면이 이 일을 발론(發論)했는데도 이무가 각하(却下)하고 따르지 않았으니, 시비가 가려졌다 하겠다. 다만 한 조목에 관한 이야기만은 피차간에 서로 싸워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12월 15일 경신
옥당이 대간을 처치하는 과정에서 교리 민유중(閔維重)과 수찬 이익(李翊)은 정창도(丁昌燾)를 체직시켜야 한다고 하고, 부교리 오시수(吳始壽)와 수찬 홍주삼(洪柱三)은 그를 체직시키면 안 된다고 하여, 각자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고 유시하였다.
함경 감사 권우(權堣)가 치계(馳啓)하기를,
"지릉(智陵)의 병풍석(屛風石)에 회(灰)를 바른 곳이 떨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숙릉(淑陵)의 정자각(丁字閣)에 비가 새는 곳이 있으며, 또 잡목이 능 위에까지 근접해 있으니 쳐버려야 하겠습니다. 순릉(純陵)의 정자각에도 비가 새는 곳이 두 곳이나 됩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향축(香祝)을 보내어 한식(寒食) 제사를 지낸 뒤에 보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의 소에 답하기를,
"이행일(李行逸)의 말이 그와 같았다면 경이 혐의할 것이 뭐가 있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이때 상의 건강이 오래도록 좋지 못하여 장소(章疏)에 대한 비답이 대부분 지체되었는데, 명하의 소에 대해서도 안에 들인 지 5일만에야 비로소 비답이 내려졌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아, 경이 원로 대신으로서 어쩌면 이다지도 나라 일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어려운 일뿐이고 갖가지로 변괴가 속출하여 마치 언덕이 보이지 않는 큰 강을 건너는 것만 같은데, 경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앞으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지난번에 경이 사직했을 때, 섣불리 허락해선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몰랐던 게 아니지만, 그래도 끝내 따랐던 것은 바로 경의 뜻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번에 도로 옛날 직책을 제수한 나의 뜻을 경이 알아야 할 것인데, 어찌 이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히려 형편없이 함부로 지어낸 말을 인용하며 오늘날의 혐의로 삼으려 하는가. 속히 소장 올리는 일을 그만두어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태화가 막 서필원(徐必遠)의 중한 배척을 받았던 관계로 출사하려 하지 않자 상이 이렇게 유시한 것이다.
12월 16일 신유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근래 외방 곳곳에 전염병이 만연되어 있고, 또 양남(兩南)의 장계(狀啓)를 보면 너무도 참혹하게 기근이 들었다 하는데, 전연 구제할 방책이 없어 정말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부에 공무를 집행하는 당상이 없는 관계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가 오래도록 옥에 갇혀 있는데도 아직 처치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홍명하(洪命夏)는 수인(囚人)으로부터 배척을 받은 것인 만큼 이로 인해 체직시킨다면 사체상 미안하게 되겠습니다만, 김남중(金南重)과 박장원(朴長遠)은 일단 옥당의 차자로 논박을 받은 상태이니 속히 체직시키고 후임자를 내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신하는 모두 체직시키고, 오늘 중으로 후임자를 임명토록 하라."
하였다. 지원이 또 아뢰기를,
"영남(嶺南) 지방에 흉년든 상황이 특히 혹심하니, 영동(嶺東) 지방에서 1만여 석의 곡식을 실어다 진휼한다 해도 두루 혜택을 입게 하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다시 영동 산화전(山火田)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덧붙여 운송함으로써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원이 또 아뢰기를,
"기전(畿甸)의 백성도 대부분이 굶주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도 그러한데, 더구나 내년 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선혜청에서 말[馬]을 기르는 데 쓰는 곡식이 무려 8천여 석에 이른다고 하니, 수천 석을 덜어내어 기민(飢民)을 진구할 바탕을 삼게 하고, 우마(牛馬)는 서북도(西北道) 각 고을에 나눠주어 기르게 하소서. 그러면 조금 도움이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복시로 하여금 그 수를 헤아려 정한 뒤에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홍중보(洪重普)와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이 모두 이민구(李敏求)를 서용하도록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홍중보가 민주면(閔周冕)을 체차시키고 이무(李堥)를 출사시킬 것을 청하고, 이은상이 정창도(丁昌燾)를 체차시키고 이지무(李枝茂)를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모두 따랐다.
유철(兪㯙)·남용익(南龍翼)을 동지의금으로, 정륜(鄭錀)을 장령으로, 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삼았다.
헌납 김만기(金萬基)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살피건대, 요즘 들어 일반 업무를 재결(裁決)하시는 것이나 장주(章奏)에 대해 응답하시는 것을 거의 대부분 지체시키고 있는가 하면, 대각이 논집하고 유신(儒臣)이 진달드려도 받아들이는 것은 적고 억울하게 엄한 분부만 내리고 계십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는 벌이 언관에게까지 미친 이상 대각이 쟁집한 것을 끝내 윤허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종류에 대해서는 지금 다 진달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령 이민구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시도록 요청한 것에 대해서까지 아직껏 유음(兪音)을 아끼고 계시는데, 신은 이 점에 대해서 더욱 개연(慨然)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가 민구를 거두어 서용하려는 것은 강도(江都)의 일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나라의 일이 오늘날의 사태에 이르게 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임금을 잊고 나라를 배반한 적(賊)은 살점을 씹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러한 자를 중도(中道)에 양이(量移)했던 것이 조정의 본의에서 나온 일이 아닐 뿐더러, 차마 말 못할 정도로 그가 저쪽 청(淸)나라 사람들과 서로 통하며 우리 나라를 협박한 정상이 확연한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선왕께서도 일찍이 그를 거두어 서용하였다가 곧바로 도로 정지시켰었는데, 그 이유가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양사(兩司)가 아뢰면서도 그 죄를 대략 말할 뿐 이 의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감히 성명(聖明)을 위해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아, 혈기를 가진 자치고 그 누가 기꺼이 만족스럽게 여기며 민구와 청명한 조정에 같이 있으려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대각에 몸을 담고 있는 신분으로서 자기의 견해에만 집착한 나머지 공의(公議)를 저지하고 편파적인 말만 늘어놓으면서 성상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으니, 정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렇기 때문에 온 나라의 공의에 대해 난색을 보이며 주저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산릉(山陵)을 봉심(奉審)하는 일과 관련하여 즉시 출발하지 않은 것은 관상감 제조에게 참으로 죄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을 듣고 경중을 감안하여 치죄(治罪)하는 관례가 본래 있는 만큼 이에 정원에 명하여 힐문케 하였는데, 그에게 물어 입계(入啓)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갑자기 내시(內侍)를 보내어 그 말을 듣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미안한 일이 되는 듯싶습니다. 어쩌면 정원이 그를 불러 물어볼 때 필수적으로 내시가 참여하여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정원이 서계(書啓)하는 것보다는 내시가 전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듣고 보는 이들마다 의아해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뒷폐단이 생길까 염려되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성명께서는 살펴서 받아들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끝 부분에 아뢴 일은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17일 임술
영의정 정태화가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홍중보(洪重普)가 처치하여 민주면(閔周冕)을 체차시켰는데, 교리 민유중(閔維重)이 상소하여 이를 배척하니, 중보가 인피하였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이지익(李之翼)을 금부에 내린 거조에 대해 물정이 크게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체로 볼 때, 지익이 일단 일을 말하는 대관(臺官)이었고 보면, 조가(朝家)에서 처치할 때에도 그 말의 허실(虛實)을 조사한 뒤 그런 일이 없었을 경우 그냥 놔두면 될 뿐인데, 어떻게 가두어놓고 힐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결과 그가 대답한 사연을 보건대, 사체(事體)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 하던 대로 널리 끌어당겨 말하면서 마치 송사를 벌이는 사람처럼 기필코 이기려고 대들게 되었으니, 조정이 얼마나 부끄럽게 되었습니까.
처음에 가두고 힐문한 것이 일단 잘못된 행동이라고 인정한다면 하루를 가두어두어도 그만큼 손상되는 것이 커진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전 장령 민주면(閔周冕)이 석방하도록 청했던 뜻이야말로 공공(公共)의 논이라 할 것인데, 대사헌 홍중보(洪重普)가 국체(國體)는 생각하지 않고 체차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보다 더 심하게 어긋난 처치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옥당이 하루를 넘겨서 처치한 것도 본래 고의로 지체시킨 것에 견줄 성격이 못되는데,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이 따로 의견을 내어 아무 까닭없이 추고할 것을 청했으니, 이는 시비를 가리지 못한 채 뒤범벅 상태로 배척한 것으로서 또한 일을 논하는 체례(體例)가 못된다 할 것입니다.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이지익(李之翼)을 석방하고 양영남(梁穎南)과 사격(沙格) 등을 다시 신문하도록 명하였다. 지익을 금부에 내렸던 것은, 상의 생각에 영남을 누차 엄하게 신문했는데도 이일상(李一相)의 수서(手書)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변명했으므로 기필코 끝까지 조사해내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하여 지익을 나문했던 것인데, 지익의 초사(招辭)를 보건대 종횡무진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 무려 수만 언(言)이나 되었다. 처음은 이일상이 양영남을 꾀어 위조했다고 자복(自服)하게 했다는 내용으로서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조목별로 공격해 배척하였고, 다음은 홍명하(洪命夏)가 이일상과 교분이 두텁기 때문에 옥사(獄事)를 조사할 때 고의로 막았다는 내용이었는데 이일상을 헐뜯었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게 이야기를 날조하였다. 그런가하면 최일(崔逸)·민광소(閔光熽)·이상고(李尙固) 등을 끌어당겨 증인으로 삼기도 하였는데, 끝내 실상을 조사해 얻어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공사(供辭)를 이미 들였으나 며칠 동안 안에 그대로 놔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 공사의 내용으로 수금(囚禁)된 여러 사람 및 색리(色吏)·사격(沙格) 등을 엄히 형신하여 끝까지 캐묻고, 이지익은 석방하라."
고 한 것이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이행일(李行逸)을 나문(拿問)하였다.
처음에 김우명(金佑明)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홍명하가 신이 중사(中使)를 불러 물어봤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발설하였다.’고 하자, 명하가 소장을 진달하여 이행일에게서 듣고 김좌명(金佐明)에게 말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행일을 나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행일의 공초(供招)를 보건대, 명하가 뭐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 반면 명하가 좌명에게 전했다고 하는 내용이야말로 망언이라고 하면서 온 힘을 기울여 명하를 추악하게 비난하였는데, 증거할 길이 없어 제대로 진위를 가려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뒤에 행일은 결국 유배되고 말았다.
삼가 살피건대, 홍명하는 문재(文才)도 없는데다가 이재(吏才)마저 없었으며 언론(言論)과 풍도(風度)도 보통 사람 이상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런데 그저 부마(駙馬) 흥득기(洪得箕)의 종조(從祖)가 되는 까닭에 효묘(孝廟)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사적(仕籍)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재상의 반열에 뛰어 올랐는데, 그가 밤낮으로 일삼는 것이라고는 당론(黨論)뿐이었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그러나 자기가 행일에게 말했던 것을 가지고 거꾸로 행일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행동은 그래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행일이 죽을까 겁을 낸 나머지 바꿔 말하면서 추악하게 헐뜯음으로써 스스로 빠져나올 계책을 삼았으니, 그야말로 못할 짓이 없는 자라고나 하겠다.
12월 18일 계해
정언 이지무(李枝茂)와 지평 이무(李堥)가 이지익(李之翼)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이무는 체직시키고 이지무는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12월 19일 갑자
헌납 김만기(金萬基) 등이 ‘부교리 오시수(吳始壽)와 수찬 홍주삼(洪柱三)이 지난번 옥당에서 간원을 처치할 즈음에 소란을 일으키며 소장을 진달해 이민구(李敏求)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체차시킬 것을 청하고, 이어 이지익이 끌어댄 사람들을 모두 나문하도록 명하여 옥체(獄體)가 소루하게 되는 폐단이 없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가 죽었는데, 집안이 너무도 가난하여 장례치를 길이 없다 하니, 듣기에 참혹하다. 선조(先朝) 때 그에 대해 보살핀 것이 여러 부마(駙馬)들 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때의 일과 비교해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참작해서 돌보아 시종일관 돌보아주었던 선조의 뜻을 본받게 하라."
영의정 정태화가 누차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니, 부드럽게 유시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잇따라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유시하였는데, 명하 스스로 교외(郊外)로 물러갔다.
유학(幼學) 이상고(李尙固), 남원 부사(南原府使) 민광소(閔光熽), 전 부사 최일(崔逸) 등을 모두 나문하였는데, 간원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1일 병인
얇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솜옷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2일 정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윤순지(尹順之)와 민응협(閔應協) 등이 모두 늙고 병든 신하로서 오래도록 감옥에 갇혀 있는데, 이는 판의금 홍명하(洪命夏)가 강 밖으로 나가 있어 아직 조율(照律)을 못했기 때문이니, 정말 염려스럽습니다. 예전부터 옥사(獄事)가 지체될 경우에는 또한 차관(次官)이 조율토록 한 규정이 있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해서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이관징(李觀徵)을 지평으로, 곽제화(郭齊華)를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4일 기사
대마도(對馬島)에 화재가 발생해 사찰과 민간 가옥 2천여 채가 연소되었는데 화염이 3일 낮밤이나 계속되었다. 왜인(倭人)이 이를 우리 쪽에 통보하면서 물품을 보내주기를 요구했는데,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원정(李元禎)이 우리 나라 역시 기근이 심하여 다른 쪽을 돌보아 줄 겨를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12월 25일 경오
지평 이관징(李觀徵)이 인피하였다.
"신은 천성적으로 우활하고 졸렬할 뿐 아니라 견문도 고루하여 목전(目前)의 논의마저도 그 시비를 밝게 구별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먼 장래의 일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민구(李敏求)가 죄로 폐기된 지 지금 어언 25년이 지났습니다. 신은 까마득한 후생(後生)이라서 강도(江都)에서 일어난 일의 전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그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는 논을 보건대, 강도에서의 일에만 국한시켜 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하된 몸으로 과연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무리 신처럼 혼미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어떻게 그 논과 견해를 달리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민구와 관련된 모든 일이 인조 대왕조에 있었는데, 그 경중을 잘 헤아려 처치하기로는 의당 성조(聖朝)만한 분이 없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때 양이(量移)시킨 뒤에 다시 은명(恩命)을 내려 방환(放還)시키고 직첩을 차례로 베풀어 주셨는데, 양사(兩司)가 이를 논집했어도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고 보면, 뭔가 분명히 까닭이 있어 영원히 그를 폐기시키려 하지 않으셨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상신(相臣) 한흥일(韓興一)이 강도의 일을 직접 보고 그 곡절을 상세히 아는 사람이었는데도 헌장(憲長)으로 있을 때 정론(停論)하기를 주장하였고, 그뒤 연신(筵臣)과 대신(大臣)도 거두어 서용하라는 뜻으로 잇따라 진달했었으니, 그때 이를 참작해서 그런 논의가 나왔었다는 것을 또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은 구차하게 동료들의 의논에 동의할 수 없으니, 직명(職名)을 체차해 주소서."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민구의 일에 대해 상께서 오래도록 대계(臺啓)를 따르시지 않기 때문에 시끄럽게 될 소지가 날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양사(兩司)의 논은 여정(輿情)에서 나온 것이니 당연히 윤허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이른바 옛 상신(相臣)이란 곧 이경여(李敬輿)를 말합니다. 경여가 그때 그렇게 말했던 것은 대체로 당시에 실록을 편찬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구의 문재(文才)로 볼 때 편찬 사업에 참여시키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그 죄를 풀어주어 재주를 이용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중론(衆論)이 ‘이 사람의 손으로 국사(國史)를 오염시키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 의논이 도로 정지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강도(江都)의 일이 지나가고 그뒤에 민구가 유배된 상태에 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정명수(鄭命壽)의 처제(妻弟)를 첩으로 삼고는 그 세력을 빌려 조정을 협박하면서 양이(量移)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조 대왕께서도 그 정상을 미워하시어 제신(諸臣)에게 ‘서로(西路)의 죄인을 석방하라고 요구한 의도는 실제로 민구를 풀어주려는 데 있다. 경들은 이 사실을 아는가?’ 하고 하교하셨는데, 이 일이야말로 더욱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할 일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잘 몰랐던 일이다."
하였다. 정언 이지무(李枝茂)가 그 뒤를 이어 반복해 논하며 서용하라고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금부에 판사(判事)가 없는 관계로 옥사(獄事)가 많이 지체되고 있으니, 변통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명하(洪命夏)는 판의금만 체직시키고, 속히 그 후임자를 내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요즘 들어 소장(疏章)을 지체시키고 계시므로 아랫사람들이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께서 응수하실 때마다 시비를 분명히 구별해주시지 않은 채 갑(甲)에 대해 이미 윤허하셨다가 또 을(乙)을 윤허하시곤 합니다. 반드시 일마다 통렬하게 분별하여 잘못된 것을 물리치신 뒤에야 나라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증제(呂曾齊)가 상소에서 말한 것은 바로 홍중보(洪重普)의 일을 가리킨 것인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그런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도 중보가 처치한 것을 타당치 못하다고 여겨 말을 하려고 하였는데 미처 하지 못하였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미 시비를 아셨다면 또한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12월 26일 신미
조형(趙珩)을 평산(平山) 금암역(金巖驛)에 유배하였는데, 이갑남(李甲男)이 나이를 속인 것을 확인하지 않고 조율(照律)했기 때문이었다.
12월 27일 임신
삼남(三南) 지방에서 세폐차목(歲幣次木)117) 을 바치는 것을 면제하였다.
12월 29일 갑술
담양부(潭陽府)에 지진이 일어나고, 전주부(全州府)에 대낮에 어두워지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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