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5권, 현종 3년 1662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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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을해

청(淸)나라가 연호(年號)를 강희(康熙)001)  로 고쳤다.

 

밤에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1월 2일 병자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오준(吳竣)을 판의금으로, 유계(兪棨)를 이조 참의로,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집의로 삼았다.

 

강원 감사가 치계하기를,
"간성 군수(杆城郡守) 권령(權坽)이 별도로 2천여 석의 곡식을 마련하여 기민(飢民)을 진구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하니,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할 것을 명했는데, 연신(筵臣)이 너무 과하다고 논하자, 개정하였다.

 

황해 감사가 본도에 기근이 든 상황을 치계하면서, 서울로 운송할 미곡 1만 1천석 중에 절반을 덜어 본도에 남겨둠으로써 진구할 자료로 삼게 하기를 청하니, 비국(備局)에 계하(啓下)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본도의 원곡(元穀)과 관향곡(管餉穀)을 합치면 모두 27만여 석이나 되니, 올해 환곡(還穀)을 다 되돌려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융통하여 충분히 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납할 미곡이 1만여 석밖에 안 되는데 절반이나 그곳에 남겨두려 하니, 일이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하고, 방계(防啓)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1월 4일 무인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차하기를,
"굶주리고 병에 걸려 쓰러져 죽어가는 상황에서 또 변괴마저 겹쳐 발생하고 있으니, 내일 조참(朝參)할 때 음악을 연주하도록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남(湖南) 담양(潭陽)에 있는 보국사(寶國寺)의 금불(金佛) 3구(軀)에서 저절로 땀이 배어 나왔다고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치계하여 보고하고, 또 본도에 기근이 든 상황을 아뢰면서 청하기를,
"재해 상황이 우심한 고을은 전세(田稅)를 탕감해 주고, 조금 곡식이 익은 고을의 전세는 알맞게 받아들여 본도에 남겨두었다가 장차 진구할 자료로 삼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에 계하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수조안(收租案)도 아직 올려보내지 않았으면서 먼저 본도에서 쓰겠다고 청하다니, 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장부를 빨리 올려보내라고 재촉하는 한편 우선은 모집한 곡식을 가지고 기민(飢民)에게 나누어주어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5일 기묘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행 판중추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병판 홍명하(洪命夏)가 성밖으로 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중대한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계속 지연시킬 수만은 없으니, 우선 명하를 체직시키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명하는 그 재주와 충성심을 취할 만하기 때문에 경솔하게 체직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고,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홍명하를 지금 만약 경솔하게 체직시킨다면 일이 미안하게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행일(李行逸)의 일에 대해서도 외부에서 말이 많은데, 심지어는 그가 공초(供招)하면서 말을 두세 번씩이나 바꿨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이런 때에 경솔하게 병판을 체직시켜 사람들의 의아심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신의 견해도 민정중과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경솔하게 체직을 청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 정중이 아뢰기를,
"행일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주워모아 짜맞추어서 자기의 설로 삼은 데 불과합니다만, 그의 형편없이 경망스러운 죄만큼은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이송령(李松齡)과 정선흥(鄭善興)이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자 도성 문밖으로 쫓아내고 성안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었는데, 행일도 이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이일상(李一相)의 일이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홍명하의 일이 또 터져나왔으니, 조정의 수치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 이미 행했던 예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외방의 부민(富民)이 혹 내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길러서 비복(婢僕)으로 삼고 싶어 합니다만 아직 조가(朝家)의 사목(事目)이 없기 때문에 뒷날의 환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것이 급하니,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사목을 만들어 급속히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이익(李翊)이 아뢰기를,
"근래 장오법(贓汚法)이 엄하지 못한 관계로 선조(先朝) 때 유배시키면서 끝내 배소(配所)에서 죽도록 한 자까지도 석방되었으니, 일이 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구를 말하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심총(沈棇)을 가리켜서 말한 것인데 일찍이 선조 때에 그런 분부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 때 그런 분부를 받았었다면 심총을 배소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정유성이 아뢰기를,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으로는 검약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삼가 듣건대, 국혼(國婚) 때 진주(眞珠)로 만든 부채가 있었는데 그 값으로 백금(白金) 1천 냥을 소비했다고 합니다. 비록 전례가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이렇듯 크게 기근을 당한 해에는 변혁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이 일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 뒤로는 그런 폐단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부채 하나에 천금(千金)을 허비하다니 그대로 놔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 부채를 환수하여 호조에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지금에 와서 처음으로 한 일이라면 개혁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이 선조(先朝) 때부터 줄곧 행해 온 일인 이상 섣불리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여러 곳의 염분(鹽盆)·어전(漁箭)이 크게 민간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데 모조리 혁파하여 곤궁한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한다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오래 전부터 해 온 것이니,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였다.

 

온성 부사(穩城府使) 유시정(柳時楨)이 회령(會寧)의 개시(開市)002)  를 감독하는 차사원(差使員)이 되었다. 이때 도감(都監)의 관원으로 엄복기(嚴復起)란 자가 있었는데, 호어(胡語)를 잘할 뿐 아니라 기질도 상당하여 호인(胡人)들과 극력 다투어가면서 주선한 공로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시정이 호인들의 노여움을 촉발시킬까 두려워하여 그를 책망하고 내쫓았는데, 그 결과 호인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탐욕스럽게 굴었다. 이에 북병사(北兵使) 정부현(鄭傅賢)이 내용을 갖추어 감사에게 보고하였는데, 감사가 조정에 치계하니, 유시정을 나문(拿問)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회령 부사(會寧府使) 유여량(柳汝𣛀)의 죄도 시정과 똑같았으나, 감사가 ‘회령부에 화재가 발생해 기계 등 기타 수요품을 마련하는 일이 급하다’는 이유로 결장(決杖)한 뒤 우선 그대로 재직시킬 것을 청하여, 조정이 따랐는데, 뒤에는 모두 죄를 받았다.

 

호서(湖西) 음성현(陰城縣)에 전패(殿牌)003)  를 도난당한 변고가 일어났다. 이런 일은 간인(奸人)들이 개인 감정을 풀기 위해 종종 저지르곤 하는데, 세도(世道)가 이토록까지 타락하다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다.

 

접위관(接慰官) 윤석(尹晳)이 ‘왜차(倭差)가 떠나지 않고 지체하면서 기필코 관(館)을 옮기게끔 하려 한다.’고 치계하였는데, 시종일관 그의 요구를 거부해 막으라는 뜻으로 조정이 유시하였다.

 

1월 6일 경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호서(湖西) 회인현(懷仁縣)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감사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1월 8일 임오

윤강(尹絳)을 판의금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민여로(閔汝老)를 정언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1월 9일 계미

상이 자정전(資政殿)의 상참(常參)에 나아갔다. 예(禮)가 끝나자 옥당과 간관이 전(殿)에 올라가 일을 아뢰었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경기 여주(驪州)에 지진의 변고가 있었는데도 도신(道臣)이 즉각 계문(啓聞)하지 않았으니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감사 정지화(鄭知和)를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교리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흉년에 금주(禁酒)하는 것은 응당 행해야 할 일로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어공(御供)도 감하는 판인데 다른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일체 통렬히 금하게 하소서. 그리고 외방에 전염병이 점점 만연되고 있으니,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각도(各道)에서 여제(厲祭)를 거행케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이민서(李敏叙)가 다시 염분(鹽盆)·어전(漁箭)을 혁파하도록 청한 내용을 신품(申稟)하였는데, 민정중도 아뢰기를,
"신이 해변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가 해곡(海曲)을 눈으로 확인한 결과 어디고 주인 없는 곳이 없었는데, 모두 궁가(宮家)와 공가(公家)에서 값을 받고 이익을 취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손발을 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1년만 임시로 폐지한다면 그리 심한 손해는 없을 것이고 백성들은 필시 기뻐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혁파하려면 완전히 혁파해야지 단지 1년만 폐지한다면 겉치레에 가깝게 될 것이니 부당하다."
하였다. 우승지 정만화(鄭萬和)가 삭서(朔書)004)  에 대한 상급(賞給)을 줄이고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만 하사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 동안만 상급을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호서 감사(湖西監司) 오정위(吳挺緯)가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인견하고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유시하였다. 정위가 청하기를,
"본도에 있는 내수사·제궁가(諸宮家)·각아문(各衙門)의 염분(塩盆)을 금년 동안만 특별히 이급(移給)토록 허락하신다면 그런 대로 무판(貿販)하여 진구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사(內司)에 소속된 염분과 춘번(春燔)은 진구하는 데 옮겨 쓰도록 하고, 기타의 염분도 비국에 말해 적당히 처리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위가 또 서산(瑞山)과 태안(泰安)의 염(塩)·철(鐵)·목면(木綿)을 진구하는 데 옮겨 쓰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말하여 적절히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심세정(沈世鼎)이 아뢰기를,
"듣건대 송시열(宋時烈)의 온 가족이 기아(饑餓)에 직면하여 심지어는 서책(書冊)을 팔아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들도 진구해 주는 판에 더더구나 이 사람에 대해 어찌 급한 사정을 돌보아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 감사에게 말하여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토록 하라."
하였다.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이 죽었다.

 

1월 10일 갑신

사간 정계주(鄭繼胄)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이행일(李行逸)의 일에 대해서 삼가 통분스럽게 여겨지는 점이 있습니다. 당초 신은 행일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곡절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행일이 명을 기다리고 있을 당시에, 신이 두루 찾아보던 길에 그에게 묻기를 ‘외부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혹 공이 스스로 말하기를 「홍명하(洪命夏)에게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는데, 그러한가?’ 하였더니, 행일이 대답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오가는 말이 그러했기 때문에 당상과 낭청의 관계상 대략 들은 바를 언급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떠도는 말을 들은 것일 뿐, 직접 이지익(李之翼)에게서 들은 말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신에게 묻기를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그저 사실대로만 하면 될 것이다.’ 하였더니, 행일이 잘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신에게 말한 것과는 전연 같지 않으니, 말을 바꿔 무함한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장관(長官)을 모함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하를 기망(欺罔)한 죄에 관련되니, 유배보내는 형벌을 시행하여 통렬히 끊어버리는 뜻을 보여야 마땅한데, 어떻게 태연히 도성 밖에서 안식을 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그의 말을 직접 들은데다가 또 언지(言地)에 몸을 담고 있는데도, 사세상 불편한 점이 있고 질병에 걸려 공무를 집행하기가 정말 어려웠던 관계로, 사실에 입각하여 논계함으로써 그 죄를 바로잡지 못했으니, 잘못이 또한 큽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전일 등대(登對)했을 때, 이행일의 일을 함부로 진달드린 적이 있었는데, 성상께서 제신(諸臣)에게 자문을 구하신 뒤 참작하여 처치하셨습니다. 그런데 금방 정계주가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행일이 상관을 무함하고 전하를 기망한 정상을 낱낱이 진달드리면서 조가(朝家)에서 그에게 시행한 벌이 너무 가볍다고 하였으니, 신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행일이 앞뒤로 말을 바꿔가며 음험하고 교활하게 마음을 쓴 것에 대해서는 신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가 말을 바꿔 모함하며 속이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모두가 죽을까 두려워서 겁먹은 나머지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정상을 가지고 말한다면 유배보내는 것도 가볍겠지만 대체를 가지고 논한다면 꼭 끝까지 다스릴 필요는 없겠기에, 의논하여 답변드릴 때 다시 논집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료가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법을 집행하자는 논을 펼치고 있으니, 신이 가벼운 쪽으로 벌을 주도록 청하는 의논을 섣불리 내놓은 잘못이 실제로 있습니다.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나라안에서 술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월 11일 을유

장령 정륜(鄭錀), 지평 여성제(呂聖齊)가 처치하여 정계주(鄭繼胄)를 체차시키고 민정중(閔鼎重)을 출사시켰는데, 계주는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륜 등이 이어 이행일(李行逸)의 죄를 논하면서 먼 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하고, 또 논하기를,
"홍명하(洪命夏)는 대관(大官)이 된 몸으로 말을 삼가지 않아 하급 관원에게 무함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일을 자초하여 사체(事體)를 손상시켰으니,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중외(中外)에 내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도록 유시하였다.

 

1월 12일 병술

이행일을 선천(宣川)에 유배보냈다.

 

교리 김만균(金萬均)을 전남도에 보내 여제(厲祭)를 행하게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용동궁(龍洞宮)에서 절수(折受)005)  한 회양(淮陽) 1개 면(面)의 산전(山田) 가운데 주민의 전지(田地)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호조가 복계(覆啓)하여 본래 주인에게 돌려 줄 것을 청했었는데, 상께서 양안(量案)006)  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판부(判付)하였으므로, 계묘년에 타량(打量)007)  한 이후의 가경전(加耕田)은 모조리 절수해 주는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가경전이라고는 하나, 주민이 농사지어 먹고 산 지가 이미 60년이 넘었고 또 이를 이유로 부세(賦稅)를 거두어들이고 있고 보면, 원전(元田)과 사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잃어버려 주민이 생업을 잃게 되었으니, 결코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못됩니다. 그리고 차인(差人) 이경남(李景男)이 규정 외로 마구 거둬들이기 때문에 백성들 모두가 괴로워하며 원망하고 있는데, 이렇듯 참혹한 흉년을 당한 때에 이런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니, 절수한 전지를 혁파하고, 경남은 해조로 하여금 가두어 다스리게 함으로써 뒤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경남을 가두고 다스리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월 16일 경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재생(裁省)할 것에 관련된 문서를 가지고 무릎 꿇고 올리며 아뢰기를,
"신들이 대략 의논해 정했는데, 삼가 상께서 재결(裁決)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미 충분히 강구했을 텐데 무슨 미진한 점이 있겠는가.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감생(減省)과 관련되는 일은 일체 남한 산성에서 막 나와서 했던 대로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 지방에서 달마다 진상(進上)하는 것 중에도 긴요치 않은 것이 있기에 감히 품처(稟處)합니다."
하면서, 이어 기록한 종이 한 장을 바치니, 상이 어떤 것은 없애고 어떤 것은 감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기인(其人)008)  의 공물(貢物)이야말로 가장 큰일인데, 1인당 1년의 공물가(貢物價)가 무려 1백 20필(匹)이나 됩니다."
하고,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내간(內間)의 방구들에 대해서는 외부 사람들이 감히 알 수 있는 성질이 못 되니, 상께서 그 숫자를 적당히 감하신다면 어찌 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기록한 것을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옛적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절용(節用)을 힘써 내간(內間)의 온돌방이 몇 개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판방(板房)이었다고 하는데, 고로(故老)들이 이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공조가 초기(草記)를 올리자 원자(元子)의 방 하나를 줄이라고 분부하셨는데, 이 역시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원자가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일마다 절약하는 정신을 보여 준다면 비용만 감축될 뿐 아니라 복(福)을 아껴주는 길도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고, 이에 방 하나를 더 줄이도록 명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이곳의 샘물이 매우 좋지 않으니 오래 계시기에 불편합니다. 거처를 옮기는 일을 대신에게 자문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래 봄철쯤에 거처를 옮기려고 했다마는, 2월 안으로 결행해야 하겠다. 그러나 일체의 잡물(雜物)을 외방에서 거두면 안 될 것이니, 호조에서 요리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석이 구마(廐馬)를 줄여 비용을 감축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줄이는 것이야 뭐가 어렵겠는가. 하지만 만약 뜻밖에 써야 할 경우를 상정한다면 너무 줄이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요(料)009)  를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영장(營將)을 줄이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설립한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이런 때에는 더더욱 폐지할 수 없다."
하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흥평위(興平尉)와 공주가 대궐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이런 때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백성을 돌보는 도리에 어긋나니, 잠시 추수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토목공사를 정지시키려 하자니 민가를 빌려 들어가야 할 형편인데, 이 또한 불편한 일이다."
하였다. 호판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우선 민가를 빌린다고 해도 토목공사를 벌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가지 방도 중에서 편한 쪽으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이토록 흉년이 들어 어공(御供)까지 이미 감했는데, 신료들이 옛날 그대로 녹봉을 받는 것은 미안한 일입니다. 백관에게 주는 녹봉을 지금부터는 삭료(朔料)010)  로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관의 녹봉을 그동안 감하고 또 감했는데, 지금 또 감한다면 어떻게 염치있는 행동을 요구하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병판이 인혐(引嫌)하고 들어간 관계로 녹정(祿政)011)  하는 일이 기한을 넘기게 되었으니, 참판을 차출하여 구례(舊例)에 따라 녹정을 열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양남(兩南)에 기근이 들어 백성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만약 본도의 전세(田稅)를 모두 서울로 운송한다면 진구할 방책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대로 본도에 놔두어 진구할 자료로 쓰게 하는 것만 못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진휼청 당상의 생각은 양남의 전세를 완전히 면제시켜 진구용으로 쓰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경비를 전적으로 전세에 의지하고 있는데, 경비를 대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지탱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남우도(湖南右道)에서 전세를 거두는 것이 부당하다 하더라도 완전히 면제해주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니, 곡식이 익은 전결(田結)에서 세금을 거두어 그것을 진구용으로 쓰도록 하라. 그리고 좌도(左道)는 반절만 거두기도 하고 전량(全量)을 거두기도 하되 잘 헤아려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복양이 진휼 어사를 별도로 삼남(三南)에 파견할 것을 청하니, 태화도 이에 찬성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엄밀히 가려 차출하되 먼저 양남(兩南)에 파견하라."
하였다. 복양이 또 조종조의 구전(舊典)대로 다시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고 제도(諸道)를 엄히 단속해 착실히 거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부터 별도로 더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평안도에서 전세(田稅)로 거둬들이는 미곡은 군향미(軍餉米)로 회록(會錄)하는 것이 관례인데, 올해는 세입(稅入)이 대폭 감축되었으므로 앞으로 경비를 계속 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청천강(淸川江) 이남 연해의 3개 현(縣)과 평양(平壤)·중화(中和) 등 8개 읍에서 지난해 전세로 거둔 미곡을 운반해 오도록 해 보충해서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윤강이 아뢰기를,
"신이 금부에 재직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루 모든 일을 제대로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광소(閔光熽)의 원정(元情)과 이지익(李之翼)의 공사(供辭)가 크게 서로 다른데, 판부(判付)하시면서 ‘의논해서 처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하지만 지익이 일단 일을 말한 대관(臺官)이었다는 이유로 특별히 석방된 상황이라서 다시 가둘 수가 없는데, 만약 대질 신문을 벌이지 않으면 의논해 처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니, 대신과 상의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하문하였다. 태화가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미처 말을 하지 못했는데, 두표가 성난 소리로 아뢰기를,
"금부에서 의논해 처리할 공사를 탑전(榻前)에서까지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청한단 말입니까. 이는 성상의 뜻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서 상당히 외람스러운 일입니다. 대신이 아무리 무기력한 존재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따위의 일에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연중(筵中)이 엄하지 못한 소치인데,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일에 대해 삼사(三司)와 승지가 필시 추고하기를 청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빙그레 웃었다. 윤강이 묵묵히 있다가 물러갔다.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함경도의 미곡 1만 5천 석을 강원도에 운반한 뒤, 다시 영남의 영해(寧海)에 수송하여 기민(飢民)을 진휼하였다. 이때 영북(嶺北)만은 조금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곡식을 옮긴 것인데, 백성들이 이 혜택을 상당히 입었다.

 

1월 17일 신묘

판의금 윤강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민광소(閔光熽)와 이지익(李之翼)의 공사(供辭)가 크게 서로 다른 만큼, 옥체(獄體)로 말한다면 면대(面對)시켜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익이 당초 일을 말한 대간이라는 이유로써 구속되었다가 곧바로 석방된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다시 나문(拿問)을 청한다는 것도 감히 하지 못할 점이 있고, 그렇다고 해서 광소를 방송(放送)하도록 곧장 청한다면 잡아들이기를 청했던 대계(臺啓)의 뜻이 전혀 없어지겠기에, 대략 그러한 사정을 진달드리며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시도록 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신이 성난 기색으로 말을 거칠게 하며 ‘전하의 뜻을 시험해 보려 한다’는 등의 말로 마구 죄명(罪名)을 가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신은 이 말을 듣는 동안 놀랍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아무리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좌지우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군부(君父)의 뜻을 탐지하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체가 부당했다고 한다면 신이 감히 여러 말을 하며 따질 수 없겠습니다만, 억울하게 배척을 받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대신의 말 한 마디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하니,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그대로 머물러 있겠습니까. 본직과 겸대직을 개정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경은 안심하고서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부호군 여성제(呂聖齊)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이시고 지기(志氣)가 바야흐로 예리하시니 무기력해지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인데, 결정을 내려주시길 기다리는 사이에 세월이 이미 변해버리고 사기(事機)마저도 잘못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위복(威福)을 내리는 권한이 위에만 있지 않게 되고 덮어 감추는 풍조가 또 아래에서 고질화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조정의 의논마저 방향을 잃은 채 개인적인 이익만 서로 다투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간관(諫官)이 논한 것에 대해 헌관(憲官)이 잘못이라고 논하자 전하께서 헌관이 잘못되었다고 논한 것을 이미 옳다고 인정해 놓고는, 헌관이 잘못되었다고 논한 것에 대해 옥당이 옳다고 주장하자 이번에는 또 전하께서 옳다고 한 주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어찌하여 성상께서는 마음 속으로 일정한 주견(主見)을 갖지 못하신 채 옳다고 하면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면 그르다고 하여 꼭 아랫사람들의 견해를 시험해 보려 하신단 말입니까. 그러나 끝에 가서 나오는 결론을 보면 시비를 명확히 가린 적이 드무니, 이런 식으로 시비를 가린다면 무슨 일을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내사(內司)에 관계되거나 궁가(宮家)에 관계되기만 하면 대단치 않은 일이라도 너무 노골적으로 성색(聲色)에 드러내시는데, 겉으로는 관대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인색한 것이 전하께서 사(私)를 제거하지 못한 점이라 할 것입니다. 비록 한 무제(漢武帝)처럼 내심은 탐욕스럽다는 비난[內多之譏]012)  을 받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선공 후사(先公後私)해야 한다는 옛사람의 경계만은 새기셔야 할 점이 없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1월 20일 갑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삼가 전라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장계로 보고드린 내용을 보건대, 도내 사찰의 불상(佛像)에서 땀이 흘렀다고 하며 변이(變異)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하였으므로 신은 통분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정도(正道)가 쇠퇴해지고 이교(異敎)가 흥행되면서부터 일하기 싫어하는 백성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고 있는데, 게다가 와언까지 지어내 전파시키는 등 못하는 짓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리하여 겨울과 봄 사이에 쇠와 흙으로 된 불상 위에 축축하게 응결된 것을 가지고 땀이 흘렀다고 하면서 백성을 현혹시키고 민심을 동요케 하니, 그 자취가 너무도 흉칙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따라서 도신(道臣)이 된 입장에서는 법에 의거해 정죄(定罪)함으로써 요사스러운 말을 종식시켜야 마땅한데 태연이 승도(僧徒)가 터무니없이 지어낸 이야기를 졸지에 듣고는 그만 의혹된 나머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장계로 보고드리기까지 하였으니, 너무나도 식견이 없다 하겠습니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분명히 지휘하도록 하시고, 태연은 중하게 추고할 것이며, 이른바 땀이 흘렀다는 불상은 일일이 깨뜨려 부수고, 말을 지어낸 승도는 국법(國法)으로 다스림으로써, 이류(異類)가 방자하게 굴며 와언으로 동요시키는 화를 영구히 막아버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에 계하(啓下)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사기(辭氣)가 삼엄하고 논의가 격렬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변이(變異)와 관계되는 일이면 도신이 치계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니, 이태연을 추고해야 할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승려들이 본관(本官)에 보고해 알린 것의 경우, 그네들의 의도가 실제로 와언을 지어내어 전파시킴으로써 백성들을 현혹시키려는 데 있었다면 국법으로 다스려도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마는, 허실(虛實)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먼저 중법(重法)을 적용하게 되면, 앞으로 보고해야 할 재이(災異)가 발생해도 서로들 조심하며 숨기게 될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불상에서 땀이 흐른 변고가 한두 번 발생한 것이 아니었지만, 불상을 깨뜨려 부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재이를 막고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리가 불상을 부수건 그냥 놔두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고 보면, 지금의 사태는 옛날 불상을 물에 던지고 불에 태운 일이나 불두(佛頭)를 가져왔던 때와는 역시 사정이 같지 않을 듯한데, 꼭 불상을 부수어야 되는 것인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간신(諫臣)이 논한 것을 신조(臣曹)에서 감히 멋대로 할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1월 21일 을미

정양(鄭瀁)·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이준한(李俊漢)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이연년(李延年)을 수찬으로 삼았다.

 

1월 23일 정유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조복양(趙復陽)과 유계(兪棨)가 호남의 전세(田稅)를 서울로 운반해오지 말고 기민(飢民)을 진휼하도록 청하고, 정치화(鄭致和)는 미곡을 운반해 와 경비를 보충할 것을 청하니, 상이 재해를 입은 19개 고을은 전액 감면해 주고 나머지는 모두 경창(京倉)에 운송해 들이도록 명하였다. 사간 이만영(李晩榮)이 아뢰기를,
"호남에서 기인목(其人木)013)  을 곡식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긴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 초에 행회(行會)했었는데 해가 바뀌어도 감감 무소식이니 해도 감사가 너무나도 태만하다 하겠습니다. 해당 감영의 관리를 우선 경옥(京獄)으로 잡아들여 중하게 죄를 매기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교리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땀을 흘렸다는 불상을 깨뜨려 부수라는 일로 상차하였는데, 성상께서 비답하시며 ‘깨뜨려 부술 필요까지는 없다.’고 분부하셨으므로, 신은 삼가 의혹됩니다.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의 여부를 우선 꼭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과장되게 선전하여 이를 기화로 터무니없이 꾸며댈 조짐이 앞으로 염려되므로, 반드시 통렬하게 물리쳐야만 인심을 진정시키고 뒤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꼭 깨뜨려 부수려고 하면 동요될 듯하니 차라리 묻지 않고 놔두는 것이 나으리라고 여겨진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신이 영부사 이경석(李景奭)과 이야기하다가 이 일을 언급하였는데, 그도 말하기를 ‘대 성인께서 포용하고 진정시키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땀이 흘렀다는 이야기가 아무리 괴탄(怪誕)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더욱 더 수성(修省)하면 그만이지 어찌 불상을 깨뜨려 부수기까지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지난 기해년에도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고 계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송시열과 송준길 두 신하가 ‘방백이 꼭 계문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였으며, 깨뜨려 부셔야 한다는 의논은 역시 없었습니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천재(天災)가 겹쳐 일어나고 기근이 거듭 닥치는 상황인 만큼, 공구(恐懼)하고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행여 이를 심상한 글로 보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수성에 관한 말을 진부한 이야기로 여기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좋다."
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이 호남(湖南)의 전세(田稅)를 호서(湖西)의 예에 따라 10두(斗)당 3 두를 감해 줄 것을 청하니, 따랐다. 유계가 아뢰기를,
"일찍이 도신(道臣)의 계문에 따라 호우(湖右) 지방에 대해 경자년의 전세(田稅)를 추수 때까지 기한을 물려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축년의 흉년든 상황이 경자년보다 더 심하였는데, 물려서 징수하기로 된 전세와 당년(當年)의 전세를 한꺼번에 독촉하여 징수한다면,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백성들로서는 더욱 마련해 낼 길이 없을 것이니, 변통해 주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복양이 아뢰기를,
"새 곡식이 익은 뒤에는 필시 바치기 어려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정치화(鄭致和)는 아뢰기를,
"추수는 으레 겨울 초에 끝나므로, 얼어붙기 전에 상납(上納)하기는 사세상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절반은 올봄에 상납토록 하고, 절반은 추수할 때까지 기한을 물려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제언사(堤堰司)를 다시 설치하기로 이미 의논해 정했는데, 상고할 만한 구례(舊例)가 없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였는데, 태화가 아뢰기를,
"근거할 만한 전례(前例)가 없다면, 우선 호조 판서와 진휼청 당상이 서로들 구관(勾管)토록 하고, 낭청(郞廳)도 호조의 낭관으로 임명하여 아울러 살피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이번에 거처를 옮기실 때 수리하는 등의 일을 가능한 한 간략하게 하도록 하신 성상의 분부야말로 정녕하였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내전(內殿)에 깔고 도배하는 물건들을 옛날 것 그대로 사용해도 되는데 모두 새것으로 바꾸려 한다 합니다. 이 말이 과연 사실이라면 비용을 아끼려는 성상의 훌륭하신 뜻이 도리어 겉치레가 되는 결과로 돌아갈 것이니, 다시 더 단속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훌륭하다. 어찌 마음에 새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공조가 첩선(貼扇)을 진상하기 위해 장인(匠人)을 호남에 내려보내 만들어 가지고 오게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언급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本道)에서 단오선(端午扇)을 봉진(封進)할 때 같이 봉진토록 하라."
하였다.

 

1월 25일 기해

민여로(閔汝老)를 헌납으로, 이무(李堥)를 정언으로 삼았다.

 

1월 26일 경자

헌부가 아뢰기를,
"어제 간관이 아뢴 데 따라 영리(營吏)를 나추(拿推)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사에게 죄가 있고 보면 그의 죄를 곧바로 논하는 것이 사체상 당연한데, 영리에게까지 나문(拿問)하라는 명이 미쳤으니, 국가의 거조가 이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해도 감사를 중하게 추고하고 영리는 나문하지 말게 함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27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이만영(李晩榮)이 영리를 나추하라고 경솔하게 진달드렸다가 헌부의 비난과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구차하게 일을 논했다는 이유로 그의 체직을 청하고, 또 진휼 어사로 하여금 원옥(冤獄)을 너그럽게 처결케 하는 동시에 인재를 찾게 할 것을 청하니, 모두 따랐다.

 

1월 28일 임인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죽었다.
삼가 살피건대, 지원은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그뒤 병자 호란 때 미처 어가를 수행하지 못해 유배를 당했다가 석방된 뒤로 주군(州郡)이나 맡으며 초라하게 지냈는데, 그의 아들 심익현(沈益顯)이 부마(駙馬)가 되면서부터 다시 기세를 떨쳐 마침내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일 처리를 우물쭈물하고 자리만 지킨다는 비난이 있긴 하였으나, 경박한 논의를 좋아하지 않았고 전형(銓衡)의 책임자로 있으면서도 뇌물과 관련된 소문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꽤 칭찬하였다.

 

1월 30일 갑진

장령 정양(鄭瀁)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현기증이 있어 오로지 술을 마셔야만 기력이 회복되는 관계로 보통 때에도 얼굴이 붉어 보는 이들이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한창 금주법(禁酒法)을 시행하여 향온(香醞)마저 폐지하게 된 이때에 금법을 이미 범했으니, 어떻게 감히 하루라도 대간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직명(職名)을 삭제해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양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처치하기를,
"전에 조금 마셨다 하더라도 오늘 조심하면 되는 것이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러나 정양이 패(牌)로 불러도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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