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갑술
동지사(冬至使) 금림군 이개윤과 부사 유경창(柳慶昌), 서장관 오두인(吳斗寅) 등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집의 최유지(崔攸之)가 남원(南原)에 있으면서 어미의 병을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하고, 이어 남중(南中)에 기근이 매우 참혹하게 들었는데도 유사(有司)가 비용을 아껴 급진(給陳)032) 을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누누이 수백 언을 올려 진달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면서 올라오도록 유시하고, 또 이르기를,
"재상(災傷)을 복심(覆審)하는 일은 재차 거행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유지가 고향에 거주하면서 힘을 믿고 강제로 세금을 거둬들이며 제때에 실어보내지 않는가 하면, 심지어는 경작하는 전지(田地)를 몰래 숨기어 양안(量案)에 수록치 않음으로써 세금을 면할 계책을 하였으니,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저 시론(時論)에 빌붙어 외람스럽게 청반(淸班)에 끼이게 되었는데, 소 한 장을 올리며 마치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자처럼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비웃었다.
3월 3일 병자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삼가 최유지의 소를 보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재해를 입은 고을은 이미 급재(給災)를 허락했는데, 남원 부사(南原府使) 민광소(閔光熽)가 다시 다수의 전지를 급진(給陳)하려 했습니다. 이에 경차관(敬差官) 여증제(呂曾齊)가 허락해 주지 않았는데, 이는 대체로 사목(事目)을 준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지가 진달드린 것은 필시 이러한 따위의 일을 가리킨 것일 것입니다."
하고,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원래 국법(國法)에 양안(量案)을 작성한 뒤에는 급진을 허락치 않도록 한 이유는 대체로 백성이 농사에 힘쓰지 않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겼기 때문인데, 지금 사대부들은 대부분 대전(大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민광소(閔光熽)나 최유지가 또 어떻게 제대로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영상에게 이르기를,
"양영남(梁穎南)의 옥사(獄事)가 이미 8개월이 경과했는데도 아직껏 결말이 나지 않고 있다. 영남이 일단 서간을 위조했다고 승복(承服)한 뒤로 여러 차례 엄한 형신(刑訊)을 받으면서도 그 이야기를 바꾸지 않고 있으니, 이를 본다면 이일상(李一相)의 수서(手書)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영남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영남이 이미 승복했는데 또 형추(刑推)하는 것에 대해 물정(物情)이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 여러 차례 엄히 형신을 가했는데도 말을 바꾸지 않고 있으니, 위조한 죄를 적용하여 예전대로 정배(定配)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북도(北道)에 이배(移配)토록 하고, 사격(沙格)과 이동현(李東顯)은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선인(船人)들이 미곡을 빼내고 물을 뿌려 수량을 불리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는데, 올해는 미곡이 귀하니 이 폐단이 필시 심해질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물을 뿌린 사실이 드러난 자에 대해서는 강상(江上)에서 효시(梟示)하여 다른 사람들을 징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신이 소회(所懷)가 있는데 감히 진달드릴까 합니다. 지난번 김좌명(金佐明)의 상소 내용 가운데 ‘몸 가까이에 독충이 잠복해 있을까 혹 염려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무신(武臣)이 많이들 불안해 하고 있는데, 이완(李浣)이 사직하여 판윤에서 체직된 것도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민정중(閔鼎重)도 신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항(閭巷)에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나도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렇기야 하겠는가."
하고, 이어 상신(相臣)에게 하문하기를,
"경들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하자, 영상과 우상이 아뢰기를,
"신들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필시 거리에 나도는 뜬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문과(文科)·무과(武科)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인 허적(許積)·김응해(金應海)·남노성(南老星)·신유(申濡)·김수항(金壽恒)·박증휘(朴增輝)·민주면(閔周冕), 지평 정수(鄭脩)가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으니, 상이 하교하기를,
"나라에 과장(科場)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시관이 절반이나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다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추고하고 다시 패초(牌招)하라."
하였다. 허적·김수항·김응해가 재차 불러도 나오지 않으니, 모두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3월 4일 정축
호서(湖西) 대흥(大興) 등 10개 고을에 지진이 일어나 가옥이 흔들리고 벽에 바른 흙이 떨어져 나갔다. 향축(香祝)을 보내 도내 중앙에서 해괴제(解怪祭)를 거행하게 하였다.
3월 6일 기묘
부호군 이완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신이 병 때문에 물러난 것을 두고 김좌명(金佐明)이 상소한 내용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진달드렸다고 합니다. 미천한 신이 치료를 받으려 한 계책이 거꾸로 인혐해야 하는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이렇게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의 병상(病狀)에 대해서는 의관(醫官)의 서계(書啓)에 이미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삼가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필시 통촉하고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신이 질병을 무릅쓰고 반열에 나아가 여러 의논들을 해소시키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현재 추고를 받고 있는 중이라서 감히 태연히 출사하지 못한 채 며칠을 머뭇거리다가 이제야 아뢰게 되었습니다. 속히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부호군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며칠 전에 서필원(徐必遠)을 만나 시사(時事)를 이야기하던 도중에 우연히 이완의 사직과 관련해 말하기를 ‘만약 거리에 나도는 이야기와 같다면 장신(將臣)이 불안해 할 것이니, 정말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했더니, 필원이 그렇다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거리에 나도는 이야기이긴 하나, 탑전(榻前)에서 진달드려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주상께서 아시도록 하고 사태를 해소시켜 선처하시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나라를 위한 그대의 정성이 사람을 경복(敬服)케 한다. 그러나 다만 거리의 이야기를 듣건대, 처음에 비해 조금 수그러들고 있는데, 만약 다시 제기한다면 시끄럽게 될 듯하니, 경솔하게 위에 진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밤을 지나지 않아 필원이 과연 전하의 앞에서 그 일을 진달드리며 신의 이름을 거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나 필원이나 모두 시종(侍從)의 반열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로서 구구하나마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성은 단지 임금과 국가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필원의 경우는 사실(私室)에서 지나치게 염려하던 말을 탑전에 진달드린 것이 본래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 만큼 가볍게 발언한다 해도 안 될 것이 원래 없습니다마는, 신의 경우는 이름이 간관의 입에서 나와 문득 뜬소문을 증거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신이 망언(妄言)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부호군 김좌명(金佐明)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번에 상소하여 간략하게 수리하시라는 일을 진달드리면서 이어 몇 조목의 말을 상소 끝 부분에 언급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사랑하고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연곡지하(輦轂之下)033) 에 독충이 잠복해 있다.’고 하는 말은 곧 문천상(文天祥)034) 이 대책문(對策文)을 올리면서 양요(楊么)와 이주(李朱)를 가리키어 한 말인데, 그다지 까다롭거나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즈음 꽤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외간에서 상소에 나오는 말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어느 귀절의 이야기는 어떤 일을 가리키는데, 어느 귀절의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다 하기에, 신이 마음 속으로 괴이하게 여겼었는데, 그것을 확대 해석해서 장령(將領)의 신하에게까지 적용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서필원이 일단 그런 소문을 듣고는 사태가 비화되어 숙장(宿將)을 혹 불안하게 만들까 염려한 나머지 상의 앞에서 쾌히 풀어 주려고 생각한 그 의도는 좋습니다. 다만 멀리 거슬러 올라가 선신(先臣)이 양국(兩局)의 대장(大將)을 바꾸도록 청했던 말까지 거론하면서 잇따라 전하에게 진달드렸는데, 어쩌면 그토록 말을 조리있게 하면서 마치 뭐라고 운운(云云)하는 자의 말을 견강부회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하였단 말입니까. 신이 이미 천만 뜻밖의 일을 당한 상황에서 구구하게 진달드린다 해도 위로 전하의 오해를 풀고 아래로 의심을 해소시키기에는 원래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귀찮게 해 드렸습니다. 신의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말에 보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람들의 마음이 착하지 못한 탓으로 터무니없이 말을 지어내면서 구절을 발췌하여 누구를 지적해서 꺼낸 말이라느니 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간악한 소인배들이 늘 해 오는 작태이니,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3월 7일 경진
허적(許積)을 특별히 서용하여 병조 판서로 삼고,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여이재(呂爾載)를 판윤으로, 김좌명(金佐明)을 이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민정중(閔鼎重)을 승지로 삼았다. 허적이 일찍이 예조 판서로 임명되었을 때 김만기(金萬基)가 탄핵하려 하자 대사간 서필원이 극력 만류하였는데, 허적이 이 말을 듣고는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아 결국 파직되기에 이르렀다. 상이 이를 알았기 때문에 이윽고 거두어 서용할 것을 명해 특별히 서전(西銓)035) 에 제수하고, 홍중보를 대신 예조 판서로 삼은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종백(宗伯)036) 의 자리야말로 본디 인물을 엄선해야 마땅한데, 만기의 마음에는 참으로 ‘중보가 허적보다 훨씬 문조(文藻)나 재국(才局)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당론(黨論)이 사람의 마음을 이처럼 망가뜨리니 김좌명이 상의 앞에서 바로 배척할 만도 한 일이다. 그런데 상이 가부를 내려주지 않아 더욱 그의 기세가 등등하게 만들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연년(李延年)·임한백(任翰伯)·홍주삼(洪柱三)·김우형(金宇亨)·민점(閔點)·오시수(吳始壽) 등을 특별히 서용하였는데, 옥당에 결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3월 8일 신사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과장(科場)의 사체(事體)야말로 엄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혼조(昏朝) 때라 할지라도 해가 뜬 뒤에야 시관(試官)이 시소(試所)로 갔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듣건대, 사자(士子)들이 시소 문밖에 모여 있다가 시관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해산하려고 할 즈음에야 시관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기강이 이 모양이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승지가 제대로 직무를 수행했던들 반드시 재촉할 수 있었을 것이고 중관(中官)이 일을 이해했던들 또한 반드시 보고했을 것인데, 이번에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그들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날 입직(入直)한 승지와 승전색(承傳色) 내관(內官)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의관(醫官) 이후담(李後聃)이 지난번 북경(北京)에 갔을 때 들락날락하며 방자하게 굴었던 정상이야말로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만, 영솔(領率)한 사람에게도 어찌 책임이 없겠습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저쪽 지역의 사정상 뜻대로 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겠습니다만, 만기가 진달드린 말 자체는 옳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후담이 일선(一先)에게 청탁하여 선래(先來)037) 를 면하려고 꾀했다 하니, 이 점도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오두인(吳斗寅)에게 하문하였는데 두인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후담의 일은 정말 놀랍다."
하였다. 두인이 인피하기를,
"지난번 사행(使行)에 신이 행대(行臺)038) 였으면서도 제대로 일행을 단속 못해 옥당의 배척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태연스럽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두인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승지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이후담의 일에 대해 사신이 당초 아뢰어 죄를 청하지 않았으니, 또한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사신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번 들은 내용을 탑전(榻前)에서 진달드릴 때 스스로 낭패를 자초할 것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정성에서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 두 신하가 소장을 진달하자 그들에게 각각 온유한 비답을 내리시어 마음이 완전히 풀리게 해 주셨는데, 신이 본래 원했던 것도 그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다만 김좌명(金佐明)의 상소 내용 중에 ‘뭐라고 운운하는 자의 말을 견강부회시켰다.’고 하는 등의 얘기가 있었는데, 신이 진달드린 본래의 동기가 그 운운하는 말을 안타깝게 여긴 데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이치상으로 볼 때 견강부회하여 그 말을 증거해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을 듣게 되었으니,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필원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3월 10일 계미
새벽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이날 조참(朝參)을 행할 예정이었는데, 약방이 짙은 안개에 독기(毒氣)가 염려된다는 이유로 정지할 것을 청하면서 두 번에 걸쳐 아뢰자 이에 정지하였다.
황주(黃州) 남문 밖의 민가 1백 13 호(戶)가 화재로 연소되었는데, 본도 감사가 치계(馳啓)하여 보고하였다.
3월 14일 정해
간원이, 황헌(黃瀗)이 장오죄에 걸려 편배(編配)된 만큼 사면령으로 인하여 용서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논하며 누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헌이 통제사(統制使)로 있으면서 불법적으로 재물을 탐한 사실이 낭자하게 드러나 법률상 사형에 처해야 마땅했는데, 상이 특별히 상변(上變)한 공로를 생각하여 말감(末減)해 정배시켰다가 이때에 이르러 사면해 주었으니, 정말 소인(小人)의 행운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재차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보건대, 진휼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영남 고을 백성들이 바야흐로 극심한 춘궁기(春窮期)를 당하여 세금을 마련해 내기 어려우니 조곡을 받아 완납토록 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으로 치계하였는데, 진휼청에서 고식적인 일이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대체를 가지고 말한다면 진휼청의 조치가 옳겠습니다만, 목숨을 구하기에도 어려운 날에 세금을 징수한다는 것이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이남(二南) 백성 가운데 20여 석의 곡식을 바치고 또 다른 노비로 대신케 하면서 자신의 공천(公賤) 신분을 면했으면 하는 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마저도 방계(防啓)되고 말았다 하니, 그 이유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성명께서는 유의해 주소서."
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에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충성심을 가상하게 여겼다. 전에 올린 차자에 대해 등대(登對)할 때 의논해 정하려고 하였는데, 요즘 내가 병 때문에 인견하지 못한 탓으로 지연시키고 말았으니, 내가 무척 부끄럽게 생각한다. 앞뒤로 올린 차자는 모두 의논해 처리하도록 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상이 공사(公事) 대부분에 대해 제때에 결정을 내리지 않았는데, 혹 긴급한 경우에도 승지가 귀띔을 해 주어야 비답을 내리곤 하였다. 심지어는 대신이 올린 소장까지도 며칠씩 그냥 놔두었으므로 아랫사람들이 걱정하였다.
3월 15일 무자
증광 전시(增廣殿試)를 실시하여 문과(文科)에서 김석주(金錫胄) 등 40인과 무과(武科)에서 조충선(趙忠善) 등 56인을 뽑았다.
3월 16일 기축
간원이 아뢰기를,
"성조(聖朝)에 아무리 결함이 없다 하더라도 헌부의 관원들이 벌써 10여 일이 넘도록 하나의 논계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기만 하므로 물의가 비난하고 있으니, 외방에 있는 자 외에는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체차된 자는 장령 김만균(金萬均)·경최(慶㝡), 지평 송규렴(宋奎濂)·이동명(李東溟)이었다. 또 논하기를,
"기읍(圻邑)의 경우, 칙사(勅使)의 행차를 대접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교묘하게 명분을 붙여 역(役)을 면제받는가 하면, 전결(田結)의 수입을 사사로이 쓰면서 과람(過濫)하게 거두어들여 백성이 감당해내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원결(元結)을 감축시킨 결과 다른 곳에서 대신 치우치게 역(役)을 떠맡게 하고 있으니, 엄히 조사하여 혁파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17일 경인
묘시(卯時)에서 저녁때까지 사방이 마치 먼지가 떨어져 내려오듯 희뿌옇게 흐렸다.
3월 18일 신묘
해가 피(血)처럼 붉고 흙비가 내렸다.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부교리로, 이유상(李有相)·이휴징(李休徵)을 지평으로, 여증제(呂曾齊)·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임한백(任翰伯)을 수찬으로, 이무(李堥)를 정언으로, 이세화(李世華)·이혜(李嵆)를 주서로 삼았다.
유계(兪棨)와 조복양(趙復陽)이 가뭄 때문에 소장을 진달하여 직접 기우제를 거행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누차 사면령을 내리는 것이 소인(小人)에게 행운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듯 비상한 변고를 당해서는 격외(格外)로 대사면령을 내리는 일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10년 이전에 유망(流亡)하여 포흠(逋欠)된 조세(租稅)는 모조리 탕척해 주어 인심을 위로하고 감복케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대신이 시행하기를 청하고, 격외로 대사면령을 내리는 일은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인 만큼 등대(登對)할 때에 직접 뵙고 대답드리겠다고 청하니, 따랐다.
양남(兩南)의 임기가 만료된 수령들을 추수 때까지 기한을 정해 잉임(仍任)시키도록 하였는데, 이는 어사 남구만(南九萬)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3월 20일 계사
유심(柳淰)을 도승지로 삼았다.
비로소 기우제를 거행하면서 향축(香祝)을 제도(諸道)에 내려 보내어 모두 비를 빌도록 하였다.
장령 여증제(呂曾齊) 등이 아뢰기를,
"동지사(冬至使)가 돌아오면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렀을 때에, 서장관 오두인(吳斗寅)이 행동을 삼가지 않은 탓으로 청(淸)나라 사람들에게 붙들려 도로 관내(關內)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빠져 나오려고 주선할 즈음에 조명(朝命)을 욕되게 하였는데도 사신이 아뢰어 알리지 않았으니, 너무나도 놀라운 일입니다. 오두인은 파직시키고, 사신은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21일 갑오
대제학 이일상(李一相)이 면직되었다. 이일상이 교외(郊外)에서 대죄(待罪)해 온 지 이때로 7개월이 되었는데, 양영남(梁穎南)의 일이 일단 완결되자 비로소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재차 상소하자 이조에 내렸는데 윤강(尹絳)이 소원대로 체직을 허락해 주도록 청하니, 따른 것이다. 일상의 아버지는 이명한(李明漢)이고 할아버지는 이정귀(李廷龜)인데, 3세(世)에 걸쳐 문형(文衡)을 담당한 것은 일찍이 세상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일상은 일찍 등제(登第)했으면서도 술 마시기만을 좋아했을 뿐 문장에는 힘을 쏟지 않았으니, 문형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실로 사람들이 기대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전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시론(時論)에 빌붙어 아첨한 나머지 별안간 천망(薦望)하고 말았으므로 물정(物情)이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재직한 지 4년 만에 체직된 것이다. 감식안(鑑識眼)이 부족하여 사자(士子)들로부터 많은 조롱을 받았는데, 유후의 그런 행동이야말로 나라를 망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의자(議者)들 모두가 비난하였다.
3월 23일 병신
하교하여 구언(求言)하고, 대신을 불러 심리(審理)039) 하는 일을 의논케 하였다. 이때 한재(旱災)가 더욱 심하게 들었는데, 상의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아 신하들이 오래도록 상을 만날 수 없었다. 이에 교리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여 청하기를,
"오늘 급히 대신·육경(六卿)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불러 특별히 면대(面對)를 허락하시고, 재해를 소멸시켜 비가 오게 하는 방책을 강구하소서."
하였는데, 차자를 들이자 상이 즉시 신하들을 부르도록 명하고, 이어 자책(自責)하는 하교를 내리면서 심지어는 ‘차라리 죽어버려 이런 말을 안 들었으면 한다.’는 말까지 하였으므로 듣는 이들 모두가 놀라워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상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음식을 줄이고 술을 금하도록 하는 한편, 승지에게 명해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는 내용으로 교서(敎書)를 초(草)하게 하고, 대신 이하를 인견하여 재해를 해소시키는 방책을 물으니 모두들 원옥(冤獄)을 심리(審理)할 것을 청하였다. 판중추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지난해 이산(尼山)의 적당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이 시골의 우매한 백성들로서 남의 꾐에 빠져 그렇게 된 것인데, 연좌된 일가붙이들이 아직도 유배 중에 있으니, 이 역시 어찌 감응하여 화기를 상하게 하는 이치가 없다 하겠습니까. 용서해 주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는데, 모두들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나무랄 것도 정말 없다고 아뢰었으나, 승지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역옥(逆獄)을 다스리는 것은 사체가 지엄한 만큼 특명이 있지 않는 한 감히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단 일가붙이를 사면할 경우, 정범(正犯)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앞으로 모두 신설(伸雪)해 주어야 하는가?"
하니, 이에 대신들이 모두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는데, 상이 정태화(鄭太和) 등에게 명하기를,
"여러 신하들과 빈청(賓廳)에서 회의하되, 도류(徒流) 중인 사람들에 대해서만 죄목을 초서(抄書)하여 등대(登對)할 때 관대한 쪽으로 처결토록 하라."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화기를 불러오는 방법을 차례로 하문하였다. 교리 오시수(吳始壽)가 아뢰기를,
"신이 합문(閤門)에 이르러 삼가 구언(求言)하시는 분부를 보았는데, 급기야 전석(前席)에 올라 직접 옥음(玉音)을 받들고 보니, 측은하게 여기는 간절한 뜻이 언외(言外)에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마음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해나가신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외간에서 말하기를 ‘이 궁(宮)은 원정(苑亭)과 대소(臺沼) 등의 경치가 상당히 좋으므로 정사를 보시고 난 여가에 점점 오락에 빠지게 되실까 걱정이다.’고 하는데, 이 점을 가슴에 새기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교리의 말이 옳다."
하였다. 또 기우제를 친히 지내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접 기도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다리의 병 때문에 걸음도 제대로 못걷는 형편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유계(兪棨) 등도 상소하며 이런 뜻을 언급했었지만 그 뜻에 부응하지를 못하였다."
하였다. 정유성이 아뢰기를,
"듣건대 진휼 어사 이숙(李䎘)이 공주(公州)에 이르러 주전(廚傳)040) 이 박하다는 이유로 하리(下吏)에게 형신(刑訊)을 가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조정에서 위임해 보낸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크게 놀라며 이르기를,
"이 일이야말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대신이 말하는 형식으로 속히 사문(査問)토록 하라."
하였다. 장령 이지무(李枝茂)가 청하기를,
"그가 조정에 돌아오기를 기다려 나문(拿問)해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일을 끝마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먼저 나문하는 일을 의논할 수 있는가. 이런 이야기가 전파될 경우, 필시 사명(使命)을 받든 자가 일을 그만둘 걱정이 생길 것이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대체로 가슴 속의 생각을 진달드리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 실제로 논계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는데, 이지무가 갑자기 아뢰기를,
"가슴 속의 생각을 진달드린 것뿐이었습니다."
하고,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이숙의 이런 행동은 사람의 마음이 없었던 짓이라 하겠다. 정유성이 이 말을 현감 최문식(崔文湜)에게서 들었는데, 문식은 이숙의 패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숙의 동료들이 그에게 모함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이에 말하기를 ‘이숙은 검약(儉約)하려는 뜻이었는데 반찬이 너무도 풍성했기 때문에 형신을 가한 것이다.’고 하며 서로들 잘못을 덮어 주었으므로 마침내 죄를 면하였다.
제도(諸道)에 전염병이 크게 돌자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여제(厲祭)를 거행하게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호남에서의 사망자가 더욱 많아 무려 1천 3백여 인이나 되었다.
3월 26일 기해
홍전(洪瑑)을 좌윤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우윤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승지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윤변(尹抃)을 지평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삼았다.
장령 여증제(呂曾齊)가 아뢰기를,
"통영(統營)에서 난리 후에 군인을 모아 전지(田地)를 경작하면서 그들을 둔전군(屯田軍)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난리가 지난 지 이미 오래되어 전지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는데도 그 군인들을 그대로 남겨두어 갖은 방법으로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너무나 무리한 일입니다. 일체 혁파하여 편오(編伍)에 옮겨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 보고하게 하였다.
병조가 아뢰어 영남좌도의 군안(軍案)을 개정하자고 청하였는데, 오래도록 바로잡지 않아 난잡함이 더욱 심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27일 경자
진휼청이 강도(江都)에 이전(移轉)할 미곡 6천 석을 덜어내어 기민(圻民)에게 조곡으로 나누어 주기를 청하니, 따랐다.
장령 여증제(呂曾齊), 지평 이유상(李有相) 등이 유지(諭旨)에 응하여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즉위하신 3년 동안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리신 것이 벌써 세 차례나 됩니다. 그런데 초년(初年)에 무슨 말을 채용해서 어떤 폐단을 개혁했는지 듣지 못하였고 2년째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금년에 이르러서 아무리 가엾게 여겨 슬퍼하는 분부를 내리셔도 보는 이들 대부분이 불신하는 마음을 품고 좋은 말씀을 즐겨 고해 드리려 하지 않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구언하신 것이 곧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전후에 걸쳐 신하들이 이미 상소한 내용 가운데에서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뽑아낸 뒤 뒤늦게나마 그것을 채용해 시행해 보소서. 그러면 또한 충분히 천리 밖에서 간언(諫言)이 나아오도록 하여 새로운 말을 전하께서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침잠(沈潛)하신 면은 넉넉히 가지고 계시지만 고명(高明)한 점은 부족하십니다. 따라서 실수하시는 것이 비록 유(柔)한 면에 있고 강(剛)한 면에는 있지 않다 하더라도, 잘못된 데 따라 그 부족한 점을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진달한 소장을 모두 묘당(廟堂)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나 거의 모두가 폐기된 채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증제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이었다.
3월 28일 신축
남천한(南天漢)을 지평으로, 이혜(李嵆)를 봉교로, 이동현(李東顯)을 부호군으로 삼았다. 동현이 석방되자마자 이완이 즉시 천총(千摠)에 임명하여 군직(軍職)에 부친 것이다.
심리(審理)할 문서를 빈청(賓廳)에서 정리해 놓고 기다린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상의 건강이 좋지 못해 등대(登對)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이경석(李景奭)·정태화(鄭太和)·정유성(鄭維城) 및 금부·형조의 당상들과 평의(平議)하여 너그럽게 처결하였는데, 3일만에 끝났다. 그런데 이에 앞서 누차 사면해 주었으므로 경범 죄수들은 모두 풀려났고, 단지 보통 사면 때는 논의의 대상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중죄인들만 남아 있었다. 이때 충군(充軍)이하 도년(徒年)에 이르는 죄수가 모두 8백 35인이었는데, 1백 3인을 석방하고 21인을 감등(減等)시켰다. 범역(犯逆)·살인 및 풍속에 관계된 죄수들은 모두 대상에서 제외하였는데, 금부와 형조에 갇혀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모두 경중에 따라 법대로 처결하였다.
윤선도(尹善道)의 배소(配所)에 위리(圍籬)041) 한 것을 철거토록 하였다. 조경(趙絅)이 죄를 받은 뒤로는 이에 대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빈청(賓廳)에서 회의할 때 이경석이 윤선도의 나이가 많아 가죄(加罪)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관대하게 해 주고 싶다고 의논하자 정태화가 마음 속으로 동의하였다. 등대(登對)하여 평의(平議)할 때 상이 이에 대해 하문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선도가 이미 연로하여 장차 죽게 되었는데 위리해 놓았으니 옥에 가두어 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본죄(本罪)가 가벼이 의논할 수 없는 것이긴 하나 위리한 것을 철거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는데, 모든 의논이 다 그러하였으므로, 마침내 철거하도록 명한 것이다.
패선(敗船)042) 의 사격(沙格)043) 을 사면해 주고 그로 인한 포흠(逋欠)을 면제해 주었다.
처음에 삼남(三南)에서 세곡선(稅穀船)에 미곡을 실어 보낸 뒤에, 사격들이 중간에서 절취(竊取)하고는 배가 난파되었다고 핑계대는 경우가 흔하였다. 이에 해조가 그때마다 그들의 처자와 족속(族屬)을 가두어 놓고 그 미곡을 도로 징수하려 하였으나 대부분 상환하지 못하였으므로 늘 그 사건으로 갇혀 있는 자들 때문에 옥(獄)이 만원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간혹 실제로 배가 난파되었는데도 뒤섞여 들어가 있는 자도 있었는데, 그들도 똑같이 징치(徵治)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모두 탕척(蕩滌)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리하여 정배(定配)된 15인과 당시 갇혀 있던 1백 64인을 모두 용서하였으며, 징수 대상이었던 쌀과 콩 5천 7백 60석도 모두 면제를 허락하였다.
사간 정계주(鄭繼胄)가 부름에 응하지 않자 헌부가 탄핵하여 체직시켰다. 계주는 용렬하고 둔한데다 무능했는데 조석윤(趙錫胤)이 입김을 불어준 덕택으로 마침내 청반(淸班)에 끼이게 되었으므로 그의 처지에 걸맞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모두들 비웃었다. 이행일(李行逸)이 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는 계주가 그를 찾아가 위로해 주고 이어 행일이 말을 바꾼 죄를 증거하여 합리화시켜 줌으로써 홍명하(洪命夏)에게 아첨을 떨기도 하였는데, 행일은 결국 멀리 유배를 당하기에 이르렀었다. 상이 한재(旱災) 때문에 대신을 인견하였을 때 계주도 사간으로 입시했었다. 상이 재해 해소책을 여러 신하에게 차례로 묻자, 계주는 좌우를 쳐다보기만 하고 대답을 못하였다. 정유성(鄭維城)이 이산(尼山)의 적당을 용서해 주자고 청하였는데 제신(諸臣)이 어렵다고 하자 그 역시 덩달아 용서하기 어렵다는 뜻을 말하였으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제신이 모두 비웃었으며 상도 빙그레 웃었다. 이에 계주가 황공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물러가서는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3월 29일 임인
교리 오시수(吳始壽), 수찬 이민서(李敏叙) 등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말들이 매우 적절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형옥(刑獄)의 문란, 둘째 양역(良役)의 고달픔, 셋째 공사(公私)간의 이익 독점, 넷째 기강의 해이에 관한 것이었는데, 심지어는 원제(元帝)044) 의 우유부단함으로 말미암아 한(漢)나라 기업(基業)이 쇠퇴해진 사례를 들어 경계하기까지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근실하고 간절한 충성심이 언외(言外)에 흘러 넘치니, 써서 몸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대신과 함께 조목마다 논란을 벌였는데, 대부분 저지당했으나 오직 형관(刑官)을 구임(久任)시키는 것과 경관(京官)을 파견해 서옥(庶獄)을 순시하게 하는 것과 각 아문에서 무역해 이익을 증식하는 일을 금단하는 등의 일만은 차자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양역(良役)을 균일하게 하는 한 조목을 재차 상차하여 아뢰니, 대신이 호패법(號牌法)의 시행을 의논하다가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마침내 정지하였다.
3월 30일 계묘
각사(各司)에서 날수를 정해 개좌(開坐)하는 법을 다시 밝혔다. 효종조(孝宗朝) 때 일찍이 ‘각사가 태만하여 개좌하지 않는 날이 많다.’는 이유로 날수를 정한 뒤 월말에 녹계(錄啓)토록 했었다. 그런데 금년 3월에 녹계한 것 가운데 수향(受香)045) 하고 재계(齋戒)하는 등의 일 때문에 개좌하지 않은 날이 반을 넘었으므로 상이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일을 보는 날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좌하도록 하고, 수향하고 향사(享祀)하는 정일(正日) 및 재계를 파하는 날은 회삭(晦朔) 때의 예처럼 하되 형(刑)만은 가하지 말도록 하였다.
예조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여조(麗朝)의 능(陵)들을 순심(巡審)케 하고 초목(樵牧)의 출입을 금지시켰는데, 승지 민정중(閔鼎重)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호남 용담현(龍潭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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