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병오
민응형(閔應亨)을 우참찬으로, 허적(許積)을 판중추로, 성태구(成台耉)를 사간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교리 민유중이 지난번 경연 석상에서 계달하기를 ‘남해(南海) 노량(露梁)은 곧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순절(殉節)한 곳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세웠던 사우(祠宇)가 좁고 퇴락하였으므로 정익(鄭榏)이 통제사로 있을 때 새로 개축하였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묘액(廟額)을 내려 절의를 높이고 후인을 권장하는 발판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께서 이미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셨습니다. 액호(額號)와 교서(敎書)를 예문관으로 하여금 속히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3일 정미
상이 안질 때문에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양남(兩南)의 진휼 어사 남구만(南九萬)과 이숙(李䎘)이 하직 인사를 드리니 인견하였다. 상이 앞으로 불러 하교하기를,
"그대들이 명을 받고 내려가는데, 소회(所懷)가 있는가?"
하니, 구만이 대답하기를,
"일단 사목(事目)이 있으니 삼가 그대로 행하겠습니다만, 별도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또한 치계(馳啓)하여 품처(稟處)해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백성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떻게 품처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한편으론 치계하고 한편으론 조치하여 혹시라도 제때에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신들이 직접 명령을 받은 이상 어찌 감히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아뢴 일이 정체되어 행하지 못하게 될 경우, 신이 죄를 받는 것이야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낙심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대로 선처만 하면 어찌 믿음을 잃게 되기까지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숙이 아뢰기를,
"일단 진구한다는 이름으로 어사가 나가는 이상 말[馬]을 부여잡고 먹여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필시 무수하리라고 여겨지는데, 곡식을 얻을 계책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신이 공천(公賤)의 속량(贖良)을 허락하는 일을 가지고 대신들과 의논했더니 모두들 어려운 일로 여겼습니다만, 만약 면천(免賤)을 허락해 준다면 기꺼이 따르는 자가 분명히 많을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우상에게 하문하기를,
"이 일이 어떠한가?"
하자,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정축년 이후로는 이런 길을 한번도 열어준 적이 없으므로 신이 감히 독단(獨斷)할 수 없습니다. 물러가 여러 신료와 상의해서 품달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도 면천한 일이 있었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병란이 끝난 뒤인 계묘년014) 과 갑진년에 이런 일을 행하긴 하였습니다만, 미곡 50∼60석을 받은 뒤에야 허락했었습니다. 이번에 어쩔 수 없이 면천해 주어야 한다면 이 규례에 따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신이 바로 조금 전에 영상과 상의했는데, 그는 상당히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은 어디 있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현재 문안하는 반열에 나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영상을 불러오게 한 뒤, 이어 영상에게 하문하기를,
"미곡을 받고 공천(公賤)을 면천해 주는 일에 관해 이숙이 언급했는데, 경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에는 본래부터 이 일이 타당치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전일 서필원(徐必遠)이 이 일을 계청했을 때도 신이 안 된다고 하여 한두 사람만 속량(贖良)시키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옛날 임진 왜란 후에 이 길이 처음 열렸습니다만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랬던 것이니, 지금 꼭 잘못을 답습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미리서 꼭 그런 길을 열어 줄 것은 없겠지만, 어사가 내려간 뒤에 만약 미곡을 바치겠다고 자원하는 자가 있으면, 어사가 치계하여 품달하도록 해서 처치할 여지를 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올해는 곡식 농사를 망친 것이 너무 심하여 받아들인 환자곡이 매우 부실하여 한 섬의 벼에서 겨우 두세 말의 쌀이 나온다고 합니다. 나누어 지급할 때에 이것을 착실한 곡식에 섞는다면, 기근을 구제하기 힘들 텐데,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영상과 우상이 아뢰기를,
"이 말이 정말 옳습니다. 심지어는 2석(石)을 합쳐 1석으로 하고 있으니,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적곡(糴穀) 납입 실적이 더욱 형편없이 부실한 고을은 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수령은 어사가 잡아들여 결장(決杖)하거나 파출(罷黜)하고, 색리(色吏)는 형추(刑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대로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수령이 곤장을 맞은 뒤에는 그 직책에 그대로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이 점도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곤장을 맞은 뒤에는 으레 관직을 버리는 자가 많이 나오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을 염려하여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신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때 또한 이 벌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이 법을 제대로 시행하는 감사가 대체로 드무니, 날로 기강이 무너지는 것을 점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멋대로 관직을 포기하는 자는 등급을 올려 죄를 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4일 무신
음성현(陰城縣)에서 전패(殿牌)를 도난당했다고 감사가 계문하였는데,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그 읍만 혁파하고 수령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 간악한 백성이 계획적으로 수령을 몰아내는 일을 막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미 이렇게 처리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이 따랐다.
2월 5일 기유
함경 도사(咸鏡都事) 정중휘(鄭重徽)가 낙강(落講)한 교생(校生) 등의 성명을 기록하여 아뢰었는데, 계본(啓本) 가운데 한 줄을 칼로 긁어낸 자국이 있었다. 이에 정원이 도사를 추고하기를 청했는데 해조로 하여금 사문(査問)케 한 결과, 도사의 영리(營吏) 박진운(朴振雲)이란 자가 장계를 가지고 있던 색리(色吏)와 함께 낙강한 사람인 이원로(李元老)로부터 뇌물을 받고는 계본을 뜯어 이원로의 이름을 지워버린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런데 엄한 형신(刑訊)에도 자백하지 않더니 원로가 장을 맞고 사실을 털어놓자 진운이 막다른 궁지에 몰려 자복하였다. 이 일을 병조에 내리자, 병조가 진운은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율(律)을 적용하고 원로는 변보(邊堡)에 충군(充軍)시키는 율을 적용해 아뢰었는데, 상이 ‘진운의 범죄 사실은 관문서(官文書)를 증감시킨 조(條)와 군기(軍機)를 그르친 율(律)에 관련된다.’고 하여 참형(斬刑)을 명하였다.
경상 감사 민희(閔熙)가 치계하기를,
"본도에 기근이 든 망극한 정상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게다가 전염병까지 크게 만연되고 있습니다. 이에 신이 각읍(各邑)에 분부하여 기민(飢民)을 정밀하게 추리고 전염병에 관한 사항을 따로 기록해 해가 바뀌기 전에 와서 보고하게 하였는데, 현재 먼저 도착한 33개 고을의 경우 기민의 숫자가 무려 2만 2천 6백 29인에 이르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먼저 보고해 온 26개 고을의 경우 현재 앓고 있는 자가 3천 6백 42인에 죽은 자가 53인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초기인데도 이러하니 앞으로 어떨지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해 본도에 상평청에서 내준 곡식이 1만 석이었는데 올해도 이 숫자만큼 허락해 주시고, 지난해 진휼하다 남은 곡식 3천 5백 15석도 회감(會減)015) 하여 진휼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영북(嶺北)에서 옮겨오는 곡식 1만 5천 석을 반드시 빨리 배로 실어와야만 물이 멀리 있어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하는 것과 같은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비국으로 하여금 해도(該道)에 분부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 계하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상평청에서 지난해 진휼하고 남은 곡식 3천 5백 15석도 아울러 내주어 계속 진휼하게 하고, 올해 내주는 진휼용 곡식도 지난해의 숫자대로 가져다 쓰게 할 것이며, 다시 앞으로의 사태를 보아가며 연속해서 계문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영북의 곡식을 성화(星火) 같이 독촉하여 운반할 일로 함경·강원 양도의 감사에게 행문(行文)하여 신칙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양남(兩南) 재읍(災邑)의 신역(身役)으로서 면포(綿布)를 견감해 주는 등의 대상에 포함된 것들을 보건대, 호남은 3만 7백여 인이고 영남은 1만 6천 9백여 인인데, 통틀어 가포(價布)를 계산하면 감면해 줄 숫자가 2천 2백여 동(同)이나 됩니다. 그러나 해마다 계속 견감해 주어 국가의 비축이 고갈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재원을 마련해 낼 계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조금이나마 참작해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재해가 특히 심한 고을에 사는 주민의 경우, 3필(匹)을 납부해야 할 자는 2필만 감해주고 1 필은 추수한 뒤에 바치도록 할 것이며, 2필을 납부해야 할 자는 1필만 감해주고 추수 때 1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등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경우, 3필을 납부해야 할 자는 1필만 감해주고 2필은 날짜를 미루어주어 바치도록 할 것이며, 2필을 납부해야 할 자는 우선 견감해 주지 말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양남의 감사·병사·수사 및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남 감사가 치계하기를,
"차등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주민으로서 상번(上番)할 군사에 대해서는 모두 포(布)를 거두어 사람을 사서 번을 서게 하도록 허락해 줌으로써 곡식을 싸가지고 떠나 가고 남은 사람은 전송하고 하는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8일 임자
이날 비로소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대사성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김시성(金是聲)을 통제사로, 허적(許積)을 좌참찬으로, 유철(兪㯙)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유심(柳淰)을 좌윤으로, 유혁연(柳赫然)을 병조 참판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삼고, 의관(醫官) 조징규(趙徵奎)를 특별히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전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익형(李益亨), 최정해(崔挺海) 및 겸관(兼官) 전동흘(全東屹)을 장형(杖刑)에 처했다. 이때 잇따라 큰 흉년이 들었는데 조정에서 환적곡(還糴穀)을 기준대로 반드시 받아내도록 하면서 명령을 어긴 자에게는 죄를 부과하였기 때문에 수령들이 고식적으로 죄를 면하기 위해 아직 받지도 않은 것을 받았다고 속여 기록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사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고부군의 경우는 허위로 기록한 것이 더욱 많았기 때문에 수령들이 모두 죄에 저촉된 것이다. 날로 속임수가 늘어가는 것이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부교리 이민적(李敏迪), 수찬 김만기(金萬基)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해서, 때때로 소대(召對)하여 하정(下情)을 통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병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휴가를 얻어 영유현(永柔縣)에 가서 노모에게 문안을 드렸는데, 관서(關西) 지방의 농사가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낫다고는 하나, 현재 민간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세(田稅)를 납부하도록 독촉하고 있으므로, 물정(物情)이 지극히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두(大豆)를 상납(上納)케 한 것은 대체로 호남의 종자(種子)를 그 대신 남겨두려는 목적에서이다. 지금 만약 관서 지방의 대두 8천여 석을 면제해 준다면 호남의 대두를 장차 상납케 해야 할 형편이니, 이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전세로 미곡을 거두는 일에 대해서는 해조로 하여금 품달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듣는 사람의 마음은 본 자보다는 못하기 때문에 늘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곤 하는데, 이 일을 성상께서 결단을 내려 주신다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은 다른 해와 달리 진휼하는 일을 이미 해청(該廳)에 위임했으니, 함께 자세히 의논하여 처리해야만 곡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한 사람이 말로 자세히 표현한다면 듣는 이들도 저절로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만기가 아뢰기를,
"현재 백성의 일이 참혹한데도 구제해 살릴 계책이 없는데, 외방에 있는 유현(儒賢)을 지성으로 초치(招致)한다면, 그런 대로 절반쯤은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별도로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하유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만, 그네들도 출처(出處)에 대한 의리를 알고 있으니, 성실성이 담겨져 있지 않는 한 필시 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방금 전에 외방에서 왔기 때문에 진휼에 관한 시책을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시험삼아 조보(朝報)에 나온 것을 보건대, 백급(白給)016) 하는 수량은 너무 적은 반면 조적곡으로 주는 것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사가 내려가더라도 착실하게 구제하는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급할 물건이 이미 다 되었다면, 아무리 원곡(元穀)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죽는 것을 보기만 하면서 어찌 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호남사격(沙格)017) 의 일은 지극히 원통하게 된 듯합니다. 아무리 살옥(殺獄)이라 하더라도 사간인(事干人)이 먼저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줄곧 형신(刑訊)을 받고 있으니 그대로 죽을 가능성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옥체(獄體)로 볼 때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김만기가 아뢰기를,
"설령 사격에게 숨긴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사죄(死罪)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영남(梁穎南)의 죄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양영남에 관한 공사(公事)는 거두어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당초 이응시 집에 와서 서간을 전할 때에 미곡을 실은 배도 왔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전파되었는데, 이지익(李之翼)이 연소한 대간으로서 감히 발론(發論)하였으므로 신도 훌륭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뒤에 처치한 것이 타당성을 잃어 즉시 이동현(李東顯)을 나문(拿問)하지 않고는 결국 조사하는 일을 중지시켜 버리고 말았는데, 이 점에 대해서 중외(中外)에서 듣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뒤에 지익이 재차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길가에 퍼진 소문을 주워모아 갖가지로 견강부회하면서 성내고 분통을 터뜨리는 내용이 없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허다한 사람들을 침해하였으니, 이 점은 그가 매우 잘못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격(沙格)이 먼저 죽게라도 된다면, 어찌 원통하고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만기가 아뢰기를,
"이 일을 전후에 처치한 것이 모두 타당성을 잃었습니다. 애초에 이동현을 신문하지 않은 것부터가 마땅함을 잃은 것이었는데, 중간에 이지익을 잡아들여 구속시킨 것도 대간을 대우하는 체모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일찍이 이 점을 진달드렸었는데, 지익이 널리 끌어들여 스스로 재판에서 변론하는 것처럼 하면서 성내고 분통을 터뜨리는 말을 많이 한 것도 매우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지익이 증거로 댄 사람들 중에, 최관(崔寬)과 이상고(李尙固)는 ‘일반적으로 떠도는 소문들을 그와 함께 어쩌다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였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가노(家奴)를 몰래 보냈다.’고 한 대목에 대해서 민광소(閔光熽)는 ‘전연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는가 하면, 소위 같이 들었었다고 지익이 주장하는 원두추(元斗樞)조차도 ‘그런 말을 같이 들은 적이 없다.’고 사람에게 말하였으며, 원만춘(元萬春)은 ‘당시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지익의 말이 이처럼 부실한 것은 필시 그가 너무나도 화가 난 나머지 말을 가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것입니다. 지금 처치할 도리를 살펴보건대, 지익에게 잘못이 있긴 하지만 풍문을 잘못 들었던 것으로 돌려버리고 꼭 심각하게 죄를 주지 않는 것이 타당할 듯한데, 옥정(獄情)으로 볼 때에도 더 이상 신문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응하지 않았다.
지중추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선비가 서책을 전매(典賣)하는 일이 본디 늘 있는 일이 아니긴 합니다만, 현재 이것조차도 없어서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개인적인 잗달한 일이 위로 성상에게까지 들려 마침내 급한 사정을 구해주도록 명까지 내리셨으므로 신은 황공하여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심정을 곡진히 살펴주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1일 을묘
상이 경덕궁(慶德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제종실(諸宗室)이 열성(列聖)들의 어필(御筆)을 간행해 올리니, 주간한 사람과 모사인(摹寫人) 모두에게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나머지에게는 유사(有司)로 하여금 숙마(熟馬)를 지급토록 하였다. 처음에는 그 일에 참여한 사람 모두에게 가자하라는 분부를 내렸었는데, 헌부가 너무 외람되다고 논했기 때문에, 이렇게 명한 것이다.
2월 13일 정사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교리 김만균(金萬均)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여제관(厲祭官)으로서 호남 장성(長城) 지역에 다녀 왔었습니다. 장성은 재해 상황이 조금 가벼운 고을이었는데도 몰려온 기민(飢民)들의 형상이 이미 귀신 꼴이라서 제사 일을 거행하는 수령들이 여행 보따리에서 덜어내어 죽을 쑤어 먹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재해를 조금 덜 입은 지역도 이러하니, 특히 심하게 입은 고을이 어떨지는 알 만합니다. 대체로 산간 고을의 경우는 해변 고을에 비해서 조금 낫기는 합니다만 재해를 입은 지역을 가려내어 감세(減稅)해 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산간 고을이라 하더라도 재해를 이미 입은 곳에 대해서는 면세(免稅)해 주도록 사목(事目)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만균이 아뢰기를,
"신은 수령에게서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 사목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니,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요즘 들어 대부분 복심(覆審)018) 이 착실하게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재해 지역과 그렇지 않은 곳이 뒤섞여 감면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견감해 주어야 할 곳에 제대로 견감을 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만균이 그렇게 진달드린 것도 당연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윗사람에게서 덜어내어 아랫사람을 보태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차라리 백성에게 속는 한이 있어도 백성을 속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현재 할 수 있는 데까지 감축한 결과, 승지의 녹봉(祿俸)이 겨우 미곡 4석(石)에 숙속(菽粟)이 각각 2석에 불과하고, 심지어 군관(軍官)과 군인들의 늠료(廩料)까지 너무 심할 정도로 감축하였으니, 또한 딱한 일입니다."
하고, 만균이 아뢰기를,
"적장 충의(嫡長忠義)019) 의 늠료를 감축한 것에 대해서도 매우 원망들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로 격쟁(擊錚)020) 한 충의가 있었으므로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고 하였다. 감축한 녹봉의 원수(元數)는 얼마나 되는가?"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충의위의 녹봉은 4개 등급을 모두 합해서 2천여 석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절반만 감해 주면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공신의 자손들을 염려해주시는 뜻이 매우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일단 감축하도록 했는데 또 다시 변통시킨다면, 일이 매우 전도되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감축하는 과정에서 충의위에게 깎아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백관의 녹봉을 그토록 감축하게 된 것만도 지극히 한심스러운 일로 여겨지는데 충의위의 경우는 일단 군역을 면제받기까지 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받았다 할 것입니다."
하였다. 만균이 아뢰기를,
"인평위(寅平尉)의 묘막(墓幕) 30칸[間]을 지어 주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만, 듣건대 1칸당 경비로 미곡 1석이 소요된다고 하니, 민력(民力)이 지탱해낼까 염려됩니다. 이전에도 추수하기를 기다려 지어 주었던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이 예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일에 어찌 정식(定式)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만포 첨사(滿浦僉使) 김흥운(金興運)을 논하며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태화가 아뢰기를,
"고사(故事)를 보건대, 서로들 피하며 가기 싫어하는 변지(邊地)의 경우, 고을 수령이 죄를 지었을 때는 곧장 견책하며 파직시키기를 청했지, 체차시키는 것만을 청하는 규정은 없었습니다. 도헌(都憲)이 아뢴 것은 고사에 위배됩니다."
하니, 장원이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송시철(宋時喆) 등이 아뢰기를,
"김흥운이 일찍이 서남(西南) 지역의 수령으로 있었을 때 잘 다스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청렴치 못하다는 비난도 많았으므로, 다시 연변(沿邊)의 중진(重鎭)을 맡길 수는 없겠기에 서로들 논계할 것을 의논할 즈음에, 체직시키는 것만을 청하는 것은 헐하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왕에 지은 죄이고 또 도배(徒配)의 형벌을 치렀으니 만큼 지금 다시 그 죄를 거론할 필요는 없겠기에 개차(改差)할 것만을 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장관이 이 때문에 대신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는데, 고사를 전혀 알지 못했던 잘못은 실로 신들도 마찬가지이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김흥운의 범법 행동에 대해서는 이미 벌이 시행된 이상, 그가 부적합하다는 것만을 논할 때는 체직시키기를 청하는 외에 다시 더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만균이 또 아뢰기를,
"이번에 옥당이 진달한 데 따라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하유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진달드린 뜻은 대개 상께서 수교(手敎)하시기를 기대했던 것인데, 단지 정원으로 하여금 관례에 따라 하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유태(李惟泰)에게는 하유하지 않으셨는데, 그에게도 똑같이 하유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시열에게 바로 조금 전에 하유했는데, 형세를 보아가며 다시 하유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수교(手敎)를 내리든 하유를 하든 모두가 임금의 명이다. 가령 시열이 하유에 응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수교를 내린다고 해서 그가 기꺼이 응해 오리라는 보장이 또한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만균이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은, 하유하는 것만으로는 유현(儒賢)을 예우하는 도리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당시 시열에게 빌붙었던 무리들의 논의를 보면 대부분 이런 식이었으니, 만균을 나무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2월 14일 무오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과 복령군(福寧君) 이욱(李栯)에게 소덕 대부(昭德大夫)를 가자(加資)하고,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와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에게 숭헌 대부(崇憲大夫)를 가자하고, 낭원정(朗原正) 이간(李偘)에게 정의 대부(正義大夫)를 가자하고, 화창 부정(花昌副正) 이윤(李沇)과 해양정(海陽正) 이희(李僖)와 화선 부정(花善副正) 이양(李湸)에게 명선 대부(明善大夫)를 가자하도록 명했는데, 열성(列聖)들의 어필(御筆)을 간행하는 작업에서 주간(主幹)하고 모사한 데 따른 상전(賞典)이었다.
풍덕(豊德) 땅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
2월 15일 기미
헌부가 논하기를,
"인평위(寅平尉)의 상에 묘막(墓幕)을 조성해주는 일은 흉년에 민력(民力)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역군(役軍) 3백 명을 1개월간 부역시키는 것은 너무 외람되니, 그 숫자를 헤아려 줄이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뒤에 누차 아룀에 따라 묘막을 조성하는 일은 덕은 부인(德恩夫人)의 예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였다.
서필원(徐必遠)을 대사간으로,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정계주(鄭繼胄)을 사간으로 삼았다.
2월 17일 신유
호남 진휼 어사 이숙(李䎘)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일 도내(道內)의 굶주리거나 병들어 죽은 숫자에 대해서 도신(道臣)이 이미 계문(啓聞)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각 고을에서 보고해 온 바에 따르면, 아사(餓死)한 자가 1백 42인,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가 9백 98인, 현재 앓고 있는 자가 6천 1백 47인이나 됩니다. 초봄에 사망한 자가 벌써 이토록 많으니, 장래의 일을 알 만합니다."
하고, 청하기를,
"순천(順天) 등 8개 고을에서 납부해야 할 미두(米斗) 가운데 3분의 1을 정조(正租)021) 로 대신 납부하게 하여 올해의 종자(種子)를 삼게 하고, 가을철에 본색(本色) 미두로 상환케 하소서. 그리고 재읍(災邑)의 전세(田稅) 4천 석(石)을 받아들여 본도(本道)에 놔두었다가 진휼할 자료로 보충해 쓰도록 조가(朝家)에서 이미 허락했습니다다만, 이 역시 견감토록 허락하시어 죽어가는 기민(飢民)들을 위로하소서."
하니, 진휼청에 계하하였다. 진휼청이 회계하기를,
"전세(田稅)야 말로 유정지공(惟正之供)022) 입니다. 따라서 각 고을에서 이미 전액을 받아 놓고서 조정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어사가 8개 읍의 미두(米斗)를 바꿔 종자곡(種子穀)으로 삼게 하려 하면서 재읍(災邑)의 전세 4천 석까지 아울러 견감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수령들이 지금껏 전세를 바치지 않고 있는 작태가, 정말 경악스러운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꺼번에 논죄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감사가 일찍이 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또한 놀랍기 그지없으니, 그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그리고 재읍의 전세 4천 석은 정조(正租)로 바꿔 납부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18일 임술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대사간 서필원(徐必遠)과 장령 송시철(宋時喆)이 서로 잇따라 논계하면서 능(陵)에 행행(幸行)하기로 한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이민적(李敏迪)과 수찬 이익(李翊)이 나아가 아뢰기를,
"옛날 군대가 패했을 때에는 국군(國君)이 소복(素服) 차림을 했던 일도 있었는데, 지금 이토록 백성들이 크게 죽어 넘어지고 있는 때에 평상시처럼 행동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과거 선조(先朝) 때에 능에 행행하시려 하자 양사(兩司)가 쟁집(爭執)했는데도 허락하지 않으시다가 칙사(勅使)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중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대체로 백성의 일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백성의 일이 참혹하게 된 것으로 말하면 그때보다 10배는 더 되니, 능에 가시는 일을 중지함으로써 행동을 삼가하는 도리를 간직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2월 19일 계해
대사간 서필원(徐必遠), 헌납 김만기(金萬基), 정언 박세당(朴世堂)이 아뢰기를,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를 방방(放榜)023) 한 뒤 3일 동안 유가(遊街)024) 하고 문희연(聞喜宴)025) 을 베푸는 것은 곧 평상시에 해 오던 일입니다만, 이렇게 엄청난 흉년을 당한 때에 관례대로 따를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유가하는 일이야 갑자기 그만두게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창기(唱妓)에게 풍악을 잡히거나 연회를 베푸는 일 따위는 일체 금단하여 재난을 걱정하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예교(禮敎)를 해치는 폐습은 통렬하게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자(士子)가 새로 대과와 소과에 합격하면 사관(四館)에서 그들을 신래(新來)라고 지목합니다. 그리하여 방방하기 전에는 사관에 일정별로 행하는 규례를 두고, 분관(分館)026) 한 뒤에는 회자(回刺)027) 면신(免新)028) 하는 일을 행하게 하는데, 갓을 찌그러뜨리고 옷을 찢는 등 위의(威儀)를 형편없이 만들게 하면서 못할 짓 없이 갖가지로 골탕을 먹이고 곤욕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치지 않고 관례대로 행하고 있는데 정말 너무나도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선조조(宣祖朝)에 금지시켜 고치라는 명령까지 있었는데, 지금껏 이 폐단이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다시 밝혀 통렬히 개혁하소서."
하니, 따랐다.
경상 감사 민희(閔熙)가 치계하였는데, 본도의 기민(飢民)이 전후로 도합 8만 2천 2백 53인, 전염병 환자가 1만 2천 7백 10인, 사망자가 2백 97인이라고 하였다.
2월 22일 병인
형조 판서 여이재(呂爾載)를 잡아들여 구속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하였다. 이에 앞서 대사간 서필원(徐必遠) 등이 논하기를,
"지관(地官) 조양(趙湸)이 합덕(合德)의 방죽 막은 곳을 불법으로 경작하다가 발각되자 중죄(重罪)를 입게 될까 두려워하여 같이 그 일을 한 무리들을 협박하여 인정(人情)029) 용으로 포목을 거두어들인 뒤 서울로 실어 왔습니다. 그런데 조양이 평소 사부(士夫)와 많이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청탁을 해서 징속(徵贖)030) 하는 기한을 늦춘 뒤 거두어들인 목화(木貨)를 모조리 착복하고는 옛날에 하던 대로 계속 불법으로 경작했는데, 이에 대신(臺臣)이 분개하고 미워하여 일찍이 논계했었습니다.
그런데 형부(刑部)가 사실대로 조사하여 다스리지 않고는 같이 일에 참여한 상한(常漢)만 죄를 주고 조양은 곧바로 놓아 주었으며, 게다가 대질 신문할 때 오고 간 긴요한 이야기들도 해조가 다시 뽑아내 버렸으니, 사정(私情)을 따른 자취가 현저하게 드러났습니다. 판서와 색낭청(色郞廳)은 모두 파직시키고, 뇌물을 받은 영리(營吏)와 본읍의 해리(該吏)는 모두 경옥(京獄)으로 잡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대질 신문할 때 오간 중요한 말들을 공공연히 뽑아내 버리다니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이런 습관은 막지 않을 수 없으니, 형조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나문(拿問)하여 중하게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중요한 말을 뽑아내 버렸다는 것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지면서 여이재가 직책을 그대로 띠고 석방되자, 서필원 등이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정언 이무(李堥)가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전남도 임피(臨陂)에 지진이 일어났다.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남(兩南)에 전염병이 날로 치성해지고 있으니, 영남도 호남에서 했던 것처럼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여제(厲祭)를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들을 착실하게 거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호남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호남과 영남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하게 재해를 입었는가?"
하니,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호남의 연해(沿海) 지방은 영남보다 심합니다마는 도(道) 전체가 흉년이 든 것은 오로지 영남이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호남 감사 이태연(李泰淵)에 대해 저번에 등대(登對)했을 때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체차시켜 바꾼다면 폐단이 적지 않을까 염려되니, 우선은 그냥 놔두고 공을 세우게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육경(六卿)에 결원이 생겼는데도 의망(擬望)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정2품의 숫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과거 선조조(宣祖朝) 때에는 인재를 선발할 때 연소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높은 반열에 두었었는데, 지금도 관례에만 얽매어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양현망(楊顯望)이 옳게 붙인 피봉(皮封)이 최담(崔湛)의 피봉에 잘못 합쳐진 것은 봉미관(封彌官)에게 죄가 있지 현망에게는 있지 않은 만큼 그의 입격(入格)을 허락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뒤폐단이 있을까 염려되어 감히 곧바로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달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이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 이동현(李東顯)을 곧장 형추(刑推)하게 하는 것은 옥(獄)을 다스리는 체례(體例)에 위배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일상(李一相)이 이 일에 관련된 전말을 신이 대략 아뢸까 합니다. 당초 수영(水營)의 색리(色吏)가 동현의 서간을 일상에게 전했을 때, 일상이 ‘나는 배를 사려고 청탁한 일이 없다.’ 하고 그 서간을 거부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색리가 이응시에게 가서 전했는데, 응시도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며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상의 집에 가니 일상이 또 거절하였습니다. 일상이 일찍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신에게 해 주었는데, 신도 그때 그 일과 관련하여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중간에 떠도는 소문이 매우 요란하기도 합니다만, 그의 본 마음을 따져 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상이 과연 개인적으로 청탁한 일이 있었다면, 그 서간을 물리쳐 다른 사람이 보게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응시의 소장을 보아도 그 속에 ‘먼저 일상에게 전했다가 그 다음에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고 하였는데, 응시가 사정(私情)을 두어 기망할 리는 절대로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공증(公證)이라 할 것입니다. 허적(許積)은 응시와 친하기 때문에 그 곡절을 상세히 들었을 텐데, 허적이 지금 이곳에 있으니 하문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응시가 생존해 있을 때 신이 본디 그와 친했기 때문에 서간을 전해 왔을 당시의 곡절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응시가 서간을 물리치고 받지 않자, 색리가 문밖에서 서성이며 떠나지 않고 말하기를 ‘관동(館洞) 이 참판(李參判)이 이 서간을 받지 않기에 여기에 와서 전한 것인데, 여기서도 받지 않으니 어디로 가서 전해야 하는가.’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서간 속에 ‘전복 한 꾸러미’ 외에는 실제로 다른 물건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양현망(楊顯望)의 일을 해조에서 품처(稟處)토록 하라고 분부하셨는데, 판서는 공무 집행이 불가능한 상태이고 참의는 체직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소신이 혼자 담당하여 회계(回啓)한다는 것도 타당치 못하니, 탑전(榻前)에서 품정(稟定)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우상에게 하문하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두표가 대답하기를,
"피봉(皮封)이 잘못 붙여진 것은 사자(士子)의 죄가 아니니, 이 때문에 합격에서 제외시킨다면 당사자로서는 매우 원통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관한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인 만큼 지금 와서 추록(追錄)한다는 것은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냥 놔두도록 하라."
하였다.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형관(刑官)의 일에 대해, 대간이 ‘일단 나추(拿推)를 명하였고 보면 파직은 그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나추하는 일이 특명으로 나온 것인 이상 나추하는 명을 환수한 뒤에는 파직을 시켜서는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떻게 해야 옳을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아뢴 대로 하라.’고 한 것은 다른 조항을 가리킨 것이고 이 일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나추하라는 명은 원래 따로 분부한 것이었다."
하였다.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이익달(李益達)이 배를 침몰시킨 일에 대해 대론(臺論)이 준엄하게 발동되어 다시 죄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때 본도의 감사로 있으면서 해변에 사는 사람들의 말을 상세히 들었는데, 그 일은 실로 갑자기 풍랑이 일어난 데에 기인한 것으로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와서 추죄(追罪)한다면 억울한 일이 될 듯싶습니다."
하고, 김시진이 아뢰기를,
"당초 그를 죽였다면 모르지만, 지금 와서 추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그 날 헌관이 탑전에서 논계했는데, 서필원이 뭐라고 말을 하자 우상 원두표와 승지 김시진이 맞장구를 쳐주었으므로,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2월 26일 경오
허적(許積)을 예조 판서로, 조복양(趙復陽)을 참의로, 조계원(趙啓遠)을 형조 판서로, 민주면(閔周冕)을 장령으로 삼았다.
김좌명(金佐明)을 뛰어올려 공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좌명은 고 상(故相) 김육(金堉)의 아들로서 중전에게 백부가 된다. 재국(才局)이 있어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에서 정2품이 모자란다고 하여 발탁해서 임용하는 일이 있게 되자, 좌명이 아경(亞卿)에서 첫 번째로 정경(正卿)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뒤에 대간이 논계하며 외척을 문제삼자 결국 개정하였다.
2월 27일 신미
정언 박세당(朴世堂)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에서 인재를 가려 임용할 때에는 지극히 공정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육경(六卿)에 결원이 생겨 이열(貳列)031) 에서 선발하는 때에, 아래에서 추천한 것이나 위에서 제수한 것을 보면 왕실의 지친(至親)을 대상으로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정함을 먼저 보여 주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신임 판서 김좌명(金佐明)은 일찍부터 재망(才望)이 있었고 오래도록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니 품계(品階)만 걸맞는다면 이 직책에 제수한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아래에서 선발해 놓으라는 명에 대해 사람들 모두가 기대하며 조정의 행동을 지켜보면서도 그중에는 경솔하게 사태를 짐작하고는 미리서부터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까지도 나왔었는데, 제목(除目)이 일단 나오고 보니 대부분이 그런 이야기들과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원근에서 듣고는 어찌 ‘아래에서는 위의 뜻을 맞추는 방향으로 천거했고 위에서도 치우치게 사정(私情)을 두어 임명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대사성의 임무야말로 지극히 중요한 관련이 있는 만큼, 학식이 있고 통명하며 단아하고 정중한 인물이 아니면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은상(李殷相)은 문재(文才)는 있지만 선비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일을 거론하여 동료에게 통지하면서 재삼 왕복했으나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무기력한 탓으로 경시를 당했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사간 정계주(鄭繼胄)는 아뢰기를,
"김좌명은 재주나 명망이 평소에 드러난데다 대신이 의논해 천거했으니 논할 만한 일은 없을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척(貴戚)을 논한 그 풍채가 가상했기 때문에 신이 ‘표현을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다.’는 뜻으로 답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은상이 국자(國子)의 임무를 담당한 데 있어서는 그가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지나치게 논할 필요는 없겠기에, 또한 이런 뜻으로 답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경시당했다는 이유로 인혐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며 인피하고, 헌납 김만기(金萬基)는 아뢰기를,
"삼가 여러 승지의 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앞뒤의 계사가 이미 다르다.’고 분부하셨으므로 신은 실로 두렵기만 합니다. 전일 계사 가운데 ‘사관(四館)의 일차(日次), 회자(回刺), 면신(免新)’이라고 한 것은 특별히 심한 것만을 거론한 것이고 ‘통렬히 개혁하라.’고 결론을 지었으니, 신래(新來)들에게 모욕을 가하는 일도 그대로 금령(禁令) 속에 포함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차(日次)하는 것이 아니라고 핑계대고서 제멋대로 모욕을 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속물근성으로 인해 이렇듯 폐습으로 굳어지고 말았으니, 어떻게 폐단들을 바로잡아 서정(庶政)을 개혁하는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제 동료가 공조 판서 김좌명을 개정할 일과 대사성 이은상의 체직을 청하는 일로 간통(簡通)을 보내 왔는데, 신의 생각에는 ‘좌명은 개정하는 것이 마땅하나 은상은 체직시키도록 논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의논의 일치를 미처 보지 못했는데, 동료가 먼저 피혐했으니, 어떻게 태연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계주와 만기는 체직시키고 세당은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튿날 경연 석상에서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좌명의 판서직을 개정할 것과 은상을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모두 따랐다.
교리 이민서(李敏叙)를 영남에 파견하여 여제(厲祭)를 지내게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실록5권, 현종 3년 1662년 4월 (0) | 2025.12.09 |
|---|---|
| 현종실록5권, 현종 3년 1662년 3월 (0) | 2025.12.09 |
| 현종실록5권, 현종 3년 1662년 1월 (0) | 2025.12.09 |
|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12월 (1) | 2025.12.09 |
| 현종실록4권, 현종 2년 1661년 11월 (0) | 202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